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50화 (50/118)
  • [■] 누가 저 인간 좀 말리라고! [■]

    ─────

    이지혁이 사이클로프스의 눈을 연신 후려쳤다.

    "죽어! 죽어엇!"

    서아영과 정해민은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도 폼이 안 날까?

    무슨 사람한테 모기가 붙어서 앵앵대는 기분이었다.

    그 앵앵대고 있는 이지혁도 폼이 안 났지만, 그 앵앵대는 모기하나 어쩌지 못하고 '우워우워'하고 있는 사이클로프스도 폼이 안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번 자이언트는 나름 위엄이 있었는데!

    "죽어어엇!"

    귀로 들려오는 사운드도 영 즐겁지가 못하다.

    "쟤는 왜 저렇게 폼이 안 나지?"

    정해민의 말에 서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이 나타나기 전에 미국의 능력자들이 한창 인기를 끌 무렵, 그들이 싸우는 장면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뿌린 것들을 보면 참 멋이 났는데…….

    단순히 카메라 워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와이드 뷰로 잡아주기만 해도 참 멋이 났단 말이지.

    그런데 쟤는 왜 저리 폼이 안 날까?

    "얼굴 때문인가?"

    "지금 얼굴 보여?"

    "아니."

    "그런데도 폼 안 나잖아. 얼굴 감안하면… 음, 가까이서 보면 폼이 더 안 나겠네."

    "슬픈 이야기네."

    그나마 얼굴이라도 잘생겼으면 어찌어찌 얼굴 빨로 액션을 커버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검은 거 막 나올 때는 좀 볼만했던 것 같은데? 나름 다크 포스도 있고 말이야."

    "근데 징그럽잖아."

    "그렇긴 하지."

    검은 것도 뭐 정도껏 해야지. 만날 이상한 촉수나 휘두르고 말이야.

    그러는데 누가 멋있게 보겠는가.

    이지혁이 허리를 뒤로 한껏 젖혔다가 앞으로 내지르며 정권을 날렸다.

    그러자 그 큰 사이클로프스의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듯 뒤로 날아갔다.

    "헐."

    서아영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람이 모기에 맞아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런 심정일 것인가.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이 너무 기이해서…….

    "기분 이상해."

    "으응."

    대체 저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쨌든 끝은 금방 나겠네."

    "방심하면 안 되지."

    "설마… 저 이지혁인데."

    서아영의 말에 정해민이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날 반항하고 짜증내고 어떻게 하면 이지혁을 골탕 먹일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사는 것 같은 서아영이지만, 막상 위기가 닥쳤을 때 이지혁을 가장 믿고 의지하는 것 역시 서아영이었다.

    '얘도 좀 이상해.'

    정해민은 무덤덤한 얼굴로 이지혁을 지켜보고 있는 서아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NDF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지만…….

    '난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문득 두려워지는 정해민이었다.

    "아영아."

    "응, 언니?"

    "니가 보기에는 내가 좀 이상하니?"

    "뭐가?"

    "성격적으로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서아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런 걸 신경 써? 생긴 대로 사는 거지. 신경 쓰지 마."

    "으응……."

    정해민은 서글픈 얼굴로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다.

    서아영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광년이쯤으로 보지 않을까?

    '여길 빨리 나가든가 해야 해.'

    그래도 아이돌인데, 아니, 아이돌이었는데, 광년이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지혁이랑 놀아서 이상해졌나?"

    "아니. 언니 원래 그랬어."

    "넌 좋겠다."

    "응?"

    "생각이 없어서."

    "…무슨 소리야?"

    "아냐."

    정해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멀리 사이클로프스의 대가리를 쪼개고 있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런 것들이랑 있으니 사람 성격이 이상해지지.

    그녀의 한숨에 무거움이 묻어났다.

    * * *

    "으라차!"

    쿵!

    이지혁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둔기가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났다.

    "으라차!"

    쿵!

    이지혁은 신이 나서 사이클로프스를 후드려 팼다.

    처음에는 힘 조절도 영 힘들고 마나를 쓰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지만, 막상 두들겨 패기 시작하니 뭔가 마구마구 신이 났다.

    잡몹들을 상대할 때는 적당히 패기만 해 휙휙 날아가는 것이 타격감이 부족했는데, 사이클로프스를 패다 보니 아주 그냥 손맛이 착착 붙는 것이!

    "쩐다."

    이만한 샌드백을 어디 가서 구하겠는가.

    물론 중간중간 반항하기도 하는 생체형 샌드백이라는 점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찰싹찰싹 달라붙는 이 타격감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이클로프스가 반항을 하려 하자 이지혁이 허리를 탁 튕기며 강렬한 훅을 광대에 꽂아 넣었다.

    쿠우우웅!

    주먹과 광대가 만나서 폭음을 만들어낸다.

    "쓰, 쓰러진다!"

    최정훈의 비명과 함께 사이클로프스의 거대한 동체가 천천히 바닥을 향해 허물어졌다.

    "으아아아!"

    저만한 덩치가 쓰러지면 그 자체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이지혁 씨! 뒤에 건물! 건무우우우울!"

    최정훈의 처절한 외침에 이지혁이 짜증을 내며 몸을 날렸다.

    "아, 왜 이쪽으로 쓰러지냐!"

    건물을 피해서 쓰러지게 하려면… 보자, 이 정도 각도에서 이정도 힘으로!

    쿠우우웅!

    이지혁의 돌려차기가 사이클로프스의 옆구리에 꽂혔다.

    그 거대한 동체가 쭉 밀려나는 듯싶더니, 아슬아슬하게 고층 건물을 피해 바닥으로 쓰러졌다.

    촤아아악!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슬라임이 마치 분수처럼 좌우로 갈라진다.

    사이클로프스가 쓰러지는 강렬한 압력에 점액질의 슬라임마저 물처럼 밀려 나갔다.

    쿠웅!

    "착지 좋고!"

    이지혁이 몸을 돌려 최정훈을 가리켰다.

    "최정훈 씨!"

    "…네?"

    "텐 카운트!"

    저 인간이 진짜 미쳤나?

    "원! 투!"

    서아영이 도끼눈을 뜨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뭐해요?"

    "…아니, 하라기에."

    "하란다고 해요? 제정신이에요?"

    "전 그저……."

    "최정훈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요즘 당신 너무 저 인간한테 물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 심한 말을?"

    최무룩한 최정훈을 두고 서아영이 이지혁에게 소리쳤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끝내세요! 이거, 사후 복구만 해도 한참 걸린단 말이에요."

    "장난이라니! 저만한 애 상대하는 게 쉬운 줄 아나! 때려도 애가 안 아파하는데 어쩌라고!"

    "그럼 마법인가 뭔가 써서 빨리 끝내 버리든가."

