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7화 (117/118)
  • [■] 마지막은 영화처럼 말이지 [■]

    ─────

    이지혁이 김다현에게 건넨 검.

    일반인에 비해 근력적 측면으로 크게 차이가 없는 김다현이 마왕의 단단한 육체를 가를 수 있게 해준 마검.

    그 검이 지금 알파의 손에 들려 있었다.

    콰득!

    무기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지는 법. 알파의 손에 쥐어진 마검은 김다현의 손에 들려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바르바체의 육체는 그 무엇보다 단단했다. 마검보다도 말이다.

    살짝 박혀 들어간 마검이 전력을 다한 알파의 힘과 더없이 단단한 바르바체의 육체와의 충돌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져 나간다.

    마검이 부러지는 그 순간!

    "이 벌레 같은 놈이!"

    바르바체가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알파는 오히려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륙마저 갈라 버릴 것 같은 바르바체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달려든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

    혼신의 힘을 다한 알파의 일격이 바르바체의 허리에 꽂혀 있는 마검의 날에 틀어박혔다.

    콰아아아앙!

    폭발.

    그리고 산화.

    알파의 일격은 헛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바르바체의 육체라 한들 마왕의 경지에 도달한 유일한 인간이 모든 것을 담아 내지른 일격마저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다.

    동강 난 마검의 날이 바르바체의 척추를 가르고 들어갔다. 이지혁이 아닌 이가 바르바체에게 가한 최초의 일격이자,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커헉!"

    바닥에 나뒹군 알파가 피를 토했다.

    '살아 있군.'

    당연히 죽어야 할 일격을 맞았는데 어째서 살아 있는 걸까?

    알파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없다.

    가슴 아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일직선으로 잘려 나갔다.

    너무도 예리한 일격이기에 오히려 살아남을 수가 있던 것이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하체가 모든 충격을 감당했다.

    어차피 이 몰골로 오래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쿨럭!"

    알파의 입으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아래로도 피가 줄줄 새어나 오고 있어서인지, 피가 그리 많이 역류하지는 않는 듯했다.

    "이 빌어먹을……."

    휘청이는 바르바체를 보며 알파가 이죽였다.

    "온다, 바르바체. 너를 지옥으로 데려갈 사신이 말이야."

    "큭?"

    순간,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가를 깨달은 바르바체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선택은 이미 조금 늦어 있었다.

    붉은 눈.

    고개를 돌린 그가 본 것은 활활 불타고 있는 붉은 눈이었다. 세상의 모든 증오를 모아놓은 것 같은 그 눈을 보는 순간, 바르바체의 육체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하나…….

    욱씬!

    척추에 틀어박힌 검이 그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상처다.

    조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상처. 다른 이들에게는 치명상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그저 잠시 움직임을 더디게 만드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그 상처가 이 순간 모든 것을 갈랐다.

    "바르바체에에에에!"

    이지혁의 우수가 바르바체의 입안으로 틀어박혔다.

    완벽한 육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을 모아 만든, 갑피를 두른 듯한 육체.

    하지만 그도 생물인 이상 신체 내부까지 그만한 강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닥까지 끌어모으고 또 끌어모은 혈기가 바르바체의 육체 내부에서 폭발한다.

    콰아아앙!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폭음과는 달랐다. 억눌린 듯 완전히 터져 나오지 못하는 소리.

    바르바체의 몸속에서 모든 것이 터지는 소리였다.

    무사하지 못했다.

    이지혁도, 바르바체도.

    바르바체의 입안으로 밀어 넣은 이지혁의 팔은 어깻죽지부터 터져 나갔다. 뜯겨 나간 어깨를 움켜쥔 이지혁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바르바체는 입으로 새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그대로 넘어갔다.

    "커헉!"

    하지만 육체 내부에서 터진 충격으로도 바르바체를 완전히 쓰러뜨리기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지긋지긋한 내구력.

    연신 입으로 검은 피를 토해낸 바르바체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이지혁! 이지혀억! 이지혁!"

    바르바체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끝의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구나! 끝까지!"

    영혼을 토해내는 듯한 바르바체의 절규에도 이지혁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뜯겨 나간 팔이 있던 자리를 움켜잡은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여주마! 이제 끝을……."

    "바르바체."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낮았다.

    무감정하면서도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래, 끝났다."

    이지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끝났어."

    바르바체는 순간 오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냐?'

    이지혁의 눈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아니.

    조금 전 그가 보았던, 이성을 잃고 오로지 파괴만을 움직이던 그때의 눈으로.

    그제야 바르바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지혁은 그의 내부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다. 아마 지금 그의 몸속은 내장 조각 하나 멀쩡한 구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지혁은…….

    우우우우우웅.

    이지혁의 육체 주변이 붉은 혈기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흡수한다.

    자신이 상처 입힌 영역의 마력을.

    바르바체의 육신에 가득 차 있던 마력이 지금 이 순간 이지혁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끝이다."

    너도, 그리고 나도.

    이지혁의 얼굴에는 너무도 많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치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 순간 모두 분출해 내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바르바체가 허탈하게 웃었다.

    "…끝까지 사람 짜증 나게 만드는 놈이로군."

    그 순간, 이지혁이 혈기를 흩날리며 바르바체에게로 달려들었다.

    콰앙!

    일격.

    소용돌이치는 혈기로 둘러싸인 이지혁의 주먹이 바르바체의 머리를 내려쳤다. 철옹성처럼 단단한 바르바체의 외골격이 으스러지고, 바르바체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이성을 잃은 이지혁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진 바르바체에게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재생을 마친 팔이 혈기로 뒤덮인다. 길게 늘어난 혈기의 손톱이 바르바체의 몸을 종잇장처럼 찢어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터져 나온다.

    그의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감정의 찌꺼기가.

    이 기묘한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이지혁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에 강하게 공명했다.

    울분, 증오.

    모든 것을 부숴 버릴 것만 같은 분노.

    그리고…….

    '슬픔?'

    최정훈은 이 기묘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제는 그도 알 수 없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집요하고 잔인하게 바르바체를 부숴 나가는 이지혁의 모습이었다.

    그건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지성을 가진 이라면 저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짐승이라 칭할 수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짐승은 사냥감을 저런 식으로 해체하지는 않으니까. 바르바체의 살점 하나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이지혁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지혁……."

    최정훈은 손을 뻗으려다 깨달았다.

    그에게는 이미 뻗을 손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저 광경은…….

    저 끔찍한 광경은 지금 그에게는 너무도 서글프게만 보였으니까.

    "최정훈 씨."

    낮디낮은 아펠드리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정훈은 대답 없이 멍하니 고개를 돌려 어느새 그의 곁에 자리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저 말입니까?"

    "네, 당신이요."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의 그가.

    이제 그에게는 한 방울의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승부는 났어요. 긴 전쟁의 끝은 모두의 파멸이에요."

    섬뜩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섬뜩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꿈을 꾸는 듯 멍하기만 했다.

    "저 기운에 휘둘리기 시작한 이지혁은 이제 모든 것을 부술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저 사람을 보내줘야 할 시간이에요."

    최정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바르바체조차 감당하지 못한 그를 자신들이 어떻게?

    "한순간……."

    아펠드리체가 입술을 깨물었다.

    "단 한순간만 저 사람을 멈춰주세요. 그럼 남은 것은 제가 할 테니까요."

    그제야 최정훈은 아펠드리체가 전투 내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다린 겁니까?"

    "……."

    "이 순간을?"

    아펠드리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습니까? 단 한순간?"

    "네, 괜찮아요."

    최정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살아 돌아올 생각이 없다, 이 사람.

    한순간의 멈춤으로는 이지혁을 막아낼 수 없다. 접근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그걸로 만족한다는 건…….

    "그걸로……."

    최정훈이 아펠드리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걸로 괜찮습니까?"

    아펠드리체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볼 수 없던, 그런 멋진 미소를 말이다.

    "죽는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리고……."

    아펠드리체가 담담하게 말했다.

    "약속했거든요. 혼자 가게 두지는 않는다고."

    그녀의 미소를 본 최정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이라고 했습니까?"

    "네."

    "그런 식으로는 불가능할 겁니다."

    "불가능해도……."

    "아뇨. 다른 방법을 써보죠."

    "……."

    "그래도 가능하다는 확신은 없습니다만, 아마 그 방법보다는 나을 겁니다."

    최정훈의 얼굴을 본 아펠드리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말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 아니라."

    "하지만 아펠드리체……."

    "이미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확률은 천분의 일도 안 될 테니까. 그리고……."

    아펠드리체가 잠시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해야 지금 그녀의 기분을 이 남자에게 전할 수 있을까?

    조악한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었다.

    "홀로 남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아펠드리체."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 사람과 함께했어요. 긴 시간이었죠.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저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함께 있지만 영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 그게 저 사람과 제 관계였죠."

    "……."

    "그렇지만……."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바르바체의 숨통을 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를 말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함께할 수는 있잖아요. 그렇죠?"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시간이 없네요. 당신과 대화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저 사람이 질투할지도 몰라요."

    "그럴 겁니다. 쪼잔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이제 시작해요, 마지막 싸움을."

    최정훈이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

    그의 피와 바르바체의 피가 뒤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이지혁이 뭔가를 웅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그저 서글픈 모습이었다.

    * * *

    풀려 버린 눈이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주변을 천천히 훑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저 모습만으로도 이지혁은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의지도,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본능.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본능뿐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렇겠지만…….'

    최정훈이 주머니로 손을 꽂아 넣으려다 흠칫했다.

    '아, 없구나.'

    팔이 없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움직이려던 그의 주머니로 서아영의 손이 들어왔다.

    "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서아영이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최정훈의 입에 물려주고는 불을 붙였다.

    "……."

    "저 사람과 할 말이 있는 거죠?"

    "음."

    "둘이 대화할 때는 항상 한 대 물고 시작했죠. 찾을 거라 생각했어요."

    "땡큐."

    최정훈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서아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남자라는 것들은…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니까."

    "별수 없으니까요."

    "…다음에는 국물도 없어요."

    다음이 있다면 말이지.

    최정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멍해 보이긴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조금의 자극만으로도 언제 발악을 시작할지 모르는 상태다. 안전핀이 뽑혀 있는 수류탄과 다를 게 없었다.

    "저 사람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네?"

    아펠드리체의 눈이 흔들렸다.

    "우연의 우연이 겹쳤을지 모르지만, 저는 저 사람이 마지막에는 저를 살려줬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 안에 어쩌면 그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요."

    "거기에 걸겠다구요?"

    "무모한가요?"

    "대답할 가치도 없네요."

    최정훈이 가볍게 웃으며 연기를 뿜어냈다.

