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16화 (116/118)
  • [■] 죽는다고 해도 두려울 건 없으니까요. [■]

    ─────

    콰아아아앙!

    가공할 속도로 바르바체의 몸이 바닥에 처박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콰앙! 콰아아앙! 콰앙! 콰앙!

    이지혁의 양손에서 혈기가 뿜어져 나와 바르바체가 떨어진 곳으로 날아들었다. 한 발, 한 발이 바닥에 꽂힐 때마다 거대한 폭염이 인다.

    그런 화염이 마치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만 같은 불의 비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초열지옥처럼 세상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는 불덩어리의 비가 내리고, 지각은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 용암이 되어 흘렀다.

    매캐한 연기와 이글거리는 열기가 사방으로 뿜어진다.

    "큭!"

    이지혁이 얼굴을 굳혔다.

    부족하다.

    지금 그의 공격은 충분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저 바르바체의 완벽한 육체에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나약해지고 있다는 건가?'

    최정훈의 계획에 휘말려 받은 피해가 너무 컸다. 그의 육체가 주변에 마력들을 빨아들여 혈기로 전환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세계에 흐르는 마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과거의 이지혁처럼 마계의 코어에 인을 박아넣고 그 마력들을 모두 활용할 수 있다면야 연료 부족에 시달리지는 않겠지만, 지금 그는 과거 이지혁의 권능을 모두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와 이지혁은 다른 존재니까.

    반면, 바르바체는 마나를 끌어들일 능력도 없는 주제에 인간들이 공급해 주는 마력을 바탕으로 되레 이지혁 이상의 힘을 실시간으로 충전하고 있었다.

    '일단은 저곳!'

    이지혁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틈이 조금 생기자마자 인간들부터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보급선을 끊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 아니던가. 저들만 처치하고 나면 바르바체도 더 이상은 흑마력을 공급받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순식간에 지쳐 버릴 것이다. 지금 이지혁 자신이 지쳐 가는 것 이상으로.

    결심을 굳힌 이지혁이 움직이려는 순간, 바닥으로부터 회색의 유성이 솟구쳤다. 이지혁조차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말이다.

    콰드득!

    솟구쳐 오른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배를 머리에 돋아난 뿔로 꿰뚫었다.

    쿨럭!

    상해 버린 내장에서 피가 역류한다. 이지혁은 줄줄 흘러나오는 피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바르바체의 머리를 내려쳤다.

    쾅! 쾅!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그와 바르바체는 진화의 끝에 있는 생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들은 전투를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 오로지 강해지기 위해서 스스로를 변화시킨 존재들이다.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도 그들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의 싸움이 이런 마구잡이 싸움이라니.

    퍼억!

    이지혁의 주먹이 바르바체의 안구를 터뜨린다. 푸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바르바체는 되레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데? 개싸움도 좀 할 줄 아는군, 이지혁?"

    "나는 그 이지혁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래.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지."

    "뭐라고?"

    바르바체가 붉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이지혁이 너만 한 힘을 가졌다면 나는 이미 가루가 되었을 테니까. 너는 힘은 셀지 몰라도 하나도 활용할 줄 모르는 얼간이에 불과하거든."

    "이 개자식이!"

    이지혁의 머리가 분노로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 미친놈들은 그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었다. 이미 사라져 버린 존재를 말이다. 그는 과거의 이지혁에 비한다면 모든 분야에서 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매번 과거의 이지혁이 지금의 그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인간도, 마족도… 심지어 저 바르바체마저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분석해 봐도 과거의 이지혁이 그에 비해 나은 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기껏해야 저 인간들과 낄낄대며 살 수 있는 그 비위나 사회성이겠지.

    하지만 그게 존재의 우월함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마저도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바르바체?"

    "헛소리?"

    "그래, 헛소리! 나는 이지혁보다 강하다. 강함을 추종하는 너희 마족들이 이지혁보다 강한 나를 두고 이지혁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스스로의 정체성마저 포기하는 꼴이 아닌가!"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입꼬리를 뒤틀어 이지혁을 비웃었다.

    "봐. 멍청하기 짝이 없다니까."

    "이놈이?"

    "멍청한 놈아, 나는 마왕을 초월한 존재다. 당연히 한계가 있는 마족과는 그 사고가 다를 수밖에 없지. 그리고 설사 내가 마왕이라 하더라도 너보다는 예전의 이지혁이 강했다고 평가하겠지."

    이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함을 그런 식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네놈은 죽어도 이해할 수 없겠지. 장담하건대 과거의 이지혁이 나를 상대했다면, 나는 지금쯤 죽었을 거다."

    "이지혁은 죽었어! 그것도 네 손에 말이야!"

    "아니, 이지혁을 죽인 건 내가 아니야. 그 자신이지. 그렇게나 부서져 버린 육체가 아니라 과거 튼튼하던 그의 몸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마왕들도 모조리 쓸려나갔겠지."

    "내가 했던 것처럼?"

    이지혁의 이죽거림에 바르바체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너는 질 딸리는 마이너 카피이지만, 내가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게 해주겠다. 죽은 놈은 고민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나 역시 궁금하군. 과연 네가 죽으면 이지혁과 마주할 수 있을까? 사후 세계가 있다면 네놈과 이지혁의 영혼이 다르게 취급될까 말이야. 그러지 않길 빌어라. 네놈의 영혼 따위는 이지혁을 만나면 갈기갈기 찢겨 나갈 테니까."

    "빌어먹을 놈들이!"

    이지혁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퍼억! 퍼억!

    배가 꿰뚫린 상황임에도 이지혁의 주먹에 실린 혈기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육체의 손상으로 전체의 대미지를 파악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깟 육체에 구멍 몇 개 뚫렸다고 대미지가 클 리가 없다.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

    이지혁의 주먹이 바르바체의 얼굴을 연신 내려쳤다. 한 대 한 대를 맞을 때마다 바르바체의 얼굴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져 갔다.

