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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53화 (53/200)
  • # 53

    Chapter 14. 전설의 부활 (3)

    “이게 무슨 일인가!”

    팽선웅 백작은 비상종 소리에 집무실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성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외성의 망루 위에 걸린 파란 깃발.

    위급한 소식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깃발이다. 만약 외부의 침입이었다면 붉은색 깃발과 함께 마법으로 만든 폭죽이 연달아 터졌을 것이다.

    “저건?”

    팽선웅의 눈이 바르르 떨렸다.

    외성을 지나 누군가가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눈에 마나를 집중해 살펴보니 제인과 정천우였다.

    가문의 상징인 샤벨타이거가 그려진 파란색의 깃발, 그것은 중요한 소식을 상징하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 없겠지…….’

    팽선웅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말을 타고 영주성 내부를 질주하는 정천우와 제인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속으로 뇌까리는 말과 달리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정찰대와 함께 출발했던 두 사람만 돌아왔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을 미리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천우 경! 제인 마법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급한 종소리에 놀란 얼굴로 뛰쳐나온 팽우룡이 영주집무실 건물 앞을 가로막았다.

    먼저 말에서 내린 뒤 제인을 내려 준 정천우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찰대가 전멸했습니다. 그곳의 괴물들을 감당하기에 정찰대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천우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우 경이! 이런, 말도 안 될…….”

    팽우룡은 눈을 부릅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팽진우가 누군가!

    20명으로 구성된 하북팽가 최강의 기사단인 썬더 기사단의 일원이다. 탁월한 실력으로 ‘팽’이라는 성을 부여받고 영주인 팽선웅에게 직접 이름을 받았다.

    그런 그가 타이거 기사단의 실력자들을 10명이나 데리고 나가서 모두 함께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고작 정찰 임무에서 말이다.

    “영주님께 먼저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정천우가 착잡한 얼굴로 팽우룡에게 말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이곳의 영주인 팽선웅에게 보고 후, 다음을 이야기해야 할 때였다. 슬퍼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그럴 필요 없네. 내가 내려왔으니까. 말해 보게!”

    “영주님을 뵙습니다.”

    정천우가 한쪽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지 않은가! 어서 말하게! 정찰대가 전멸했다고? 어쩌다가, 어쩌다가 전멸했다는 말인가!”

    팽선웅이 정천우를 일으켜 세우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찰대는 팽진우 경의 뜻에 따라 정찰에 나섰습니다. 인근 지역에 오크와 고블린들이 내려와 새롭게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정천우는 정찰대가 어떻게 행동하고 임무에 충실했는지 설명했다. 설명을 이어 가던 그는 트롤과 오우거, 그리고 미노타우로스들을 발견한 얘기를 해 주었다.

    팽선웅을 비롯한 하북팽가의 기사들은 대형 몬스터가 우글거린다는 정천우의 말에 경악했다.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팽진우가 서식지에 발을 들였다는 대목에서 탄식을 흘렸다.

    “아아! 진우 경, 진우 경! 어찌 그리 무모한 짓을 했더란 말인가!”

    팽선웅은 팽진우의 과잉 충성에 고개를 흔들며 안타까워했다.

    대형 몬스터에게 죽임을 당했다면 지금쯤 시체조차 제대로 남지 않았을 게 뻔하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몬스터들에게 쫓겨 탈출하는데, 오우거들이 정찰대를 덮쳤습니다. 정찰대원들이 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정천우가 참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팽선웅과 기사들의 얼굴에 짙은 슬픔이 드리워졌다.

    “천우 경, 그대는 그런 격전 속에서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까?”

    팽우룡의 곁에서 슬픔을 억누르며 얘기를 듣기만 하던 팽만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형 몬스터와 격전을 벌이고 과도한 내공을 소모한 탓에 내상이 깊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정천우의 모습이 너무 멀쩡했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동료들의 죽음에 팽만리의 상심이 컸다. 동료의 죽음 때문에 뒤틀린 감정이 정천우의 생환을 이상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마치 ‘비겁하게 도망친 것 아니냐?’라는 식의 질문이었다.