    그래, 무모하겠지.

    하지만…….

    "멈출 수 없는 사람을 멈추는 것보다야 그게 낫겠죠."

    "……."

    아펠드리체도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불가능한 일을 이 사람은 몇 번이고 해냈다. 도박을 해야 한다면 이 사람의 의견에 걸어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녀도 믿고 싶었다.

    아직은 저 안에 이지혁이 남아 있음을 말이다. 그게 비록 헛되기 짝이 없는 바람이라고 해도.

    "가죠."

    "……."

    최정훈이 바닥에 담배를 뱉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어 들어간다.

    태풍 속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어쩌면 그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기반한 일일 것이다.

    분노하고, 화내고, 슬퍼하더라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려 한 최정훈이 마지막에 와서 부려보는 투정.

    그래, 그저 투정일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당신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짜릿한걸."

    최정훈이 낮게 웃었다.

    자살행위.

    떨어지는 길로틴에 목을 들이미는 짓거리.

    멍청하고, 또 멍청한.

    하지만 최정훈은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죽는다. 그리고 만약 죽는다면 바르바체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저 사람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

    비극은 그렇게 완성되는 거니까.

    "걸어요."

    최정훈의 말에 아펠드리체가 걷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책은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로 만들어뒀죠."

    "…저 사람의 기억 속에 말인가요?"

    "네. 간단한 일이죠."

    최정훈이 웃어버렸다.

    "저 사람의 기억 속에 우리가 죽이지 말아야 할 것들쯤으로만 남아 있더라도 성공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죽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온 것으로 평가를 받는 게 진정한 테스트 아니겠어요?"

    "당신, 성격이 좀 이상하네요."

    "인정하죠.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짓이란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는 전력으로 저 사람의 발을 묶는다는 헛짓거리를 하느니, 이게 차라리 현명해 보이네요."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이건 멍청한 짓거리다.

    이성의 생물인 드래곤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드래곤도 아니니까.'

    "멈춰요."

    "네?"

    "제가 혼자 갈게요."

    최정훈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아펠드리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펠드리체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홀로 가는 게 낫겠네요. 여럿이 가서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노력했어요."

    아펠드리체가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 이제는 쉬어요. 남은 건 내가 해볼게요."

    "아펠드리체……."

    "마지막까지 자신이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려요.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지켜보는 거예요. 모든 것을."

    "……."

    최정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다.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지켜보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이 될 순간을 말이다.

    "가세요."

    "네. 그럼……."

    아펠드리체가 빙긋이 웃었다.

    "안녕히, 작지만 용감했던 인간이여."

    그녀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들으며 최정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천천히 이지혁에게 걸어가는 아펠드리체.

    그녀의 행동을 본 서아영이 최정훈에게 다가와 그의 옷을 움켜잡았다.

    "뭐하는 거예요?"

    "빤한 이야기예요."

    최정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화죠."

    "대화?"

    "네, 대화.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 빤하지만 빤하지 않은 것."

    "저 이지혁을 상대로요?"

    "네."

    최정훈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대화겠죠."

    "……."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서아영이 불안한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대화?'

    그녀는 최정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서 왜 대화라는 단어가 나온단 말인가.

    "그저 말이 아니에요. 마음을 전하는 것,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게 모두 대화죠.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힘은 대화죠. 폭력으로 여기까지 온 마당에 할 말은 아니겠지만, 결국 인간이 마지막에 선택할 수 있는 건 이거겠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서아영에게 최정훈이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나아가는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괜찮겠죠. 그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사람이니까."

    * * *

    '이상한 기분이야.'

    아펠드리체는 손을 들어 가슴을 꾹 눌렀다.

    '이게 긴장이라는 건가?'

    드래곤은 자신의 죽음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시간의 결과이거나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한 수명의 찬탈이다. 결국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과가 있는 세계에서 당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드래곤인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은 인과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수레바퀴였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수레바퀴에 이물질이 끼어들었다.

    거기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뭐라는 거야, 망할 도마뱀이."

    인과로 설명이 안 되는 존재.

    세상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는 존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에는 사라진다는 필멸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존재.

    더없이 강하지만, 또한 더없이 약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

    그래. 그 사람이 이지혁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에 괴로워하면서도 결코 그 운명에서 달아나지 않은 사람.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편해질 수 있음에도 단 한순간도 편해지려 하지 않은 사람.

    더없이 이상하고… 지켜보기 힘들었던 사람.

    아펠드리체의 눈에 비친 그는 마치 불합리의 화신 같았다.

    신에게 저항하고, 운명에 저항하고,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부정하던 자.

    그리고 언젠가 세상을 멸망시킬 자.

    그 결과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다.

    이지혁.

    이제는 파괴신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그가 멍하니 고개를 이곳저곳으로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찾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아펠드리체는 그 모습이 마치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길을 잃은 아이.

    그리고 갈 곳이 없어진 아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 그저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아이처럼.

    새삼 알 수밖에 없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바르바체와의 마지막 싸움이 처절하기 짝이 없었는지, 그의 육체 곳곳이 찢어지고 갈라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재생되었던 한 팔도 다시 찢겨 나가 새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어느 한 곳도 멀쩡한 곳이 없었다. 이어지는 전투와 전투에 너덜너덜해진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언제였더라?

    편안한 그의 모습을 본 것이 말이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기억하는 이지혁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감당하지 못해 힘겨워했으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라도 그의 속은 언제나 문드러져 있었다.

    '어쩌면 당신은 여기까지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흑마력을 사용하는 대가로 마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이지혁은 이 순간을 예상했을지 모른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스스로를 잃어간다.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확정되어 있는 최악의 결과를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그 기분이란 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결코 멈출 수 없다는 건?

    "조금은… 미안해져."

    이해해 주지 못한다는 게.

    이해해 주지 못했다는 게.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에 그를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이 아니기에 그를 이해해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지혁은 언제나 저 작은 몸으로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행선.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종족의 차이가 아닌 거야.'

    그 누구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저 그렇게 믿는 것이다.

    누구도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까. 그저 짐작하고 그저 그럴 것이라 믿는 것이다.

    확언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

    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신뢰였지.

    그렇게 말해주었어야 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는다고 말이다.

    그걸…….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너무 늦게.

    아펠드리체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바보 같아.'

    풀려 있는 동공.

    갈 곳을 찾지 못하는 눈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너무도… 너무도 아프게.

    그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풀려 버린 이지혁의 눈동자도,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도 아니었다.

    그가 홀로 멍하니 서 있다는 것.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구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여전히.

    그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러니 가야지.

    그러니 가줘야지.

    그가 더 이상은 외롭지 않도록 말이다.

    "적어도……."

    아펠드리체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지막에는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수천 년의 세월보다 의미 있는 단 한순간을 위해서 아펠드리체는 천천히 이지혁을 향해 걸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 * *

    감정조차 없는 눈동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저 눈이 적의를 가득 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면 조금은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이지혁의 눈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감정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감정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

    그의 안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한때는 저 눈이 격렬한 증오를 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때는 분노나 증오보다는 짜증을 담기도 했다.

    때로는 서글픔을, 그리고 때로는 아쉬움을…….

    그리고 한때는…….

    그녀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애정이라 부를 만한 감정을 담았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눈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이 증오조차 품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펠드리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라…….'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게 영향을 받아 슬픔을 느끼는 존재를 드래곤이라 할 수 있을까?

    지금도, 그리고 과거에도 그녀의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이미 그녀는 드래곤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으니까.

    인간이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 말이다. 그 미묘한 동질감에 기뻐하는 자신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이미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드래곤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베라프에서의 삶을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 사람은 이미 죽어서 껍데기만 남아 있다.

    그런데… 무엇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일까?

    '언젠가 그 사람이 말했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죽음을 박탈당해 버린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드래곤은 어떨까?

    드래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가?

    아니.

    그녀가 아는 한 그런 경우는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짓은 드래곤이 할 일이 아니다. 그저 한없이 인간다운 일일 뿐.

    아이러니.

    인간임에도 인간이 아니게 된 자와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스러워진 자.

    끝까지 이지혁을 쫓았음에도 결국 그녀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다.

    이지혁의 뒤를 쫓아 이 세계로 올 때부터 그녀는 이 이상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지혁의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결과.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었으니까.

    이지혁이 이런 일을 겪지 않고 죽었다면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가 없는 세월뿐이다. 완전한 기억을 가진 그녀는 이지혁의 흔적 하나조차 잊지 못한 채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겠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바라보았다.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 이지혁을 말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욕하겠지.

    병신 같은 드래곤이 또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다며 화내고 욕하겠지.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겉으로는 퉁명스레 말하며 속으로는 애 끓이는 사람.

    그래서 바보 같고.

    그래서…….

    아펠드리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느린 걸음.

    결코 서두르지 않는 걸음.

    이지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지금에 와서야 처음으로 이지혁과 진정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이 순간이 조금 더 이어지기를… 마지막으로 향하는 그 길이 짧지 않기를 바랐다.

    크륵.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

    세상 무엇에도 무심해 보는 그 눈이 아펠드리체를 포착했다.

    "보고 있어요?"

    아펠드리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당신은 내가 다가가는 걸 싫어했죠. 어쩌면 나는 당신에게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네요."

    듣고 있을까?

    저 사람은?

    저 사람 안에 그녀의 말을 들어줄 그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헛된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그토록 밀어냈어도 결국 나는 당신의 곁에 있었어요. 잊지 않았겠죠."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라는 걸.

    밀어내고 밀어내도…….

    결국은 다가갈 테니까.

    "으……."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분명 일그러진 얼굴임에도 그 속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이라는 것은 결국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의 일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 같은 느낌.

    "우으……."

    이지혁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은 아펠드리체였다.

    명백한 적의.

    조금 더 다가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은 느릿하지만 확고했다. 조금씩 그렇게, 조금씩…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

    이지혁의 오른손이 뿜어낸 혈기가 아펠드리체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

    이지혁의 혈기는 아펠드리체의 육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 폭발했다.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공격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피하지도 않았다.

    "으……."

    이지혁의 몸이 주춤했다.

    다가오는 아펠드리체를 두려워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아펠드리체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있다.

    저기에 있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형태의 의식은 아닐지라도, 그녀를 상처 입히고 싶어 하지 않는 의지가… 저곳에 있었다.

    '그걸로 충분해요.'

    편린일지라도, 저곳에 그가 있으니까.

    그가 원한 것.

    그건 영원한 안식.

    한 번도 그가 원한 것을 들어주지 못했다.

    세상에 절망하기 전, 이지혁이 자신을 놓아달라며 수년 동안 울부짖었을 때도 아펠드리체는 그를 가두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힘을 얻은 그가 자신을 그만 보내 달라고 할 때도 아펠드리체는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언제나.

