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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낭인무사-27화 (27/200)
  • # 27

    Chapter 8. 기사가 되다 (2)

    “그렇게 하죠.”

    정천우는 기꺼운 어조로 말했다.

    수고비를 넉넉하게 뜯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옆구리가 좀 심하게 아팠지만 말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그전에 이것들을 먼저 회수해야 할 듯하오.”

    팽선웅 백작은 바닥에 떨어진 소환단(?)을 챙겼다. 그러는 사이, 정천우가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팽가의 기사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남은 복면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와 힘을 잃었음에도 꿈틀대며 반항하는 자로 나뉘었다.

    확실한 것은 영지에 불어닥친 혼란이 가라앉았다는 점이다.

    ‘이제 돈 챙기는 일만 남은 셈인가?’

    정천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얼마를 부를까 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사이, 멀리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팽선웅 백작이 말발굽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기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깨닫고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영주님! 영주님!”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다급한 목소리가 하북팽가의 영주관 주변을 뒤흔들었다.

    “오! 만리 경!”

    소환단을 챙겨 돌아오던 팽선웅 백작이 반가운 기색을 내보이며 손을 들었다.

    모두가 팽씨 성을 쓰는 탓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성이 아닌 이름 뒤에 ‘경’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하북팽가다. 팽씨 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충성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대단한 영광인 것.

    충성스러운 자신의 기사가 구원하러 왔다는 것에 팽선웅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커다란 체구를 가진 기사가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10명에 이르는 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팽만리.

    썬더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단장인 팽우룡과 함께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었다.

    팽만리는 말을 세우기가 무섭게 훌쩍 뛰어내려 팽선웅 백작의 앞에 섰다. 그의 온몸에 핏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위급 신호를 발견하고 달려왔습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만리 경, 나는 괜찮네. 여기 정천우 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무사할 수 있었지. 그런데 남문 수비는 어찌하고 이리도 급하게 달려온 것인가?”

    팽선웅 백작은 책망하는 기색을 담으며 팽만리를 향해 가볍게 질책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형옥과 수수가 기사들을 지휘해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지. 경은 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정리해 주시길 바라네. 나는 정천우 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

    “영주님, 호위를 데려가십시오.”

    팽만리는 정천우를 힐긋 쳐다보고는 불안해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데다가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닌 듯 보였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을 하늘같은 주군과 단둘이 놔둘 수는 없었다.

    “이분은 나의 목숨을 구하신 분이야. 만리 경은 안심해도 괜찮네.”

    “그럴 수 없습니다. 주군을 홀로 두고 어찌 제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지. 그대의 뜻은 잘 알겠네. 그럼 같이 가는 것으로 하지. 다른 기사에게 이곳의 정리를 지시하게.”

    “알겠습니다, 주군.”

    팽만리는 우직하게 대답하고는 빠르게 부하들에게 달려가 지시를 내렸다.

    “이해하시오. 저 친구가 원래 좀 고지식한 면이 있는 편이라오.”

    “괜찮습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하오.”

    팽선웅 백작은 미안해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위기는 있었지만 이토록 충성심 깊은 기사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다는 게 기쁘기 짝이 없었다.

    “주군, 지시를 마치고 왔습니다.”

    “수고했네. 그럼 정천우 님, 자리를 옮기도록 하겠소이다.”

    “네.”

    정천우는 팽선웅이 왜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역천검 때문인 게 뻔하다. 그의 눈이 벌써 몇 번이나 역천검을 힐끔거렸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방향은…….”

    팽선웅 백작의 곁에서 걷던 팽만리가 말끝을 흐렸다.

    “어쩔 수 없잖은가. 집무실이 있는 영주관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내 거처로 가는 게 손님에 대한 예의지.”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집에 가는 게 뭐가 대수라고.’

    정천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집이 무슨 금역(禁域)이라도 된다는 양 구는 게 기가 찼다. 팽만리가 황송해하면서 입을 다물자 말도 하기 싫어졌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하북팽가의 중심이자 나의 집이오.”

    팽선웅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럴 수가! 이것은…….’

