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1화 (41/118)
  • [■] 뒈지든 말든 알 게 뭐야 [■]

    ─────

    "어쩌자는 건가요?"

    서아영의 말에 최정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좀비 사태는 대충 해결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없이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정화되고 있었다.

    이제는 요령이 붙었는지, 처음보다 속도도 잘 나고 있었다.

    과거에는 드문드문 나오는 좀비들을 정화하는 데도 시간이 엄청 걸렸는데, 지금은 심심해서 좀비를 끌고 나와 잡을 지경이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로아벨이 발작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소소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훈련이라니, 말이야 쉽지."

    서아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좀비 사태가 아직 미처 다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미국에서 이지혁을 통한 자국 능력자들의 강화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선 이지혁을 설득해서 그 일을 맡게 하는 것부터가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을 설득해서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위가 쿡쿡 쑤셔왔다.

    게다가 어찌어찌해서 이지혁을 설득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설마 또 그 방법을 쓸까요?"

    "…설마요."

    이지혁이 지금까지 그들을 단련시키기 위해 썼던 방법은 간단하다.

    이계에다가 풀어놓기.

    "그것만큼은 절대 안 돼."

    그 일을 통해서 그들이 강해진 것 역시 사실이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첫 번째 이계 생활 때는 치료사인 기타무라 렌 덕분에 절묘하게 밸런스가 맞아서 희생자가 없던 거다.

    만약 밸런스가 무너졌다면, 순식간에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이계에 갔을 때는…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지혁이 발에 불나도록 뛰어다닌 덕분에 겨우 모두가 생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걸 타국인들에게 한다?

    "다 죽을 거야."

    이지혁이 미국 능력자들에게도 NDF 사람들만큼의 신경을 써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서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동안 괴롭힘만 주구장창 받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일이 터져 생각해 보니 그 인간이 NDF에 은근 신경을 써왔다는 것이 실감난다.

    '좋지 않아.'

    이런 기분이 들 줄이야.

    지금까지 그들에게도 막 대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타국의 능력자들을 대입하자 막 대하는 것도 애정이다 싶었다. 이지혁의 성향이라면 타국의 능력자들에게는 죽든 말든 관심도 안 줄 가능성이 크니까.

    "그 크리스토펀지 스토펀지 하는 양반은 뭔 배짱으로 이지혁 씨한테 자국의 금싸라기 같은 능력자들을 맡기겠다는 거래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지혁이 어떤 인간인지 알 텐데 말이다.

    그만큼이나 겪어보고도 아직 이지혁에게 신뢰감이 있다면, 크리스토퍼도 판단력이 매우 떨어지는 거다.

    "아니, 따져 보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이지혁을 이상하게 생각할 거리가 별로 없지 않나?

    입으로야 투덜대기는 하지만 미국 측에서 벌어지는 굵직한 사건들을 모조리 해결해 준 게 바로 이지혁 아니던가.

    "설마 이지혁이 좋은 사람이라는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

    최정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지혁을 잠시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 결코!

    보통 사람이라면 몰라도 크리스토퍼는 정보국에서 평생을 굴러먹은 실력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지혁을 그만큼이나 겪고도 그의 인성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이지혁이 미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업적과 인성은 따로 평가하는 게 맞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러지?"

    "으음……."

    최정훈이 살짝 고민하는 듯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지혁이 어떤 인간인지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왜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네?"

    최정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최근 일련의 사태에 미국이 한 것은 그저 버티거나 바리게이트를 쳐서 막아내거나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몬스터에 대한 적극적인 공략은 해보지도 못했죠."

    "그야 뭐……."

    "생각해 보면 미국이 수세적인 입장에 몰린 것은 블랙 먼데이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거야 그렇죠."

    "게다가 앞으로 게이트에서 어떤 것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체적인 레벨을 올리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 나을지도 모른다고요."

    "냉정한 선택이네요."

    냉정이라…….

    이걸 과연 냉정이라고 해야 할까?

    최정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게이트의 레벨이 올라간다면, 결국 미국은 자체적으로 게이트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자국의 국방을 타국에 의지한 국가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는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어왔지 않은가.

    그러니 그들은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나가서 싸우는 걸 선택한 것이다.

    그 자체는 냉정하다기보다는 현명한 방법이지만…….

    '왜 하필 이지혁인가.'

    다른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최정훈이 같은 입장이라면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여하튼 지혁 씨한테 연락을 한 번 해보죠."

    "출근 안 한대요?"

    "출근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제멋대로 출근하더니, 출근해야 하니까 귀찮다고 오늘 안 나온답니다."

    "연락이라도 해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가 전화하셨는데요?"

    서아영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이가 몇인데 엄마가 직장에 전화해서 '우리 아들 오늘 출근 못한다' 소리를 한단 말인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아니, 뭐, 따져 보면……."

    고등학생일 때 실종됐다가 5년 만에 돌아왔으니, 나이야 그렇다 쳐도 나름 고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 찝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해민이 언니한테 연락해서 데려오라고 해볼게요."

    "알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이지혁을 설득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는 최정훈이었다.

    * * *

    - 쿼드라킬!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지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거지!

    이게 바로 실력이라는 거다!

    "잘도 그동안 나를 무시했겠다!"

    이지혁은 사정없이 상대를 몰아치는 아군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동안 게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이것이 팀 게임이라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베라프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보니 아군을 전혀 믿지 못했고, 혼자서만 모든 것을 하려다 보니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제 팀원을 믿고 게임을 하니 승률이 수직 상승하고 있었다.

    이지혁은 치솟는 흥을 이기지 못하고 채팅을 쳤다.

    - 이게 클라스다!

    뿌듯한 마음으로 화면을 바라보자 순간 열화와 같은 반응이 터져 나왔다.

    - 클라스? 클라스? 니가? 니가?

    - 와! 저거, 지금 입 터는 거임? 노답이네, 진짜.

    - 프로 탑승객 클라스 보소. 지리구요.

    - 한 게 뭐 있다고 클라스 운운하지? 진짜 양심도 없는 듯.

    이지혁은 열폭하는 적 팀원들의 채팅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원래 지는 쪽은 말이 많은 법이지.

    하지만 아군의 반응도 영 좋지는 않았다.

    - 님만 없었으면 10분 전에 끝났음.

    - 진짜 지립니다, 지려요.

    - 이만큼 하드캐리를 하는데 어떻게 이리 역캐리를 하지? 그냥 우물에서 와드 박고 놀았으면 10분 전에 게임 끝났을 텐데, 진짜.

