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대륙의 낭인무사-3화 (3/200)
  • # 3

    Chapter 1. 낭인 정천우 (3)

    ***

    여행은 순조로웠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 흔한 산적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사람이라는 젊은 남자와 위진충은 가끔 불안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동하는 경로도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일부러 산길만 골라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쩌다 마을이 나타나면 위진충이 여자의 곁에 남고, 젊은 남자가 낭인들 한두 명을 데리고 나가 음식을 장만해 온다.

    그래서 더 이상하다.

    말대로라면 젊은 남자…… 그러니까 남궁석이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의 남편 될 사람이다. 위진충은 남궁세가의 무인이다.

    당연히 남궁석이 여자의 곁에 남고 위진충이 음식을 구해 와야 한다. 그런데 하는 짓은 정반대였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또 뭐가 수상해요?”

    정천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화의룡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인상을 찌푸렸을망정 허투루 넘어가진 않았다.

    낭인의 일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잘해 온 사람의 말이다.

    같은 하류 인생이지만 하오문과 교류가 거의 없는 낭인이다. 정보력이 부족하기에 감(感)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낭인 생활을 팔 년이나 하면서도 죽지 않았던 것은 정천우의 감이 좋다는 의미다. 그러니 화의룡으로서는 정천우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화의룡도 고개를 내저었다. 여행하는 내내 지극히 평온했으니까 말이다.

    “어휴…… 제가 대형이었으면 낭인 때려치우겠어요.”

    화의룡이 키득거리면서 정천우를 바라보았다. 또 그의 의심병이 도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 돈 벌기 이렇게 쉬운 일이 또 어디 있다고?”

    “낭인 일이 쉬워요?”

    정천우의 말에 화의룡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뢰가 없으면 굶어야 하고 굶지 않으려면 지저분한 의뢰라도 받아야 하는 게 바로 낭인이다. 골치 아픈 일이 걸리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때도 있다.

    차라리 농사꾼이나 사공을 하고 말지, 낭인은 정말 할 짓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돼먹었기에 쉽다고 하는지 화의룡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낭인 일에 기술이 필요하기를 해, 아니면 목돈이 필요하기를 해? 몸뚱이만 튼튼하면 할 수 있잖아.”

    “돈 많이 모았다면서요?”

    “버는 족족 은하전장에 넣어 두기야 했지.”

    “맨날 수상하다고 의심하는 거 안 지겨워요? 이번 기회에 때려치우고 장사 같은 거 하시죠.”

    “인마, 내가 물건 볼 줄 알아야 장사를 하지. 돈으로 돈 벌긴 틀린 놈이야, 내가. 그러니까 지금 젊었을 때 바짝 벌어야 늙어서 후회 안 하는 거야.”

    “예, 예. 만수무강하세요.”

    “자식이? 인마, 그렇지 않아도 올해까지만 하고 때려치울 거야.”

    “응? 아깐 낭인 일 계속하실 것처럼 그러시더니?”

    “인마, 나도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하겠냐? 올해는 장가가야지.”

    정천우는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눈코입 제대로 붙은 그럭저럭…… 아니, 미인 소릴 듣는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게 그의 목표다.

    그러기 위해선 돈이라도 많아야겠다는 생각에 전장에 돈을 맡기기 시작했다.

    팔 년 동안 악착같이 모았다. 지금은 은자로 삼만 냥이 넘는 돈이 쌓여 있다.

    낭인 생활 접고, 괜찮은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작은 가게나 할 생각이었다. 가게는 여자한테 맡기고 자신은 사냥하거나 약초를 캐러 다닐 생각이었다.

    낭인 생활을 하면서 사냥 기술도 제법 괜찮아졌고 약초와 독초를 구분할 정도의 실력은 된다.

    큰돈은 못 벌겠지만 욕심을 버리면 그럭저럭 처자식 굶기지 않고 살 자신은 있었다.

    문제는……

    “여자는 있어요?”

    “……나쁜 자식!”

    정천우는 인상을 굳혔다. 그의 얼굴에 상처받았다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쿡!”

    정천우가 화의룡을 째려보는데 옆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 야반도주 의뢰의 주인공인 진미령이었다.

    정천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언제 웃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에효…… 그래, 새꺄. 넌 여자 있어서 좋겠다.”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요. 음식 잘하죠, 마음씨 곱죠, 말하는 것도 예쁘게 잘…….”

    “대신 뚱뚱하지.”

