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40화 (40/118)
  • [■] 내가 그를 찾아가는 건 이유가 필요 없어 [■]

    ─────

    "아우우으."

    간만에 늘어지게 잠을 잔 이지혁이 기지개를 켰다.

    "일어났어요?"

    "으음……."

    이지혁은 자신의 머리 위로 얼굴을 들이미는 아펠드리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말이야."

    "말씀하세요."

    "아침마다 눈을 뜰 때 네 얼굴을 본다는 게 영 유쾌하지만은 않거든?"

    "잠이라도 자게 해줬는데, 정말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네요."

    "끙……."

    사실 그 부분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베라프에서 돌아온 이후로 잠을 전혀 잘 수가 없었다. 의식을 놓아버리는 순간 시작되는 흑마력의 침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을 잤더니 죽었다'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잠을 잤더니 마귀가 되었다'가 되어버리면 그냥은 끝나지 않는 일이었다.

    덕분에 몇 달을 뜬눈으로 살고 있었는데, 아펠드리체가 그가 잠든 동안 흑마력의 침입을 막아주고 있다 보니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런데 너는 잠 안 자도 되나?"

    "우리 종족이 얼마 만에 자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죠? 이지혁 씨가 죽기 전에는 안 자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물론 그렇겠지, 드래곤이니까.

    그런데 사람 모습을 하고 있으니 자꾸 그런 부분이 신경 쓰인단 말이지.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자상하네요. 답지 않게요."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답지 않다니? 난 원래 자상한 사람이었어. 그걸 니들이 몰랐을 뿐이야."

    "그리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겠죠."

    "넌 이상하게 욕 한 마디 안 하고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줄 안단 말이야?"

    "칭찬 고마워요."

    욕이야, 이년아!

    칭찬은 얼어 죽을.

    "그럼."

    우우우웅.

    "끄윽."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아펠드리체가 이지혁의 머리에 마나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껏 온갖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어본 이지혁이지만, 서로 다른 마나가 육체의 안에서 부딪쳐 중화되는 과정은 그 고통들 중에서도 단연코 상위권이 꼽힐 만했다.

    "헉."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마나가 멈추자 이지혁이 긴 탄식을 내뱉으며 늘어졌다.

    "못해 먹겠네, 진짜."

    그저 편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평범하게 사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지금이라도 방법은 있어요."

    "안 간다고."

    그놈의 베라프.

    천 년을 넘게 살았으면 됐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돌아가라는 말인가.

    "지혁 씨."

    아펠드리체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자꾸 그렇게 거부만 할 게 아니에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혁 씨가 죽기 전에 먼저 리미트가 올 거예요."

    "알아."

    "그럼 대참사가 벌어져요. 알고 있죠?"

    "안다니까."

    "……."

    아펠드리체가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원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특히나 베라프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너무도 완고했다.

    '힘들었으니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나약한 인간의 정신으로 베라프에서의 생활을 버텨내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아무리 정신이 고정되어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고정되어 있었기에 미치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괴리감을 느껴야 했겠지.

    베라프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이 생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해하기 힘들어요."

    "응?"

    "인간이란 존재를 떠나서 모든 생물은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겠지."

    "그런데 이지혁 씨는 왜 스스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버리려고 하죠?"

    "음……."

    설명하기 어렵다.

    그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나 확실한 것은……."

    "……."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라는 거야."

    "모르겠군요."

    "인간과 드래곤은 사이클이 다르니까. 네가 보자면 난 이제 겨우 헤츨링을 벗어난 주제에 삶이 권태롭다고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로 보일지도 모르겠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웜급도 아닌데 말이야."

    이지혁이 키득대며 웃었다.

    "인간이 다른 생물과 가장 다른 게 뭔지 알아?"

    "모르겠어요."

    "자살을 한다는 거지."

    "……."

    자살을 하는 드래곤은 없다.

    자살을 하는 아종족도 없다.

    베라프에서 알게 되었지만 타 종족들이 인간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설계가 잘못됐어."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하를 감당하지 못해서 생명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일인지를 감안한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진화를 하면서 이성도 함께 발달했어야 하는데, 어디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뇌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온전히 감내하지를 못해."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나는 그걸 벌써 얼마나 겪고 있는 줄 알아?"

    "……."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야. 놓고 싶은 거지. 베라프로 돌아가 버리면 그럴 수가 없어서 가고 싶지 않은 거야. 이해시키기 어렵겠지. 나도 나를 이해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뭐, 당연한 거지."

    미쳤으니까.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말이야.

    "휴……."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쉬고는 이지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서글프네요."

    그의 방식을 부정해야 그의 삶을 연장시킬 수 있는데, 그의 방식을 부정하면 그의 삶이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부정되어 버린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를 구하려 드는 것이 되레 그를 죽이려 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아이러니가 그녀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이야기네요."

    "드래곤에게도 어려운 게 있나?"

    "드래곤도 생물이에요. 그저 조금 깊이 보고, 멀리 보고, 오래 볼 뿐이죠."

    "자랑 같은데?"

    이지혁이 키득댔다.

    드래곤과 이런 대화를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지만 당신."

    "응?"

    "당신이 죽으면 슬퍼할 존재들이 많다는 것도 기억해요."

    "그럴까?"

    "당신이 살아온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것들이 적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지도."

    허무하게 사라져들 갔지만 말이야.

    그래도 사람이라고 정을 주고 마음을 나누던 이들은 지금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엮이기 싫어진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아펠드리체와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그녀와의 교류가 이어질 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이니까.

    "당신은 그저 지친 걸지도 몰라요."

    "흠……."

    "그러니 쉬다 보면 다시 일어서겠죠."

    "그 말대로라면 지금 나는 최악이군."

    쉬어야 할 타이밍에 혹사당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펠드리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더 쉬어요, 조금 더."

    벌컥!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이예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나 최정……."

    뭔가 소리치던 이예원이 둘이 하는 꼴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빠."

    "응?"

    "그냥 차라리 모텔을 가."

    "이년이 미쳤나!"

    이지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예원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미친 건 너지! 집에 엄마 아빠 다 있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러다가 거사도 치르겠다! 왜? 자리 비워줘?"

    "으으……."

    이지혁은 화도 내지 못하고 뒷목을 움켜잡았다.