    그녀는 그를 막아서고 방해하는 역할이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마지막을 함께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녀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지혁은 그 사실마저 끔찍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혼자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마지막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다면, 그녀의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살아서 그녀가 겪을 것은 허무와 그리움의 지옥일 테니까.

    "조금은 이기적일지 몰라도 말이에요."

    아펠드리체는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에게 다가섰다.

    이제는 실패하더라도 괜찮다.

    그가 지켜줬으니까.

    그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이지혁의 의지가 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이지혁을 따라 이 세계로 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까.

    "으……."

    이지혁의 육체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붉은 혈기가 피어오른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은 검붉은 혈기가 이지혁의 발아래에서부터 솟아올라 이지혁을 감쌌다.

    그런 후, 다시 이지혁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그 손이 자신을 겨누는 것을 본 아펠드리체는 되레 양팔을 벌렸다.

    느릿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걸음.

    이지혁의 눈이 붉게 물든다.

    '알고 있어.'

    두 번의 요행은 없다.

    거리는 더 가까워졌고, 이지혁이 뿜어낸 혈기는 더 강해졌다. 아무리 저 안에 의지가 남아 있다고 해도 이 거리에서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저 혈기가 발출되는 순간, 아펠드리체는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겠지.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까. 그리고…….

    '저버리지 않는 것.'

    믿음을.

    마지막까지 저버리지 않는 것.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이지혁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우으……."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펠드리체에게서 압박이라도 느끼는지, 이지혁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뿐.

    "크아아아아아아!"

    이지혁이 괴성을 지르며 아펠드리체를 향해 손을 뻗어냈다.

    소멸.

    모든 것이 소멸한다.

    그 순간.

    이지혁의 발밑 그림자에서 새하얀 인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지혁을 지켜보고 있던 최정훈과 서아영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도가윤?"

    "가윤아!"

    그림자 속에서 물처럼 스며 나온 도가윤이 이지혁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육체는 살아 있다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잘려 나간 한쪽 다리와 갈가리 찢겨진 양팔.

    서아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까지…….'

    언제부터였을까?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있던 걸까?

    저 지경이 되도록 그녀는 이지혁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던 것이다.

    등 뒤에서 가만히 이지혁의 몸을 감싸 안은 도가윤이 아이를 달래듯 볼을 어루만졌다.

    "괜찮아요."

    "……."

    "괜찮아."

    이지혁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크륵!"

    이지혁의 시선이 도가윤에게로 돌아갔다.

    상대가 등 뒤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이지혁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려치겠다는 듯이.

    "안 돼."

    그때, 이지혁의 등 뒤에서 솟아난 검은 그림자가 이지혁의 손을 움켜잡았다.

    "달링, 그러면 안 돼. 슬퍼할 거야."

    "……."

    에르카나.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의 팔을 움켜잡고 있었다.

    최정훈의 눈이 떨렸다.

    살아 있었던가.

    그 순간, 이지혁의 바로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텔레포트?'

    정해민.

    그녀가 김다솜을 데리고 이지혁의 앞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한 것이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요, 오빠."

    두 여인이 이지혁에게로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최정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렵지도 않은가.

    저 이지혁이.

    이상한 것은 이지혁의 반응이었다.

    "아……."

    그의 몸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지만, 그를 껴안은 이들을 떨쳐 내지 않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갈 곳을 모르는 손.

    그런 이지혁에게로 마침내 아펠드리체가 다가섰다.

    "괜찮아요."

    아펠드리체가 양손을 뻗어 이지혁의 양 볼을 감쌌다.

    "괜찮아요,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아펠드리체를 바라보던 이지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이지혁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는……."

    "힘들었을 테니까."

    "……."

    "이제 쉬면 돼요, 이제.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 혼자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살아 있는 내내 혼자였으니까. 그래서 외로웠을 테니까. 적어도… 죽음만은 내가 함께해 줄게요."

    그 순간, 이지혁을 둘러싸고 있던 여인들의 몸이 눈부신 광채에 휩싸였다.

    "헛!"

    최정훈은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을 보며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도가윤과 정해민, 그리고 김다솜이 그의 앞으로 밀려났다.

    "오빠!"

    "이지혁!"

    소리치는 그녀들의 모습 앞으로 이지혁과 아펠드리체의 모습이 새하얀 백광에 휩싸이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 * *

    "혼자 재미 보게 두진 않아. 달링은 내 거니까."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을 끌어안고 있는 에르카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당신도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아펠드리체가 손을 뻗어 이지혁을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신의 힘.

    이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라트렐이 그녀에게 안배한 힘.

    그녀의 죽음을 매개로 발현되는 힘.

    "마지막은 함께이니까."

    환하게 웃는 아펠드리체의 웃음과 함께 온 세상이 하얗게,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새하얗다.

    모든 것이 새하얗기 짝이 없었다.

    세상의 경계가 없어진, 새하얗기만 한 공간에 그는 홀로 떠 있었다.

    '뭐지?'

    인식이 시작된다.

    스스로가 있는 곳을 인지한 그가 가만히 눈을 떴다.

    세상을 인식한 순간, 스스로에 대한 파악이 시작되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인식'했다.

    "살아 있다고?"

    살아생전 이지혁이라 불리던 자.

    "아니, 살아 있을 수가 없는데……."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의 마지막이 말이다.

    자신은 분명 죽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사후 세계라……. 끔찍하군. 사후 세계가 없는 쪽이 내 입장에서는 더 나을 텐데 말이야."

    그가 생전에 저지른 죄악들을 생각하면 그가 갈 곳은 지옥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옥이라기에는 너무도 밝고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지옥이라 해도 상관없다.

    아무리 끔찍한 지옥이라도 그의 지나온 삶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영원히 안식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 순간, 이지혁의 뇌리 속으로 기억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건?"

    그의 기억이다.

    하지만 그가 아닌 이의 기억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죽고 난 뒤에 그의 육체가 겪은 기억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런 기억까지 밀려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에 대한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멍청하긴……."

    이지혁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뭘 믿는다는 말인가.

    대체 뭘.

    그는 이미 죽었는데. 저곳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닌데, 그에게서 뭘 바란다는 말인가.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멍청하긴……."

    같은 말을 읊조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인데 말이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그게 최선이었겠죠."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새하얗기만 한 공간에 그가 아닌 다른 존재가 생겨나 있었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오는 그 존재를 본 이지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펠드리체?"

    "아니요."

    아펠드리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형상을 가진 존재가 고개를 저었다.

    이지혁도 그 순간 눈치챘다.

    이 여자는 아펠드리체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아펠드리체의 모습이지만, 분명 그녀는 아니었다. 느껴지는 기질이 완전히 달랐으니까. 아펠드리체 같지만 아펠드리체가 아닌……. 그보다 좀 더 성스럽고 위엄이 가득하다.

    이지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알 것 같다.

    이자가 누구인지.

    이지혁의 얼굴이 증오로 가득 찼다.

    증오할 수밖에 없는 자.

    이지혁의 인생을 엉망으로 뒤틀고, 영원한 고통 속에 빠뜨린 자.

    "라트렐!"

    아펠드리체의 얼굴을 한 이가 처연하게 웃었다.

    "네. 제가 라트렐입니다, 이지혁."

    이지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 그는 라트렐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죽으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사후 세계까지 네가 관장하는 줄 알았다면 안 죽으려고 발악했을 거다. 나는 네 세계의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꼴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군."

    아펠드리체, 아니, 라트렐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네. 우선 이곳은 사후 세계가 아니에요. 제가 만들어낸 공간이죠."

    "난 죽었는데?"

    "네. 당신은 죽었죠. 하지만 당신의 육체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지금 반만 죽어 있는 상태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아니, 슬퍼해야겠군. 그 말은 내가 죽었으면 네 면상을 보지 않아도 됐다는 뜻이니까."

    "이 얼굴은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 형상화한 것이죠. 그 존재가 아펠드리체라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지만."

    "그 뜻이 아니라고, 이 등신아!"

    이지혁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과거 아펠드리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답답함이 느껴졌다. 여하튼 베라프 출신들은 하나같이 그를 머리 아프게 만든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됐어. 그보다 대체 왜 내 앞에 나타났는지나 설명하시지. 미리 말하지만, 너와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이 나는 매우 엿 같으니까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는데."

    라트렐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에게 이리 저주를 퍼붓는 이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지혁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가 이지혁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

    "사과하고 싶었어요."

    "사과?"

    "네, 사과요."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아니… 이봐, 네게 정상적인 인식이라는 개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와 나의 관계는 누가 누구에게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냐. 신이라서 똑똑할 줄 알았는데, 과도하게 멍청한데?"

    "알고 있어요. 당신은 결코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사과해야 해요. 이것이… 아마 마지막일 테니까."

    처연한 라트렐의 얼굴을 보며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사과고 뭐고, 일단 들어보자고."

    "네."

    "왜 그런 거야?"

    "……."

    "대체 왜 나를 그 세계에 묶어두려고 한 거지? 그것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몰골로 말이야. 왜 나를 멸망의 좌라 칭하고 모두가 나를 적대하게 만든 거야?"

    "하나는 의도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실수."

    "실수?"

    "당신을 묶어둔 것은 제 의도였어요. 하지만 당신을 적대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당신이 언젠가는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자가 될 것이고, 그 상황을 막으려면 베라프에 잡아두어야 한다는 신탁을 내렸을 뿐이에요. 하지만 제 피조물들에게 내리는 신탁은 제 의도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해요. 그래서 조금은 변질이 되어버렸죠."

    "에, 그러니까… 편지를 날렸는데, 그 편지가 배송되는 와중에 조금 찢어져서 중간이 다 날아가고 내가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말만 전해졌다?"

    "비슷해요."

    "그럼 AS를 했어야지! 이 미친년아!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요즘은 서비스센터 가도 무료로 3년은 AS를 해주는데, 신이라는 게 한 번 메시지 잘못 갔다고 그걸 내버려 둬?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입에서 불을 뿜을 듯한 기세로 소리치는 이지혁이지만, 라트렐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 피조물들에게 신탁을 내리는 것은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신은 세상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피조물들의 자유의지에는 간섭해서는 안 되니까요. 신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것도 커다란 부담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에요."

    "부담? 부우~담? 내가 지금 부담이 뭔지 알려줄까? 이거~ 큰일 날 여자네, 이거?"

    "……."

    "아이고, 이런 게 신이라고 설쳐 대니 베라프가 그 꼴이지. 너는 솔직히 양심도 없냐? 네가 그 세계를 엿같이 운영한 덕에 몇 천 년이 지나도록 발전이 없잖아. 이번에 지구 보고 눈 안 돌아가디?"

