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88화 (88/118)
  • [■] 아, 이거… 안 될 것 같은데? [■]

    ─────

    "편대 소멸합니다."

    크리스토퍼는 넋이 나간 얼굴로 비전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중국이 저지른 짓의 결과는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중국의 대응이 비교적 상식적이었다는 것이다.

    날아드는 탄도미사일에 대응해서 탄도탄 요격미사일을 비처럼 뿌리고, 공중은 전투기를 배치해서 직접 요격을 노린다.

    크리스토퍼가 미국으로 날아드는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고, 그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지금 일제히 준비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탄도미사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자신의 주위로 날아드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저 탄도미사일을 카운팅해 되돌리기만 했다면 이런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쓰촨의 마왕은 미사일 하나당 괴조 한 마리씩을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괴조는 물리 공격을 모조리 튕겨 방어해 내고 있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괴조의 몸을 빌려 현신한 마왕이 그 와중에 공격까지 퍼붓고 있었다.

    마왕의 마법과 인류의 과학이 합쳐진 최악의 형태의 공격이 지금 인류의 목을 조이고 있는 것이다.

    "베이징의 대응은?"

    "대응이 가능할까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움직임이……."

    그렇겠지.

    출격시킨 전투기는 모조리 터져 나갔고, 요격을 위해 발사한 미사일도 모조리 격추당했다. 그런데 더 이상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길로틴에 구속당해 떨어지는 칼날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중국은, 그리고 인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칼날이 떨어져 목을 쳐주기를.

    크리스토퍼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중국이 저지른 일이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더라도 저 병신 같은 것들을 어떻게든 응징할 것이라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고위층이 내린 판단 실수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는다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결과다.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잘잘못을 떠나서 마왕의 손에 수많은 인류가 죽는다는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결과였다.

    "제길."

    크리스토퍼는 차마 비전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본 화면은 베이징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미사일을 너무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핵 떨어집니다."

    크리스토퍼는 눈을 감았다.

    차마 볼 수가 없다.

    인류 역사상 단 두 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외에는 사용된 적이 없던 핵이라는 절대병기가 지금 인구 상주 인구 이천만, 최대 삼천만의 인구가 머무르고 있다고 불리는 인류 최대의 도시, 베이징에 떨어진다.

    감고 있는 눈으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 화면에 무슨 모습이 찍히고 있을지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 같다.

    주르륵.

    꽉 깨문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열이 올라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분노가 고통조차 잊게 만들고 있었다.

    "베이징 시… 소멸합니다."

    아득하다.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50년대에 찍은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어색하고 멍멍하게 들린다.

    "국장님."

    "잠시만."

    자신을 부르는 부하의 목소리에 크리스토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제 겨우 한 발의 핵이 떨어졌을 뿐이다. 아직 열일곱 발이나 더 남아 있다. 그러니 터져 버린 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서둘러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맞다.

    하나…….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 불리는 크리스토퍼이지만, 눈앞에서 삼천만에 달하는 인간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광경을 본 충격을 단숨에 떨쳐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후우웁."

    깊게 심호흡을 한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들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중국이 증명해 주었다."

    "예."

    "대책 강구해. 데스크 포스 구성되어 있지?"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두 끌어모았습니다."

    "영상 던져 주고 대책 강구하라 그래. 탄착 지점은 여전히 특정되지 않고 있나?"

    "…죄송합니다."

    "아니, 그걸로 됐어. 탄착 지점 내에 있는 대도시 쪽을 기본으로 하여 방어 라인 구성해."

    "알겠습니다."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주물렀다.

    '베이징 한중간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인위적인 광경이었다.

    괴조, 그러니까 마왕의 의지가 핵무기의 낙하를 조절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저 무기를 요격하기 위해서는 마왕의 방어를 뚫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 아연한 상황에 크리스토퍼가 얼굴을 마구 문질러 댔다.

    "다음 미사일은?"

    "…동해로 향하고 있습니다."

    "동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입니다."

    "으음……."

    크리스토퍼가 씹어뱉을 듯이 말했다.

    "한국 연결해. 지금 당장."

    * * *

    "베이징이 소멸했습니다."

    마치 지옥에 빠져든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백 발의 ABM과 수백 기의 전투기를 모조리 투입했지만……."

    국방부 장관이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쩌라는 말인지."

    아마 지금쯤 이 소식을 들은 공군은 패닉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식 모두를 중국에서 이미 썼건만, 그 결과가 이거였다.

    소멸.

    공포 영화에서 주인공이 멍청한 짓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영화를 지켜보는 이들이 무력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저리 멍청하지 않으니까, 내가 저기에 있다면 저렇게 당하지 않을 거야'라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 안정감을 제거당했다.

    미사일을 발사한 순간의 중국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국가였지만, 적어도 베이징으로 날아오는 탄도미사일을 방어하는 중국의 대처는 현실적이었다.

    그 현실적인 대처가 모두 무위로 돌아가더니, 결국에는 베이징에 핵이 떨어진 것이다.

    '할 말이 없군.'

    송정수는 가만히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그런 상상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저 베이징의 상황이 그들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미식거리는 속 때문에 안에 든 것을 모두 게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나올 것도 없겠지만.

    "음, 그러니까……."

    침묵을 깬 사람은 역시나 이지혁이었다.

    태연한 그 목소리를 들은 송정수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떠올렸다. 저 인간은 긴장도 안 하는가 싶은 마음과 그래도 이지혁이라도 평온을 유지해 줘서 위안이 좀 된다는 마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자리에 이지혁마저 없었으면 이곳의 패닉이 더 심해졌을 거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일단은 전투기 그거 다 돌아오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이미 배치를 완료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 배치 완료한 전투기를 회수해야 할 것 같다구요. 안 통한다는 걸 알았는데, 거기 있으라고 말하는 건 개죽음당하라고 말하는 거랑 똑같잖아요."

    국방부 장관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합참의장이 국방부 장관 대신 발언했다.

    "하지만 전투기를 회수하면 저희가 현실적으로 탄도미사일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출격시키면 막을 수는 있구요?"

    "하나……."

    이지혁이 한숨을 쉬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지혁 대신 입을 열었다.