    마왕조차 범접하지 못한 이지혁의 뒷골을 이예원이 폭격하고 있었다.

    아, 이게 뒷골이 당긴다는 거구나.

    상승한 혈압 탓에 얼굴이 벌게진 이지혁이 벌떡 일어나서 이예원에게 달려들었다.

    "뒈진다, 진짜!"

    하지만 이예원은 핏줄이 남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지혁의 마수에서 벗어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아아아아!"

    박선덕이 이지혁의 방에서 달려 나오는 이예원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엄마! 쟤들 봐! 집에서 신혼살림 차릴 기세라니까!"

    "그래?"

    박선덕은 별 감흥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TV로 시선을 옮겼다.

    "엄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저러고 있다니까!"

    "피 마르면 죽어."

    "아니, 엄마는 화도 안 나?"

    "왜?"

    "……."

    왜냐고 물으시면 할 말이 없지요.

    "아니, 그래도 사람이… 집에 어른이 있는데 최소한 그런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왜?"

    아니, 거, 그…….

    이예원이 말문이 막혀 멀뚱거리자 박선덕이 가만히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예원아."

    "응."

    "니가 니 오라비를 가만히 생각해 보렴."

    "으응?"

    "쟤가 어디 정상적인 애들한테 장가를 갈 수 있겠니?"

    "…어렵지."

    쉬운 일이 아니지.

    저 성질머리를 누가 받아주겠어.

    자신씩이나 되니까 오라비라고 그래도 챙기는 거지, 다른 애들 같았으면 벌써 도망갔지.

    "그러니까 그냥 내비 둬라. 어디서 저런 며느리를 얻겠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이예원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부들거리는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 그럼 혜민 언니는 어쩌고!"

    박선덕은 여전히 뚱했다.

    "걔가 무슨 우리 며느리라도 되니? 지혁이가 바람피워?"

    "그런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혜민 언니가 낫잖아!"

    "딱히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구만."

    "엄마!"

    이예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박선덕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게 어디 엄마한테 소리를?"

    "자, 잘못했어요."

    어머니의 위엄 앞에 3초 만에 격침된 이예원이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그녀는 저 아펠드리첸지 뭔지 하는 계집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예쁘다.

    아니, 꼭 너무 예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예쁘긴 한데 뭔가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리고 인간적으로 밸런스가 너무 붕괴된다.

    강아지들이 투닥투닥거리며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호랑이가 날름 뼈다귀를 물고 가버리는 것을 강아지들이 멍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리고……."

    "응?"

    "지금이야 저러고 있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의 인연이라는 거다. 내비 둬."

    "으응."

    엄마의 말이 은근 가슴에 와 닿는다.

    어찌 될지 모르는 게 사람의 인연이라…….

    이예원이 피식 웃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쟤는 저러고 있고, 다른 애들도 다 투닥거리는데, 나중에 툭 튀어나온 애가 채가면 엄청 웃기겠다."

    그럼 다 닭 쫓던 개 꼴 될 거 아냐.

    이예원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도 저 얼굴에 복에 겨운 대접을 받고 있는데, 여기서 또 뭔가 추가될 리가 있나.

    요즘 저런 모습만 접하다 보니 그녀도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솜이도 한 번 불러야지."

    "그 음침한 애?"

    "응, 엄마. 은근 애는 괜찮아."

    "아이고, 집 안에 들이면 에어컨이 없어도 되겠더라. 나는 별로다."

    "엄마는 그럼 그중에 누가 제일 나아?"

    "나는……."

    고민하던 박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이가 싹싹하지."

    "그지? 그지?"

    "그런데 뭐, 지들이 좋아야지."

    "그건 그렇긴 한데……."

    좋아한다라…….

    이예원이 살짝 얼굴을 구기며 방에서 걸어 나오는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저 인간은 누구를 좋아하는 거지?

    고자가 아니고서야 미인들이 저리 주변에 많은데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오빠."

    "응?"

    "오빠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이게 미쳤나? 아침부터 뭔 짓거리야? 할 짓 없으면 가서 공부나 해!"

    "내가 공부한다고 뭐 되겠어?"

    "…게임이라도 해라."

    말을 돌리는 이지혁을 보며 이예원이 눈을 빛냈다.

    '분명 누구한테 마음이 있기는 할 텐데?'

    끈덕진 이씨 집안의 본능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지혁의 여자가 꼭 이 주변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어디를 가겠다고?"

    그 목소리는 낮고, 무겁고, 또한 묵직했다.

    낮게 울린 음성은 심혼을 뒤흔드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피가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지구라는 곳."

    대답하는 음성은 고혹적이었다.

    살며시 다가와 부드럽게 쓰다듬지만, 그 속에는 그저 부드럽지만은 않은 끈적거림이 있었다.

    상대의 무거운 음성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 고혹적이고 달뜬 음성이 날카롭게 날아든 음성을 되받아쳤다.

    "네가 누군지 알고는 있는가?"

    "물론이지."

    "그런데도 지구로 가겠다고?"

    여인.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 가죽 타이즈로 전신을 두른 여인이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타는 듯 붉은 입술을 혀로 살짝 축인 여인은 몽롱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런데?"

    "에르카나!"

    에르카나라 불린 여인이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자, 사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유는?"

    "이유?"

    여인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음성이지만 그 웃음소리조차 마음을 진탕시킨다.

    수많은 서큐버스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존재이자 마계의 마왕.

    열세 번째 마왕의 위를 차지한 자.

    서큐버스 퀸. 에르카나.

    그녀가 지금 붉은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알면서 묻는 거겠지? 응?"

    "그놈 때문인가?"

    "물론이지. 아니며 내가 뭐하러 현세로 가겠어. 지루하고 재미없는 곳이잖아. 그 사람 하나를 빼면 볼 것도 없는 곳이지."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큐버스 퀸.

    그 지고한 위치에 있는 여인.

    그리고 마계에서도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최고위의 마왕.

    왜 그녀가 그런 인간 하나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은 이제 없다. 그는 그저 인간일 뿐이야."

    "알아."

    "네가 비록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오른팔 같은 존재였다고는 하나 이제 그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왜 아직 그에게 그리 집착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에르카나는 한심하다는 듯 사내를 바라보았다.

