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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52화 (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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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14. 전설의 부활 (2)

    “…….”

    잭슨이 멀뚱한 얼굴로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사나이의 진심을 이런 식으로 짓밟을 줄은 몰랐다.

    “너처럼 멍청한 자식을 내가 왜 데리고 다녀야 하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널 보듬어야 하는데? 지랄도 참 가지가지 한다. 왜 이렇게 띨빵한 녀석을 진우 경이 가르쳤는지 모르겠군.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형편없어서야…….”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잭슨은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이를 갈았다.

    자신은 욕을 먹어도 싸다. 감히 대들 수도 없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이 정천우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평생을 믿고 따랐던 팽진우가 무시당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 팽진우가 그를 따르라고 했기에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정작 받아들일 사람이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고 있다.

    비록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잭슨은 엄연히 기사다. 그는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정천우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놈은 정말이지 똥오줌 못 가리는 놈이군.’

    “하아…… 네놈은 차라리 멍 때릴 때가 더 나았다. 그냥 자라!”

    뻐억!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가는 머리만 복잡해질 것 같았던 정천우가 육합권의 수법으로 잭슨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혈도를 제압해 재우고 싶었지만 그런 고상한 행위를 하기에는 더러운 기분을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컥! 그르륵…….”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던 잭슨은 불의의 공격에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기절하고 말았다.

    기절한 잭슨의 마혈을 봉한 정천우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젠장, 이런 놈을 데리고 영지까지 가야 한다 이거지? 꼬여도 참 더럽게 꼬였네.”

    정천우가 혀를 차며 자리를 떴다.

    나무나 구해 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개소리를 지껄이는 바람에 괜히 기분만 나빠졌다.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온 정천우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모았다. 그동안 잭슨이 뻘짓거리 하지 못하게 마혈을 봉한 건 덤이었다.

    ***

    “ФБЙЭбД…… 치료!”

    한참 만에야 마나를 회복하고 정신을 차린 제인이 자신의 몸에 치료 마법을 걸었다.

    그것은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외상보다 내상이 더 컸기에 치료 마법을 연속으로 펼치고서도 원래의 혈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아지신 겁니까?”

    정천우는 말린 곡물로 만든 죽을 그릇에 담아 제인에게 내밀었다. 이곳에선 수프라고 불리던데, 혹시라도 고기 냄새를 맡고서 몬스터들이 다가올지 몰라 육포는 넣지 않았다.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제인은 죽…… 아니, 수프 그릇을 받아 들고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었다. 몸이 낫고 배 속에 따뜻한 음식이 들어오니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고개가 조금씩 숙여졌다.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정천우 때문이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던 일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정천우는 그녀가 음식을 먹을 만큼 몸이 회복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보았다.

    아직 빠른 이동은 불가능하겠지만 움직일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안전한 길로만 이동할 테니까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저는 저 물건 좀 해결해야겠습니다.”

    정천우가 손가락으로 한쪽에 쓰러진 잭슨을 가리켰다.

    그는 마혈을 봉쇄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움직일 수는 없는 상태였다.

    “왜 저러고 있어요?”

    “글쎄요. 일어나기 싫은가 보죠. 가서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알았어요.”

    제인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그의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지만 정천우는 이내 관심을 접었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그렇게 극심하게 변화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뭐, 그런 일이라면 나쁘진 않겠지만…….’

    정천우는 제인 역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런 정도의 미녀가 스스로 안겨 온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며칠째 자신에게 짜증만 내던 여자였으니까. 그저 순간적으로 감정 조절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잭슨의 곁으로 다가가 마혈을 풀어 주었다.

    “끄으으으…….”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

    “……이건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잭슨은 볼멘소리로 따졌다. 억울하다기보다는 분하고 슬퍼서였다.

    동료와 스승을 잃었다. 그게 자신의 실수 때문이라는 게 더 괴롭다. 그런 와중에 스승의 유언마저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보니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닥치시지?”

    “으으으…….”

    정천우가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잭슨은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불안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어리광 따윌 부릴 때가 아니다. 넌 어떻게 할 건가? 선택해라. 계속 그렇게 등신같이 멍 때리든지, 아니면 정신 차리고 나와 함께 움직이든지! 한 가지 약속하는데, 나와 함께 움직이다가 미친 짓거리 하면 일단 너부터 죽여 버린다.”

    “…….”

    잭슨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도려낼 것 같은 정천우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그가 달려들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전신을 압박하던 이상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잊지 마라. 난 다른 건 몰라도 죽인다는 약속은 칼같이 지킨다. 출발할 테니까 준비해.”

    정천우가 한 번 더 잭슨을 위협하고는 제인에게 다가갔다. 이제부턴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만이 살길이다.

    “제인 마법사님, 영지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몸은 좀 괜찮아요?”

    “그게…….”

    제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보다야 몇 배나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통이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는 정도일 뿐이다.

    “괜찮다면 제게 업히세요. 그게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잭슨 경한테 업히셔도 되고요.”

    “아니요. 천우 경이 좋아요.”

    “……네.”

    “아, 그, 그게 아니라…….”

    제인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뭔가 꼬인 느낌에 황급히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정천우는 등을 돌리고 자리에 앉아 팔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네.”

