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3화 (103/118)
  • [■]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

    ─────

    "마왕 다섯 체 전원 제거 완료입니다!"

    "좋았어!"

    상황이 전파되자마자 정인수는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우아아아아! NDF, 이 기특한 새끼들!"

    마왕을 잡아냈다.

    그것도 무려 다섯이다. 보고받은 대로 한반도에 떨어진 마왕의 숫자가 다섯이라면, 그들 모두를 잡아낸 것이다.

    NDF가 더 강해졌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 짧은 시간 내에 마왕을 모두 잡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정인수가 쾌재를 불렀다.

    "그럼 이제 이쪽은 해결된 건가?"

    아무리 마수들이 많이 날뛰고 있다고는 하나 마왕 다섯을 잡아낸 NDF가 합류한다면 순식간에 이들을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밀어내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마 이 마족들과 마수들을 쳐 죽이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흥분한 정인수가 소리쳤다.

    "피해는?"

    "거의 없답니다. 한둘 정도가 부상을 당하기는 했는데, 그 정도면 싸게 먹힌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사망자도 없는 건가! 와!"

    "발사 준비됐습니다. 발사합니까?"

    "묻지 말고 갈겨!"

    "예!"

    화력을 마수들에게 쏟아부으면서 정인수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피해가 거의 없었어.'

    인류 최후의 날이니, 둠스 데이니 말은 많았지만, 이 정도면 선방했다 수준이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한 최선의 결과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이지혁을 붙들어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이 후방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보다 더 기뻤다.

    "그래서 지원은 언제 온대?"

    "그건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뭐, 아무려면 어때. 그 양반들이 게으른 사람들도 아니고, 금방 오겠지."

    정인수가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 * *

    "미국으로 바로 간다고?"

    - 예.

    최정훈의 전화를 받는 송정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물론 미국이 지금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하네만, 자네들이 빠져 버리면 이쪽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인데……. 화력이라도 퍼부어서 지금 몰려 있는 마수들이라도 정리해 주면 안 되겠나?"

    - 쉽지 않습니다. 에테르나 마나나 무한한 것이 아니라 여기서 힘을 빼면 그만큼 마왕을 상대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총리님이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래를 위한 길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끄응……."

    이건 언제부터 이리 말을 잘했지? 아, 원래부터 말은 잘했구나. 말은…….

    "…알겠네. 건승을 비네."

    - 네, 그럼.

    윤영민이 황망한 얼굴로 송정수를 바라보았다.

    "그, 그대로 보내도 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요. 미국이 밀리면 거기에 있는 전력들이 한반도로 진격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손 써볼 수도 없이 밀리게 될 겁니다. 그걸로 인류는 끝입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도 있지 않습니까. 이미 유럽은 대항할 힘을 잃은 상황인데, 그러다 유럽 쪽의 마왕들이 한국으로 몰려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그때 다시 돌아오게 하면 됩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송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쉬운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일단은 자국민을 보호하고 우리 전력을 조금이라도 남겨놓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다가 미국이 밀려 버리면 다 끝입니다."

    "그렇지요. 그렇긴 한데……."

    윤영민은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송정수는 그런 윤영민의 심정을 이해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그나 윤영민도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입장에서 자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 타국의 지원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비록 그것이 옳은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차라리 저쪽에서 말을 해줘서 다행이로군.'

    최정훈 등이 알아서 미국의 능력자들과 교감하여 먼저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송정수나 윤영민은 이대로 손을 놓은 채 두고 보다 결국은 패하는 미래밖에 남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미국으로 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금방 끝내고 돌아올 겁니다."

    "예. 그럴 겁니다."

    송정수가 가라앉은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이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NDF가 마왕 다섯을 별다른 피해도 없이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현재 미국에는 확인된 것만 스물이 넘는 마왕이 있었다.

    거기에 유럽에서 합류하게 될 마왕과 아직 전선에 나서지 않은 이들을 생각하면 승산은 여전히 매우 희박하다.

    설령 천운이 따라 그들을 어찌어찌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에는 NDF 역시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투를 빌어줘야 하건만…….'

    본인들도 스스로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이런 구차한 생각이 하고 있는 자신이 새삼 혐오스러운 송정수였다.

    '무사히 돌아오게.'

    송정수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 *

    "농담이 아니라고!"

    콰아아아아앙!

    화면에 보이는 폭발을 보며 크리스토퍼가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막아! 막으라고!"

    "……."

    목이 쉬어 이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크리스토퍼가 발악하듯 외쳤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누구도 크리스토퍼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막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마왕들을 막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화면을 보며 이를 갈았다.

    방법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저들을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마왕들의 힘은 그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전략? 전술?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죽창을 든 사람들에게 완전무장한 탱크를 막으라고 하는 꼴이다. 약한 부위를 노린답시고 궤도로 접근했다가 기관총에 벌집이 되거나 궤도에 밟혀 죽는 것 말고는 다른 미래가 없었다.

    능력자들을 밀어 넣고, M-3로 포격을 날리고, 전술핵까지 투하했지만,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마수는 그런 방법으로 막아낼 수 있지만, 마왕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무기력함.

    전신이 극도의 무기력함에 빠지고 있었다.

    "알파는! 알파는 어찌 되었나?"

    "아직……."

    "이 빌어먹을 새끼는 대체 뭐하는 거야!"

    크리스토퍼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알파가 NDF와 이지혁을 끌고 돌아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하지만 그 '버팀'이라는 것은 희생자를 밀어 넣어 시간을 끄는 것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이 희생자 하나하나에 연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지만, 희생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전력이 줄어든다는 말과 동일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전력이 줄어들다 보면 알파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대항할 힘을 잃게 된다.

    "능력자들 뒤로 다 빼!"

    "예? 하지만 그랬다가는 군이……."

    "알아! 알고 있으니까 후퇴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침음을 흘렸다. 인도주의적으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전략적으로는 버릴 수 있는 전력과 버릴 수 없는 전력은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군.'