    "하, 마나 아껴야 한다니까 그러네."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슬슬 지겹기도 하고……."

    이지혁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서 주먹에 에테르를 모았다.

    이제 그만 끝낼 시간이다.

    우오오오오오!

    하지만 사이클로프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린 사이클로프스가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게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어라?"

    그리고 공중이라 이동이 애매한 이지혁을 상대로 그 크고 거대하고 두꺼운 손을 휘둘렀다.

    "어라라?"

    이거, 못 피하는 각인데?

    어?

    파아아앙!

    허공에서 모기를 때려잡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이지혁의 몸이 유성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아아아아아악!"

    이지혁이 지르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울리다가 저 멀리로 사라졌다.

    "헐, 어디까지 날아가는 거지?"

    "대기권 돌파할 기센데."

    정해민과 서아영이 감탄을 내놓았다.

    이지혁의 몸이 점처럼 작아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디쯤 떨어질까?"

    "일단 일본은 넘을 것 같은데?"

    기세만 보자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뭐, 저 인간이면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 돌아오겠지."

    "이계에서도 돌아온 사람인데."

    그러니 이지혁에 대한 걱정은 안 든다.

    저 사람이 죽는다는 건 인류 멸망 이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니, 인류가 멸망해도 알아서 다른 세계로 가서 잘 먹고 잘살 것 같은 사람이니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럼 저거, 이제 어떻게 하지?"

    우오오오오오오오!

    이지혁을 날려 버린 것에 고무되었는지 데몬스트레이션을 하는 사이클로프스를 보며 서아영이 한숨을 지었다.

    그나마 이지혁이라도 있으니까 빨리 끝내라든가, 얼른 처리하라든가 하는 말을 해 댄 것이지, 이지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저 사이클로프스는 레이드 몹이었다.

    NDF의 전원이 전력을 다해서 상대해야 하는 몬스터란 말이다.

    그 와중에 건물들이나 도심의 피해가 얼마나 클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저번 자이언트 사태에서야 국경의 평야 지대였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던 거고, 여기서 그때처럼 화력을 퍼부었다가는 NDF가 아니라 백정 집단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지?"

    가장 좋은 방법은 도심 밖으로 유인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피해는 엄청나겠지.

    "그러니까 빨리 끝내라고 내가!"

    서아영이 이를 으득으득, 갈았지만, 없는 놈에게 화풀이를 해봤자 한계가 있다.

    "이 일을 어떻게……."

    서아영이 불만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사이클로프스의 머리 위에 검은 게이트가 나타났다.

    "응?"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게이트.

    이지혁이 독문으로 사용하는 게이트다!

    "이지혁 씨!"

    최정훈이 반색하여 소리쳤다.

    역시 이지혁. 그 멀리까지 튕겨갔음에도 게이트를 열어 단숨에 돌아온 것이다.

    게이트가 입을 쩌억 벌리자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그와 함께 사이클로프스가 예상 밖의 대처를 내놓았다.

    크아아아!

    사이클로프스가 입을 쩌억 벌리더니, 게이트 바로 밑에 가져다댔다.

    "헐……."

    "저, 저거, 어떻게 하지?"

    "삼킬 생각인가?"

    정해민의 눈이 떨렸다.

    "어, 어떻게 해! 지혁이 나오면 바로 먹히는 거 아냐?"

    "뭐, 그럴 거 같긴 한데……."

    "뭐가 그리 심드렁해! 그럼 안 되잖아!"

    "으음……."

    안 되나?

    이지혁이라면 위장을 찢어서라도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나 같으면 저런 불량식품은 안 먹을 것 같은데?

    서아영이 먹힐 이지혁을 걱정해야 하나, 먹는 사이클로프스를 걱정해야 하는가를 놓고 갈등할 때, 게이트 안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커먼 그림자는 점점 그 크기를 불리더니, 이내 게이트 밖으로 떨어졌다.

    "으응?"

    "뭐, 뭐야!"

    "헐……."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본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헛웃음을 터뜨린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뭐냐!

    저 시커멓고 커다란 것은!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포경은 불법이라고 말했는데……."

    한 번 잡혀가 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나.

    여하튼 인간 진짜!

    게이트 안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고래가 사이클로프스의 입에 틀어박혔다.

    커어어어!

    아무리 거대한 사이클로프스라 하더라도 그 입으로 단번에 고래를 집어삼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고래는 크기도 장난이 아니었다.

    "저거, 향유고래 같은데."

    "…그 짧은 시간에 별걸 다 잡았네."

    "유네스코에 신고해!"

    "유네스코 아니야, 언니. 그린피스, 그린피스."

    "너 잘났다……."

    고래가 입에 틀어박히는 강렬한 타격감에 사이클로프스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모로 쓰러졌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먼지구름이 솟아오른다.

    "죽었을까?"

    "죽었을 듯."

    "죽어야 양심 있지."

    모두가 사이클로프스가 어찌 되었는지 시선을 집중할 때,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이지혁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 고래 어디 갔어!"

    최정훈은 눈가에 흐르는 이슬을 닦아냈다.

    누가 저 인간 좀 말리라고!

    제발 좀!

    * * *

    "내 고래 어디 갔냐고!"

    이지혁의 외침을 들으며 최정훈은 눈가의 이슬을 닦았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지혁이 하는 짓을 보니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딱히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달라진 것은 이지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이지혁이 이 세계에 적응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지혁에게 적응한 것이다.

    "……때로는 진실은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구나."

    최정훈이 눈물을 삼켰다.

    "아, 내 고래……."

    "아, 밑에 있잖아, 이 화상아!"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밑에?"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먼지구름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디?"

    이지혁의 몸이 천천히 하강했다.

    먼지구름이 어느 정도 걷히고 나자 그 안에 입에 고래가 틀어박힌 사이클로프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헐……."

    저건 왜 남의 고래를 처먹고 있는 건가?

    그리고 먹을 거면 똑바로 먹든가, 뭘 한입에 먹겠다고 그걸 입에다가 통째로 욱여넣고 있는 거지?

    지가 몬스터면 몬스터지, 저리 머리가 나빠서야.

    "쯧쯧."

    이지혁이 사이클로프스의 빈곤한 두뇌를 걱정할 때, 이지혁의 걱정을 알기라도 했는지 사이클로프스의 입이 움직였다.

    우적!

    "헐……."

    씹는 소리가 이리 크게 나도 되나!

    "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지지야!"

    어떻게 잡아온 고랜데 그걸 처먹고 있단 말인가!

    저게 한 마리에 돈이 얼만데!

    우연히 착지한 곳에 고래가 있었고, 우연히 이지혁이 고래 머리에 정면으로 충돌한 것뿐이지만, 어쨌든 이지혁이 잡은 것 아닌가!

    물론 날려 보낸 사이클로프스의 지분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통째로 먹으면 안 되는 거지!