    "국토가 유린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대응이라도 해보겠다는 심정은 이해합니다. 저도 같은 상황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할 겁니다."

    국방부 장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그저 개죽음일 뿐입니다. 방금 보셨지 않습니까. 저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1초 만에 전투기는 전부 소멸됩니다. 지금 이 상황이 아니더라도 전투기는 사용할 곳이 많습니다. 굳이 스스로의 전력을 약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이란 게 있다면 말이지.'

    최정훈은 마음 쏙에서 불쑥 밀고 나오려는 본심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만… 그럼 대응할 방법이 있는가?"

    이번에는 최정훈이 할 말을 잃었다.

    대응 방법?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현대 과학이 탄도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들은 모두 무력화되었다.

    그런데 또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미국 측에서 핫라인 연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연결하게."

    윤영민은 화면에 뜨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미스터 프레지던트, 우선은 유감을 표합니다.

    "고맙다고 해두지요, 맥클라렌."

    - 저희의 정보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동해, 정확히는 동해와 남해 사이로 탄착 지점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탄이 정확히 베이징으로 떨어진 것으로 볼 때, 탄도미사일의 궤도에 모종의 의지가 개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인즉…….

    "탄착 지점을 예측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겠죠."

    - 저희의 의견도 동일합니다. 다만…….

    크리스토퍼가 말을 한 번 끊었다가 고민하는 듯 입을 열었다.

    - 공식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예측을 하자면… 마왕들의 성향과 행동 패턴을 감안할 때, 인구가 몰려 있는 대도시 쪽으로 핵이 떨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예상 탄착 지점에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어디입니까?

    "…부산이군요."

    윤영민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대한민국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부산이 남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울도 반이 날아갔는데 거기에 부산까지 파괴되면… 한국은 국가 기능을 거의 상실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

    그나마 서울은 사람들이라도 대피시킬 수 있었지만, 핵이 떨어지면 그것도 불가능하다. 지하철과 방공호에 사람들을 얼마나 밀어 넣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거기에 숨는다고 해서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 일단 방어 체계를 통한 대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묻는 말입니다만… 이지혁 씨.

    "네?"

    순간, 윤영민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크리스토퍼는 얼마 전까지 실험 대상으로 쓰겠다며 공공연히 그들에게 이지혁을 넘길 것을 종용하던 사람이다. 그런 이가 안면을 몰수하고 이지혁과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지켜보는 이들을 찝찝하게 만들었다.

    - 아무래도 이지혁 씨에게 또 한 번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류의 과학 능력으로는 저것을 막아내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묻는 것인데, 저걸 막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흐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행동.

    "뭐.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막아는 봐야죠. 확률이야 뭐, 반반 정도 되려나?"

    - 절반이라…….

    가능성이 0에서 50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 이지혁씨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일입니까?

    "그렇네요, 그게."

    크리스토퍼가 미간을 찌푸렸다.

    알파를 통해서 지금 이지혁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이지혁의 손에 인류가 멸망당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지혁이 힘을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시켜야 한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지혁이 직접 나서야 한다니.

    늑대를 막기 위해 사자를 불러들이는 심정으로 크리스토퍼가 물었다.

    - 그래서 그 방법이?

    * * *

    부산, 남포동.

    "한산하네."

    전국에 게엄령이 떨어지고 대피 명령이 내려졌으니, 한산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

    이지혁은 낄낄대며 길 한편에 놓여 있는 노점으로 다가가 호떡을 집어 들었다.

    "먹을 게 많네."

    "이지혁 씨, 그거 절돕니다."

    "에이, 내가 안 막으면 어차피 다 날아갈 호떡인데… 뭐, 어때요?"

    "…법리적으로는 문제지만, 도의적으로는 허락될 상황 같네요."

    최정훈은 말 없이 호떡 노점으로 들어가서 주머니에서 뺀 현금을 아래쪽에 끼워 넣었다.

    "크, 착하시기도 하지."

    이러면 법리적 문제도 해결이 되겠지.

    최정훈은 만사태평한 이지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라도 좀 긴장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좋을 텐데.

    하긴 이지혁이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최정훈의 심장이 멎을지도 모른다. 저런 양반이 긴장을 한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사태가 터졌다는 반증일 테니까.

    그냥 저래 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조금은 긴장한 티를 내주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정말이지 복잡한 심경이었다.

    "걱정도 안 되십니까?"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가만히 보면 항상 느끼는 건데, 이지혁은 애초에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이지혁의 발언으로 유추하자면, 육체가 사라지고 정신이 일순간 공백에 빠지는 순간적인 죽음의 단계를 수천수만 번 겪었다고 하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가 무뎌질 만도 했다.

    '타인의 죽음에도 무뎌지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 최정훈과 다른 이들이 긴장을 하는 이유는 본인의 목숨이 위험해질까 봐서가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청와대 방공호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으면 그만이지, 굳이 위험한 부산까지 와서 미사일을 막겠답시고 설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의 실수로 부산 오백만 시민의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불가항력적인 일이고, 딱히 실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막을 수는 있는 겁니까?"

    "반반이라니까요."

    "음, 반이라……."

    "그리고 애초에 여기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히로시마나 오사카로 갈 수도 있는 거니까."

    "…히로시마는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왜요?"

    "아니, 뭐……."

    아무리 그래도 같은 도시에 핵이 두 번 떨어지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일본이 죄를 많이 짓기는 했지만, 그건 좀 가혹한 형벌이었다.

    "한국에 떨어지는 것보다야 낫지."

    "매우 국가주의적인 발언이네요."

    "사람은 다 그래요. 내 동네, 내 지역, 내 나라. 그걸 우선적으로 챙기는 거죠."

    "아니, 그거 타파해 온 게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 같은 건데."

    "그렇다고 한국인과 타국인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음……."

    미묘한 이야기였다.

    "그냥 지켜보다 보니 그렇더라구요. 인간은 뭔가 나누는 걸 좋아해요. 한 국가였던 이들이 둘로 나뉘더니 서로를 원수처럼 여겨 싸우고 전쟁하는 걸 보고 있으면 코미디가 따로 없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고, 그냥 경계선 하나가 그어졌을 뿐인데 그걸로 편이 나뉘면 원수 되는 건 순식간이더라구요."