    "발전이 꼭 좋은 건 아니에요. 피조물들이 얼마나 행복한가가 중요하죠."

    "그래서 니가 보기에는 베라프의 인간들이 행복해 보여? 야, 거기 지옥이야, 이 정신 나간 여자야. 인권이 없다고, 인권이! 내가 베라프에서 몇 번을 죽으려고 했는데."

    "인간의 경우만 보면 그렇겠죠. 하지만 베라프에는 다른 이들도 살아가죠."

    "음……."

    "제약을 걸지 않았다면 지금쯤 베라프는 인간에게 정복당했을 거예요. 당신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유사 인류와 몬스터, 그리고 상위 생명체… 그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겠죠. 그게 아니면 위기를 느낀 이들의 반격으로 인류가 절멸했을 거예요."

    "으으음……."

    이지혁은 순간 할 말이 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 부분은 그도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니까. 만약 베라프의 인류가 지구의 인류처럼 발전했다면 오크나 엘프는 잘 풀리면 노예고, 나쁘게 풀리면 멸종했을 것이다.

    드래곤? 드래곤은 좋은 아이템 취급을 받고 슥삭…….

    "뭐, 여하튼 넘어가자고. 네 운영 방식에 딴지를 걸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으니까."

    "네."

    "나를 묶어둔 의도는 뭐야?"

    "그건 제가 사과해야 할 일이에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째서?"

    "멸망하니까."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직도 그런 개소리를 하고 있어? 베라프를 멸망까지 몰고 간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야. 너희가 그런 개짓만 하지 않았더라도……."

    "아뇨. 그런 말이 아니에요."

    이지혁이 눈을 치켜떴다.

    이 여자,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당신이 베라프를 멸망시킨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베라프가 멸망한다는 거죠."

    "뭐?"

    "모든 세계에는 한계가 존재해요. 베라프는 이제 끝을 맞이할 시간이 된 거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라프에 암흑이 찾아올 것이고,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사멸할 거예요. 세계의 죽음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까, 베라프가 멸망하고 있다는 거야? 나와 아무 상관 없이?"

    "네."

    "왜?"

    "생명력이 다했기 때문이에요. 생물이 그러하듯, 세계에도 생명력이 있죠."

    "아니, 그 생명력이 다 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 별이 터지는 것도 아닌데."

    "당신들과는 달라요. 베라프를 유지하는 근원, 마나가 소멸하게 되면 모든 생명은 자연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어요."

    "아……."

    이지혁은 그제야 라트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마나가 사라진다면 그럴 것이다. 그 세계의 존재들은 모두가 마나에 얽매여 있으니까.

    "이해는 했어. 그런데 그것과 나를 잡아둔 이유는 매치가 안 되는데?"

    "저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라트렐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세상의 사멸은 신으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이치예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저의 피조물들이, 제 아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필요했어요."

    "그게 지구라는 건가?"

    "예."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라트렐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화로군."

    "그래요."

    라트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타 차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위해서는 막대한 마나가 필요하죠. 하지만 그 마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바로 매개체예요."

    "……."

    "수많은 차원의 벽을 넘어 마나를 정확히 전달하여 거대한 문을 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류의 마나를 품은 매개가 필요하죠."

    "그래서 잡아둔 거로군. 그리고 그래서 영원히 살 필요가 있었겠지. 타 차원의 존재인 내가 베라프의 마나에 완전히 동화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네. 그리고 그 작업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당신은 돌아갈 방법을 찾아버렸죠."

    "그래서 너는 나를 막으려 했고."

    "네. 결국 막지는 못했지만요."

    이지혁이 주먹을 움켜잡았다.

    "잘난 듯이 떠드는군."

    분노가, 증오가… 수천 년이 넘도록 쌓여 있던 그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라고 하면 내가 이해하고 납득이라도 할 것 같았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절규가 터져 나왔다.

    * * *

    "아무런 상관이 없죠."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만 들렸다.

    신은 그런 존재니까.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존재는 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는 모든 생물의 탄생과 사멸을 지켜봐야 하는 존재.

    수호자를 가장한 방관자.

    그것이 그녀의 역할이니까.

    감정이 있다 해도 쉽게 요동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그저 때마침 그곳에 있었을 뿐이니까요. 세상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에."

    "잘 아는군."

    이지혁이 손을 뻗어 라트렐의 목을 움켜잡았다.

    "잘 알아, 아주 잘 아는군. 네게 무슨 사정이 있든 그걸 왜 내가 이해해야 하지? 나는 네 잘난 사정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지옥을 맛봤어. 그리고 내가 사는 세상조차 네 덕에 저 꼴이 됐다. 그런데 내가 너를 이해해야 한다고? 용서해야 한다고? 웃기지마!"

    이지혁의 고함이 세상에 메아리쳤다.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적어도 날 끌어들이지는 말았어야지! 나는 왜 네게 희생당해야 했나! 네가 신이라면 대답해 봐! 왜! 왜! 어째서!"

    이지혁의 목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베라프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납득하기에는 그의 희생이 너무도 컸다. 세상을 모두 불태워도 꺼지지 않을 만큼 그의 분노는 거대했으니까.

    "결국 모두 네가 원하는 대로 됐군. 베라프로의 길은 열렸으니, 이제 베라프 인들은 멸망을 피할 수 있겠지. 이 지구로 넘어올 수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마계와의 길이 연결됐으니, 마나는 이 세계를 가득 채우겠지. 해피 엔딩이군. 모두가 잘됐어. 그렇지? 오로지 나를 제외하곤 말이야."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축하라도 해야 하나? 내가? 베라프를 지키게 돼서 축하한다고? 빌어먹을!"

    라트렐은 조금은 처연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그녀인데 말이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그래, 영광이겠지. 영광이어야지. 그게 내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 기뻐해야겠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는데, 이 한목숨이 재료로 들어갈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조금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당신답지 않아요."

    "진정하라고? 지금 나더러 진정하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내가 당신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어요."

    이지혁이 허탈한 눈으로 라트렐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이겠지.

    신성과의 대화라는 것은.

    이들은 개인을 보지 않으니까.

    그들이 보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세상이니까.

    아무리 소리치고 울분을 토해낸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이지혁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천 년, 아니, 만 년이 지나도 말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나 지껄이려고 날 불렀나?"

    "……."

    "할 말 끝났으면 꺼져. 그래, 알게 되었으니 차라리 낫지. 모르는 게 나은 진실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엿 같아도 진실은 아는 게 나아. 덕분에 아주 시원하고 엿 같은 마음으로 소멸할 수 있겠네. 아주 고맙군."

    라트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신은 죽을 수 없어요."

    "…뭐?"

    "당신의 영혼은 육체에 묶여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죽기 위해서는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게 불가능하니까 하는 말 아냐!"

    라트렐은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이곳은 나의 땅이 아니에요."

    "……."

    "그리고 나의 땅이라고 하더라도 살아 있는 생명을 거둘 수 있는 힘은 제게 없어요."

    이지혁이 가만히 라트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힘이 파괴로 발현될 수 있었다면 감히 마족이나 마왕이 베라프를 침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발을 들이는 즉시 그녀의 권능으로 박살이 났을 테니까.

    "제 권능은 소생과 창조예요. 당신에게 육체의 기억을 되살려준 것처럼요. 모든 것을 보았겠죠."

    "그래."

    "안타깝지만, 그녀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제가 당신의 육체를 멈춘다는 건 불가능해요.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편린이 되어버린 당신을 재생시키고 접촉하는 것이죠."

    "내 육체를 멈추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가?"

    "네."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네, 맞아요. 당신이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죠.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아직 세상을 구하지 못했어요.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파괴신이 되어버린 당신의 육체를 멈추지 못하면… 지구도, 베라프도, 그리고 마계까지도 모조리 멸망하고 말 거예요. 세상은 암흑이 되어버리겠죠."

    이지혁의 표정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도와주실 건가요?"

    "내가 너를 돕는 일은 없어."

    이지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와 나는 서로를 돕는 관계가 아니지. 서로 이용하고 증오하는 관계일 뿐이야. 이해의 합치가 있다면 잠시 손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너를 돕는 건 아냐."

    라트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군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해. 신이라는 작자가 할 일 없어서 나를 불러낸 것은 아닐 테고."

    "육체의 주도권을 되찾아와야 해요."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이미 죽었어. 죽은 자가 무슨 수로 육체를 되찾아?"

    "말하다시피 당신은 아직 죽지 못했어요."

    "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여기서부터 재생한다는 건 불가능해."

    "가능하죠, 제가 도와준다면."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라트렐을 바라보았다.

    "내 육체가 머물러 있는 곳은 지구야. 너의 신성이 통하는 땅이 아닐 텐데? 그리고 단순히 사자의 소생이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가?"

    라트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소멸을 담보로 한다면 가능해요."

    "…소멸?"

    "예."

    이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죽음을 통해 나를 소생시킨다고? 미쳤어? 너는 신이야. 베라프의 모든 것들을 돌봐야 하는 신이라고."

    "네. 저는 신이에요. 베라프의 모두에게 가호를 내려야 하는 신이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제가 수호해야 할 피조물들이 모두 없어지겠죠. 그것보다는 차라리 제가 소멸하는 게 나아요."

    "너……."

    "그리고 어차피 베라프가 사라지고 그들이 지구로 이주한다면, 저는 더 이상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힘들겠죠. 그저 지켜보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예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제가 사라져도 괜찮겠죠."

    이지혁이 가만히 라트렐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표정으로는 그녀의 감정을 알기 힘들었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본연의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그걸로 괜찮다는 건가? 피조물들을 위해서 자신을 소멸시킨다는 게?"

    "당신들의 말로 하자면 이렇게 표현해야겠죠. 물가에 애를 내놓은 심정.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 덕분에 알게 되었죠. 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당신들은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미래를 개척했죠. 당신이 그러했듯."

    라트렐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의 아이들도 그럴 수 있겠죠. 신에게 얽매인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지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며……."

    이지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라트렐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증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트렐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당신에게 있어서는 가혹한 결정이 될 거예요. 나는 당신을 소생시킬 수는 있지만, 당신의 수명을 늘릴 수는 없어요. 길어야 한순간. 당신의 삶은 끝나겠죠."

    "알고 있어."

    "어쩌면 나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이용하려 드는 걸지도 몰라요. 나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가혹한 삶을 다시 한 번 강요하는 거겠죠."

    이지혁은 조금 씁쓸한 눈으로 라트렐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나는 영원히 너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의 말을 받아들여야겠지. 네가 그렇듯이 나도 지켜야 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시 죽어주지."

    라트렐이 눈을 감았다.

