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88화 (88/200)
  • # 88

    Chapter 23. 풍요 속의 빈곤 (1)

    “놈들이 나온다!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정천우가 고함을 질렀다.

    측면을 타격할 생각으로 돌파를 준비했으나 상황이 바뀌었다. 안쪽에 숨어 있던 무당파의 기사단 하나가 요격에 나선 것이다.

    “적의 숫자는 우리의 절반에 불과하다! 함성을 질러라!”

    곁에서 말을 몰던 팽만리가 능숙하게 명령을 덧붙였다. 잔뜩 긴장했던 썬더 기사단과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놈은 내가 맡겠습니다!”

    정천우는 붉은 깃털로 장식된 투구를 쓴 장맹기를 창으로 가리켰다.

    붉은 깃털로 장식된 투구는 총사령관을 의미한다. 명령 체계를 목적으로 아군의 눈에 띄기 위해 투구에 장식된 깃털이다.

    문제는 적군에게도 눈에 띄기 쉽다는 점이다. 표적이 되기 쉬운 만큼 실력도 대단할 수밖에 없다.

    팽만리가 팽우룡을 보호하면서 강적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정천우가 나서야만 했다.

    “하아!”

    정천우가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전투마는 지친 상태에서도 아픔을 참지 못하고 안간힘을 다해 속도를 높였다.

    파지직!

    창대에 꽂아 둔 역천검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정천우는 말고삐를 놓고 두 손으로 창대를 단단히 붙잡았다.

    목표는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무당파의 총사령관.

    최초의 격돌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싸움이 될 게 확실했다. 가속도를 붙여 가는 중이었기에 사람이 죽거나 말이 죽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상태다.

    “밀리지 마라! 동료를 믿어야 이긴다!”

    정천우가 고함을 질렀다.

    마주 달려오는 적 기사단이 내보이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충분히 쉬고 있었는지 사람도 말도 생생해 보였다.

    ‘만만해 보이지가 않아! 덩치도 나보다 크고, 마나도 충만해…….’

    정천우는 장맹기와 맞닥뜨리는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상태와 자신의 상태를 비교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상대의 할베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 마나 쉐도우가 한층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죽어 줘야겠어!”

    격돌의 순간, 정천우가 자세를 낮췄다.

    “이런!”

    장맹기가 기겁한 얼굴로 재빨리 할베르트의 궤적을 수정했다. 곧장 찔러 가려고 했는데 목표로 했던 정천우의 가슴이 전투마의 머리에 가려졌던 까닭이다.

    정천우는 말의 몸통을 다리로 휘어 감으면서 창날로 할베르트를 쳐 냄과 동시에 장맹기의 옆구리를 훑었다.

    콰지직!

    “끄아악!”

    뇌전의 기운을 담은 역천검의 날이 한 뼘 깊이로 갑옷을 파고들며 지나쳤다.

    장맹기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옆구리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비겁한…… 젠장!”

    욕설을 내뱉으며 지나쳐가는 정천우를 향해 분노의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상대를 조롱할 틈도 없었다.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하북팽가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자신들보다 두 배가 넘는 숫자다.

    공격은 고사하고, 살벌한 기세로 파고드는 창을 쳐 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쏙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반전하라! 반전하라!”

    장맹기가 짜증을 담아 소리쳤다.

    실수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수의 기사단을 상대로 돌파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지쳤다고는 해도 적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난전으로 간다!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놈들은 지쳤다. 차분하게 상대하라! 우리는 강하다! 무당의 이름으로 적의 목을 자른다!”

    장맹기는 대열을 갖추기가 무섭게 천천히 말을 몰았다.

    평소에 훈련하던 대로 스톰 기사단원들은 삼각뿔 형태로 대열을 유지하며 장맹기를 보조했다.

    “개자식, 그놈만큼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장맹기가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정면으로 맞붙을 것처럼 하고는 격돌 직전에 꼼수를 부린 상대 지휘관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휘관이라는 놈이 정면 대결을 회피하다니, 장맹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겁한 짓이었다.

    “노오옴!”

    장맹기는 반전을 마치고 진격해 오는 적 기사단의 선두에 선 정천우를 노려보며 노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그러든지.”

    정천우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을 받으면서 창을 곧장 내질렀다.

    ‘이런 띨빵한 놈이 지휘관이라 다행이야. 멍청한 자식.’

    정천우는 오히려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숫자에서부터 밀리는데도 전력의 일부를 떼어내 어딘가로 보내다니, 어리석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멍청한 놈이 지휘관인 게 하북팽가의 입장에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꽤 하는데?”

    정천우가 팔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을 애써 참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흥! 비겁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네놈 따위는 진작 죽였을 것이다! 차압!”

    “웃기는 소리! 새꺄! 내가 빵 쪼가리 하나만 더 집어먹고 왔어도 넌 벌써 뒈졌어! 알아?”

    “개소리!”

    “이거나 받아라!”

    정천우는 이죽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말에 씩씩거리는 틈을 타고 재빨리 허리춤에서 드로잉 나이프를 꺼내 던졌다.

    “흥! 지저분한 수작!”

    장맹기는 창대로 드로잉 나이프를 튕겨 내며 코웃음을 쳤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쓸데없이 마나를 낭비하다니, 멍청한 놈이라며 속으로 비웃음을 던졌다. 그러고는 곧장 할베르트를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드로잉 나이프를 쳐 내면서 창을 휘두르기 딱 좋은 자세가 되어 있었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츠가각!

    “미, 미친놈!”

    장맹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상상도 해 보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의 할베르트에 몸통이 썰려 나가야 할 정천우가 말을 버리고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때문에 할베르트는 애꿎은 전투마의 목덜미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서둘러 무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할베르트를 목덜미에 받아들인 말이 투레질하며 앞발을 번쩍 들었다.