    "나는 이지혁을 뛰어넘은 존재다! 나는 이지혁 이상의 이지혁이라고! 너희가 아무리 그따위로 소리쳐 봤자, 그건 현실도피밖에 되지 않아! 나는 이지혁보다 우월하다!"

    "큭큭큭큭."

    바르바체가 나직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그 웃음은 이내 광소가 되었다. 몸을 젖히며 웃어 제낀다. 이제는 눈물까지 찔끔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이지혁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혈기가 바르바체의 몸을 옥죄어 들었다. 팔을 우득, 소리와 함께 부러져 나가고, 파고든 혈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내장이 입으로 역류한다. 바르바체는 그 상황에서도 웃었다.

    크게 더 크게.

    이지혁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웃기냐!"

    "크하하하하하하핫!"

    "뭐가 웃기냐고 물었다!"

    입으로 푸른 피와 내장 조각을 마구 토해내면서도 광소를 그치지 않는 바르바체의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눈물까지 빼며 웃던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배 속으로 파고든 뿔을 곧추세우며 말했다.

    "어떻게 우습지 않을 수 있나."

    "……."

    "네가 정말 네 스스로를 과거의 이지혁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어차피 틀린 말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너는 어떠한가. 이지혁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고 있지. 그건 거꾸로 말하면, 네가 그 누구보다 이지혁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지혁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건 너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과거의 이지혁이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이야. 큭큭큭큭, 어차피 너 따위는 이지혁의 변형에 지나지 않아. 그것도 한참 뒤떨어진 변형일 뿐이지."

    "닥쳐!"

    "모르겠다면 알게 해주지."

    꾸우욱!

    오른 주먹을 부러져라 움켜잡은 바르바체가 일순 머리 위에 꽂혀 있는 이지혁의 육체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일순 반신이 날아간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가 둥근 구멍이 뚫린 것처럼 소멸했다.

    "컥!"

    천하의 이지혁마저도 지금의 이 일격에는 비명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모르는군. 하긴 이건 머리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이지혁은 바르바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연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기도 하지만, 애초에 바르바체의 말은 그에게 뭔가를 전달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자, 느껴라, 멍청아."

    바르바체가 이를 드러냈다.

    "물속으로 들어와 버린 육지 동물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

    바르바체의 양손이 이지혁의 몸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단 일격에 팔이 날아간다.

    그러더니 날아간 팔이 순식간에 다시 재생한다. 다시 한 번 바르바체의 주먹이 재생한 팔을 날려 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영혼을 찢어내는 것 같은 기합성과 함께 바르바체의 주먹이 무수한 궤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회색의 마력을 가득 머금은 바르바체의 주먹이 이지혁의 육체를 후려칠 때마다 허공으로 회색의 긴 꼬리를 남긴 유성이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유성의 비가 이지혁의 육체를 두들긴다. 한 방, 한 방이 터질 때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지혁의 육체는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재생하는 순간 다시 터지고, 재생하는 순간 다시 터지기를 반복한다.

    혼을 갈아 넣은 영혼의 일격들이 무수히 터진다.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기를 몇 차례.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려 하는 이지혁을 바르바체는 끈질기게 뒤쫓았다. 이 거리는 그의 거리다. 아무리 이지혁이 강하다고는 하나 육체에 모든 것을 쏟아 넣은 그가 근접전에서 밀릴 리는 없다.

    상식을 초월한 전투는 끝에 가서야 모두에게 익숙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리려 하는 마법사와 붙으려 하는 전사. 그 궁극의 전투가 지금 허공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전투 속에 담긴 힘과 원리는 전혀 다른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허공을 다시 수놓기 시작한 붉은 유성과 회색의 유성을 보며 최정훈이 몸을 떨었다.

    이미 체력은 다 떨어졌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덜덜 떨리고, 관절이 삐그덕댄다. 몸의 근육이 한 올, 한 올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최정훈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전투의 결착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최정훈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승부가 끝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최정훈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비애가 찾아오고 있었다. 물론 최정훈은 전투광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이 끔찍한 전투가 끝난다는 사실이 슬픈 게 아니었다.

    '이지혁 씨…….'

    어떤 식으로 이 싸움이 끝나든 간에 그들과 이지혁의 인연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 * *

    "아저씨, 콜라 사 먹게 1,300원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

    피식.

    난데없이 떠오른 옛 기억에 최정훈이 웃고 말았다.

    "열 캔도 사 줄 수 있어요, 이지혁 씨."

    지금이라면 말입니다.

    * * *

    돌이켜 보면 긴 기억이었다.

    그리고 결코 길지 않은 기억이었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그와 이지혁이 함께한 순간은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없이 충만했다. 죽는다 해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 모든 인연의 끈이 이곳에서 끊긴다고 생각하니, 몸 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 같은 욱신거림이 밀려왔다.

    알고 있다.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쯤.

    최정훈은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서 울고 징징대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고, 과감하게 미련을 끊어내는 것이 훨씬 편히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끊어내지 못하니 인간이겠지.

    인간이 개미보다 못하게 보이는 이 전장에서 최정훈은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자각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리석은 방식으로.

    허공에서 치고받던 두 개의 유성이 서로 얽힌 채 바닥으로 낙하했다. 추락이라고 하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지각의 해일이 최정훈을 덮쳤다.

    "막아!"

    최정훈의 고함 소리가 터지기 무섭게 그들을 두르고 있던 실드가 우윳빛의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거침없이 밀려온 지각의 해일은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다. 집채만 한 높이의 해일이 밀려오는 모습만 봐도 웬만한 사람은 오줌을 지릴 것이다.

    그런데 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흙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당장에라도 뒤로 돌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최정훈은 되레 몸을 바로 세웠다. 몸으로 싸울 수 없다면 정신이라도 지지 않아야 한다.

    콰아아아아!

    지각의 해일이 우윳빛으로 빛나는 보호막을 타고 올랐다. 유리로 만들어진 돔을 시커먼 물이 뒤덮어 버리듯이 스멀스멀 위로, 위로 기어 올라가는 흙더미와 바윗덩어리들이 최정훈에게서 현실감을 앗아가고 있었다.

