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79화 (79/200)
  • # 79

    Chapter 21. 흑룡 기사단 (1)

    팽선웅 백작은 늠름한 모습으로 무당파의 전령을 내려다보았다. 목소리가 낮고 묵직했지만 마나를 담았기에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무당파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북팽가의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우리는 싸울 것이다! 훠우!”

    “후, 후, 후아!”

    팽선웅 백작의 결연하고도 힘이 넘치는 외침에 하북팽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함성을 질러 뜻을 같이했다.

    “후회할 것이오!”

    병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책 위에 당당한 자세로 선 팽선웅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그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도 항복할 생각이 없다! 네놈들은 오늘 우릴 건드린 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으하하하!”

    팽선웅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두려울 게 없었다. 병력도 기사 전력도, 하북팽가가 우위에 서 있다. 게다가 사기까지 높은 상태라 무당파가 덤벼든다고 해도 걱정이 없었다.

    보고를 들을 때야 상대가 예상외의 전력을 끌고 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직접 적의 병력을 확인하고 보니 안심되었다. 그동안 수집했던 정보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셈이다.

    적의 전력이 예상한 범위 내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전령이 말 머리를 돌리기가 무섭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목책을 향해 날아왔다.

    “창!”

    목젖이 보이도록 웃음을 터트리던 팽선웅 백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뒤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재빨리 세이버를 끼워 만든 창을 건넸다.

    바우우웅!

    거대한 돌덩이가 목책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팽선웅 백작은 창을 손에 쥐기가 무섭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푸른빛의 마나 쉐도우가 창을 감싸자 상체를 뒤로 기울이며 날아드는 돌덩이를 가늠하고는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슝! 슈슈슝!

    마나 쉐도우를 머금은 창이 팽선웅 백작의 손을 떠나기 무섭게 뒤이어 세 개의 창이 날았다.

    하북팽가에서 가장 무력이 뛰어나다는 팽우룡과 팽만리, 그리고 팽만봉이 창을 날렸다. 네 자루의 창에 깃든 마나 쉐도우가 날아오는 돌덩이에 충돌했다.

    콰과광!

    네 자루의 창에 깃든 마나 쉐도우가 돌덩이와 부딪치면서 연달아 폭음이 일어났다. 창을 둘러싼 네 개의 마나 쉐도우가 간섭을 일으키면서 날아오던 돌덩이를 산산이 부숴 놓았다.

    “우와! 하북팽가 만세!”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돌덩이가 네 자루의 창에 박살 나는 광경을 보고 병사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환호와 달리 팽선웅 백작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무당파 병력의 뒤쪽에 공성 병기가 있다는 건 눈치챘지만 설마 트레뷔셰(Trebuchet, 무거운 돌을 날리는 공성용 병기)까지 동원했을 줄은 몰랐다.

    “무당파에 트레뷔셰가 있다. 썬더 기사단은 적 병사들이 돌진하는 시기에 맞춰 출격하도록 하라! 마법사들은 트레뷔셰 공격을 방어하라!”

    “충! 썬더 기사단장 팽우룡, 명을 받듭니다!”

    팽우룡이 대표로 나서서 군례를 올리고는 목책 밑으로 내려갔다.

    썬더 기사단원들이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적 기사단을 뚫고서 대형 공성 병기인 트레뷔셰를 무력화시킨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

    마법사들이 트레뷔셰 공격을 막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다.

    “라이온 기사단과 타이거 기사단이 뒤를 받치고, 샤벨타이거 기사단이 퇴로를 확보한다!”

    “충! 라이온 기사단장 그란드 팽, 명을 받듭니다.”

    “충! 타이거 기사단장 윈체스터 팽, 명을 받듭니다.”

    “충! 샤벨타이거 기사단장 정천우, 명을 받듭니다.”

    흩어져서 지역 방어를 하기로 했던 기사단장들이 약식 군례를 올리며 팽선웅 백작의 명령에 화답했다.

    원래 세웠던 작전과는 어긋난 일이다. 목책을 방패 삼아 적병의 수를 줄인 뒤에나 기사단이 출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트레뷔셰가 등장함에 따라 변화가 생겼다.

    “제길, 이거 처음부터 꼬였잖아? 샤칼!”

    “왜?”

    “네가 여기에 남아서 아까 그 뭐냐? 돌덩이 있잖아, 그것 좀 처리해 줘. 할 수 있지?”

    “안 뒈지려면 해야지, 별수 있겠어?”

    샤칼은 입맛을 쩍 다시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인간의 전투에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끼어드는 건 처음이었다. 내키지 않지만 명령에 따라야 한다. 반항했다가는 저 성질 더러운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뭐야! 이런 젠장!”

    정천우가 뜨악한 얼굴로 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전력을 다해 내공을 창에 불어넣었다. 곧이어 뇌전의 기운을 품은 마나 쉐도우가 불쑥 일어났다.

    돌덩이가 날아오고 있었다.

    샤칼이 뒤늦게 그것을 발견하고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아무리 빨리 주문을 외운다고 하더라도 제시간에 요격하기에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팽선웅 백작이 발견했는지 마나 쉐도우를 담은 창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정면으로 날아오는 게 아니라서 그랬는지 허무하게 돌덩이를 스쳐 지나갔다.

    ‘제기랄! 저런 게 떨어졌다가는…….’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정천우가 속으로 신음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놓치면 끝장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무지막지한 돌덩이가 목책과 부딪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말이다.

    정천우의 팔뚝이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기운 대신에 마나 쉐도우를 뭉툭하게 생성시켰다.

    이곳의 기사들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공 운용 능력을 지닌 정천우는 기어이 그 일을 해냈다.

    “우, 우리한테 떨어지겠어!”