    살아남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아군마저 가차 없이 도구로 쓰는 그가 마족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자, 잠시만요!"

    "음?"

    "왔습니다! 도착했습니다! 알파와 NDF들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리스토퍼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의 비전이 알파와 NDF들을 비추고 있었다.

    "빌어먹을, 빨리도 오는군!"

    "후퇴 계획은?"

    "취소한다. 지원해라. 모든 힘을 다해서 저들을 지원해!"

    "라져."

    크리스토퍼는 태연하게 걸어서 마왕들에게로 향하는 알파를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빌어먹을, 누가 보면 영웅이라도 온 줄 알겠군."

    인류 최악의 악당이 영웅이 되어 등장하는 장면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의 위험성만은 마왕들도 인지하고 있는지 어느새 공격이 끊겨 있었다.

    "해치워 버려……."

    간절한 바람을 담아 크리스토퍼가 중얼거렸다.

    * * *

    "아, 많네."

    알파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저리 많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새 더 늘었네요."

    "전혀 못 줄였다는 거로군."

    "…바라지도 않았지만, 좀 무능하긴 하네요."

    "네 부하들이지?"

    "못 배워 먹은 것들이라 좀 무능합니다. 거의 할렘 출신들이라……."

    "그러고 보면 흑인들이 많네."

    "그거 인종차별입니다? 이 나라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등 뒤에서 총 맞기 딱 좋다구요."

    "우리나라로 갈 거니까 상관없어."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지만, 알파와 이지혁의 얼굴은 그 대화만큼 편안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잔뜩 긴장하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뭘 저리 반겨주는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그들이 등장하자마자 마왕들이 공격을 멈추고 일제히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리에 있던 마왕들도 슬금슬금 그들 쪽으로 다가온다.

    "엄청 환영해 주는데?"

    "유명인이시니까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인연인데."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갑지 않다니, 그거 매우 아쉬운 소린데."

    "음?"

    귓가에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여어."

    "오랜만이군."

    "신수가 훤해지셨어? 좋은 거라도 먹고 다니나 봐? 이왕이면 같이 먹고 다니면 좋을 텐데 말이지."

    "큭큭큭큭."

    바르바체는 유쾌하게 웃었다.

    "반면, 너는 영 좋지 않아 보이는군."

    "뭐, 그렇지.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는 법이고, 나쁜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있는 법이지. 지금은 딱히 좋지 않은 기간이지만, 오늘만 지나면 다시 좋은 날이 오겠지."

    "네게 좋은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리 네가 마왕이기는 하지만, 남한테 악담을 퍼붓는 건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 정도는 이해했으면 좋겠군."

    "참고하지."

    이지혁은 가만히 바르바체를 바라보다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배는 강해졌군.'

    바르바체가 강해진 것인지, 이지혁이 약해져서 상대적으로 강한 존재감을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바체를 바라보는 심정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과거, 전성기의 이지혁이라 할지라도 경계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런 이를 지금의 힘으로 상대한다?

    '칼 물고 앞으로 엎어지는 게 현실적이지.'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늘어질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개미가 코끼리의 다리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봐. 아흔아홉 번째 마왕."

    "네네. 말씀하시죠, 가장 지고하신 마왕님."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제안?"

    바르바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는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테니 생각을 한 번 해보는 게 좋을 거야. 빤한 제안은 아니야.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제안을 해놓고 즐기는 취미는 없거든."

    이지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 한 번 해보시지, 그 제안이란 것."

    * * *

    바르바체가 빙긋이 웃으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너라는 존재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뭐라는 거야?"

    바르바체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마계에 홀로 떨어져 마왕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지겨우니 이제 그만해도 될 텐데?"

    "나는 네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라고 생각했다. 영원의 시간을 살 수 있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 들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군. 다른 인간들에게 영원의 시간을 준다고 해서 과연 너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뭐, 조금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얘들끼리 마왕 잡아내고 있잖아. 너희는 너희를 엄청 대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딱히 뭐 대단할 건 없어."

    바르바체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길을 걸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지. 네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올라온 이들은 스스로 대단하다 여길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정말 대단한 것은 나침반이나 지도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네가 스스로 길을 만들어내 그 사막 가운데 도시를 세웠다는 것이지."

    "에……."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아니, 아니, 알겠는데… 너하고 내가 이렇게 서로 덕담이나 나누고 있을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그냥 할 말이나 어서 했으면 좋겠는데."

    "이게 내가 할 말이다."

    "응?"

    바르바체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인간이되, 마왕이지. 그리고 네 힘만으로 그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인간을 대표하고, 인간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차고 넘치지."

    "…대표?"

    "그렇다."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저… 위대하신 마왕님, 그쪽은 워낙 뇌가 근육근육해서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 인간은 너희처럼 단순하게 '네가 더 세니까 니가 짱이다'로 그런 게 정해지지 않아요. 이쪽은 정치라는 매우 더럽고,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개념이 있거든요. 가장 강한 개체가 그 종족을 대표하는 건 이쪽에서는 짐승의 개념이에요."

    "상관없다."

    "아니……."

    "너도 알고 있겠지? 너희가 이 세계에 세운 체계는 이미 모두 무너졌다."

    "음……."

    "그리고 이제 무너지겠지. 이제 너희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 이제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투항해라."

    "……."

    이지혁이 눈을 찡그렸다.

    저 머리 없는 놈이 무슨 또 빤한 소리를…….

    "그럼 남은 너희의 생존은 보장하겠다."

    "에?"

    이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존을 보장한다고?"

    "그렇다."

    바르바체가 가만히 말을 이었다.

    "남아 있는 모든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지. 그 대가로 네가 인류를 통치하면 된다. 우리와의 합의를 통해서 말이야."

    "…너, 미쳤냐?"

    "아니라는 것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물론 그렇겠지.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는 너희의 정신은 굳건하기 짝이 없어야 하니까. 미친다는 개념이 있을 수 없겠지. 그런데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하지 못할 말이라서 말이야."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뭐, 인간과 공존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서로 연합 왕국이라도 세우고 평화협정이라도 맺을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봐, 바르바체."