    신조차 감당하지 못할 고통 속을 헤맸으면서도 결코 스스로를 잃지 않은 이 작은 생명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녀가 천천히 손을 뻗어 이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

    "사멸한 당신의 신들이 지금 당신을 본다면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웃기는 소리."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신 같은 건 필요 없어.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는 거니까."

    라트렐이 빙긋 웃었다.

    "나의 아이들도 당신과 같이 굳건하기를.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울지 않기를."

    "모든 자식에게는 부모로부터 떠나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지. 그저… 그저 지금이 그때일 뿐이야.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안심이 되네요."

    "뭐……."

    '딱히 너를 안심시키려 한 말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려던 이지혁이 한숨을 쉬며 말을 삼켰다.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의 소멸을 각오한 이 위대한 신의 마지막에 이런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경멸과 증오는 별개의 문제.

    그가 그녀를 용서할 수 없더라도, 그것이 이 신의 위대함을 가리지는 못하니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경청하지."

    라트렐이 환히 웃었다.

    "미안했어요."

    "……."

    "나는 당신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했어요. 당신은 나의 피조물이 아니니까. 나와 이어져 있지 않으니까. 그저 짐작할 뿐이었죠. 이렇게 이어지고서야 알게 되네요. 당신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미안했어요. 미안해요, 이지혁."

    이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심정.

    길고 긴 시간을… 어쩌면 그는 이 한마디를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미안했어요. 그리고……."

    라트렐이 이지혁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는다. 그건 세상의 피할 수 없는 이치겠지. 나는… 그저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죽을 뿐이야."

    "당신답네요."

    "그리고 나도 마지막 할 말은 있어."

    이지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악연뿐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게 되겠네. 그건 고맙다고 해두지. 그리고… 덕분에 나의 세상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를."

    라트렐과 이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더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해하니까, 서로를.

    새하얀 세상.

    온통 새하얀 세상에 새하얀 빛이 가득 찼다.

    라트렐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이지혁에게로 천천히 밀려들었다.

    "남길 말은?"

    흐려져 가는 라트렐이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나의 아이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살아가기를.]

    "전하지."

    그들에게.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그들을 사랑하던 신이 있었음을.

    환한 미소를 지으며 흐려져 가는 라트렐을 바라보던 이지혁의 눈가에 한 방울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당신에게 축복을, 세상을 멸망에서 막아낼 자여.]

    눈부신 빛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 * *

    천천히 눈을 뜬다.

    흐릿한 시야.

    끔찍한 통증.

    '뒈지겠군.'

    대충 무슨 꼴을 당한 것인지 기억을 통해 보기는 했지만 지금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인간의 육체였다면 이미 죽었어야 할 고통을 이 육체는 꿋꿋이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전신에서 밀려오는 격통을 받으면서도 이지혁은 웃고 말았다. 통증이란 육체의 경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니까.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말 그대로 죽음에서 돌아온 것이다.

    흐릿하기만 했던 시아가 천천히 초점을 찾아갔다.

    느릿하게.

    이윽고 선명해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펠드리체의 얼굴이었다.

    "…드래곤도 눈물을 흘리나?"

    "……."

    이죽이는 이지혁을 본 아펠드리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이지혁?"

    그의 볼을 움켜잡은 아펠드리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아프다고! 이 도마뱀이 미쳤나!"

    "당신! 당신이에요?"

    "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뭐, 이해 못할 건 아니다. 그는 죽었으니까. 아펠드리체는 그가 겪고 있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소생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아펠드리체도 알고 있었던 사실 아닌가.

    그런데 이지혁이 살아났으니 인간이 죽은 자가 돌아왔을 때 느끼는 황당함과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망할 년을 만났지."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생각하니 또 열 받네. 썩을 라트렐."

    "라트렐? 그분을 만나신 거예요?"

    "아무 이야기 못 들었어? 뭔가 들은 게 있었으니 이런 무모한 짓을 했을 거 아냐?"

    "네……. 그분께서는 그저 제 안에 당신을 쓰러뜨릴 힘을 실어두었다고 하셨어요."

    "사기꾼 같은 게."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이지혁의 소생은 '그' 이지혁의 소멸을 의미하니까.

    "여하튼 당신 정말 살아난 것 맞죠?"

    "속고만 살았나."

    이지혁이 혀를 찼다.

    "라트렐의 가호가……."

    "거기까지."

    이지혁이 손을 들어 아펠드리체의 말을 막았다.

    "가호는 얼어 죽을. 이건 계약이야. 그년이 나를 소생시키는 대신 나는 멸망을 막아주는 거지. 서로 막장으로 치닫는 계약을 가호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말자고."

    "……."

    아펠드리체는 이지혁의 말을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 사람이 살아났는데. 이 사람이 다시 그녀의 곁에 왔는데.

    아펠드리체는 아무 말없이 이지혁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야! 아프다고!"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에이."

    이지혁도 차마 아펠드리체를 밀어내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달링!"

    "아프다고 이년아!"

    에르카나의 포옹은 아펠드리체와는 격함의 정도가 달랐다.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이지혁이 눈물을 쏙 뺐다.

    "야 이 꼴통아!"

    "오빠!"

    순간 텔레포트를 해온 정해민과 김다솜까지 달려들자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죽여라! 죽여! 그래 어차피 죽을 건데 지금 죽여라!"

    이지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머쓱해진 이들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얼핏 보아도 이지혁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몸을 하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의식을 찾으신 겁니까?"

    슬그머니 다가온 디오레 12세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이지혁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왜? 라트렐 욕이라도 3박 4일 동안 해줄까?"

    "확실하군요."

    이 이상의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세상에 수많은 이들이 존재하지만 신에 대한 존중이 단 1g도 존재하지 않는 이는 이지혁이 유일했으니까. 심지어 마왕조차도 신을 증오할지언정 그들을 저리 비하하지는 않았다.

    "치료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치료 마법은 인간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것이라……. 지금의 이지혁 씨는……."

    "됐어."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치료는 의미가 없었다. 그가 인간으로 되돌아왔다는 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지혁이 그림자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반쯤 의식을 잃고 있는 도가윤을 끄집어내 디오레 12세에게 내밀었다.

    "얘부터 어떻게 좀 해. 이러다 죽겠다."

    "네. 당장 치료하겠습니다."

    디오레 12세가 도가윤을 받아들자 이지혁이 주위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그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와중에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받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이지혁 씨."

    이지혁은 격동에 가득한 눈을 하고 자신에게 주춤주춤 다가오는 최정훈을 보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미리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런 쪽은 취미 없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생각만 해도 소름 돋으니까."

    "…이지혁 씨."

    이지혁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최정훈은 이지혁이 뭐라고 지껄여도 상관없다는 투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안 통하네, 이거.'

    개드립으로 대충 무마해 보려고 했는데 이 양반들은 너무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딱 질색인데.

    "정말 살아나신 겁니까?"

    "…살아난 건 사실이긴 한데, 자꾸 죽었다고 강조하는 것 같아서 이거 영 별로네요."

    "이러다가 또 확 돌아서 날뛰는 건 아니죠?"

    "내가 날뛸 판인데요."

    "…진짜 이지혁 씨 맞군요."

    이지혁은 순간 이들이 자신을 구분하는 기준이 뭔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느꼈다.

    '인생 좀 제대로 살 걸.'

    이 감동적인 순간에 순간순간 '억울함'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들고 있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게 전부 이지혁의 잘못인데.

    "어떻게 된 겁니까?"

    "거참."

    이지혁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나도 이제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나한테 설명을 요구하면 내가 뭐라고 해요."

    "설명하면 되죠."

    "…그거 명답이네."

    이지혁이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가 라트렐을 만났던 이야기, 그리고 라트렐이 선택한 길을 말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분이 떠나셨군요."

    "음. 소멸을 받아들인 거지. 자신의 역할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분이……."

    아펠드리체와 디오레 12세가 받은 충격은 다른 이들의 충격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신의 아이들인 그들이 자신의 신을 잃은 것이다.

    특히나 디오레 12세는 마치 세상이 망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뭐 그렇겠지."

    "아니……."

    디오레 12세가 손에서 빛을 뿜었다.

    "신성력은 아직 존재하는데."

    "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녀의 가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곧 그 가호도 다 하겠지. 그러면 너희는 신과 연결되지 못한 채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택해야 할 거야."

    "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신실한 종일 뿐입니다. 그분이 없이……. 어찌 우리가……."

    "라트렐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

    이지혁의 얼굴은 답지 않게 진지했다.

    "그녀는 너희가 스스로 걸어가기를 바랐어. 모든 아이가 언젠가는 부모의 부재를 겪어야 하듯이 너희 역시 그녀 없이 살아가기를 바랐던 거야."

    "……."

    "너희를 안고 죽는 방법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해서 너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어."

    "그, 그럼 다른 신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베라프를 떠날 수 없는 그들은 베라프와 함께 사라지겠지. 그게 그들의 운명이니까."

    디오레 12세의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신에 모든 것을 바쳤던 그가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라트렐의 가장 강력한 대적자였던 그가 라트렐의 어린양에게 라트렐의 뜻을 전달해야 한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글쎄.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없을 것 같군. 다만 너처럼 신을 잃은 인간이 어찌 했는지는 알고 있지."

    "신을 잃은 인간……."

    "신을 잃은 인류는 신을 버리지 않았지. 신의 가르침을 쫓았을 뿐이다. 너희 역시 그러하겠지. 이제 더 이상 라트렐은 너희에게 뜻을 전해주지 못하지만 그녀의 가르침은 너희에게 남아 있을 터. 그걸 쫓는 건 어렵지 않겠지. 부모가 죽어도 아이가 부모의 말을 기억하듯."

    디오레 12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교단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전적으로 네게 달린 것이겠지. 하지만 기억해, 디오레 12세. 그녀가 너희에게 바란 것은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걸."

    "…기억하겠습니다."

    디오레 12세가 깊은 생각에 잠겨들자 이지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트렐에게는 좋은 감정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었지만 그녀의 의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피조물들을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으니까.

    "너무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이."

    최정훈도 살짝 넋이 나갔다.

    "그럼 그 베라프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되겠죠. 전부 오지야 않겠지만."

    "아이고 머리가……."

    최정훈이 머리를 감쌌다. 인종만 달라도 트러블이 폭발하는 세상인데 아주 다른 차원의 인류들이 몰려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 생각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최정훈은 애써 머리를 가득 채우는 상념들을 밀어 넣었다. 지금은 걱정할 때가 아니라 이지혁의 귀환을 축하해야 할 때였다.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최정훈이 이 감동적인 상황을 축하하려 했다.

    "여하튼 이지혁 씨."