    어?

    아군 반응은 왜 이렇지?

    나… 나름 잘한 거 아닌가?

    "지혁 씨."

    그때,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늘하다니!

    한 육백 년 전쯤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펠드리체의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응?"

    "웬만하면 채팅하지 마시구요."

    "…응."

    "그리고 앞으로는 게임 시작하면 최대한 구석에 계시면서 뭘 하려고 나서지 마세요."

    "으응."

    이지혁이 시무룩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아펠드리체는 조금은 안쓰러운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전 대륙이 달려들어서 죽어라, 죽어라 난리를 쳤을 때도 입만은 살아서 땍땍대던 이지혁이었다.

    그런 이지혁이 겨우 게임 때문에 풀이 죽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지혁에게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지혁 하나에게 박살이 났던 베라프의 명예를 위해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느, 늘고 있어요."

    "정말?"

    이지혁이 반색했다.

    그래, 늘고 있지.

    …내 짜증과 스트레스가 늘고 있지.

    아펠드리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예전 베라프에 마왕이 강림했을 때도 태연한 얼굴로 보고를 받던 아펠드리체의 평정심이 겨우 게임 때문에 깨어지고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늘고는 있으니까.'

    이지혁은 아펠드리체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저리 좋아하는 거겠지.

    그 '늘고 있다는 것'이 개미 눈꼽만큼이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니까!

    아펠드리체는 파르르 떨리는 안면 근육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의 육체는 이래서 불편하다. 감정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니까.

    드래곤의 몸일 때는 감정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는데, 인간의 몸으로는 감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늘고는 있어요."

    문제는 다른 사람들도 실력이 오른다는 것이었다.

    게임이란 것은 유저도 같이 발전하는 컨텐츠다. 게임이 서비스되다 보면 그 안의 유저들의 실력도 같이 늘어가는 것이다.

    그 평균적인 실력 상승에 비해서 늘어나는 속도가 떨어진다면, 실력이 되레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절대평가에서는 성적이 오르지만, 상대평가로 하면 떨어지는, 그런 느낌?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야.'

    아펠드리체가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러니 언젠가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응!"

    이지혁이 해맑게 웃었다.

    뭘까?

    이 알 수 없는 죄책감은…….

    아펠드리체는 긴 인생, 아닌 용생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이 세계는 이상한 곳이야.'

    베라프는 정적인 곳이다.

    한 번씩 큰일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변화가 없이 흘러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밀도가 높았다.

    '힘들었겠지.'

    베라프의 천 년과 이곳의 천 년은 전혀 다를 것이다.

    베라프에서 한 달은 지나야 겪을 만한 일들을 지구에서는 열흘 만에 모두 겪어버릴 정도로 많은 것들이 벌어지니까.

    그렇다면 이지혁이 실제로 느낀 시간의 흐름은 더 느렸을 것이다.

    왜 이지혁이 베라프를 그리도 끔찍하게 여겼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대적인 시간 축이 다른 것이다.

    '행복한 걸까?'

    이지혁이 다시 키보드를 부여잡고 욕설을 날리고 있었다.

    베라프의 멸망의 좌라기에는 너무도 경박스러운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 왜일까?

    "지혁 씨."

    "응?"

    "이 세계로 와서 행복하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이지혁이 순간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 * *

    "행복하냐고?"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그런 건 모르겠는데?"

    "그래요?"

    "응."

    이지혁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지구로 돌아오고 싶어 한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안정을 찾고 싶었을 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감정이 컸다고 해야 할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자기 스스로 정확하게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이지혁도 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군요."

    아펠드리체는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이 처음 베라프로 왔을 때, 그는 2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드래곤인 아펠드리체의 눈으로 보자면, 아이라기보다는 태아 수준이겠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베라프에서의 시간을 겪으며 정신이 닳고 해져서 무생물에 가깝게 변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지혁은 정신이 고정되어 있었기에 천 년을 넘게 살면서도 어린아이의 감성을 유지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의 이지혁이 가장 이지혁다운 모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변해가고 있었다.

    확실하게.

    베라프에서 떠나던 시점의 이지혁과 지금의 이지혁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괴리가 컸다.

    근본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았지만, 디테일한 성격면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그를 곁에서 지켜봐 온 아펠드리체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변해갈까?'

    베라프에서의 시간이 성격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고, 자신이 본래 있던 세상의 삶을 받아들이는 이지혁이 어찌 변해갈지는 아펠드리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아펠드리체가 뭔가 말을 하려는 순간, 방문을 열고 정해민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혁아, 최정훈 씨가 좀 와보래."

    이지혁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이 인간들은 요즘 뭔 엄마 찾는 애들도 아니고, 왜 자꾸 자신이랑 뭘 못해서 안달인가.

    "아, 안 갈 거야!"

    또다시 앙탈을 부리기 시작하는 이지혁을 보며, 정해민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심술보는 대체 언제나 사라지려나.

    답도 없다, 답도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정해민이 이지혁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봐야지."

    "이따 간다 그래."

    "이제 좀 자각을 해야지. 너는 이제 중요 인사라니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해. 니가 없으면 안 돌아가는 게 많단 말이야."

    "끄응……."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싫어서 죽어라고 단련을 시켜놓은 건데,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은가.

    "이상한 일이죠."

    "네?"

    정해민이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리 중요한 사람이고 지혁 씨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급한 사람이 찾아오는 게 맞는 것 아닌가요? 말로는 중요 인사라고 하면서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죠?"

    "으음……."

    "인간들은 필요한 사람이 움직이는 게 상식 아닌가요?"

    "하지만 저쪽이 상관이니까."

    "글쎄요? 인간의 계급 체계가 어찌 되는지는 몰라도 제가 보기에 그 사람들이 지혁 씨보다 높아 보이지는 않네요."

    "으으으……."

    정해민이 한 방 먹었다는 듯이 뒤로 살짝 물러섰다.

    저 말을 이지혁이 한다면 어린놈이 건방지게 군다고 했겠지만, 아펠드리체가 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왠지 어렵단 말이다.

    "끄응……."

    정해민이 뭔가 받아칠 말을 골똘히 찾고 있을 때, 정해민의 그림자 속에서 도가윤이 불쑥 솟아올랐다.

    "아, 깜짝이야!"

    이지혁이 불쑥 나타난 도가윤에게 놀라 소리쳤다.