    '보호막이 조금만 약했으면 생매장되었겠군.'

    저런 괴물들이 싸우고 있는 곳에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 드래곤과 베라프 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쿠르릉! 쿠르르릉!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각의 해일이 몇 번이고 밀려왔다.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이파, 삼파가 묵직하게 세상을 밀어내고 있었다.

    겨우 흔들림이 잦아들었을 때쯤에는 머리 위까지 완전히 메워진 흙더미 덕에 빛조차 사라졌다.

    "리버스 그래비티."

    아펠드리체의 깔끔한 영창과 함께 보호막을 뒤덮고 있던 흙더미들이 허공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옆으로 옮겨지는 흙더미들 사이로 최정훈의 눈이 필사적으로 이지혁과 바르바체를 찾아냈다.

    "저기……."

    보인다.

    반듯해져 버린 세상.

    조금 전까지 용암으로 녹아내린 지각이 식어 굳으며 주변 전체가 암석지대로 변해 버렸는데, 방금 전의 충격으로 모두 깨져 나갔는지 마치 사막 같은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대체 이 주변 땅은 몇 번을 변하는 거야?'

    아마 저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지금 최정훈은 우주에서도 보일만 한 거대한 크레이터 위에 올라서 있을 것이다. 그 범위가 너무 크다 보니 안에서는 평평해 보이는 크레이터 말이다.

    그리고 그 드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아니, '우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저 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지금 저 모습은 '우뚝'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바르바체의 몸은 마치 예리한 칼로 수백, 수천 번 난도질당한 듯 자잘한 흉터가 끝도 없이 덮여 있었다. 모두 재생이 되어 흉터만 남은 상처이지만, 그 상처의 수 때문에 검던 육체가 회백색으로 바뀌어 버린 것만 같았다.

    얼마나 격전을 치렀는지 그 몸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한편, 이지혁은…….

    뚜욱.

    이지혁의 손끝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우악스럽게 손으로 잡아 뜯은 듯 어깨가 통째로 뜯겨 나가 있고, 아래로 보이는 팔에는 곳곳에 허연 뼈가 드러나 있다. 거기에 아랫배는 뻥 뚫려 속이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재생이 안 되고 있어.'

    상처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머리가 날아가도 일순간에 재생해 버리던 이지혁이 지금은 저 상처를 재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바르바체의 몸에 상처를 입힌 만큼 마력을 흡수했을 텐데도 저만한 상처를 재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정말 이지혁이 끝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크르르르."

    이지혁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붉게 물든 눈과 피에 젖어 붉어진 이가 지금 그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잃어가는군."

    바르바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까지의 듣는 것만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저음이 아니었다. 바르바체의 목소리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모르겠군.'

    누가 더 나은 상황인지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도 상처를 재생시켜 낸 바르바체가 더 나은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들은 그런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누가…… 누가 나은 상황이죠?"

    고개를 돌려 아펠드리체에게 묻는다.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모른다구요?"

    "보이지 않아요. 안개라도 낀 듯이. 지금 이곳은 마력의 파장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어요. 그래서 제 통제도 통하지 않아요. 게다가 저들은 지금 제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체계의 에너지를 쓰고 있어요. 누가 나은지는… 그래요, 모르겠네요."

    최정훈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때, 바르바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보이는가?"

    "……."

    "너의 마지막이 말이야."

    "……."

    이지혁의 눈이 더 붉어졌다.

    "크륵."

    목에서 흘러나온 짐승의 울음 소리. 지금까지의 이지혁에게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던 일이다.

    "잃어가는군. 그 찬란하던 이성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던 의지를, 내게 인간이라는 생물을 다시 보게 만들었던 그 모습을 말이야."

    바르바체가 조금은 허무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너는 너무도 이상한 존재였지. 그 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멍청하고 감성적이었다. 마족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발상으로 세상을 뒤집어놓고서는 그 아무것도 아닌 정이라는 것에 집착해 신과 같은 지위를 스스로 집어던졌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 너는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되레 빛나 보였지. 나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 대는 게 너였으니까."

    바르바체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최정훈의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슬프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결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 잔혹한 마왕이 슬픔을 느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지켜보고 싶었다."

    바르바체의 눈이 핏발이 섰다.

    "긴긴 세월 이어온 이 지루하고 하찮기 짝이 없던 삶에 있어 너는 구원과도 같았지. 어느 순간 나의 세상에 뛰어들어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으니까. 네가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지켜보는 것이 더없이 두렵고 즐거웠지. 그래, 너는 그런 놈이었다."

    쓸쓸하게 들린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최정훈은 그리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너는 없군."

    바르바체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게 네가 봐야 할 세상이다."

    "……."

    "네게 주어진 과도한 힘은 너마저 파괴하는군. 예전의 이지혁 역시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곳에서 힘을 추구했다면 나조차 우습게 뛰어넘었겠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때는 그게 더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는데, 너를 보니 알 것 같다. 힘이… 힘이 전부가 아닌 거야."

    "……."

    "끝났다, 이지혁. 해피 엔딩은 없어."

    바르바체가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내가 이긴다고 해도 내게 남는 것은 전멸해 버린 마왕과 소수만 살아남은 마족을 건사하는 것뿐이겠지. 이제 걸레짝이 되어버린 이 육체와 급격히 줄어버린 수명을 붙들고 말이야. 네가 이긴다면? 너는 모든 것을 파괴하겠지. 세상도, 차원도, 그리고 너 자신도 말이야. 이 병신 같은 새끼야."

    바르바체가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재미없고 짜증나는 싸움은 처음이다. 적어도 이전의 이지혁과 싸울 때는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 상황을 즐길 수 있었어. 나는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있는 적을 얻었다. 그건 내게 더없는 축복이겠지. 하지만 그 상대가 하필이면 너라는 것은 더 없는 저주다. 결국 내게 신은 없던 거지."