    "바보 같아."

    "으음!"

    "그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라 함께한 게 아냐. 내가 그를 아흔아홉 번째 마왕으로 만든 거지."

    "…잠시 잊었군."

    망각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악마나 드래곤이나 별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착각을 할 만큼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존재감은 강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마왕으로 만들어볼 셈인가?"

    "아니, 원하지 않을 거야."

    "그럼?"

    에르카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자꾸 이유를 찾는데 말이야."

    "……."

    "내가 그를 찾아가는 건 이유가 필요 없어. 여하튼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네가 없어지면 네 영지는 어떻게 관리할 셈인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의 영지까지 흡수한 덕분에 네 영지는 마계에서도 가장 넓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가지고 싶으면 가져."

    "이……."

    "그런 건 이제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나는 그에게로 갈 거야."

    사내는 타는 듯한 눈으로 에르카나를 바라보았지만, 에르카나는 그에게는 한 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돌아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과 살랑거리는 꼬리를 본 사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이지혁!

    그 찢어 죽일 놈이 아직까지 마계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때 죽였어야 했건만!"

    열세 번째 마왕까지 합류한다면, 아흔아홉 번째 마왕을 처리하는 일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전에 움직여야 한다.

    "보로엘."

    "예, 마왕이시여."

    "델카란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사내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옥좌에 몸을 기댔다.

    그는 마계에 활력을 가져다준 존재지만, 이제는 너무도 위험해져 버렸다.

    오히려 과거의 강대했던 그보다 지금의 그가 존재 자체로는 조금 더 껄끄러울 정도로 말이다.

    "긴 잠을 자게 해줘야지."

    아주 오랫동안 쉬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 * *

    "그 택배 회사라는 건 어떻게 알아봐야 해?"

    "……."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서 사과를 깎아대고 있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물어보는 질문이 왜 저따위인가.

    "진짜 아이돌 때려치웠어?"

    "…티비도 못 나가. 이젠 케이블도 안 받아줘. 행사도 없어."

    시무룩해진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이 얼굴을 감쌌다.

    쓸모라고는 그거 하나였는데, 이제는 백조까지라니.

    "근데 어차피 너… 능력자라서 월급은 받잖아."

    "쥐꼬리만큼 주는데 그거 받아서 어떻게 먹고살아! 사람이 놀면 뭐해, 일을 해야지!"

    옆에서 정해민의 말을 듣던 박선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발언이지?

    아들내미 월급 통장에 꽂히는 걸 보면 적지 않은 돈인 거 같던데, 그게 적다고 말하면 씀씀이가 헤픈 건데…….

    그래도 안 놀고 자기가 몸으로 뛰어서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거 보면 생활력은 있는 거 같고…….

    이건 마이너스인가, 플러스인가.

    매우 미묘한 발언이었다.

    "너, 아이돌에 엄청 집착했잖아. 그거 때문에 연습생 생활도 10년씩 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정해민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돌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던 마음이 컸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사람이란 건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니까.

    NDF에서 거칠게 굴려지면서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그동안 손에 꼭 잡고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하던 아이돌 생활을 그만 놓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지금쯤 침대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눈물이나 짜고 있었을 텐데, 지금 그리 마음이 나쁘지 않을 것으로 보아 아이돌 강박증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난 모양이다.

    "아……."

    이지혁이 정해민의 표정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제 그 나이에 아이돌이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게 쪽팔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구나!"

    "아니거든!"

    정해민이 부들거렸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도 아직도 소녀 드레스 입고 깜찍하게 뛰어다니고 있는데!

    아이돌 연습생 10년을 겪었다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소속사에 들어온 터라 나이가 많은 편도 아니란 말이다!

    저건 지보다 나이 많으면 다 아줌만 줄 안다니까!

    "그래, 솔직히 그동안 좀 과하긴 했지."

    "아니라고! 나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럼 그 사람들 지금 다 어디 갔는데?"

    "……."

    정해민이 부들부들대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티, 티비에 못 나오니까, 그러니까 잠시……."

    "잠시 더 이쁘고 젊고 귀여운 애들에게로 갈아탔겠지."

    "아, 아니야! 아직 집에 소포도 날아오고!"

    "예전처럼?"

    추욱.

    그녀의 어깨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예전처럼이라니! 그리 잔인한 말을 하다니!

    악마가 따로 없었다.

    "너……."

    "어차피 천년만년 해 먹을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 정도 했으면 된 거야. 이제 국제 택배원으로 새 삶을 살아야지."

    "으으으……."

    정해민이 몸을 떨었다.

    그녀 나름으로도 어느 정도 결심은 하고 있던 일인데, 그걸 이지혁의 입으로 들으니 왜 이리 서럽고 울컥하는가.

    같은 말을 듣는데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는 남자였다.

    "택배 아이돌은 어때? 쩔 거 같은데? 여러분의 택배를 직접 배송해 드리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간만에 터진 고막 폭격기에 이지혁이 기겁을 하며 물러났고, 박선덕과 이예원도 귀를 막으며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리체! 리체에!"

    소리를 듣고 나온 아펠드리체가 한숨을 푹 쉬더니, 사일런스를 걸었다.

    목젖이 보이도록 입을 쩌억 벌린 채 울고 있는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뭔가 이제야 아침 같네."

    상큼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 * *

    "밥이야?"

    끄덕.

    "으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다솜에게서 주먹밥과 보온병에 담긴 국을 받아 든 이지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긴 한데 말이야.

    "너, 아침에 기다리는 거 좀 그만해라."

    "…네?"

    "날씨가 이리 추운데……."

    반쯤 얼어버린 김다솜의 얼굴을 보고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야 날씨가 괜찮았으니까 밖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영하란 말이다.

    능력자도 아닌 어린애가 밖에서 덜덜 떨면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분이 좋다면 그건 미친놈이지.

    아… 나 미친놈 맞지?

    "어차피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그럴 거지?"

    "……."

    "휴……."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앞으로는 그냥 벨 누르고 들어와. 엄마가 열어줄 거야."

    "네?"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기다릴 거니까, 차라리 그냥 들어와서 놀아. 저 꼬맹이 봐. 제집인 줄 알잖아."

    "아니거든?"