    "북한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어? 그걸 이야기한 건 아니었는데, 딱 맞아떨어지네요. 이곳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일은 꽤나 흔해요."

    "…그렇긴 하죠."

    "제 입장에서 보자면 지역이니 국가이니를 초월해서 어쩌구 하는 건 별로 와 닿지가 않아요. 그 선을 그은 게 인간인데, 이제는 그 선을 무시하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애당초 선을 긋지 말았어야지."

    "어렵네요."

    현학적인 이야기지만 삼천포이기도 했다. 최정훈은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왔대요?"

    "핵이요? 지금 서해 통과 중이랍니다. 곧 한반도 상공을 통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거 좀 딜레만데……."

    이지혁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지나가는 걸 수도 있잖아요?"

    "네, 그렇죠."

    "그런데 괜히 선방 날리면 분명 이쪽으로 공격 방향을 틀 것 같단 말이에요."

    "…그렇죠."

    "그렇다고 냅 두다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방향 바꿔 떨어지면 답도 없고."

    최정훈도 혼란에 빠졌다.

    기다려 보자니 위험도가 증가하고, 선제공격을 하자니 핵이 한반도로 떨어질 확률이 증가한다. 이건 그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 상부에 보고를……."

    "그거 보고한다고 무슨 답이 나오겠어요? 아까 그 양반들 보니 답도 없어 보이던데."

    "끄응."

    최정훈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 몬스터나 마왕들과 죽어라 싸워왔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차라리 그냥 마왕이 쳐들어오는 게 속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오려면 빨리나 오든가, 느릿느릿 날아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것도 문제죠."

    "음, 확실히 그렇네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속만 타는 느낌이었다.

    "일단은 뭐, 건드려 보죠. 아무리 그래도 우리 쪽에 안 떨어질 테니 기다려 보자는 건 뭔가 인간으로서 문제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렇죠."

    사실 이쪽에 문제가 없다고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냥 보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던 최정훈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설교할 주제가 아니었네.'

    이런 상황일수록 사람의 본심이 나오는 법이다. 민주주의가 어쩌고 입을 털어 대긴 했지만, 그 역시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법은 있나요?"

    "음, 몇 가지가 있는데… 선택해 보실래요?"

    이지혁의 입에서 나온 몇 가지라는 말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NDF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첫 번째로는… 음, 미사일 위에 달라붙은 마왕 놈의 사역마를 제거하고 미사일은 따로 처리하는 방법이죠. 가장 확실하게 미사일을 제대로 제거할 수 있다는 이점이 크지만, 약간의 단점이 있어요."

    "뭐죠?"

    "사역마를 공격하다가 살짝 삐끗하는 순간… 쾅!"

    저 입으로 말하는 쾅!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음, 아마 이걸 시행하면 미사일이 근접한 다음에 해야 하는 일인데… 그러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는다고 봐야겠죠. 아니, 뭐, 그렇게 말할 게 아니네. 부산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을 거예요. 헤헤."

    "일단 그건 제외하죠."

    "그래도 이게 나름 합리적인데……."

    "제외!"

    단호한 최정훈의 선언에 이지혁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다음 방법인데, 이게 좀 애매해서……."

    "애매해요?"

    "네. 전투기 하나랑 조종사 좀 수배해 줘요. 내가 뒤에 타고 가서 어떻게 해볼 테니까."

    "기각하죠."

    "왜요? 이거 확실한데."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동안 이지혁 씨를 한두 번 봐온 것도 아니고, 이제는 대충 보면 견적이 나오죠. 이지혁 씨, 솔직하게 광역으로 다 때려 부수는 건 잘하지만, 정교하게 뭔가를 노리는 건 재능이 없잖아요."

    "…무당이세요?"

    "요즘은 그거 욕이에요. 여하튼 안 됩니다."

    "어차피 터질 거 좀 멀리서 터뜨리면 되는 거죠, 뭐."

    "살아 돌아올 자신은 있구요?"

    "으음……."

    이지혁이 고심하기 시작했다.

    "텔레포트를 적당히 잘 시전하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이지혁 씨는 지금 예전의 본인이 아니잖아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이지혁이라면 방법이고 뭐고 그냥 핵째로 서해 상공에서 터뜨려 버렸을 것이다.

    "이지혁 씨를 잃을지도 모르는 작전은 시행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인간으로서 실격일지 모르지만, 지금 이지혁 씨의 중요도는 오백만 시민보다 우선합니다. 미리 말해두는데,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서울 쪽으로 달아나세요. 이거, 진심입니다."

    "…그만하시죠. 남자의 뜨거운 눈빛은 별로 받고 싶지 않네요. 면역도 없고."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이 와중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은 이 인간의 최대 장점이기는 한데, 참 사람이 참 뭐랄까…….

    차마 최정훈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럼 최후의 방법인데……."

    이지혁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솔직히 이 방법은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죠. 그럼 가용한 인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어떻게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어쩌면 다른 나라 입장에서도 매뉴얼이 될지 모르니까요."

    이지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매뉴얼요?"

    * * *

    "상황은?"

    "현재 서해 지나고 있습니다. 곧 남서부를 지나게 될 겁니다."

    "으음……."

    윤영민은 불안한 표정으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궤도대로라면 탄도미사일은 한반도의 남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게 된다.

    우선 부산에 인력을 배치하기는 했지만, 그전에 탄도미사일이 방향을 바꿔 하강한다면 막을 수 없는 결과가 터져 나올지도 몰랐다.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모두를 막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송정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천 명의 목숨이 단 한 사람의 목숨보다 가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부산에 인력을 배치한 게 아닙니다. 부산으로 떨어질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지요. 전시 상황입니다. 위급 상황이구요. 흔들리지 마십시오."

    송정수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말에 윤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 혼자 이런 일을 겪었다면 지금쯤 우왕좌왕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멘탈의 소유자라는 것은 그도 최근 들어 알게 된 바였다.

    단단한 껍질로 몸을 둘러 방비하고 있을 뿐, 그는 결단력이 약한 사람이었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모릅니다."

    송정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이건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섰습니다. 신뢰의 영역이죠."

    "신뢰라……."

    송정수가 가만히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막아내야 한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만 갔다.

