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86화 (86/200)
  • # 86

    Chapter 22. 불길한 상상 (4)

    “누가 쉽게 죽어 줄 것 같은가!”

    내상을 입은 흑룡 기사단원이 전신의 힘을 모조리 스콜피온에 담았다. 노란빛을 뿌리는 정천우의 스콜피온을 향해 전력을 다해 부딪쳐 갔다.

    흑룡 기사단원은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스콜피온이 스스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스콜피온이 스스로 적을 참살하기 위한 최단 거리를 찾아가고 있다. 자신이 지닌 힘의 100%를 넘어서는 완벽한 위력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희열이 밀려들었다.

    마나를 몸에 받아들인 이후로…… 아니, 검을 잡은 이후로 이렇게나 기분 좋았던 움직임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인다.

    검게 물든 스콜피온이 노란빛의 스콜피온과 부딪치는 순간까지 그의 눈을 통해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아름답다!’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평생을 갈고닦은 자신의 마나.

    한없이 빨려 들어갈 듯 짙은 어둠을 닮은 마나 쉐도우.

    자신과 꼭 닮은 마나 쉐도우와 상대의 노란 마나 쉐도우가 드디어 마주쳤다. 노란 빛깔의 마나와 검은 빛깔의 마나가 맞닿으면서 반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찬란한 폭발.

    ‘어?’

    흑룡 기사단원은 웃음기조차 지우지 못한 채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검은색 마나 쉐도우를 깨부순 상대의 스콜피온이 크게 확대되었다.

    파캉!

    흑룡 기사단원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노란빛에 휩싸이는 것과 동시에 두개골이 박살 났으니까.

    “이 자식, 이상한 놈이잖아? 죽으면서 웃고 있어. 에잇! 기분만 더러워지게.”

    정천우는 투구와 함께 두개골 윗부분이 절단된 흑룡 기사단원의 시체를 뒤로하고 다음 상대를 찾아 말을 몰았다.

    썬더 기사단원과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은 팽만리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흉악한 괴성을 지르며 반항하는 흑룡 기사단의 기사들을 압박해 포위망 안에 가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의 숫자는 2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슈발리에를 선두에 두고서 몰아치던 흉포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상처 입은 짐승에 불과할 뿐이었다. 광기에 물들어 스콜피온을 마구 휘두르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스콜피온을 휘둘러 창날에 붙은 뇌수와 핏물을 털어 낸 정천우가 전투마의 배를 걷어찼다.

    “서둘러야 합니다! 우선 기사 2명을 우룡 경에게 보내 주십시오.”

    정천우가 팽만리의 곁으로 다가가 창에 의지해 겨우 서 있는 팽우룡을 손으로 가리켰다.

    팽만리는 그렇지 않아도 팽우룡의 생사를 걱정하던 상황이었다. 정천우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위풍당당하던 팽우룡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세이버를 끼워 만든 창에 의지해 바닥에 자빠지지 않은 게 고작이었다.

    이제껏 믿고 따르던 팽우룡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비틀거리는 광경이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대로 놔두었다가는 누군가 와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았다.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이 팽만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처, 천우 경! 이, 이곳을 맡아 주시오! 형님! 형니임!”

    팽만리는 다급한 얼굴로 자신의 투구를 벗어 정천우에게 내밀었다.

    투구를 장식한 붉은 깃털.

    기사단 전체의 지휘관을 뜻한다. 그렇다는 것은 정천우에게 기사단의 지휘권을 일임하겠다는 의미였다.

    “자, 잠…… 제길!”

    정천우가 팽만리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벌써 전투마를 몰고 팽우룡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남기고 간 투구를 내려다보던 정천우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싼 투구를 벗어 던졌다.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지휘를 맡기다니! 더러워서라도 기필코 잘 해내고 만다!”

    이를 바드득 갈아붙인 정천우가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를 머리에 눌러썼다.

    “놈들의 말부터 해치워라!”