    눈이 퉁퉁 부은 정해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머리에 쓴 모자에 달린 방울이 고개의 흔들림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는 게… 퍽이나 귀엽다.

    "알겠어?"

    "…네."

    김다솜이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묘하게 미소가 핀 얼굴을 보니 이지혁의 마음도 편해졌다.

    "쯧."

    관계를 참 많이 만들었구나.

    그래놓고는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지.

    '이번엔 아니야.'

    과거의 관계들에 무심했던 것은 그들이 결국 이지혁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끝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지혁에게 불과 천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란 정을 주고 싶어도 도저히 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존재들에게 정을 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아니다.

    이들은 이제 이지혁의 남은 생을 함께 걸어가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걸 인정하고 나자 조금은 관심이 더 생기는 것 같았다.

    "너도!"

    이지혁이 발을 살짝 구르자 그림자에서 머리가 쏙 튀어나왔다.

    "옷 좀 껴입고 다녀!"

    처음 만났을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은 도가윤의 옷차림을 보며 이지혁이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얘도 참 이상하다.

    집도 없나?

    항상 자신을 밀착 감시한다. 때때로 중간중간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다.

    가족이나 다른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이야 그러다 말겠지 싶어서 무심하게 굴었는데, 조금씩 관심을 가지다 보니 얘야말로 의문투성이의 인간이었다.

    "너, 보호자가 누구야?"

    "…마녀."

    "너… 보호자가 서아영이야?"

    "네."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누굴 보호한다고?

    "너 가족 없어? 엄마, 아빠?"

    "없어요."

    "…법적인 보호자가 서아영이야?"

    "네."

    말세다.

    진짜 말세야.

    보건복지부!

    아, 아니구나.

    여성가족부?

    여하튼 정부 새끼들은 뭐하는가. 그 여자가 어떤 여잔데 보호자야!

    "어쩐지 애가 돌봄을 전혀 못 받았다 싶더라니."

    그 미친 여자가 어린애를 제멋대로 굴려 대고 있었구나.

    이지혁은 자신의 불찰을 깨닫고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무래도 주변 정리를 한 번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출근하자."

    평온하다면 평온한 일상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 *

    이지혁이 평온한 일상을 시작할 때…….

    최정훈은 지옥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까지 했으면 됐지, 또 뭘 지원하라는 겁니까!"

    - 사태가 어찌 흐를지 모르는 일 아니오! 그러니 대기 좀 해달라는 게 그리 힘든 일입니까?

    "이번 사태가 시작된 이후로 우리 대원들은 하루도 못 쉬며 시달리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게이트가 안 열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명색이 국토 방위대인데, 우리 국토는 내버려 두고 미국만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 다 보내 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 안 되면 그 사람만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게 전분데 뭘 그 사람만입니까! 저는 더 할 말 없습니다."

    - 이봐요, 최정훈 씨!

    최정훈은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텀블러에 든 자양강장제를 원샷했다.

    "바빠 죽겠는데."

    이지혁이 특단의 대책을 내린 이후로 좀비 사태는 빠르게 진정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소규모로 조금씩 튀어나오는 좀비들에게 신성력을 끼얹어 버리는 것만으로도 시간당 수천에 가까운 수의 사람들이 정화되어 병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 기세로 정화되어 나간다면 산술적으로는 한 달 내로 모든 일처리가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로아벨이 버티느냐의 문제겠지만."

    일이 단숨에 끝나지 않겠다는 걸 파악한 이후, 철저하게 스케줄을 관리하여 로아벨을 쉬게 하고 있으니 별일이야 없을 것이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호텔로 향하는 로아벨이 자꾸 '죽인다느니', '흑마도사가 어쩌느니', '저주가 어쩌고' 하는, 여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험한 말을 내뱉는다는 보고가 들어오고야 있지만, 그건 최정훈이 알 바 아니고…….

    그리고 다행히도 통역 마법이 걸리지 않은 이들은 로아벨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 괜찮다.

    "입이 험한 엘프라니……."

    소심한 드워프 같은 건가?

    괴리감이 너무 심하잖아, 이거.

    최정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국의 좀비 사태에 끌려가 있는 동안 서류는 산을 쌓았다. 전자 결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임에도 손으로 결제해야 할 문서들이 이만큼이나 쌓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단순히 그 광경을 놀랍게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면 서글픈 일이겠지만.

    "왜 일은 줄어들지 않는가?"

    일이란 왜 늘어나기만 하는 것인가.

    왜 연봉은 천천히 늘어나는데, 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인가.

    "끄응……."

    최정훈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국내의 일들을 처리 못했으니 일이 쌓이는 것은 당연했다.

    이지혁 등이 해외에서 싸돌아다니는 동안이라고 국내에 게이트가 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NDF의 도움 없이 KSF들이 그 일들을 잘 처리해 주었기에 지금까지 문제없이 버텨온 것일 뿐이다.

    "슬슬 과부하인가……."

    이제는 국내에 집중할 때도 되었다.

    잘 버텨냈을 뿐이지 덕분에 KSF도 비번 하나 없이 풀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니, 이러다가는 불만이 폭주하거나 과로로 쓰러지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NDF 대원 하나가 KSF의 일개 대대급의 게이트를 처리할 수 있으니 KSF 입장에서 보면 몇 개 사단급의 공백을 메워온 것이다.

    "일단은 오늘 하루만 어떻게 쉬고……."

    어쨌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뿌듯함에 서아영이 로아벨을 호위할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기고 모두 휴가를 준 관계로 지금 사무실에는 그와 김재범만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휴가가 없나?"

    최정훈이 우는소리를 하자 퀭한 눈의 김재범이 고개를 돌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미안."

    최정훈이 외근을 나와 있는 동안 홀로 NDF를 지키며 각종 업무와 압박과 잔소리에 시달린 김재범이다.

    그의 앞에서 우는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

    "진짜 휴가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

    휴가는 좋은 거지만, 휴가를 다녀온 사이 쌓일 업무를 생각하면… 휴가를 준다고 해도 거절할 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사무실이라도 조용한 게 다행이었다.

    평소처럼 할 짓 없는 능력자 놈들이 어슬렁거리고, 저 구석에서 전기나 파지직거리며 놀고 있으면 신경이 더 쓰일 테니까.