    "말하라."

    "또라이 같은 소리 작작 좀 할래? 너는 어차피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잖아. 네가 보장하는 생존이라는 것은 인간을 지옥과도 같은 삶에 몰아넣고 그걸 즐기는 거겠지. 거기에서 나오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받아먹고 말이야."

    "틀리진 않다."

    "그럼 뭐? 살아가는 대가로 고문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라도 하라는 건가?"

    "큭큭큭큭."

    바르바체는 웃어버렸다.

    "너답지 않군, 아흔아홉 번째 마왕."

    "여기서 또 전형적인 대사가 나와야 하는 건가? 나다운 게 뭔데, 이 새끼야."

    "너는 항상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하는 타입이었지."

    "…뭐라는 거야, 또."

    "지금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의 손을 잡는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지혁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 이제 잡담 그만하고."

    "이러면 어떤가?"

    낮게 찔러 들어오는 바르바체의 말에 이지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는 이제 너희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이게 진짜 미쳤나?"

    이지혁은 도무지 바르바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밀어붙이고는 왜 이제 와 손을 떼겠다고 하는 것인가.

    "모르는 건가?"

    "…뭘, 인마?"

    "인간은 이미 내가 딱히 손을 쓰지 않아도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지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희는 문명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족이다. 처음부터 원시 상태로 태어났다면 다르겠지.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서부터 살아가야 한다. 봐라."

    바르바체가 손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

    "너희가 만들어낸 문명. 나의 눈으로 보아도 놀랍고 찬란하던 그 문명은 모두 무너졌다. 이제 너희는 잃은 것을 그리워하고 현재의 삶을 저주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학이라도 공부했나?"

    "딱히 공부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 천하의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전혀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말이 옳다는 것은 증명된 것 아닌가?"

    이지혁은 반박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바르바체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세계는 긴밀히 이어져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부산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몇 개 도시가 살아남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류가 무사하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아마 지금 이들을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남은 이들에게는 지옥 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한동안은 그동안 쌓아놓은 식량과 여러 가지 이기들을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지옥이지.'

    인간의 삶을 유지해 주던 모든 문명의 이기는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죽어라고 퍼부어 댄 핵으로 인해서 대지는 방사능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폭을 당한 이들은 수도 없다.

    이지혁은 그제야 바르바체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인간이 내뿜는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에서 나오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다.

    그저 인간들이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농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지혁이 이 상황을 인정하고 납득하게 된다면, 이지혁을 통해 인간이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게 통제하려 들 것이다.

    "짜증나네."

    진정으로 이지혁을 화나게 하는 것은 그 제안을 '엿이나 처먹어라'며 바로 거절해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 그의 앞에 몰려 있는 전력을 인간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리.

    절대 불가능했다.

    얼핏 보아도 서른에 가까운 마왕들이 그들의 앞에 진을 치고 있다. 이 정도라면 한 차원을 멸망시켜 버리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전력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제 소수만 남아버린 인류의 힘으로 막아낸다고?

    이지혁이 전성기의 힘을 회복하고, 불사를 다시 손에 넣는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미 이지혁은 힘을 잃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마나를 다루는 능력자들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을 상대로 어찌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항하다 모두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굴욕적인 삶을 감내할 것인가.

    선택이 쉽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자격은 이지혁에게 없었다.

    "뭘 그리 망설이고 있어?"

    "응?"

    서아영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넌 원래 겁대가리가 없는 인간이었잖아. 여기서 망설이거나 할 인간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쫄아서 빌빌거리는 거야? 하고 싶은 대로 질러 버려."

    "……."

    "쪽팔리게 마왕의 애완견으로 살라는 거야? 나는 그런 거 안 해. 아니, 못해. 네가 싸우지 않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싸울 거야. 나는 가축으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겠어."

    "지당하신 말씀."

    김다현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건 절대 반댑니다. 저는 게임을 해도 서렌을 안 치는 사람이거든요."

    "그거 자랑 아냐, 병신아."

    윤혁규가 얼굴을 감쌌다.

    알파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마왕이라는 것들이 제안을 해올 줄은 몰랐네요. 지능은 높되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상대와 자신을 맞출 줄 모르는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경우는 딱히 그들이 맞춰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바르바체라는 저 마왕 놈이 다른 마왕들과는 다르기 때문일까요?"

    "둘 다일걸?"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제안은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뭐, 들을 가치는 없는 것 같군요."

    "어째서?"

    "불가능하거든요. 저것들이 이 세계에 머물러서 놀고먹는 한에는 언젠가 다시 충돌이 벌어질 겁니다. 그게 안 되려면 저것들이 이 세계를 떠나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었으면 그냥 떠나지 굳이 저런 말을 하지는 않았겠죠. 그러면 이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저놈들과 인간이 공존을 해야 한다는 건데, 여기는 우리끼리 쓰기에도 좁거든요. 룸메이트로서 저것들은 너무 역겨워요."

    "그건 그렇지."

    "그러니 현명한 결단을."

    "으음."

    이지혁이 마지막으로 최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에……."

    최정훈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지혁의 앞으로 나섰다.

    "응?"

    뭔가 안정되는 말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정훈은 말없이 이지혁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바르바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제 의견은 간단합니다."

    최정훈이 손을 들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엿이나 처 드시죠, 친애하는 마왕 각하."

    "…와!"

    가장 온화하다고 생각해 온 최정훈의 가장 과격한 반응이 이지혁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지혁 씨."

    "예?"

    "사람은 한 번 죽는 겁니다."

    "……."

    "죽을 때 폼 나게 죽읍시다. 빌빌대지 말구요."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데?"

    수많은 말을 들었음에도 바르바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은 처음부터 이지혁 하나만을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저런 조무래기들의 말을 신경 쓸 내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대답이니까. 대답하라, 이지혁.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무한한 권력과 힘을 줄 것이다."

    "으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말했다.

    "야."

    "……."

