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9화 (49/118)
  • [■] 뭘 소환한 건데요? [■]

    ─────

    불꽃의 비는 화려하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보며 곽명훈은 넋을 잃어버렸다.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건가?

    "나 죽는다고오오오!"

    곽명훈이 절망 어린 비명을 질렀다. 같은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 이지혁은 낄낄대며 웃고만 있었다.

    "NDF 인간들은 다 또라이니까 절대 엮이지 마라. 말도 섞지 말란 말이다!"

    '지부장님의 말을 들어야 했어.'

    보통 사람들은 능력자들에게서 조금씩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다고 한다. 인간 같지 않은 힘을 손에 넣게 되면서 하나같이 조금씩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능력자들이 보기에는 NDF 인간들이 딱 그랬다.

    이것들은 능력자들이 보기에도 어디 하나씩은 뒤틀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자들이 바로 이지혁과 서아영이었다.

    서아영이야 예전 KSF 시절부터 지랄마녀라 불리며 절대 엮어서는 안 되는 기피 인물 1호라는 평가였고, 이지혁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서는 그 서아영을 평범한 능력자 A로 만들어 버린, 역대 최대의 또라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엮이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일이란 닥쳐 보지 않으면 모른다더니.

    가만히 잘 있는 이지혁을 왜 도발했단 말인가.

    이지혁이랑 엮였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야 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인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곽명훈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불꽃의 비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몬스터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벗어났더니, 이제 사람에게 죽게 생겼다.

    "으아아아!"

    불꽃이 거의 바닥으로 내려오자 곽명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아저씨 참, 겁도 많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지혁이 곽명훈의 머리 바로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떨어지는 불꽃을 향해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아!'

    그랬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바로 이지혁.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 제일의 능력자이다. 그런 사람이 함께 있는데 이 정도 불꽃쯤이야!

    "아뜨뜨뜨뜨!"

    "헐."

    힘차게 팔을 휘저었지만 불꽃은 수월하게 뚫어내더니, 이지혁의 몸을 덮쳤다.

    이지혁의 전신이 불꽃에 휩싸이더니 추락하여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뭔가 잘 탄다.

    고소한 냄새도 나는 것 같은데, 이거?

    "아, 뜨거!"

    "……."

    말은 잘하는데?

    보통 저렇게 불에 타면 말도 잘 못하지 않나?

    "와, 이거… 마나처럼은 안 되네?"

    이지혁이 불에 타는 형상 그래도 몸을 세우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괜찮으세요?"

    "이 정도야 뭐, 괜찮아요."

    "계속 타고 있는데요?"

    "네?"

    이지혁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으아아아! 서아영! 이거 좀 꺼줘!"

    서아영이 썩은 얼굴로 혀를 찼다.

    "뒈지시든지."

    "저년이?"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거, 알아서 해결할 수 있으면 스스로 해야죠! 한 번 방출한 걸 뭐 어쩌라는 거예요!"

    "혼자 해결할 수 있으면 이런 말 안 하지!"

    "왜 못해요!"

    "마나는 쓰면 안 된다니까!"

    "뭐래?"

    이지혁은 당장 서아영에게로 달려가서 마나와 에테르의 차이부터 시작하여 왜 자신이 마나를 사용하면 안 되는지를 강의하고 싶었다.

    그녀의 뻑뻑한 머릿속에 절대 잊혀지지 않을 완벽한 지식을 새겨 넣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낸 이지혁이 이를 부득 갈았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내 몸이 타고 있는데…….

    "흡!"

    에테르를 몸 밖으로 살짝 뿜어내자 불꽃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마나를 이용하면 훨씬 간단하겠지만, 보충도 안 되는 마나를 마음대로 쓸 수는 없으니까.

    이런 잡몹들을 상대로는 더더욱.

    "으아아아아!"

    "헐? 뭐야?"

    순간, 옆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이지혁이 튕겨낸 불꽃에 맞아 바닥을 구르고 있는 곽명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저씨, 진짜 가지가지 하네. 아재, 괜찮아요?"

    "불을 꺼주고 괜찮냐고 물어봐, 이 미친놈아!"

    "…나도 사람인데 그런 말 듣고 꺼주고 싶겠어요? 사람이 부탁을 하려면 정중하게 해야죠!"

    "이 개새……."

    곽명훈이 숨이 넘어가려고 하자 이지혁이 혀를 쯧쯧, 차면서 손을 떨쳐 에테르를 뿜어냈다.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지.

    휘이잉!

    크게 바람이 불면서 곽명훈의 몸에 붙었던 불꽃이 휘날린다.

    "으으……."

    곽명훈이 자신의 몸을 살피면서 진저리를 쳤다.

    이 미친놈들이랑 엮여서 이게 무슨 꼴인가.

    "괜찮아요?"

    "……."

    "불 꺼주고 물어보라면서?"

    "…괜찮습니다."

    너만 없으면 더 괜찮을 텐데.

    곽명훈은 뒷말을 필사적으로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확실하게 기억해서 KSF에 전파해야 한다.

    이지혁이라는 인간과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하게 말해줘야 한다. 그게 그의 의무였다.

    "놀 시간 있어요?"

    그냥 빨리 움직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꼭 저렇게 비비 꼬아서 말한다니까.

    이지혁이 서아영을 보며 인상을 썼다.

    처음에는 저렇게까지 밉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람이 왜 자꾸 밉상으로 변해가는지 모르겠다.

    원인이 있나?

    응? 나?

    에이, 내가 뭘 했다고.

    이지혁이 콧방귀를 뀔 때 곽명훈은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게이트가 열린 지 아직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KSF 지부에서도 아직 지원이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NDF는 어떻게 이리 빨리 현장에 도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한둘이 온 것이 아니었다.

    이지혁이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한가한가 봐? 우르르 다 몰려오고?"

    "한가하죠. 당신이 사고를 안 치고 있으니까."

    "내가 뭔 사고를 쳤는데!"

    "…생각해 보니 당신이 사고를 친 건 아니에요. 이상하게 당신 주변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 않으니, 한가하다고 해둘게요."

    때릴까?

    이지혁이 마나를 쓰지 않고 에테르만으로 서아영과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지 각을 재고 있을 때, 곽명훈이 소리를 질렀다.

    "뭐하는 겁니까!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다치고 있단 말입니다! 노닥거릴 시간이 있어요?"

    이지혁이 멍하게 곽명훈을 바라보았다.

    어? 이 양반, 조금 전에 자기한테 불붙었을 때는 안 이랬는데?

    "사람이 초지일관해야지."

    쯧쯧.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서아영의 대처는 달랐다.

    "그래?"

    "예!"

    "그래서 넌 누군데요?"

    "네?"

    "그러니까 당신 누구냐고? 어느 지부죠?"

    "…강북 지분데요."

    "그럼 강북 지부에 전화해서 지부장 5분 내로 튀어오라고 해주세요."