    베이징이 날아갔다는 것은 국제사회와 동아시아에 말로 다 하지 못할 충격을 가져올 것이다. 경제적 문제도 있지만, 베이징의 부재로 인한 중국의 혼란, 그리고 중국에서 북상하고 있는 마왕군에 대한 대처가 불가능해진 것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실질적으로 중국이 무력화되었다고 봤을 때,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두 개의 스팟을 한, 일, 러 삼국이 막아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도쿄와 서울은 이미 반파되지 않았는가.

    '제대로 한 방 먹이지도 못했는데 계속 전력을 깎아 먹고 있어.'

    마왕의 출현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송정수조차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게이트가 열리는 동시에 인류와 마왕간의 한판 승부가 벌어질 줄 알았건만, 현실은 더욱 지독했다.

    '말라 죽겠군.'

    차라리 일찍 승부가 났다면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느긋하게 전진하는 마왕들 덕분에 희망을 버릴 수도 없었다.

    "탄도미사일이 내륙으로 진입합니다."

    송정수가 두 손을 꽉 잡고는 눈을 감았다.

    '부탁한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NDF들뿐이었다.

    * * *

    "아, 이거… 안 될 것 같은데?"

    이 순간, 사람의 힘을 가장 쭉 빼놓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분명 저 말일 것이다.

    이지혁의 말에 NDF들이 허망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이지혁이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NDF들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하기 싫어서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잘 안 될 거 같다는데,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봐요?"

    "저 인간이 진짜!"

    서아영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야, 이 화상아! 지금 이 작전에 사람 몇의 목숨이 달렸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냐!"

    서아영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누른다고 들어가는 인간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이지혁은 누르면 오히려 튀어 오르는 사람이지, 누른다고 순순히 박혀주는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카아아아악!"

    서아영이 막 발작하려는 찰나, 여대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서앙영을 잡아끌었다.

    "안 놔? 이거 안 놔? 안 그래도 거의 끝장날 판인데, 그전에 저 새끼 죽빵 한 방만 갈겨보게 비켜봐!"

    "참으세요, 부장님!"

    "솔직히 니들도 원하는 거 아냐? 보고 싶지 않아?"

    "아니, 그런 걸……."

    최정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나무나려는 찰나, 그의 눈에 기이한 장면이 들어왔다. 서아영을 잡고 있던 여성 대원들의 손에서 슬그머니 힘이 빠지고 있었다.

    "헐……."

    최정훈과 눈이 마주친 이들이 얼굴을 붉히더니, 다시 서아영을 잡았다.

    '보고 싶긴 했구나.'

    사실 보고 싶은 마음은 최정훈도 간절했다. 언젠가 서아영이 이지혁의 죽빵 한 대만 갈겨줄 수 있다면 십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최정훈이었다.

    "이제 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뭐가 문젠데요?"

    "에, 음……."

    이지혁이 머리를 긁더니 입을 열었다.

    "그거, 속도가 음속은 못 넘었다면서요?"

    "그렇죠."

    "그 말을 듣고 '아, 엄청 느린가 보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래도 거의 시속 1,000㎞로 날아오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걸 보고 캐치한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아니, 그걸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해!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음, 이건 누가 잡아줘야 하는데……."

    이지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적절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뭐, 별수 없죠."

    "벼, 별수 없다니요?"

    "쫄지 마세요. 그렇다고 포기하겠다는 거 아니니까. 일단… 음, 전화 좀 해줘요."

    "전화요? 어디에다 전화합니까? 국방부? 아니면 미국?"

    "아니, 그런 애들 말구요."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알파요."

    * * *

    "썩을 놈."

    크리스토퍼는 휴게실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는 알파를 보며 치를 떨었다.

    이건 간이 크다, 작다의 영역이 아니었다. 어디 한 군데가 돌아버리지 않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돌아버린 놈이 세계 최악의 범죄자임과 동시에 이 상황의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평소에는 시가를 즐기는 그이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편안히 즐길 수 없기에 일반적인 담배도 잊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불을 붙인 크리스토퍼가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저 썩을 인간이 이곳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꼴은 정말 참아줄 수가 없었다.

    "알파."

    "으음?"

    "빌어먹을, 눈 뜨라고, 이 망할 자식아!"

    알파가 슬며시 눈을 뜨고 크리스토퍼를 바라보더니 하품을 하며 다시 이불을 끌어당겼다.

    "아함~ 5분만 더 잘게요, 대디."

    "대가리에 총알구멍을 내버리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 좋을 거야."

    "이런, 이런."

    알파가 고개를 휘휘 젓더니 몸을 일으켰다.

    "공사가 다망하신 크리스토퍼 맥클라렌 님께서 내겐 무슨 볼일이시지? 아침부터 사람을 깨워 대며 말이야. 나는 저혈당이라 기상에 약하다고."

    "네놈의 아침은 몇 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말하는 아침이란 건 지난 지가 이미 오래다."

    "눈뜨는 순간이 곧 아침이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그러니 그리 도끼눈 뜨고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가서 커피 한 잔 타주겠어? 에스프레스 블랙으로 말이야. 몇 번 얻어먹었는데, 역시나 돈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원두가 아주 죽여주더군."

    알파의 너스레에 크리스토퍼가 이를 드러냈다.

    "너는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세계 최악의 범죄자 씨?"

    "미 정보국 아닌가?"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면 그사이에 명칭이 바뀌기라도 했나? 응? 내가 모른 새에 말이야. 그걸 친히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겠지?"

    "……빌어먹을."

    저런 인간을 붙잡고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일이었다.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어. 망할 짱깨 새끼들이 일을 저질렀다."

    "이봐, 맥클라렌.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너는 인간쓰레기로는 갈 데까지 갔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명칭까지 굳이 더할 필요는 없다고."

    "그놈들 때문에 지금 미국으로 핵이 날아오고 있다."

    "…어, 음, 이번은 예외로 해두지. 사실 나도 동양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당신에게만 말하는 거니까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해줘."

    "농담할 시간이 없다고 했을 텐데? 핵이 날아오고 있다. 네 도움이 필요해."

    "맥클라렌, 나를 신뢰하는 당신의 마음은 알지만, 나는 군사 전문가가 아니니 될 수 있으면 그런 문제는 펜타곤에 문의해 주기를 바라."