    "노크 좀 하고 다녀!"

    "노크?"

    도가윤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위로 뻗어서 톡톡, 쳤다.

    "아……."

    그림자에서 손이 불쑥 나와서 휘젓듯 노크를 하는 광경을 생각해 보니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호러지, 그게 호러야.

    "됐다. 그런데 왜?"

    도가윤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이지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응?"

    그러고는 손을 뻗어 정해민의 손을 잡았다.

    정해민이 씨익 웃더니, 그 자리에서 텔레포트를 해버렸다.

    "엇!"

    당황한 듯한 이지혁의 목소리만이 남아버린 방에서 아펠드리체는 가라앉은 눈으로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옳은 일일까?'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지혁은 원하지 않는 일이 아닐까?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직 뭔가 시작된 것도 아니고,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정리를 마친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을 따라 가려는데, 방문이 끼익- 열렸다.

    방문을 열고 나타난 의외의 사람에게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혁 씨는 사무실에 갔어요."

    "알아요."

    "그럼 무슨 일?"

    아펠드리체는 자신 앞에서 머뭇대고 있는 김다솜을 바라보았다.

    김다솜은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죠?"

    "네."

    "언니가 쓰는 능력도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거죠?"

    "네."

    숨길 일도 아니고, 말한다고 껄끄러울 일도 아니었다.

    이미 대부분은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김다솜이 간절함이 담긴 눈으로 아펠드리체를 바라보았다.

    "저도 그거 배울 수 있나요?"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갸웃했다.

    "배울 수 있냐고 묻는다면, 배울 수야 있다고 말씀드려야겠죠. 지혁 씨도 마법을 배웠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네."

    "효율 자체가 극히 떨어질 것이고, 지금부터 배운다고 해도 실제로 위력을 내려면 몇 십 년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아……."

    아무리 아펠드리체가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왜 배우려는 거죠?"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설명해 줬으면 하네요."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함께 싸우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는데, 저는 그냥 멀리서 지켜보는 것밖에 못하는 것 같아서요."

    "흐음……."

    아펠드리체가 알겠다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은 이곳에서 나름 그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영역 안에 포함된 사람이 바로 정해민과 도가윤을 위시한 NDF의 능력자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특이한 포지션을 잡고 있는 사람이 둘.

    아펠드리체와 김다솜이었다.

    아펠드리체는 베라프에서부터 이지혁과의 인연이 있어 넘어온 경우였고, 김다솜은 이 집단 내의 유일한 일반인이었다.

    원래라면 아펠드리체도 소외감을 느낄 법한 경우지만, 드래곤인 그녀가 다른 인간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조금 다르다고 소외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문제는 김다솜이었다.

    그녀의 포지션은 매우 어정쩡했다.

    이지혁과 친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지혁과 엮여 있는 것에 비하면 그 고리가 너무 약했다.

    "소외되고 싶지 않은 건가요?"

    "아니요."

    의외로 김다솜은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도움이 되고 싶은 거예요. 작은 도움이라도."

    "흠……."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아펠드리체가 이 효율 낮은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배울 수는 있겠지만, 이지혁 씨에게 도움이 되는 수준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몰라요. 그래도 괜찮아요?"

    "네."

    김다솜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아펠드리체는 그녀에게 한 가지 얻어낼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베라프의 인간과 이곳의 인간이 마법에 대해서 어떤 차이점을 가질 것인가.

    이지혁이란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그는 흑마도사였다.

    이지혁이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에게 마나 컨트롤을 알려줄 고위 마법사가 필요했다. 애초에 마나 친화력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가르칠 수준이 되는 사람 중 그에게 마법을 가르치려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지혁은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다솜의 경우는 다르다.

    아펠드리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 이 세계의 인간이 마법을 배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그녀는 드래곤이자 마법사.

    호기심과 학구열이라면 전 세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생물이다.

    "한 번 해보죠."

    김다솜이 환한 얼굴로 아펠드리체의 손을 꼭 잡았다.

    "좋아하지 마요."

    "네?"

    "나는 지혁 씨처럼 무르지 않으니까."

    아펠드리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 *

    "……."

    최정훈은 할 말을 잃고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이지혁 좀 데리고 오라고 했지, 누가 마왕을 소환해 오라고 했나!

    저 빡친 얼굴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자마자 빡친 분위기만으로 사무실을 싸늘하게 얼려 버린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다.'

    좋게 좋게 이야기해도 통할까 말까인데,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말을 꺼내라는 말인가!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정해민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더니 도가윤을 가리켰다.

    "끙……."

    도가윤에게 뭔가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을 거라 판단한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이지혁에게 말을 건넸다.

    "저… 이지혁 씨."

    "눼?"

    "……."

    발음이 애매하다.

    지금 저 속이 얼마나 뒤틀려 있을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화를 좀 푸시고……."

    "화요?"

    이지혁이 삐딱한 고개로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아니, 차라리 그냥 화를 내시죠."

    그게 속이 더 편하겠다.

    아오, 내가 뭔 폭발물 관리반도 아니고, 만날 이래서 어떻게 사냐고!

    최정훈은 말없이 품에 손을 넣어 약병을 꺼내더니,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위장약이 분쇄되어 입안으로 들어간다.

    겔형을 사서 먹었더니 나중에는 위장약으로 배를 채우는 느낌이라 다시 알약으로 바꾸고야 말았다.

    "화날 게 뭐가 있겠어요? 필요하면 부를 수도 있죠. 뭐, 어차피 싫다고 해봐야 손잡고 텔포 타서 오면 그만인 건데. 제가 뭐가 화가 나겠어요."

    "하하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를 파악한 최정훈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캬, 제가 없는 동안 이쪽 세상이 많이 변했나 봐요. 예전에는 용무 있는 사람이 오는 게 기본이었는데, 이제는 용무 있는 쪽이 사람을 오라 가라 하고 마아아∼않이 바뀌었네요."

    "하하하……."

    할 말이 없다.

    할 수 있는 건 웃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용건으로 사람을 오라고 하셨는지 한 번 들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괜히 바쁘신 분 시간 빼앗는 거 같아서 제가 무척이나 죄송스럽네요."

    아, 이랬었지.

    예전에는 저 말투가 기본이었지.

    최정훈은 새록새록 돋아나는 추억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능력자들의 훈련을 이지혁 씨에게 맡기고 싶어 합니다."

    "아, 그래요?"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오라고 해요."

    "네?"

