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62화 (62/200)
  • # 62

    Chapter 17. 평화를 원하거든 칼을 들어라 (2)

    ***

    영약(?)을 캐기 위해서 목책을 나선 정천우는 경공을 발휘해 달려가는 중이다.

    경공을 발휘한다고는 하지만 죽자 사자 달리는 게 아니다. 몬스터 토벌로 인하여 위협이 사라진 다음이었기에 조금은 방만한 태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방에 구리구리한 냄새가 가득하다. 대규모로 몬스터 토벌이 벌어진 후유증이다. 피와 살점이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다.

    “골이 지끈지끈하네.”

    정천우가 수건으로 입을 가리면서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오크와 고블린의 서식지였던 곳에서 가장 악취가 심하다. 가장 많은 학살이 벌어진 곳인 데다가, 부산물을 수거하면서 더욱 많은 피가 땅을 적신 탓이다.

    지독한 냄새는 달려갈수록 오히려 더욱 짙어졌다. 대형 몬스터와 싸우면서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 사람?”

    정천우는 경공을 발휘하던 다리에 내공을 줄여 나갔다. 천천히 속도를 줄여 나가다가 마침내 자리에 멈췄다.

    달리는 중에 언뜻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릴 리 없는 게 들렸으니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몬스터 토벌이 끝나고 부산물을 챙기는 작업은 한참 전에 끝났다. 더구나 목책 경비 책임자인 샘슨한테서는 오늘 목책 밖으로 나간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몬스터 토벌에 성공했다고는 해도 샘슨이 지키는 방향은 몬스터 산맥이 존재한다. 지금 당장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몬스터들이 내려올 게 뻔하다. 이런 곳에 영지민이 아무런 이유 없이 몰래 나올 이유가 없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정천우는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나뭇가지같이 소리 나는 물체를 밟지 않으려고 주변을 세심하게 살폈다. 하북팽가의 사람이라면 좋겠지만 일단은 조심하는 편이 좋다.

    나무와 우거진 풀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움직였다. 10분 정도를 이동하고 나서야 드디어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북팽가의 사람들은 아니야! 그럼 누구지?’

    정천우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복장을 살피면서 눈매를 좁혔다.

    사람들의 복장은 비슷한 형태였다. 물고기의 비늘을 닮은 쇳조각을 꿰어 만든 스케일 아머를 입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형태였는데 제법 내구력이 좋아 보였다.

    모두 롱소드를 착용하고 있었고 콧날을 보호하는 형태의 코린트식 투구를 쓰고 있었다. 투구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무장 상태가 상당했다. 등 뒤에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고, 모두들 한 손에는 크로스보우를 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갖가지 투척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는데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복장만으로는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정천우가 귀에 내공을 집중시키고는 귀를 기울였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풀숲에 납작 엎드렸다.

    ‘응? 뭐지?’

    정천우는 자리를 잡고 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뭔가 불쾌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실을 건드린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나 놈들이 사람의 접근을 파악하기 위해 트랩 같은 것을 설치했는지 둘러보았으나 그런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정천우는 기분 탓으로 돌리고 사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투입된 특임대는 임무를 완수한 게 틀림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몬스터 산맥 깊숙이 자리 잡은 대형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왔다는 게 그 증거야. 어둠의 기운을 품은 디바인 마크가 확실하게 발동했다는 의미지.”

    ‘디바인 마크? 그럼 저 자식들은…….’

    사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정천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몬스터들이 하북팽가의 영지를 공격한 사건은 저들이 일으킨 게 확실했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정천우는 3명의 사내들을 살피면서 숨을 죽였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상당했다. 하북팽가의 전력으로 따진다면 정규기사단인 타이거 기사단원과 엇비슷한 실력을 지녔다.

    리더인 듯 보이는 사내는 팽씨 성을 부여받은 썬더 기사단원의 수준으로 보였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생각해서 그렇다.

    정천우는 아직 이류의 실력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게다가 숫자가 셋이나 된다. 함부로 나섰다가는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도 몰랐다.

    일단은 놈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하북팽가의 영주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영지가 좀 더 안전해진 셈이지. 먼저 간 동료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 무당파가 더욱 크게 도약할 수 있게 됐어.”

    “형제들의 죽음이 헛되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놔둘 겁니까?”

    이제껏 조용히 있던 사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순간, 엿듣고 있던 정천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별다른 말도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천우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 처리해야겠지. 놈은 발각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 알람 마법에 걸린 줄도 모르는 걸 보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놈인 것 같다. 기사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내가 셋을 세면 크로스보우를 발사하도록 하라.”

    “네, 장전부터 하겠습니다.”

    “어떤 놈일지 기대되는군요.”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명령을 내리자 나머지 두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면서 크로스보우의 시위에 쿼렐을 걸었다.

    정천우의 위화감은 더욱 깊어졌다.

    3명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발각되었다는 걸 믿기가 어려웠다. 자신은 기척을 모두 숨긴 상태였다.

    의문이 생겼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나…….”

    사내들이 크로스보우의 장전을 마친 것을 확인한 리더가 숫자를 세어 나갔다. 나머지 2명의 사내가 살짝 긴장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정천우는 자신이 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은신술을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2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작정하고 숨은 자신을 발견했을 거라곤 믿고 싶지 않았다.

    이곳 세상의 기사들은 기감(氣感)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둘…… 셋!”

    리더가 셋을 말하는 순간 세 개의 크로스보우가 움직였다.