    "빌어먹을, 이 급박한 상황에 잠이나 처 자고 있으니 뭘 알겠냐고! 지금 마왕 놈들이 미사일에 이상한 짓을 해서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배제할 수가 없어!"

    "어, 그래? 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내게 물으면 어쩌자는 거야!"

    "잠깐만, 맥클라렌. 사실 냉정하게 봐서 범죄자인 내가 당신에게 대처법을 묻는 게 당신이 내게 대처법을 묻는 것보다는 좀 더 건설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을까?"

    "누가 그걸 몰라! 지금 상황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으니 그런 거 아냐!"

    "진정하라고. 일단 가서 맥주 한잔하는 거 어때? 당신,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알파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방금 맥클라렌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까딱했다가는 정말 핵무기에 자신 또한 박살 날 수 있었다.

    아무리 알파가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왔다지만, 핵 앞에서는 먼지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핵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래."

    "그럼 뭐하고 있어? 당장 도망가야지. 제트기라도 부르라고."

    "좋은 소식은 그 미사일이 무척이나 천천히 날아오고 있다는 거지. 무려 열 시간이나 있어야 이곳에 도착한다고."

    "그건 좋은 소식이로군. 타국으로 달아날 수 있겠어."

    "나쁜 소식은 지금 전 세계로 날아들고 있는 핵의 총 숫자가 열일곱 발이나 된다는 것이고, 그 미사일을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로는 제거할 수 없다는 점이지."

    "음, 그래. 그럼 일단 티켓은 취소해 줘. 내 애국심이 이곳을 떠나는 걸 허락지 않는군."

    "썩을."

    욕지기를 내뱉은 크리스토퍼의 반응을 보니 농담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로군. 그래서 막을 수가 없다는 건 어떻게 증명한 거지? 막아봤나?"

    "베이징이 날아갔어."

    "오, 그거 참 아쉽군. 내가 동양인 친구들을 참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 순간, 알파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마왕이 수호하는……."

    "잠시만, 맥클라렌. 전화가 왔잖아."

    "지금 그딴 전화가 중요하냐고!"

    "웬만하면 자네의 의견에 동조해 주고 싶지만, 지금 이 전화가 아무 데서나 걸려온 스팸이 아니거든. 잠시만."

    맥클라렌을 저지한 알파가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최."

    - 네, 오랜만이네요."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네요. 미스터 최가 제게 전화를 다 주시고 말입니다."

    - 저도 설마 당신에게 연락할 날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이지요.

    '한국어?'

    유창한 한국어로 말하는 통화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는 지금 알파가 통화하고 있는 상대가 최정훈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정훈이 알파에게 왜 연락을 하는 거지?'

    목소리와 언어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지만,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그 내용까지 아는 것은 무리였다.

    "아, 그래요? 음……."

    알파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그러는 게 낫겠네요. 뭐, 지금 바로 움직인다고 전해주세요."

    알파가 전화를 끊더니 크리스토퍼를 돌아보았다.

    "맥클라렌."

    "음?"

    "일이 생겨서¨ 나 한국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뭐?"

    "지금 이지혁 씨가 나를 찾는다는군. 이런 젠장, 이지혁이 나를 찾는다니. 이거,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아무래도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크리스토퍼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을 뻘로 들었나? 지금 미국으로 핵이 날아오고 있는 상태라 네 힘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열렬한 구애에는 감사해야겠지만, 지금 나는 당신 같은 뚱보보다는 이지혁이 더 급해."

    "이 미친놈이 진짜……."

    크리스토퍼가 막 발악하려는 찰나에 알파가 크리스토퍼를 보며 말했다.

    "나라고 딱히 별수가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이지혁을 도와서 한국으로 떨어지는 핵을 막아내면 무언가 수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 양반도 내가 한 번 도와줬는데 미국에 떨어지는 핵 한 방은 막아주겠지. 안 그래?"

    "……."

    이지혁은 이미 힘을 잃었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알파가 그걸 모를 리 없고, 힘을 잃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지혁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알파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럼 다녀오지.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를 먹었으면 좋겠군. 조리장에게 말해줘. 그럼."

    알파가 그 자리에서 퍽! 하고 꺼지듯 사라지자 맥클라렌이 머리를 움켜잡았다.

    '탈모 오겠네, 진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대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거나 탈모로 머리를 잃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만 남을 것이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고.

    크리스토퍼가 한숨을 쉬며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핵이 그냥 한국을 지나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렇게 된 이상 그 핵이 반드시 한국으로 떨어지길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크리스토퍼는 이지혁에 대한 증오가 마왕에게 가득하기를 빌며 터덜터덜 걸어 사무실로 향했다.

    "한국 쪽으로 위성 다 집중시켜. 이지혁과 알파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다!"

    * * *

    최정훈은 초조한 얼굴로 알파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왜 이리 늦어?"

    지금 핵이 날아오고 있는데, 이리 늦으면 어쩌란 말인가.

    "…늦고 싶어서 늦은 건 아니라구요."

    일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최정훈이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알파가 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다짜고짜 찾아오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이지혁 씨처럼 능숙한 텔레포터가 아니라구요. 이쪽을 찾아오는 방법을 말씀해 주셔야죠. 그게 아니라면 주소라도 말씀해 주시든가요."

    "…주소를 말해주면 찾아오실 수는 있나요?"

    "오랜만에 뵙네요."

    알파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이지혁 씨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황송한 일이 벌어졌다 해서 만사 젖혀두고 달려왔습니다."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할 일도 없는 거 같은데?"

    "정답. 아, 아니죠. 저 나름 바쁜 사람입니다. 지금은 다음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잠시 쉬고 있는 타이밍이라고 해두지요."

    "뭐, 됐고."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도와드려야죠.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로 핵이 날아오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전 세계로 핵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여기로도 떨어지는지는 몰랐습니다. 과연 중국, 과연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는 그 고생을 하고도 마계와의 문을 여는 수준밖에는 이루지 못했는데, 일순간 전 세계에 핵을 떨궈 버리는군요. 인간들의 스케일에는 저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이쯤 되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마계의 문을 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그냥 내버려 뒀으면 이러다가 다 죽었을 텐데. 내가 이러려고 마계 문 열었나 자괴감 들고 괴롭네요."