    다른 기사들도 의혹이 생겨났다. 정찰대가 몰살하는 와중에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는지 그게 의문이었다.

    비겁자!

    기사들이 정천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런 의혹이 드러나고 있었다.

    ‘씨발! 살아 돌아온 게 죄야?’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의 일에 끼어들어 개고생한 것도 억울한 판에 분위기가 더러워지니 기분이 확 상했다. 팽우룡의 주화입마를 고칠 때까지만 해도 간 쓸개 모두 내줄 듯이 하던 인간이 그랬으니 정천우는 배신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정천우가 발끈하려는 그때, 잠자코 지켜만 보던 제인이 앞에 나섰다.

    “천우 경은 최선을 다했어요. 정찰 임무의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것도, 위기에 빠진 정찰대를 위해 희생한 것도 이 사람이죠.”

    “오우거가 떼로 몰려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팽만리는 제인의 말을 듣고서도 의문을 접지 않았다.

    정천우가 진정으로 도왔다면 정찰대의 피해가 최소로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저와 천우 경이 살아 돌아온 게 못마땅하다는 의미인가요?”

    제인은 아직 부상에 벗어나지 못해서 힘들었지만 팽만리를 쏘아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그게 아니라…….”

    팽만리는 그제야 아차 하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제인은 자신이 모시는 영주의 사촌 여동생이다. 그런 사람에게 ‘왜 너만 살아서 돌아왔냐?’라고 한 셈이었다.

    “됐어요. 더 듣고 싶지 않네요. 정찰대 사람들이 모두 죽고 여섯 마리의 오우거가 남았죠. 그 흉측한 것들이 저와 천우 경에게 달려들었을 때, 전 이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전 봤어요.”

    제인의 창백한 얼굴에 한 가닥 황홀한 빛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그녀가 말을 하다가 말고서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무얼 보았다는 것인가?”

    팽선웅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제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팽선웅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뇌전의 샤벨타이거!”

    “뇌전의…… 샤벨……타이거?”

    팽선웅 백작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제인의 말을 천천히 따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눈살을 찌푸리던 팽선웅 백작은 제인의 기이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제인은 확신하는 눈빛으로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그러나 팽선웅의 얼굴 가득 불신의 빛이 흘러나왔다.

    그 옛날 벽력대제가 검으로 ‘뇌전의 샤벨타이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건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벽력대제가 죽고 나서 그것을 흉내 내기 위해 수많은 마법 무기가 만들어졌다. 정령을 가둔 정령 무기에서부터 불의 마법을 담은 검까지.

    하지만 누구도 검으로 뇌전의 샤벨타이거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팽선웅을 비롯한 하북팽가 기사들의 얼굴에 불신(不信)의 기운이 서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천우는 벽력대제와 같은 방식으로 마나를 다룬다. 실제로 확인도 했고, 그가 중원에서 왔다는 것도 믿는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흐릿하게 마나 쉐도우를 만들어 내는 정도였다.

    그걸 보았던 팽선웅이었기에 제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팽선웅은 정천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여 줄 수 있겠나?”

    “……딱 한 번뿐입니다.”

    정천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몸 상태가 엉망이다. 엉망이라는 말조차 지금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데 부족하다.

    생전 처음 보는 괴물에게 걷어차이고, 익숙하지 않은 무공을 억지로 사용한 탓에 내상이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공을 펼쳐 보라는 팽선웅의 명령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열 받아서라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 돈도 안 되는 일에 나섰다가 몸만 버리고 왔다. 그런 상황에서 비겁자로 의심받는 건 억울하다.

    ‘내가 더러워서라도 성공하고 만다.’

    뿌드득…….

    정천우가 속으로 이를 갈며 역천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러자 기사들이 각자 허리춤의 세이버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좆같네! 개새끼들, 제 놈들 목숨을 소중하다는 거냐?’

    정천우의 콧등이 한차례 실룩였다.