    그게 말이나 되냐! 여기가 어딘지 알고!

    텔레포트 능력자도 없는 일개 지부에서 무슨 수로 여기까지 5분 만에 온단 말인가.

    "아니, 왜……."

    "상관도 못 알아보고 소리부터 빽빽 지르고 있는 사람을 내 손으로 때리는 건 심력 낭비니까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합니까?"

    "그럼 언제 중요해요?"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잖아요."

    서아영은 피식 웃었다.

    "이봐요, 당신."

    "…네?"

    "당신 혼자 세상일 다 걱정하는 척 안 해도 돼요. 우리도 충분히 상황을 보고 있으니까. NDF가 이게 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건 다른 사람들이 맡고 있어요. 이해했어요?"

    "아……."

    그럼 그렇지, 저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었다.

    "그럼 아까 하신 말씀도?"

    곽명훈이 기대에 찬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지만, 이지혁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곽명훈의 기대를 배반했다.

    "아니, 난 진짜 귀찮아서 안 한 건데?"

    "……."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곽명훈이 외계인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곽명훈은 도무지 이 이지혁이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인간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이만한 게이트 하나 빨리 처리 못하고 뭐하는 거예요!"

    서아영이 소리를 지르자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게이트가 열리면 내가 처리하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지?"

    "어차피 할 거, 미리미리 좀 하면 서로 편하고 좋잖아요. 당신은 사설이 너무 길어요."

    "……."

    뭔가 빡 치고 열은 받는데 반박은 잘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지혁이 뭔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서아영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돌아간 뒤였다.

    "빨리 처리하자!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건물 상하는 거 하나하나가 다 세금이니까 빨리 정리해."

    "예!"

    단호한 대답과 함께 NDF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앗!"

    서아영이 우수에 에테르를 모아 집채만 한 불꽃을 피워내더니,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고 있는 게이트의 입구로 집어 던졌다.

    화르르륵!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른다.

    서아영은 그 광경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야 이제 그녀가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미 흩어져 버린 몬스터를 하나하나 잡아서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건 뭉쳐 있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일이었다.

    "진즉에 입구에서 틀어막았으면 일이 쉬웠을 텐데."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이지혁이 부들대기 시작했다.

    "내 탓이야? 내 탓인가? 나만 나쁜 놈인가? 나만 죽일 놈이야? 퇴근 후에 일해주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이래서 상사라는 것들은!"

    "대한민국에 퇴근이 어딨어요, 퇴근이! 집에 가면 일이 끝나나? 당신이 퇴사하기 전에는 일 안 끝나니까,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세요!"

    "하, 헬조선 클라스."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퇴근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시절이 순진했다. 이 나라와 직장은 퇴근한 사람도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이제 나는 가봐도 되는 거죠?"

    "끙……."

    서아영이 짜증 어린 눈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푸닥거리 한 번 할 때가 됐나?'

    요즘 저 언니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슬슬 자신에게 대들기 시작한 것 같은데?

    뭐, 이해야 한다.

    사람이라는 것들은 잘해주다 보면 기어오르는 것이 특성이니까. 요즘 좀 잘 대해주기는 했지.

    그럼 이제 슬슬 다시 군기를 잡을 시점이기는 한데…….

    우우우웅!

    하지만 서아영의 군기를 잡아줄 존재는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게이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음?"

    서아영이 긴장된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게이트라 딱히 거대 몬스터는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가 나오는 거죠?"

    "나야 모르죠."

    이지혁은 휘파람을 불었다.

    "준비해 주세요! 큰 게 나올 것 같은 느낌이니까."

    "뭐, 그야 그렇지만."

    이지혁은 휘적휘적 뒤로 물러났다.

    "…어디 가요?"

    "거, 누누이 말했잖아요."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나 퇴근했다니까. 낄낄낄."

    이지혁이 활기차게 게이트의 반대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저……!"

    서아영이 낄낄대며 도망가는 이지혁의 등 뒤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가, 이 화상아!"

    이지혁이 몸을 돌리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겁 많은 부하 직원들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주지."

    "응?"

    "퇴근은 목숨보다 중하다."

    "……."

    "그럼 이만."

    이지혁의 뒷모습을 보며 서아영이 고함을 질렀다.

    "야! 진짜 가냐?"

    하지만 이지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뭐, 진짜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새삼 이지혁을 다시 보는 서아영이었다.

    * * *

    "진짜 가냐고!"

    진짜 가고도 남을 인간이란 것은 알고 있다.

    그래, 이지혁이라면 당연히 진짜 가겠지.

    "어휴! 답도 없는 인간!"

    서아영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도심 한복판에 게이트가 열린 비상 상황만 아니었다면, 서아영도 굳이 이지혁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분한 휴식이 없다면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가 없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당연한 NDF에게 컨디션 조절이란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KSF에서 활동하던 당시에 그녀 역시 불합리한 근무 요건 때문에 열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불합리함을 바꾸는 것도 NDF를 창설한 이유 중 하나였다.

    "끄응……."

    그래도 그렇지.

    적어도 저기서 뭐가 나오는지는 보고 갈 것이지.

    "아, 몰라. 됐어!"

    서아영이 짜증을 확 내며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에서 뭐가 나오든 그녀가 해결하면 된다.

    "어디 가?"

    "집."

    정해민의 물음에 이지혁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저기서 뭐 나오고 있는 거 아냐?"

    "그런가 본데?"

    "그런데 그냥 가? 뭐 나오는지, 아영이가 해결할 수 있는지는 보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응?"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됐다."

    정해민의 빠른 포기를 보고 이지혁은 씨익 웃었다.

    말만 곱게 했어도 도와줬지.

    이것들이 도와주기 시작했더니, 이젠 당연하게 사람을 부려먹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자신이 너무 바빠질 것 같아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NDF를 단련시켜 놨는데, 이런 일 하나하나에 자신을 불러 댄다면 그 시간들은 다 뭐였냐는 말이다.

    그러니 돕지 않는 거다.

    절대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정해민은 그런 이지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디 가는데?"

    "집에."

    "영화는?"

    "응?"

    상황이 이런데 영화는 무슨 놈의 영화인가.

    지금 게이트가 열려서 난리인 게 안 보이는 건가?

    "게이트가 열렸는데 영화는 무슨 영화야?"

    "넌 어차피 퇴근했다며?"

    "응."

    "그럼 무슨 상관이야?"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은 궁지에 몰렸다.

    생각해 보니 정해민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화관 다 문 닫았잖아."

    "응?"

    정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의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이지혁이 왜 그런 것도 생각 못하는 걸까 하고 보여주기 식이란 게 빤히 느껴졌다.

    "내가 누군지 잊었어."

    "아……."

    그러고 보니 얘는 여기에 게이트가 열리든, 폭탄이 터지든, 메테오가 떨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구나.

    "부산으로 갈래? 아니면 대구?"

    "……."