    벌컥!

    그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이지혁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한 손에는 과자를!

    다른 한 손에는 오식이를 집어 든 채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그를 보며 최정훈의 머리가 멍해졌다.

    "오늘 출근 안 해도 되는 날인데요."

    "알아요."

    "그런데 왜 출근을?"

    "…따뜻하고 편하니까?"

    이런 개…….

    꼭 있지!

    꼭 있지, 저런 인간!

    퇴근하고 싶다고 징징대다가 막상 퇴근하면 할 짓 없는 인간이 있지!

    그래서 비번인데도 할 일 없나 싶어서 직장에 기웃대는 이상한 인간이 꼭 하나씩은 있다니까!

    그런데 왜 그게 이지혁이라는 말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라도 자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이지혁이라는 말인가!

    "아, 따뜻하다. 밖에 너무 추워."

    너는 또 왜 왔니?

    편안하게 목도리를 풀고 있는 정해민을 보며 최정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여하튼 쟤는 요즘 무슨 세트 메뉴도 아니고, 이지혁이 가는 데는 항상 있네.

    그리 할 일이 없나?

    아, 없겠지.

    할 일이 있을 리가 없네.

    행사 없는 연예인이 뭘 하겠어.

    어차피 새 앨범 나올 일도 없을 테고, 녹음하거나 안무 연습할 일도 없을 테니 놀아야지.

    최정훈이 시큰해지는 안구를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이곳은 좀 바쁩니다."

    "네, 일하세요."

    니가 있는데 일이 되겠냐?

    이지혁은 최정훈이 은근히 날리는 눈치를 기본 실드로 모조리 튕겨내고는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다.

    하필 그 컴퓨터가 최정훈의 자리에서 훤히 보인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처음에 뭐였더라?

    이지혁이 업무 시간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틈틈이 감시하기 좋은 자리?

    개뿔이!

    입사 첫날부터 게임 깔고 업무 시간에 게임해 대는 인간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차라리 제일 안 보이는 구석으로 보내 버렸어야 하는 건데!

    "아……."

    그래, 맞다. 할 일이 있었다.

    "이지혁 씨, 미국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최정훈 씨."

    "네?"

    "한 번만 더 지원이니 뭐니 하는 소리 씨부리면 그놈의 좀비 새끼들 한 마리씩 잡아서 도시마다 떨어뜨려 버릴 거라고 해요."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죽어도 다시는 지원이니 어쩌니 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다른 지원 요청도 있습니다마는……."

    "다른 지원요?"

    "저번에도 말이 한 번 나왔습니다만, 교육에 관한 것입니다."

    "교육?"

    "네. 미국에서 자국 능력자들에 대한 강화 교육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지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그거, 재미있을까?"

    이지혁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 * *

    "비번은 얼어 죽을!"

    스핏 파이어 윤혁규는 지금 일본에 와 있었다.

    일본에서 레벨 5 게이트가 열린다며 지원을 요청해 왔고, 그 지원에 적절하고 훌륭한 방식으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윤혁규였던 것이다.

    "아, 씨, 옆에 걸 뽑았어야 하는데……."

    제비뽑기.

    능력자들이 뭔가 내기를 한다는 것은 밸런스가 깨지기 일쑤였고, 결국 가장 공정한 제비뽑기로 윤혁규가 당첨이 되었다.

    "텔포라도 해주지!"

    아무리 가까운 일본이라지만 텔레포트라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뭐, 마커가 없어?

    텔레포터가 마커가 없으면 어쩌자는 건데!

    윤혁규가 투덜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저 앞으로 붉게 물든 게이트가 보였다.

    "어떻게 됐어요?"

    통역사가 붙어서 그의 말을 해석해 주기 시작했다.

    이것도 문제다.

    이지혁을 보니 무슨 이상한 기술 걸어서 통역 없어도 말 통하게 해주더니만, 출장 가는 사람한테 그런 거 하나 걸어주면 일하기가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런데 뭐?

    귀찮아?

    망할 놈! 그리 귀찮은데 밥은 어떻게 먹고 사나. 링거 꽂고 누워 살지.

    어휴!

    "곧 열린답니다."

    "이놈의 게이트는 만날 곧 열려."

    "그런데……."

    "네."

    "이지혁 씨는 안 왔냐고 묻는데요?"

    순간, 윤혁규의 이마 위로 핏대가 섰다.

    "아니, 이 새끼들이 뭐만 하면 이지혁, 이지혁. 레벨 5짜리 하나 열린 걸로 뭘 이리 호들갑이야!"

    "레벨 5면 국가비상사태입니다만?"

    "레벨 5에 무슨 국가 비상이에요. 우리 신입들도 그 정도는 이제 혼자 알아서 처리해요."

    "그게 무슨……."

    에휴, 얘들한테 말한다고 알아듣겠나.

    "그러고 보니……."

    예전에 레벨 5짜리 하나 열린다고 나라 망한다 소리 나왔던 게 불과 석 달 전이었나?

    그 석 달 사이에 정말 많은 게 변했구나.

    게이트가 열리고 5년 동안 변한 것보다 이지혁이 등장한 이후 불과 3개월 사이에 변한 것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윤혁규가 한숨을 푹 쉬고는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 그쪽은 위험합니다?"

    "내가요, 아니면 몬스터가요?"

    윤혁규가 고개를 까딱까딱 저으며 진동하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빨리 나와라."

    얼른 처리하고 집에 가서 쉴 거야.

    나도!

    그때,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붉은 게이트가 확 열리면서 그 안으로 이계로 통하는 통로가 보인다.

    "어떤 게 나올까나?"

    윤혁규가 조금은 기대되는 심리를 담아 게이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거?"

    그의 옆에서 게이트를 지켜보던 통역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장이야."

    통역의 입에서 절망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럴 만도 하긴 한데…….'

    이상한 괴리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레벨 5 게이트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몬스터다.

    그런데 왜 이리…….

    왜 이리 친근하게 느껴지지?

    크아아아아아아!

    윤혁규는 게이트 앞에서 울부짖는 오거를 보며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랄까…….

    집에서 키우던 개랑 비슷한 종류의 개가 옆집에서 그를 보고 이를 드러내고 짓는 걸 보는, 그런 느낌?