    최정훈이 되레 놀라 이지혁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노발대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됐네요."

    잘돼?

    뭐가?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빨리 오라고 하세요."

    "자, 잠깐만요."

    지금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뭐, 훈련하다 보면 박살 날 수도 있는 거고, 뒈질 수도 있는 거죠. 미리 확실하게 못 박아놓으세요. 애 병신 돼서 돌아가도 우리 책임 아니라고."

    "……."

    일이 해결은 됐다.

    해결은 됐는데…….

    이걸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뒈지든 말든 알 게 뭐야."

    혼자서 중얼대며 사악하게 웃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일이 생각보다 더 꼬여가는 것을 느꼈다.

    자꾸 뒷목이 뻣뻣하게 저려온다.

    괜찮을까?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최정훈의 의구심과 이지혁의 음흉함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일단 좀 진정하시죠."

    최정훈이 살살 이지혁을 달랬다. 지금 기세로 능력자들을 데리고 왔다가는 태평양을 넘어 날라야 할 관이 비행기에 다 실리지 않을 기세였다.

    그랬다가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아주 박살이 나겠지.

    예전처럼 미국의 비위를 거스른다고 큰일이 벌어지는, 그런 시대는 아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세계 최강대국과 척을 져서 좋을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좀 엿 같긴 하네.'

    최정훈이 인상을 썼다.

    부탁 받은 입장인데 되레 부탁한 쪽을 신경 써서 거슬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 최정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일이 조금씩 거슬리는 것을 보니, 최정훈의 마음속에서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제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무시할 수 없지.'

    능력자 전력이라면 이지혁이 있는 NDF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능력자를 제외한 화기 전력이라면, 대한민국은 무슨 짓을해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종합 전력을 놓고 봤을 때는 어떨까?

    능력자를 포함한 채로 미국과 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음……."

    결과는 아주 간단하다.

    미국이 진심으로 나온다면 한국은 하루도 못 버티고 전 국토에 개미 새끼 하나 살아남지 못하겠지.

    능력자들은 몬스터를 잡는 데 특화되어 있을 뿐, 군대와 맞붙었을 때는 그 메리트가 극도로 떨어진다.

    설령 군대를 상대로도 몬스터를 때려잡는 효율을 모두 뽑아낼 수 있다 해도 미군이 뽑아내는 화력 앞에서 국토를 지켜내지는 못할 것이다.

    미군의 화력이 이지혁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지혁은 아무도 없는 대한민국에 홀로 살아남아서 미국의 국토를 차례차례 파괴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대한민국은 없을 텐데.

    '관계 악화는 좋지 않아.'

    미국이 그리 극단적으로 나올 확률은 없다. 이지혁이 돕지 않는다면 다음에 고위 게이트가 열렸을 때, 미국도 멸망을 면치 못할 테니까.

    하지만 한국 역시 미국에 대해 우위를 쥐었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우위를 쥔 쪽은 한국이 아니라 이지혁이니까.

    그 차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실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이지혁이 가진 우위를 자신의 우위라 착각하는 순간,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나올 것이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이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기분 나쁨을 끌고 가서는 안 된다.

    "사실 그 능력자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내가 기분이 나쁠 때 내 앞에 나타난 죄?"

    "……."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사람이 논리를 완전히 버려 버리면 이리되는구나.

    논리로 나오지를 않으니 따져 물을 수도, 지적할 수도 없다.

    이거, 어찌 보면 무적의 대응인데?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왜! 왜!"

    최정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막말로 이지혁에게 굴려질 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최근 조금씩 악감정이 쌓이는 기분이지만, 미국의 능력자들은 그저 조국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것뿐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타국의 능력자에게 훈련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을 단순히 기분 나쁘다고 마구 굴려 대겠다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옳은 일인가.

    '우리가 악당 같잖아!'

    최정훈은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객관적으로 보면 이지혁 측이 빼도 박도 못하는 악당 아닌가?

    문제는 NDF 역시 싸잡혀서 악당이 될 거라는 점이었다.

    NDF가 한 것이라고는 미국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 것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끙… 이지혁 씨, 그 사람들은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진정하시죠."

    "잘못이 있다니까요."

    "이지혁 씨가 기분 나쁠 때 눈에 띈 거요?"

    "그렇죠."

    이지혁이 해맑게 웃었다.

    "농담이시죠?"

    "당연하죠."

    "……."

    뭘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냐는 듯 눈으로 힐난하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니가 말하면 장난이 장난같이 안 들린단 말이다.

    심지어 나는 조금 전까지 너는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고.

    "일단은 오라고 해요."

    "오!"

    이지혁이 쿨하게 반응하자 최정훈이 반색했다.

    이 인간이 이럴 인간이 아닌데, 왜 이러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맡아달라고 부른 거 아니에요? 그런데 막상 맡겠다니까 반응이 또 이상하고…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거예요?"

    "귀찮으실 테니까요."

    "아, 그거요?"

    이지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하품을 해 대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할 것도 아닌데 뭐."

    "네?"

    최정훈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지만, 이지혁은 굳이 대답해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걱정 말고 오라 그러고, 그때 맞춰서 다른 애들이나 제때 소집해 줘요."

    "그러겠습니다."

    이지혁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가 생각하는 걸 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따져 보면 저 인간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언제나 지가 선택하고 지 하고 싶은 대로 했지.

    "생각하니 빡 치네."

    "네?"

    "아닙니다."

    최정훈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일단은 크리스토퍼에게 연락해서 능력자들을 보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그 와중에 생기는 불상사는 이지혁의 책임일 뿐이지, NDF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라고 못을 박아야지!

    그 와중에 정해민이 사 온 커피를 받아 들고는 그녀를 타박하는 이지혁을 보자 가슴이 무거웠다.

    '조금만 더 상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요."

    "네?"

    "왜 사람들이 이리 안 보여요? 요즘 뭐 바쁜 일 있나?"

    "바쁜 일이라면 바쁜 일이겠지만……."

    최정훈은 머리를 슬쩍 긁고는 대답했다.

    "해외에 지원 나가 있습니다."

    "넹?"

    이지혁이 멍하게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 * *

    "북경 오리!"

    김다현의 눈이 불을 뿜었다.

    베이징! 베이징하면 베이징 덕 아니던가!

    해외여행의 묘미가 뭔가. 바로 다양하고 새롭고 신기한 해외의 요리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병신 같은 윤혁규가 일본에 가서 몬스터만 처리하고는 바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던가.