    이지혁이 입을 꾹 닫았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퇴근해서 게이트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꼼짝없이 영화를 보러 가야 할 판이었다.

    "끄으응……."

    이지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는 건 아니겠지?"

    "난 자주 그러는데?"

    "이번에는 아닐 거야. 아니어야 할 거야. 그지?"

    정해민이 생긋생긋 웃으며 이지혁을 압박했다.

    "하하하……."

    이지혁이 어색한 웃음으로 정해민의 압박을 받아냈다.

    "영화 볼래, 저거 해결할래?"

    "저거 해결하면 영화 안 봐도 되나?"

    "응. 이번에는 봐줄게. 피곤할 테니까."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몸을 돌려 게이트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정해민이 그 광경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해결하고 와."

    "에휴."

    한숨을 푹푹 내쉬며 게이트로 걸어가는 이지혁을 보며 정해민이 싱긋 웃었다.

    '여하튼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조금 전만 해도 영화를 보러 가는 것에 저항감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영화 보기 싫다고 티를 낼 리가 있나.

    퇴근이니 뭐니 신경 쓰기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거겠지.

    예전의 정해민이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핏대를 세웠겠지만, 이젠 내공이 쌓여서 이지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응?

    최정훈은 왜 이런 방법을 못 쓰냐고?

    그야 남자니까.

    남자가 이랬다가는 바로 죽빵이 날아가겠지.

    이지혁은 은근히 여자에게 약하단 말이다.

    아니, 대놓고 약했다.

    그가 껄끄러워하거나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모두가 여자였다.

    "은근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니까."

    정해민이 볼을 부풀렸다.

    * * *

    "뭐예요!"

    "아, 그만해요. 설명하기 귀찮고, 힘들고, 한심해서 내가 울 거 같으니까."

    "…뭐라는 건지."

    서아영은 황당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에 희희낙락하며 도망가던 이지혁이 왜 죽을상을 하고 돌아오는 것일까?

    "그럴 거면 왜 갔어요?"

    "아… 하지 말라고, 그런데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지혁은 설명하기도 귀찮아 손을 휘휘 저었다.

    "상황은?"

    "보다시피."

    서아영이 게이트를 가리켰다.

    게이트가 거의 찌부러지고 있는 것을 보니, 보통이 아닌 놈이 넘어오는 모양이었다.

    저 큰 게이트가 넘어오고 있는 몬스터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서 거의 타원형이 되어버렸다.

    "다른 곳은?"

    "거의 정리가 되어간대요."

    "흠……."

    이지혁이 게이트를 발견한 시점에 이미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지혁의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그런데 그 많은 몬스터들을 이 짧은 시간 안에 대다수 정리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반증이리라.

    "놀고먹지는 않았나 보네."

    "놀고먹어요? 죽어라고 굴렀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두 번의 마왕을 상대했다.

    스치기만 해도 죽는, 그 최악의 상황을 버텨낸 NDF였다.

    박성찬과 김다현이 에이스로서 활약을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여하튼 그들 자체의 강함이 없었다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좀비 사태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고생한 것은 사실 이지혁이 아니라 이들이었다.

    '좀 세지긴 했나?'

    정확한 강함을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이지혁은 에테르에 정통하지도 않고, 자신보다 약한 이들의 강함을 서로 구분하는 것에도 딱히 재능이 없었다.

    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토끼나 너구리나 비슷한 것이지, 둘 중 어느 생물이 더 강한가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까.

    "흐음, 그럼 이것만 해결하면 되는 거군."

    이지혁은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그러진 게이트 너머로 시커먼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큰 게이트에 꽉 찰 만큼 거대한 검은 그림자.

    이지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만한 게이트를 채울 만한 생물이라면 드래곤이거나 자이언트뿐이지 않나?

    그 둘이 넘어온다면 귀찮아질 텐데.

    정리하지 못해 귀찮은 게 아니라 이곳이 도심의 한복판이기에 문제가 생긴다.

    "어?"

    하지만 나타난 몬스터는 이지혁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류였다.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따지자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생물학적으로 분류한다면, 저 몬스터는 자이언트과에 속할 테니까.

    자이언트 뺨치는 거대한 인간형 동체라든가.

    평소라면 이지혁은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저 몬스터는 자이언트와 비슷한 크기를 갖추고 있지만, 자이언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력이 약하고 상대하기는 더 쉬우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몬스터였다.

    거대한 회색빛 동체, 어떤 생물의 것인지 모를 가죽으로 대충 둘러싼 듯한 하체,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같이 꿈틀대는 근육질의 우람한 두 팔.

    그리고…….

    나타난 몬스터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하나밖에 없는 눈이 번뜩였다.

    사이클로프스.

    평소라면 사이클로프스 정도의 몬스터에 이지혁이 이리 당황하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차라리 드래곤이 나왔으면 속이 편하겠다는 심정이었다.

    사이클로프스의 손에 들린 거대한 메이스가 바닥을 향해 휘둘러진다.

    "아, 안 돼!"

    이지혁이 기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메이스가 바닥에 닿는 것을 저지할 수가 없다.

    왜 이리 당황하냐고?

    저 메이스는 아티팩트란 말이다!

    정확하게는 사이클로프스가 저 메이스를 휘두를 때 아티팩트가 된다.

    사이클로프스가 들고 다니는 메이스는 일명 대지의 메이스라고 불리고…….

    그 효능은…….

    우르르르르르릉.

    바닥에 메이스가 내려쳐지자 사이클로프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망했다."

    이지혁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뭐, 뭐예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에,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이지혁의 몸이 바닥과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음, 저 메이스가 마법이 걸려 있는 메이스거든."

    "마법? 무슨 마법?"

    "어스퀘이크라고 알까 모르겠네?"

    "어스퀘이크?"

    서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 같은데?

    "무슨 뜻이에요?"

    "직역하자면 지진이지."

    "아, 지진."

    서아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지, 지진?"

    "응."

    그럼 지금 몸이 덜덜 떨리는 게?

    "이, 이거 말하는 거죠? 지금 떨리는 거?"

    "이건 전조 현상이라고 봐야지."

    "그럼 진짜 지진은?"

    "응. 이제 곧 올 거야."

    "어, 어떻게 좀 해봐요!"

    "글쎄, 이미 발동된 마법을 취소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안 돼!"

    우드드득.

    바닥이 과격하게 진동하더니, 사이클로프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친! 여긴 도심 한복판이란 말이에요!"

    "알긴 아는데……."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도리가 있나."

    "꺄아아아아아악!"

    우르르릉!

    바닥이 터질 듯 뒤집히며 사이클로프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진동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서아영은 절망적인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으로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마천루들이 들어왔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저 건물들이 무너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인가.

    그 끔찍한 예상에 서아영의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이건 정말 대형 사고다.

    "어떻게 좀 해봐요!"

    "아니, 나라고 한들."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한다는 건 그도 아는데, 이미 발동된 마법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고.

    "끄응……."

    그럼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지.