    "…오식이가 알면 좋아할까?"

    그래도 오식이 친군데, 저거 죽여도 되나?

    살려서 데리고 가면 오식이가 좋아할까?

    윤혁규가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일본의 능력자들과 게이트를 포위하고 있던 자위대가 오거를 향해 화력을 뿜어 대기 시작했다.

    "으음……."

    날아드는 총탄과 포탄, 에테르의 세례에도 꿈쩍 않던 오거가 괴성을 지르며 능력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으음……."

    고민하던 윤혁규가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왜?

    "저, 문제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만……."

    - 뭐?

    이 새끼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도 열 살은 많을 텐데 자꾸 반말이네, 싸가지 없는 놈이.

    윤혁규는 부들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여기 일본에 지원 나왔는데, 게이트에서 오거가 나왔습니다."

    - 그런데?

    "오식이 친군데, 죽여도 됩니까?"

    - 음…….

    살짝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던 이지혁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암컷이야?

    "그야 모르죠."

    동물도 감별 못하는데 오거를 어떻게 감별하겠냐.

    - 그럼 일단 죽이지는 말고, 적당히 때려서 데리고 와봐.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통역이 황당하다는 듯 윤혁규를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미쳤나?

    오거가 뭔지 모르는 건가?

    NDF가 어떤 곳인지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끙, 근데 안 죽이는 게 더 힘든데."

    괜히 전화했나?

    윤혁규는 조금 후회하는 마음으로 오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크륵?

    윤혁규의 존재감을 느꼈는지 자위대를 처날리고 있던 오거가 뒤를 돌아보았다.

    "악감정은 없다."

    오히려 호감이 좀 있지. 몬스터들 중에서는 오거가 제일 친숙하거든.

    "그래도 뭘 어쩌겠냐, 까라면 까야지."

    스핏 파이어의 양손 앞에서 터져 나온 불꽃의 대포가 오거를 휩쓸었다!

    크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짐승의 울부짖음과 살 타는 냄새가 일본의 하늘로 퍼져 나갔다.

    "자자, 반항하면 더 아파요."

    천하의 오거를 애 다루듯이 때려잡고 있는 윤혁규를 보며 통역은 멍하니 뇌까렸다.

    "저 새끼들은 대체 뭐지?"

    NDF의 위상이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 *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감히 윤혁규가 오거와 싸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거.

    5레벨 게이트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몬스터.

    그 등장만으로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았을 만큼 인류가 대면한 가장 끔직한 몬스터가 바로 오거였다.

    이전 원자력 발전소 게이트 사태 때도 이지혁이 등장하기 전에 모두가 절망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의 모든 능력자 전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몬스터가 바로 오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우쭈쭈."

    윤혁규는 그사이 노릇노릇 구워진 오거를 향해 걸어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오거가 겨우 몸에 붙은 불을 끄고는 이를 드러내며 윤혁규를 노려보았다.

    "어쭈?"

    윤혁규가 오거의 반항적인 눈빛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감히 오거 주제에 사람을 보고 눈을 부라린다는 말인가.

    오식이 정도 되는 오거라면 이해한다.

    오식이는 이미 오거라기에는 너무 많이 가버렸으니까.

    이지혁의 마나를 받아들인 오식이는 오거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오거라면 오식이를 만나는 그 순간 3초 만에 전신이 해체되어 죽을 것이다.

    "…나도 말이야."

    윤혁규라 하더라도 오식이와는 견적이 안 나왔다.

    애초에 이지혁에게 종속되기 전에도 가장 강한 개체의 오거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릴라로 치면 실버 백 같은 우두머리 오거가 오식이인 것이다.

    그러니 오식이급의 오거라면 몰라도 보통 일반적인 오거라면 지금 윤혁규의 상대는 아니었다.

    비단 윤혁규뿐 아니라 NDF의 요원이라면 누구나 이제는 오거 하나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러니 NDF 내에서도 최상위급 능력자인 윤혁규라면 오거 정도는…….

    콰앙!

    윤혁규가 뿜어낸 불꽃이 오거 앞에서 터지더니, 그 거대한 동체를 마치 바람에 실린 종잇조각처럼 멀리 날려 버렸다.

    카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흐음……."

    윤혁규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똑같은 불꽃 능력자지만 윤혁규와 서아영은 스타일이 달랐다.

    서아영이 불꽃 그 자체의 열기와 화력으로 공격을 하는 타입이라면, 윤혁규는 불꽃이 터져 나가는 파괴력으로 상대를 폭발시켜 버리는 타입인 것이다.

    그래서 별칭도 스핏 파이어였다.

    "괜찮으려나?"

    윤혁규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거에게 다가갔다.

    웬만하면 생포해 오라는 이지혁의 명령이 있었으니 생포해야 하는데, 살짝 흥이 돋아서 있는 그대로 질러 버렸다.

    그 정도 파괴력이면 웬만한 몬스터는 피 떡이 돼서 원래 형체가 무엇인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크르륵.

    "호오?"

    그러나 익숙한 오거의 그로울링이 들려오자 윤혁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죽지는 않더라도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쌩쌩했다.

    "과연 오거는 오거라는 건가?"

    최상위 몬스터의 위엄이랄까?

    오거의 맷집은 윤혁규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지혁이 이계로 사람을 날려 댔던 관계로 온갖 신기한 몬스터를 다 보았고, 덕분에 오거 정도는 이제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상대는 튼튼했다.

    "이러니 오거지."

    과거의 윤혁규라면 온갖 악을 쓴다고 해도 오거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계에서 생고생을 하면서 화력을 몇 배로 늘릴 수 있었기에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전신의 털이 검게 그을린 오거가 핏발이 잔뜩 선 붉은 눈으로 윤혁규를 노려보았다.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느꼈을 텐데도 꼬리를 내리기보다는 적대감을 품는 것이, 이 몬스터가 얼마나 흉포한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긴장 좀 해야겠는데?'

    윤혁규는 살짝 굳은 얼굴로 비척비척 일어나는 오거를 바라보았다.

    그의 화력은 웬만한 몬스터를 단번에 피 떡으로 만들 수준이지만, 그의 육체는 일반인에 비해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다.

