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26화 (26/200)
  • # 26

    Chapter 8. 기사가 되다 (1)

    “이게 뭐야?”

    정천우는 손에 쥔 역천검의 괴상한 변화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꼼짝없이 마법사가 발사한 라이트닝 마법에 당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몸에서 아무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천검이 마법을 막아 준 게 틀림없었다.

    “그랬단 말이지?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마법이라는 수법이 자신에게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자 자신감이 생겨났다.

    비록 관통상을 당한 옆구리가 아팠지만 이만하면 해볼 만하다. 게다가 라이트닝 마법을 막아 낸 덕분인지 역천검에 뇌전의 기운까지 덧씌워졌다.

    정천우가 내공을 끌어올리면서 복면의 마법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뇌전의 기운을 품은 내공이 더해져 역천검에서 누런빛이 더욱 크게 일어났다.

    “마, 막아라!”

    복면의 마법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마법에 의해 되살아난 데스나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망할! 생강시가 있었어.”

    정천우의 충만했던 자신감이 대번에 사라졌다.

    놈들에게 데스나이트가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자신감이 급격히 하락해 마른침을 삼키면서 긴장한 눈으로 데스나이트를 경계했다.

    생강시와 연관된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마구마구 떠올랐다.

    ‘젠장! 튀어야 하나? 생강시 상대로는 승산이 없는데.’

    갈등이 생겨났다.

    중원에서 만났던 생강시는 끔찍했었다. 뼈는 강철로 만든 것처럼 튼튼했고, 살을 베어도 금세 아물었다. 목을 자르거나 머리통을 부수지 않으면 죽지도 않았다.

    그런 괴물과 싸우려고 생각하니 망설임이 생겨났다.

    “후…… 돌겠네.”

    주변을 둘러본 정천우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자신이 도망치면 하북팽가의 무사들은 모조리 죽는다. 바닥에 쓰러져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기사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란드를 비롯한 2명의 사내 역시 잔뜩 지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빠지면 데스나이트를 막을 자가 없다.

    ‘이걸 들이받어, 말어?’

    정천우가 자신의 손에 들린 역천검을 바라보며 속으로 갈등했다.

    마법을 막으면서 흡수한 뇌전의 기운이 이글거린다.

    그의 머릿속에선 싸워 볼 만하다는 생각과 왜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중이었다.

    “어쩔 겁니까?”

    정천우는 고개를 돌려 그란드를 향해 소리쳤다. 다른 사람의 신분을 모르니 그로서는 그란드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팽가의 기사는 어떠한 위기에서도 물러나지 않소!”

    대답은 그란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바로 하북팽가의 주인, 팽선웅 백작이었다.

    “……잘났다.”

    고민이라곤 전혀 묻어나지 않는 즉각적인 대답에 정천우가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꼭 저런 인간이 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유형이다. 위기를 조금만 피해 가면 될 텐데, 융통성 없이 싸우려고만 든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왕에 도와주는 거, 화끈하게 도와주고 생색이나 팍팍 내자는 계산이 나왔다.

    이곳에서 가장 끗발이 좋은 놈이라니, 의뢰비를 팍팍 뜯어내면 그만이다.

    “젠장! 까짓것, 싸웁시다! 이놈은 어떻게든 내가 막아 볼 테니, 저놈부터 죽여요!”

    정천우가 역천검을 들어 복면의 마법사를 가리켰다.

    중원에서 보았던 생강시는 조종하는 놈을 죽이는 순간 움직임이 멎었다. 중원의 생강시나 이곳의 데스나이트나 거기서 거기라면 복면의 마법사를 노리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팽가의 명예를 걸고 우리 영지를 망쳐 놓은 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오!”

    팽선웅 백작은 분노가 담긴 눈으로 복면의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마법사는 데스나이트가 자신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여유를 되찾았다. 마법을 무효화시켰지만 그에게 공격 수단은 마법만이 아니었다.

    복면의 마법사가 정천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형 선고를 내리는 집행관처럼 느릿하면서도 단호한 손짓이었다.

    “으하하하! 가라! 가서 저놈을 죽여라!”

    복면의 마법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해치우고 영지로 돌아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어디 갈 데까지 가 보자!”