    이지혁이 양손으로 마나를 모았다.

    지금은 마나를 낭비하니 어쩌니 하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가볍게 수인을 맺어 허공에 마법진을 만들어낸 이지혁이 소리쳤다.

    "열려라!"

    마법진이 검은빛을 뿜어내더니, 허공에 그 입을 쩌억 벌렸다.

    "응?"

    서아영이 멍한 눈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뭐한 거예요?"

    "소환."

    "뭘 소환한 건데요?"

    "음, 이거… 잘될까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러니까 뭘 소환했냐구요?"

    "어, 그러니까……."

    뭐라고 말하면 쉽게 알아듣지?

    연체동물?

    수많은 게임들의 마스코트?

    니가 생각하는 가장 친숙한 몬스터?

    이지혁은 그 모든 설명을 함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슬라임."

    "네?"

    검게 입을 벌린 게이트 안에서 찐득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 *

    그건 꽤나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허공 한가운데에 열린 거대한 문에서 진득한 점액성의 액체가 느릿하게 바닥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서아영 역시 정상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이고, 당연히 그 광경을 보고 좋아할 수는 없었다.

    "으으……."

    본능적으로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슬라임?"

    어느새 그들에게 다가온 정해민이 그 광경을 보며 물었다.

    "그게 뭐야?"

    서아영이 정말 싫다는 티를 얼굴로 팍팍 내며 정해민을 돌아보았다.

    "모를 수도 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언니, 저 꼴 보니 속이 안 좋아서 그래."

    이지혁은 서아영의 반응을 보며 낄낄 웃었다.

    왜 싫어하는 걸까?

    슬라임은 각종 게임 등에서 참 인기 좋은 캐릭터인데 말이지.

    "낄낄낄낄."

    하기야…….

    이지혁이 허공에서 바닥으로 내려앉는 슬라임을 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사실 이지혁이 보기에도 그리 예쁜 광경은 아니었다.

    미묘하게 투명함과 불투명함의 사이에 적절히 걸쳐 있는 점액질의 액체가 주르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저건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쯧."

    이지혁이 발끈하는 서아영을 보며 혀를 찼다.

    왜 하늘은 사람에게 동시에 두 가지를 주지 않는 것일까?

    이 여자에게 최정훈의 머리가 있다면, 역대 최고의 능력자가 탄생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완충재군요."

    역시나.

    이지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최정훈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장점을 모으지 못한다면 같이 다니기라도 해야지.

    현장에 도착한 최정훈이 바닥을 채워 나가는 슬라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지는 바닥이나 흔들리는 건물 아래로 저런 점액질의 반액체가 스며든다면 무너지는 걸 방지할 수 있겠죠."

    "똑똑해."

    이지혁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뭔가를 할 때면 옆에서 그걸 알아보고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편하다니까.

    입 아프게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이지혁이 최정훈의 유용성을 실감하고 있을 그 시점에도 게이트에서는 슬라임이 마치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워낙 점성이 강하다 보니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게이트를 가득 채우며 흘러나오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

    언제까지 나오는 거지?

    "근데, 저거…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응."

    "얼마나 더 나오는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나?

    "그건 나도 모르지."

    "…사람이 대책이란 게 없어."

    완충재를 밀어 넣겠다는 것은 좋지만, 저거 저렇게 계속 나와도 되는 건가?

    왠지 뒤처리가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에 최정훈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데 저 슬라임… 여하튼 저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응. 온순해."

    "…살아 있는 겁니까?"

    "몬스터라니까요. 이상하게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친구라든가 미소녀의 옷을 녹여주는 고마운 몬스터라 이미지가 박혀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냥 뭐, 통째로 사람이든 뭐든 삼켜서 질식시킨 다음에 녹여 먹는 평범한 몬스터란 말이죠."

    음, 그러니까…….

    질식과 용해라…….

    최정훈의 눈가가 푸들푸들 경련하기 시작했다.

    "온순하다면서요?"

    "온순하기야 하죠. 느려 터져서 제대로 삼키지를 못하니까. 몬스터가 그 정도면 온순한 거지, 무슨 강아지라도 바라셨나?"

    넌 강아지 키우잖아.

    오거.

    최정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기…….

    최정훈의 손가락이 커다란 건물을 가리킨다. 슬라임이 스멀스멀 흘러가 건물 안으로 점액을 밀어 넣고 있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죽겠지, 뭐."

    "……."

    최정훈이 이지혁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아니! 사람 구하자고 소환한 거 아닙니까! 그럼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뭐가 달라요!"

    "덜 아프게 죽겠죠."

    "헐……."

    이지혁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최정훈의 팔을 슬며시 밀어냈다.

    "농담한 거 가지고 정색은. 걱정 말아요. 사람은 밀어내라고 해놨으니까. 적당히 위층으로 밀어 올리겠지. 그리고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으면 쿠션 역할도 할 테니까."

    "영 신뢰가……."

    "아, 믿지 말든가!"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신뢰가 없어, 신뢰가!"

    "제가 언제 처음부터 안 믿었습니까! 절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오호라, 내 잘못이다? 내가 잘못했다?"

    "사람이 사람을 겪으면 갈수록 신뢰가 쌓여야 하는데, 있는 신뢰까지 날려 먹고 계시니까 제가 하는 말 아닙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요!"

    "헐……."

    최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어쨌냐니?

    그 많은 이야기를 이제 내 입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보고서 제출할까요? 아주 논문급으로 써드릴 수 있는데?"

    "사양할게요. 귀찮아서 못 읽을 듯."

    "에휴."

    최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여하튼 이거, 어마어마하긴 하네.'

    보고 있자니 대단해 보이기는 했다.

    게이트에서 울컥울컥 쏟아져 나온 점액질의 액체가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반쯤 투명한 액체가 갈라진 바닥을 메우고 흔들리는 건물을 움켜잡는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최정훈이 슬라임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 써먹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몬스터란 것은 퇴치해야 할 존재였지, 활용해 할 도구가 아니었으니까.

    이지혁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고, 이지혁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드드드득.

    바닥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흔들리지만, 슬라임이 충격을 받아주었기 때문인지 다행히 무너지는 건물은 없었다.

    "와!"

    서아영도 그 광경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저 인간, 여하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으면서 결정적일 때는 도움이 된단 말이지.

    "일단 하나는 해결했네요."

    "잘했어요."

    "헤헤헤."

    이지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잘했어요'라니, 이게 얼마 만에 받아보는 칭찬인가.

    그동안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고서도 항상 욕만 먹고 원망만 들었는데, 이런 공치사를 받으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래서 칭찬은 오거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 거구나.

    이지혁은 고개를 돌려 사이클로프스를 바라보았다.

    크아아아아!

    사이클로프스는 자신의 주위를 휘감아오는 슬라임을 메이스로 마구 후려치고 있는 중이었다.

    "흐음……."