    멍청한 놈, 일본에 가면 일본 요리를 먹고 와야 하는 거고, 중국에 오면 중국 요리를 먹고 와야지!

    "베이징 덕! 북경 오리!"

    "아, 알았다고!"

    추이펑은 차 뒷자리에서 아까부터 계속 북경 오리를 외치는 김다현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북경 오리!"

    "저 미친놈이!"

    어차피 서로 말은 통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저 인간이 대체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했더니, 베이징 덕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끄응……."

    운전을 하고 있는 부관은 차마 통역도 하지 못한 채 전방 주시 중이었다. 추이펑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입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된다!

    "한국이면 나름 잘사는 나란데 뭔 난민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게이트 처리하러 가는 길에 저렇게 요리 이름이나 외치고 싶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서글프다.

    "이지혁을 보내 달라니까, 이 썩을 놈들이."

    뭐?

    레벨 5 게이트 정도는 이지혁이 안 가도 된다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우습게 보이는 건가?"

    감히 요청을 거절해?

    뒤에 이어진 말만 아니었어도 한바탕 소란을 피웠겠지만, 최정훈이 한 말은 추이펑의 기분도 가라앉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라 별것 아닌 일에 사람 오라 가라 했다 소리 나오기 시작하면 뒷감당이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지혁의 성질을 건드리지 말라는 충고는 정보국에 도는 불문율이었다.

    전 세계 정보국에 도는 이지혁에 대한 평가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타입.

    하지만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격 파탄자였다.

    그런 인간이 빡이 쳐서 설치기 시작하면 답도 안 나온다.

    "그래서 온 인간이……."

    "베이징 덕!"

    "아오!"

    추이펑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인간이 이상한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능력자 중 절반은 정신이상자라는 말도 있고, 추이펑도 저것보다 정신 나간 인간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니까.

    다만, 그를 정말 짜증나게 만드는 것은 저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 웬만한 연예인은 발로 싸대기를 왕복으로 후려칠 만큼이나 잘생겼다는 점이었다.

    왜 저 얼굴로 저러고 사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한국 놈들은 다 이상해.'

    도무지 정상적인 인간이 없다.

    자이언트 때 이미 알아봤지!

    남의 나라에서 발악을 한 서아영도 미친 인간이었고, 그걸 낄낄대며 보고 있던 이지혁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이 인간은 개중에 사람 같던 기억이 있어서 안심했는데…….

    '사람 같긴 개뿔.'

    사람의 기준이 완전히 바뀐다면 모를까, 저 인간이 사람 같다고 말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지혁이 워낙에 막장이라서 옆에 있을 때는 티가 안 났을 뿐이지, 저 인간도 다른 곳에 가면 구역의 미친놈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인재였다.

    그런 놈이 평범한 사람으로 느껴지다니, 대체 한국의 능력자라는 놈들은 얼마나 미친 것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는 말인가.

    "답도 없지."

    추이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작은 땅덩어리에서 이런 놈들만 줄기차게 뿜어내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크, 큰일입니다!"

    그때, 운전을 하던 부관이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게이트가 열렸답니다. 현재 교전 중이라는 신호가 왔습니다."

    "제길!"

    추이펑이 욕지기를 뱉었다.

    분석하기로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했기에 자리를 비워 김다현을 데리러 온 것이다.

    그런데 벌써 게이트가 열렸다고?

    "이젠 분석이고 뭐고 아무 쓸모가 없군."

    최근 몇 달 사이 세계는 급변하고 있었다.

    5년에 걸쳐 인류가 쌓아올려 왔던 게이트 상대법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다.

    우선 게이트의 방식부터가 달라지고 있고, 과거와는 다르게 수와 전략으로 처리할 수 없는 몬스터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전의 자이언트만 해도 과거의 방식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몬스터였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속국이나 다름없던 나라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고, 그 속국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주는 도움이 주력도 아니라 떨거지 하나를 던져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 추이펑의 자존심을 짓뭉개고 있었다.

    "제길!"

    추이펑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밟아!"

    "옙!"

    끼이이이익!

    타이어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회전했다.

    "어어! 왜 이리 빨라요! 안전 운전!"

    "쯧."

    패스 드리프터라는 인간이 과속 좀 했다고 덜덜 떠는 꼴이라니.

    '대책이 필요해.'

    미국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동양과 서양을 지배하는 양국이 동방의 소국에게 손을 벌린 채 떨어질 콩고물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이 황당하기만 했다.

    단 석 달 만에 벌어진 변화에 추이펑은 낮은 침음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지혁.'

    그 불가해한 존재를 어떻게든 회유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며, 추이펑은 손에 들린 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 * *

    "도착했습니다."

    "큭."

    추이펑은 자동차가 멈추자마자 날듯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필이면 여기라니까.'

    추이펑이 이를 갈았다.

    서이두 국제공항과 베이징 사이.

    저 게이트가 열린 곳에서 강 하나만 건너면 바로 베이징 중심가로 이어진다.

    도심의 중심가 한가운데에 게이트가 열리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이곳만 해도 차고 넘칠 정도로 위험하다.

    "나왔어?"

    눈앞에 보이는 아무나 붙들고 소리쳤다.

    소총을 든 채 화를 내려던 군인이 추이펑의 계급장을 보자마자 부동자세로 소리친다.

    "그렇습니다!"

    "어디야?"

    "저, 저기!"

    군인이 가리킨 곳을 본 추이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뭐야?"

    추이펑의 눈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생물들이 보였다.

    "드레이크?"

    아니, 다르다.

    전에 보고된 드레이크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생물들이었다.

    "와이번인가?"

    딱 한 번, 한 개체가 출현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육체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주제에 박쥐와 같은 날개를 펼쳐 유연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

    웬만한 화기로는 흠집도 나지 않아서 처리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는 말을 들었지.

    하지만 뭐, 그 정도야 흔한 일이었다.

    몬스터를 잡는 데 그 정도 애로 사항이 없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와이번 하나쯤이야 중국 능력자들만 해도 찜 쪄 먹고 남는다.

    문제는…….

    "날아오릅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눈앞으로 생각하기 싫은 광경이 펼쳐졌다.

    카아아아아!

    괴성과 함께 와이번 떼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저게 뭐야?'

    추이펑은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철새가 동시에 하늘을 메우며 날아오르듯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와이번들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마, 막아!"

    정신을 차린 추이펑이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이곳은 베이징이란 말이다. 1,700만 명이 사는 도시라고!