    "됐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됐다니까."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일단 돌아오셨으니."

    "됐다구요."

    "말 좀 들어, 임마!"

    "됐다고!"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또 쓸데없는 말로 분위기 몰아가려고 그러지! 난 그런 거 딱 질색이라니까! 아파 죽겠는데 축하는 뭔 축하예요."

    "그래도 사람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축하는 얼어 죽을. 곧 죽는데 뭔 놈의 축하야."

    "네?"

    이지혁이 씁쓸한 어투로 말했다.

    "이 육체는 한계에 달했어요. 마족화로 바뀐 몸마저 이제는 생명을 잃어가고 있죠. 고칠 방도가 없어요."

    "……."

    최정훈이 할 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죽는다고?

    또?

    "농담이시죠?"

    "농담이면 좋겠지만."

    이지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라트렐이 할 수 있었던 건 제 정신을 소생시키는 것뿐이었어요. 내 몸은 그녀의 권능이 닿는 영역이 아니니까. 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큰일이긴 하지. 멸망은 멈췄으니까."

    최정훈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죽는다고? 이 사람이?

    이지혁은 헛소리는 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 다 해결되었는데."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해피 엔딩은 영화에나 있는 거죠. 그래도 괜찮아요."

    이지혁이 조금은 서글픈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켜야 할 건 지켰으니까."

    그리고 남을 테니까.

    그의 유지가 말이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죽어도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 * *

    최정훈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겨우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해결이 이지혁의 죽음을 담보로 한다면 과연 이걸 해결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인류의 멸망보다는 이지혁의 죽음이 낫다.

    머리로는 그리 생각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최정훈이었다.

    "그럼… 시간이 얼마나 남은 겁니까?"

    "글쎄요."

    이지혁이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루 이상은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길어야 한 시간일 수도 있고……. 사실 몸 상태로 보면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는 않거든요. 내가 고통에는 웬만큼 익숙한 사람인데,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싶을 정도니까."

    "…그렇게나 짧아요?"

    "누구나 원하는 만큼은 살 수 없는 거죠."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지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쁘지는 않아.'

    하나 더 바랄 것이 있다면, 어머니와 인사를 나눌 시간이 남아 있다면 좋을 것 같다. 베라프에서 살아갈 때 그가 가장 아쉬워한 것 중 하나가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지 못했다는 거니까.

    그리고…….

    "그런 얼굴 표정 짓지 말라고."

    이지혁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이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뭐, 그리 즐거웠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은 아니지만, 아주 가치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름 깔끔하게 가고 싶다고. 질질 짜면서 하는 이별 같은 건 내 스타일이 아냐. 그리고……."

    이지혁이 아펠드리체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따라오니 뭐니 하는 개소리 따윈 하지 마. 네가 나를 그만큼이나 괴롭혔으면 너도 겪어봐야지. 남은 인생 동안 부재가 어떤 느낌인지 겪어보라고."

    "잔인하네요, 당신."

    "난 원래 그래."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함께 죽어주는 건 로망이 아냐."

    그의 목소리는 조금 씁쓸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결코 대체할 수 없어 보이는 게 있더라도, 모든 건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지.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될 거야."

    "당신은 그러지 못했잖아요."

    "나는 미련하니까."

    이지혁의 얼굴에 떠오른 처연함을 본 아펠드리체가 입을 닫았다.

    "너는 나만큼 미련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마도……."

    아무 대답 없는 아펠드리체를 보며 이지혁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선택은 그녀의 몫이겠지.

    "뭐, 여하튼… 돌이켜 보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저기요."

    그 순간, 저 멀리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낸 이를 바라보았다.

    "어? 살아 있었어?"

    "…즐겁게 재회하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저도 좀 할 말이 있거든요."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은데, 유언이라도 남길 생각인가?"

    알파가 허탈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바르바체를 쓰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저의 활약을 잊었단 말입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인류는 지금쯤 멸망했다구요!"

    "알지. 그런데 죽은 줄 알았지. 교과서에 실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런 건 사양입니다."

    "희한하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인데, 하체가 날아가고도 어떻게 살아 있지? 원한이라도 남은 건가?"

    "…말을 말아야지."

    알파가 하나 남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런데 너… 왜 거기 있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데 말입니다."

    알파가 자신의 앞에 놓인 바르바체의 시신을 톡톡, 두드렸다.

    "이지혁 씨."

    "응."

    "혹시 제 능력이 뭔지 아십니까?"

    "나야 모르지."

    알파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저는 여러분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이지혁 씨와도 다르지요. 다른 이들이 태생적인 능력자라면, 저는 연구 결과로 만들어진 능력자이니까요. 덕분에 저는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꼭 끝까지 들어야 하는 거냐? 유언이나 빨리하지? 사료로 쓸 내용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아무리 봐도 네가 한 말이 제대로 전달될 것 같지는 않은데? 녹음기라도 켜줘?"

    "일단 좀 들으십시오!"

    "왜 승질이야? 미친놈이!"

    "아, 곧 죽는다구요!"

    "나도 곧 죽어!"

    최정훈은 문득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단 이 인간들에게는 상식적인 반응을 바라지 말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이 둘이 대화를 하면 승천하는 멘탈을 다잡기가 힘이 들었다.

    "두 분, 대화를 좀 빨리 끝내주시죠."

    알파와 이지혁의 고개가 최정훈에게로 홱 돌아갔다.

    "사망 확정자 둘이 대화하는 게 그리 아니꼬워요?"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거기에 왜 딴지만 들어가면 좋다고 합공을 하느냐, 이 말이다.

    "하고 싶으신 대로 충분히 대화 나누시죠."

    알파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여하튼 제 능력은 여러분과 조금 다르거든요. 애초에 저는 능력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능력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아마 이곳에서는 제게서 여러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 것을 보셨을 겁니다. 그걸 링크라고 하는데, 살아 있는 사람과 연동하여 그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죠."

    이지혁이 짜증을 부렸다.

    "미안한데, 보고서로 제출할 생각은 없어? 강의 듣는 기분이라서 좀 졸리는데."

    "금방 끝납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좀 끝내봐."

    "네……."

    알파는 매우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나름 중요한 이야긴데 이렇게 사람을 귀찮아할 수가 있는가. 하체가 날아간 채 억울한 표정을 지으니 감정 전달이 확실하게 되고 있었다.

    "그래도 곧 죽을 사람인데, 좀 상냥하게 대해주시죠."

    "나도 죽는다니까요."

    "…그러네요."

    보통은 이게 웃긴 상황이 아닐 텐데…….

    "그리고 제게는 능력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말이죠……."

    알파가 피식 웃고는 바르바체의 시체 위에 손을 올렸다.

    "죽은 대상의 육체를 이용해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쉽게 말하면 갈아탄다 정도가 되겠네요."

    "어?"

    이지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뭔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란 말인가.

    "지금 제 육체도 원래 제 육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갈아탈 육체는 조금 마음에 드네요. 엉망이긴 해도 갈아타면 상처는 수복이 되니까요. 원래는 이지혁 씨의 몸으로 갈아타려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낫겠네요. 그럼 신사숙녀 여러분……."

    알파가 빙그레 웃었다.

    "조금 뒤에 뵙길. 모든 것이 완전해진 새로운 세상에서 말입니다."

    알파의 몸이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바르바체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

    이지혁이 허탈하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손끝에 혈기를 모아 바르바체, 아니, 알파에게 날렸다.

    콰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겠지."

    하지만 바르바체의 몸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변신하는 와중에 공격받아 쓰러지면 스토리가 안 되겠지. 썩을."

    이지혁이 머리를 마구 긁었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최종 보스를 쓰러뜨렸더니 최종 보스가 변신하고, 그 변신한 놈을 또 쓰러뜨렸더니 히든 보스가 처 나오네! 게임 디자인을 이따구로 처 해놔도 컨트롤러 박살 날 텐데, 실제로 이 짓을 하네? 미친놈들이 진짜!"

    이지혁이 절로 앓는 소리를 냈다.

    "빌어먹을."

    습관처럼 하던 말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렇지. 결국… 인간의 적은 인간일 수밖에 없지."

    용사가 마왕을 무찔렀으니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결론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는 그때부터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사태를 파악한 최정훈이 얼굴을 굳혔다.

    "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저 녀석은 위험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바르바체보다 더 위험해요. 차라리 히틀러가 돌아와서 세계를 정복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구요."

    "…그렇게나?"

    "더한 놈이 될 겁니다."

    저거, 이미지 더럽게 안 좋구나.

    이지혁이 혀를 찼다.

    "좋게 가려고 했더니… 마지막까지 안 도와주네, 진짜."

    이지혁이 머리를 마구 긁었다.

    그의 눈에 허공에 떠올라 있는 바르바체의 육체가 보였다. 걸레짝이 되어버린 바르바체의 몸이 천천히 회복되는 것이 보였다. 저 회복이 끝나는 순간이 아마 알파가 바르바체의 몸을 완벽하게 차지하는 순간일 것이다.

    바르바체의 육체만으로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바르바체는 저 육체로 마나를 모으지 못했지만, 알파라면 분명히 그에 대한 방법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지혁으로는 저 육체의 방어를 뚫을 수 없다. 게다가 알파는 바르바체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 아닌가.

    알파라면 육체를 차지하는 즉시 도망가 이지혁이 자연사하기를 기다릴 것이다. 이지혁이 먼저 죽기만 하면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전투 센스는 바르바체에 미치지 못하지만, 알파는 적절히 비열할 수 있고, 자존심이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하자고 들면 몇 배는 더 까다롭다.

    "별수 없지."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말라니까."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을 보며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뭔 편안한 죽음을 맞겠다고."

    알파를 중용할 때부터 다수의 부작용은 감수했다. 설령 그가 최후의 순간에 이지혁의 목숨을 노린다거나 배신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인류의 전력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크니까.

    하지만 그게 이런 방식일 줄이야.

    '방심의 대가라기에는 너무 크지만.'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거대한 검은 게이트가 바르바체의 육체 위로 생겨났다.

    "저, 저거?"

    최정훈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이지혁의 의도를 눈치챈 것이다.

    "그, 그렇죠. 변이가 완벽하게 끝나기 전에 타 차원으로 보내 버리면 되는 거죠!"

    "뭐, 그렇긴 한데……."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나도 가야 해요."

    "네?"

    최정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아니, 이지혁 씨. 가다니요? 왜……?"

    "바르바체의 몸을 차지한 놈이라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차원에 가둔다고 해도 탈출해서 결국 이곳을 찾아올 거예요. 그런 생각 못할 놈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러니 누군가는 놈을 따라가서 막아야 해요."

