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3화 (63/200)
  • # 63

    Chapter 17. 평화를 원하거든 칼을 들어라 (3)

    “어디, 목이 잘리고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보겠다!”

    휴만이 이를 갈아붙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를 가로지른 굵은 혈관이 꿈틀거렸다.

    그저 쥐새끼 정도로 생각하고 평소처럼 처리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강적이었다. 자신이 직접 키운 부하 하나는 벌써 저세상으로 가 버렸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지체했다간 앞서 죽은 놈을 따라 가게 생겼다.

    ‘찰리마저 잃을 순 없다!’

    부하의 생명까지 걸린 싸움이었기에 휴만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누구의 목이 잘릴지 네가 결정할 일은 아닐 텐데?”

    정천우가 쥐어짜듯 귀 옆에 붙였던 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자신의 가슴 앞으로 가져갔다.

    검 끝은 전방으로 향한 상태였으며, 반드시 베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담아 휴만을 노려보았다.

    일검필살(一劍必殺)!

    지금 풍기는 정천우의 기세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말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대략 7미터가량.

    검의 길이와 두 사람의 팔 길이를 생각한다면 한순간에 생(生)과 사(死)를 가를 수 있을 정도의 짧은 거리다.

    먼저 틈을 보이는 사람이 죽는다.

    살벌하고도 잔인한 규칙.

    둘은 그 잔인한 규칙을 순순히 인정했다. 상대를 죽인다면 자신은 살아날 수 있다.

    ‘제길, 어지간히 소심한 새끼잖아?’

    정천우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금방 달려들 것 같았던 상대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먼저 움직이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정천우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휴만과 자신은 거의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엇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싸우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단순히 싸우는 게 아니라 생명을 건 승부라면 더욱 신중해지는 게 당연하다.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상대에게 집중했다. 집중이 깨지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더 이상 기다릴 순 없어! 내가 먼저 들어가든지…….’

    정천우가 역천검의 손잡이를 다시 한 번 움켜잡았다.

    이런 상태로 대치가 길어지면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도발을 해서라도 상대가 반응하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이봐! 겁나면 그냥 가라. 사내새끼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뭐야? 나한테 반한 거야? 난 그런 취미 없으니까 꿈 깨라. 차라리 옆에 자빠져 있는 새끼랑 놀지그래?”

    “……닥쳐.”

    정천우의 구역질 나는 도발에도 휴만은 흥분하지 않았다.

    휴만은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신의 부하인 찰리는 죽음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중이다. 시간을 끌 게 아니라 빨리 상대를 죽이고 상처를 돌봐 줘야 한다.

    그러나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적을 향해 달려들려고 할 때마다 영문 모를 찜찜한 예감이 들었다. 수많은 임무를 해내면서 발달한 위기 감지 능력이 그의 발을 묶어 놓았다.

    놈을 죽이고 찰리를 구해야 한다는 이성과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이 그의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워 댔다.

    으드득!

    휴만이 입술을 씰룩이며 이를 갈았다. 유독 오늘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지금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난 것이나, 그 사람이 하필이면 기사급 실력을 지녔다는 것.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휴만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서 타이밍을 잡았다. 상대가 숨을 내쉬어 자연스럽게 근육이 풀어지는 순간을 노릴 생각이었다.

    순간,

    퉁! 피잉!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쿼렐이 쏘아졌다. 휴만이 아니라 쓰러져 있는 찰리가 쏜 것이었다.

    “우욱! 이런 빌어먹을!”

    정천우가 뜨악한 얼굴로 역천검을 들어 쿼렐을 쳐 냈다.

    뜻밖의 기습이었던 탓에 움직임이 좋지 않았다. 휴만에게 잔뜩 집중하느라 살기를 뒤늦게 감지했다. 정천우는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가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공을 밀어 넣을 틈도 없었다. 달려드는 휴만을 향해 무작정 집어 던졌다.

    “헛!”

    휴만이 깜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키면서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는 아까 특수하게 제작된 찰리의 스케일 아머도 뻥뻥 뚫린 것을 봤다. 엄청난 힘을 담고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탓에 롱소드에 힘을 과도하게 실었다.