    "너 같으면 내 밑으로 들어오겠냐? 니가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지."

    "그지?"

    이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못하는 걸 남에게 강요하지 마. 그게 관계의 기본이야, 병신아."

    바르바체의 얼굴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 * *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고?"

    "그럼 그걸 받을 줄 알았냐?"

    "……."

    이지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르바체를 바라보다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원래 적이 내미는 것은 꿀도 안 받아먹는 거야, 새끼야."

    "확실히 미개하군."

    "고등동물이라서 좋겠네. 그래서 하는 짓이 잘 지내고 있는 미개인들 있는 세상에 쳐들어와서 깽판 놓는 거냐? 평화적으로 잘살고 있는 사람들 괴롭히고 있는 주제에 잘난 척은 적당히 하지?"

    이지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 모금 길게 담배를 빨았다가 천천히 연기를 뱉어낸 이지혁이 띠꺼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나도 니들이 이 세상에 어슬렁거리는 꼴은 절대 못 보겠으니까 협상을 하고 싶으면 여기서 꺼진 다음에 편지라도 보내. 어디 그딴 얼굴로 처 돌아다녀? 밥맛 떨어지게."

    "이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군."

    바르바체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너희와 협상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무모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기야 너희가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리 없지."

    "지능이 낮아서 미안하다만……."

    이지혁이 가만히 마왕들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희가 우리보다 지능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데?"

    "…뭔 소리냐?"

    "아니, 애초에 너희가 생각하는 지능 떨어지는 인간이라는 기준은 베라프잖아. 그런데 거기는 보통 못 배우니까 사람들이 지능이란 게 있어도 활용을 못한다고. 그런데 이쪽이야 기본적으로 기초 교육을……."

    이지혁이 머리를 긁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네. 너희, 똑똑한 건 맞냐? 너희가 머리가 좋으면 이런 멍청한 제안은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제 됐다."

    바르바체는 고개를 저었다.

    "협상은 의미가 없는 것 같군. 너희와 이런……."

    "저 새끼, 멍청한 게 맞는 것 같은데?"

    김다현이 바르바체의 말을 끊었다.

    "왜?"

    윤혁규가 넌지시 묻자 김다현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 저 새끼가 조금이라도 똑똑하면 이지혁 씨를 상대로 협상을 하려 들지는 않을 텐데. 우리도 알잖아. 저 양반은 청개구리를 삶아 먹어서 뭘 하자고 하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양반인데."

    "…그렇지."

    "그런 양반을 상대로 자기가 먼저 제안하는 협상을 하겠다고 나선 건 보통 멍청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이지. 그렇지 않아?"

    "듣고 보니 좀……."

    김다현의 말이 결정타였는지 NDF들이 다들 '저 새끼, 알고 보면 엄청 멍청할지도 몰라'라는 눈으로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바르바체는 분노한 얼굴이 되었지만, 속 시원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생각해 보니 애초에 협상의 대상이 이지혁이었다는 점에서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끝까지 짜증나게 하는군, 아흔아홉 번째 마왕."

    "…뭐래? 씨바."

    이지혁이 어이없다는 듯 바르바체를 보고는 말했다.

    "지가 트롤링을 해놓고는 왜 남한테 난리래? 남 탓 쩌네. 넌 게임은 절대로 하지 마라. 탑신병자 같은 새끼야."

    바르바체가 가만히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마음대로 지껄여라. 그게 네가 이 세상에서 내뱉는 마지막 말이 될 테니까."

    "아아, 그래. 전형적인 대사 그만하시고, 이제 덤비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었다."

    바르바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이지혁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협상은 깨졌다.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의 존재를 지워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왕들이 그들을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이 담배를 힘차게 빨았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바르바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마왕들을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인류에게는 녹록치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라도 유지하는 것인 인류를 위한 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인간은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어차피 이곳에서 이지혁과 바르바체의 협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이 마족들에게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실에서 무슨 좌절감을 느낄 것이며, 불합리를 느낄 것인가. 어쩌면 지금 이지혁이 내린 선택은 수많은 인류가 그나마 힘겹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빼앗은 건지도 모른다.

    "면상 펴."

    서아영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이지혁에게 말했다.

    "내 면상이 어때서?"

    "요즘 너 심심하면 심각한 척하더라. 안 어울리니까 적당히 해."

    "…이게 지금… 시비 거냐?"

    서아영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부터 네가 생각하고 일을 벌였지? 일단 벌여놓고 생각하는 게 네 스타일 아니었어?"

    "음……."

    "일단은 그냥 저지르는 거야. 뭐, 저질러 보고 그게 결과가 좋지 않으면 나중에 저승 가서 사과하면 되잖아."

    "나름 열심히 해봤는데, 잘 안 됐네요. 하하?"

    "그거면 됐어."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을 하면 같이 욕먹어 주고, 때리려고 하면 같이 싸워줄게. 네가 인간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고생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어. 세상의 그 어떤 누구도 너를 비난할 자격은 없어. 그러니까 어깨 펴."

    이지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원래 어깨가 좀 좁은 편이라 그리 보이는 거거든? 아까부터 바짝 펴고 있거든?"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서아영이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자 이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살다 살다 이 여자에게 위로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최정훈이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온 서아영에게 위로를 받다니.

    뭔가 재미있으면서도 본인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르바체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이 있죠."

    최정훈이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가 맞는 말 아니에요?"

    "비슷한 말입니다. 어쨌든 뜻만 통하면 되는 거죠.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온 과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와 다시 자유가 없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죠. 아무리 저들이 인류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공기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과 별다르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는 일이 터질 것이고, 그저 잠시 삶을 연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죠."

    "흐음……."

    "그러니 싸웁시다. 싸우다가 죽는다고 해도 억울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여하튼 싸우면 된다는 거죠?"

    "저……."

    그때, 알파가 손을 살짝 들었다.

    "왜?"

    "제 생각에는 저쪽 제안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받아볼 방법 없나요?"

    "저 새끼 소심해서 이제는 안 받아줄 텐데?"