    “……치사하게.”

    이번에는 화의룡이 울 듯한 얼굴로 정천우를 노려보았다.

    그렇다.

    화의룡이 사귀는 여자는 다 좋은데 외모가 엉망이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술에 취해서 자는 방에 여자가 쳐들어가 덮쳤단다. 화의룡이 극구 부인하지만 그와 사귀는 여자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

    “푸흡…… 음, 음…….”

    화의룡의 울 것 같은 표정에 또다시 진미령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정천우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언제 웃었느냐는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정 대형, 여자는 생긴 게 전부가 아니죠.”

    “자식이 삐지기는. 알았어, 인마. 그러게 가뜩이나 여자 안 생겨서 고민하는데 왜 건드려?”

    “쳇! 그렇다고 발끈해요? 사나이가 쪼잔하게.”

    “그래, 인마! 나 쪼잔해! 됐냐?”

    정천우와 화의룡은 그렇게 투덕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잘 아는 사람과 함께한 덕분에 여행의 지루함을 덜 수 있어서 두 사람 모두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말싸움도 한숨 돌리면 잊어버릴 농담이었다.

    “자! 오늘은 이쯤에서 쉬었다가 내일 날이 밝으면 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위진충이 앞으로 나와 낭인들을 세웠다. 낭인들은 살았다는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위진충이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산길인데 서두르기까지 하니 낭인들에게는 벅찬 강행군이었다.

    느긋한 여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낭인들이 불만을 토로하자 위진충이 금자를 더 얹어 주었다. 불만은 봄날에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졌다.

    “자, 자! 서두릅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잘 것 아니겠소?”

    정천우는 낭인들을 재촉했다. 낭인 중 한 명은 벌써 나귀의 등에 실린 물통을 내리고 있었다.

    빨리 저녁을 먹고 자 두어야 내일 이어질 강행군을 감당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운기를 해 둬야 몸이 버티지, 지금처럼 무리하게 계속 움직이다가는 누구 하나 탈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정천우는 숲으로 들어갔다. 땔감을 찾기 위해서다. 말라 죽은 나무가 땔감으로는 최고다.

    “좋은데?”

    벼락에 맞아 죽은 나무를 발견한 그는 허리춤에서 박도를 뽑아 들었다.

    도끼가 있으면 좋겠지만 낭인인 그는 도끼든 박도든 가리지 않았다. 핑계 김에 전륜도법의 기수식을 잡고 가볍게 휘둘렀다.

    콰직!

    “이런…… 안 되겠네.”

    정천우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벼락 맞은 나무는 너무나 바싹 말라 있어서 도법을 연계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다. 너덧 번은 쓱쓱 휘두를 생각이었는데 단번에 툭 부러져 나갔다.

    “응?”

    정천우는 물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들려오긴 했지만 멀지 않은 곳에 물이 있다는 증거다.

    나무를 해 놓고 물통을 채울 겸 간만에 몸이나 씻으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웃차! 가벼워서 좋네.”

    발길질 한 방에 쓰러진 나무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일반인이라면 버거운 무게였겠지만 내공을 수련한 그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우와! 무식하게도 해 오셨네!”

    화의룡은 정천우가 끌고 오는 나무를 발견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겼다. 저만한 양이라면 하룻밤 보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이봐! 물통 좀 줘! 물 떠 오게.”

    커다란 솥을 내려 물을 붓는 낭인에게 정천우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정천우의 손에는 수건으로 사용하는 천이 한 장 들려 있었다.

    “아이고, 형님이 뜨러 가지 않으셔도…….”

    “뭐, 겸사겸사 씻고 오려고. 식사나 잘 준비해 줘.”

    “고맙습니다, 형님. 이왕이면 꽉꽉 채워서…….”

    “알았어, 알았어. 빨리 줘.”

    일부러 젊은 사람들로 골라서 데려온 탓에 낭인들의 나이는 많지 않았다. 이번에 함께하는 낭인 중에서 정천우의 나이가 일행의 중간쯤은 된다.

    정천우를 모르는 낭인들은 없다. 그래서 젊은 낭인은 그의 무례한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낭인들은 원래 나이보다 경력과 강한 힘이 대접받는다. 그러니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정천우가 대형 소릴 듣는 것이겠지만.

    ‘응?’

    정천우가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통을 들고 냇가로 갔을 때는 선객이 있었다.

    “씻으러 오셨습니까?”