    사이클로프스의 키가 워낙에 크다 보니 슬라임이 저리 두텁게 쌓였는데도 겨우 무릎까지밖에 차오르지 않았다. 그 무릎까지 오는 슬라임이 다가오는 것을 메이스로 마구 후려치는 꼴을 보자니,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엿 될 뻔했네."

    이지혁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사이클로프스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만한 몬스터는 아니다. 이지혁이 없더라도 능력자들이 연합한다면 적당히 잡아낼 수 있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 위치에 이 상황에 떨어지자, 말 그대로 최악의 몬스터가 되고야 말았다.

    이지혁이 순간적으로 슬라임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더라면 도시는 반파되었을 것이다.

    "응?"

    순간,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

    "네?"

    "아뇨. 저 슬라임한테 한 말이에요."

    "……."

    뭐라는 거지?

    저 물컹물컹해 보이는 생명체와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보다 더한 능력인데?

    하기야 따져 보면 이 인간은 오식이랑도 사람처럼 이야기하니까.

    그래도 오식이는 뭔가 개 같기라도 하지.

    욕 아니고, 개 같다고.

    아니, 그냥 개 같다고. 강아지!

    "말이 통합니까?"

    이지혁이 멍한 얼굴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쟤가 어디로 말을 하겠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당신이 그런 눈으로 보면 자살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세상 사람 전부가 그런 눈으로 날 봐도 당신만은 그러면 안 되지.

    최정훈은 눈물을 머금었다.

    뭘까, 이 엿 같은 기분은?

    "그, 그럼요?"

    "의지가 통하는 거죠."

    그게 그거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주면 좀 좋은가.

    "저 괴물이랑 말입니까?"

    "나름 귀욤귀욤하잖아요."

    "미의식에 대한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뭘 모은다는 거죠?"

    "아……."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뭐긴 뭐겠어요, 사람이죠. 동전이라도 모을 줄 아셨나?"

    이지혁의 비웃음에 최정훈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 * *

    "으아아아아! 이게 뭐야!"

    창식이는 언제나 운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방콕족에 동네 마실형 양아치인 창식이는 번화가를 돌 일이 잘 없었다.

    다른 놈들이 뚫리는 술집을 찾을 때, 창식이는 뚫리는 편의점을 찾는 편이었다. 물론 민증 검사 프리패스 기능이 장착된 얼굴을 가진 창식이에게 사지 못할 성인 용품은 없었지만.

    친구 놈들이 제발 술집에 한 번만 같이 가달라고 해도 귀찮아서 잘 가지 않는 창식이였다.

    그런 창식이가 정말 오랜만에 번화가로 나왔다.

    그놈의 옷이 뭔지.

    인터넷으로 대충 사면 그만이지!

    하지만 그의 누나와 어머니는 창식이의 그러한 외침을 철저하게 응징했고, 결국 창식이는 옷을 사기 위해 번화가로 나와야 했다.

    "그냥 대충 사면 되잖아!"

    이유야 간단했다.

    인간의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육체는 나약한 일반인이 입는 옷 따위를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웬만한 빅 사이즈는 입는 순간 쫄티로 돌변했고, 기성복 따위는 감히 창식이의 육체를 커버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교복도 주문 제작을 했겠는가.

    그러니 그가 인터넷에서 살 수 있는 옷이라고는 빅 사이즈 전용 상품밖에는 없었고, 이상하게도 빅 사이즈 몰의 옷은 정신 나간 디자인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입어보고 사라.

    타당하다.

    매우 타당하다.

    그런데 그게 타당하지 않은 이유는, 이 넓은 번화가에 산적한 수많은 옷들 중 창식이가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아낸다는 것은 정말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창식이는 매우 서글펐지만, 용돈 동결과 아침마다 밥상 위에 올려져 있는 식은 밥에 결국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러면 같이 가주기라도 하든가, 온갖 핑계를 대며 혼자 보내는 이유는 뭔가.

    더 슬픈 것은 오늘따라 평소보다 옷이 더 없다는 것이었다.

    '고객님, 입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말에 옷을 껴입어보면 힙합 후드가 스판 트레이닝복으로 돌변하는 마법이 펼쳐졌다.

    억지로 껴입다가 옷이 파손되기 직전까지 간 것만 해도 몇 번인가.

    "안 사! 안 산다고!"

    창식이가 결국에는 옷 사는 걸 포기하고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을 때였다.

    우르르릉!

    갑자기 바닥에 웅웅 떨리기 시작했다.

    "으아! 이게 뭐야!"

    서울에서 지진이라니!

    여기가 도쿄도 아니고!

    지진판이 어쩌고저쩌고,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고 어쩌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대처한다고 했더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나?

    그런데 들어갔다가 건물이 무너지면 깔려 죽는 것 아닌가?

    최창식이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지진이 조금 잦아들었다.

    "끄, 끝난 건가?"

    그럴 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최창식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물컹하고, 흐물흐물하고…….

    그리고 뭔가 그로테스크한 액체가 그를 향해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수난의 날이었다.

    * * *

    이게 대체 뭐야!

    뭐, 이런 게 다 있지?

    창식이는 기겁을 했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몬스턴가? 몬스터 같은데?

    근데 무슨 놈의 몬스터가 저따위로 생겼지?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단순했다.

    창식이는 즉시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하지만 바닥이 과격하게 흔들리고 있는데 제 속도로 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간, 균형을 잃은 창식이가 바닥을 굴렀다.

    "아오, 씨발!"

    나오는 건 욕뿐이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불투명한 색의 점액이 어느새 발치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엄청 느린 것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엄청나게 빠르다. 저 멀리서 본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바로 앞까지 와 있는 것이다.

    "으아!"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비명은 입 밖으로 채 다 흘러나오지 못하고 막혀야 했다.

    꾸르륵.

    점액이 순식간에 창식이의 몸을 덮쳤다.

    '썩을!'

    전신이 물컹물컹한 젤리에 둘러싸인 것처럼 이상한 감각과 함께 눈앞이 흐릿해졌다.

    "으아, 이걸 어떻……. 어? 말이 나오네?"

    뭔가 물 같은 것들에 둘러싸였는데 말은 나온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단지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팔을 휘두르고 악을 써도 그의 몸은 젤리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한 치도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하……."

    이렇게 죽는구나.

    창식이의 눈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아직 장가도 못 가봤는데…….

    학교도 졸업 못했고…….

    태민이 신발 뺏은 것도 못 돌려줬고, 이번 달 받을 돈도 많은데 이대로 죽어야 하다니…….

    창식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엄마, 미안해."

    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게 효도 한 번 못해보고 죽으니, 우리 엄마 속이 얼마나 아플까.

    그러게 왜 옷은 사라고 사람을 이런 데로 보내서는!

    엄마, 너무해!

    실시간으로 인식이 바뀌어간다.

    그런데…….

    "나 언제 죽지?"