    "이지혁 씨가 무슨 수로 저놈을 막는다구요. 이지혁 씨는 이제 살아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이젠 힘도 잃었는데……."

    "어쩐지……."

    이지혁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게 이 말일 줄이야. 라트렐이 정말 제대로 엿을 먹이고 갔네요."

    "네?"

    "방법은 있어요. 영혼을 이곳에 두고 가는 법을 들었거든요. 그 썩을 라트렐에게 말이죠."

    "서, 설마……."

    최정훈의 눈이 떨렸다.

    다시 또 반복되는 것이다.

    베라프에서 그랬던 것처럼 죽지 못하는 삶이.

    "하, 하지만… 이지혁 씨."

    최정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이 상태로 고정이 되는 거잖습니까. 이 망가져 버린 육체, 지옥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육체로 말이에요. 그, 그걸 감내하겠다는 겁니까?"

    이지혁은 대답 없이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이지혁 씨! 안 돼요!"

    이지혁이 피식 웃으며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고마웠어요, 그동안."

    * * *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바르바체의 육체를 차지한 알파를 바라보았다.

    '쩝.'

    인생이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지금처럼 그 사실을 실감한 때가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지만, 아직 마지막 선택이 남은 것이다.

    "그래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다행이지."

    이전에 베라프에 끌려갔을 때는 선택이고 뭐고 없었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이의 의지로 휘둘리는 경험은 그때만으로 족하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이지혁의 팔을 잡았다.

    "거참, 취미 없다니까!"

    "이지혁 씨!"

    최정훈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최정훈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에이 참, 이런 거 질색이라니까."

    "다른,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있을 수도 있겠죠."

    "……."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고 느긋하게 생각할 방법이 없다는 것뿐이죠. 한 삼 일 뒤쯤 그럴 수도 있어요. '아, 내가 그때 이랬으면 지금쯤 편히 죽었을 텐데, 병신같이……'라구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지금 당장 생각나는 방법이 이것뿐인데."

    "그건 너무……."

    가혹하다.

    너무도 가혹하다.

    이제껏 지옥을 겪다가 이제야 안식을 찾아가던 이지혁이다. 그런데 그에게 같은 일을 또 겪게 하라는 건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세상이 망하는 꼴을 보는 게 낫다.

    하지만 그 생각은 결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올릴 수 없을 것이다.

    최정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또다시 걸어가는 이지혁의 등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말이다.

    '단 한 번도 좁혀지지 않는구나.'

    이 머나먼 간극은.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결국 이지혁에게 의존하고야 만다. 그 사실이 분하고 그 사실이 너무도 미안해서 최정훈은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뭐야? 초상집 분위기야?"

    자신을 차마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이지혁이 혀를 찼다.

    "괜히 분위기 어둡게 만들지 말자고. 뭐, 나는 이게 그리 나쁜 마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내가 선택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새드 엔딩은 아니지."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정해민이 피를 토하는 듯 말하자, 이지혁이 손을 뻗어 정해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울지 마라."

    "우으……."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 없던 사람이 다시 없어지는 것뿐인데."

    "이 멍청아."

    "휴……."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망할 놈은 좀 빨리 변신해서 정신이라도 없게 만들든가. 뭐 이리 시간을 넉넉하게 줘서 사람 어색하게 만드냐. 여하튼 끝까지 도움이 안 돼요."

    김다솜이 이지혁의 손을 움켜잡았다.

    "정말…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거예요?"

    이지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맞다. 입만 열면 금방이라도 뭐가 터져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가 아니라 김다솜이.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이지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죽는 것보다는 나은 결말 아닌가?"

    "…그렇지만……."

    "오빠가 푼수라 고생이 많다. 네가 잘 돌봐줘야 할 거야."

    "……."

    이지혁이 김다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지나쳤다. 더 시간을 끄는 것은 오히려 그녀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다시금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람을 확인한 이지혁이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았다.

    "우리가 뭐, 감동의 작별 인사라도 나눌 그런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동감이에요. 그래도 전우니까."

    "전우라……."

    이지혁이 웃었다.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전우.

    서아영과 그의 사이를 그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뭐죠?"

    "예원이한테 양보 한 번만 해주면 안 되나?"

    "당신이 하는 일의 대가로?"

    "그렇게 생각해도 별수 없고."

    "차라리 멸망하죠, 우리."

    "그럴 줄 알았어."

    이지혁이 서아영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그녀마저 지나쳤다. 서아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지혁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병신같이 같이 죽겠다는 생각으로 가는 건 아니지?"

    "…이해력 진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니까."

    이지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봐야 죽는 거밖에 안 된다고, 이번에 갈 곳은 시간도 아주 느린 곳이니, 천천히 생각이나 해봐야지."

    "죽으면 죽일 거예요."

    "…널 데리고 살 최정훈 씨가 걱정이다."

    이지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의 앞을 마지막으로 가로 막은 이들은 아펠드리체와 에르카나였다.

    "음……."

    뭔가 말을 하려던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비키라고 해도 안 비키겠지?"

    "아뇨. 비켜줘요. 다만, 우릴 떼놓고 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어차피 동족도 다 죽었는데 달링이나 따라가야지. 내가 여기 남아서 뭐하겠어."

    "말이 통할 여지는?"

    "없어요."

    "없어."

    "그래, 그렇겠지."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찰거머리처럼 말이다.

    지금 이지혁에게 주어진 운명이 가혹한 것처럼, 이들에게는 이지혁 없이 이 세계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

    "후회해도 소용없어."

    "죽으면 그만이죠."

    "동감."

    "…답도 없네, 진짜."

    육신을 조여오는 고통을 느끼며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최정훈, 서아영, 정해민, 김다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도가윤. 그리고 김다현과 박성찬을 위시로 한 NDF들까지… 모두가 그를 보며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디오레 12세를 필두로 한 베라프 인들의 시선이 모이고, 지구의 인류도 모두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디오레 12세는 눈을 감았다.

    신은 그를 떠났다. 하지만 여기에 인간의 의지가 있었다.

    '의지를 가지고 살라 하셨더랬지.'

    그 인간의 의지를 지금 이지혁이 보여주고 있었다. 라트렐의 가장 큰 숙적이었던 그가 말이다.

    "음, 깔끔하게 끝내자고."

    이지혁이 이죽거렸다.

    "작별 인사를 일일이 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좀 구질구질하지. 원래 이런 엔딩에서 주인공을 등을 보이며 멋지게 사라지는 거지. 그래, 그러니까……."

    이지혁이 잠시 입을 닫았다.

    최정훈은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담담한 척하려 해도 결코 담담할 수 없는 그의 속내를 보는 순간, 차라리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이지혁……."

    "마지막은 영화처럼 말이지."

    이지혁이 몸을 돌렸다.

    "자, 잠깐만!"

    최정훈이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껜 뭐라고?"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니라…….'

    눈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과거 베라프로 끌려갔을 당시, 그가 가장 아쉬워한 것은 마지막에 어머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 이번에는 달라야 할까?

    '아니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제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줄 수는 없다.

    '결국은 달라진 게 없네.'

    이지혁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에 돌아오면 제대로 먹을 테니까, 요리 솜씨나 좀 길러두시라고 말해줘."

    "전하겠습니다."

    "음……."

    이지혁이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체, 아니, 알파의 변이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더 없었다.

    "자, 그럼 여기서 이별입니다, 여러분."

    이지혁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펠드리체와 에르카나도 그를 따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이지혁 씨!"

    최정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지혁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기다릴게요. 만들어놓겠습니다, 당신이 돌아올 곳을!"

    "에, 쟤들도 불쌍한 애들이니까… 너무 구박하지 말고 잘 대해주세요. 최정훈 씨가 신경을 좀 써주면 좀 더 쉽게 이 세계에 적응하겠죠."

    "…예."

    "쓸모가 많을 거예요. 그럼."

    이지혁이 바르바체의 육체 위까지 날아올랐다.

    "진짜 같이 갈 거야?"

    "굳이 대답해야 하나요?"

    "달링 따라가는 게 더 재미있으니까."

    이지혁이 한숨을 쉬며 둘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처음으로 돌아가는군.'

    생각해 보면 베라프에서도 그랬다. 누구와도 공감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의 옆을 지켜준 사람은 이 둘뿐이었다. 그때에 비한다면 상황이 좀 더 나쁘지만 말이다.

    "뭔가 마지막 말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들을 돌아보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이럴 때는 말없이 사라지는 게 더 멋지겠지."

    "달링, 그건 잘생긴 애들에게 어울리는 말이야."

    "그 꼴로 멋을 찾는 건 조금 문제가 있어요."

    "…너희, 가라."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이지혁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세계의 먼지 하나마저도 그 눈에 담아두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늘로 시작해서 천천히 내려간 그의 눈이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재미있었지.'

    그래, 재미있었다.

    힘든 일도, 짜증나는 일도 많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이 세계에 잠시 머무른 시간은 말이다. 이제부터 그가 겪어야 할 길고 긴 이계에서의 삶을 버텨내는 데 이 세계의 기억은 한 줄기 빛이 되어줄 것이다.

    "엄마 좀 부탁할게요, 최정훈 씨."

    "…예."

    "믿고 맡기는 거예요. 우리는 친구니까."

    최정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만 울어.'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자.

    그럼 정말 영영 이별하는 것 같으니까.

    이건 잠시 동안의 헤어짐일 뿐이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안녕이라고는 안 합니다!"

    "물론이죠."

    이지혁이 환희 웃었다.

    지금까지 최정훈이 본 이지혁의 미소 중 가장 멋진 미소였다.

    "그럼 이만!"

    이지혁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던 검은 게이트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최정훈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해 두자.

    잊지 않도록.

    한동안은 마지막이 될 저 모습을 결코 잊지 않도록.

    게이트가 이지혁의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온 순간!

    번쩍!

    바르바체, 아니, 알파가 두 눈을 떴다.

    "이?"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의 육체를 이지혁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혈기가 감쌌다. 그 무엇보다 단단하게 변한 혈기가 아직 완전히 육체에 적응하지 못한 알파를 구속했다.

    "이런 미친! 뭐하는 짓거리야!"

    "그렇게 열 받지 말라고. 아마 이제부터 너와 나는 끝없이 싸워야 할 테니까. 아득할 정도로 긴 세월 동안 치고받아야 하는데, 벌써부터 열 받으면 안 되지."

    "이것 놔, 이 미친놈아아아아아아!"

    "낄낄낄낄, 듣기 좋은 소리군, 그거."

    급격하게 속도를 내 내려오는 게이트를 감지한 이지혁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짧았던 여행은 이걸로 끝이다.

    운명은 그에게 휴식을 허락지 않았다. 죽어도 돌아와서 싸우고 고통받는 것이 그의 운명이니까.