    “예. 물도 받아야 하고, 이왕 온 김에 씻고 가려고 합니다.”

    정천우는 위진충의 말에 업무용 미소를 지어 주면서 물통에 물을 담았다.

    물을 다 채운 뒤 정천우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는 시냇물 안에 들어갔다. 때마침 위진충은 다 씻고 시냇물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낭인들 사이에서 대형이라고 불리시던데, 유명하신가 봅니다.”

    위진충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천우에게 말했다.

    낭인들이 정천우를 향해 존경 비슷한 감정을 보이는 게 신기해 보였다. 낭인들이 은연중에 그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거칠고 제멋대로인 낭인들에게 존경받는 게 부러운 건 아니다. 그러나 정천우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조차 그를 대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고서 뭔가 남다른 게 있는 사람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하!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다 보니 절 알아보는 것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위진충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정천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물 밖으로 나갔다.

    ‘뭐지? 이거 찜찜한데…….’

    정천우는 위진충의 몸을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몸은 풍기는 분위기만큼이나 대단했다.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었고 군살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저 몸만 봐도 그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정천우가 불안해하는 것은 위진충의 등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오래된 상처가 아니다.

    상처에 대해 낭인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걸핏하면 동네북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게 낭인의 삶이니까.

    위진충의 상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정천우가 판단했을 때, 길어 봐야 열흘 이내에 만들어진 상처로 보였다.

    내공을 사용하는 무인은 신진대사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두 뼘에 이르는 상처를 내공으로 보호하면서 치료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하지만……

    ‘서둘러 꿰맨 상처야.’

    정천우가 심각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상처를 꿰매 놓은 솜씨가 엉망이다. 전문가가 아니라 급한 대로 상처만 봉했다는 의미다. 그러고 난 뒤에 위진충이 내공을 사용해 강제로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치유한 것이 분명하다.

    열흘 이내에 만들어진 상처.

    저만한 상처를 내공까지 사용해 억지로 치료했어야 할 만큼의 이유.

    정천우의 이마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야반도주를 했다는 남녀의 어색한 태도와 이상한 주종 관계까지…… 의문투성이였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하나는 제가 들고 가지요.”

    “예, 감사합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정천우는 물로 씻으며 고개를 숙여 주었다.

    위진충이 물통을 들고 멀어지자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수상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기분이었다.

    “조심해야겠어.”

    정천우가 서둘러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서는 벗어 둔 옷을 차려입었다.

    가죽 물통을 등에 메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가가기 전부터 바람을 타고 음식 냄새가 흘러왔다. 허기가 지는 걸 느끼며 정천우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딱 맞춰서 왔네요?”

    “잘 먹어야 이 몸뚱이를 오래 써먹지.”

    정천우는 가죽 물통을 내려놓으면서 화의룡의 말을 받아 주었다. 커다란 솥에 죽처럼 끓고 있는 음식을 퍼서 그릇에 담고는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건량(말린 국수나 떡, 고기 따위의 건조 음식)을 물에 넣고 끓인 음식이다. 고기가 들어가서인지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이 났다.

    낮 동안에는 이동하느라 걸어가면서 건량을 생으로 뜯어 먹지만 노숙할 때는 이렇게 끓여서 먹는다.

    “의룡아.”

    “예, 대형.”

    음식을 먹으면서 정천우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화의룡의 눈빛이 달라졌다. 둘 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정천우가 이런 표정일 때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아는 화의룡이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다. 저런 표정일 때는 위기감을 느꼈을 때가 확실하다.

    “조심해라. 위험할 것 같다.”

    “언제쯤…….”

    “그건 나도 알 수 없어. 어쨌든 조심해. 항상 칼 잘 들고 다니고. 알았지?”

    “대형도 조심하세요.”

    “그래.”

    두 사람은 서로의 안전을 염려해 주며 음식을 천천히 그리고 많이 먹었다.

    화의룡이 먼저 일어나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정천우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위험하다고 했으면 진짜로 위험한 거다. 생존에 관련된 것이라면 정천우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

    화의룡은 암기를 정비하고 애병인 낭아곤을 세심하게 점검했다. 장비를 모두 점검한 뒤에 정천우의 곁으로 갔다.

    그가 생각했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거기다.

    낭인 생활을 팔 년이나 하고서도 살아남은 남자, 숱한 의뢰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 돌아온 남자.

    불멸(不滅)의 낭인.

    낭인촌의 사람들은 정천우를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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