    “우와악!”

    목책 위에 늘어선 병사들이 식겁한 얼굴로 몸을 숙였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날아오는 모습에 기가 죽었다. 아이언 우드로 만든 목책의 뒤에 기사들이 몸을 숨겼다.

    그때였다.

    “차아압!”

    정천우가 기합과 함께 창을 던졌다.

    한껏 뒤로 당겼던 오른팔이 상체의 회전력을 빌려 크게 원을 그렸다. 뒤이어 마나 쉐도우를 품은 창이 공간을 꿰뚫고 날아갔다.

    콰광!

    엄청난 크기의 돌덩이와 창이 마주치면서 폭음이 터졌다.

    팽선웅 백작과 썬더 기사단의 3명이 힘을 합쳐 바위를 막아 낸 것보다도 훨씬 커다란 폭음이었다.

    “우와아아…….”

    “사, 살았어!”

    병사들은 전방 4~50미터 상공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바위를 쳐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헉, 헉! 제기랄! 뒈지는 줄 알았네!”

    정천우가 힘겨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전신의 내공을 한꺼번에 터트린 까닭에 힘이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병사들은 물론, 기사들마저 정천우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천우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명령은 내려졌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

    다시 한 번 바위가 쏘아지기 전에 충분히 대비시켜야 했다.

    “샤칼! 멍 때리지 말고 잘 막아!”

    “아, 알았다. 무서운 자식! 대단했다.”

    샤칼은 정천우가 보여 준 놀라운 모습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팽선웅 백작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다. 마법으로 해결한다고 해도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조차 쉽지 않은 일을 홀로 해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됐어, 말할 힘도 없다. 잘 부탁해. 너만 믿겠다.”

    정천우는 혀를 내두르는 샤칼에게서 눈을 떼고 제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인 마법사님은 옆에서 같이 도와주세요.”

    “알았어요, 천우 경.”

    제인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크게 놀랐다. 정천우의 능력이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놀란 마음보다 서운한 마음이 더 앞섰다.

    함께 싸우면서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일부러 샤벨타이거 기사단에 배정해 달라고 팽선웅 백작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같이 싸우기도 전에 작전이 변경되었다.

    제인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무심하게 몸을 돌리는 정천우를 보고는 제인이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천우 경, 잠시만요!”

    제인은 목책 밑으로 내려가려는 정천우를 불러 세웠다.

    “하실 말씀이 남…… 읍!”

    정천우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제인이 덥석 안겨 들어 입맞춤을 해 왔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정천우의 눈이 감겨들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허우적대던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휘이익!”

    “싸우기 전부터 너무 후끈하잖아?”

    목책 위에 섰던 기사와 병사들이 두 사람의 모습에 짓궂은 농담과 부러움이 가득한 야유를 보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입술은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

    정천우의 눈이 다시 번쩍 떠졌다.

    붉게 물든 얼굴로 입맞춤하던 그녀의 혀가 자신의 입술을 들추며 들어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정천우는 그녀를 받아들였다.

    거칠어진 제인의 숨결이 얼굴을 간질였다.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정천우는 그녀가 무척이나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천우는 제인의 부드러운 몸을 더욱 끌어당기며 그녀의 혀를 받아들였다.

    혀와 혀가 뒤엉키면서 장미꽃의 향기가 풍겼다. 이번에는 정천우가 혀를 그녀에게 밀어 넣으며 타액을 나누었다.

    제인은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꼭 감은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안도감.

    그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확인.

    제멋대로 날뛰던 감정의 파도가 지금 이 순간 거짓말처럼 잔잔해지고 있었다. 밀려드는 안도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

    마침내 길었던 입맞춤이 끝나자 제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멈추었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감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그녀는, 귀를 파고드는 사람들의 탄성과 환호성에 얼굴을 붉혔다.

    “조심하세요.”

    “그러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정천우는 수줍게 말하는 제인의 어깨를 한차례 쓰다듬고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아쉬워하는 제인을 두고 정천우는 목책 밑으로 내려갔다. 샤벨타이거 기사단원들이 내려가면서 제인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정천우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음, 음! 모두, 싸움에 집중하세요.”

    제인은 목책 위에 남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확인하고는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화끈한 장면을 목격했던 병사들은 헛기침을 흘리면서 키득거렸다.

    막연하게 두려움을 느꼈던 병사들은 두 사람의 애정 행각에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천우, 제법이다?”

    버둥거리면서 말에 올라탄 헤이먼이 히죽 웃었다.

    말에 타기를 꺼리는 다른 드워프와 달리, 헤이먼은 고삐를 잡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인간 세상에 나와 샤칼을 호위하면서 오랫동안 말을 탔던 까닭이다.

    “뭐가?”

    “뭐긴 뭐야? 저 아가씨 말하는 거지.”

    헤이먼은 턱짓으로 목책 위에 선 제인을 가리켰다. 음충맞게 웃는 모습이 인간 수컷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천우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해 놓고도 정천우는 민망한 기분이었다. 제인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찐하게 화답하고 말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자신 역시 제인을 특별하게 생각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였다.

    “몰라, 머리 복잡해. 일단 이번 전쟁부터 이기고 생각하자. 그리고 넌 샤칼을 도와!”

    “귀병신을? 어째서?”

    헤이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녀석이 불안해. 네가 옆에서 도와줘. 게다가 넌 무기가 좀 그렇잖아?”

    샤칼을 힐끗 쳐다본 정천우는 헤이먼의 손에 들린 전투 도끼를 가리켰다. 말 위에서 사용하기엔 많이 짧다.

    “그래, 내가 책임지고 목책을 방어하겠다.”

    “믿는다.”

    “맡겨 둬라!”

    헤이먼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목책을 향해 몸을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