    "…뭐래, 미친놈이."

    알파가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열심히 주절거렸는데 상대가 저리 나오면 상처받을 만하겠다 생각한 최정훈이 이지혁에게 말했다.

    "일단 상황부터 빨리 정리해 주시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야, 여기로 핵 날아오고 있으니까……."

    "네."

    "좀 세워봐."

    "네?"

    "너는 세우고, 나는 부순다. 오케이?"

    "네?"

    알파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 * *

    "그러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저는 제 스스로가 최고의 능력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최고란 말에 조금 이견이 있을 수는 있는데… 이지혁 씨를 포함한다면 제가 감히 최고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이지혁씨는 냉정하게 말해서 능력자가 아니잖습니까. 그 능력이라는 것 자체도 어디까지나 보조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니, 이지혁 씨는 능력자라기보다는 마법사나 캐스터라고 불려야 맞는 것이죠. 각설하고, 이지혁 씨를 제외하면 최강의 마법사라… 아, 헷갈렸네. 이지혁 씨를 제외하면 최강의 능력자라 자부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가 다른 능력자들에 비해서 무척이나 다양한 능력을 가진 멀티 캐릭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좀 닥쳐, 이 미친놈아!"

    이지혁이 질린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그도 말이 많기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뜨겠다는 말은 이제 식상하게 들을 정도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알파는 그런 이지혁조차 질리게 만들 정도로 말이 많았다.

    '이 인간, 원래 성격이 이랬나?'

    어쩌면 그동안은 한국어 실력이 애매해서 말을 잘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구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알파를 상대할 때마다 이 수다를 들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이지혁은 그동안 자신을 상대하던 이들이 왜 그리도 치를 떨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일종의 정신 공격이다. 손으로는 마법을 처 날리면서 입으로는 정신 공격을 해 대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있나.

    '배워야지.'

    주둥이로 하는 정신 공격에 있어서는 알파가 그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남에게 내게 없는 장점이 있다면, 배우고 수용하는 것이 지성인의 자세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결론이 못하겠다는 거 아냐?"

    "못하겠다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죠. 미묘한 어감 차이를 잘 감안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까."

    "너 아니면 다 못하는데?"

    "……."

    "그리고 네가 못하면 다 죽어."

    "음, 잠시만요. 그건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알파가 곤란하다는 듯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한 대 피우면서 생각해 봐야죠. 담배 있습니까?"

    "새삼 생각이 난 건데, 내가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나더러 담배 달라고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인 것 같다."

    "전 별로 담배를 즐기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담배가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죠. 바로 이럴 때요."

    이지혁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꺼내 알파에게 내밀었다. 참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수 있겠는가.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 길에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흡연 구역은?"

    "그냥 피워, 새끼야. 사람들 다 대피했는데 뭔 놈의 흡연 구역이야?"

    "제가 이래 봬도 준법 시민이라서요."

    "넌 한국 국민도 아니잖아."

    "아, 그렇네요. 그럼 그냥 피우면 되는 거죠.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알파가 너스레를 떨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날아오는 미사일을 멈춰 달라는 거죠? 일시적으로? 아니면 속도를 줄여야 합니까?"

    "어느 쪽이든 편한 쪽으로 해. 내가 캐스팅 실패해서 탄두 날려 먹지만 않으면 돼."

    "으음……."

    알파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거…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 지금 슬롯이 꽉 차서 하나를 버려야 한단 말이죠. 다들 정들었는데……. 이번에 저한테 하나 빚지시는 겁니다."

    "뭔 개소리야?"

    "…이거 설명하자니, 제 패를 까 보이는 거 같아서 말하기가 좀 그렇네요. 그렇다고 말을 안 하려니 제가 이번 일로 얼마나 큰 희생을 하는지 이지혁 씨가 알아주시지 못할 것 같아서 손해 보는 느낌이고."

    "괜찮아."

    "네? 괜찮다구요? 그게 보통 그쪽에서 나올 말인가요? 아니면 내 한국어 실력이 아직 부족한 건가?"

    "어차피 니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내가 네 희생에 대해서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할 일이 없으니 몰라도 괜찮다고."

    "…쿨 가이가 여기 있네요."

    알파가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5분 내로 준비하고 올 테니, 조금 기다려 주세요. 이건 본체가 가야 하는 일이라서."

    "그러든지."

    "네, 그럼."

    알파가 빛을 뿜어내며 텔레포트를 시전하자 최정훈이 알파가 있던 공간을 보며 말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한 배를 탄 사이예요."

    "그래도 저는 영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이해를 잘 못하시는 모양인데……."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저놈이 다른 마음을 먹거나 제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어차피 이 지구는 멸망해요. 그럼 어차피 다 죽는 건데, 지금 믿고 못 믿고를 따질 필요가 없죠. 일이 잘못되어도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좀 더 일찍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의 문젠데."

    "…그렇긴 합니다만."

    보통 사람은 그게 안 된다는 게 문제다. 거대한 적 앞에서 연대한다는 것은 말이야 쉽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인데, 쌓여 있는 원한과 증오를 풀고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알파를 신뢰하십니까?"

    "전혀요."

    이지혁이 딱 잘라 말했다.

    "전혀 안 믿어요. 다만, 이건 신뢰가 아니라 필요의 영역인 거죠. 믿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믿어야죠. 그게 최선이니까."

    "음……."

    최정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찝찝하다는 이유로 알파를 배제한다면, 당장 날아오는 핵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진짜 세상일이란 건 알 수가 없네요. 저놈과 연대를 하게 되다니. 정말 내일 일은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다고?"

    이지혁이 고개를 까딱했다.

    "어차피 다 저놈이 꾸민 일인데, 알 수 없을 건 또 뭐예요?"

    "네?"

    "문을 열 때부터 저놈은 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당당하게 와서 손을 잡자고 한 거죠."

    "짜여진 시나리오란 말입니까?"

    "지금까지야 아마 철저하게 놈이 계산한 대로 흐르고 있겠죠. 이번 핵 문제까지야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최정훈이 오싹한 심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걸 다 예상했다고?'

    "그럼 설마 이지혁 씨와 손을 잡기 위해서 문을 연 겁니까?"