    "그래요?"

    시무룩해진 알파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죠. 마왕이든 뭐든 쳐 죽여서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요."

    "…초 치고 있네."

    이지혁이 한심하다는 듯이 알파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어차피 어떤 식으로 말이 오가고, 어떻게 협상을 했더라도 이지혁이 저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은 동의하지."

    "뭘 말입니까?"

    "다 쳐 죽인다는 말."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예전부터 묵은 감정이 좀 많거든. 오늘 아주 마계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주지."

    이지혁이 다가오는 마왕들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 * *

    "…시작인가."

    크리스토퍼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가슴 앞쪽으로 모았다.

    신앙이라는 것이 없는 그이지만, 이런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게 된다.

    절망적이기 짝이 없어서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이라도 없으면 도무지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신의 존재를 찾기 마련이었다.

    "마왕군 접근합니다."

    "마수들은 어떻게 됐나?"

    "마수들은 마왕들과 연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군대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M-3가 제 역할을 해주고 있어서 막아내고는 있지만……."

    "큰 피해는 없겠지?"

    "예. 하지만 마수 쪽은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부어 수를 줄이고, 요원들을 지원하는 것까진 힘듭니다."

    "괜찮아. 어차피 남는 전력이 있어도 도울 수 없을 테니까."

    "예."

    사자와 사자가 싸우는 곳에 개미가 끼어든다고 하여 전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아무리 개미 떼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왕들에게 있어서 일반 군대와 보통의 능력자들은 개미에 비해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진짜 이게 마지막이군."

    인류와 마왕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 싸움이 시작된다. 크리스토퍼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가를 꺼내 물었다.

    앞을 뜯어내고 불을 붙인 크리스토퍼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항상 겪는 일이지만, 좀 불합리하군."

    "뭐가 말입니까?"

    "전쟁 때도 그랬지만, 결국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 싸움은 나와 관계없는 곳에서 벌어지더란 말이야. 예전에는 권력자들이 내 역할을 빼앗아갔는데, 이제는 저놈들이 내 역할을 가져가는군."

    "아쉬운 일이죠."

    "아쉬워?"

    "그동안 해온 노력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큭큭큭."

    크리스토퍼가 가볍게 웃었다.

    '모르는 소리 하고 있군.'

    책임을 져보지 않은 이의 입에서나 나올 만한 말이었다.

    위에 서보지 않은 자, 그리고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에 시달려 보지 않은 자는 영광만을 본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본 자는 그 책임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타인에게 운명을 맡기고 속 편하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적어도 그 부담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토퍼는 화면에 보이는 이들을 애도했다.

    인류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이들이 얼마나 거대한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지금 위장이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빌 수밖에 없지.'

    남아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응원뿐이다. 크리스토퍼는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그러니 이제는 저들을 믿는 수밖에.

    "국장님."

    "왜?"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내가 저 화면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나?"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음?"

    크리스토퍼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부관이 내민 화면을 들여다본 크리스토퍼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 이게 뭐지?"

    "아직은 정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변수.

    변수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게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르겠군.'

    어쩌면 새로운 운명의 길이 열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크리스토퍼는 시가를 꽉 깨물었다.

    * * *

    "싸우면 되는 거지?"

    "그런 것 같은데."

    "아, 좀 긴장되는 것 같은데."

    "뒤에 가서 토하고 와. 나는 벌써 한 번 토했어."

    "사나이 가오가 있지."

    "저기 최정훈 씨 토하러 간다."

    김다현은 부리나케 뒤로 달려가는 최정훈을 보며 키득 웃었다.

    "장난 아니네."

    "부담감이 말도 못해. 아오, 차라리 그냥 싸우다 죽는 게 속 편하겠다."

    "그렇다고 순순히 죽을 생각은 없겠지?"

    "당연하지, 병신아."

    윤혁규가 너스레를 떨었다.

    "암으로 죽거나 교통사고로 죽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마왕한테 죽으면 그게 얼마나 억울한 일이냐."

    "나는 한 번씩 형의 사고방식을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어."

    김다현이 한숨을 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하기는 하다."

    "왜?"

    "우리 이렇게 우르르 몰려 싸우는 거 처음 아냐?"

    "…음?"

    윤혁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못해도 천오백은 넘는 수가 도열해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능력자들이 마왕들의 이동을 따라 그들의 주변에 진을 친 것이다.

    '이거 좀 이상하긴 하군.'

    이전에는 몬스터의 퇴치를 맡았고, NDF에 들어온 이후로는 험한 곳만 끌려 다녀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NDF의 기본적인 임무는 언제나 소수로 몰려다니는 것이었다.

    이전에 미국으로 마왕이 쳐들어왔을 때를 제외한다면, 언제나 백 명이 안 되는 소수로만 작전을 진행하다가 이 많은 수와 함께 싸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

    "든든은 얼어 죽을."

    그만큼이나 건너편에 있는 놈들도 장난이 아니었다.

    모여 있는 마왕들을 보고 있으려니, 그 위압감이…….

    "쟤들, 무슨 괴수 대잔치 같은데? 사진 찍어놨다가 피규어로 발매하고 싶다."

    "…난 니 대가리 안을 열어보고 싶다."

    "형."

    "왜?"

    "혹시 우리 여기서 살아남으면 나랑 같이 사업하자."

    "뭔 사업?"

    "저 새끼들 모습 잘 기억해 뒀다가 넘버링으로 피규어 발매를 하는 거야. 아마 날개 돋친 듯이 팔릴 거야. 분명히."

    "……."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 또라이 순위에서 김다현이 이지혁을 제쳤다는 것을 알아버린 윤현규가 영혼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라."

    "약속한 거다?"

    "살아남으면 말이지."

    어차피 죽을 확률이 99%쯤 될 텐데, 1% 확률로 살아남는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이제 시작인가 본데?"

    "…아아."

    마왕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 것을 알아챈 윤혁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이, 김다현이."

    "왜?"

    "뒈지지 마라."

    "낄낄낄낄."

