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4화 (4/200)
  • # 4

    Chapter 2. 역천검(逆天劍) (1)

    중원에는 유명한 무기들이 있다.

    명검으로 알려진 간장(干將)과 막사(莫邪), 그리고 보도(寶刀)로는 화룡도(火龍刀)와 무극도(無極刀)가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당대의 뛰어난 무인들이 애용했다.

    이들 말고도 다른 의미에서 유명한 병기들이 있는데, 대부분은 요기(妖氣)나 사기(邪氣)를 뿌려 대는 것들이다.

    이런 종류의 병기들은 주인의 정신을 지배해 광인(狂人)으로 변하게 한다.

    중원에 떠도는 유명한 병기 중에서 최악으로 알려진 병기가 있는데, 그것은 한 자루의 검이다.

    역천검(逆天劍).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검이라고 알려진 그것은 괴이한 소문이 뒤따르는 병기다. 역천검을 소지한 주인들은 하나같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의 무림맹주인 옥진영이 역천검의 주인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역천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바닥에는 역천검이 꽂혀 있었지만 옥진영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졸지에 무림맹주를 잃은 중원은 사파 연합의 공격에 한동안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그렇게 괴이한 사연을 담은 역천검이 지금 한 사람의 손에 쥐여 있었다.

    “아가씨, 포기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위진충은 바닥에 놓인 역천검을 씁쓸한 눈으로 쳐다보며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아버님께서 실종되신 것에는 이것이 관련되어 있어요.”

    진미령은 금방에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역천검을 쓰다듬었다.

    역천검의 형태는 중원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검날과 손잡이가 통짜로 만들어졌고, 기이한 글자가 검신의 중앙에 일직선으로 음각되었다.

    분명 잘 만들어진 검이었다. 비록 중원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만든 검이었지만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진철운은 역천검을 가지고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역천검의 기이한 저주가 다시 벌어진 것이다.

    “어째서 역천검의 주인들이 사라지는 것인지, 아버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알아야겠어요. 이대로는 억울해서라도 참을 수 없어요.”

    진미령은 침울한 어조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저주를 밝히기 위해서 남궁세가로 가는 중이다. 천하제일의 머리를 지녔다는 남궁현현에게 역천검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남궁현현은 진법과 기문둔갑에도 조예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그 수준이 제갈세가를 뛰어넘는다 하니 남궁현현이라면 역천검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다.

    “문주님을 생각하는 아가씨의 마음은 알지만 이건 무모합니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놈들이 우릴 쫓고 있습니다. 목적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위진충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역천검 위에 손을 얹었다.

    그로서는 답답한 마음뿐이다.

    진선문(眞仙門)은 강호의 일에 관여하던 문파가 아니었다. 역천검을 고이 창고에 모셔 두었다면 강호에 나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상한 글자가 새겨진 검이 있다!

    진선문의 몇몇 사람들에게서 흘러나간 이야기가 흉측한 살귀(殺鬼)들을 불러들였다.

    진선문의 불행은 그렇게 역천검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엔 진선문의 식솔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급기야 문주의 부인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결국은 문주까지 실종되었다.

    진선문의 사람들은 이게 다 역천검의 저주라고 믿었다.

    그러나 저주 따위가 아니었다.

    사라졌던 식솔들의 시신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문주의 부인은 복합적인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역천검의 저주에 걸린 사람,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문주 진철운뿐이었다.

    진미령은 다 무너진 진선문을 나섰다. 진선문 안에 있는 게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역천검의 비밀을 밝히겠다며 남궁세가로 향한 순간, 적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목적은 역천검의 탈취였다.

    “이제 와서 포기하라는 건 너무하잖아요. 우린 대체 뭘 위해서 살아온 거죠? 이까짓 검이 뭐라고…….”

    진미령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이까짓 검 한 자루 때문에 진선문이 풍비박산이 났다. 억울해서라도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진선문의 피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아가씨마저 위험에 처한다면 저는 먼저 가신 분들을 저승에서 어찌 뵈어야 할지…….”

    “백부님이 염려하는 바는 알아요.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지 않겠어요? 역천검을 내주면 끝일까요?”

    진미령은 회의적인 목소리로 역천검을 내려다보았다.

