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2화 (102/118)

[■] 그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저도 타도 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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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미친 짓 같다니까!"

"그냥 닥치고 달려들라고!"

김다현이 입에서 불을 뿜었다.

"으아아!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인간이랑 조를 함께 짜 가지고는!"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사람 하나를 들쳐 업고 마왕 앞에서 재롱을 부리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저거 한 방 스치기만 해도 윤혁규와 김다현은 사이좋게 피떡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마 운이 좋아 다른 이들이 저 마왕 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사이좋게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김다현과 윤혁규를 분리시킬 수 없어서 합동 장례식을 치러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이걸 감행하자고 하는 놈이나, 그 말을 듣고 사람을 들쳐 메고 돌진하는 자신이나 제정신이 아니기는 매한가지였다.

김다현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이러다 나 죽으면 내가 죽어서도 형 가만히 안 놔둘 거야."

"입으로 떠들 시간에 집중해, 이 미친놈아!"

윤혁규의 고함에 김다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미쳤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 사람이 마왕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미쳐야 가능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만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 나도 모르겠다."

김다현이 전력을 다해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끅!"

그 순간, 윤혁규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김다현이 전력으로 달렸을 때 어떤 속도감을 느끼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순간, 세상이 일그러지며 마치 다른 차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도 이렇지는 않아.'

다행히 눈이 적응한 것인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상적이 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앞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마왕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윤혁규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고, 김다현의 육체가 급격하게 뒤틀리며 아슬아슬하게 그 손을 피해냈다.

촤아아아악!

손이 스쳐 지나가는 풍압만으로 연혁규의 옷이 걸레짝이 되어 찢겨 나갔다. 피부에 화끈한 감각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씨! 뭐하는 거야!"

마왕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져서 바닥에 엎어진 김다현이 성질을 냈다.

"바로 앞까지 붙어줬잖아! 그럼 한 방 먹여야지! 뭐하는 건데?"

"어… 미, 미안하다."

윤혁규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 새끼, 항상 이런 식으로 싸우고 있는 건가?'

스치면 죽는다. 한 방, 한 방에 목숨이 위험하다.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경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진짜 주마등 봤네.'

마왕의 손이 얼굴 근처로 접근하는 순간에는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다현은 이런 광경을 매번 보고 있다는 것 아닌가.

새삼 김다현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윤혁규였다.

"왜 못 때렸는데?"

"…야, 내가… 으……."

윤혁규가 한숨을 쉬고 설명했다.

"급가속할 때 눈이 못 따라간다."

"가속?"

"어. 그때 눈이 못 따라가. 그러니까 가속할 때 조금만 더 천천히 해주면……."

"뭐? 그럼 저 새끼들이 우리 동선 다 보고 미리 대처할 수 있게 가속하라는 거야? 지옥으로 가속하라고?"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하라고!"

김다현이 역정을 냈다.

"이렇게 해!"

"뭐?"

"어차피 형은 공격만 하면 되잖아. 내가 알아서 왼쪽으로 파고들 테니까, 눈에 뭐가 보인다 싶으면 그냥 갈겨 버려."

"미친놈아, 그게 말이 되냐?"

"다른 방법 있어?"

"없지."

"원래 이건 안 미치고는 못 이기는 게임이야. 이리된 거, 제대로 미쳐 주자고!"

"…또라이 새끼, 진짜."

윤혁규가 마구 머리를 긁었다.

미친 짓이라는 것은 알지만, 김다현의 말대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저 마왕 놈이 지금처럼 가만히 있어준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다.

'빨리 한 방 먹여야 해!'

윤혁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쳤다.

"가자! 달려!"

"…씨발, 뭔 적토마가 된 기분이네."

윤혁규를 제대로 업은 김다현이 우측 다리로 몇 번 땅을 걷어찼다.

"뭐하냐?"

"원래 말은 이러는 거야!"

"아, 좀! 이 또라이 새끼야!"

"간다!"

김다현이 미친 듯이 가속을 하기 시작했다. 윤현규가 보고 있는 세상이 쭈욱 늘어난다 싶더니, 일순 다시 일그러진 세상으로 돌입했다.

'으으으…….'

또다시 혼란이 찾아왔지만 이번도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윤혁규가 양손에 에테르와 마나를 쑤셔 박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후, 세상이 일순 뒤집힌다 싶더니, 원래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냐! 어디에 있냐!

'지나쳤…….'

윤혁규가 허리를 뒤로 확 젖혔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으로 마왕의 등이 보인다.

"처먹어라!"

윤혁규의 양손에 모인 화염이 대포처럼 쏘아져 나갔다.

* * *

"상황은 어떠냐고 물어봐도 될까?"

살짝 애매한 크리스토퍼의 말에 아무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면 그냥 입 닥치고 상황이 좋을 거라고 위안하면서 기도라도 올려야 하는 걸까?"

"…최악입니다, 국장님."

"그냥 대답을 하지 말지그랬나."

크리스토퍼가 시가를 질겅질겅 씹었다. 시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담배 연기를 맡은 공기청정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크리스토퍼가 닦달을 하기 시작했다.

"M-3는 어떻게 되었나?"

"문제없이 모두 배치가 되었습니다. 파괴에 대비한 여유분까지 후방 배치를 마친 상황입니다. 이미 화력은 기대치를 웃돌고 있습니다."

"마수 놈들은 문제가 없겠지?"

"폭격과 포격으로 진격 자체를 막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한국으로 보내지는 물건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성공입니다."

"그래, 아주 좋은 소리로 들리는군."

크리스토퍼가 입을 갈았다.

"그런데 최악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를 좀 물어도 될까? 빌어먹을, SAT는 만점을 받았는데, 대학에서 입학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기분이군. 학창 시절에 마리화나라도 죽어라고 피워댄 모양이지?"

"마리화나보다 지독한 것들이 설치고 있기 때문이죠."

크리스토퍼가 연기를 뿜어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왕.

스물에 가까운 마왕이 전선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아무리 이곳에 이천의 능력자가 있다고는 하나, 스물의 마왕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비가 없네. 썩을 놈들."

크리스토퍼가 시가를 마구 빨아 당겼다. 초조함을 느낀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질 리가 없건만 말이다.

"알파가 저들을 막아낼 수 있을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겠지."

크리스토퍼는 초조한 눈으로 화면 속의 알파를 바라보았다.