    김다현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고는 제자리에서 한 번 뛰어올랐다.

    "그건 약속 못하겠는걸? 그거보다는 뒈져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자고. 사후 세계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됐어, 새끼야. 죽어서까지 네 면상 보고 싶지는 않다."

    "…와, 악담 보소."

    윤혁규가 피식 웃고는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시작이군.'

    포문을 여는 것은 언제나 그녀였다.

    "으아아앗!"

    걸걸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오면서 서아영의 육체가 검붉은 불꽃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니 다들 당황할 만도 하겠지만, 그 누구도 움찔하지 않았다.

    옆에서 피어나는 불꽃보다 앞에서 다가오는 마왕들이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뒈졋!"

    서아영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마왕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아영이 괴성을 지르며 불꽃을 뿜어내고 또 뿜어냈다.

    "후……."

    루드라도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벼락을 줄기줄기 내뿜기 시작했다. 선제 타격은 언제나 NDF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알파에게 소리쳤다.

    "어이."

    "네?"

    "전방 지휘는 네가 맡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알아서 해."

    이지혁은 그 말을 남기고 뒤쪽으로 이동했다.

    "후읍."

    가장 뒤까지 온 이지혁이 양손으로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마법과 마나에 관한 한 그 이해도가 마왕마저 뛰어넘었다고 평해지는 이지혁이지만, 대규모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캐스팅할 시간이 필수였다.

    '시간이야 벌어주겠지.'

    이만한 전력이 있으니 그가 영창을 할 시간을 버는 것은 충분할 것이다.

    이 순간, 이지혁은 기이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주문을 외우는 그를 지켜주는 것들은 마수들이거나 이지혁이 만들어낸 키메라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지혁을 지켜주는 이들은 인간인 것이다.

    항상 마수를 대동하고 인간과 싸워오던 이지혁은 자신의 앞쪽을 촘촘히 막아서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등을 보면서 묘한 감흥에 빠져들었다.

    '아직 감상적이 될 때가 아냐.'

    한 번씩은 이런 생각도 했다.

    인간을 적대하는 포지션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 되어보고 싶다고 말이다.

    이지혁의 더러운 성격을 감안하면 이야기책에서나 나올, 그런 폼 나는 용사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모양이야 안 나도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고 싶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 상황인데도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이 이지혁의 딜레마였다.

    "아무려면 어때."

    이지혁의 양손이 허공을 수놓는다. 그와 동시에 대기에 충만한 마나들이 이지혁의 육체 주변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흡!"

    손을 아래로 뻗자 이지혁이 자리한 대지에 커다한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준비는 끝났고.'

    이지혁이 과거 훈련용 돔에 만들었던 것과 같은 원리를 가진 마법진이다.

    그때 만든 마법진이 그 안의 공간에 마나를 모으는 원리였다면, 지금의 이 마법진은 이지혁에게 마나를 공급한다는 차이가 있었다.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이지혁이 눈을 감았다.

    미세한 마나 한 줄기도 놓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의 몸이 곧 새하얀 빛에 뒤덮이기 시작했다.

    "…저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지혁과 하얀색은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이지혁에게는 시커먼 색이나 붉은색이 어울렸다.

    '아니, 파란색이 시그니처일지도 모르겠네.'

    저 트레이닝복이 꿈에서도 나올 것 같다.

    최정훈은 불꽃과 벼락을 몸으로 받아내며 전진하는 마왕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몇 번이나 본 광경이기는 하지만, 저 마왕들의 터프함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뭐, 그래도……."

    때리고 또 때리면 쓰러진다는 것은 확인했으니까.

    "바인딩!"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주문을 영창하자 바닥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들이 마왕들의 다리를 휘감았다.

    이지혁에게 쌍욕을 먹어가며 배운 마법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력만 따지면 이제 숙련자라고.'

    예전 처음 이계로 끌려갔을 때부터 꾸준히 배워온 것이니 단기 속성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은 실전에서 쓸 일이 없었기에 숨겨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뒷짐을 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투두둑!

    하지만 마왕들을 묶어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굵고 튼튼한 나무뿌리이지만, 마왕들에게는 새싹보다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최정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바인딩! 바인딩! 바인딩!"

    연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계속해서 마왕들의 다리를 휘감는다. 그들을 묶어놓겠다는 꿈은 꾸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1초.

    이곳까지 도달하는 속도를 단 1초라도 줄여서 광역 마법을 쓰는 이들이 대미지를 넣을 수 있는 시간을 단 1초라도 버는 것이다.

    "바인딩! 아오, 죽겠네! 바인딩!"

    효과가 있었는지 앞쪽에서 달려오던 마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분노나 고통과는 거리가 먼, 귀찮음이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이 하찮은 놈들이!"

    "앞쪽으로 화력 집중!"

    소리를 지른 마왕에게 불벼락이 떨어졌다. 형형색색의 에테르들이 하늘을 날기 시작하고, 불꽃과 폭염, 벼락과 폭풍이 대지를 휩쓸었다.

    '장관이군.'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지금까지 에테르의 폭발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이만큼이나 거대한 폭발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전 세계에서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이고, 그 수가 이만큼이나 되다 보니 화력이 리미터를 뚫고 있었다.

    "갈겨!"

    "죽여 버렷!"

    사방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며 악을 쓰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황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지만, 최정훈은 가면 갈수록 냉정하게 가라앉는 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로 뭔가 될 리가 없지.'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마왕이니까.

    다른 마수들이라면 지금쯤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이만한 화력을 한 놈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면, 그놈도 골로 갔을 것이다. 아무리 마왕이라고 하나 지속적으로 쏟아붓는 에테르를 감당하지는 못한다는 걸 이미 증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수를 쓰기에는 마왕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화려하기만 할 뿐이야.'

    NDF들이 쏘아내는 에테르가 송곳 같은 느낌이라면, 다른 이들이 쏘아내는 에테르는 무딘 이쑤시개 같은 느낌이었다. 천 번이 아니라 만 번을 찔러도 대미지는 줄 수 있을지언정 마왕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는 느낌.