    분노한 이지혁이 사이클로프스의 배를 향해 전속력으로 하강했다.

    "끙차!"

    쿠우우웅!

    이지혁의 드롭킥이 사이클로프스의 명치에 작렬했다.

    사이클로프스가 입에서 고래를 뿜어내며 기억자로 몸을 굽혔다.

    '꺼억꺼억'대는 소리가 들리고, 배 안에서는 뭔가 이 세계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꾸륵대는 소리가 마구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파?"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그러게 남의 고래를 탐하면 안 되지!"

    다시금 이지혁의 주먹이 사이클로프스의 명치에 꽂혔다.

    사이클로프스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으라차!"

    쾅! 쾅! 쾅!

    이지혁의 주먹이 연속으로 사이클로프스의 육체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사이클로프스가 자신의 배 쪽에 있는 이지혁을 마구 후려쳤지만, 이지혁은 쥐새끼처럼 사이클로프스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그러자 사이클로프스의 주먹이 자신의 배를 후려친 꼴이 되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아!

    사이클로프스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이지혁의 킥에 눈을 찔리고는 다시 바닥으로 쓰러져 눈을 부여잡고 굴렀다.

    "아……."

    최정훈이 조금은 안쓰러운 얼굴로 사이클로프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본 대형 몬스터들은 나름의 포스를 보여주었는데, 저 사이클로프스는 처음 등장할 때 지진을 불러온 것을 빼면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그것도 모기처럼 앵앵거리는 이지혁에게 얻어맞는다.

    사람이 모기에게 물려서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쌍하다."

    "응."

    정해민과 서아영도 같은 의견이었던 모양이다.

    외형적으로 전혀 예쁜 구석이 없는 사이클로프스가 불쌍해 보이는 걸 보니, 이지혁이 지금 악랄하긴 악랄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죽일 거면 곱게 보내주지. 샌드백도 아니고, 저게 뭐야."

    그 마법인가 뭔가를 썼으면 저런 몬스터 정도는 한 방에 잡았을 것인데…….

    저건 몸집만 컸지, 마왕인가 뭔가 하는 것들에 비하면 쭉정이나 다름없었다.

    마왕이 바로 앞에서 쏘아낸 투기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좀 이상해지기는 했네.'

    정해민은 바닥에서 몸을 뒤트는 사이클로프스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사이클로프스를 눈으로 보았다면 그녀는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이클로프스를 보며 반쯤 무시하고 있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는데?'

    서아영도 정해민과 비슷한 심정인 모양이다.

    대놓고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저만한 몬스터도 보통 일은 아닐 텐데…….'

    이지혁 없이 잡으라고 하면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몬스터다.

    그런데 영 긴장감이 없었다.

    이미 마왕을 상대해 본 이들이다 보니 저 정도의 몬스터를 상대로는 긴장감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응?"

    "그래도 저 정도면 거의 국가 괴멸급 몬스터 아냐?"

    "……그렇지."

    "그런데 이렇게 무슨 영화 보듯이 보고 있어도 되는 건가?"

    "저 양반이랑 손발 맞추는 게 쉽지가 않잖아."

    "흐음……."

    하기야 이지혁이 혼자서 날뛰기 시작하면 뒤에서 지켜보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도 없다.

    "지혁아, 빨리 좀 끝내봐!"

    정해민의 외침에 이지혁이 즉각 화답했다.

    "저 아줌마가……. 몬스터 잡는 게 쉬운 줄 아나!"

    "아, 아줌마."

    정해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아줌마라니! 꽃다운 이십 대에게 아줌마라니!

    "아, 아줌마라니……."

    정해민이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서아영이 다급하게 등을 토닥거려 줬다.

    "아냐, 언니! 언니가 나보다 어리게 보이잖아. 저 인간 막말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무시해, 무시! 언니, 아직 스무 살로 보여."

    "그치?"

    "응, 그럼. 저 인간이 눈이 삔 거지! 지도 누나가 아줌마처럼 보인다고 하는 말이 아닐 거야."

    "으응."

    정해민이 겨우 진정하자 서아영이 짜증을 확 부렸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정리하라고요!"

    "아, 시간 끄는 게 아니라니까."

    죽어라 때리고는 있는데 대미지가 안 박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쯧."

    이지혁이 결국은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나를 끌어올리려 할 때, 그게 눈에 들어왔다.

    "어?"

    사이클로프스의 옆에 같이 뒹굴고 있는 메이스.

    '저거, 대지의 메이스지?'

    아티팩트.

    지진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는 아티팩트.

    사이클로프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개체들만 한 번씩 들고 출현하는 메이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몬스터는 번식을 통해 수가 증가하기도 하지만, 자연 발생하기도 한다.

    사이클로프스는 성별이 없는 몬스터였고, 대부분이 자연 발생한다.

    그 자연 발생의 와중에 저 메이스도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호오?"

    이지혁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지더니, 바닥에 떨어진 메이스 앞에 나타났다.

    "음……."

    이거, 커도 너무 크네.

    메이스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데, 손잡이가 이지혁의 몸보다 더 두껍다.

    "아닌데."

    분명히 같은 메이스를 사람들이 쓰는 걸 봤는데…….

    이건 기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 중의 하나였다.

    사이클로프스를 잡아서 루팅해서 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단 말이지.

    이지혁이야 뭐…….

    육체는 일반인보다 못한 수준이었으니, 대지의 메이스가 아니라 숏 소드 하나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저질 육체라 애초에 포기했지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그의 육체는 거의 슈퍼맨급이란 말이지!

    ……음, 그건 좀 오버고.

    어쨌든 이 세상을 다 따져도 박성찬급의 능력자가 아닌 한 에테르를 활용하는 이지혁보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으으음……."

    이지혁이 살짝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갸웃대다가 메이스에 손을 댔다.

    이거, 마나를 써야 하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메이스가 우웅- 하고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

    반색한 이지혁이 메이스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홀로 진동하던 메이스의 크기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의봉인가?"

    좋은데?

    이거, 뭔가 신기하다.

    이지혁이 장난감을 본 어린아이처럼 몸을 들썩였다.

    점차 줄어들던 메이스가 결국은 이지혁의 손에 꼭 들어올 정도로 작아졌다.

    "근데 이거……."

    들 수 있을까?

    메이스 머리가 바닥에 닿아 있는데, 작아져 접점이 줄어들어서 그런 건지 자꾸 바닥을 파고들어 갔다.

    가만히 두기만 해도 땅에 박혀드는 무게를 이지혁의 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안 되면 말고."

    이지혁의 어깨에 힘줄이 돋아났다.

    "후웁!"

    에테르를 가득 모은 이지혁의 팔이 느릿하게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어?"

    이거, 생각보다 가벼운데?

    아니, 내가 생각보다 센 건가?