* * *

"와,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전선 곳곳에서 터지는 마나의 폭풍을 보며 알파가 너스레를 떨었다.

"…대장이 좀 너무한 것 같은데?"

"내가?"

알파는 손 곳곳에 묻은 푸른 피를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야 언제나 젠틀하지. 뭔 문제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다리 밑에 머리가 터진 채 죽어 있는 마왕만 없더라도 젠틀하다고 인정을 해줬을지 모른다.

'그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해 댈 수 있다는 게 우리 대장의 장점이기도 하지.'

대단한 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무지하게 몰려오는군."

알파가 고개를 까딱까딱 꺾었다.

"피해는?"

"심각해."

"이만큼이나 설치고 있는데도 피해가 심각하다고?"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어. 대장이 가는 포인트에서는 이득을 보고 있는데, 대장이 없는 곳에서는 마왕을 감당 못해서 애들이 죽어 나가는 중이야."

"그거 좀 속 뒤집어지는 소린데……."

"그러니 좀 더 설쳐 보라고."

"제길."

알파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이렇게는."

"응?"

"나 일단 크리스토퍼 좀 만나고 올 테니까, 조금 기다려."

"에?"

알파가 게이트를 열더니,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헐."

"이봐, 맥클라렌."

갑자기 열린 게이트 안에서 알파가 튀어나오자, 크리스토퍼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호러 영화라도 찍을 셈이냐! 사람 놀래키지 마."

"간만 작아져서는."

알파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안 된다고?"

"소모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나중에는 애들 다 눕고 나서 나 혼자 마왕 수십을 상대해야 한다고."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

"그게 지금 국장이라는 사람이 할 말이냐?"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마왕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 분야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온전히 맡길 수밖에 없어."

"알아."

알파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러니 내가 한국에 좀 다녀와야겠어."

"뭐?"

"모르겠어? 지금 저 많은 마왕 놈들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어정쩡한 수의 능력자들이 아니라 확실한 에이스들이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마왕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겠다 싶은 능력자는 우리 측에 다섯 정도, 그리고 NDF에 스물 정도. 거기에 이지혁이지."

"한국과 우리의 차이가 그 정도나 난다고? 같은 수련을 받았는데도 말인가? 그 동양인들은 뭔 짓을 한 거지?"

"그들은 이미 마나를 몸으로 받아들인 경험이 있었어. 인종차별적인 말 지껄이지 말라고, 맥클라렌. 나중에 대통령이라도 해먹어 보고 싶으면 스캔들을 조심해야지. 지금 저 뒤에서 녹음하는 놈들이 있을지도 몰라."

"빌어먹을, 살아남을 수만 있으면 그냥 은퇴할 거다. 그래서? 한국에 다녀오겠다고?"

"응."

"…넌 미쳤어."

알파가 피식 웃었다.

"원래 지나치게 합리적인 생각은 반감을 부르기 마련이라는 것쯤은 알아, 맥클라렌."

"엿이나 처먹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린 크리스토퍼가 알파의 웃는 얼굴을 보고는 이를 갈았다.

"네 부하들과 다른 요원들을 두고 한국에 가겠다고?"

"내가 지금부터 한국에 다녀왔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이대로 그냥 무작정 싸웠을 때 우리가 치러야 할 리스크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하루 밤낮도 부족해. 모든 브리핑이 끝나는 시점에는 지구도 멸망하겠지. 그러니 그냥 닥치고 알아서 잘 막으라고. 나는 다녀올 테니까."

"맙소사, 조금 있으면 유럽 쪽 놈들도 몰려온다고! 그런데 너 없이 우리끼리 막으란 말이야?"

"자꾸 그렇게 매달리지 말라고. 내가 원래 쿨한 남자이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나오면 가슴이 아프니까."

"꺼져, 미친놈아!"

"분부대로."

순식간에 시커먼 게이트를 만들어낸 알파가 손을 흔들며 그 안으로 사라지자, 크리스토퍼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까지 난리를 치는 미친놈이랑 같이 싸워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형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진짜 미치겠군."

이대로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리 가버리면 대체 마왕들을 어떻게 막으라는 건가.

"진짜 사람 빡 치게 하는 데는 뭐가 있는 놈들이라니까."

* * *

볼로낙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생명체에 대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내 생각처럼 연약하지 않군.'

단순이 힘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힘으로 따진다면 서아영을 다르게 볼 이유가 없었다.

인간치고는 강하다. 하지만 마왕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게 서아영의 위치였다.

볼로낙이 서아영을 다르게 보는 이유는 그 힘이 아니라 의지였다.

'저 꼴이 되어서까지 투쟁심을 잃지 않는다는 말인가?'

서아영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쪽 팔은 거의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한쪽 다리도 허벅지부터 부러져 덜렁대고 있었다.

아랫배에는 주먹이라도 들락거릴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상태였다. 일반적인 생물은 저 정도의 대미지를 입었다면 죽는다.

특히나 인간이라면 당장 쇼크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서아영은 입과 코로 피를 줄줄 쏟아내고, 그 이상의 피를 배로 쏟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결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정말 인간은 불가해하군."

서아영이 쿨럭대며 피를 뱉더니, 피로 붉어진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쫄았냐?"

"확실히 불가해해."

볼로낙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 상태가 되어서도 투쟁심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고, 저 상태가 되어서도 이죽거릴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그대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이지?"

"…마왕도 죽는 건 무서운 모양이군?"

"존재를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 더 이상 사고할 수 없어지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는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저능 생물들이겠지."

"너 같은?"

서아영은 그 순간 메뚜기가 한숨을 내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끔 인간들도 자신보다 못한 존재에게 경의를 보내기는 하겠지.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불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애완동물을 보는 순간? 그럴 때 말이야."

"…너, 뉴스도 보냐?"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와 비슷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종족과 수준을 뛰어넘어 나는 지금 너에게 경외심을 느끼고 있다."

서아영이 키득키득 웃었다.

"메뚜기한테 칭찬받는다고 별로 좋지는 않은데?"

볼로낙이 가만히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모든 생물은 동력을 기본으로 움직인다. 어떤 행위를 할 때에는 그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생물은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고등 생물로 갈수록 생존이 확보되기에 다른 가치를 삶의 목적으로 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생존에 위협이 가해지는 순간, 고등 생물과 하등 생물의 반응은 동일해진다. 생존이 최우선의 목표로 변경되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생물은 생존을 거부하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서 그녀가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일이 그의 기분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도발에 여념이 없었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재미있는 생물이로군.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말이야."