    이거 좀 이상하다.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것이나 비슷한 상황인데, 몸에 변화가 전혀 없었다. 되레 숨도 잘 쉬어지고 지진 진동도 안 느껴지는데다가 온도도 적당하고 뭔가 물컹물컹하니 물침대에 누워 있는 듯한 감각도 느껴지는 것이… 이거…….

    "엄청 편하잖아?"

    최창식의 멘탈이 승천하기 시작했다.

    뭔가 따뜻한데 푹신하고, 잠이 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 잘까?"

    이미 저항은 해봤다.

    물어도 보고, 휘둘러도 보고,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그가 무슨 악을 써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럼 악을 쓰는 게 무의미하지 않은가.

    차라리 손을 놓아버리는 게 현명하다.

    창식이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편히 몸을 눕혔다. 물컹한 액체가 액체답지 않게 그의 몸을 편안하게 받아주었다.

    "자자."

    고민한다고 답 나오는가.

    '자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는 말도 있던 것 같고, 이리된 이상 그냥 잠을…….

    그 순간, 창식의 몸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액체들이 물컹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으응?"

    뭐지?

    이제 시작인가?

    그러고는…….

    "으아아아아아!"

    순간적으로 액체들이 그의 몸을 움켜잡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니, 창식이의 몸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와, 씨! 왜 이래! 안 가! 안 갈 거라니까!"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애초에 몬스터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알고는 있다, 알고는!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는 봐야지!

    최창식이 절망에 어린 눈으로 소리를 지르다가 몸을 뒤틀었다. 마구 발로 차고 악을 써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간 감자처럼 그의 몸은 한쪽으로 스무스하게 이동해 갔다.

    "하……."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문어가 발로 생선을 잡아서 입으로 옮기듯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아마 이 괴물의 입이 있는 곳이겠지.

    "한 많은 인생……."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아니, 오래 살지 않았기에 더 미련이 넘치는 것 아닌가! 죽고 싶지 않다고!

    최창식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지.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를 켜고 동영상 녹화를 시작한 창식이가 울먹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 엄마!"

    마지막 순간에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엄마밖에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이 상황이 되고 보니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 놈들은 며칠 슬퍼하는 척하다가 또 술 처먹고 담배나 피면서 자신을 잊어가겠지.

    기억해 줄 사람이라고는 예원이 정도일까나?

    "엄마, 나 이제 죽는 거 같아. 그동안 고생시켜서 미안했어. 엄마, 저번에 없어졌다던 10만 원 가져간 거 나야. 내가 지갑에서 몰래 뺐어. 엄마가 아끼던 도자기 깨트린 거도 나야. 치치가 깼다고 했는데, 그거 내가 밤에 화장실 가다 깬 거야. 치치 그만 괴롭혀."

    창식이는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아버지 정장 입고 나갔다가 술 먹고 싸움 나서 다 찢어졌어. 그거 세탁소에서 잃어버린 거 아냐. 내가 찾아서 입고 찢어 먹어서 버렸으니까 세탁소 아저씨한테 미안하다고 해.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지은 죄는 엄청나게 많았는데, 막상 생각하려니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외의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한 최창식이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엄마, 나 몬스터한테 잡힌 것 같거든? 아무래도 곧 죽을 거 같아. 그동안 속만 썩여서 미안했어. 엄마, 미안해!"

    대충 할 말을 모두 마친 최창식은 다음 생에는 효도하겠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녹화를 마치고 전송을 눌렀다. 과연 전송이 되겠나 싶었는데, 의외로 동영상은 잘 전송되었다.

    "이제 후회는 없어."

    최창식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이라고 하면 남자는 당당해야 하는 법이다.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죽는 건 사양이다.

    그런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다만, 마지막 순간에 소원이 하나 있다면…….

    "하……."

    얼굴 한 번만 더 보고 죽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최창식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한 많은 인생!"

    최창식이 버럭 소리를 지른 순간, 눈앞이 화악- 하고 열리는 듯하더니, 그의 눈에 그토록이나 바라던 얼굴이 들어왔다.

    "어?"

    이거 뭐지?

    꿈인가?

    최창식은 눈 안 가득 들어오는 서아영의 얼굴을 보며 지금이 꿈인가 현실인가를 의심했다.

    사람은 죽을 때 주마등을 본다더니, 이게 그건가?

    최창식은 억울했다.

    죽어서 억울한 것이 아니었다.

    주마등이면 어차피 상상인데, 상상이면 좀 다른 모습도 있지 않은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준다든가, 아니면 무표정이라도 좋았다.

    그런데 저렇게 얼굴 가득 짜증이란 짜증은 다 머금고 사람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건 없지 않은가.

    그녀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어?

    이거 키스 각인데?

    어차피 상상인데 죽기 전에 한 번쯤…….

    퍼억!

    순간, 엄청난 격통이 최창식의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까룩!"

    기이한 비명 소리와 함께 최창식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아아악!"

    뭐냐!

    왜 이리 아파!

    최창식이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릴 때, 최정훈은 서아영을 나무라고 있었다.

    "아니, 일반인을 왜 걷어차고 그럽니까!"

    "쟤 표정이 변태 같았다니까요! 나이도 어린 게!"

    "표정만 보고 뭘 어떻게 안다고!"

    "표정만 봐도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여자는 알아요."

    "……."

    저리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는데…….

    최정훈은 서아영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여기서 더 따져 물어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거고, 지금 중요한 것은 서아영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 보입니까?"

    "아뇨."

    최정훈은 안쓰러운 얼굴로 최창식을 바라보았다.

    서아영이 마음먹고 찬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능력자의 신체 능력이라면 가볍게 걷어찬 것도 무지하게 아팠을 것이다. 갈비뼈가 무사한지 의문이었다.

    "숨은 잘 쉬어지세요?"

    "아, 예."

    최창식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점액질에서 사람이 하나둘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이렇게 나도 옮겨진 거구나.

    그런데 대체 이걸 누가…….

    "헐!"

    최창식이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한쪽으로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응?"

    최정훈이 영문을 몰라 그런 최창식을 바라보았다.

    "뭐지?"

    쟤 왜 저러지? 무슨 사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최창식이 달려간 곳을 본 최정훈은 뭔가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혀, 형님!"

    "응?"

    이지혁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뭐지?

    이 인간형 오거는?

    아니, 오거형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인상의 남자가 자신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고 있었다.

    "아, 그……."

    아는 얼굴인데… 그러니까, 예원이 친구인 그…….

    "형님, 창식입니다."

    "그래, 창식이. 창식이구나."

    이지혁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창식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너, 여긴 웬일이냐?"

    "아, 저 이상한 것에 갇혀서……."

    "아, 그래?"

    이지혁이 혀를 찼다.

    "조심 좀 하지. 그래, 다친 데는 없고?"

    "예? 예, 형님!"

    최창식이 울컥한 마음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이지혁은 남에게 이런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하품이나 하고 있을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다친 데가 없냐고 물어보다니.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을 그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뭐, 그냥 그러다 보니 이리됐지. 다친다. 저 뒤로 가 있어라."