    휴만의 착각이 정천우를 위기에서 구했다. 드로잉 나이프를 막느라 그가 잠시 멈칫한 순간, 정천우가 자세를 회복하고 오히려 반격을 가했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 역천검이 어지럽게 빛을 뿌리면서 휴만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어림없다!”

    캉! 카강, 캉!

    휴만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역천검을 걷어 냈다.

    공격을 막아 가는 와중에도 상대의 빈틈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눈을 움직였다.

    ‘보통이 아니야!’

    휴만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롱소드를 통해 느껴지는 상대의 힘은 평범한 기사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검을 내지를 때마다 묵직한 압력이 전해져 손아귀가 욱신거렸다.

    “으아압!”

    공격 일변도로 역천검을 휘두르던 정천우의 입에서 커다란 함성이 튀어나왔다.

    상대하던 휴만은 갑작스러운 상대의 괴성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천우가 뒤로 몸을 빼면서 오른손으로 역천검을 집어 던질 듯이 어깨 높이로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속임수를 쓰려고!’

    휴만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정천우를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무기를 집어던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위협일 뿐이라고 믿었다. 검을 버리면 싸울 수단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휴만은 곧바로 자신의 예상을 정정해야만 했다.

    “미, 미친!”

    마나 쉐도우를 잔뜩 뒤집어쓴 역천검이 회전하면 날아왔다.

    역천검을 쳐 내려던 휴만이 생각을 바꿨다. 무기를 쳐 내느라 멈칫하다가는 아까의 상황을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완력과 마나 쉐도우를 그대로 실은 검을 정면에서 쳐 냈다가는 충격 때문에 또 몸이 굳을 게 뻔했다. 차라리 회피하고 나서 그동안 쌓인 분풀이를 통쾌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슈슈슉! 슈슉!

    “어엇! 이런 빌어먹을 자식!”

    휴만이 욕설을 터트리며 롱소드를 어지럽게 휘둘렀다.

    정천우가 던진 드로잉 나이프가 연달아 날아왔다. 아까와 달리 뇌전의 기운을 담은 마나 쉐도우가 드로잉 나이프를 완전히 감싼 상태였다.

    “제대로 싸울 순 없는 거냐!”

    휴만이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다섯 자루의 드로잉 나이프를 막느라 기운이 쪽 빠지는 느낌이었다. 드로잉 나이프 하나하나에 담긴 기운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직접 검을 부딪친 것과 같은 정도의 충격을 받는 바람에 모두 막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와중에 날아오는 방향까지 미묘하게 변화해서 무척이나 곤욕을 치렀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드로잉 나이프를 막는 사이 정천우가 저만치 멀리 떨어져 몸을 피했다는 점이다.

    “아뿔사!”

    휴만의 얼굴이 휴지처럼 참담하게 구겨졌다.

    “이제 제대로 싸워 보려고.”

    정천우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츠걱!

    그는 찰리의 가슴에 틀어박힌 역천검을 비틀어 뽑았다. 애초부터 찰리가 목적이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으으으…… 처음부터 노렸구나!”

    “뭐, 부정하진 않겠어. 성가신 건 질색이거든.”

    정천우는 어깨를 한차례 으쓱해 보였다.

    역천검을 던져 자신에게 쿼렐을 겨누는 찰리를 노렸다.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우는데 암습에까지 신경 쓰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네놈, 곱게 죽이지 않겠다! 각오하라!”

    “아까처럼 쉽진 않을 거야.”

    정천우가 코웃음을 쳤다.

    이젠 오로지 상대에게만 집중하면 끝이다. 암습의 위험이 없는 이상 위력적인 무공을 마음껏 사용해도 괜찮다.

    왼 다리를 거의 편 상태로 적에게 향하게 하고, 오른 다리는 살짝 굽혀 체중을 왼 다리와 오른 다리에 2:8의 비율로 배분했다.

    역천검은 두 손에 쥔 채로 사타구니 부근에 손잡이가 닿을 듯이 감싸 쥐었다. 검신이 수평을 이룬 듯 보였지만 검 끝이 살짝 지면을 향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오호단문도의 기수식이다.