"뭐라는 거야, 메뚜기 새끼가."

"……."

볼로낙은 더 이상 이 생물과 대화를 하는 것을 포기했다. 지능이 낮아서인지, 여러 가지 물음에 획일적인 대응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꼭 지능이 낮아서인 건 아닌 것 같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

인간이 피를 잃으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체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저 인간은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성적인 대답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제는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한다.

진즉에 끝났어야 하는 일이건만, 이지혁 때문에 저 인간이 고통받는 시간만 늘어났다.

"즐거웠다, 인간이여. 너를 전사로 기억하지."

볼로낙이 손을 들어 올렸다.

비록 인간인 적이라고는 하지만, 저만한 전사를 죽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자비란 있을 수 없는 법.

마나를 끌어모아 적어도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해 주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예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서아영이 싱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엿 처먹어."

"…아주 일관적이군. 좋아."

볼로낙이 모은 마나의 덩어리를 서아영에게 집어 던졌다. 아니, 집어 던지려 했다.

그 순간.

"아니, 아니. 저리 예쁜 아가씨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다니… 마족이 야만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정도가 조금 과한 것 아닌가?"

볼로낙이 기겁을 하여 뒤로 돌았다.

대체 누가 기척도 없이 자신의 등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가 서아영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하더라도!

카앙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척추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아아악!"

볼로낙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쯧쯧."

일격으로 볼로낙의 등에 바람구멍을 내버린 알파가 손에 묻은 푸른 피를 바닥으로 털어내며 혀를 찼다.

"거참, 사람이든 마족이든 얻어맞을 때 반응은 비슷하네. 메뚜기가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너… 너는!"

볼로낙이 놀란 눈으로 알파를 돌아보았다.

왜 이 사내가 여기에 있단 말인가.

"배신자!"

"에?"

알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인간인 내가 인간을 돕겠다는데, 그걸 배신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거지? 그럼 내가 끝까지 너희를 도와 함께 싸우기라도 했다는 거야?"

"이놈!"

"와, 이거… 장난 없네."

알파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했다.

"배신자가 아니라 은인이라고 불러야지. 그래도 너희는 내 덕분에 이 세계로 넘어와 이 난리를 칠 수 있던 거잖아. 거기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배신자라니. 이거참, 마왕들도 은혜를 모르는군. 보면 볼수록 인간과 비슷하단 말이야."

알파가 볼로낙을 향해 다가갔다.

"우쭐거리지 마라. 겨우 이 정도 상처를 입혔다고 해서 네가 우위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전혀 아닌데?"

알파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상처를 입혀서 내가 우위를 잡은 게 아니라, 상처가 없었어도 너 같은 건 내 상대가 안 돼."

"인간이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건 너지."

알파가 비릿하게 웃었다.

"상대의 전력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입만 털고 있잖아. 이제 내가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를 알려주지. 큭큭큭."

* * *

"해치웠나?"

"아오! 젠장!"

"…왜?"

"이럴 때 그런 말 좀 하지 마! 영화도 안 봐? 만화도 안 보냐고! 해치웠냐고 하면 절대 안 죽는단 말이야! 저 흙먼지 걷히면 멀쩡하게 서서 이쪽 보고 있겠지."

"미친놈아, 이게 영화냐?"

"내가 말을 말아야지!"

대체 왜 이런 걸로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윤혁규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놈은 한 번씩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저 보라고!"

흙먼지가 날아가고 드러난 마왕의 모습을 확인한 윤혁규가 도끼눈을 떴다.

"쓰러졌네! 이 새끼야!"

"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마왕의 모습을 본 김다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저거, 더미 아냐? 지금쯤 마왕이 우리 뒤에서 노리고 있다든가."

"아까부터 우워우워만 하는 거 못 봤냐? 쟤는 지능 캐가 아니라 육체형이라고."

"…그 말 맞는 거 같네."

"응?"

김다현의 말에 고개를 돌린 윤혁규의 눈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마왕의 모습이 들어왔다.

"안 통하네."

"응. 안 통하네."

김다현과 윤혁규는 조금은 허탈한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윤혁규의 공격이 정확하게 등을 가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왕은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타격이 아예 없다고 하기는 애매하고, 타격을 입기는 했는데 그 타격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첩되어야 저놈을 잡을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망했다는 거지.'

일격을 성공시키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아까부터 김다현은 턱이 열려 헐떡이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뛰어든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실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실수가 나오는 순간, 그들은 모두 죽는다.

"망했네, 이거."

마왕을 잡아낼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김다현이 이를 갈았다.

"다시 가야지."

"그래도 안 쓰러진다니까."

"그럼 또 가야지."

"…인마."

"씨발, 그럼 뭐 어쩔 거야? 안 통하니까 도망가서 누가 처리해 주기를 바라고 밥이나 먹을까? 오늘 점심은 햄버거로 할래?"

"누가 그러재?"

"어차피 통하든 안 통하든 결과는 똑같아. 저 새끼 잡으면 다음 놈 잡다가 죽는 거고, 못 잡으면 저 새끼한테 죽는 거지."

우습게도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도 저 새끼 좀 관대하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는데 공격을 안 하네."

"그냥 좀 멍청한 거 같은데?"

"그지?"

윤혁규가 피식 웃으면서 마왕을 보았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멍청하고 공격 성향이 강하지 않다.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온 냉철하고 파괴적이던 마왕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그럼에도 마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저 강건함 때문이겠지.

"죽어라고 공격을 퍼붓다가 지쳐서 한 대 맞으면 진다는 건가? 정말 더러운 타입이네."

"심지어 상성도 안 좋아."

김다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저런 놈이 다른 데로 가면 난리가 날 게 빤하니까. 최대한 잡아놓으면서 시간 끄는 수밖에."

"파리처럼 앵앵대면서 말이지?"

"벌이라고 하자, 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왕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포착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광전사 같은 고함을 내지른 마왕이 그들을 향해 쿵쿵대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이건 또 색다른 맛이네.'

마왕이라기보다는 마수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그들이 알던 마왕과는 전혀 달랐다. 익숙한 것은 차라리 마수. 지능이 떨어지지만 어떤 공격도 튕겨내는 마수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마수가 이를 드러내며 달려오는 모습은 그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좀 무섭네, 이거."