    메이스를 붕붕 휘둘러 본 이지혁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사이클로프스를 노려보았다.

    "너, 잡몹 주제에 너무 오래 걸렸어."

    이제 그만 끝내야지!

    이지혁이 기합성을 내뿜으며 사이클로프스에게로 날아들었다.

    "으라차!"

    사이클로프스의 정수리에 이지혁이 휘두른 메이스가 정확하게 적중했다.

    데에에엥!

    마치 종을 친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사이클로프스의 정수리에서 거대한 진동이 발생했다.

    역시 대지의 메이스.

    이지혁이 뭘 하지도 않았는데 자체로 진동을 발생시키며 사이클로프스의 머리를 흔들어놓았다.

    크아아아아!

    사이클로프스의 비명 소리가 이지혁의 귀를 찢어놓을 듯 크게 울려 퍼졌다.

    '여기 에테르가 주입되려나?'

    마나와는 어느 정도 조합이 되었지만, 마나가 강화력은 딱히 없는 편이라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그럼 에테르는?

    이지혁이 대지의 메이스에 에테르를 밀어 넣었다.

    우우웅!

    메이스가 흔들리며 새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 이거, 뭔가 각이 사는데?"

    스트라이킹이라도 시전한 것같이 메이스가 빛을 뿜어냈다.

    그것도 새하얀 빛을!

    이지혁은 그 새하얀 빛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언제나 악역만 맡다가 하얀빛을 보니 뭔가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라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자, 이제 끝내자."

    이지혁이 손안에서 메이스를 빙글빙글 회전시키다가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커어어엉!

    순간적으로 반항하며 손을 휘둘러 오는 사이클로프스의 공격을 슬쩍 피해내고는 허공을 지지대 삼아 빠르게 하강한다.

    "으아아아아!"

    어깨가 빠질 만큼 메이스를 뒤로 쭈욱 밀어냈다가 손목이 꺾이도록 휘두른다.

    혼신의 힘을 실은 일격이 사이클로프스의 머리를 강타했다.

    쿠우우우웅!

    "으아!"

    최정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생물체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광경은 언제 봐도 껄끄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끝?"

    "응, 끝."

    손으로 얼굴을 가린 정해민이 묻자 서아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고도 살아나면 사이클로프스가 아니라 히드라지.

    아무리 재생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저건 못 살아난다.

    "어쿠!"

    이지혁이 아직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사이클로프스의 가슴팍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되네, 이거."

    아주 안 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나를 공격적인 용도로 쓰지 않고도 저만한 몬스터를 잡아냈다.

    이 정도면 이지혁의 에테르 활용도 궤도에 올라왔다고 봐야 한다.

    대부분은 전투 센스에 의존한 전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음……."

    이지혁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은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왜요?"

    "……아닙니다."

    최정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 슬라임들이나 이제 어떻게 해주시죠."

    그때, 의외의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 *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고!"

    최정훈은 등 뒤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음?"

    고개를 돌려보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저 이상한 물컹한 건 뭐냐구요! 저기에 끌어들여 가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이걸 어떻게 보상할 건데?"

    "당신들, 능력자야? 능력자면 일을 똑바로 해야 할 것 아냐! 우리 집 어떻게 할 거야? 어? 어떻게 할 거냐고!"

    저게 뭐지?

    최정훈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상황을 주시했다.

    이지혁의 슬라임이 삼켰다가 뱉어낸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뒀더니, 그들은 주변의 능력자들을 상대로 항의를 하고 있었다.

    최정훈은 휴대폰을 꺼내 경찰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반인들은 일반인이 상대해야 한다.

    능력자가 일반인들과 얽히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무리 정중하고 상식적으로 대우해 준다고 해도 트러블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발생하는 것이다.

    지원 요청을 마친 최정훈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NDF들을 보니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서자 사람들의 사나운 눈초리가 최정훈에게로 모였다.

    "넌 뭐야?"

    글쎄요, 저도 제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NDF 부부장인 최정훈입니다. 불만 사항이나 요구 사항이 있으면 제게 말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책임자야?"

    "어, 음……."

    책임자라고 해도 되려나?

    최정훈이 살짝 고민하는 틈을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됐고! 책임자 나오라 그래!"

    '사장 나오라 그래' 스킬이 발동되자 최정훈의 볼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놈의 책임자는 뭐 그리 찾아대는가.

    "제가 책임자입니다."

    "진짜 당신이 책임질 수 있어?"

    "예, 일단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최정훈은 말을 하면서도 연신 눈을 힐끔거리면 경찰이 언제 도착하는지를 살폈다.

    '아, 슬라임.'

    하지만 생각해 보니 도로고 뭐고 슬라임이 모조리 막아서고 있는데, 무슨 수로 경찰이 여기까지 오겠는가.

    "이지혁 씨!"

    "넹?"

    "일단 저 슬라임 좀 어떻게 해주세요!"

    "뭘 어케 하라구요?"

    "아……."

    좀 제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란 말이다!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먹냐!

    "좀 치워주세요. 여기도 이제 정리해야죠."

    "어?"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요."

    "네?"

    "저거, 지금 반쯤 금 간 건물도 많을 것 같은데, 이대로 치워도 돼요? 까딱하면 무너질 텐데?"

    최정훈이 아차 하는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지금이야 유지가 되고 있다 해도 저 건물들이 언제 무너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평소의 최정훈이면 당연히 생각했을 일인데, 이지혁의 전투를 보고 있다 보니 긴장감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 그럼. 저쪽으로 길을 내주실 수는 없나요?"

    "그런 미묘한 컨트롤까지는 어려운데."

    이지혁이 뚱한 표정으로 말하자 최정훈이 한숨을 쉬었다.

    뭔가 항상 도움이 되는 사람인데 뭔가 도움이 안 되는, 이상한 사람이다.

    "경찰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지혁이 뭔가 기묘한 시선으로 최정훈을 보았다.

    "왜 그러시죠?"

    "아뇨. 가끔은 최정훈 씨가 똑똑한지 멍청한지 헷갈려서요."

    "네? 그게 무슨?"

    이지혁이 손가락을 들어 정해민을 가리켰다.

    "여기 엘리베이터."

    "누가 엘리베이터야!"

    정해민이 버럭했지만, 이지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 앞으로 가서 데리고 오라고 하면 되잖아요."

    "아……."

    최정훈이 아차 싶은 눈으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도 여기 놀고먹는 애들한테 가서 경찰 하나씩만 안고 오라고 해도 금방 다 채우겠구만."

    그거 좋은 방법인데?

    매우 무식한 방법이지만, 효용성은 장난 아니겠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

    "좀 생각을 하고 살아요."

    "아아……."

    최정훈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이지혁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다니, 죽고 싶다.

    "넌 뭐하냐, 가서 경찰 안 데려오고."