    “제기랄!”

    정천우가 기겁한 얼굴로 땅을 손바닥으로 밀쳐 내면서 몸을 날렸다.

    믿을 수 없지만 놈들은 자신이 숨은 곳을 향해 정확하게 크로스보우를 겨눴다.

    파바박!

    정천우가 숨었던 자리에 세 개의 쿼렐이 깊숙하게 박혔다.

    “뭐가 이렇게 꼬이냐!”

    정천우는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발바닥의 용천혈로 내공을 뿜어내면서 보법을 밟았다. 저렴한 무공인 탓에 보법이라곤 오로지 전진밖에 없다. 다른 무공처럼 적의 사각으로 파고드는 고급의 무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

    땅거죽이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흙먼지를 일으켰다.

    정천우의 뒤를 따라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길게 꼬리를 만들었다.

    20미터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아니다. 정천우가 여섯 걸음 만에 5미터 거리까지 접근했다.

    “우왁!”

    “이런!”

    “흩어져!”

    3명의 사내는 뜻밖의 빠른 돌진에 기절할 듯 놀라며 소리쳤다.

    셋은 롱소드의 손잡이를 잡아 가며 사방으로 흩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드로잉 나이프를 쥔 정천우의 손이 머리 위에서 완만한 대각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슈슈슉!

    세 자루의 드로잉 나이프가 날카로운 파공음을 동반하며 그의 손을 벗어났다. 내공을 머금은 드로잉 나이프는 누런빛을 발하며 3명에게 거의 동시에 날아갔다.

    정천우는 드로잉 나이프를 던지기 무섭게 역천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발검술의 원리를 담아 정천우가 검집을 쥔 왼손을 당기고,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듯 하여 역천검을 뽑았다. 검집을 벗어난 역천검이 하얀빛을 뿌리며 아름다운 반원을 그렸다.

    이제 막 정천우가 던진 드로잉 나이프를 가까스로 피해 낸 무당파의 사내를 향해, 역천검이 만들어 낸 빛의 궤적이 이어졌다.

    콰득!

    역천검이 금속으로 만든 코린트식 투구를 우그러뜨리며 사내의 두개골을 뭉갰다. 두개골이 부서지면서 발생한 압력에 의해 눈알이 튀어나오고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급하게 뻗어 낸 발검술이라 내공을 담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검기를 사용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면 깔끔하게 갈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위슬리!”

    비통한 감정이 듬뿍 담긴 절규가 정천우의 귀를 때렸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정천우는 눈알이 덜렁거리는 시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역천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시체의 찌그러진 투구를 잡아 뒤쪽을 향해 밀었다. 그와 동시에 시체를 밀어서 얻은 반탄력을 빌려 옆으로 몸을 날렸다.

    퍼벅!

    “으악! 위슬리!”

    정천우를 공격해 가던 다른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당혹성을 흘렸다. 정천우가 밀쳐 낸 시체의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에 이르는 기다란 검상이 생겨났다.

    정천우가 아닌 동료의 시체를 훼손한 사내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내장이 스케일 아머 밖으로 튀어나와 허연 김을 뿜어내는 시체를 끌어안았다.

    “찰리! 피해!”

    리더인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피융!

    그러나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정천우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드로잉 나이프에 내공을 담아 던진 것이다.

    퍽!

    “커흑!”

    찰리라는 이름의 사내는 드로잉 나이프가 파고든 오른쪽 가슴을 손으로 감싸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이노옴!”

    리더는 찰리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드는 정천우에게 몸을 던졌다.

    롱소드에 맺힌 푸르스름한 마나 쉐도우가 길게 꼬리를 물고 정천우에게 날아갔다.

    “쳇!”

    살벌한 파공음을 동반한 공격을 피할 길이 없어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롱소드를 쳐 냈다. 그러고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내공을 가다듬었다.

    “찰리! 찰리! 괜찮나?”

    “휴만 대장…… 더럽게 아픕니다. 크윽…….”

    “멍청한 자식, 네 몸부터 챙겼어야지!”

    정찰조의 리더인 휴만은 안타까운 눈으로 찰리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드로잉 나이프가 너무나 깊숙이 박혔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파고든 드로잉 나이프의 칼날이 내부를 마구 휘저어 놓을 게 확실하다. 그렇다고 지금 드로잉 나이프를 빼냈다가는 폐에 구멍이 생겨 호흡곤란으로 죽을 수 있다.

    정확한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면 찰리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부하 하나를 잃었지만 살아남은 부하만이라도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의 책임이니까.

    휴만은 숨을 헐떡이는 찰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롱소드를 움켜쥔 채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만하면 해볼 만하겠어.’

    정천우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출발이 좋다.

    비록 발각당하는 바람에 불필요한 싸움을 하게 되었지만 상대의 기습을 역이용해 둘이나 무력화시켰다. 이러면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는 부상자 하나에 자신과 실력이 엇비슷한 놈 하나. 부상자는 나중에 천천히 해치워도 늦지 않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휴만을 경계하며 정천우가 역천검을 겨누었다.

    “네놈, 정체가 뭐지?”

    휴만이 롱소드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롱소드의 검신이 한차례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푸르스름한 마나 쉐도우가 피어올랐다.

    “이제야 그게 궁금하냐? 한가한 새끼!”

    정천우가 코웃음을 치며 역천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고서 오른쪽 귀 옆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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