의연하게 반응하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악마적인 모습을 보이던 마왕들은 사람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지만, 눈앞에서 폭발하는 야성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 공포의 근원은 '내가 어떤 공격을 해도 절대 먹히지 않을 것 같은 강건함'이었다.

대응할 방법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오, 씨."

김다현이 손을 뻗어 윤혁규를 움켜잡았다.

"업혀!"

"또?"

"그럼 뭐 어쩔 거야? 저 새끼 눈이 형 포착한 거 같은데. 내가 아무리 앵앵대도 이제 내 쪽 안 봐. 어그로가 튀었다고."

"…빠른 전멸요."

"지랄 말고 빨리 업혀."

윤혁규가 빠르게 김다현의 등에 붙었다. 윤혁규를 업은 김다현이 이를 갈며 앞을 바라보았다.

"오냐. 내 다리가 더는 안 움직일 때까지 시간은 끌어주마. 그 뒤에는 잡아먹든 찢어 죽이든 네 마음대로 해라!"

"…그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저도 타도 되나요?"

"뭔 헛소리야?"

"…내가 한 말 아냐."

"응?"

김다현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 * *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의 뒤에서 알파를 발견한 김다현이 기겁을 했다.

미국에 있어야 할 놈이 이곳에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헐? 너, 왜 그 아줌마 들쳐 엎고 있냐?"

알파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서아영을 발견한 김다현이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진정하자.'

혹시나 알파가 서아영을 공격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알파의 전신에 묻어 있는 푸른 피를 보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유추하자면, 알파가 서아영을 도와 마왕 하나를 처리하고 부상당한 그녀를 데리고 왔다는 건데…….

"아, 잠시만요."

설명은 나중이라는 듯이 알파가 앞으로 나서더니, 손을 쭈욱 뻗었다.

'와!'

무시무시한 마나가 손끝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진다. 에테르와 융합한 마나가 땅으로 스며든다 싶더니, 달려드는 마왕을 향해 파고들었다.

콰드드드득!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마왕의 발밑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라났다. 강철보다 단단한 가지로 마왕의 육체를 휘감은 나무가 저 먼 하늘 위로 마왕을 집어 올렸다.

"와, 저거 뭐야?"

"그냥 시간 끄는 거예요. 타격은 거의 없을 겁니다. 잔재주만 늘어서 이런 건 또 잘하거든요."

"…쩌네."

김다현이 막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윤혁규가 소리쳤다.

"그 아줌마는 왜 그리된 건데!"

"…부탁이 하나 있는데, 좀 내려와서 말해주면 안 됩니까? 건장한 남자가 남자를 업고 있는 걸 보는 사람 입장도 좀 고려를 해주셔야죠. 영 보기가 좋지 않네요."

"으으음……."

윤혁규가 얼굴을 붉히고는 팔딱였다. 그러자 김다현이 윤혁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마왕 하나 처리하고 왔죠. 죽이고 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쓰러지시더군요. 응급처치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제길."

김다현이 알파에게 달려가 서아영을 받아 들었다.

"치료는 영 젬병이라서요. 죽이는 건 잘하는데, 살리는 걸 잘 못해요. 이지혁 씨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형!"

"응?"

"심하다. 이대로 놔두면 죽어."

"그, 그럼 어떻게 해?"

"일단은 내가 이지혁 씨 찾아볼게. 형이 여기서 이 새끼랑 같이 저 마왕 놈 맡아."

알파가 퉁명스레 말했다.

"마왕은 마왕 놈이고, 저는 이 새끼면 아무리 봐도 제가 마왕보다 더 나쁜 놈으로 보이지 않나요."

"별다를 것도 없잖아."

"와, 내가 이런 사람들을 동료라고 구하러 왔구나."

"쓸데없는 말 할 시간 없어. 나는 간다. 형, 그럼 부탁해."

"어? 어어?"

뭔가 말을 할 새도 없이 김다현이 서아영을 들쳐 업고는 날아가 버렸다.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윤혁규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없네, 진짜."

윤혁규는 알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여러분이 필요해서요."

"…뭔 소리야, 그게?"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미국 측에 지금 마왕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는데, 그쪽 전력만으로는 막기가 좀 힘들어요."

"…그래서?"

"이쪽을 차라리 빨리 정리하고 저리로 넘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죠. 다들 데리구요."

"미친! 여기도 마수가 죽어라고 튀어나오고 있는데, 거길 가버리면 마수는 어떻게 하라고?"

"남은 이들이 잡겠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알파가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여기서 우리 조국 지키겠다고 자리 잡고 계시다가 망한 미국과 유럽에서 몰려오는 마왕들 다 상대하시든가요. 그렇게 죽고 싶다면 누가 말리겠어요."

"……."

"나를 못 믿는 건 이해합니다. 그래도 상식선에서 움직이려고 해야죠."

"제길."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알파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지금은 이런 논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저거, 언제 내려와?"

"다 뜯겼네요. 이제 내려올 겁니다."

"끄응."

윤혁규는 곳곳이 찢어진 알파의 옷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찢어진 것만이 아니라 푸른 피 사이로 알파의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잘 몰랐는데, 흐른 피의 양을 감안한다면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

"너, 괜찮냐?"

"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아, 그랬죠. 그런데 이제 다 나았어요."

윤혁규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상식이 잘못된 건가? 요즘 들어서 뿅 하고 나아버리는 인간들이 많아진 것 같은데."

"구세대의 기준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이 많죠.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진 거죠."

"아, 뭐, 그래."

알파든 이지혁이든 말을 하면 할수록 뭔가 말려들게 만드는 것만은 최고였다.

"내려옵니다."

쿠우우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상식적으로 거대하게 뻗은 나무가 둘로 갈라지면서 마왕이 떨어져 내렸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지른다. 영화에서 괴물들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막상 그 광경을 눈앞에서 보니 저만한 데몬스트레이션이 없구나 싶었다. 절로 오금이 저려오니까.

"저거, 상대할 수 있냐?"

"혼자서는 무리죠. 그런데 둘이면 해볼 만합니다."

"…너와 듀오를 해야 한다는 건가?"

"저쯤 되면 최고의 파트너라고 할 수 있죠. 기절해 계신 분이 깨어 있었다면 확실한 증언을 해주셨을 텐데, 아쉽네요."

"…그래그래."

주둥아리로는 뭘 못하겠어.