    '이래서 알파가 우리를 찾아왔구나.'

    혼자서 딜을 모두 넣기에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공격을 할 수 있는 이가 필요했겠지.

    최정훈이 이를 악물었다.

    "크아아아! 이 버러지들아!"

    선두의 폭염을 뚫고 마왕이 그들을 향해 폭발적인 속도로 달려들었다.

    "큭!"

    선두에 서 있던 서아영이 불꽃을 뿜어냈지만, 마왕은 불타는 집으로 돌진하는 소방수처럼 거침없이 불꽃을 받아내며 서아영의 바로 앞으로 쇄도했다.

    "이……."

    서아영이 막 몸을 바닥으로 날리려는 순간, 그녀의 앞으로 희끗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콰아앙!

    서아영의 앞에 나타난 그림자가 달려든 마왕을 힘차게 걷어차자, 마왕이 달려든 속도보다 더 빠르게 되튕겨 나갔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서아영을 향해… 그림자, 알파가 윙크를 했다.

    "도와드린 겁니다?"

    "뭐래? 네가 아니어도 문제없었어."

    "…그래요?"

    시무룩해하는 알파를 보며 서아영이 혀를 찼다.

    '희한한 놈이라니까.'

    그 순간,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

    서아영이 빛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지혁이 마치 새하얀 구름을 뿜어내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마나의 덩어리를 날려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뭉치던 새하얀 마나들은 처음에 구름 같아 보이더니, 곧 뭉치고 또 뭉쳐서 새하얗게 작열하는 태양 같은 모습으로 화했다.

    "먹혀라!"

    이지혁이 소리를 지르자 새하얀 태양이 터져 나가면서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히익?"

    뜬금없이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한 서아영이 몸을 피하려 했지만, 도망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을 새하얀 빛줄기가 감싸 안았다.

    '뜨거워?'

    뱃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일전에 받아본 적 있는 느낌. 형태는 다르지만, 이지혁이 일전에 그녀에게 걸어준 버프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마법 같았다.

    '그걸 여기 있는 전부에게 걸었다고?'

    사방에 있는 모든 능력자들이 새하얀 빛에 둘러싸여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웅대함을 넘어 장엄함의 영역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제 처 싸우면 돼!"

    저 말만 없다면 말이다.

    * * *

    '버프라…….'

    서아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마나를 몸에 맞았을 때의 강렬한 빛은 사그라들었지만, 육체가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일전에 볼로낙을 상대할 때 버프의 힘을 실감한 서아영이었다. 과거의 이지혁이 전해 주던 흑마력이 공격성과 공격력만을 강화해 주는 느낌이라면, 이 버프는 전체적은 능력치 자체를 모두 올려주는 것 같았다.

    '뭐가 더 낫느냐'라고 묻는다면?

    '이게 낫지.'

    효과야 의견이 갈리겠지만, 적어도 버프를 받아도 고통스럽지 않다는 측면에서는 이쪽의 압승이었다.

    "으라차!"

    서아영이 양손을 힘차게 떨쳤다.

    이왕 버프도 받은 김에 힘 좀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양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양손에서 만들어진 불꽃이 그녀의 가슴 앞에서 하나로 합쳐지더니, 이내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가 솟아올랐다.

    화염의 토네이도가 마왕들을 덮쳐 간다.

    '커다랗네.'

    본인이 가진 에테르에 마나로 강화를 시키고, 거기에 이지혁의 버프까지 더해지자, 과거의 그녀에 비해 화력이 열 배는 더 올라간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파르륵.

    전방의 마왕이 크게 손을 흔들자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하게 피어오르던 불꽃이 피식 하고 꺼져 버렸다.

    "고양감은 얼어 죽을."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를 잠시 잊었다. 마왕들의 힘은 아무리 마나를 사용하고 버프를 받는다고 해도 그녀 혼자서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뭐…….

    그녀는 혼자가 아니니까.

    "차아아앗!"

    사방에서 에테르들이 쏟아져 마왕들을 타격하기 시작했다.

    전방에서 달려들던 마왕들이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는 타격을 받으면서도 쉬지 않고 전진하던 선봉의 기세가 꺾인 것이다.

    '잘하면…….'

    서아영의 머릿속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불리하다.

    불리할 것이다. 계산에는 밝지 못한 서아영이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마왕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전력을 모으고 모은다고 하더라도 저만한 수의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슬슬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먹힌다.

    통한다.

    그들의 화력이 마왕들에게 확실하게 대미지를 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서아영의 얼굴에 희망이라는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들은 오늘 마왕들을 무찌르고 새로운 삶을 쟁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말이다.

    * * *

    "밀립니다!"

    "마수들에게 침투당한 전방 쪽은 장비 버리고 소개해서 뒤쪽으로 후퇴하라고 해. 예비로 남겨둔 능력자들 투입해서 앞쪽 바리게이트 재건해!"

    "…하고는 있습니다만."

    "알아, 새끼야! 상부에 요청해서 이쪽으로 핵 한 방 터뜨리라고 해."

    "중심을 비껴서 타격한다고 해도 너무 가깝습니다."

    "안다고 하잖아! 그럼? 그냥 이대로 죽을 거야?"

    "…요청하겠습니다."

    정인수가 이를 꽉 깨물었다.

    안다.

    이 짓거리가 미래를 희생해서 현재를 얻는 짓이라는 걸.

    하지만 여기서 죽어버린다면 미래 따위는 없었다. 오늘 그가 하는 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스러운 생일지라도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선택지쯤은 남게 될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이미 수도 없이 피폭을 당한 정인수다. 전쟁이 끝나면 아마 다시는 군인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정인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군인의 존재 가치는 민간인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죽는 그 순간까지 그는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직업으로 이 일을 택한 이들이 아닌, 징병을 당한 이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 역시 의무였다.

    "쏴! 갈기라고!"

    "전방이 너무 혼잡하여……."