    "예, 형님."

    창식이는 고분고분하게 이지혁의 말을 따랐다.

    "으음?"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최창식이라는 사람은 알고 있다. 처음 이지혁의 주변을 모조리 조사할 때 워낙 특이한 인물이라 기억에 선명하게 남은 사람이었다.

    이예원의 친구이자 어릴 적부터 이지혁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동네 동생.

    그리고 강북 고등학생 중 최고의 위험인물.

    최창식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옆 동네 고딩들이 꼬리를 말고 만다는 인간 흉기이자 레전드 급식충이었다.

    그런 창식이가 이지혁을 대하는 게 과도하게 저자세였다.

    능력자라서?

    아닐 텐데…….

    저 나이의 고딩이, 그것도 자신의 싸움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을 고딩이 상대가 능력자라고 해서 저리 저 자세로 나갈 이유가 없다.

    보통은 그렇지 않은가.

    "저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던 창식이를 최정훈이 불렀다.

    "예?"

    저 대답하는 얼굴 좀 보소.

    호랑이라도 옆에 끼고 있는 듯한 긴장이 느껴졌다.

    "이지혁 씨와는 아는 사이십니까?"

    "예… 동네 형인데요."

    정확하게는 동네 놀던 형이지만.

    "친하신가요?"

    "친…하다기보다는… 글쎄요?"

    최창식이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지혁의 등을 보고 몸을 한차레 부르르 떤 창식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뭐가요?"

    "저 양반 옛날 학교 다닐 때는 어땠나요?"

    창식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최정훈은 자신이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음을 직감했다.

    "하, 학교 때요?"

    "…아뇨, 됐습니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죠."

    "네……."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린 최정훈의 눈에 사이클로프스를 향해 낄낄대며 다가가는 이지혁의 등이 보였다.

    '당신, 대체 뭐하고 다닌 겁니까?'

    이지혁은 들썩대는 등으로 대답했다.

    이지혁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라 사이클로프스를 향해 쏘아졌다.

    * * *

    우우웅!

    이지혁의 양손에 새하얀 빛무리가 어리기 시작했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묘한 감흥에 휩싸였다.

    그동안 이지혁이 인류를 구해준 게 몇 번이던가.

    하지만 그때마다 시커먼 것들만 뿜어내다 보니 그걸 지켜보는 기분도 항상 이상했다.

    악마와 악마가 싸우는 걸 인간이 옆에서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지혁이 환한 순백의 하얀빛을 뿜어내는 것을 보자 감회가 새롭다.

    '이래야지.'

    히어로물에 대한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식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영 보는 맛이 나지 않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광경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

    "뒈져라! 새끼야!"

    하…….

    히어로는 그런 말 안 해, 인마!

    무슨 빛을 뿜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알맹이가 저따위라서 거부감이 드는 거였어.

    최정훈이 부들부들하는 심정으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저 양반,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지?

    이지혁이 하늘 위로 쭉쭉 올라간다. 마치 날듯이 뛰어오른 이지혁이 허공을 박차고 위로 또 위로 올라갔다.

    "뭐하는 거야?"

    왜 저리 올라가지?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할 무렵, 이지혁은 마침내 사이클로프스의 머리까지 도달했다.

    힘들게 사이클로프스의 머리까지 도달한 이지혁이 주먹을 후려치자, 사이클로프스는 아주 간단하게 고개를 꺾어 피한 다음 메이스로 이지혁을 후려쳤다.

    "히익?"

    쿠우웅!

    허공이라 몸을 뒤트는 속도가 느린 나머지 그 거대한 메이스에 정면으로 얻어맞고야 말았다.

    이지혁은 허공에서 파리채로 후려 맞은 파리처럼 바닥으로 강렬하게 처박혔다.

    콰앙!

    이지혁이 충돌한 바닥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아고, 허리야."

    이지혁이 허리를 부여잡고 먼지구름 사이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쯧쯧."

    이지혁이 흙먼지를 털어내는 모습을 본 최정훈이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도무지가 이 인간을 보고 있자면 긴장감이라는 것이 사라진다니까.

    "그러게 왜 머리까지 올라갑니까! 다리도 있고, 배도 있고… 때릴 때야 넘쳐 나잖아요."

    "모르는 소리!"

    이지혁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들어서 사이클로프스를 가리켰다.

    "저 눈 안 보여요?"

    "네?"

    "사이클로프스는 눈을 쳐서 죽여야죠! 기본 아니에요! 그런 것도 모르시나?"

    최정훈은 혼란에 빠졌다.

    "아, 눈이 약점입니까?"

    "아니요. 단단해요."

    "…그럼 눈을 쳐야만 죽일 수 있다든가?"

    "그런 게 어딨어요. 때리면 다 죽지."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럼 꼭 눈을 노려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지혁이 인상을 썼다.

    '내가 뭘 잘못했나?'

    저건 화가 많이 난 표정인데?

    최정훈이 긴장하는 순간, 이지혁이 버럭했다.

    "만화도 안 봤어요! 사이클로프스 막타는 원래 눈을 치는 거라니까! 검으로 지르거나 창으로 찌르거나 주먹으로 치거나! 그러면 '펑' 하고 터지거나 '으악' 하고 죽는 거죠!"

    이 새끼가 미쳤나?

    최정훈은 진심으로 이지혁의 뇌를 후벼 파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 난리를 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다 뒈지면 누가 책임집니까! 헤드샷을 치든 몸통을 처갈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죽이기만 하면 되지!"

    "거, 양반. 험악하시네."

    이지혁이 이죽대자 최정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능력자였으면 저 새끼랑 진짜 한판은 붙어볼 텐데!

    그래도 능력자여서 반항이라도 하는 서아영이 부러워지는 최정훈이었다.

    아무리 때려봤자 따끔도 안 할 텐데, 따끔하게 하겠다고 덤비기도 뭐하고.

    "끄으응……."

    최정훈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참 교전 중인데 담배라니!"

    "그럼 안 피우게 좀 해주시든가요! 탈모 오겠습니다, 탈모!"

    "제가 뭘 어쨌다고요."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시겠죠?"

    "모르니까 묻죠! 아는데 묻는 사람도 있나!"

    "답도 없다, 진짜!"

    "네?"

    최정훈이 간만에 성질을 냈다!

    "저 괴물이나 얼른 잡으세요! 건물 다 무너지겠어요!"

    "헐, 엄청 부려 먹네."

    "내가 힘만 있었어도 안 이럽니다! 어휴! 왜 나는 능력자가 아니어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능력자 된다고 좋을 것 없어요."

    이지혁은 그 말을 끝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 눈알 노리지 말고 빨리 처리 좀 해주세요!"

    "……."

    거, 사이클로프스는 눈을 막타 치는 거라니까 그러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최정훈의 목소리에 워낙 힘이 없어서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지혁이 양손에 에테르를 모았다.