    에테르 덕분에 어느 정도 강화가 되기는 했지만, 늘어난 공격력에 비한다면 방어력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오거가 마음먹고 휘두른 공격이라면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몸이 두 쪽 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크르르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오거가 흉측한 얼굴로 윤혁규를 노려보았다.

    "아직 힘이 남았네?"

    윤혁규가 살짝 허세를 부렸다.

    조금 떨리기는 하지만, 몬스터 앞에서 그런 기색을 보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 정도야 잘 알고 있다.

    "처발라 주지."

    윤혁규의 양손에 붉은 구슬이 만들어졌다.

    화르르륵.

    구슬이 타오르며 붉다 못해 아주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다. 무려 다섯이나 되는, 농구공만 한 공들이 윤혁규의 몸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하아아아!"

    윤혁규의 입에서 낮은 기합 소리가 새어 나오고!

    "먹아랏!"

    다섯 개의 공이 일제히 가공할 속도로 오거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륵?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공들에 실린 힘을 직감한 오거가 몸을 빼려 했지만, 날아드는 속도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콰아아아!

    오거의 육체에 붉게 타오르는 불꽃의 공이 틀어박히며 맹렬하게 회전했다.

    화염의 공이 오거의 육체를 뒤틀고, 태우고, 또 으스러뜨렸다.

    카아아아악!

    고통스러워하는 오거의 비명.

    바닥을 파고들어 간 오거가 전신을 떠는 와중에 화염의 공들이 한곳으로 충돌하더니, 이내 거대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오!"

    윤혁규도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능력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실험할 수 있는 장소가 흔한 게 아니다 보니 대충 이론으로는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활용해 보지 못한 기술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지혁이 밀어 넣었던 이계 생활의 마지막쯤에 구상한 기술이라 실제로는 써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파괴력이 그가 생각한 이상이었다.

    "그런데 너무 센데……."

    윤혁규가 머리를 긁었다.

    "으으음……."

    조심스레 오거가 파묻힌 구덩이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본 윤혁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죽지는 않았으니 뭐, 다행이긴 한데…….

    이걸 죽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거의 새까만 숯이 되어 있는 오거를 보며 윤혁규가 고민에 빠졌다.

    이 정도면 반쯤 죽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완전히 죽인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저게 오거입니까?"

    "아, 네, 뭐……."

    조금 전까지는 확실하게 오거라고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뭐라고 해야 하지?

    레어 오거 구이?

    아니, 미디엄 레어 오거 바비큐?

    "흐으음……."

    작명이 매우 곤란했다.

    "어쨌든 아직 살아는 있으니까 괜찮겠죠."

    인간이라면 즉사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몬스터가 괜히 몬스터가 아닌 것이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아무리 몬스터라도 이 정도면 죽어야 정상이지만, 오거는 워낙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곤란하네, 곤란해. 죽으면 안 되는데……."

    통역은 윤혁규를 바라보며 입을 쩌억 벌렸다.

    대체 이 인간은 뭐하는 인간인가.

    혼자서 저 오거를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때려잡은 것도 놀라운데, 그 와중에도 저 오거를 생포하려 하고 있다는 건가?

    '한국 능력자들은 다 이런 건가?'

    아무리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일본의 능력자들과 차이가 너무 컸다. 일본의 능력자들은 단체로 달려들어도 저 오거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인 것이다.

    "놀랍습니다."

    "…내가 더 놀라워요."

    "네?"

    윤혁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건 윤혁규가 상대가 전화 받기를 기다렸다.

    - 아, 왜!

    "……."

    전화 건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혁규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전화해서 용무를 이야기한 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왜라니…….

    인간아, 그럴 거면 그냥 전화를 받지나 말지, 받기는 꼬박꼬박 받으면서 불만은 왜 이리 많다는 말인가!

    "아니, 그 오거를 잡기는 잡았는데 말입니다."

    - 근데요?

    "오거가 반쯤 탔는데, 괜찮을까요?"

    - 타요?

    "네. 화력 조절 실패해서 거의 미디엄 레어가 되어버렸는데, 이거 살릴 수 있나요?

    - 하…….

    수회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한숨에 윤혁규는 마주 한숨을 쉬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그냥 대충 처리하고 가면 될 일을 굳이 물어가며 처리하려 한 그의 잘못이지.

    그냥 모르게 슥삭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괜히 물어봐서는.

    '오식이가 좋아할까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오식이는 알지도 못하는 일 때문에 이지혁의 눈치를 보자니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 아니,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해 가지고는!

    그럴 줄 알았다.

    전화기에서 터져 나오는 버럭질에 윤혁규는 전화기를 멀리 떼었다.

    저 멀리 전화기에서 뭔가 떽떽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윤혁규는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전화에서 나오는 소리를 무시했다.

    어차피 들어봐야 좋은 소리도 아니고, 듣는다고 뭐가 나아지지도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잔소리일 뿐이었다.

    "다 끝난 일 가지고 잔소리는."

    - 뭐?

    "아, 아닙니다."

    귀신같은 새끼, 그걸 또 들었냐?

    - 내가 뭘 들은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 얻다 대고 큰 소리야!

    "에이, 진짜!"

    윤혁규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지가 아무리 귀신이라도 침 뱉는 소리까지야 듣겠냐고.

    계속 뭐라 뭐라 씨부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혁규는 전화기를 멀리 떼고는 인상을 썼다.

    - 어이.

    "네?"

    - 지금 영 각이 안 사는 거 같은데, 한국 와서 따로 한 번 보자.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경청하고 있습니다!"

    - 아닌 거 같은데?

    "정말입니다."

    이지혁과 독대라니!

    차라리 염라대왕과 독대를 하고 말지, 그 미친 짓을 왜 해야 한단 말인가.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은 하기 싫었다.

    - 그래서… 뭐가 문젠데?

    "얘 좀 심각한거 같은데, 정해민 씨 좀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 왜?

    "이거 비행기나 배로 실어 가다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어떡합니까? 난리 날 텐데요. 죽여서 데리고 가는 거면 문제도 아니지만, 살린 채로 데려 가려면 그런 것도 고려해야죠."

    - 별게 다 걱정이네. 설치면 다시 때려잡으면 그만이지.

    야, 이 미친놈아.

    누가 그걸 모르냐?