윤혁규가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마왕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해보자. 죽기밖에 더하겠냐."

"좋은 자셉니다."

* * *

"마왕 한 체 제거했습니다."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며 송정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짐승인가.'

발악을 하며 마왕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알파의 모습은 그마저도 떨게 만들었다. 마왕과 인간이 싸우는데, 마왕이 아니라 인간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야 하다니.

'이미 저건 인간이 아니다.'

형태가 같다고 해서 그 본질도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송정수가 보기에 이미 알파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단순히 인간의 강함을 뛰어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쾌거입니다!"

윤영민의 말에 송정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쾌거는 쾌거다. 어쨌든 마왕을 제거했으니까. 서아영이 지원하고 알파가 들이치는 조합은 생각 이상으로 마왕을 괴롭게 했고, 그 결과 볼로낙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마왕은 말 그대로 찢겨 죽었다.

'어쨌든 좋아!'

적의 적은 친구인 법. 알파가 뒤에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왕을 제거하는 데 가장 확실한 무기가 되고 있었다.

"다른 쪽 상황은?"

"알파가 윤혁규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다른 세 체의 마왕은 이지혁의 지원으로 어찌어찌 막아내고는 있습니다만,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다?"

"예. 일단은 막고는 있습니다만……."

"알겠네."

송정수가 윤혁규와 알파가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서 다른 쪽을 지원해야 한다.

"유럽은?"

"……."

"유럽은 어떻게 됐나?"

"보시겠습니까?"

"그냥 말로 해."

"학살 중입니다."

송정수의 몸이 움찔했다.

"미국은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유럽은 학살당하고 있다는 건가!"

"M-3의 지원 여부가 컸습니다. M-3가 있는 우리 측과 미국 측은 일반 능력자들과 군을 마수에게 돌리고 마왕을 따로 상대할 수 있었지만, 유럽 쪽은 마수들을 방어할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전열이 무너졌고……."

송정수가 눈을 감았다.

사람이 아마 몇 만 단위로 죽어 나가고 있을 것이다. 군대까지 무너지기 시작했다면, 아마 백만 단위의 인간이 죽어 나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나마 민간인 피해가 없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이지, 민간인까지 당하고 있다면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

"길어야 세 시간입니다."

"세 시간이라……."

그 짧은 시간 때문에 인류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마수 쪽 전선은?"

"되레 압도하고 있습니다. M-3가 해주는 역할도 크지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퍼부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겠지."

송정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은 끔찍한 후유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지금 전선에 있는 모든 군인들이 피폭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부작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래도 살아남는 것이 낫다.'

일단은 살아야 미래가 있는 법이다. 그 미래가 아무리 끔찍하고 힘들지라도 말이다. 지옥 같은 미래와 당장의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부분은 지옥 같은 미래를 선택할 것이다. 그건 나아질 여지라도 있으니까.

"현재 가용되고 있는 M-3 중 마왕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여분의 M-3가 있나?"

"무립니다."

"여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M-3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 이상으로 큽니다. 한 대라도 빠지게 되면 균형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M-3를 마왕에게 붙인다고 해서 딱히 볼 수 있는 이득이 없습니다. 마음이 급하신 것은 알겠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으으음."

송정수가 답답하다는 듯 침음을 삼켰다.

"미국 쪽은?"

"막아내고 있습니다. 마왕 역시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선 자체가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알파 하나의 존재가 그렇게나 큰가?"

송정수가 화면 안의 알파를 바라보았다. 마왕을 상대로 마치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알파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이전에 이지혁에게 기대하던 것을 알파에게 기대하게 되는군.'

그 사실이 이상하게 갑갑한 송정수였다.

이미 알파는 세 마리가 넘는 마왕을 잡아낸 이후다. 이건 이지혁의 전과와 필적하는 수치였다. 선입견을 떼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현재 인류의 에이스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알파였다.

마왕을 잡아낸 시간과 상황을 모두 고려해 본다면, 지금의 알파는 이전의 이지혁 이상으로 강하다는 뜻도 된다.

희망적인 이야기이지만, 송정수는 그 사실을 마냥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놈을 신뢰해야 싸울 수 있다니, 이건 아이러니로군."

"배부른 소립니다."

윤영민이 송정수의 말을 막았다.

"사용할 수 있다면 독이라도 삼켜야죠. 일단은 말입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송정수는 우울한 눈으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네가 악당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 좋겠군.'

이대로 그들이 패배하게 된다면 알파의 실체는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미지수가 되어버릴 것이다. 알파가 제 본심을 드러내려면 마왕들을 모두 무찌른 후가 되어야 할 테니까.

송정수는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좋다. 일단은 막아내는 것에 집중해야겠지. 함포 지원은 아직 멀었나?"

"가동하고 있습니다."

"쪽발이 새끼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 추가 병력 투입은!"

"지금 이동 중입니다."

"빌어먹을 놈들."

이 와중에도 전력을 조금이라도 보존해 보겠다고 꾸물거리는 일본 놈들을 보니 속이 뒤집어졌다.

"전쟁만 끝나봐라. 내가 저 새끼들 가만히 두나."

의자를 걷어찬 송정수가 걱정 어린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막을 수 있겠지?'

그건 그저 바람일지도 몰랐다.

* * *

"사람의 머리는 건 생각하라고 있는 거지."

"……."

"생각을 안 할 거면 그 무거운 머리를 왜 달고 다니냐? 모자걸이냐? 딱히 모자걸이로 쓰기에도 적절하지 못해 보이는 두상인데, 그따위로 쓸 거면 그냥 따버리지."

"……."

"저쪽은 스피드형이고, 너희는 광역 공격이 가능한데, 자꾸 그런 식으로 대인 공격을 해 대면서 전력을 낭비하고 있냐? 그게 맞냐? 맞아? 파리를 이쑤시개로 찔러 죽이는 게 빠르지, 어느 미친 인간이 살충제 놔두고 이쑤시개로 파리 잡겠다고 설치냐? 영화에서도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아도 이쑤시개로는 안 잡는다."

물론 이지혁이라는 인간이 원래 그런 종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인간이 힘이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나름 잘 먹고 잘살았지, 힘도 없이 주둥아리만 나불댔으면 벌써 어딘가에서 흠씬 얻어맞거나 칼 맞아서 야산에 묻혔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이지혁의 말 하나하나는 듣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이지혁의 타깃이 된 사람은 최정훈이나 서아영, 김다현, 윤혁규 등의 NDF 지도 계층쯤 되는 이들이었기에 피부로 실감하지 못한 것뿐이다.

