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95화 (9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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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4. 세력 확장 (4)

    ***

    “아쭈? 지금 개기는 거지?”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일 없습니다.”

    정천우가 눈을 부라리자 샤칼과 헤이먼이 정색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피와 살이 튀는 교육 이후, 두 사람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교육 이후에도 한 번의 교육을 더 받긴 했다.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고 야밤에 도주하려다가 정천우에게 딱 걸린 것이다.

    사실 발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짐을 싸 놓고 도망치려던 모습 그대로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했으니까 말이다.

    ‘맹약’에 묶인 두 사람이었다. 맹약을 포기할 생각으로 도망치려는 순간, 고통이 두 사람의 발을 묶은 것이다.

    정천우는 싸 놓은 짐을 발견하고서는 조용히 검집을 들고 문을 잠갔을 뿐이다.

    교육의 성과는 확실했다. 이제 두 사람은 정천우한테 깍듯하게 존칭을 사용했다. 아직도 반항의 눈빛은 남아 있지만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천우가 지금 그들을 갈구는 이유는 간단했다. 식사 좀 받아 오랬더니 보기 더러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둘 다 빈손이지?”

    “귀병신이…….”

    “반 토막이…….”

    정천우의 물음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상대의 별명을 말했다. 그러고는 서로 상대를 노려보며 ‘무슨 개소리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 식사를 받아오기 싫어서 둘 다 떠넘겼다는 거냐? 그래 놓고 니들은 꾸역꾸역 다 처먹고 오고? 이거 진짜 개새끼들이네?”

    “가! 갑니다! 지금 당장 받아 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귀병신, 꺼져! 내가! 내가 갈 거야! 반드시 내가 받아 온다!”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아 옆에 내려놓는 모습을 발견한 두 사람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투덕대며 뛰어갔다.

    “새끼들이, 꼭 매를 들어야 정신을 차려.”

    정천우는 뽑았던 역천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회의에 참석하느라 식사 좀 받아 놓으랬더니 두 놈이 다 저 모양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하북팽가는 무당파의 포로들을 회유하는 데 성공하고서 병력을 이끌고 무당파를 향해 진격 중이다.

    “그나저나 수수 경의 말처럼 쉽게 해결될지는 모르겠군. 겨우 말 몇 마디로 넘어올 놈들이 아닌데 말이야.”

    정천우는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성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동대륙 사람과 달리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정천우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가 보는 것은 반나절 거리의 무당파 영지다. 그가 있는 곳이 성채보다 훨씬 더 지대가 높아 상대적으로 성채가 작아 보였다.

    “그녀의 말처럼 쉽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정천우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팽수수의 계책은 잘 들어맞았다. 무당파의 포로를 하북팽가에 흡수할 계책을 짜낸 것도 그녀다.

    무당파의 기사…… 아니, 이제는 하북팽가의 기사가 된 장학기를 앞세워 무당파의 영지에 무혈입성하겠다는 게 그녀의 뜻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무당파의 영지가 너무 크다. 게다가 방어 태세는 천혜의 요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절벽 사이를 성벽으로 막았다. 하북팽가의 공격을 두려워해서 지은 것이라고 했다. 저곳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무당파를 접수하기는커녕 맥없이 되돌아가야 할 판이다.

    “뭐, 내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

    정천우는 멀리서 허겁지겁 뛰어오는 샤칼과 헤이먼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출진을 서두른 하북팽가의 병력은 점심때가 되기도 전에 성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성벽이로군그래.”

    팽선웅 백작은 혀를 내두르며 10미터 높이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하북팽가를 비난하고 도발을 일삼던 무당파는 그에 비례하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무당파로 가는 길목을 엄청난 높이로 가로막고 있었다.

    팽선웅 백작으로서는 성벽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었다.

    예전에 하북팽가에서 무당파를 치러 갔던 적이 있다고 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참전하지 못했다. 영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영지를 돌보기에 바빠 무당파를 도모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성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 그대의 차례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비록 주군을 바꾸었지만 약속을 어길 만큼 신의가 없지 않습니다.”

    장학기는 팽선웅 백작에게 군례를 올리고는 할베르트의 창날에 백색 천을 달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몰아 성벽에 다가갔다.

    성벽 위는 초긴장 상태였다. 얼핏 헤아려도 만 명은 거뜬해 보이는 하북팽가의 대병력이 몰려왔으니 긴장하는 것도 당연하다.

    무당파의 병사들은 흉벽에 의지해 크로스보우를 겨누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했다가는 고슴도치가 될 게 분명했다.

    장학기는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백색의 깃발을 더욱 높이 들고 다가갔다. 성벽 위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멈춰 선 장학기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스톰 기사단 소속의 장학기다! 지금 ‘통곡의 벽’을 책임지는 자가 누구인가!”

    장학기가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통곡의 벽은 하북팽가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건설한 성벽이다. 즉, 눈앞의 성벽을 말하는 것이다.

    잠시 후 흉벽 사이로 전신을 금속 갑옷으로 차려입은 기사가 몸을 드러냈다.

    “스톰 기사단의 사람이 어찌 하북팽가의 병사들과 함께 온 것이오!”