    정천우가 흑룡 기사단을 둘러싼 아군을 향해 말을 몰면서 사자후를 토했다.

    익숙한 정천우의 명령에 하북팽가 기사들의 행동이 바뀌었다. 이제껏 견제만 하던 소극적인 공격 대신에 흑룡 기사단의 말을 노렸다.

    “말을 지켜라! 정정당당하게 덤벼라, 망할 자식들아!”

    흑룡 기사단원 중의 하나가 말을 향해 날아드는 창을 쳐 내며 절규했다.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말까지 잃는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 것인지 뻔했다.

    차라리 후퇴 명령이라도 떨어지면 좋으련만 명령을 내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단장인 슈발리에는 하북팽가의 기사단장을 쫓아간 뒤로 소식이 없다. 부단장이라도 있었다면 괜찮을 텐데 그마저도 기사들의 합동 공격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로 이 모양이다.

    ‘큰 뜻을 품고 동대륙에 넘어왔건만! 이처럼 허무하게 끝이라니! 억울하다! 원통하다!’

    또다시 날아오는 서너 개의 창을 쳐 내고, 흑룡 기사단원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으와아아아! 어둠의 뜻을 받나니! 영원한 축복이 나를 따를지어다!”

    통곡처럼 이어지는 노랫가락이 흑룡 기사단원의 입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러자 다른 흑룡 기사단원들이 비통한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노랫가락은 음산하고도 괴기스럽게 들렸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상관하지 않고 적의 말을 노렸다.

    카강!

    “더헛!”

    세이버가 장착된 창으로 말을 공격하던 샤벨타이거 기사단의 엔토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왜 그래?”

    그와 삼재진을 이루는 조원이자 친구인 빌리가 놀라 물었다. 내내 잘 공격하던 엔토가 창을 놓치며 뒤로 물러나는 게 이상했다.

    “이, 이 자식들 변했어! 갑자기 강해졌어! 내 손을 봐!”

    엔토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두 손을 내밀었다.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음에도 핏물이 흥건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손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건틀릿을 벗기지 않아도 대충 상상이 갔다.

    “위, 위험해!”

    빌리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엔토가 자신을 바라보는 틈을 노리고 흑룡 기사단원 중의 하나가 스콜피온을 사선으로 휘둘러 오고 있었다. 엔토의 앞으로 나선 빌리가 부랴부랴 세이버가 장착된 창으로 올려쳤다.

    캉!

    “크윽!”

    빌리의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엔토가 말한 것처럼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압력이 창대를 타고 전해졌다. 손아귀가 짖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재수 없으면 사이좋게 적의 스콜피온에 썰릴 판이다.

    “엔토! 엔토! 서둘러!”

    “차, 참아! 버텨! 버텨!”

    빌리는 엔토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엔토는 친구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뒤로 손을 뻗어 말안장에 매달린 여분의 창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망가진 손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창대를 더듬어 대기만 했다.

    “죽는 거다! 네놈들은 나와 함께 죽는 거다! 크흐흐흐…….”

    눈알을 시뻘겋게 물들인 흑룡 기사단원은 빌리를 찍어 누르면서 쉬어 빠진 목소리로 음산하게 지껄였다.

    “엔토! 엔토오!”

    흑룡 기사단원의 무지막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빌리가 비명처럼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정작 엔토는 예비용 창을 손에 잡지 못하고 참담한 표정만 지었다. 이대로는 끝장이라는 걸 알지만 자신의 손은 이미 힘을 줄 수 없는 상태였다.

    “크하하하! 죽어라!”

    흑룡 기사단원은 쇳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크게 웃으면서 더욱 강하게 빌리를 내리눌렀다.

    “크윽!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빌리의 눈이 체념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넘어섰다. 근육은 극한까지 힘을 쏟아 낸 까닭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팔이 접히는 순간이 마지막이다. 팔이 굽혀지면 마나의 통로가 막힌다. 그렇게 되면 눈앞에서 시커먼 기운을 뿌려 대는 상대의 마나 쉐도우가 자신의 육체를 썰어 댈 것이다.