루드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지혁의 독설을 받으면서 그동안 놀고먹는 것으로 보이던 이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개고생을 하고 있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인간과 하루 종일 대화를 하고 설득을 시켜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연봉을 두 배 이상 받을 자격이 있었다.

"지금 딴생각하지?"

"아닙니다."

"어떻게 마왕을 앞에 두고도 딴생각을 하냐? 세상에, 그러고도 아직 목이 붙어 있으니 진짜 신기할 노릇이지. 세상이 참 이상한 게, 별로 필요 없는 건 끈덕지게 붙어 있는다니까."

"……."

루드라는 찔끔 배어 나온 눈물을 훔쳤다.

'그래도 내가 여잔데…….'

서아영을 대하는 것을 감안하면 여자라고 딱히 더 배려해 주는 인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취급은 해줘야 할 것 아닌가.

"…거, 좀 너무 심한 거 아냐?"

"오호?"

이지혁이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배신자 씨 생각은 그러신가 보네요."

"끄으으응."

박성찬의 두꺼운 목이 푹 꺾였다. 고개를 숙인 그를 상대로 이지혁이 비수를 마구 찔러 넣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제가 조심해야죠. 어설프게 또 말대꾸했다가 처 맞으면 이번에는 진짜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때도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번에 가슴 뚫리면 정말 죽겠죠."

"…미안하다니까."

"네네, 사람 가슴을 손으로 뚫어놓은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면 사과를 받아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죠. 사과만 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세상이잖아요."

"끄으응."

"살인미수로 감방에 처넣어 버려야 할 인간을 먹이고 재우고 가르쳐 놨더니, 이제 저한테 훈수를 두고 계시네요.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아니, 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대머리 아니거든! 민 거거든!"

"민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는데."

"……."

박성찬이 찔끔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는 이지혁에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알파가 설마 이지혁과 손을 잡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당연히 자신을 잡아 죽일 거라 여긴 이지혁이 의외로 순순히 다시 받아준 게 이상할 지경이다.

"저기……."

"마왕이 앞에 있는데 또 말장난이나 하고 있네요. 진짜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건지."

'말장난은 니가 했잖아! 니가 말 걸었잖아!'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아내야 했다. 지금 이 인간과 싸울 수는 없었으니까.

"제발 거 좀 어버버하지 말고 한번만 제대로 좀 잡아요. 인간이 마왕을 힘으로 압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데, 그 좋은 상황을 잡아놓고도 한 대를 못 때려서 처 맞고 있다는 게 말이나 돼요?"

"그러니까 차라리 다현이를……."

"김다현이 여기 오면 쟤보다 미묘하게 느리고, 쟤보다 엄청 약해서 얻어맞아 죽기 딱 좋아요."

"……."

이젠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박성찬이 미묘한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잠자리가 이리 빠른지 누가 알았겠어."

날개를 떼고 보자면 그냥 예쁜 여자처럼 생겼다. 그런데 그 등에 거대한 잠자리 같은 날개 네 장이 달려 있는 것이 문제였다. 딱 봐도 날개에 어설프게 한 대만 맞아도 날개가 찢겨 나가 가볍게 리타이어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대를 안 맞는다.

이동을 시작하면 눈으로 쫓아갈 수가 없다.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중인 것이다.

게다가 이지혁의 설명에 따르자면, 한 대 맞으면 뻗을 것처럼 생겼어도 의외로 방어력이 준수해서 두어 대 맞는 걸로는 별 대미지도 안 들어갈 거란다.

하기야 마왕쯤 되면 수많은 전투를 겪었을 것이고, 그 마왕급이 치고받는 와중에도 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방어력을 설명해 주는 거지만.

어찌 되었든 우락부락하기가 킹콩에 버금가던 마왕들에 비하면 비주얼적으로는 좀 만만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말이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놈을 한 대 때리는 것보다는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숫자는 도망가지라도 않으니까.

"광역으로 마구 때려서 발을 묶고 마무리하면 된다니까."

'그 광역기에 안 맞는다고!'

이지혁의 말에 루드라가 죽어라고 범위 공격을 뿜어 대고 있지만, 마왕은 번개 사이를 날아다니는 신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약하지도 않아.'

박성찬은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길게 베여 뼈가 드러나 있는 상처를 보니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한 대.

딱 한 대 스쳤을 뿐이다. 저게 10㎝만 더 깊이 들어왔으면 박성찬은 즉사했다.

저런 스피드로 날아다니면서 저런 공격을 뿜어 대는 것은 반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련 명목으로 김다현을 상대할 때도 이리 힘들지는 않았는데.

"아니, 그러니까 차라리 김다현을……."

"내가 뭐!"

"히익!"

박성찬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를 들쳐 업은 김다현이 그 자리에 나타나 있었다.

"뭐, 뭐야?"

"아, 또 꼴 보기 싫은 인간 얼굴 보네."

"……."

박성찬이 입을 다물었다.

그날 이후로 김다현은 박성찬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예전에 좋던 사이가 무색할 만큼 말이다. 박성찬의 입장에서도 김다현을 이해할 수밖에 없기에 할 말이 없었다.

"뭐야?"

이지혁이 '너, 왜 여기에 왔어?'라는 눈으로 보자, 김다현이 어깨에 멘 서아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놔두면 죽을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잘했네요."

평소 같으면 귀찮다고 난리를 쳤을 이지혁이지만, 서아영의 상세가 심상치 않았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합류해서 저거나 맡고 있어요. 고쳐 놓을 테니까."

"네."

김다현이 살짝 걱정 어린 눈으로 서아영을 보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지혁이 고치지 못한다면 아무도 고칠 수 없다. 이미 일반적인 의사가 맡을 수 있는 단계를 넘어버렸으니까.

"씁."

이지혁이 호흡을 쭉 빨아들이더니, 양손에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많이도 상했네. 안 죽은 게 용하다."

이지혁이 서아영의 상태를 보며 혀를 찼다.

김다현이 어떻게 서아영과 조우해 그녀를 이리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볼로낙을 잡아냈다는 뜻이 된다.

마왕을 한 마리 잡은 대가치고는 싸게 먹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지만.