    이 도시에 저 와이번 떼가 뿌려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추이펑의 손이 덜덜 떨렸다.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대형 참사가 벌어지는 것이야 기본이고, 2차 피해가 얼마나 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차라리 자이언트가 낫지!"

    추이펑이 이를 갈았다.

    자이언트 사태 때는 암담하기는 해도 확실한 목표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일단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란 말이야!"

    추이펑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퍼지자 사방에서 에테르가 빛을 뿜으며 허공에 떠오른 와이번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

    그 직후, 추이펑은 자신의 실수를 통감해야 했다.

    에테르가 날아듦과 동시에 허공에 떠오른 와이번들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일부는 하강하여 바닥을 메우고 있는 군인과 능력자들을 강습하기 시작했고, 그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대부분의 와이번들은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온 하늘로 퍼져 나간다.

    "안 돼."

    추이펑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수백은 될 듯한 수의 와이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 저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한 마리를 잡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수백 마리였다.

    이 모든 일이 수습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으……."

    추이펑의 다리가 힘을 잃어갈 때쯤, 그의 귓가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긴 이르지, 아저씨."

    "음?"

    추이펑이 고개를 돌려 김다현을 바라보았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

    자신도 모르게 욕을 입에 담은 추이펑을 내버려 두고, 김다현은 천천히 앞으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수지가 안 맞긴 하지만……."

    저 와이번들을 모조리 잡아내려면 꽁지가 빠지게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베이징 덕 한 마리로 퉁 치기에는 감수해야 할 고생이 너무 많지만,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일도 못하는 인간쓰레기 취급 받던 윤혁규 꼴이 된다.

    "그건 안 되지."

    이지혁에게 욕과 잔소리를 동시에 듣는 것만큼 인간이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 꼴만은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김다현이 의욕을 불태우며 달리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공기를 가르며 달리던 김다현이 그대로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카악?

    갑자기 바로 옆에 인간이 나타나자 당황한 와이번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흠……."

    김다현이 팔다리를 한 번 털어내더니, 허공을 박차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여 있는 와이번들을 발판처럼 짓밟은 김다현이 허공을 그대로 질주했다.

    카아아악!

    카악!

    김다현의 발에 짓밟힌 와이번들이 바닥을 향해 움푹움푹 떨어져 내렸다.

    "달려볼까나!"

    김다현이 다리에 에테르를 잔뜩 끌어모았다.

    "으랴아아아아압!"

    파아아앙!

    순간적으로 음속을 초월하며 소닉붐이 주변을 튕겨냈다. 허공과 와이번들을 발판 삼아 김다현이 질주를 시작했다.

    "허……."

    추이펑은 놀란 상태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번에도 저자가 활약하는 것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그 거대한 자이언트를 농락하며 시간을 끈 것도, 실질적으로 자이언트를 무력화시킨 것도 김다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뭐랄까…….

    되레 자이언트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런 느낌이 강했다.

    사자가 말벌에게 쏘여 도망간다고 해서 말벌이 사자보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압도적인 스피드로 농락했다는 느낌이었지, 체감적으로 김다현이 강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긴 잔상을 남긴 김다현이 허공에서 와이번 떼 사이를 제멋대로 헤집고 있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마치 검은 구름 사이에 새하얀 빛줄기가 긴 꼬리를 남기며 이리저리 회전하는 것 같았다.

    김다현의 속도는 그만큼이나 압도적이었다.

    "떨어집니다!"

    하늘에서 와이번들이 우수수 하강하기 시작했다.

    추이펑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김다현의 신위를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게 확실하게 끝장을 내라! 몸이 단단하니까 반격에 주의하란 말이야!"

    쿵! 쿵!

    와이번들이 비처럼 떨어져 바닥과 충돌했다.

    카아아아!

    김다현에게 당해 떨어지긴 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닌지, 바닥에 떨어진 와이번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이상 그들의 한계는 극명했다.

    "퍼부어!"

    콰아아아앙!

    콰으으릉!

    중국의 능력자들이 뿜어낸 에테르가 와이번을 말 그대로 짓눌러 버렸다.

    불꽃과 얼음과 벼락이 한 점을 향해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폭발하고 또 폭발했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와이번이 반쯤 숯이 되어버린 채 덜덜 떨다가 이내 숨이 끊어졌다.

    "좋아!"

    화력을 집중하면 와이번을 하나하나 잡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저 하늘 위의 와이번들에게는 화력을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일 뿐.

    콰앙!

    콰앙!

    사방에서 폭음이 들려왔지만 추이펑은 그쪽으로는 눈도 주지 않은 채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 더!"

    바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능력자의 물량이라면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중국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와이번 한 마리당 50명의 능력자만 붙여도 놈들은 반항도 못해보고 박살이 날 것이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허공에서 수백 마리의 와이번 떼와 혼자 격전을 벌이고 있는 김다현이었다.

    "강하다."

    "…예."

    부관의 긍정이 짜증스럽다.

    하지만 강하다는 말을 한 것은 추이펑인데 누구에게 짜증을 내겠는가.

    강하다.

    정말 강하다.

    아무리 와이번을 발판 삼아 뛰고 있다고는 해도 인간이 저렇게 허공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와중에 와이번들을 짓밟고 후려쳐 떨어뜨리고 있다는 건 정말 웬만한 밸런스와 자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괴물인가?'

    어디서 저런 인간들이 자꾸 나오는 거지?

    불과 몇 달 전까지 강자라고 불리던 능력자들은 요즘엔 회자도 되지 않는다.

    NDF.

    한국의 능력자들이 세계에 회자되기 시작할 때, 추이펑은 그들의 평가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이번이 두 번째다.

    저 작은 나라에게로 능력자 세계의 밸런스가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지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 이지혁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충분히 강하다.

    이지혁이 한국에 없다고 해서 저 능력자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미국을 제외한다면 어디에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중국의 추이펑조차 저 김다현과 서아영이 있는 한국과는 척을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한국에는 저 김다현급의 능력자가 수십 명이나 더 있었다.

    "끔찍한 일이지."

    인접국이 강하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동아시아는 예전부터 말도 안 되는 강대국들이 밀집해 있는, 폭탄과도 같은 곳이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한국.

    그 겨우겨우 맞아들던 밸런스가 한국의 말도 안 되는 약진과 함께 깨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지고 있군."