    "내가 데려와야 하는 거야?"

    "하는 짓도 없이 서 있으면 귀라도 열고 있어야지! 귓구멍 좀 파줄까?"

    "……이게 말하는 것 좀 봐! 누나한테!"

    "아줌마라고?"

    "누나라고! 누나!"

    "아줌마?"

    울먹.

    정해민의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자 최정훈이 '앗, 뜨거라' 하고 달래기 시작했다.

    "아차차, 정해민 씨! 사람들이 보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이! 저 중에 정해민 씨의 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

    정해민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정훈의 말이 맞다. 저 중에 자신의 팬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징징 짜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참아내서…….

    "팬은 무슨. 그 팬들 다 다른 데로 갈아탄 지가 언젠데? 아이돌로 먹고살려면 이제 똥꼬 쇼라도 해야 할 판인데, 뭔 놈의 팬이야, 팬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최정훈이 기겁하여 정해민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정해민의 음파 병기를 감당하기는 너무 얇고 작았다. 손을 뚫고 나오는 소리가 최정훈의 손을 덜덜 떨리게 만들고 있는 지경이었다.

    이 여자는 입에 기차 화통을 장착하고 사나!

    어떻게 이런 작은 몸에서 이만한 소리가 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 뭐야!"

    "이런 제길, 이거 뭐야! 어디서 나는 소리야!"

    "북한의 공격인가!"

    사람들도 갑자기 터져 나온 음파 병기에 당황하여 귀를 틀어막았다.

    "쯧."

    이지혁이 슬금슬금 정해민에게 다가가더니, 번쩍 들어 슬라임에게로 집어 던졌다.

    푸욱!

    점액질이 정해민을 그대로 삼키더니, 소리가 사라졌다.

    "진짜 저걸 고소하든지 해야지."

    그동안 이지혁의 귀가 입은 타격을 감안하면 피해 배상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받아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게, 왜 그런 말을 하고 그러세요!"

    "내가 뭐 틀린 말 했나요? 팬은 무슨."

    이지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은 현실을 보고 살아야지,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살면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이 꼭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충격을 먹는단 말이지.

    "저……."

    "네?"

    최정훈이 은근슬쩍 다가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분, 정해민 씨 아닌가요?"

    "맞습니다만?"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최정훈은 대답 없이 이지혁을 돌아보았다.

    이지혁 역시 대답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슬라임에 파묻혀 발만 튀어나와 있는 정해민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쑤욱.

    그사이 눈물범벅이 된 정해민이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미안하다."

    이건 사과해야겠지.

    "너……."

    "저기, 니 팬인데, 사인 좀 해달라는데?"

    "응?"

    정해민의 손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큭?"

    귀싸대기라도 날아올 줄 알고 이지혁이 거리를 벌렸지만, 정해민의 손은 옆구리에 찬 힙색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물을 닦아내고, 단 20여 초 만에 풀 메이크업을 완성한 정해민이 화사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귀신이 따로 없네.'

    이것이 프로인가.

    "어머, 안녕하세요!"

    정해민이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말투와 행동거지를 하며 자신의 팬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사인을 해주고 같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되게 좋아하네."

    "팬이요?"

    "아뇨, 쟤가요."

    "……."

    최정훈은 무언으로 동의를 했다.

    지금 저 광경만 보자면 누가 연예인이고 누가 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뭐하자는 거야, 지금!"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저 광경이 딱히 흐뭇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야! 너! 책임자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상황을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최정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뭘 책임져 달라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요구 사항을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와, 말투 재수 없다.

    이지혁이 사무적 어투로 돌아간 최정훈을 보며 혀를 쭉 내밀었다.

    "이 상황을 어쩔 거냐고.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리잖아."

    "병원에 가시면 됩니다. 앰뷸런스를 불러드리지요."

    "우리 집은 어쩔 거야! 저 이상한 게 다 들어찼다고!"

    "그건 보상 매뉴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재난구역으로 선포될 것이고, 구청에서 구호반이 나올 테니, 조금 기다리시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밖에 일 못해?"

    최정훈이 살짝 인상을 썼다.

    "저희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해서 피해를 끼쳐 드린 점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나름으로는 최선의 대처를 하였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는 부분은 직접 민원을 넣으시거나 행정소송을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심력을 낭비하는 것은 아까운 일 아니겠습니까?"

    "이 새끼, 말하는 것 봐? 야, 이 새끼야. 너는 에미, 애비도 없어?"

    최정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사람들은 공직자에게는 마음대로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들이 뽑은 선출직에게는 되레 굽실대면서 노력해서 올라온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대우 받기를 바란다는 말이지?

    "안 계십니다."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논리로 이길 수 없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을 보게 되자 이들과 말을 하고 있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최정훈은 심호흡을 했다.

    이들과 말을 섞고 있는 시간이 아깝기는 하지만, 경찰이 오기 전까지 이들을 관리하는 것 역시 최정훈의 일이었다.

    그러니 알려줘야겠지.

    지금 이들이 화를 내야 하는지, 고마워해야 하는지 말이다.

    최정훈이 한마디를 더하려는 시점에 누군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응?"

    고개를 돌려보니 서아영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

    최정훈은 자신이 흥분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무리 방법이 과격했다고는 하나 자신들은 저들을 살려주었다.

    그런데 적반하장식으로 책임을 지라는 말이나 해 대니 기분이 뒤틀린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평정을 유지하려 해도 최정훈 역시 사람.

    이런 대접을 받고 기분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서아영은 최정훈의 흥분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기분이 나빴을 것이 빤한데도 최정훈은 저들을 비꼬고 있는데, 서아영은 그런 최정훈을 말리고 있었다.

    '반성해야지.'

    지금 서아영이 하는 태도가 원래 최정훈이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최정훈은 최근 그가 예전 같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아, 제가 좀……."

    최정훈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서아영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마구 고개를 저었다.

    "응?"

    이 사람, 왜 이러지?

    서아영이 턱짓으로 뒤쪽을 슬쩍슬쩍 가리켰다.

    뒤쪽?

    이 사람 반응을 보니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최정훈이 불안함을 느끼고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가슴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이 불안함의 원인은 무엇일까?

    너무도 서글픈 것은…….

    최정훈은 이미 이 불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돌아본 곳.

    최정훈의 뒤에는 잔뜩 뿔이 난 표정을 지은 이지혁이 불만을 토해내는 사람들을 꼬나보고 있었다.

    "팍, 씨!"

    이지혁의 입이 열리자 최정훈의 눈물샘도 같이 열렸다.

    '망했다.'

    이지혁이 달아오른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에헤이! 이지혁 씨!"

    최정훈이 이지혁의 몸을 끌어안아 뒤로 당겼다.

    "잠깐 놔봐요."