    "아니까 그냥 갈기라고, 이 새끼들아! 다 같이 죽을 일 있어?"

    "…예!"

    몬스터가 침투한 전방 라인에 M-3 타격을 지시하면서 정인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만큼이나 뒤섞여 있는 전장을 포격하게 된다면, 아군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상자를 두려워해 포격을 멈췄다가는 모두가 휩쓸리게 된다.

    이건 감염원을 처리하는 일에 가까웠다.

    살짝 오염된 부분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순식간에 전신으로 오염원이 파고든다. 그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내지 못하면 끝이다.

    물론 감염 부위를 도려내는 과정에서 커다란 상처가 생기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은 고통이 생겨나겠지만 말이다.

    정인수가 이를 꽉 깨물었다.

    "버텨라!"

    "예!"

    "지금 NDF들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거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올 거야. 그런데 돌아온 땅에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야 되겠냐?"

    "그렇습니다!"

    "버텨! 버티고 또 버텨! 마지막 한 사람이 죽어서 살점도 안 남을 때까지 우리는 버틴다. 우리 뒤에는 민간인이 있다. 우리 모두가 죽을 때까지는 한 사람도 못 건드린다!"

    "예!"

    사기를 북돋운 정인수가 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전황은 장난으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NDF를 잃은 그들 또한 딱히 타국들보다 전력 면에서 좋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마왕 없이 마수들의 웨이브만으로 멸망해 버린 중국보다 몇 배는 더 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M-3의 존재와 좁아진 전선, 그리고 개전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투를 지속하면서 쌓인 노하우였다.

    시작부터 공격을 받았고, 그 공격을 지금까지 버텨냈다.

    이제 대한민국의 군인 하나하나가 전쟁의 스폐셜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버틸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원을 청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정인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마음을 다졌다.

    '도와줄 사람은 없다.'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는 NDF들은 그들보다 더 험난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은 오로지 그들만의 힘만으로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돌아올 자리 정도는 내가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정인수가 결의에 찬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 * *

    "…시작인가."

    송정수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그렇지요."

    송정수가 마수들과 교전을 하고 있는 군의 영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이곳이 밀린다면 세상의 운명과 관계없이 그들의 운명이 결정 날 것이다. 이곳의 전투도 중요하지 않다고 폄하할 수는 없었다.

    '어찌어찌 버티기는 가능할 것 같군.'

    정인수가 생각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었다. 방위 사령관으로 정인수를 임명하는 것은 모험이었지만, 모든 측면을 고려했을 때, 그 이상으로 마수와 몬스터를 이해하고 그에 대항하여 지휘를 할 만한 이가 없다고 여긴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송정수는 자신의 선택이 그들의 삶을 조금은 연장시켰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미국의 상황은 화면으로 볼 수 없는 겁니까?"

    "위성 궤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화면 송출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런데 신경을 써서는 안 되는 상황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송정수가 가볍게 웃었다.

    "전권이야 국방부 장관과 정인수 중장에게 위임했으니, 이제 우리가 할 것은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아니죠. 운명을 같이하는 것 역시 역할입니다."

    "후우, 그렇죠."

    송정수는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길고 긴 싸움을 버텨왔다. 이제야 그의 역할이 끝나간다고 생각하자, 끔찍한 피로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 아닙니다."

    "…그렇지요."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그가 할 일이 거의 없다고는 해도 그는 책임자로서 이 상황을 끝까지 주시할 의무가 있었다.

    아래에서 대처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가 대처해야 한다. 그게 책임자의 역할이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예?"

    "같이 등산이라도 가시겠습니까?"

    "하하하하!"

    윤영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지요. 그런데 총리님과 같이 등산을 가면 제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낚시라도 가시죠."

    "예. 그것도 좋겠네요."

    화면을 바라보며 송정수가 미소를 지었다.

    '낚시라…….'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송정수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평화는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 여유는 다시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국토의 2/3를 잃어버린 대한민국은 이대로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을 버텨내야 한다.

    전쟁은 고통만을 남기는 법이다.

    '그럼에도 이겨야 한다.'

    비록 남는 것이 고통뿐일지라도 말이다.

    송정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미국에서 싸우고 있을 전사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저, 저기!"

    "예?"

    윤영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송정수를 불렀다.

    "저, 저길 보십시오!"

    윤영민이 경악하여 가리키는 곳을 본 송정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 * *

    "어찌어찌 통하는 것 같은데?"

    "…그렇죠?"

    루드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버프가 생각보다 위력이 괜찮은데?'

    이지혁 덕분에 화력이 급상승한 것이 느껴졌다.

    '우리, 버프가 없을 때도 마왕 하나는 잡을 수 있었잖아.'

    그런데 화력이 올라갔으니, 아무리 마왕들이 모여 있다고 한들 쉽게 접근해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방탄복을 입고 엄폐해 있는 적을 향해 기관총을 갈기고 있는 느낌이다. 비록 그 기관총이 제대로 된 총이 아니라 BB탄 총이기는 하지만, 초당 백 발을 갈겨 대는 비비탄이라면 충분히 방탄복을 입은 사람에게도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어쩌면!'

    희망은 언제나 그렇게 생겨나는 법이다.

    * * *

    "재미있군."

    바르바체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인간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야기했을 텐데? 인간을 무시하지 말라고 말이야."

    이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아름다웠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지독한 비꼼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인간을 무시하지 말라니. 그것참, 재미있는 말이로군."

    "너의 그 방심이 너의 목을 앗아가게 될 거야, 바르바체."

    "아니다, 에르카나."

    "뭐가 아니라는 거지?"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방심한 적이 없다."

    "…뭐?"

    바르바체가 미소를 지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상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상황이 다르다고는 하나 우리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인간을 정복하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방심을 할 리가 있나."

    에르카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이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야 모든 배우가 모였군. 그렇다면 이제 시작해야겠지."

    "시작한다고?"

    "그래."

    바르바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본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자, 즐겨보자고, 에르카나. 비극일지 희극일지 모르는 이 무대를 말이야."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