    윗대가리들은 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그들이 예전처럼 한국을 대했다가는 아무래도 큰 사단이 날 것이다. 이번 사태가 해결되는 즉시 고위층들과 면담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추이펑이었다.

    "이대로 괜찮습니까?"

    "뭐가?"

    "지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와이번의 수가 줄어들수록 움직이기가 힘들어질 텐데요."

    "아!"

    추이펑은 자신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런 간단한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다니!

    "지원! 지원해라! 머리 위로 갈기란 말이야!"

    추이펑의 외침에 능력자들의 시선이 위로 올라간다. 그러더니 바닥에서부터 형형색색의 빛줄기들이 허공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와, 씨!"

    김다현이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바닥에서 무지갯빛의 파도가 몰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능력자들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위협적인 정도가 아니라 현실감도 잘 들지 않는 수준이었다.

    멋지기도 멋지고, 다 좋다. 다 좋은데!

    "나도 맞으면 죽는다고, 이 미친놈들아!"

    김다현이 소리를 꽥! 지르고는 날아드는 빛줄기들 사이로 유영을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에테르들에 치를 떨며 김다현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추이펑의 모습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런 머리로 대체 어떻게 저 자리를 꿰차고 있는지.

    '아니, 우리도 뭐…….'

    서아영이 책임자인 NDF도 할 말은 없었다.

    어쩌면 윗대가리들이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은 조직의 숙명이 아닐까?

    "별 쓸모도 없는 짓을."

    보기에는 화려하고 좋지만, 응축되지 못한 각각의 에테르들은 허공을 날고 있는 와이번들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어쩌지?"

    와이번들이 빽빽할 때는 그래도 상대하기가 쉬웠는데, 반수 정도의 와이번들을 떨어뜨리고 나니 발판도 슬슬 줄어드는 것이, 운신이 어려워졌다.

    이 정도면 할 만큼은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욕먹겠지.'

    분명 욕먹을 거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런 거 필요 없으니 잘하라고'를 외치며 욕을 퍼부을 인간이니까.

    뭔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김다현이 결심할 때쯤, 그의 귓가로 짜증이 잔뜩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 너 뭐하냐?"

    "응?"

    왜 이 목소리가 이곳에서 들리는가.

    김다현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아래로 돌렸다.

    저 아래 심술이 가득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

    하나는 확실해졌다.

    돌아가서 욕먹을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 먹을 욕이 걱정이지.

    썩을.

    * * *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가.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이 비행기로 북경에 떨어진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지혁이 왜 이곳에 있는가!

    이지혁에게 신경 쓰다가 하마터면 날아오는 에테르에 정면으로 맞을 뻔한 김다현이 기겁을 하며 몸을 뺐다.

    "와, 씨!"

    욕이 절로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혁은 쪼그려 앉은 자세로 김다현을 노려보다가 소리쳤다.

    "아, 뭐하냐고?"

    "뭘요!"

    이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김다현이 열심히 몸을 놀리면서도 뚱하게 대답했다.

    "워치 안 봐?"

    "아?"

    김다현이 손을 들어 스마트워치를 보았다.

    "헐."

    그사이에 연락이 100통 가까이 와 있었다.

    '스토컨가.'

    예전,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고했을 때도 이런 열렬한 연락은 받아보지 못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후로 확인을 제대로 못했다 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백 통이나 되는 전화가 걸려올 줄이야.

    "누가 죽기라도 했어요?"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려와."

    "내려가면 또 괴롭히려고!"

    "아오, 저 화상이 진짜."

    이지혁이 이를 갈아붙였다.

    그 광경을 본 김다현은 절대 내려가면 안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맞아 죽는다!

    문득 이지혁을 본 첫날 부러진 코가 시큰해 왔다.

    저 인간한테 제대로 맞아본 사람은 NDF에서도 김다현밖에 없었다.

    '다른 놈들은 모르지.'

    저 인간이 사람을 팰 때 얼마나 무자비한지 모를 거다.

    진짜 죽는 줄 알았지.

    김다현이 몸을 부르르 떨고는 와이번의 머리를 밟으며 날아올랐다.

    "그래, 내려오지 마라."

    이지혁이 이를 으드득, 갈더니, 양손을 털어냈다.

    "절대 내려오지 마! 경고한다. 내려오면 뒈진다."

    "또 뭘 하시려고!"

    "분명 난 말했다."

    이내 이지혁의 양손이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으아!"

    그 손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아챈 김다현이 괴성을 질렀다.

    저 미친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내가 여기에 있는데!

    "하지 마아!"

    김다현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지혁은 낄낄대며 양손에 마나를 모았다.

    "내려오지 마! 내려오면 죽인다!"

    "으아아!"

    이지혁의 양손에 모인 마나가 검은 연기처럼 뿜어져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김다현은 그 광경을 보며 반대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 마법진을 볼 때마다 뭔가 든든하던 적도 참 많았는데, 지금은 절대 든든해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 잘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지혁은 도망치는 김다현을 보며 낄낄댈 뿐이었다.

    이윽고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더니, 허공에 거대한 전류의 강을 만들어냈다.

    검은 전류가 요동치는 모습을 본 김다현은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저게 뭐냐!

    아니, 저 인간 센 건 알았는데…….

    원래 저런 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셌던가?

    검은 전류가 마치 용처럼 휘감기며 회전하는 모습을 본 김다현이 전력으로 소리 질렀다.

    "살려주세요오!"

    하지만 이지혁은 가차없었다.

    "넌 내려와도 죽어!"

    쿠쿠쿠쿠!

    요동치던 전류가 허공에서 어설프게 퍼져 나가던 와이번 떼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 후에…….

    파지지지지직!

    전류가 터지는 소리와 뭔가 폭발하는 굉음이 동시에 터지며 하늘에 거대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흐어."

    뜬금없이 등장한 이지혁이 하늘을 검은 번개로 뒤덮어 버리는 장면을 목도한 추이펑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못해 먹겠네, 진짜!"

    이쪽은 저 김다현만으로도 충분히 놀랐단 말이다.

    이전에 본 서아영의 불 쇼에 대한 충격도 아직 다 가시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이런 걸 보여주면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망할 괴물 놈들.'

    그나마 김다현이 설칠 때는 그가 대단하다는 심정이었는데, 이지혁이 전류를 뿌려 대자 학살당하는 와이번들이 불쌍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보라고, 저걸.

    카아아아아아악!

