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89화 (8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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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23. 풍요 속의 빈곤 (2)

    ‘빌어먹을! 단장님은 벌써 당한 것인가!’

    장맹천은 비통한 얼굴로 뒤쪽을 흘끔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추격자가 몇이나 되는지 알 순 없다. 확실한 것은 많은 숫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다.

    이번 전투는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많은 기사를 잃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러나 영주만 무사하다면 재기할 수 있다.

    주변 영지에 도움을 요청하고 병사를 모집해 다시 한 번 하북팽가를 도모할 수 있다. 그래서 악착같이 영주를 무당파의 영지로 데려가려는 것이다.

    문제는……

    “커윽! 으윽! 웨엑! 우욱…….”

    말 위에 올라탄 장천근이 구역질까지 해 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망할! 그러게 쓸데없이 쫓아와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고 난리야!’

    장맹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하북팽가의 몰락을 보겠답시고 직접 출정한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했다.

    툭하면 쉬었다가 가자고 엄살을 부려 대는 바람에 진군 속도가 한없이 늘어졌었다. 진군할 때도 사람 피곤하게 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운동과는 담쌓은 인물이라 도주할 때도 비대한 몸뚱이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돌겠군!”

    장맹천은 답답한 상황에 욕설을 내뱉었다.

    겨우 저 정도 위인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바친 장맹기 사령관과 기사단원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런 상태라면 도주하는 것보다 추격자와 싸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에게 박차를 가하면서 장맹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열이 묻어났다.

    추격자는 고작 4명.

    작은 점처럼 보인다. 대략 20분 정도면 따라잡힐 것 같았다. 20분 안에 무당파의 영지에 도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소리.

    특히 저 돼지 같은 영주를 무사히 데리고 단시간에 간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될 개소리다.

    “멈춰라! 멈춰라!”

    장맹천은 앞서 달리는 기사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영주를 데리고 도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죽자 사자 말을 재촉하던 기사들은 장맹천의 명령을 듣고는 겨우겨우 말을 세웠다.

    말을 세운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의혹이 스며 있었다. 어째서 멈추라고 했느냐는 눈빛이었다.

    “추격자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차라리 휴식을 취했다가 지친 적을 처리하고 간다!”

    장맹천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말에서 내렸다.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서 말에게도 휴식을 주는 한편 자신도 쉬기 위해서였다.

    지휘관의 명령을 그제야 이해한 나머지 9명의 기사들도 차라리 잘 됐다는 얼굴로 말에서 내렸다. 그들 역시 장천근의 꽥꽥대는 소리에 지쳐 가던 중이었다. 장맹천의 말을 듣고서야 쫓긴다는 심적인 부담감을 털어 낼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은 멀리서 먼지구름을 만들며 달려오는 추적자들을 향해 은은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최대한 쉬었다가 적이 다가오면 공격할 준비를 한다. 알겠나!”

    “예!”

    9명의 기사들은 약식 군례를 올리고는 바닥에 앉아 쉬었다. 그들은 무당파의 기본 무장인 할베르트를 꺼내 닦는가 하면 육포를 꺼내 허기를 달랬다.

    ‘빌어먹을! 사령관님이 있었다면 이렇게 부담스럽진 않았을 것인데.’

    장맹천은 낑낑거리며 말에서 내려오는 장천근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영지를 잘 다스린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짐에 불과하다.

    애초에 따라나서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장맹천 역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추격자와 있을 싸움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체력을 더 회복해야 한다. 지친 추격자들을 해치운다면 2차 추격자들과 거리를 벌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지금이야 정직하게 길을 따라 도주하고 있지만 저들을 해치운 뒤에는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뿌드득!

    장맹천이 턱에 힘을 주었다.

    형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장맹기의 죽음이 확실시되는 지금.

    영지로 돌아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장맹기의 복수를 하겠노라고 그는 맹세했다.

    마법 전력을 이끌고 오지 않은 게 실수다. 하북팽가의 마법 전력이 미약하다는 의견 때문에 구태여 끌고 오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무당파의 마법사들이 너무 까칠하다는 게 문제다. 늙어 빠진 놈들이라 그런지 이리저리 재는 게 많다. 게다가 자부심까지 높다.

    전투에 방해만 될 것 같아 기사단에서 그들을 배제했다. 장천근은 그들이 없어도 충분하다고 판단해 마법사를 배제하는 걸 승인했다.

    하찮은 자존심 때문에 장맹기를 잃었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차라리 조금 굽히더라도 마법사들을 설득해 데려왔어야만 했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이번에 돌아가게 된다면 무릎을 꿇고 애원이라도 하겠다. 빌어먹을 하북팽가 놈들…….”

    장맹천의 눈에 활활 타오를 듯한 복수심이 깃들었다.

    하북팽가는 이제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동대륙에서 지워 버리고 말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던 장맹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전에 네놈들에게 먼저 처절한 절망을 맛보게 해 주겠어!’

    추격자들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쉬면 좋겠지만 이제는 싸움을 준비할 때였다.

    “모두 준비하라! 장비를 점검하고 적과 싸울…… 으음…….”