    방어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앞으로 튀어 나갈 수 있게 체중을 지탱하는 뒷다리에 힘을 주고 선다. 그리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기다린다.

    먹이를 노리며 자세를 웅크린 호랑이의 자세를 본떠서 창안한 기수식이었다.

    지이이잉…….

    역천검에 내공이 몰려 들어가면서 미약하게 진동이 일어났다.

    흐릿하게 빛나던 누런 뇌전의 기운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검신을 에워쌌다.

    정천우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충분한 힘과 기세로 상대를 난폭하게 몰아칠 준비를 해 나가는 중이다. 상대의 호흡에 자신의 호흡을 맞추고 때를 기다렸다.

    ‘으음…… 오호단문도! 병사들이나 배우는 도법으로 저런 투기를 발휘하다니! 게다가 저 기운은 또 뭐란 말인가!’

    휴만은 정천우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나운 기세에 마른침을 삼켰다.

    누런빛의 마나 쉐도우라니…….

    마나 쉐도우의 색깔에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휴만은 겁내기보다는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다. 반드시 부하들의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그의 고집스러운 입매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드아아아!”

    휴만이 롱소드의 검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롱소드의 검날이 자갈을 훑고 가면서 불똥이 튀었다.

    그때까지도 정천우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던 정천우는 휴만이 지척에 다다를 때쯤에야 체중을 실은 오른발로 힘차게 지면을 밀어냈다.

    내공을 담은 오른발이 지면을 박차면서 땅거죽을 한 움큼이나 뜯어냈다. 무게중심이 앞다리로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진각을 밟았다.

    왼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힘을 부드럽게 이어, 두 손에 쥔 역천검을 비틀면서 힘차게 들어 올렸다.

    쩡!

    둔중한 쇳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내려쳐 오던 휴만의 롱소드가 튕겨 나갔다.

    정천우의 공격은 그게 시작이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비틀린 상체가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상대의 공격을 쳐올리느라 어깨 위로 곧게 세웠던 역천검이 사선을 그리며 휴만의 머리를 쪼갤 듯이 내리꽂혔다.

    오호단문도 제일초식 맹호수참(猛虎手斬)!

    쾅!

    “크억!”

    떨어지는 역천검에 롱소드를 들이밀었던 휴만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정천우의 일격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어깨와 가슴이 뻐근해질 만큼 충격을 받았다.

    “우욱! 제, 제기랄!”

    겨우 공격을 막아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휴만의 착각이었다.

    싯누런 빛을 품은 역천검이 횡으로 베어져 오고 있었다. 휴만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롱소드를 다급하게 들어 올렸다.

    카앙!

    “우웨엑! 크아, 후아, 훅, 우욱…….”

    연이은 충격에 휴만이 입으로 핏물을 토해 내면서 비틀비틀 물러났다.

    “곱게 죽이지 않겠다며?”

    정천우가 역천검으로 휴만을 겨누며 비웃었다.

    이렇게 상대를 압도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실전에서 오호단문도를 시험해 보니 이건 상상 이상이다. 오호단문도의 무공을 열심히 수련한 보람이 느껴졌다.

    “큭…… 비웃지 마라! 기사는…… 기사는 모욕을 참지 않는 법이다! 으아아아!”

    화가 난 휴만이 비명처럼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상의 몸일 때도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몸 상태로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천우가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는가 싶더니 넘어질 듯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그 탓에 휴만의 롱소드가 애꿎은 허공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 순간, 훤하게 드러난 휴만의 옆구리로 역천검이 빨려들 듯 파고들었다.

    쩌걱!

    “큭! 분하다…….”

    휴만이 롱소드를 떨어뜨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임무는 아무런 위험이 없을 거라고 부하들에게 말했건만, 몰살을 당하다니…….

    “그러게 그냥 도망갔으면 서로 좋았잖아. 나도 쓸데없이 살인 같은 걸 안 해서 좋았을 테고. 안 그래?”

    “우, 웃기지 마라. 고, 곧…… 피바람이 불면 네놈도……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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