    악랄한 수단까지 동원하여 진선문을 망가뜨린 집단이다. 역천검을 넘겨봐야 그런 자들이 곱게 물러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 우리가 이렇게 핍박을 당하는지, 역천검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겠어요. 이제껏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요.”

    진미령은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힘 있게 말했다.

    자신과 진선문이 변괴를 겪는 건 역천검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믿어 왔다. 그렇지 않다면 더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심기를 어지럽혀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위진충은 한풀 꺾인 얼굴로 진미령에게 사과했다.

    진선문은 사실상 끝났다. 적의 이목을 흐리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사람들마저 뿔뿔이 흩어 놓았다. 사정이 이런데 역천검을 포기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단지 진선문의 마지막 후손인 진미령이 위험에 빠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위진충의 충심이었을 뿐이다.

    “아니에요. 제가 더 미안해요. 그만 주무세요. 내일부터는 바빠질 거잖아요.”

    “알겠습니다. 편안히 주무십시오, 아가씨.”

    위진충은 눈물을 닦아 내는 진미령을 두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고 지나갔건만 답답한 마음은 더욱 커졌다.

    ***

    다음 날.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여기부터 따로 행동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정대로 남궁세가까지 갔다가 복귀하시면 됩니다. 약속드린 의뢰비에 조금 더 넣었습니다.”

    위진충은 날이 밝자마자 낭인들을 모아 놓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약속한 의뢰비가 든 주머니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사실 낭인들이 약속대로 남궁세가로 가든 그냥 돌아가든 중요치 않았다.

    자신을 쫓는 의문의 집단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위진충의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진선문의 무복이 아닌 일반 낭인의 옷이었다. 진미령이나 남궁석 또한 일반 낭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헉!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정천우는 진미령의 얼굴을 보고는 속으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낭인으로 분장해야 하기에 진미령은 면사를 벗었다. 일부러 흙을 발라 미모를 가리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천우의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재미있는 사람이었는데…….’

    진미령은 자신을 쳐다보며 눈을 껌뻑이는 정천우를 보자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사람을 잃고 우울해져 있었는데 정천우와 화의룡의 너스레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어제 위진충과 나누었던 대화.

    저들이 남궁세가를 찾아가는 동안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진선문을 공격하는 의문의 적들은 강하고 잔인하다. 남궁세가에 가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진미령의 얼굴에 수심이 짙어졌다.

    입가에 은은하게 맴도는 그녀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느낌을 주었다. 짙은 그녀의 한숨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측은한 마음을 들게 하는 마력이 숨어 있었다.

    ‘뭐지? 저 미소는…….’

    정천우의 멍했던 얼굴이 안타까움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에게 미소 짓는 진미령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가더니 마침내는 가슴이 시릴 만큼 처연하게 바뀌었다. 그 모습이 정천우의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했다.

    아련한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는 처연한 미소였다.

    결정적으로…….

    ‘아름답다!’

    정천우가 변장한 그녀의 얼굴에서 느낀 최종적인 감정이 그거였다. 저런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뭐 해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예쁘긴 더럽게 예쁘네요. 그렇죠?”

    “그러게.”

    화의룡의 말에 정천우는 이내 잡념을 털어 내고 건네받은 주머니를 털었다. 금자 스물다섯 냥이었다.

    “한동안 쉬어도 되겠네요.”

    “자식은, 어떻게 된 놈이 쉴 생각부터 하냐? 그러다 버릇 된다.”

    “다 늙은 영감처럼 왜 그렇게 잔소리가 심해요? 뭐, 어쨌든 이번엔 대형이 틀렸네요. 그래서 다행이긴 하지만요.”

    화의룡은 수상하다던 정천우의 예감이 빗나갔다는 것에 안도하며 기분 좋은 얼굴로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틀렸으면 좋은 거지 뭘 그래? 어쨌든 한 건 했으니 돌아가거든 술이나 한잔하자.”

    정천우는 진미령 일행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시원섭섭한 느낌이었다.

    다시 못 본다는 게 아쉬운 여자다.

    뭔가 미심쩍기는 해도 어쨌든 다른 남자의 여인이다. 임자 있는 여자는 애초부터 쳐다보지 않는 게 정천우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슴 저리도록 진하게 남는 아쉬움과 심장의 떨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마지막의 그 가슴 저리게 하던 미소 때문인가…….

    정천우는 애써 아쉬움을 달래며 기억에서 진미령을 지우려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죠. 제가 좋은 데 알아 놨…….”