    "이거, 좀 괜찮기는 한데……."

    슬슬 모이는 에테르의 양이 좀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상태쯤으로만 베라프에 넘어갔어도 지구로 돌아오는 게 오백 년은 빨라졌을 텐데.

    아니, 이 기운을 활용해서 뭘 해보겠다고 설치다가 더 길어졌으려나?

    뭐,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우우우웅!

    에테르가 모이며 하얀빛을 뿜어낸다.

    이지혁은 그 흰빛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베라프에서 하얀빛은 신성력의 상징이다.

    치유 마법이라든가, 신성력이라든가… 이지혁과 상성이 좋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하얀빛을 내뿜었었지.

    그걸 자신이 직접 내뿜고 있다 보니 기분이 이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좋긴 한데……."

    에테르는 확실히 활용 가치가 있는 기운이었다.

    마나가 무속성을 띠는 대신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면, 에테르는 속성이 확연한 대신 활용이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한정된 활용성 안에서는 마나 이상의 파괴력을 내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서아영이 저 어린 나이에 아크 메이지급의 파괴력을 선보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아직은 영 모자라단 말이지."

    잡몹이야 어떻게 상대할 수는 있는데, 사이클로프스 같은 거대 몬스터의 방어력을 뚫기에는 아직 미약했다. 차라리 서아영급의 능력자를 에테르로 상대하라면 숙련된 체술로 어떻게 해볼 수 있겠는데, 저런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는 공격력이 모자랐다.

    '마나를 쓸까?'

    그렇다고 마나를 쓰자니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하는데?

    '게이트 여는 데도 마나는 썼는데 뭐.'

    경우가 다르다고 우길 수 있나.

    "끙……."

    이지혁이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해보면 알겠지."

    에테르 능력자들을 교육시키다가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에테르는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마나 능력자들은 마나를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마나량이 늘지는 않는다.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마나는 철저한 소모품이고, 보유 마나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기사는 단련을 하는 것이고, 마법사는 연구를 하는 것이다. 마법을 쓴다고 해서 마나량이 늘어난다면 베라프의 마도 연구소는 폭죽놀이로 정신이 없었겠지.

    하지만 에테르는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이지혁을 그들을 단련시키면서 직접 느낀 것이다.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에테르 양이 늘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체 내의 에테르가 어떤 증식 작용을 하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에테르를 늘리려면 써야 한다는 것이다.

    쓰고 또 쓰고, 한계까지 쓰다 보면 에테르의 양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에테르를 한계까지 퍼부을 대상이 지금 이지혁의 눈앞에 있었다.

    "후우웁."

    이지혁이 이를 악물고 에테르를 더 끌어 올렸다.

    자꾸 에테르를 끌어 올리다 보면 마나까지 같이 올라오는 게 문제다. 평생 써온 마나다 보니 생각만 하면 자동으로 준비가 갖춰진다. 그걸 억제하면서 에테르만 끌어 올리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이지혁이 에테르를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헐?"

    그 광경을 본 최정훈이 입을 쩍 벌렸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지혁이 전신에서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걸 눈으로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LED라고 해야 하나?

    발광 다이오드?

    전구?

    뭔가 수식어가 착착 입에 감기지는 않지만, 여하튼 그런 무언가를 보는 느낌.

    "뭔가 미묘하게……."

    이거, 영화적으로 연출해서 보면 엄청 멋있을 거 같은데, 그냥 눈앞에서 사람이 빛 뿜는 거 보니 좀 기분이 이상하다.

    반딧불이 같은데, 저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거나 말거나 이지혁은 에테르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아, 이거 영 어렵네."

    물과 기름이 뒤섞인 곳에서 국자로 기름만 건져 올리는 기분이었다. 물이 어느 정도 섞여 들어가도 된다면 퍽퍽, 퍼 올리겠지만, 에테르만 정확하게 걷어 올리려니 신경이 많이 쓰였다.

    여하튼 절묘한 컨트롤로 성공은 했다.

    "자, 그럼!"

    이지혁이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순간, 사이클로프스의 메이스가 이지혁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저런."

    최정훈은 혀를 찼다.

    거, 사람이 뭔가 거창하게 해보려고 하는 시점에 꼭 저런 식으로 태클이 들어온다니까.

    콰앙!

    콰아앙!

    "저런."

    그리고 저 사악한 사이클로프스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신 메이스를 내려쳤다.

    저렇게 악독할 수가.

    최정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흐뭇하지?

    뭔가 속이 시원한 것도 같고.

    지금까지의 적들은 너무 강하거나 너무 물리적이지 못했다. 마법이 팽팽 날아다니는 전장에서는 이지혁이 얼마나 타격을 입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가 없었고, 물리적인 타격이 강한 상황에서는 지금처럼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지 않은가!

    이지혁이 저런 몬스터에게 당할 리가 없다는 확신도 있는데다가 저 내려쳐지는 메이스는 얼마나 강렬해 보이는지, 한 번 내려칠 때마다 오장육부가 동시에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하! 사이다."

    "사이다?"

    먼지구름 사이에서 뒤틀린 음성이 흘러나오자 최정훈은 바로 미소를 지우고 정색했다.

    "아, 먼지가 많아서 사이다 먹고 싶다구요. 요즘 중국에서 미세 먼지가 얼마나 날아오는지……."

    "바로 앞에 먼지구름 놔두고 중국발 미세 먼지?"

    "아… 누가 고등어라도 굽나?"

    최정훈의 능청에 이지혁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타깃은 최정훈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알고 있는 이지혁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사람이 간만에 뭔가 해보려고 준비하는데!

    "너는 변신할 때는 기다려 주는 게 예의라는 것도 모르냐?"

    무구하게 이어져 온 용사와 악당의 전투 시 반드시 지켜져야 할 불문율을 깨뜨리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지혁의 육체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이것도 한 번 해보고 나니 아까보다 뭔가 용이했다.

    "거, 기 좀 그만 모으시고 공격 좀 하시죠. 기 모으는 거 보다가 밤새겠네."

    "……."

    저 사람, 언제부터 저렇게 능글맞아졌지?

    이지혁이 최정훈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갑자기 포탄처럼 사이클로프스에게로 쏘아졌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순간적으로 최정훈은 이지혁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누우우우운!"

    콰아아앙!

    이지혁의 주먹이 사이클로프스의 눈을 후려쳤다.

    눈꺼풀이 내려와 가드를 하긴 했지만, 그거 눈꺼풀 정도로 막아낼 수 있는 타격이 아니었다.

    쿠오오오오!

    고통에 겨운 사이클로프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 눈! 눈!"

    쾅! 쾅! 쾅!

    이지혁이 사이클로프스의 눈을 연신 후려쳤다.

    최정훈은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다시 꺼내 불을 붙였다. 깊숙이 한 모금을 빨아들인 최정훈이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말했다.

    "진짜 집착 쩌네."

    최정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하튼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다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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