이지혁의 힐이 서아영의 몸을 파고들면서 회복이 시작되었다. 으득대는 소리와 함께 뼈가 제자리를 찾고, 뜯겨 나간 피부가 재생되면서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것도 괜찮군.'

이런 식으로 나름 동료들을 치료해서 다시 전장에 투입하는 것도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이지혁의 특성상 치료 마법의 효율이 매우 높으니까.

다만, 마왕을 상대하다 보면 이처럼 치료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다쳐서 끝나는 일이 흔치는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다.

"끄으으……."

서아영이 정신을 차리자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줌마, 좀 적당히 다치지? 치료하는 사람 힘든 것도 생각해 줘야지."

"뭐, 인마? 한 마리 잡았으면 절을 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아, 네네."

몸뚱아리는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은 기름이라도 바른 듯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아… 더럽게 아프네."

"금방 괜찮아진다."

"너도 쓸모가 있을 때가 있네."

"…칭찬 고마워."

쓸모가 있을 때라니. 이제껏 이지혁이 해온 일은 다 뭐라는 말인가.

'이 여자도 정신 나갔어.'

이지혁은 서아영에게서 눈을 떼고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손은 그녀에게 힐을 뿜어내고 있었다.

"…와!"

이지혁이 흥미롭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 * *

"으아아아아아!"

김다현은 최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신이 낸 소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적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카하핫!"

마치 백치 같은 표정의 마왕이 두 날개를 흔들며 그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보다 강한 상대는 몇 번이고 접해봤지만, 자신보다 빠른 상대를 본 적은 없는 김다현이다.

압도적인 속도의 차이 앞에 김다현이 몸을 떨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지금까지 그를 상대한 이들이 어떤 느낌이었을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압도적인 스피드를 상대로 공격을 적중시켜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그의 속도에 농락당하던 마왕 놈에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뒤로 뛰어!"

귓가에 소리가 파고들자마자 김다현이 몸을 뒤집었다. 그 속도로 달려 나가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나의 지원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우드드득!

하지만 몸의 부담마저 없애주는 것은 아닌지,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격통이 찾아왔다.

콰아아아아!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벼락의 비가 그의 앞을 뒤덮었다.

"후와!"

NDF의 여자들과는 절대 척을 지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주는 위력이었다. 저 벼락의 비 앞에서는 김다현이고 윤혁규고 할 것 없이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누구에게 대항하든 통구이가 된다는 것도 비슷했다.

"제길!"

하지만 그건 김다현의 경우고, 저 빌어먹을 마왕은 끝도 없이 쏟아지는 벼락의 비가 마치 슬로우 모션이라도 되는 양 여유롭게 피해내고 있었다.

"쯧."

그 순간, 그의 귓가에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혁?'

우웅!

광속으로 벼락의 비를 피해내고 있는 마왕의 등 뒤에 시커먼 게이트가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싶더니, 그 안에서 길쭉한 다리가 튀어나와 마왕의 등을 뻥! 걷어차 버렸다.

꺄아아아아아악!

균형을 잃은 마왕을 벼락의 비가 덮쳤고, 그와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세상을 울렸다.

"……."

"더럽게 깝치네."

진짜 덤비지 말아야 하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는 김다현이었다.

* * *

한 번을 잡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딱 한 번을 잡아내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죽엇!"

루드라의 벼락이 마왕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마왕의 전신을 백색의 뇌전이 강타한다.

꺄아아아아아!

인간의 그것 같기도 하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한 비명 소리가 마구 울려 퍼졌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 같은 울음소리였다.

"이게 이리 통하나?"

김다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왕이라고 다 용가리 통뼈는 아니에요."

"음……."

"밸런스가 맞아야지. 저 속도에 다른 놈들 같은 방어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사기지. 그런 놈이 미쳤다고 전방에 나와서 이러고 있겠어요?"

이지혁의 말에 김다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말 대로면 마왕들 중에서도 나름 서열이 있는 거예요? 저번에 듣자하니 이지혁 씨는 99번째였다면서요?"

"…아니, 그건 서열이 아니라 순서고."

이지혁이 말을 이었다.

"딱히 서열이라는 게 있는 건 아닌데, 암묵적으로 서열이 나뉘기는 하지. 상위 서열의 마왕들이 일반적인 마왕들보다는 발언권이라든가 권한이 더 강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그중에서 대가리 격인 놈이 하나 있어요."

"그게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는 건가요?"

"네. 뭐, 그렇죠."

이지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주도라.'

바르바체가 이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걸 주도라고 불러야 할지는 의문이었다.

애초에 이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마계와 인간계의 간극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바르바체를 위시한 마왕들이 인간계를 노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문제가 발생했겠냐마는 이지혁이 알기로 그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맹수 앞에 고기를 던져 놓으면 당연히 달려든다. 그걸 맹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원인을 찾는다면 이 세계가 왜 마계와 가까워졌는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으음."

이지혁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차원이 뒤틀렸다는 사실에 집중했을 뿐이지, 차원이 왜 뒤틀렸는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차원이 뒤틀려 홀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지혁이 베라프로 빨려 들어가는 끔찍한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모든 일의 원인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된 이지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크르르."

벼락으로 샤워를 해서 전신에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마왕이지만, 아직 확실하게 대미지가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오!"

서아영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지혁이 그녀의 상체를 슬쩍 밟아 다시 눕혔다.

"아직 아냐."

"저거부터 처리해야 할 것 아냐!"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응?"

그 순간, 등 뒤로 접근한 박성찬이 마왕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카악!"

미처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허리를 움켜잡은 박성찬이 마왕을 뒤로 넘겨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스, 스플렉스?"

김다현이 황당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물론 사람에 따라 공격법은 다 다른 법이지만, 설마 마왕을 상대로 스플렉스를 시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걸 하는 사람도 황당하고, 그걸 얻어맞는 마왕이 있다는 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 잠자리 같은 게!"

박성찬은 잔뜩 약이 올랐는지 마왕의 팔을 움켜잡고는 바닥에 몇 번이고 내려쳤다. 쾅쾅! 소리와 함께 한 번 바닥에 처박힐 때마다 마왕의 몸이 바닥을 1m 가까이 파고들었다.

"아우."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제 대미지가 어떤가는 둘째 치고, 저런 식으로 얻어맞고 싶지는 않았다. 육체적 대미지보다 정신적 대미지가 더 심할 것 같으니까.