    화의룡이 기분 좋은 얼굴로 말하던 순간이었다.

    쉬이익! 퍽!

    “으억!”

    “의룡아! 숙여!”

    정천우가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며 화의룡의 몸을 잡아끌어 몸을 낮추게 했다.

    화의룡의 팔에 수리검이 박혀 있었다. 사방에서 파공음과 함께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의룡아! 괜찮아? 독은?”

    고통스러워하는 화의룡을 살피던 정천우가 박도를 뽑아 들었다.

    “큭! 다행히 독은 없는 것 같아요.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나라고 알겠냐? 일단 튀어야겠다.”

    정천우가 자세를 한껏 낮춘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이 포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느슨한 곳은 있을 거라 믿었다.

    “크억!”

    “으아악! 암기!”

    “저, 적이다!”

    “자세 낮춰! 싸울 준비 해!”

    희희낙락하며 돈을 세던 낭인들이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주변의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정천우가 허둥대는 낭인들 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싸운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금은 싸움보다 도주로를 찾는 게 더 급하다.

    피이잉!

    정천우가 도주로를 찾아 주변을 살피는데 무언가가 파공음을 내며 살아왔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박도를 휘둘렀다.

    캉!

    “큭! 빌어먹을! 암기에 내공이 실렸어.”

    정천우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수리검을 쳐 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박도로 쳐 냈음에도 은은하게 손아귀가 저렸다. 제대로 무공을 단련한 무인이란 의미였다.

    “의룡아! 따라와!”

    정천우는 숲을 향해 뛰었다. 낭인들과 떨어지는 편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숲이라면 그가 몸을 숨기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낭인이란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존재.

    저들과 함께해야 할 의리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무조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게 살아남는 지름길이다. 감상이나 후회 따윈 살아남고 나서 해도 충분하다.

    “비켜!”

    숲을 향해 달리던 정천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복면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복면인의 손에는 수리검이 들려 있었다.

    복면인을 향해 박도를 힘차게 뿌렸다.

    초식도 뭣도 아니다. 실전에서는 삼류 무공의 초식 따위 필요 없다. 본능적인 공격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런!”

    복면인이 당혹성을 흘렸다.

    낭인이 자신에게 달려들 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자신이 던진 수리검이 막힐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급하게 협봉검을 뽑았다. 머리를 노리고 횡으로 날아드는 박도를 막아 갔다.

    차앙! 빡!

    정천우는 복면인이 박도를 막는 틈을 타서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억! 죽……!”

    정강이를 울리는 고통에 복면인이 인상을 구겼다.

    뻐걱!

    대치하던 복면인의 머리통에 화의룡의 낭아곤이 틀어박혔다.

    “잘했어! 뛰어!”

    정천우가 화의룡을 칭찬하며 몸을 날렸다.

    만약 화의룡이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의외의 공격이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예, 대형!”

    화의룡이 긴장된 얼굴로 대답하며 경공을 발휘했다. 두 사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도망치는 그들의 등 뒤로 낭인들의 비명이 연달아 들려왔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뒤로하고 둘은 죽을힘을 다해 경공을 발휘했다.

    “여기도 아닌가?”

    “예, 대주. 낭인들인 모양입니다.”

    복면의 중앙에 붉은 점이 찍힌 복면인의 무심한 듯한 말에 복면에 푸른 점이 찍힌 인물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진선문이라고 했던가? 참 어지간히도 성가신 놈들이야.”

    “처음 진선문을 나섰을 때 처치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게 참 아쉽습니다.”

    푸른 점의 복면인은 아깝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본문에 내분이 일어날 줄은 우리도 몰랐으니까 말이야. 잠깐…….”

    붉은 점의 복면인은 무심한 어조로 대답하다가 눈에 이채를 발했다. 그러고는 땅에 새겨진 발자국들을 세심하게 살폈다.

    “3명이 빠져나갔어. 이들이 전부가 아니야.”

    “쫓으시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으응? 왜 한 명이 비는 거지?”

    붉은 점의 복면인이 고개를 돌려 푸른 점의 복면인을 향해 명령을 내리려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푸른 점의 복면인은 동료들의 수를 세어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말로 하나가 비었다. 분명히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복면인들은 서른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물아홉 명이었다.

    “찾아!”

    붉은 점의 복면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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