    "에헤이, 왜 이러십니까! 진정하게요, 진정."

    "아니, 쯧!"

    베라프에서 저 난리를 쳤으면 지금쯤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구해주러 온 사람에게 되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다니.

    베라프의 기사나 마법사들이었다면 보따리가 아니라 지옥행 특급열차표를 내밀어주었겠지. 목을 따버린다거나 잘 익혀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베라프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지혁도 베라프에서처럼 깔끔하게 이들을 반성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원래 염라대왕 앞에서는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고 하잖아?

    물론 베라프였다면 이지혁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은 1㎞ 전방에서부터 도망가지 못해서 안달이었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서아영도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정해민은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나 보는 광경이긴 하지만, 볼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중에 민감한 아이돌인 그녀는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막무가내인지도 잘 알고 있고, 그들이 얼마나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지혁아!"

    그렇기에 이지혁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의 항의가 얼마나 정당하고 얼마나 정중하든 일반인과 얽혀든 능력자는 반드시 욕을 먹게 된다. 연예인도 그랬으니까.

    누가 옳고 그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정해민이 달래려고 하는 찰나에 이지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던 모양이다.

    "넌 뭘 그리 꼬나봐?"

    이지혁에게 돌직구로 시비가 날아들었다.

    "헐……."

    최정훈의 눈이 커졌다.

    "아!"

    "으……."

    서아영과 정해민도 못 볼 걸 봤다는 투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이지혁은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안 꼬나봤는데요?"

    "그런데 눈이 왜 그래?"

    "원래 이런데요?"

    "눈이 어떻게 원래 그렇게 생겨 대놓고 꼬나보고 있구만."

    "원래 그런데요?"

    이지혁에게 시비를 걸던 중년의 남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끄덕.

    최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생긴 걸로 그러면 안 되지.

    이지혁이라고 저리 생기고 싶어서 저리 생긴 건 아니지 않은가.

    "……진짜 원래 눈이 그래?"

    "넹."

    "왜 그리 생겼어?"

    "……."

    천하의 이지혁마저 이 순간에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리 생겼냐니.

    그걸 왜 이지혁에게 따진다는 말인가.

    이지혁이 이리 생기고 싶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엄마…….'

    이지혁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안 그래도 요즘 주변에 있는 사내놈들이 다 사람같이 않게 생겨서 스트레스를 받는 찰나에 이런 말까지 들으니까 정말 스트레스가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생기고 싶어서 생겼냐고!"

    "그럼 선글라스라도 좀 써라. 어린놈이 인상이 그리 나빠서야……."

    취이이익!

    이지혁의 정수리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진짜 해보자는 건가?"

    "에헤이! 이지혁 씨! 에헤이!"

    최정훈이 거머리처럼 이지혁에게 달라붙었다.

    "비켜봐요! 아니, 저 아저씨가! 머리도 없으면서 뭘 남의 외모를 지적질이야! 머리나 심지!"

    "뭐, 이 새끼야?"

    이지혁에게 지적을 하던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반짝거리는 머리가 서글프다.

    저 썩을 풍성충 놈이 감히 민두노총을 건드리다니.

    "말이 심하네!"

    "넌 언제까지 풍성할 것 같냐!"

    인파 속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반짝이는 남성들이 사내를 거들고 나섰다.

    "아, 음… 이지혁 씨, 그건 좀 심한 듯."

    최정훈마저 아저씨의 편을 들고 나섰다.

    "…아니, 욕은 내가 먼저 먹었는데."

    "눈 찢어진 건 성형이라도 할 수 있잖습니까. 저건 답도 없는데."

    "…아."

    이지혁은 반성했다.

    "그럼 자라나라, 머리머리라도."

    "크아아앗!"

    분노한 아재의 돌진에 이지혁이 '앗, 뜨거라'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을 통제하던 NDF 요원들이 아저씨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하시죠!"

    "놔봐! 내가 오늘 저놈 머리털을 모조리 뽑아버릴 거야."

    "그전에 아저씨 목이 뽑혀요."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저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시비 걸어도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니들은 뭐야!"

    막무가내로 나오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요원들이 쩔쩔매기 시작했다.

    '착하기도 하지.'

    이곳이 베라프였다면 저 아저씨는 감히 능력자들의 얼굴도 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분이 나쁘다고 목을 따버릴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 힘이 없는 일반인이 능력자를 되레 핍박하고 있었다.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살아 있는 곳. 그것이 현대의 위대함이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싫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이런 것을 바라오긴 했다.

    아무리 현대가 힘이 있으면 살기 좋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힘을 가진 자에 대한 대우는 베라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베라프에서 힘은 권력이고, 재력이고, 폭력이다.

    힘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힘을 가진 자라도 대중을 상대로 그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

    힘을 가진 자에게는 불편한 일이지만, 인간이 쌓아 올린 시스템이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지혁은 그 기적을 간절히 바라오던 사람이다.

    베라프의 야만에 끝도 없이 시달린 이지혁이 아니던가.

    그러니 약자가 자신에게 항거하는 사태에 대해서는 딱히 불만이 없었다.

    다만, 그래도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강하고 강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저 아저씨가 이지혁보다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았다.

    베풀어준 은혜에 적반하장식으로 나오면 뭘 어쩌자는 건가.

    "이봐요, 아저씨."

    "뭐?"

    "나 아니었으면 아저씨는 죽었어요. 그런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죠."

    이지혁은 평소답지 않게 정중히 말을 했다. 그 나름으로는 최대한 예의를 차린 말투였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헐……."

    이지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아주 당연한 진리를 그는 아직 몰랐던 것이다.

    "그게 너희 일 아냐?"

    "네?"

    "내가 내는 세금으로 너희 월급 받잖아. 그리고 그 대신 니들이 하는 일이 사람들을 몬스터에게서 지키는 거잖아. 그러면 당연히 해야지. 그걸 제대로 못한 걸 죄송스러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지혁은 말문이 막혔다.

    논리에서 밀린 게 아니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입을 섞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였다.

    "어, 그… 죄송합니다."

    사과했다?

    최정훈은 깜짝 놀라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입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역시 아재 파워는 강한 것인가?

    천하의 이지혁을 후퇴시키다니.

    "됐고,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거야? 너희,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음……."

    이지혁이 손을 뻗어서 최정훈을 슬쩍 잡아 당기고는 앞으로 밀었다.

    "저는 또 왜!"

    "담당이시잖아요."

    "제가 언제부터 이런 거 담당이었다고."

    "처음부터요."

    "아? 그래요?"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는 담당이 생겨나는 기묘함을 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나서자 따가운 시선들이 연신 최정훈에게 쏟아져 내렸다.

    "흠흠."

    최정훈은 헛기침을 하여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런 시선을 받는 건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특히나 그 시선에 미묘한 적의가 어려 있을 때에는 말이다.