    이지혁의 입이 열렸다.

    "…바르바체."

    "아직은 기억하고 있나?"

    "아직은……. 그래, 아직은."

    "병신 같은 놈."

    바르바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전투를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싸우면 싸울수록 이지혁은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억도, 목적도…….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보이는 것은 모두 부순다는 본능뿐이다.

    지독하게 가혹한 운명이다.

    그토록이나 고통받은 이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이곳이라니. 이미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이지혁의 잔재에게마저 그는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너는 신이 된 건지도 모르지. 신이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는 존재니까. 그 어떤 신조차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차원의 파괴, 그 미친 짓을 이룰 만한 힘을 가진 게 너니까."

    그렇다면 가장 가여운 신의 탄생이겠지.

    바르바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너의 미래를 보았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파괴라는 본능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부수기만 하는 너를 말이야. 그건 너무 가혹한 미래지. 그러니 여기서 끝내자, 이지혁.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은 너를 죽여주는 거다."

    이지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바르바체."

    "말해라. 유언을 들어줄 정리 정도는 있으니까."

    "나를 죽일 수 있나?"

    "물론."

    "내 삶을 끝낼 수 있나?"

    "물론이다."

    이지혁의 입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미소.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미소가 이지혁의 입가에 지어졌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이지혁의 눈이 순식간에 검붉게 물들었다.

    바르바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 병신 같은 놈!"

    바르바체가 전력을 다해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조차 단 한 번도 진입해 본 적이 없는 속도였다.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여 달려든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목에 주먹을 틀어박았다.

    콰드드득!

    뜯겨 나간 뼈와 살이 폭발에 휘말린 돌 조각들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끅."

    재생하지 못하는 육체.

    목과 윗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이지혁의 입으로 피가 흘러내린다.

    "그만……."

    최정훈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꽈악.

    이지혁에게 다가가려 하는 최정훈을 서아영과 아펠드리체가 붙들었다.

    "안 돼요."

    "그……."

    "안 된다구요!"

    흘러내린다.

    피가.

    그리고 눈물이.

    지금 이곳에서 긴 싸움이 그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흘러내린 이지혁의 피와 함께 말이다.

    * * *

    "저 새끼, 죽빵 한 방만 후리면 안 될까?"

    "아, 그러시구나."

    뭐지?

    흘러 들어온다.

    기억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네가 그 이지혁이라는 인간인가?"

    아펠드리체와 처음 만났던 순간이.

    "뭐야? 너, 영혼이 없잖아?"

    에르카나와 처음 만난 그 순간이…….

    뭐냔 말이다.

    이지혁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

    육체뿐 아니라 기억과 정신마저도 완전히 그의 의지대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의 기억이 제멋대로 떠오르고 밀려오는 것은 그가 통제를 잃고 죽어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지혁 씨는 그걸로 괜찮습니까?"

    불쾌감.

    진득한 불쾌감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짜증,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그를 괴롭히는 것은 떠오르는 기억들과 함께 당시에 이지혁이 느낀 감정들이 그대로 흘러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지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크륵."

    터져 나간 성대는 바람 끓는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아."

    어머니의 말이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자신이 죽어도 괜찮다던 그 사람.

    세상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다 내 자식이 그 순간까지 조금이라도 편한 것이 낫다 하던 그 사람.

    이지혁으로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성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짐작으로밖에 다가갈 수 없는 감정이었으니까.

    더없이 비이성적이고, 더없이 한심한.

    하지만 더없이… 더없이 따뜻한.

    "야, 이 썩을 인간아! 왜 이리 늦게 왔어!"

    수많은 기억 중에서 이런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것은 참 비극이었다. 하지만 다른 기억을 떠올린다고 해도 딱히 이것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애정을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예원이라는 사람이니까.

    입으로는 화를 내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은 이예원의 특기니까.

    그의 동생, 그가 지켜야 할 사람… 하지만 지켜주지 못한 사람.

    "나는 달링만 있으면 돼!"

    우스운 이야기다.

    이지혁이라는 사람을 가장 믿는 이가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심지어 천 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아펠드리체도 아니고, 원래라면 그의 적이 되었어야 할 마왕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에르카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그리 맹목적인 감정을 일방적으로 보낼 수 있는 걸까?

    그녀를 대할 때마다 귀찮음이라는 감정이 앞섰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따뜻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영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힘이 되기도 했다.

    이해하지 못함에도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존재. 에르카나는 그렇게 이지혁을 버티게 해주었다.

    "비이성적 교환. 교환할 가치 없음."

    "너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

    "육군 대령 정인수입니다. 군대는 다녀오셨습니까?"

    "아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 * *

    수많은 인연들의 기억이 그의 머리를 헤집어놓고 있었다.

    '이게 주마등이라는 건가?'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의 삶은 불과 하루쯤에 불과하다. 그 이전 이지혁이 살아온 삶은 그저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그의 삶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주마등이 떠오른다는 말인가.

    그리고…….

    "다녀오세요."

    그 목소리는 너무도 선명했다.

    "기다릴 테니까."

    선명하고… 너무도 선명하고…….

    그리고…….

    이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붕괴되어 더 이상은 재생조차 하지 못하는 육체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한발 물러선 듯 그 고통을 그저 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것처럼.

    "…빌어먹을."

    바르바체가 이지혁을 보며 중얼거렸다.

    "끝까지 기분 더럽게 하는군."

    무슨 뜻일까, 저 말은?

    천천히 감각이 돌아온다. 고통에 가려져 있던 감각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지혁은 바르바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물?'

    우는 건가? 내가?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지금 그가 맞이하고 있는 것이 죽음이라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지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얻을 수 없는 신기루였다. 간절히 갈망하고 또 갈망하지만, 결코 얻을 수 없는.

    그래서 더 목이 마른, 그런 갈망.

    그리고 그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이 모든 것의 소멸이라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애초에 그는 가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울고 있다고?

    어째서?