    그럼에도…….

    "괜찮아."

    희망이란 게 있으니까.

    언젠가…….

    언젠가는…….

    자신을 끌어안는 두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이지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후, 무정하게 내려온 게이트는 그와 아펠드리체, 에르나와 알파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우우우웅.

    쩌억 벌어진 게이트의 검은 입이 천천히 닫힌다.

    그리고 소멸.

    게이트가 사라져 버린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이지혁 씨.

    허무한 중얼거림.

    이지혁은 세상을 구하는 대가로 자신을 지옥으로 던져 버렸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것이 최정훈을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

    "일어나요."

    "……."

    "일어나요. 당신은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만들어야죠. 당신 말대로, 그가 돌아올 세상을."

    입술을 질끈 깨문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죠."

    멸망의 위기는 그들을 비껴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자의 업이 있는 법.

    무너진 세상을 재건하고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남겨진 이들의 몫이었다.

    "조금만 쉴게요. 하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걷겠죠. 그가 그랬듯이 말이에요."

    이지혁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최정훈에게로 청명한 하늘의 햇살이 천천히 내리쬐었다.

    * * *

    "이겼나……."

    윤영민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화면 안으로 보이는 상황으로는 모든 것이 끝났다.

    "이긴 게 아닙니다."

    하지만 송정수의 목소리는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겨우 끝난 거지요, 한 가지가."

    "…예, 그렇죠."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라고 표현하기 힘든 결과였다. 인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마지막까지 이지혁의 희생을 요구했다.

    '이 사람아, 왜 그리 다 짊어지는가.'

    세상을 위해 마지막 위기를 짊어지고 사라져 버린 이지혁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끝까지 그들은 이지혁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나눠 질 수 없던 것이다.

    "망할 녀석."

    송정수의 복잡한 음성이 천천히 새어 나왔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

    송정수가 가만히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앞쪽 재떨이에 불을 붙인 담배를 내려놓은 송정수가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멀쩡한 담배 하나가 타들어 갔지만, 윤영민은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저 담배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잖습니까. 언젠가… 언젠가 그는 돌아올 겁니다. 십 년이 걸릴지, 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그가 세상을 지켜낸 보람을 느끼게 해줘야지요. 그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던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속죄라고 생각합니다."

    송정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님께서 짊어져야 할 짐이 무겁습니다."

    "총리님께서 져야 할 짐이 더 무겁지요."

    송정수는 빙그레 웃으며 윤영민을 바라보았다.

    '많이도 성장했구나.'

    과거의 어설프던 모습은 이제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송정수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위치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이 전란에 가장 성장한 사람이 아마 윤영민과 최정훈일 것이다.

    '그걸로 된 거지.'

    그러니 믿을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말이다.

    송정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노력했겠지.'

    그러니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총리님……."

    창 밖을 바라보던 윤영민이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송정수의 입에 물린 담배가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

    윤영민은 아무 말 없이 송정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입에 물린 담배를 빼내 재떨이에 올렸다.

    "정말……."

    윤영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윤영민이 송정수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한참 동안 허리를 펴지 않는 윤영민의 등 뒤로 두 개비의 담배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가만히 흩어지고 있었다.

    * * *

    "엔딩이로군."

    크리스토퍼가 시가를 물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정신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이 정신력이라는 것도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소파에 잠시 몸을 기댔을 뿐인데 미친 듯이 잠이 몰려왔다.

    과거, 전쟁터를 7일 밤낮으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누빌 때도 이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반응 소멸했습니다."

    "그렇겠지."

    크리스토퍼가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끝이군.'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끝났다. 그의 삶을 통틀어 가장 처절하고, 가장 끔찍했던 전쟁이 말이다.

    "지역에 수색대 파견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잔당을 찾아내라. 생존한 마족과 마수가 있다면 척살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열려 있는 마계 쪽 게이트 앞에 바리게이트 설치하고 포대 확충해."

    "예!"

    크리스토퍼가 눈두덩이를 비볐다.

    다른 이들에게는 끝난 전쟁이지만, 그는 아직 마무리를 해야 한다.

    다만…….

    "백악관에 연락해."

    "무슨 말을 전합니까?"

    "이양받은 권한을 이 시간부로 반환한다."

    "국장님!"

    부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수습을 맡기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적어도 안정이 된 후에……."

    "그 안정은 언제 오는가?"

    "……."

    "끝이 없다. 내가 정국을 이끌어야 할 이유는 백 개도 더 찾을 수 있어. 그렇게 이양이 미뤄지다 보면 독재가 시작된다. 우수한 독재보다는 무능한 민주주의가 낫다. 그것이 우리의 이념이 아니던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지쳤어. 그리고 나는 새 시대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야. 이제는 화합의 시대가 오겠지. 한평생을 어떻게 적을 제거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살아온 나 같은 퇴물은 물러나야 할 시기이지."

    "국장님은 절대로 퇴물이 아닙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다만, 이건 내가 결정한 거야. 인류는 이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걸세. 그 시대는 새로운 사람들이 이끌어 나가야 하는 거지. 어쭙잖게 조언이나 하겠답시고 기웃대는 순간, 새 시대에 낡음이 묻어나겠지. 나는 그저 지켜보겠네."

    크리스토퍼가 쓰고 있던 모자를 옆에 내려놓았다.

    부관은 그 장면을 보고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전체 차렷!"

    사무실 내의 모두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경례!"

    모두의 경례를 받으며 크리스토퍼가 내려놓은 모자를 다시 썼다. 그러고는 정확한 경례로 그들의 예의에 화답했다.

    세계의 운명을 짊어졌던 장성의 마지막이라기에는 조촐하기 짝이 없지만, 그 어떤 웅장한 퇴임식보다 가치 있는 마지막이었다.

    "그럼 이제 뭘 하실 겁니까?"

    모자를 내려놓은 크리스토퍼가 빙그레 웃었다.

    "글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 마누라에게 선물을 해야겠지. 그러고 나서는 낚시나 할까?"

    "낚시 말입니까?"

    "그래, 낚시. 언젠가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같이 낚시를 하기로 했거든. 낚싯대나 드리워 놓고 기다려야겠지,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말이야."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걸어 나가는 크리스토퍼의 등은 뭔가 후련해 보였다.

    * * *

    많은 우여곡절 끝에 전쟁은 끝났지만, 세계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너무도 많은 피해를 낳았다. 인류가 이룩해 놓은 거대한 문명은 거의 박살이 났고, 피해자 수는 집계가 안 될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문제는 생존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문명의 부재는 생산력의 부재로 이어진다. 대단위로 만들어놓은 농장을 대부분은 잃은 인류는 당장 식량난이라는 결과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잃은 피해자보다 아사자로 더 많은 이들을 잃게 될 거라는 결과가 나오자 세상은 패닉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해결책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식량은 충분합니다."

    디오레 12세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베라프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곳은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니까요. 라트렐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내다보시고 진작부터 식량을 비축하라 명하셨습니다. 이 세계로 넘어오게 된 대가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식량을 저희 쪽에서 지원하겠습니다."

    베라프의 도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오염된 대지도 저희가 복구시킬 수 있습니다. 정화 마법으로 간단히 해결이 되더군요."

    방사능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땅이 되어버린 수많은 도시들은 대지신의 신도들이 맡았다. 과학으로 답이 없는 문제를 마법과 신성력은 너무도 쉽게 해결해 버렸다.

    "정말 다행입니다."

    최정훈은 조율을 맡았다.

    전쟁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지구와 베라프 양쪽의 신뢰를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최정훈은 지구의 생존자들에게 베라프 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류에 긍정적인 영향과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역설했다.

    덕분에 공동이 되어버린 땅을 일정 부분 내주는 것으로 베라프 인들의 이주가 허락되었다.

    당장 그들에게도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생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동화될 수 있겠지만, 한동안은 한 세계에 두 가지 문명이 공존하게 될 것이다.

    일단 문명 간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피한 것만으로도 성공이었다.

    * * *

    살아남은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와 과학의 혜택이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장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똑바로 올려요!"

    거대한 철골이 폐허가 되어버린 땅 위에 세워지고 있었다.

    서아영이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릴까요?"

    "뭐가요?"

    "우리가 살아온 시간. 그때로 되돌아가기 전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최정훈이 씨익 웃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이 허허벌판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흔한 일이죠."

    최정훈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인류가 이전 시대에 비해 퇴보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인류는 힘을 모았고, 다시 발전했죠. 그리고 결국에는 이전 시대를 앞섰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을 본다면 막연하게 느껴지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과거보다 나아가 있을 겁니다. 그게 인간이니까요."

    "인간……."

    최정훈이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들고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줄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죠."

    "네, 그렇죠."

    "언젠가 돌아올 테니까요. 그때까지 적절하게 발전시켜 놓지 않으면 한 달 정도는 잔소리를 듣고 살아야 할 텐데, 저는 스트레스로 객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시원한 방에서 콜라 빨면서 게임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둬야죠."

    "듣고 보니 하기 싫은데……."

    "하하하하."

    최정훈이 조금은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압니다, 쉽지 않은 거.'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세상은 그가 지켜낸 세상이니까.

    이 순간에도 그는 아마 이 세상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며.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해민 씨가 데리러 올 겁니다. 어차피 비행기 타고 다니면 시간 못 맞춰요."

    "정상회담에 왜 최정훈 씨가 가야 하는 거예요? 대통령급도 아닌데."

    "그러게나 말입니다. 오라는데 어쩌겠습니까."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시대는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이지혁은 이것의 몇 십 배나 되는 부담을 짊어지고 싸웠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친구가 싸우고 있는데, 그가 싸우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는 그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발전에는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한 가지 잊지 말아요."

    "네?"

    "이지혁 씨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랐을 거예요."

    "……."

    최정훈은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지혁의 얼굴이 거기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랬겠죠."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참 바라는 것 많은 사람이에요. 일은 일대로 하면서 행복하라니."

    "원래 성격 나쁘잖아요."

    "그렇죠. 네……. 네. 그래요."

    눈물이 배어 나온다.

    처음 만난 그 순간이 눈에 선하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 얼굴.

    그 얼굴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만들어야지.

    돌아와서 너무나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말이다.

    "바빠지겠죠."

    "여기서 더요?"

    "네. 바라는 것 많은 사람을 만족시켜야 하니까요."

    최정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어 나갔다.

    서아영은 가만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예전 보았던 이지혁의 등과 최정훈의 등이 겹쳐 보인다. 서아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당신이 지켜낸 이 세계에서.

    "같이 가요!"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아련한 바람이.

    불어온 훈풍과 함께 시간은 흘러갔다.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마저도 흐려질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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