    “우와악!”

    상처 입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장맹기는 창대를 놓치면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순간, 땅바닥을 구르던 정천우가 몸을 일으키며 역천검이 장착된 창을 쭉 뻗었다.

    콰각!

    “더, 더러운 놈…… 너, 너 따위는 기사도 아니…….”

    갑옷을 뚫고 들어온 역천검의 칼날을 내려다보던 장맹기가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새끼, 더럽게 투덜거…… 저건 또 뭐야? 이런 니미!”

    장맹기의 시체를 끌어내리면서 말 위에 올라탄 정천우가 말 머리를 돌리려다가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도주하고 있었다. 눈에 내공을 모아 확인하니, 무리 중에 붉은색과 푸른색 깃털로 장식한 투구를 쓴 놈이 섞여 있었다. 영주를 뜻하는 깃털 장식일 게 분명하다.

    어째서 자신들을 상대로 전력을 나누었나 했더니 영주를 피신시키기 위해서 희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멍청하다고 했던 말은 취소해 주마!”

    정천우는 말 머리를 돌렸다.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다수의 무리를 처리할 자신이 없었다. 후방에서 쏘아 대는 트레뷔셰를 처리하기 위해서라도 기사단과 함께 움직이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서둘러라! 무당파의 영주가 도주한다!”

    정천우의 고함에 기사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무당파의 영주를 잡아 죽일 생각에 더욱 힘을 냈고, 무당파의 스톰 기사단은 기를 쓰고 시간을 벌려고 했다.

    “훅, 후욱…… 제길! 끈질긴 놈들!”

    정천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흘러내린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음에도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말았다. 하북팽가의 기사가 월등히 많아 피해가 미미하긴 했지만 시간을 지체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만리 경! 나는 놈들을 추격할 테니 저 못된 물건을 맡아 주십시오. 레밍턴! 하스론! 슈라!”

    정천우는 팽만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3명의 이름을 불렀다.

    대형 몬스터 사냥 때부터 알고 지냈던 3명의 기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몰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우리는 무당파의 영주를 추격한다! 반드시 해내야 하는 임무다!”

    “맡겨 주십시오!”

    “따르겠습니다!”

    “천우 경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3명의 기사는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였음에도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며 말 위에서 가볍게 군례를 올렸다.

    “생생한 말로 골라 타라! 서둘러!”

    정천우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무당파 소속 스톰 기사단이 탔던 말을 붙잡았다. 자신들이 탄 말들은 전투로 인하여 지친 상태였지만 스톰 기사단이 탔던 말은 상대적으로 피로도가 적었다.

    정천우를 따라 지목받았던 3명의 기사는 서둘러 튼튼해 보이는 말로 갈아탔다.

    “준비가 끝났으면 출발한다! 만리 경! 뒤를 부탁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천우뿐이다. 시체처럼 늘어진 팽우룡을 등에 태운 채 팽만리가 추격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하다.

    “뒤는 걱정하지 마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

    “이 싸움!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

    정천우는 팽만리가 내민 손을 굳게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가리를 해치우는 것이다. 중원이 되었든 동대륙이 되었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대규모 싸움은 몇몇 개새끼들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거거든!’

    정천우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항상 윗줄에 앉은 놈들의 욕심 때문에 죽어 나가는 건 밑의 사람들이다.

    “가자! 이랴아!”

    정천우가 전투마의 배를 걷어찼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만약 무당파의 영주를 놓친다면 싸움이 장기화될 확률이 높다. 그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전쟁터에 끌려 나오는 건 이제 질렸으니까 말이다.

    ***

    “영주님, 힘을 내십시오!”

    장맹천은 마른침을 삼키며 재촉했다.

    평소라면 감히 영주에게 이렇게 말할 순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이 걸린 일이다. 그것도 영주인 장천근 본인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장천근의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필승을 예상하고 하북팽가를 치기 위해서 장천근이 직접 나섰다.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있지만 그것은 기사라서가 아니다. 눈먼 쿼렐에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다.

    겨우 한 시간가량 말을 타고 질주했을 뿐인데 장천근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괴로워하는 중이다.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하는 장맹천으로서는 복장이 터져 죽을 맛이었다.

    ‘그러게 평소에 단련 좀 하시라고 했건만…….’

    장맹천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항상 투덕거리면서도 형제처럼 지냈던 장맹기를 두고 도망치는 길이다. 목숨 바쳐 얻어 낸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셈이니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맹천의 속 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천근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아직 멀었는가?”

    “…….”

    “어째서 대답이 없는가! 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지를 묻지 않는가!”

    자신의 질문을 받은 장맹천이 대답하지 않자 장천근은 근엄한 표정과 함께 짐짓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장맹천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영주가 워낙 말 타는 걸 힘들어했기에 무당파에서 하북팽가까지 오는 데만 나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고작 겨우 한 시간 남짓 말을 달려 놓고 어디까지 왔느냐고 묻는다.

    기가 막히고 당황스러워 그로서는 멍한 표정을 짓는 게 고작이었다.

    “후우…… 영주님, 오는 데만 나흘이 걸렸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서두르셔야…… 이런, 젠장맞을!”

    “뭣이! 지금 무어라 했는가!”

    자신과 말하던 장맹천이 대답하다가 말고 인상을 쓰며 욕을 하자 장천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 했느냐고 묻지 않았는가!”

    “추격이 붙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끼랴!”

    장맹천은 장천근이 탄 말의 볼기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분노해 고함을 지르던 장천근이었지만 갑자기 말이 달려 나가자 말의 목을 붙들고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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