    "마지막이 되어서야 감상적이 된 모양이군. 하지만 어쩌지? 너는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네가 죽고 나면 이 별을 지워주지. 죽어간 동료들의 애도를 위해 말이야."

    왜 이런 말을 내게 하는 거지?

    내가 이지혁으로 보이나?

    이들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다.

    웃음이 난다.

    이 기괴한 생물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그와 싸워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그가 완벽한 자신의 대적자의 포지션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지독할 정도의 이기심.

    그리고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그의 적개심을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완전하게 잘못되었다.

    이지혁은 이 별의 존재들에게 애착을 느끼지 않으니까.

    우주의 다른 끝에 있는 별이 터져 나간다고 해서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지금 이지혁이 딱 그런 심정이었다.

    관계없는 것들의 죽음, 그리고 소멸.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바르바체는 여전히 영문 모를 말을 그에게 늘어놓았다.

    "분한가?"

    "……."

    "그 질긴 생명력이 원망스럽겠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데, 죽을 수도 없지. 그럼 이곳에서 모두가 죽어가는 꼴을 지켜보라고. 그 일그러진 얼굴로 말이다."

    푸욱!

    바르바체가 이지혁의 목에서 손을 뽑아냈다.

    피가 거의 말라 버렸는지 목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는데도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아니, 그것도 너무 잔인한 처사인가. 약속은 지켜야겠지. 그 길던 삶을 내 손으로 끝내주지. 그토록이나 원하던 일이니까 말이야."

    바르바체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실감이 난다.

    저건 막을 수가 없다. 지금의 이지혁이 바르바체의 공격을 피해내거나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말라 버렸으니까.

    육체는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대기에 흐르고 있는 마력도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최소한의 마력 공급마저 끊겨 버린 이지혁은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딱히 저항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할 만큼 했음에도 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긴 인연이었다. 결국 너는 나도 파멸시켰지. 완벽한 승리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지. 껍데기뿐이라고 해도 너는 이지혁이니까."

    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들은 그가 이지혁이라는 사실을 놓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지금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그 순간, 이지혁은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혈기가 빠져나가자 이성이 돌아오고 있다. 조금 전,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던 그가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그럼 적어도 마지막은 짐승으로 죽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잘 가라!"

    바르바체가 오른팔을 뒤로 힘껏 당겼다.

    콰아아아앙!

    이내 거대한 폭음이 터지며 이지혁의 몸이 태풍에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큭!"

    이지혁은 전신을 뒤덮는 격통에 전율했다. 한참을 날아서야 바닥에 처박힌 이지혁이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살아 있어?'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그는 방어 능력을 잃었다. 바르바체가 마음먹고 그를 공격했다면 지금쯤 완벽하게 소멸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살이 있는 건가.

    천천히 느긋하게 죽일 작정인가?

    그 바르바체가?

    의문은 금세 풀렸다.

    "감히!"

    그의 시야에 전신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바르바체의 모습이 보였다. 명백히 공격을 당한 모습.

    하지만 누구에게?

    * * *

    최정훈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게 무슨 짓인지는 잘 알고 있겠죠?"

    "물론이죠."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르바체가 살아남는다면 우리는 저놈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공격해야 하는 거죠. 놈이 완전히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기 전에. 선방은 제대로 날린 것 같은데요?"

    "이지혁을 제거하고 나서도 늦지 않았어요."

    "뭐, 그렇겠죠. 하지만……."

    최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막 타를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 사람은 죽여도 제가 죽여요. 냄새나는 마왕에게 빼앗길 수는 없죠."

    최정훈이 낄낄대며 바르바체를 노려보았다.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지겨운 소리군, 지겨운 소리야."

    그것도 잘 알아들으라고 이쪽 말로 해주는군. 저리 배려심 깊은 마왕이 또 있을까.

    "어차피 일시 동맹이었잖아? 이제 동맹을 깰 차례지. 인간의 저력이 뭔지 보여주지, 마왕!"

    "큭큭큭!"

    그 순간, 바르바체가 최정훈에게 날아들었다.

    "막아!"

    최정훈에게 수천 겹의 실드가 둘러쳐졌다. 그리고 그의 앞을 드래곤들이 틀어막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바르바체의 앞을 막아선 드래곤들은 순식간에 말 그대로 '분해'당했다. 드래곤들을 날려 버리고 최정훈의 바로 앞까지 날아온 바르바체가 아펠드리체 등이 손을 쓸 틈도 없이 실드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터지며 최정훈이 피를 뿜으며 허공을 날았다.

    "최정훈 씨!"

    서아영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콰당!

    바닥에 쓰러진 최정훈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 버린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닥을 짚었다.

    "퉤!"

    입안에 잔뜩 고인 피를 뱉어낸 최정훈이 고개를 들고 이죽였다.

    "한 방에 인간 하나도 죽이지 못하는 걸 보면… 너도 약해졌군. 그 정도로는 우릴 이기지 못할 텐데?"

    "네 말에 말려들 생각은 없다, 인간. 어차피 모두 죽일 셈이었다. 이제 이곳에는 질렸어."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바르바체를 보며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갈겨!"

    화력이 쏟아진다.

    에테르와 마나, 그리고 신성력까지.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힘이 바르바체를 향해 쏟아졌다. 급히 거리를 벌린 아펠드리체와 NDF들의 머리를 지나 바르바체에게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나긴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화려하고, 또 화려하게.

    그리고 그 화려한 폭발의 한편에서 이지혁의 고개가 살짝 꺾이고 있었다.

    "…뭐라는 거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는 거냐고!"

    목이 터져라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폭음에 가려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싸 쥔 이지혁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폭염과 폭음이 뒤덮어 버린 세상에서 잿빛으로 뒤덮인 이지혁의 눈이 최정훈을 향해 돌아갔다.

    * * *

    무모하다.

    전신에 피 한 방울 제대로 돌지 않고 있지만, 이지혁은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절대 불가능하다.