    와이번들의 끔찍한 비명이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검은 전류는 몸속을 관통하며 불쌍한 와이번들을 시커먼 숯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파지지직!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검은 벼락이 와이번의 몸을 지지고는 다음 와이번에게로 타고 흘렀다.

    수십 개의 벼락 줄기들이 그런 식으로 몇 번 이동하고 나자 멀쩡하게 날아다니는 와이번은 손에 꼽을 정도로밖에 남지 않았다.

    "튀라고!"

    어느새 와이번 한 마리를 잡아탄 김다현이 와이번의 머리를 후려치며 재촉했다.

    와이번 역시 당장 등에 달라붙은 이 미친 인간과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전력으로 검은 벼락에게서 도망쳐 날았다.

    "호오?"

    이지혁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것이야말로 국공 합작.

    아니, 인수 합작이 아닌가.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이지혁의 우수에서 튀어나온 검은 촉수가 길게 뻗어 나가면서 날아오른 김다현과 와이번을 친친 휘감았다.

    "으헉!"

    헛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김다현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혁의 모습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 올랐다.

    "형님! 제가 그게 아니옵고!"

    "쯧."

    김다현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이지혁이 촉수를 끌어당겼다.

    "으아아악!"

    김다현의 육체가 달리는 것보다 더 빠르게 이지혁에게 끌려간다.

    쿠웅!

    촉수에 붙잡힌 김다현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흙먼지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끄응……."

    그나마 와이번의 육체가 쿠션이 되어주었기에 다친 곳은 없지만, 전신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입은 살아서 불만을 토해내려던 김다현은 바로 옆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와이번이 우드득대는 소리와 함께 촉수에 흡수되는 것을 보고는 재빠르게 입을 닫았다.

    …원래 저런 분이시니까.

    불만은 속으로 삼키는 것이란 점을 깨달은 김다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형님, 제가 내려오지 않으려던 게 아니고……."

    "…그냥 죽일까?"

    "살려주십시오!"

    김다현은 이지혁에게 번개같이 달려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형님, 접니다! 김다현!"

    "알아."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어휴……."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질 같아서는 확 패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이놈을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준비해. 한국으로 갈 거다."

    "네?"

    김다현이 멍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한국이요?"

    "그래."

    그럼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서 이곳까지 이지혁이 직접 왔다는 말인가?

    "한국에 무슨 일이 있나요?"

    "으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그답지 않게 조금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지……."

    "네."

    "음, 오해하지 말고 들어. 화도 내지 말고. 일단은 침착하는 거야."

    뭔 말을 하려고 이게 이리 뜸을 들이지?

    김다현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지혁이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좀 다쳤어."

    "다쳐요? 누가요?"

    "거, 음……."

    이지혁이 뭔가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자 김다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다쳤다고 이지혁이 굳이 중국까지 날아와 그를 데려가겠다고 하겠는가.

    그렇게까지 김다현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다현이 다짜고짜 이지혁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잡았다.

    "다솜이냐!"

    "일단 진정하고……."

    "다솜이냐고! 다솜이가 다쳤어?"

    시스콤의 대명사인 김다현은 이성을 잃고 이지혁을 윽박지르기 시작했고, 천하의 이지혁조차 그 기세에 압도당하여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으응."

    "뭐? 왜! 어쩌다가! 많이 다친 거야! 아니, 왜 다친 거냐고! 상태는 어떻고! 말을 해봐!"

    "끙……."

    이지혁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김다현을 보고 신음을 내뱉었다.

    멱살이라니.

    멸망의 좌가 평범한 인간에게 멱살 짤짤이를 당했다고 하면 베라프 사람들은 자기 귀를 뚫어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나의 위엄이…….'

    눈물이 앞을 가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김다현의 기세가 워낙 살벌해서 감상에 빠져 있을 틈도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바닥에 메다꽂고 파운딩이라도 칠 기세였다.

    "뭐, 많이 다친 건 아니고……."

    "왜 다쳤는데! 왜!"

    "거, 마법 배우겠답시고 설치다가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는데,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냐."

    "…그게 뭔 소리야?"

    이지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직접 가서 보는 게 속 편할 테니까, 준비나 해."

    "이이!"

    김다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솜이가 다치다니!

    우리 다솜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다솜이가 다치다니, 대체 NDF 놈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뭐해! 빨리 가자고!"

    "으응."

    이지혁은 김다현의 기세에 찔끔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따져 보면 이지혁은 그를 빨리 한국으로 데려가겠답시고 먼 길을 달려온 사람 아닌가.

    그럼 고맙다고 해야지, 이런 취급이라니.

    "하……."

    앓느니 죽지.

    지금이라도 저 뻔뻔해 보이는 뒤통수를 후려 갈겨서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지만, 분노와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진동면도기처럼 턱을 떨어 대는 김다현을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래, 니가 뭔 죄가 있겠냐."

    시스콤인 게 죄지.

    에휴.

    이지혁은 두말없이 손을 휘저어 게이트를 열었다.

    "자……."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 거야?"

    "오냐."

    김다현은 살짝 미심쩍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한 번 보고는 곧 두말없이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게이트로 들어갈 때마다 이계에서 지옥을 겪고 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 김다현이 얼마나 다급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지혁은 김다현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추이펑을 바라보았다.

    "뭐, 그리됐으니 뒷정리 잘 부탁드려요."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 추이펑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이내 게이트가 사라졌다.

    "…이게 뭔 일이다냐?"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추이펑만이 멍한 얼굴로 그들이 사라진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우우우웅.

    게이트는 결코 크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 만큼 작은 게이트가 우거진 수풀 가운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빛의 게이트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더니, 이내 곧 그 입을 벌리며 어두운 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뿌연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음……."

    하이 톤의 탄성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곳인가?"

    그녀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심혼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흑발과 흑의.

    그리고 그 검은색과 대조되는, 투명하기까지 한 새하얀 피부.

    그 피부 한가운데에 자리해 이질적으로까지 보이는, 피처럼 검붉은 입술.

    열세 번째 마왕.

    서큐버스 퀸 에르카나.

    그녀가 마침내 지구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금 기분 나쁜 곳인데?"

    에르카나는 손을 올려 입술을 매만졌다.

    베라프와는 다른, 끈적한 느낌이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이곳이 어떤 곳인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이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 그럼……."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주위를 살피던 에르카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이쪽인가?"

    또각.

    그녀의 걸음이 천천히 옮겨지기 시작했다.

    "지금 가니까 기다려요, 달링."

    낮지만 높은 그녀의 웃음이 천천히 울리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