    “으아아아…… 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저항하던 빌리의 입에서 괴상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보았다.

    이제껏 자신을 찍어 누르던 흉측한 붉은 눈을 가진 흑룡 기사단원의 머리가 사라진 것을…….

    “잘 버텼다! 이젠 우리 차례다! 말을 죽여라! 접근하지 말고 놈들의 힘을 빼라! 공격하라!”

    절망의 순간에 나타난 정천우의 모습을 보고, 빌리는 하마터면 왈칵 눈물을 쏟아 낼 뻔했다.

    자신을 지나쳐 흑룡 기사단이 우글거리는 곳에 서슴없이 뛰어드는 모습은 차라리 감동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적군 기사단을 스콜피온과 함께 반으로 썰면서 당당한 등을 보여 주었다.

    빌리는 몸에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저런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창대를 꼭 움켜쥔 그는 자신도 모르게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정천우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당황에서 벗어난 엔토 역시 쥐어지지 않는 손을 창대에 천으로 감고서 뒤를 따랐다.

    “죽는 거다!”

    “크하하하! 흑룡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흑룡 기사단원들은 전의를 불태우며 광기에 빠져들었다. 사방에서 하북팽가 기사들의 창이 치고 들어왔지만 두려움 같은 감정은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 아니다. 그저 광기와 살육에 물들어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미친 새끼들! 죽는 게 소원이냐?”

    정천우는 질린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벌써 다섯 놈의 목을 쳤다. 그러는 사이, 숫자를 앞세운 하북팽가의 기사들이 여덟 놈의 목을 떼어 냈다.

    남은 흑룡 기사단원이라고 해 봐야 고작 다섯.

    그럼에도 놈들의 기세는 전혀 죽지 않았다. 쉬지 않고 싸운 탓에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항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천우가 손을 들어 하북팽가 기사들을 말린 것은 혹시나 항복해 오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천우에게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흥! 우리에게 항복은 없다! 죽음은 그저 어둠의 품에 안기기 위한 작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갑옷 위로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붙은 흑룡 기사대원 하나가 정천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나머지 4명의 흑룡 기사대원들도 그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폈다.

    하북팽가 기사들의 집요한 공격에 전투마를 잃고 피로 질퍽거리는 땅 위에 서 있음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모습이었다.

    “징그러운 새끼들! 소원대로 해 주마!”

    정천우는 스콜피온을 말안장에 걸고는 허리춤의 역천검을 뽑았다. 한차례 숨을 가다듬은 그는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역천검에 밀어 넣었다.

    오랜 싸움으로 지쳤을 법한데도 정천우의 역천검에서는 노란빛의 마나 쉐도우가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정천우의 몸이 말 위에서 솟구쳤다. 머리 위로 역천검을 치켜든 채 흑룡 기사단원들이 밀집한 곳으로 떨어졌다. 정천우의 몸 주변에 순간적으로 한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났다.

    “형제들이여! 뒤를 부탁한다!”

    정천우와 말다툼을 벌이던 커다란 덩치의 흑룡 기사단원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정천우의 기세에 죽음을 직감했다.

    뒤에서 들리는 절그럭거리는 소리에 흑룡 기사단원은 마지막 힘을 다해 스콜피온을 힘껏 쳐올렸다. 역혈대법을 사용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마나까지 모조리 뽑아 쓴 탓에 검은 빛깔의 마나 쉐도우는 볼품없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떨어지는 정천우의 역천검을 막아 가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콰앙!

    “으아악!”

    역천검과 스콜피온이 마주치는 순간, 충돌음과 함께 흑룡 기사단원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어깨가 기괴하게 뒤틀리고, 역천검을 받아 낸 스콜피온은 맥없이 부러졌다.

    “흑룡의 형제들이여!”

    흑룡 기사단원이 입으로 핏줄기를 뿜어내며 절규했다.

    자신이 만들어 준 틈을 이용해 동료들이 복수해 주기를 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