    현재 바르바체와 남은 이들 간의 전력 차는 코끼리와 개미 정도의 차이였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개미는 코끼리의 귀를 파고들어 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어떠한 '불편함'을 줄 수 있겠지만, 이곳의 인간들은 바르바체에게 '귀찮음' 이상의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저들이 약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전력도 결코 약하지 않다. 거기에 전투와 전투를 겪으면서 단련된 저들은 웬만한 차원은 순식간에 정복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체는 그 수준을 예전에 뛰어넘었다.

    지금 저들의 공격으로는 바르바체의 육체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시선의 차이가 있다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할 리가 없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최정훈과 바르바체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저항하는가.

    그런데 왜 포기하지 않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지능은 아마 저들을 아득하게 뛰어넘었을 터, 그런데 오히려 세상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가득 차버렸다. 마치 과거의 이지혁이 아펠드리체를 똑똑하지만 멍청하다고 비웃듯이 말이다.

    '왜 포기하지 않는가.'

    의미 없는 저항일 뿐인데,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는데…….

    그런데 왜…….

    "큭!"

    이지혁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울린다.

    그의 머리가 윙윙 울리고 있었다.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고!"

    무언가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 *

    "쳐 갈기라고!"

    최정훈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막지 못한다.

    알고 있다.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할 최정훈은 아니었다.

    최상의 상황은 이지혁과 바르바체가 동귀어진을 하는 것이다. 둘 다 죽어주거나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박살이 나고 남은 하나는 다른 이들이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을 입는 상황. 그게 최정훈이 노린 결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게 시나리오를 짠다고 해도 현실이 거기에 동조해 주리란 법은 없다. 마지막까지는 비슷하게 흘러갔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르러서 시나리오가 틀어졌다.

    바르바체의 여력이 너무 충분히 남아버렸다.

    게다가 상황이 더욱 좋지 않은 것은… 마지막에 남아버린 것이 바르바체라는 사실이다. 설령 바르바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고 해도 자신들은 바르바체를 죽일 수 없다.

    그의 육체는 그들의 공격으로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으니까. 마력의 공급이 끊어졌다고 해도 그 육체만으로도 바르바체는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신의 육체라는 건가?'

    최정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지혁은 신의 능력을 얻었지만, 바르바체는 신의 육체를 손에 넣었다. 그 어느 쪽도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겠지만, 지금 그들의 입장에서 더 두려운 것은 단언컨대 신의 육체를 손에 넣은 바르바체였다.

    이지혁을 상대로는 무언가 해볼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바르바체를 상대로는 그들의 어떤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정훈은 공격의 고삐를 멈추지 않았다.

    "갈겨! 처 갈기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과장되게 손을 흔들어 독려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최정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어째서?'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다른 이들은 왜 아무런 불평 없이 그의 말을 따르고 있을까?

    그들 역시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길고 긴 전투의 끝이 결국에는 패배로 끝나고 만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왜?

    '분전했다'라는 마지막 평가를 남기고 싶어서?

    아니면…….

    그 순간, 커다란 하울링이 터져 나왔다.

    울음소리.

    인간의 것도, 짐승의 것도 아닌 울음소리가 터지는 동시에 바르바체를 둘러싸며 공격을 하던 이들이 단숨에 튕겨 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큰 타격을 주기 위해 바르바체에게 가까이 접근한 이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순간적으로 온몸이 분해되어 소멸했고, 그나마 거리를 조금 유지하던 이들은 인간 탄환이라도 된 듯 뒤로 튕겨 나갔다.

    콰아앙! 콰아아앙!

    튕겨 나간 이들이 뒤쪽의 무리에게 틀어박히며 폭음이 터졌다.

    단 일격.

    공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울음 한 번에 인류의 전력이 완벽하게 무력화되어 버렸다.

    "하……."

    허탈함조차 밀려오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하찮은 것들."

    가라앉는 폭염 속에서 바르바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깨에 들러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이다. 공격이 쏟아지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바르바체의 모습를 보며 최정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길고 긴 전쟁은 끝났다.

    인류는 패배했다.

    '분전이라 할 수 있을까?'

    최정훈은 웃어버렸다.

    분전이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다는 말인가. 결과가 같은데.

    분전했기 때문에 결과가 달라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이곳을 지켜보며 기도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 말할 수 있겠는가. 분전했지만 실패했으니 우리를 원망하지 말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그런 병신 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 리 없잖아.'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는 말은 핑계다. 그들이 잠시 짊어진 짐을 이지혁은 항상 져왔으니까. 그 작은 어깨가 혼자 짊어지던 짐을 수많은 이들이 나눠진 것뿐인데, 그 무게가 무겁다고 징징대란 말인가.

    바르바체가 최정훈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결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말이다.

    최정훈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인간인 그가 느끼기에도 한숨이 날 만큼 느린 걸음인데, 저 마족이 느끼기에는 얼마나 느리게 걷고 있는 걸까? 저건 오히려 저놈에게는 빨리 걷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더럽게 분위기 잡네."

    입에서 흘린 피로 형편없는 몰골이 된 서아영이 최정훈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최정훈은 서아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

    의문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아영을 보며 최정훈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비켜 있어."

    "…최정훈 씨."

    "알잖아. 막을 수 없어."

    서아영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가 무얼 한다고 해도 바르바체를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정훈을 이대로 바르바체와 대면하게 둘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마주해야 한다면 당당하게. 비굴하게 뒤로 숨는 모습을 저놈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인간의 모습으로 남길 수는 없지."

    무슨 말로도 최정훈의 결심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아영이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제 발로 죽음으로 걸어가는 최정훈의 앞길을 터줄 정도로 그녀는 대가 세지 못했다.

    그때, 아펠드리체가 말없이 서아영을 끌어당겼다.

    "아……."

    뭔가 말하려는 서아영을 보며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저었다.

    "열어줘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

    "비록 그게 남기는 게 고통뿐이라 해도."

    서아영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 * *

    찰칵.