    추격자를 주시하면서 부하를 독려하던 장맹천은 앓는 소리를 냈다.

    ***

    “어째서 멈추시는 겁니까?”

    “쉰다!”

    정천우는 의아해하는 하스론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말에서 내렸다.

    “적이 코앞에 있습니다.”

    “알아! 그래서 쉬자는 거다. 놈들은 충분히 쉬면서 우릴 기다리고 있어. 우린 지쳤다. 체력을 회복해 두지 않으면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놈들이 도망치면 어떻게 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쫓아가면 되지.”

    “…….”

    “겨우 여기까지밖에 도망치지 못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일단 쉬어 둬. 놈들이 도망치려고 하면 쫓아가고, 덤비려고 하면 싸운다. 아쉬운 건 저놈들이지 우리가 아니야. 그때까진 푹 쉬어 둬!”

    “……알겠습니다.”

    뭔가 찜찜한 느낌이었지만 하스론은 이내 수긍하고 말에서 내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전투 직후에 곧바로 추격하느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상관이 쉬라는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킥…… 자식들, 골 때릴 거다.”

    정천우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자신들이 곧바로 들이닥칠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을 게 뻔하다. 그래서 일부러 3명만 데려왔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적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놈들의 수가 11명이라는 건 전투 중에 확인했다. 고만고만한 놈들이라 정천우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숫자다.

    하지만 그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스론 일행과 함께라면 어렵지 않게 적들을 쫓아 제거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서 지목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닥을 치는 내공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추격하면서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해 보충하긴 했지만 앉아서 정식으로 내공을 운용하는 게 훨씬 더 효율이 높다.

    놈들이 도망치지 않고 싸울 생각을 해 줘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살기 어린 비웃음을 담았던 정천우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러고는 전력으로 혼원벽력심공을 운용해 대기 중에 녹아 있는 대자연의 기운을 호흡과 함께 빨아들였다.

    “오오오…….”

    “과연!”

    “마나가 흘러들어 가는 게 느껴져!”

    하스론을 비롯한 3명은 정천우의 주변에 몰려드는 마나의 흐름을 깨닫고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마법사가 아닌 존재가 이런 식으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자, 자! 우리도 쉬자고. 몸이 아주 뭉개지는 느낌이라니까?”

    “하스론,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단장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니까 명령하셨겠지.”

    “슈라! 그건 하스론 말이 맞아! 단장님께서 우리한테 쉬라고 했으면 쉬는 거야. 사실 우리가 지친 건 맞잖아. 이 상태로 싸웠다간 목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위험해.”

    정천우를 따라온 3명의 기사들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명령에 따라 바닥에 주저앉아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눈은 무당파의 기사들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말 위에 올라가 싸워야 했으니까 말이다.

    ***

    “놈들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영주인 장천근의 호위기사인 에디앙이 눈에 살기를 드러냈다. 당장에라도 말을 몰고 달려가 한바탕 싸우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모르겠군. 2차 추격조를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야…… 그렇다고 보기엔 석연치가 않아…….”

    장맹천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으면서 겁 없이 자신들을 추격한 4명의 하북팽가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불과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멈췄다.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았더니,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럴 거면 대체 왜 그토록 악착같이 추적해 온 것이지?”

    장맹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사방이 탁 트인 야트막한 산과 평야로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저들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방향을 바꾼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저들이 남아서 후발 추격대에 알리면 그만일 테니까 말이다.

    “설마…… 싸우겠다는 뜻인가?”

    장맹천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멀어서 상대의 표정까지 자세히 살필 순 없지만 저들의 행동은 너무나 태연하다. 후발 추적대에 알리기 위한 조치도 전혀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쉬고 있을 뿐이다.

    무작정 도망치는 것보다 힘을 비축하고 싸우는 쪽을 택했다. 적의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적었기에 가능한 결정이다.

    그러나 저놈들은 뭐란 말인가!

    자신들과 싸우겠다는 게 아니라면 저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장맹천을 더욱 헛갈리게 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우리를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맹천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쫓는 추격자 4명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지만,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

    자신 역시 추격자가 겨우 4명인 것을 깨닫고 안도부터 하지 않았던가!

    “그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놈들의 생각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에디앙이 장맹천의 곁으로 다가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장맹천의 혼잣말이 지나친 억측이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들은 기사 전력만 10명이다.

    더욱이 스톰 기사단장인 장맹기와 거의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는 장맹천까지 함께 있다. 호위 기사들의 실력 또한 스톰 기사단에 준하는 능력을 지닌 정예들로 구성되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누가 봐도 자신들의 승리다. 그런데 추적자들은 태평하게 앉아 있다.

    에디앙이 생각했을 때, 저들은 겁이 없거나 혹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나도 자네의 생각에 동의하네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서 그러네.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저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이유가 없어.”

    “큭!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나 봅니다.”

    “하하하! 그런 말도 안 될 얘……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에디앙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면서 고개를 내젓던 장맹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놈들이 일어섰다!

    단순히 일어선 것만이 아니다. 서둘러 말에 오르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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