    "그래서 정확하게 어떤 피해를 입으셨습니까?"

    "말했잖아. 집이랑 차. 이런 거."

    "그건 저희한테 말씀하실 부분이 아니라……."

    "그런 건 됐고!"

    "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저 이상한 걸죽한 거에 삼켜졌다 나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단 말이지. 내가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거야?"

    "예? 보상이요?"

    아니, 이게 뭔 개소린가?

    슬라임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사람들을 살려줬더니, 보상을 해달라니.

    재산 피해라든가 그런 쪽이었다면 어떻게 협조를 구해서 매뉴얼을 마련할 수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피해를 보상하라니.

    '뭐, 크게 틀린 것도 아니지만.'

    국가적 재난 사태에 휘말려서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그 사람을 케어해서 건강한 상태로 사회로 되돌리는 것 역시 국가의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아마 곧 데스크가 마련되고 구호대가 올 겁니다. 자세한 것은 그쪽에서 논의하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구호대?"

    대머리 아저씨는 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

    "사고는 누가 쳤는데 구호대 타령이야? 이거, 다 너희가 벌인 일 아냐?"

    "일을 벌인 건 저희가 아니라 몬스터죠. 몬스터가 벌인 일을 저희가 수습한 겁니다."

    "그래? 그럼 그걸 제대로 수습 못한 것도 너희 잘못 아냐?"

    "범죄가 일어나면 미리 막지 못한 경찰 잘못이고, 불이 나면 미리 끄지 못한 소방관 잘못입니까?"

    "당연한 말을 하고 있네."

    "아……."

    최정훈은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왜 그리 간단하게 뒤로 빠지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이래서 콜센터 사람들이 머리가 빠진다고 하는 거구나.'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스트레스는 수많은 능력자들의 발악을 받아주었던 최정훈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 정도였다.

    문제는 이 사람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다른 일반인들도 말리기는커녕 은근슬쩍 사내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 그리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사내의 말이 관철된다면 보상금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까?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희가 어떻게 보상해 주기를 바라십니까?"

    "치료비랑 위자료지."

    "하하."

    "웃어? 너 지금 웃었어?"

    대머리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팔을 걷어붙였다. 드러나 소매 아래로 문신이 보이는 것이,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사람이란 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에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지.'

    지금 눈앞의 인간은 이성이 없거나, 아니면 과도하게 이성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할 거냐고?"

    대머리 아저씨가 최정훈의 가슴을 툭툭, 밀기 시작했다.

    "이 인간이?"

    그 순간, 서아영이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왔다.

    "이 여자는 뭐야?"

    "야, 이!"

    침착하라고 말리던 서아영이지만, 최정훈의 몸에 손까지 대는 것을 보니 더는 참을 수 없던 모양이다.

    "뭐? 너는 또 뭐야?"

    서아영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쓰려는 순간, 바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아저씨."

    또 어느 놈이 시비를 거나 싶어 고개를 돌린 대머리 아저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 *

    "아, 아니……."

    저게 뭐야?

    뭐 저런 게 다 있지?

    사람은 사람인 것 같은데, 저리 생긴 사람이 있는 게 말이나 되는가?

    "왜, 왜 그렇게……."

    "뭐?"

    "아, 아니요."

    대머리 아저씨가 고개를 푹 숙였다.

    와, 꿈에 나올까 무섭다.

    그도 어디 가서 인상으로 밀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놈은 인상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아까 이지혁에게 눈이 왜 찢어졌냐고 말한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런 얼굴도 있는데 그 눈 좀 찢어진 게 뭔 대수라고.

    암, 사람이 눈코입만 제대로 달려 있으면 되는 거지.

    "어이, 아저씨."

    "…네?"

    대머리 아저씨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여기 아저씨 말고 또 누구 있어?"

    "…많죠."

    "어?"

    헐…….

    그냥 눈을 부라린 것뿐인데 이 꼬리뼈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전율은 뭔가.

    그도 왕년에 그쪽 생활 좀 하면서 온갖 진상과 온갖 더러운 인상들을 다 봤지만, 저렇게 얼굴 하나로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인상의 끝판왕은 처음 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간다.

    액면가가 짐작이 안 되는 얼굴이지만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자신보다 어린 것은 확실한데, 반말을 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아저씨, 왜 그래?"

    "예, 예?"

    "아니, 뒈질 뻔한 인간들 살려줬으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뭐? 피해 보상?"

    "아, 아니, 그게……."

    뭔가 변명을 하려는 찰나, 앞에 있는 인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그냥 그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아오, 창식아."

    "예, 형님."

    "인상 좀 쓰지 마라. 꿈에 나오겠다."

    "…예."

    창식이는 입을 삐죽인 다음 이지혁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대머리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이름이 뭐야?"

    "저, 박현동입니다."

    "어, 그래. 현동이 아저씨. 아저씨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사람이 양심이란 게 있어야지. 여기 있는 분들이 아저씨한테 뭘 잘못했나?"

    "아닙니다."

    "그럼 고마워해야지. 죽을 사람 살려줬으니 얼마나 고마워. 그런데 왜 여기서 피해 보상이 어쩌고 하고 있는데? 그럼 아저씨는 목숨 살려준 값을 뭐로 갚을 건데?"

    "그건 세금으로."

    "세에금?"

    창식이가 코웃음을 치더니, 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를 하나 꺼내 박현동에게 던졌다.

    엉겁결에 오백 원을 받아 든 박현동이 의문 어린 시선으로 최창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당신이 이 형님들한테 준 세금이 얼만데? 그거면 되는 거 아냐?"

    "……."

    "이제 오백 원 갚았으니까 어쩔 건데? 이제 목숨 살려준 값을 해야지?"

    "아니, 저는……."

    최창식이 이를 갈았다.

    "사람이란 게 말만 한다고 사람이 아니야. 도리를 알아야지, 도리를! 내가 무식해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런데 당신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왜 그래?"

    최창식이 박현동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당신들도 똑같아. 사람이 억지를 부리고 있으면 말려야지. 뭐 주워 먹을 것 있다고 와서 기웃대고 있어."

    이지혁은 최창식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놈이 어른들한테 말하는 꼬락서니 좀 보소.

    과연 창식이다.

    그런데 그 광경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도 창식이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거, 능력자들 그런 일 하라고 나라에서 세금 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최창식이 피식 웃었다.

    "아저씨."

    "네?"

    "군대 또 갈래요?"

    "예?"

    이건 무슨 소름 돋는 소리란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군대에 두 번 가나.

    "…그게 무슨 소립니까?"

    "왜요? 아저씨 말대로면 군대 가서 나라 지키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야죠. 세금으로 월급 받고 하는 거잖아요."

    아니, 그게 좀 다른데…….