    최정훈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금 전 그가 흘린 피 때문에 반쯤 젖었다 마른 담배는 속이 울렁거리는 비린내를 풍겨 댔다.

    '이 와중에 같이 담배 한 대 피워줄 사람이 없다는 게 참 아쉽군.'

    저 뒤쪽에 쓰러져 있는 이지혁은 담배를 피울 줄 알까? 아니, 이성의 화신이 되어버린 저놈은 그런 걸 왜 피워서 신체를 혹사시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

    '여러모로 아쉽다니까.'

    저 칼 같은 NDF 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함께 담배를 피워주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최정훈이 낄낄 웃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꺾여 나간 다리 때문에 절뚝일 수밖에 없지만, 최대한 바른 걸음으로 보이도록 애썼다.

    "큭."

    바르바체가 낮은 웃음을 흘리고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미학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가 그렇게 중요한가? 결국은 죽음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낳을 텐데."

    "동의하는 바야."

    최정훈이 담배 연기를 뿜었다.

    "확실히 너희와 이야기하다 보면 인간이라는 동물이 꽤나 감상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 하지만 뭐 어때. 그게 인간의 미학이라면, 그걸 인정하고 관철시키려 하는 것도 인간답지 않겠어?"

    "궤변이로군."

    "그럴지도."

    최정훈은 눈앞에 선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서 있는 이 괴물을 말이다.

    고개를 들어도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바르바체의 가슴 어림뿐이었다. 그 압도적인 피지컬을 보는 순간, 그의 본능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나라 하나가 날아가는 게 덜 무서운 느낌인데.'

    머리 위로 핵이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봐도 이리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바르바체의 육체는 생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바르바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어억!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이 되지 않았다.

    깨달은 것은 조금 뒤. 팔이 있어야 할 곳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이 그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었다.

    "끄윽."

    최정훈이 이를 꽉 깨물었다.

    공격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손짓에 그의 팔이 터져 나가며 어깨 아래로 잘려 나간 것이다.

    "흐음, 쉽지 않군. 적당히 죽지 않게 공격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야. 지금의 내 기준으로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하군. 너무나도."

    "…그럴지도 모르지."

    팔이 날아가며 잃은 혈액 때문인지, 아니면 고통 때문인지 최정훈의 얼굴이 하얗게 바래갔다.

    "너는 고통스럽게 죽는다."

    "……."

    "네가 생각하는 미학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아. 나를 힘들게 만든 것과, 저 이지혁에게 제대로 엿을 먹인 것에 경의를 담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네게 고통을 줄 것이다. 철저하게 너라는 존재를 부정할 것이다. 그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물론 너희의 미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말이야."

    이를 드러내며 웃는 바르바체를 보고 최정훈이 눈에 힘을 주었다.

    흔들리지 마라.

    "그럼에도 저항할 텐가?"

    "……."

    "도망쳐 봐. 등을 보이고 달아나 봐. 그러면 내가 귀찮아서 일격에 죽여 버릴 수도 있잖아. 이곳에서 네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고 해서 네가 얻는 게 무엇이지? 그저 고통밖에는 없어. 알고 있을 텐데?"

    "알다마다, 멍청한 마왕아."

    최정훈이 남아 있는 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주먹을 꽉 쥐고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네가 아는 인간이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는 인간이란 건 '저항하는 자'다. 고개를 숙여 현실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는 거야.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잃는 거지. 고통? 그게 뭐라고 내가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말이냐."

    최정훈이 씨익 웃고는 말했다.

    "내가 네게서 달아나지 않으면 너는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잊지 못하겠지. 인간을 잊지 못하겠지. 이게 내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자. 복수다. 엿 같은 마왕이여."

    바르바체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 * *

    "내가 가장 너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말해줄까?"

    "아니.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떠벌이 마왕?"

    바르바체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지혁도 그렇고, 이 인간도 그렇고… 도무지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 입이라는 것을 한시도 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너희가 그리 행동하면 내가 당연히 너희를 기억할 거라 재단하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

    딱!

    바르바체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최정훈의 남은 팔마저 날아갔다.

    쇼크로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충격이 밀물처럼 덮쳐 왔지만, 최정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신기하네.'

    보통은 양팔이 날아가는 순간 사람은 죽을 텐데…….

    고통은 선명하기만 하고, 의식도 딱히 흐려지지 않았다. 이런 순간조차 그가 죽을까 봐 조심조심 상처를 입히는 바르바체의 배려심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가?

    "최정훈 씨!"

    그는 비교적 담담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서아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발악하는 서아영과 그런 그녀를 막아선 이들의 거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못할 짓이긴 하지.'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세우는 싸움이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그에게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가 농락당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안 된다.

    다른 이들에게, 특히나 서아영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왜 죽는 건 너인데 네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더 슬퍼하는 건지 모르겠군."

    최정훈이 입을 열었다.

    그도 모르게 꽤나 대미지를 입었는지 혀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너는 평생 이해하지 못하겠지."

    "……."

    "네가 죽어도 슬퍼해 줄 이가 없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말이야."

    "인간의 감정 따위는 불필요한 작용이지."

    "그럼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바르바체는 입을 닫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이해가 가지 않는 인간들을 바르바체가 이해하려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을.

    최정훈의 말대로 그는 인간이라는 것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호기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나 자신이군.'

    그는 이미 인간을 멸종시키기로 했다.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이미 없애기로 한 인간에게 왜 호기심을 가진다는 말인가.

    그들의 사고가 어떻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든 그게 바르바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가장 목을 매고 있던 건 나라는 말인가?"

    바르바체가 낮게 자조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거의 멸망해 버린 동족에 대한 미련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바르바체가 비릿한 비웃음을 흘렸다.

    "쓸데없는 집착이었군. 나도 너희를 비난할 자격은 없는 모양이야. 그러니 이제 끝내주마. 너희는 용감했다. 네 말대로 너만은 내가 기억하도록 하지. 그러니 편히 잠들어라, 최후의 '인간'이여."