    제인은 뒷말을 삼키고 정천우의 등에 몸을 얹었다.

    그는 등에서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에 기분이 묘해졌다.

    아까는 자리를 피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지금은 좀 달라졌다. 대형 몬스터가 아닌 이상 그가 충분히 기척을 눈치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묘하게 뭉클거리는 감촉을 여유롭게 만끽하면서 정천우가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 출발합니다.”

    ***

    정천우 일행이 영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다음이었다. 몬스터의 서식지를 피해 이동하다 보니 이동로가 길어진 탓이다.

    정찰대원의 수가 많았을 때야 소수의 몬스터쯤은 조용히 처리하고 전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원이 적은 데다가 부상당한 제인, 그리고 자괴감에 빠져 싸울 수나 있을지나 의심되는 얼간이 하나가 전부인 상황이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없었던 정천우는 최대한 몬스터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목책이 보이는군요. 내려 드리겠습니다.”

    정천우가 한시름 덜었다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등에 업힌 제인을 내려 주었다.

    “정찰대다! 정찰대가 돌아왔어!”

    목책 경비대 주간조의 최고참인 샘슨이 크게 소리쳤다. 샘슨의 고함에 경비를 서던 다른 대원들이 서둘러 목책의 문을 열었다.

    “샘슨 아저씨, 별일 없었죠?”

    “나야 뭐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

    “저희가 전부예요.”

    “뭐? 왜?”

    “몬스터가 너무 많아요. 모두 당했죠. 말이 있으면 좀 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영주님을 만나 봐야 하거든요. 제인 마법사님이 많이 다쳐서 타고 가야 해요.”

    정천우가 제인을 가리키며 말하자 샘슨이 고개를 돌렸다.

    과연 제인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혈색이 좋지 않았다.

    “그래야지. 이봐! 말 좀 끌고 와!”

    샘슨이 멀찌감치 떨어진 경비대원에게 소리쳤다.

    영주성까지 급한 소식을 전할 때 사용하는 비상용 말을 끌고 오라는 의미였다.

    말을 끌고 오기가 무섭게 정천우가 제인을 말 위에 태웠다. 그러고는 제인의 뒤에 정천우가 올라탔다. 아픈 중에도 정천우가 자신을 감싸 안듯이 말고삐를 잡자 제인은 잠시지만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넌 알아서 와! 이랴!”

    정천우는 초췌한 얼굴의 잭슨에게 한마디 툭 던지고는 말고삐를 휘둘렀다.

    그로서는 정말 많이 참았다. 이틀 동안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잭슨을 데리고 오느라 열불이 치밀었다.

    생각 같아선 처음 말했던 대로 버려두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제인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겨우겨우 끌고 왔다.

    정천우의 입장에선 잭슨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사태가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잭슨의 탓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사실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고 제인이 말했고 정천우도 동의했지만, 잭슨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괴감 때문에 기력을 잃은 것이라 결국 의욕을 되찾지 못했다.

    돌아오는 동안 몬스터의 한 끼 식사거리로 만들지 않은 것만 해도 그는 정천우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다.

    “괜찮을까요?”

    “됐어요. 지금 급한 것은 영주님께 정찰대의 전멸 소식을 알리는 겁니다. 제인 마법사님도 쉬어야 하고요. 저런 얼간이 때문에 보고가 늦어져선 안 됩니다.”

    정천우가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말고삐를 더욱 세차게 휘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城)의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확대되었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정천우가 서두른 탓이다.

    원래라면 이번 정찰 임무만 대충 마무리하고 발을 빼려고 했다. 지난번에 받았던 수고비를 감안하면 딱 그만큼만 일해 주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바로 영약 때문이다.

    독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처리만 잘하면 해결될 문제다. 미약하긴 해도 영약이 내공 증진에 효험이 있는 이상 포기할 순 없는 일이다.

    정천우가 말을 몰아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을 발견한 경비병 둘이 창을 교차시키며 막아섰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크게 고함을 지르는 경비병의 목소리에 정천우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로 그렇게 말을 몰아오는 겁니까!”

    “당장 영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정찰대가 전멸했습니다. 전 영주님께 명예기사의 작위를 받은 정천우입니다.”

    정천우가 왼손에 낀 기사의 인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서 보내 드려! 제인 마법사님이시다.”

    “아…….”

    뒤에서 크로스보우를 겨누던 경비병 하나가 제인을 알아보고 서둘러 다가오며 소리쳤다.

    “들어가십시오. 비상사태다! 줄을 잡아당겨!”

    뒤에서 크로스보우를 겨누었던 병사는 정천우를 영주성 안으로 들여보내기가 무섭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로 구성된 정찰대가 전멸했다는 건 큰일이다. 정천우가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보고하도록 하려면 안에다가 알려 둬야 한다.

    창으로 정천우를 막아섰던 경비병 중의 하나가 빨간색 줄과 파란색 줄 중에서 파란색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성문의 망루 위에 샤벨타이거가 그려진 파란색 깃발이 올라가면서 요란하게 종이 울렸다.

    두두두두!

    정천우와 제인을 태운 말이 내성(內城)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외성(外城)에서 보낸 비상종 덕분인지 정천우를 태운 말이 다가가기도 전에 내성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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