    듣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이지혁이 창식이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저 인간이 원래 저리 머리가 좋았나?

    생긴 건 오거랑 지능이 비슷할 것 같…….

    아, 오거 머리 좋지?

    그제야 모든 비밀을 알았다는 듯 이지혁이 허벅지를 내려쳤다.

    역시 생긴 걸로 사람이나 동물을 판단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귀엽게 생긴 판다가 알고 보면 흉포한 동물인 것처럼 말이다.

    창식이가 저리 생겼다고 창식이가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또 얼굴만 보고 당연히 머리가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되지."

    창식이가 말을 유창하게 할 수도 있는 거지.

    이지혁은 잠시나마 창식이를 무시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액수가 다르지 않나."

    "액수? 제가 보기에는 저 사람들이 나라에서 일 안 하면 돈은 더 벌 거 같은데? 안 그래요?"

    "……."

    "따져 보면 군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인데, 군대 끌려간 사람들 보고는 불쌍하다 소리 하면서 저 고생하는 사람들한테는 왜 그래요? 예?"

    박현동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할 말이 궁하기도 했지만, 말을 한다고 해도 눈앞에 이 남자에게 통할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괜히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맞을까 봐 무섭고.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는 겁니다. 예? 확 그냥 다 엎어버릴라."

    창식이의 어깨 근육이 꿈틀꿈틀한다.

    그리고 그 어깨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상하게 능력자들은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라든가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리 막 나갔던 것이다.

    능력자 특별법이 그들을 보호해 주기도 했고, 그들이 듣기에도 능력자들이 딱히 일반인에게 해를 끼친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번 연쇄살인이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창식이는 일반인이다.

    무섭다면 일반인인 창식이보다 능력자들이 더 무서워야 정상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창식이가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야, 창식아."

    "예, 형님."

    "왜 그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러냐."

    "형님께 너무 무례한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창식이가 서아영을 힐끔 보더니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 하지 마.

    창식아, 왜 그러니. 그건 진짜 아니다.

    니 얼굴에 '발그레'가 어울리기나 하냐! '발그레'가! 이 정신 나간 놈아!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많은 마왕들 앞에서도 공포라는 것을 느껴본 적 없는 이지혁이 지금 이 순간 본능적인 공포를 대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형님이 나서시면 일이 커지지 않습니까."

    "내가 뭐?"

    "어휴, 제가 나서야 일이 좀 원만하게 해결되지요. 예전 형님 성격이면… 어휴!"

    이지혁이 뭔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창식이가 고개를 돌려서 박현동을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내가 오늘 여기 있어서 운 좋은 줄 알아요. 저 형님이 꼭지 돌면 오늘 여기 사람들 다 줄초상 치르는 겁니다."

    "창식아."

    "예전에 저 형님이 어땠는 줄이나 알아요? 와, 내가 말하자면 3박 4일이 모자라. 진짜 그때 내가 처맞아서 흘린 피를 모으면 우물 하나 채우고도 남을 거라니까, 그게……."

    "차앙식아?"

    "……."

    순간적으로 조금 많이 나갔다는 생각을 한 창식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래, 그랬지. 내가 아주 기억이 새록새록하구나. 니 말을 듣다 보니 생각이 났다."

    "…형님."

    "그래, 아주 새.록.새.록.하.네, 그냥."

    "살려줍쇼."

    창식이가 이지혁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그 큰 덩치로 반쯤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예전에 대체 뭔 일이 있던 거지?'

    그러고 보면 처음 최창식이라는 인물을 파악했을 때도 이지혁이 능력자라는 걸 모르면서 설설 기었었지.

    하기야 저 더러운 성격에 능력자가 아니라 해도 보통 사람이야 아니었겠지만, 누가 봐도 인류 끝판왕쯤의 자리는 쉽게 차지할 것 같은 창식이가 저리 설설 길 정도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사람이라도 잡아먹었나?'

    그 정도의 일이 아니고서야 저 최창식이 이지혁같이 호리호리한 보통 남자에게 저렇게까지 쪼는 게 말이 되는가.

    "예전에 뭔 일이 있었는데요?"

    최정훈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예전에요?"

    최창식은 어색한 웃음으로 이지혁의 시선을 피했다.

    "지혁이 형님이 아주 잘해주셨죠. 동네 꼬마들은 다 형님 좋다고 따라다녔을 정도니까요."

    "와……."

    거짓말이 이리 티가 나는 사람이 있구나.

    순간적으로 덜덜 떨리는 다리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휘적대는 손에,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처럼 불안하게 이곳저곳을 헤매는 눈까지.

    얼마나 정직한 남자란 말인가.

    "크흐흐흠, 여하튼!"

    최창식이 빠르게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사람들이 그러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지. 능력자들도 피 흘려가며 우릴 구해주고 하는 건데, 왜 차별하고 괴롭히고 그럽니까? 입장 바꿔서 당신들이 그런 일을 당하면 좋겠어요?"

    박현동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좋겠지."

    "알면서 그럽니까."

    "안 좋기야 하겠지만… 저들은 언제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지 않나?"

    "뭐라고 했수?"

    최창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니까. 일반 사람들이 저 인간들의 종이 될 수도 있다고."

    "……."

    "지금 조금이라도 우위가 있을 때,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우리가 밟힌단 말일세."

    "뭔 개소리를 늘어……."

    "됐어, 인마. 그만해."

    "아니, 형님!"

    "그만하라고."

    "…예."

    이지혁은 가만히 박현동을 바라보았다.

    박현동은 이지혁을 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진 이지혁의 눈을 보고 있자니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눈빛이…….'

    조금 전까지 장난스레 그와 다투던 모습이 아니었다. 최창식의 겉모습 같은 것은 장난처럼 여겨질 정도로 묵직한 느낌이 박현동의 명치를 꾸욱 누르고 있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

    이지혁은 박현동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밖으로 내보내 드려."

    "으응."

    정해민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이지혁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이지혁이 이런 분위기를 내뿜을 때는 쓸데없는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여기로 오세요, 다들."

    "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군말 없이 정해민의 주위로 몰려든다.

    "넌 안 가냐?"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니가 왜?"

    "그냥 저 사람들이랑 같이 가기 싫어서요."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니 맘대로 해라."

    정해민이 사람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최정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람들이 저렇지는 않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대부분은 불안해하고 있겠지.

    이지혁이 처음 지구로 돌아왔을 때 느낀 균열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가다 보면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막을 수 있을까?'

    이지혁은 회의적이었다.

    막기도 어렵겠지만, 어찌어찌 막아낸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금 벌어질 일이다.

    그때마다 이지혁이 나서서 막을 수는 없다.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희생과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긴 세월 아래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이제 정리하고 가죠."

    "예."

    큰 희생 없이 게이트를 막아냈지만, 그 일을 이뤄낸 사람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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