    말로는 한 식구라고 해 놓고 자신이 팽선웅을 공격할까 봐서 경계하고 있다. 기분이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친 척하고 팽선웅을 공격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씨발, 내가 참고 만다.”

    정천우가 인상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소!”

    “닥치시지! 나 지금 기분 안 좋아! 확 받아 버리는 수가 있어!”

    정천우가 눈에 살기를 드러내며 팽만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만리 경, 그만하게. 자네가 지나쳤어.”

    “죄송합니다, 영주님.”

    팽만리는 영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꾸짖자 고개를 숙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후우…….”

    정천우는 한 소리 듣고서야 뒤로 물러나는 팽만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달려들면 몸이 부서지건 뭐건 칼질부터 해 대려고 했다.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팽선우에게서 멀어졌다. 그제야 기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미세한 살기가 사라졌다.

    대략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걸어간 뒤에야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리를 잡은 정천우가 자신의 몸 상태부터 점검했다.

    ‘엉망이잖아? 이런 상태로 오호단문도를 펼칠 수 있을까? 미치겠군.’

    정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단전이 쿡쿡 쑤시는 게 상태가 별로다.

    내상만 그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제인을 업고서 몬스터 서식지를 이틀이나 긴장하며 움직였다. 온몸에 쌓인 피로가 도를 넘어섰다.

    이런 몸으로 오호단문도를 시전해 뇌기(雷氣)로 이루어진 호랑이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해야 한다.

    의심받는 게 더러워서라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후읍!”

    숨을 깊게 들이마신 정천우가 역천검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검날을 수평으로 만들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 끝이 살짝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그만큼 육체적으로 힘에 부친다는 의미다.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중원의 오대 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기초 무공.

    팽가의 정식 무사들에게만 전수하는 무공으로, 기초 무공이라기엔 완성도가 지극히 높다. 이것이 기초 무공으로 분류된 이유가 바로 초식의 간결함 때문이다.

    집단 전투에 투입되는 하급 무인에게 꼭 필요한 초식들로만 구성되어 범용성이 좋았다. 진법을 운용하기에도 좋았고, 난전(亂戰)에서도 유용한 도법이었으니까 말이다.

    중단세로 역천검을 겨누었던 정천우의 자세가 낮아졌다.

    “차앗!”

    정천우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튀어나왔다.

    오호단문도 제일초식 맹호수참(猛虎手斬).

    역천검이 전방을 향해 연속으로 대각선을 그려 냈다. 총 세 번의 대각선 베기가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찢어 놓았다.

    연속 베기가 끝남과 동시에 전방으로 정천우가 몸을 날리면서 머리 위로 역천검을 들어 올렸다. 역천검이 가상의 적을 향해 장작을 패듯 힘차게 내리꽂혔다.

    “흐앗!”

    바닥에 착지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기합을 동반하며 몸을 회전시켰다. 주저앉듯이 몸이 낮아지면서 검날이 크게 원을 그렸다.

    오호단문도 제이초식인 맹호폭격(猛虎爆擊)이었다.

    뒤이어서 정천우가 보법을 밟으면서 역천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맹호측격(猛虎側擊), 맹호난방(猛虎亂方), 와호노성(臥虎怒聲), 용호상박(龍虎相搏)…….

    오호단문도의 초식이 이어질수록 정천우의 역천검에 희미한 금빛이 어렸다. 흐릿하긴 했지만 팽선웅과 기사들이 그의 움직임에 집중한 상태라 볼 수가 있었다.

    크게 좌우 베기를 하던 정천우의 몸이 푹 가라앉았다. 때를 같이해 역천검에서 마나 쉐도우가 더욱 진하게 맺혔다.

    “차아압!”

    파바팡!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정천우의 역천검이 빠르게 공간을 베었다.

    제인과 함께 오우거의 포위를 뚫기 위해 사용했던 노호출격(怒虎出擊)의 초식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오오오! 샤벨타이거!”

    팽선웅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역천검을 휘두르기 직전에 정천우의 검에서 흘러나온 마나 쉐도우가 샤벨타이거의 형상으로 변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전설이…… 드디어 전설이 부활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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