"크아아아아!"

확실히 본인도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발악을 하고 있었다.

촤아아악!

"헉!"

스스로 팔을 끊어낸 마왕이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박성찬이 놀란 얼굴로 위를 바라보았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왕을 보자 등골이 서늘해져 온다.

대화는 통하지 않겠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확실하게 의사가 전해져 온다.

"어이, 박성찬 씨."

"네?"

고개를 돌린 박성찬을 향해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숙여요."

"…네?"

"숙이라고."

이지혁의 말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하던 박성찬이 갑자기 부르르 몸을 떨더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

그야말로 폭풍 같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새하얀 불꽃과도 같은 정체 모를 에테르가 허공을 향해 뿜어진 소방호수에서 나온 물줄기처럼 마왕을 집어삼켰다. 그 크기는 소방호수에서 나왔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구슬프고 처량한 비명이 들려온다 싶더니, 마왕의 날개가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에테르가 사라지자 허공에는 마왕의 모습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 마리 완료."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박성찬이 알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사람인가.'

아무리 박성찬등 이 힘을 빼놓았다고는 하지만, 일격에 마왕을 죽였다. 사람의 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이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이지혁이야 애초에 논외에 있던 사람이고, 순수하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자 중에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알파의 강함은 충분할 정도로 알고 있다고 생각해 온 박성찬이지만,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어쩌면 이지혁의 수련 때문에 더 강해진 것일 수도 있지.'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과거의 알파에게는 자신의 힘을 숨겨야 할 이유나 여유 따윈 없었으니까.

"이쪽은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은데요?"

"하나 남았을 텐데?"

"그쪽은 윤혁규 씨가 갔습니다. 애초에 거기에 전력을 대다수 집중했다고 하니까, 윤혁규 씨만 합류해도 잡아내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흠……."

이지혁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뭐 얻어먹겠다고 기어 들어왔어?"

"…안 그래도 영 곤란해서 말입니다. 지금 미국이 박살 나기 일보 직전입니다. 여기는 어느 정도 정리됐으니, 그쪽을 좀 도와주시죠."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으면 머리가 안 돌아가느냐고 했을 텐데, 이지혁 씨가 그런 말을 하니까 그런 생각이 안 드네요. 그냥 단순하게 귀찮고 배알 꼴려서 도와주기 싫으신 거죠?"

"잘 아네."

알파가 한숨을 쉬었다.

상대의 대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에도 컨트롤이 안 되는 것은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좀 도와주세요. 다 죽어 나가게 생겼다니까요."

"여기도 바빠."

"그래서 제가 일부러 와서 마왕을 다 잡아낸 것 아닙니까."

"귀찮은데."

이지혁이 얼굴에 귀찮음을 가득 담았다.

그 표정이 얼마나 리얼한지, '정말 이 인간 귀찮아서 안 가려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러지 마시고 좀."

"아, 귀찮다고."

"헤헤, 제가 이리 도와드렸잖습니까."

"너 없어도 다 해결했어."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테니 좀 도와주세요."

박성찬은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알파도 어디 가면 황제가 따로 없을 터인데.'

과거에도 어둠의 황제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미국이 그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제거하지 못한 알파가 아닌가.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다녀도 알파를 제거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을 한 곳으로 모을 수가 없어서 손대지 못했다.

거기에 이지혁의 수련을 통해서 몇 배나 강해진 알파다. 장담하건대, 지금 알파가 가지는 가치는 웬만한 나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미국 전체의 국력을 모아도 알파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정도다.

그런 알파가 저리 배알도 없이 헤헤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눈에 보이는 광경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지혁이 얽히면 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미국이 뭐 어쨌다구요?"

서아영이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뻥 뚫린 옆구리를 몇 번 만져 보던 서아영이 손을 털고는 알파를 노려보았다.

"마왕들이 엄청 몰려왔어요."

"미국은 수도 많잖아요. 거기 천명이 넘는 애들이 있는데, 우리한테 손 벌릴 상황이에요?"

"도움이 안 된다구요."

알파가 우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뭐 수가 많다고 해결되는 상황입니까? 그럼 중국이 박살 났을 리가 없죠. 사람 수로 따지자면 걔들보다 많은 데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마왕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 쪽 능력자들은 거의 도움이 안 됩니다. 다수가 모여서 전력을 구성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적어도 공격이 명중하면 대미지가 생기고, 마왕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저 양반이 우수한 교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시간이 너무 짧아서인지 영……."

이지혁이 도끼눈을 뜨자 알파가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흐음."

서아영도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다음은 우리겠지.'

그렇다면 아직 미국의 전력이 살아 있을 때, 힘을 합쳐서 함께 싸우는 게 이득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가를 논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알았어요. 남아 있는 한 마리 정리하는 대로 바로 넘어가죠."

"현명하십니다."

"잠깐만요."

김다현이 손을 들었다.

"마왕을 잡아냈다고는 하나 마수들이 아직 남아 있잖아요. 마족 놈들도 날뛰고 있는데요."

"알아."

"이대로 여길 내버려 두고 가게 되면 피해가 장난 아닐 텐데."

"응, 그렇겠지."

서아영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피해에서 그칠 수 있겠지. 미국이 뚫리게 되면 우리는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추산해 보지 않아도 될 거야."

"…피해를 추산할 수 있는 사람이 남지 않게 될 테니까?"

"명확해지는 거지."

김다현이 한숨을 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쪽에서는 정인수의 지시를 받는 군인과 KSF들이 목숨을 걸고 마족과 마수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원을 해준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터인데, 그걸 알면서도 그들을 내버려 두고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알고는 있지만 말이야.'

냉정하게 봤을 때는 서아영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지금 해야 할 것은 미국으로 넘어가 전력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미국의 능력자들이 전멸한다면 그들에게 남은 미래 역시 빤할 테니까.

"가야죠."

"준비시켜. 남아 있는 한 마리 빨리 잡고 넘어간다."

"예."

김다현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서아영이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됐어요."

"나는 안 가고 싶은데?"

"사람은 살다 보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법이죠. 닥치고 따라와요."

"망할 폭력녀."

이지혁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서아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라고는 알파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도와는 주겠지만, 나는 너를 신뢰하지 않아. 그건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이죠, 마드모아젤."

"버터 같은 새끼."

서아영이 옆을 지나쳐 걸어가자 알파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단 말이지.'

알파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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