    정천우는 팽선웅 백작의 기대를 버리지 않고 놀라는 중이었다.

    팽가를 상징하는 호랑이가 석상으로 조각되어 정문 좌우에 배치되었다. 중원의 호랑이와는 조금 생김새가 달랐지만 위압적인 모습인 것만은 분명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건축물의 외형이었다. 지붕에 기와를 얹은 중원의 건물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크지는 않아도 중원의 건물을 다시 보니 반가웠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게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괜한 향수(鄕愁)에 젖어들게 해 주었다.

    “멋지군요. 정말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정천우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하하하! 팽가의 본모습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 그렇게 말하곤 하오. 지붕에 얹은 저것은 벽력대제께서 특별히 지시한 것이오. 석판 하나하나를 석공이 직접 조각해서 얹었다고 하오.”

    “기와를…… 그렇군요.”

    정천우는 기와를 돌로 깎아서 만들었다는 얘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기와라는 건 점토를 틀에 찍은 다음 가마에서 구워야 한다. 그러나 절정의 무인이 그런 자질구레한 과정을 알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무식한 짓을 했을 게 뻔하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었다. 벽력대제가 얼마나 중원이 그리웠으면 건물을 저런 식으로 지었겠는가!

    “들어갑시다!”

    “충(忠)!”

    팽선웅 백작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경비병 2명이 육중한 철문을 열어 주고는 군례를 올렸다.

    건물은 밖에서 보았을 때 느낀 대로 아담했다. 그러나 내부가 잘 다듬어져 있어 정갈한 맛이 있었다.

    “저쪽으로 가십시다.”

    팽선웅 백작은 손을 펼쳐 한쪽을 가리켰다. 세 개의 건물 중에서 왼쪽에 세워진 작은 곳이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묵묵히 뒤를 따르던 팽만리가 앞으로 나섰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영주관이 공격을 받았으니 본관이라고 해서 무사할 것이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팽선웅이 가족들과 함께 기거하는 화이트 타이거 캐슬이라면 상관하지 않는다. 거기엔 경비 인력이 충분하고 기사까지 배치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는 블랙 타이거 캐슬은 다르다. 특별한 손님이 오지 않는 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같이 타 세력의 침습을 겪은 상황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다.

    ‘빠르잖아? 제법인데?’

    정천우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가는 팽만리를 바라보며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몸놀림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경공이나 경신술을 사용하는 무인들만큼은 아니어도 날렵한 움직임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상 없습니다. 들어가서 불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게! 자, 들어가십시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팽선웅 백작이 계단에 발을 올렸다.

    출입문 밖에 검은색 호랑이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분위기만 따지면 중원의 풍경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정천우는 그 정취를 만끽하며 뒤를 따라갔다.

    먼저 들어간 팽만리가 방 안에 붉을 밝혀 둔 채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시오. 만리 경은 시녀를 불러 간단하게 다과를 준비시켜 주게.”

    “예, 주군!”

    팽만리가 절도 있게 인사하고는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정천우 님!”

    “네, 영주님.”

    “말 돌리지 않고 묻겠소이다. 그 검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계시오?”

    “벽력대제라는 분이 생전에 사용하던 것이라 들었습니다. 만약 이게 진품이라면 말이죠.”

    정천우는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역천검의 검집을 두들기며 말했다.

    “확인하고 싶소이다.”

    팽선웅 백작이 흥분된 표정을 드러내며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선조의 검!

    벽력대제 팽진옥, 그 위대한 무인이 사용하던 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이 절로 일어났다. 진품이 확실하다면 하북팽가가 옛 명성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흥분이었다.

    정천우가 역천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새끼가 소심하기는!’

    정천우가 역천검을 뽑다 말고 인상을 찡그렸다. 팽만리가 긴장하면서 정천우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천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최대한 천천히 역천검을 뽑았다. 피가 엉겨 있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게 뻑뻑한 느낌이었다.

    3분의 1쯤 뽑았을 때는 아예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검신을 잡아서 빼냈다. 팽만리가 긴장하고 있어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살펴보시지요.”