    “하북팽가와 벌인 영지전에서 무당파는 패했소!”

    “뭣이? 그게 사실이오? 그럼 그대는 하북팽가의 편에 선 것이오?”

    “그렇소!”

    장학기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성벽 위가 술렁였다. 자랑스러운 무당파의 기사가 하북팽가에 투항하고서도 저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는 게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배신자! 그대는 부끄러움도 모르오?”

    “마교에서 보내 준 기사단이 전멸하고, 영주님이 전사하셨소!”

    “헉! 지금 그게 무슨 헛소리요! 마교의 기사라니! 지금 그대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성벽 위에서 대답하던 자의 목소리가 크게 흔들렸다. 부정하고는 있지만 어설픈 연기 때문에 오히려 성벽 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혹만 심어 주고 말았다.

    “이미 하북팽가의 영주인 팽선웅 백작께서는 우리와 함께 출정했던 기사단이 마교의 기사들이라는 증거를 확보하셨소! 만약 여기서 하북팽가의 군대가 회군한다면 우리는 끝장이오!”

    “다, 당치도 않소! 그런 협박 따위 정도로 우리가 순순히 성문을 열 거라 생각하오?”

    “협박이 아니오! 그대도 기사라면 알 것이오! 마교의 흑룡 기사단과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기사단에 주의 주었지 않소! 만약 성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팽선웅 백작께서는 곧장 돌아가 마교와 무당파가 손잡은 사실을 무림맹에 알리고 영지전을 종결한다고 선언한다 하셨소!”

    “끄응…….”

    성벽 위에서 대답하던 기사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장학기가 대놓고 마교 운운하는 통에 당황했다. 마교와 내통한다는 것은 동대륙에선 해서 안 되는 일이다. 동대륙의 공통된 적이니까.

    강하게 부정했어야 하는데, 상대가 무당파의 기사 출신이라 속사정을 빤히 알고 있었다.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문제는 장학기가 하는 말이 충격적이라는 것에 있었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곱게 돌아가겠단다. 그리고서 마교와 결탁한 사실을 무림맹에 고하고 영지전이 종료되었다고 선포한다 한다.

    그렇다는 것은 무당파를 동대륙 전체의 적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제기랄! 나더러 대체 어쩌라는 거요! 나는 영주님으로부터 ‘통곡의 벽’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단 밀이오!”

    “영주님은 전사하셨다고 아까도 말했잖소! 스톰 기사단의 유일한 생존자인 내가 현재 최고명령권자요.”

    “흥! 어림없는 소리! 그대는 하북팽가로 돌아섰다고 했지 않소이까!”

    “후우……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오!”

    성문을 열어 줄 듯 말 듯 대답하는 상대에게 장학기가 크게 소리쳐 물었다.

    “나는 리차드 장이오!”

    “리차드 경, 나는 무당에서 이름까지 받은 정식기사요.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아시오?”

    “그, 그건…….”

    리차드 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벽력대제가 살던 세상이라는 중원식의 이름을 받는다는 건 영주의 작위를 승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사단이 전멸하고 장씨 성의 이름을 하사받은 사람은 오직 장학기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장학기가 현재 무당파의 영주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는 의미다. 물론 말뿐인 승계 조항이라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말이다.

    성벽 위에서 리차드 장이 고민하는 모습에 장학기가 다시 마나를 모아 소리쳤다.

    “내 목숨은 무당의 것이오! 나는 무당을 배신하지 않소! 팽선웅 백작께서는 지금 동맹을 맺자는 이야기요.”

    “믿을 수 없소!”

    “팽선웅 백작께서는 하북팽가와 우리 무당파의 방위력이 안정되면 독립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소!”

    “하지만 그런 약속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오!”

    리차드 장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원 병력이 오기까지 아직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배신한 장학기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더 갈등이 생겼다.

    차라리 장학기의 말처럼 성문을 열어 주고 하북팽가의 뜻에 무당파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은 ‘통곡의 벽’을 사수하라는 거였다. 일개 수문장에 불과한 자신이 영지의 운명이 걸린 결정을 함부로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대는 더 이상 매끄러운 혓바닥으로 날 현혹하지 말고…… 으응?”

    리차드 장은 최후의 통첩을 전하러 입을 열었다가 눈매를 좁혔다.

    하북팽가의 진형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데, 전투마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바보로군.”

    리차드 장은 코웃음을 쳤다.

    성벽에 거의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는 상대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이다.

    “저, 저! 쏴! 쏴라!”

    리차드 장은 기겁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달려오던 하북팽가의 사람이 성벽을 밟고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평지를 달리듯 엄청난 속도였다.

    리차드 장이 당황해서 병사들에게 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병사들은 대체 어디를 쏘라는지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하북팽가의 병력을 살피기에 바빴으니까 말이다. 하북팽가의 진영에서 홀로 튀어나온 인물을 말하는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병사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리차드 장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성벽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리차드 장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껌벅이며 입을 쩍 벌렸다. 병사들 역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내는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침을 한 번 찍 뱉고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새끼가, 진짜 말 더럽게 많네!”

    성벽 위에 난입한 사람의 정체는 바로 정천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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