    정천우가 자세를 낮추면서 역천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상단 자세로 데스나이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생강시와 같은 존재를 상대하려면 어설픈 공격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느 정도는 방어를 포기해서라도 검에 힘을 더하지 않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가 노리는 것은 검을 쥔 데스나이트의 오른팔이었다.

    중원에서 상대해 보았던 생강시의 피부는 무척이나 질겼다. 뼈다귀까지 튼튼해서 정천우의 능력으로는 절단은커녕 반만 잘라도 성공이다. 비록 역천검에 자신이 낼 수 있는 능력 이상의 검기가 담겼다고 해도 말이다.

    ‘벤다!’

    정천우는 역천검을 고쳐 쥐며 데스나이트를 노려보았다.

    전신의 공력을 모조리 퍼부은 일격을 날린 후에 회피 위주로 데스나이트를 유인하면서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팽가의 기사들이 마법사를 해치울 때까지.

    “크르륵!”

    데스나이트는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마법에 의해 강제로 죽임을 당한 뒤에 데스나이트가 된 놈이다. 그런데도 검술 실력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지 무당파의 기수식을 잡으며 걸어왔다.

    ‘신중한 거야, 아니면 진짜 느린 거야?’

    정천우는 경계하는 눈으로 데스나이트의 행동을 주시하며 기다렸다.

    데스나이트와 정천우가 대치를 이루는 사이, 팽선웅 백작과 그 일행이 복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와라!”

    정천우는 꿈지럭거리는 데스나이트의 움직임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크워억!”

    고함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기회를 엿본 것인지, 데스나이트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때를 같이해 정천우의 몸이 움직였다. 상체를 비틀며 검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오른발을 크게 내디뎠다.

    쿵!

    오른발이 대각선 앞으로 크게 나가서는 진각(공격에 힘을 더하기 위해 발을 구르는 것)을 밟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상체가 빠르게 회전했다.

    “끼야압!”

    목이 터져 나갈 정도로 강하게 기합을 내질렀다.

    전신의 공력을 모조리 빨아들인 역천검이 그의 머리 위에서부터 대각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캬악!”

    데스나이트가 얼굴에 시뻘건 핏줄이 잔뜩 일어난 채로 마주 고함을 질렀다. 검은빛에 물든 바스타드 소드를 앞세운 데스나이트의 기세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내 바스타드 소드와 역천검이 맞부딪쳤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데스나이트와 격돌한 정천우가 이를 악물었다. 튕겨 나가는 역천검 때문에 상체가 뒤로 밀렸다. 그렇지만 허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버텨 냈다.

    격돌하면서 발생한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절호의 기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고통을 억눌렀다.

    “으아압!”

    정천우가 비명처럼 기합을 내질렀다.

    충돌하면서 입은 내상 탓에 그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대신에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역천검을 잡아당기는 데는 성공했다.

    ‘한 방!’

    정천우의 눈에 독기가 흘러나왔다.

    역천검이 반원을 그리면서 은빛의 궤적을 만들었다. 그 궤적의 끝에는 데스나이트의 팔이 있었다.

    서걱!

    데스나이트의 두 팔이 맥없이 잘려 나갔다.

    “크와악! 크륵! 캬우욱!”

    데스나이트는 팔뚝부터 잘려 나간 두 팔을 내려다보며 비명을 질러 댔다. 이미 죽은 몸이었음에도 고통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신적인 충격일지도 몰랐다.

    “응? 뭐야?”

    정천우는 뒤로 몸을 빼내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의 공격이 큰 효과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데스나이트의 두 팔은 싱겁게 날아갔다.

    “이거 가짜잖아? 괜히 겁먹었네!”

    정천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군이 데스나이트를 조종하는 마법사를 죽일 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

    “어쩐지 생강시를 너무 빨리 만든다 싶었어.”

    스각!

    정천우는 괴로워하는 데스나이트의 목을 역천검으로 간단히 날려 버렸다. 강적이라고 예상했던 괴물이 너무나도 쉽게 해결되니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정천우는 역천검에 묻은 시커먼 피를 털어 내고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이 또?”

    정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복면인 마법사가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전격계의 마법을 사용하려는지 손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부상이 심각한 팽가의 기사들은 한 명이 더 많음에도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런 상태에서 마법에 당한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다.

    정천우의 손이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에 들어갔다. 피가 엉겨 붙은 드로잉 나이프가 손에 쥐어졌다.