    정천우는 테이블 위에 피 묻은 역천검을 올려놓았다. 그제야 팽만리가 긴장을 풀었다.

    “이것이 역천검!”

    팽선웅 백작이 한차례 마른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역천검을 두 손으로 들어서 가지고 갔다.

    라이트닝 마법을 막아 낼 당시에 나타났던 룬어는 검신에서 사라져 있었다.

    “기름과 깨끗한 천을 가져오라고 이르게.”

    “예, 주군!”

    “흐음…… 모르겠군, 모르겠어…….”

    피 묻은 역천검을 살피면서 팽선웅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부터 질리도록 보아 왔던 가짜 역천검과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주군, 말씀하신 기름과 천을 가져왔습니다.”

    팽만리가 직접 기름병과 천을 팽선웅의 앞에 내려놓았다. 같이 들어온 시녀가 차와 쿠키를 내려놓고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빠져나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팽선웅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역천검을 감상할 뿐이었다.

    퐁!

    팽선웅이 기름병의 마개를 열고는 천에 기름을 묻혔다. 역천검의 손잡이를 쥐고서 검신을 부드럽게 천으로 닦아 나갔다. 막 엉기기 시작한 피가 닦여 나가고 검신이 은빛으로 변해 갔다.

    팽선웅은 핏물을 닦아 낸 뒤에 기름기까지 완전하게 닦아 냈다. 그리고서야 천과 기름병을 한쪽으로 치우고 역천검을 세밀하게 살폈다.

    “특이할 게 없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으니…….”

    팽선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봐서는 여전히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정천우가 마법을 검으로 막아 내는 걸 보았다. 라이트닝 마법은 기사에겐 상극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보통은 마법에 당하지 않도록 마나 쉐도우로 쳐 낸다.

    하지만 당시의 정천우는 그저 검을 들이밀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마법이 무효화되었다.

    가짜가 아니라는 의미다.

    아니!

    최소한 마법검 정도는 된다는 의미다.

    어쨌든 룬어가 사라진 지금으로서는 역천검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주군, 어째서 고민하십니까?”

    “모르겠다는 말일세. 이 검이 진품이라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평범하단 말이야.”

    “진위 여부를 가리는 방법이 없습니까?”

    “방법이 있긴 하네만, 지금의 나는 곤란하네.”

    “무엇 때문입니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벽력대제 외에는 역천검에 마나를 불어넣을 수 없었다고 하네. 내가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직접 시험했을 것인데…….”

    팽선웅은 팽만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기사라곤 하지만 시험하다가 상처를 입으면 미안했던 까닭이다.

    “제가 시험해 보겠습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네. 차라리 마법사 제인을 호출하는 게 나을 듯해.”

    “마법사 제인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일 겁니다. 부상이 제법 깊어 보였습니다.”

    팽만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적 마법사와 싸우면서 그녀 역시 마나 역류로 피를 토하는 걸 보았다. 그런 상처라면 여기까지 오는 것도 무리일 터였다.

    “……할 수 없군. 부탁하네. 마나를 과하게 집어넣지 말고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주입하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군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팽선웅은 손에 쥔 역천검을 팽만리에게 건네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하겠습니다.”

    팽만리는 역천검을 건네받고서 전신의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마법검이라면 팽만리도 몇 번 경험해 보았다.

    주인 인식 마법 같은 경우엔 엉뚱한 자가 사용하려 하면 충격을 받기도 한다. 보통은 전기 충격이 발생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정도는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저 손바닥이 따가워서 짜증 나는 정도의 통증?

    “이엽!”

    지지징…….

    팽만리가 가볍게 기합을 지르며 역천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에 반응한 역천검이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빠지직!

    “크헉!”

    콰당탕! 챙그랑!

    “만리 경! 만리 경!”

    팽선웅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처음에는 괜찮다 싶었다. 그런데 역천검에서 순간적으로 누런 뇌전이 일어나 팽만리를 뒤덮었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에 팽선웅은 보았다. 역천검의 검신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룬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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