    "그건 아니겠죠. 다만, 문을 열면 제가 놈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다는 계산까지는 끝냈을 거예요. 아마 지구에서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놈일걸요? 내 팬티 색깔까지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왜 그렇게까지?"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 가는 건 있죠."

    최정훈은 가만히 이지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런 놈은 결코 다른 이들에게 일을 맡기고 결과를 기다리지 않아요. 아무리 크게 설치고 있다고는 해도 마왕들이 세상을 멸망시켜 주길 기다릴 놈이 아니에요. 놈에게는 마왕들도 수단에 불과하겠죠."

    "마왕들이 훨씬 강한데도요?"

    "인간이 핵보다 강해서 핵을 무기로 쓰는 건 아니잖아요. 수단이 더 강한가, 강하지 않은가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천배는 더 중요하죠."

    "으음……."

    최정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지혁 씨는 그걸 다 알고도 알파와 손을 잡은 건가요?"

    "필요하니까요."

    최정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들 둘의 대화에서 오가는 정보는 그가 알고 받아들이는 정보의 몇 배는 될 것이다.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탐색과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건 최정훈이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의 문제였다.

    "……아닐 수도 있고."

    "네?"

    "아니요."

    알파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이지혁은 정말 별생각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최정훈이었다.

    이 양반이야 수틀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복잡한 거 싫어하니까.

    "이럴 때 아펠이나 에르카나가 있으면 별로 고생할 이유도 없는데. 쯧."

    이지혁이 짜증 서린 얼굴로 불만을 내뱉었다.

    요즘 이것들은 뭐하는지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이지혁이 없는 곳에서 나름 이 세계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정확한 움직임이나 목적을 알 수 없으니 갑갑한 마음이었다.

    '누굴 탓하겠어.'

    평생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결하다시피 하다 보니 주변인들이 뭘 하든 신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 힘을 잃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들의 부재를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도 굳이 이지혁에게 자신들의 움직임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고.

    이 관계에 대해 뭔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할 찰나, 눈부신 빛과 함께 알파가 그들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 *

    "…뭘 이리 주렁주렁 달고 왔어?"

    이지혁은 알파의 주변에 우르르 서 있는 십여 명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왕 데리고 오려면 좀 정렬시켜서 깔끔하게 데리고 오든가, 어디서 노숙자 같은 복장을 한 십여 명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꼴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신뢰감이라는 녀석을 바닥 끝까지 추락시키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에에……."

    알파는 헛기침을 하더니 빙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일이 있으면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버리는 것이 이지혁 씨 개인의 성향인지, 아니면 동양적인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메리칸인 저는 합리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미국이 널 최악의 범죄자라고 하던데?"

    "…괜찮습니다. 제가 사랑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혼자 꼭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죠. 원하시는 능력을 갖춘 이들을 선별해서 왔습니다. 슬로우를 걸어줄 이들과 프리즈를 걸어줄 이들이죠."

    이지혁이 뚱한 얼굴로 알파를 바라보았다.

    "너는?"

    "에이, 또 제가 준비 안 하고 사람만 데리고 왔다고 하면 그걸로 트집 잡아서 깔려고 하시는 거죠?"

    "잘 아네."

    알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낄낄 대었다.

    "그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여기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분이 있어서 그렇게 날로 먹을 수가 없더라구요. 원하시는 건 확실하게 만들어 왔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얼굴로 간단히 넘어갔지만, 머릿속까지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만들어 왔다라…….'

    조금 전, 텔레포트를 하기 전까지 알파는 그런 능력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 능력자가 가지는 능력은 하나라는 통설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중 능력 혹은 능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

    지금까지 알파가 어떤 능력을 사용해 왔는지를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오겠지만, 막상 생각을 해보니 알파는 자신의 앞에서 유의미한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에이, 뭘 그리 또 생각하고 그러십니까? 이제 우리는 동지 아닙니까."

    "자신의 능력도 알려주지 않는 동지?"

    "사람에게는 각자 프라이버시가 있는 법이지요. 이 나라에서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프라이버시에 대한 존중은 필수입니다. 물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는 말은 안 받겠습니다. 여긴 로마가 아니니까요."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좋아. 대신 확실하게 막아내."

    "물론입니다. 아니면 다 죽을 텐데, 저도 목숨 걸고 해야죠. 다만, 이 나라가 저에게 있어서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는 곳이라는 점 역시 생각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순전히 저는 이지혁 씨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거니까요."

    능글맞게 웃는 알파.

    최정훈은 그런 알파에게 역정을 냈다.

    "그래서 대가라도 지급해 달라는 겁니까?"

    "노노, 그런 게 아니죠. 저의 이 마음을 알아달라는 겁니다. 이지혁 씨가 원한다면 언제든 최선을 다한다는 이 마음을요."

    이지혁이 머리를 잡았다.

    "미안한데, 나는 남자한테는 관심이 없어."

    "그건 아쉽네요. 방금 양성애자로 전직할 뻔했는데."

    "꺼져."

    알파가 정말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자 최정훈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 둘이 세계의 운명을 쥐고 있는 이들이라니.'

    심지어 새로 추가된 세계의 희망은 전 세계 모든 지도자의 편두통을 유발하던 이전 희망을 평범한 정상인으로 보이게 만드는 똘기를 갖췄다.

    알파가 고개를 돌리더니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멀뚱거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시작 안 해요?"

    너 때문에 이러고 있었던 거잖아, 이 미친놈아!

    마음 같아서는 욕을 한 사발은 퍼부어주고 싶지만, 지금은 참는 게 낫다는 걸 모를 최정훈이 아니었다.

    그리고 작전을 실행하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서 뭘 하자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이 작전을 입안한 것은 그가 아니라 이지혁이니까.

    '어, 잠시만.'

    괜찮을까? 이래도 되는 걸까?

    새삼 이 작전을 짜낸 사람이 이지혁이라는 것을 깨달은 최정훈이 불안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에게도 딱히 대안이랄 게 없었지만 말이다.

    "…왜요?"

    "이지혁 씨,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아는데요……."

    "왜 그래요, 불안하게."

    "아뇨, 아뇨. 별다른 게 아니고… 진짜 계획이라고 할 만한 게 있으신 거죠?"