    파웃!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면서 드로잉 나이프가 정천우의 손을 떠났다.

    “ЭФДЙ…… 아악!”

    주문을 외우던 복면의 마법사가 드로잉 나이프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드로잉 나이프가 박힌 왼쪽 어깨를 오른손으로 감싼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선 상처를 입어도 악착같이 싸우는 게 기본이다. 저렇게 움츠리는 건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행동이다.

    정천우의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가 걸렸다.

    “이, 이게 갑자기! 어억! 데스나이트! 나의 데스나이트가! 이럴 수가…….”

    복면인 마법사가 괴로워하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드로잉 나이프가 날아온 방향을 보다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데스나이트가 팔과 목이 잘린 채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데스나이트가 망가질 수 있지?”

    복면인 마법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데스나이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그가 속한 영지의 기사 전력을 반이나 희생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허무하게 파괴되다니,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복면인 마법사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천우는 역천검을 들고 복면인 마법사에게 다가서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이내 오만상을 찌푸렸다.

    단숨에 해치우려고 했는데 옆구리의 상처가 말썽이었다. 무리한 동작을 해내느라 다시 피가 흘러내렸다.

    “제길, 몸뚱이가 남아나질 않겠네.”

    “네 녀석이 내 데스나이트를 저렇게 만들었느냐!”

    “그럼 누가 했겠냐? 어디 짝퉁을 만들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지랄이야!”

    정천우는 상처 주변의 혈도를 다시 눌러 가며 코웃음을 쳤다.

    “짝퉁? 그게 무슨 개소리냐! 네놈을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

    복면의 마법사가 분노해 소리쳤다.

    이번 임무는 실패다. 자신과 함께 이번 작전을 수행했던 대장의 실력이나 정천우나 비슷하다. 그건 아까 둘이 싸울 때 확인했다.

    그런데도 정천우는 데스나이트를 처치했다. 복면인 대장의 실력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건만.

    강철 같은 피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마나!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그게 바로 데스나이트라는 존재다. 무시무시함의 대명사인 데스나이트가 죽었다는 건 제대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인데…….

    “죽이겠다고? 날? 이 자식이 아직 분위기 파악 못하네?”

    정천우는 옆구리에 흐르던 피가 멎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법사를 향해 이죽거렸다.

    “건방진 놈! 이놈을 당장 해치…… 이런…….”

    “저거 바보 아냐?”

    “이, 이…… ЁЭФДЙ…….”

    복면의 마법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켜 줘야 할 기사들이 팽가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의 손에서 스파크가 일어난 순간, 정천우가 빠르게 쇄도해 들어갔다. 검 대신에 오른 주먹이 쳐들렸다.

    복면의 마법사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주문을 완성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정천우가 한 박자 빠르게 주먹을 뻗었다.

    퍽!

    우직!

    주문을 외우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마법사의 입에 정천우의 주먹이 박혀 들었다.

    “크아악! 우어어어!”

    복면의 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부러진 이가 시뻘건 선혈과 함께 바닥에 후두둑 뿌려졌다.

    정천우는 마법사가 쓰러지는 순간 발을 들었다.

    “얍삽한 놈! 죽어!”

    퍽! 퍼버벅!

    “컥! 아욱! 사, 살려…… 크악…….”

    복면의 마법사가 죽는다고 소리 질렀지만 정천우의 발길질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지만 내공이 담긴 발길 앞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발길질이 이어질수록 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 점점 가늘어졌다.

    “망할 자식! 후와, 속이 다 시원하네.”

    정천우는 발길질을 멈추고 넝마가 된 복면의 마법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이, 가까스로 2명의 복면인을 해치운 팽선웅 백작이 다가왔다.

    “혹시 죽였소?”

    “죽이진 않았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오. 늦었지만 귀하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바요. 나는 하북팽가의 영주 팽선웅이라고 하오.”

    팽선웅 백작은 정중한 태도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천우라고 합니다. 저도 원하는 게 있어서 도운 일이었죠. 뭐, 위험한 물건인 것 같지만요.”

    정천우는 바닥에 떨어진 소환단을 쳐다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건 소환단이 아닌 것 같았다. 영약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란드를 따라왔지만 헛수고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 일은 부하들에게 맡기는 것으로 하고,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소.”

    팽선웅은 정천우의 역천검을 내려다보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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