    바르바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인간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를 살려두고 마계로 끌고 가 천 년의 고문을 한다고 해도 이자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자를 굴복시키는 방법은 정신을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파괴해서 굴복시키는 것은 그의 패배를 의미한다. 정신이 파괴된 최정훈은 더 이상 최정훈이 아니니까.

    패배.

    처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패배.

    그를 패배시킨 자가 다른 이도 아닌,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더없이 어이없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바르바체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걸로 모든 것을 끝낸다.

    바르바체의 손끝이 자신의 머리로 향하는 것을 보며 최정훈은 몸에 힘을 뺐다.

    저항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싸울 수 없는 자와 싸우겠다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발악이니까.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가 바르바체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다. 바르바체는 그가 발악하고, 소리치고, 두려움에 떨기를 원할 테니까.

    절대 그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

    겉으로는 후회 한 점 없다는 얼굴을 유지해야 한다.

    실제로는 어떠냐고?

    '미칠 지경이지.'

    어느 미친놈이 할 것을 다 하면 죽는 순간에 후회가 없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후회가 없다고?

    남은 것은 모두 후회뿐이었다.

    불가항력적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가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정훈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짓눌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저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지혁의 모습을 한 이가 고통에 겨워하고 있지만, 그건 그저 이지혁의 모습을 한 이일 뿐이다. 그러니 돌아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빈자리를 그의 물건이나 사진으로 채워 위안받기도 하니까. 이젠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모습을 한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라볼 가치는 있었다.

    * * *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냐고.'

    이지혁은 자꾸만 주저앉으려 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최정훈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무감정한.

    그저 바라보는.

    "나는 아니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무감정할 수밖에.

    그가 바라보는 곳에 그가 원하는 이는 없으니까. 그는 이지혁이 아니니까.

    아무리 이지혁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근본적으로 이지혁과 달랐다. 최정훈이 그를 바라보는 이유도 알 수 없고, 그 행동에 동조해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최정훈이 뭘 원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바르바체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병신 같은 놈.'

    승부의 결과를 이리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최정훈이다. 그가 바르바체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기야…….

    이지혁이 이겼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겠지. 결국 인간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든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 들러리들이 승부의 방향을 가르고 말았다.

    그러니 통쾌하게 웃어버리면 된다.

    너희가 선택한 결말이 이거라고.

    나 역시 혼자 죽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게 비웃으면 된다.

    그런데…….

    왜 저놈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단 말인가.

    그리고 왜 그는 그런 최정훈을 비웃을 수가 없는가…….

    그리고 바르바체는 왜 그에게 고통을 주겠답시고 인간을 죽이려 든다는 말인가.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데.

    욱씬!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몰려왔다.

    '아니야.'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소멸했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지혁이 그의 육체를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라진 자가 돌아올 수는 없으니까.

    이 두통은 과거의 이지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이지혁이 아직 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고, 그의 몸을 되찾으려 든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는 이미 모든 힘을 잃었으니까.

    그가 아직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지혁이 완벽하게 소멸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고 있네.]

    그의 몸이 흠칫했다.

    들려온다.

    비웃음이 가득한 목소리.

    '그랬지.'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기억.

    그저 자료를 나열해 둔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억들이 구체화되어 스스로의 인격을 갖춰간다.

    그건 '과거'의 이지혁이 아니라, '현재'의 이지혁의 바람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경멸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동경할 수밖에 없던 과거에 대한 호기심이 이지혁의 존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저 환상일 뿐인.

    인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기억을 통한 재구성.

    너무도 많은 기억과 너무도 많은 사례가 있기에 정밀하기 구성되는 것뿐이다. 영혼이 없는 기억 따위는 인격이 될 수 없으니까.

    […려들어!]

    '뭐라고?'

    노이즈 가득 낀 것 같던 목소리가 소리치고 있었다.

    점점 더 선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달려들… 고, 이 병신 새끼야! 손가락… 까딱할 힘이 남았으면… 뜯어버려!]

    명확하지 않다.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지혁이, 아니, 이지혁의 기억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 너무도 확실했다.

    '병신 새끼.'

    어떻게 덤비란 말인가.

    어떻게 저놈이랑 싸우라는 말인가.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단 한 줌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데.

    그의 눈에 바르바체가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들어왔다.

    저 손을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최정훈은 깔끔하게 이승과 작별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모두가 죽는다. 모두가.

    인간의 죽음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는 왜 인간에게서 관심을 끊어내지 못한단 말인가.

    혼란스럽다.

    그저 혼란스럽다.

    인간이었고, 마족이었으며, 이제는 인간도 마족도 아니게 되어버린 그는 대체 누구에게 물어 이 혼란을 풀어야 한다는 말인가.

    [지랄하고 있네!]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 짜증이 잔뜩 담긴 그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쪽팔리게 징징대지 말라고! 그럴 시간에 움직여!]

    움직이라고?

    어디로?

    [닥치고…….]

    몸에 힘이 들어간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지혁의 전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치 다음에 떨어질 말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말이다.

    [달려들어!]

    그 순간, 이지혁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스스로가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대부분의 힘을 잃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을 다 한다고 해도 바르바체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짓은 자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바르바체에에에에에에에!"

    그는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외친다.

    달려들라고.

    기억이 말한다.

    지금 저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기억은 이지혁의 기억이다. 그의 기억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의 것이다. 그러니 그 기억은 자신의 기억이다.

    결국 조금 전부터 소리치고 있던 것은 바로 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핏발이 선 눈으로 이지혁이 달려들었다. 그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뽑아내며.

    "큭?"

    바르바체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저런 힘이 남았나?'

    풀 한 포기 뽑을 힘도 없던 놈이 무슨 기력으로 달려든단 말인가.

    "먼저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주지."

    이지혁에게로 몸을 돌린 바르바체가 마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웅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죠, 바르바체 씨."

    마지막의 마지막을 기다려 바르바체의 등 뒤로 잠입한 알파가 척추에 마검을 틀어박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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