    불안함이 잔뜩 실린 최정훈의 물음을 들으며 이지혁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계획이라는 것을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뇨. 실례가 된다고 해도 부탁합니다. 이게 꼭 필요한 거거든요."

    "말했잖아요."

    이지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잘 봐요. 얘들이 날아오는 미사일을 멈출 거예요."

    "네."

    "그럼 제가 그 위에 있는 괴물을 제거하는 거죠."

    "…네."

    "그럼 남은 미사일만 어떻게 잘 처리하면 되는 거죠. 간단하지 않아요?"

    네, 간단하지 않습니다.

    "야, 인마! 그렇게 설명하면 세상에 어려운 게 어딨어!"

    "헐, 막말이 심하시네."

    "죄, 죄송합니다."

    최정훈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쓸데없이 본심을 입 박으로 내뱉는 병이 간만에 발동한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

    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방법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최정훈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지혁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알파까지 와서 깽판을 치는 것을 봐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알파를 좀 제어해 줄 거라고 믿은 이지혁은 완전히 손을 놓고 알파가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준비를 해야죠."

    "……."

    알파가 저리 나와주는 것이 눈물 나도록 고맙다면, 과연 누가 잘못된 것인가.

    알파인가, 아니면 최정훈인가.

    답이 없는 문제를 끌어안으며 최정훈은 처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일단 방향이 중요한데… 어디서 오는 겁니까?"

    "남서쪽이니……."

    최정훈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시속 1,000 정도라고 했으니, 눈으로 보이겠죠? 비행기가 착륙하듯이? 여객기 정도의 속도라고 했잖습니까."

    최정훈이 으음, 하고 신음성을 냈다.

    "이게 보통 여객기라고 이미지네이션을 하면 안 되는 게, 일반적인 여객기는 착륙 전에는 속도를 줄인단 말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건 최고속도로 바로 내려오는 거죠. 눈앞에서 200㎞로 밟는 차 한 대만 지나가도 눈이 돌아가는 게 사람인데, 그 다섯 배의 속도로 날아오는 겁니다. 속도를 안 줄이고요."

    알파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객기가 랜딩 기어 내리고 활주로로 들어올 때의 속도는 대략 2~300㎞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 그거밖에 안 돼요?"

    "그렇죠."

    최정훈의 설명에 알파가 머리를 긁었다.

    "들었지? 생각보다 일이 쉽지 않겠다."

    알파가 뒤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며 말하자 그들 중 하나가 실없다는 듯 대답했다.

    "보스나 그런 생각 안 하고 있지, 우리는 듣자마자 다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당신처럼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흔한 줄 알아?"

    "그, 그도 그렇지."

    적나라하게 날아오는 돌직구에 얻어맞아 움찔하는 알파를 보며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또 무슨 콩가루 집단인가.'

    미 정보국에서 얻어낸 바에 따르면, 알파를 따르는 이들은 알파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조직되어 있다고 하던데…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이들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뭘 믿어야 하는 거지?'

    자신의 감을 믿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미국이 준 정보를 믿어야 하는 건지 아리송한 최정훈이었다.

    "여하튼 그렇다고 하니까, 잘 잡아줘. 여기 날아가면 세계가 같이 날아가는 거야."

    "이미 보스가 반쯤 날린 거 아냐?"

    "그렇다고 다 날릴 수는 없잖아."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궁시렁거리는 반 노숙자들을 보면서 최정훈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안 볼란다.'

    이건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이지혁과 서아영 등이 투닥댈 때 외부인들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아주 절절하게 실감하는 느낌이었다.

    "그만 닥치고 준비 좀 하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지혁이 날뛸 때는 막아줄 사람이 없지만, 알파는 제어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잘 안 해줘서 문제지만.

    "넵!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일하러 왔으면 일이나 하지, 놀러 왔어?"

    "아뇨. 뭐……."

    알파가 어정쩡한 자세로 꼬리를 내리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알파가 저자세로 나가는 것을 이상하게 보던 알파의 일행들도 알파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나자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대신 이지혁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부작용이 생겼지만 말이다.

    '힘을 잃었는데도…….'

    이지혁이 자신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흑마력을 더 이상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는 이지혁에 대한 평가를 전혀 내리지 않은 것 같았다.

    되레 과거에 적대할 때 이상으로 이지혁을 대접해 주는 느낌도 조금 났다.

    '알파쯤 되면 보는 게 달라지는 건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알파는 이지혁에 대한 존중을 전혀 잃지 않았고, 이지혁은 그걸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재미있는 관계다.

    "확실하게 막아야 할 거야."

    "걱정 마십시오."

    "걱정 안 하고 싶은데,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

    "에이, 그래봐야 나라 하나 날아가는 거죠. 정말 위급하면 탈출할 수도 있을 거 아닙니까."

    "탈출은 없다."

    "네?"

    알파가 멍하게 되묻자 이지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라가 망할 판인데 나만 발을 뺄 수는 없지. 정말 안 된다 싶으면 최후의 수단까지 쓸 거야."

    그 최후의 수단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듯, 알파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는 비장미까지 어려 있었다.

    "반드시 성공해야겠군요."

    "당연한 말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조절하려고 하던 최정훈은 울리는 스마트워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최정훈입니다."

    - 거의 접근했네. 조금 있으면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 부담은 주고 싶지 않지만, 실패하면 잃는 게 너무 크네.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 부탁하네.

    최정훈이 가만히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라는데요?"

    "…어디 보인다는 거예요?"

    "아마도 저쪽이니까……."

    최정훈이 하늘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지 않을까요. 이제 곧……."

    그때, 이지혁이 눈을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거, 커다란 새 같은 게 달고 날아온다고 하지 않았었어요?"

    "그렇습니다."

    "마왕이 직접 타고 오는데?"

    "…네?"

    최정훈의 눈에는 아직 보이지도 않건만, 이지혁은 뭔가를 보고 있는 듯 눈 위를 가리더니 욕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여기가 무슨 관광지도 아니고, 온갖 마왕 놈들이 다 놀러 오는군."

    최정훈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 저편에 아주 작은 까만 점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최정훈의 육체가 긴장으로 빳빳이 굳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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