    얘를 때려잡다가는 비행기가 먼저 때려잡히니까 그런 거지! 배도 마찬가지고! 그런 생각도 못하냐? 그런 생각도?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습니까."

    - 아, 그럼 그냥 죽여.

    "네?"

    - 귀찮게 진짜.

    "…아니, 텔레포터 하나 보내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구요."

    - 마커가 없잖아.

    "아……."

    깜빡했다.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 기다려 봐. 정 대령님한테 이야기해서 헬기 한 대 차출해 볼 테니까. 잘 묶어서 대롱대롱 매달아서 와.

    "헐……."

    영화에서나 본, 그런 장면을 직접 연출한다는 말인가?

    "그러다 깨어나면요?"

    - 줄 끊어서 태평양 한중간에다 버려."

    "…네."

    굉장히 명확하기는 한데, 뭔가 이 찝찝한 기분은 뭐란 말인가.

    - 그럼 알아서 잘 데리고 와라.

    뚝.

    전화가 끊기자 윤혁규는 매우 찝찝한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보다가 역정을 냈다.

    "아, 수틀리면 버리고 오라더니… 잘 데리고 오라는 뭐야, 진짜! 아오, 내가 속이 터져서 진짜!"

    전화기를 던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윤혁규를 보며 통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인간도 심상치 않은데 말 몇 마디로 저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저 이지혁이라는 존재는 대체 어떤 인간이란 말인가.

    한국이라는 나라가 오늘따라 더없이 멀게 느껴지는 그였다.

    * * *

    "못해 먹겠네 진짜."

    윤혁규가 괜스레 돌부리에 화풀이를 하는 동안, 통역은 미묘하게 꿈틀대고 있는 오거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저 최강의 생물이 저 꼴이 되어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아는 오거라는 생명체는 저리 간단히 잡혀서는 안 되는 몬스터였다.

    "정말 저걸 옮겨 가시려구요?"

    안전핀 뺀 수류탄을 손에 쥐고 현해탄을 건너는 게 차라리 속이 더 편할 텐데 말이다.

    오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넌다니, 멀쩡한 정신이 박힌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다.

    "까라면 까야죠."

    문제는 그 깔 거리를 준 사람이 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슥삭하고 갔으면 될 일을 말이다.

    "에휴……."

    제 무덤을 파고 들어간 윤혁규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담배 땡기네."

    끊은 담배가 절로 생각나는 윤혁규였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그 이지혁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지혁이요?"

    윤혁규는 피식 웃고는 말았다.

    아, 아직 이지혁이 어떤 놈인지 묻는 사람도 있구나.

    웬만한 나라라면 이지혁에 대한 정보는 기본으로 얻고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니, 급이 낮은 사람이라 이지혁에 대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는 건가?

    아무러면 어떤가.

    "그냥 지랄 맞은 인간이에요."

    "…네?"

    뭔 소린가, 이게?

    "뭐, 이런저런 말로 설명해 봐야 어차피 말로 하는 설명이 실제를 반도 못 따라가니까 의미가 없고, 그냥 한마디로 지랄 맞은 인간이에요. 사람을 어떻게 괴롭혀야 하는지 항상 고민하는 것 같은 인간이죠. 이상한 부분에서 성실하다니까. 빌어먹을."

    "그렇군요."

    "어휴……."

    윤혁규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거에게 주춤주춤 걸어갔다.

    "쇠사슬 좀 준비해 주세요."

    "쇠사슬이요? 뭐 하시게요?"

    "묶어야죠, 도망 못 가게."

    통역이 조금은 멍한 눈으로 윤혁규를 바라보았다.

    무시무시한 인간이라도 생각했는데, 허당 기가 있는 모양이다.

    "쇠사슬로 오거를 묶겠다구요?"

    "네. 뭐가 잘못됐나요?"

    "…제 귀에는 그게 사람을 종이로 묶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좀 약한가?"

    윤혁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대체 뭘로 묶어 가야 하지?

    "적당한 게 어디 없을까요?"

    "말해보겠습니다. 아마 몬스터 포획용으로 준비된 특수 로프가 있을 겁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윤혁규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아직 꿈틀대고 있는 오크를 보며 그 자리에 앉았다.

    로프가 오면 묶어놓고 헬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속이 영 답답하네.

    "근데 아저씨."

    "네?"

    "혹시 담배 있어요?"

    윤혁규는 결국 금연을 포기했다.

    * * *

    "…야."

    "네?"

    이지혁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그 사실을 알아챈 윤혁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오거야?"

    "네. 뭐가 잘못됐습니까?"

    "잘못된 거야 없지.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라니!

    너랑 나랑 나이 차가 얼마나 난다고 아저씨야, 아저씨는!

    "오식이 친구나 여자 친구 만들어준다고, 생포해서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었어요?"

    "그랬죠."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자구요! 입장 바꿔서!"

    이지혁이 입으로 불을 뿜었다.

    "당신 같으면 소개팅 해준다고 한 애가 홀랑 타서 숯 덩어리가 되어 오면 어떤 기분일 거 같은데?"

    더럽겠지.

    아니, 걱정부터 되야 하는 건가?

    이거, 미묘한데?

    "애가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꼴로 데리고 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나름 최선을 다했습니다만은?"

    "열심히 할 필요 없으니까 잘하라니까!"

    "…죄송합니다."

    이지혁이 도끼눈을 뜬 채로 말했다.

    "오식이가 오무룩했잖아요! 이제 어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앉아 있는 오식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동족이 저 꼴로 나타났으니, 기분이 이상할 만도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이지만, 지금은 할 말이 그게 다였다.

    "원래는 이뻤을 거 같은데… 쯧쯧."

    이뻐?

    오거가?

    뭔 개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쟤들도 나름 이쁘고 못생기고가 있나?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치료할 수는 없나요?"

    "으음……."

    이지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종속의 인을 찍으면 치료할 수는 있다.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마나를 대량으로 퍼부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마나는 아깝지만, 오식이가 시무룩해 있는 걸 보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너, 말 잘 들어야 한다?"

    컹.

    오식이가 짧고 굵게 대답을 한다.

    "그래도 동족이라고 살리고는 싶은 모양이지. 쯧쯧."

    이지혁이 꼬리를 살랑대는 오식이를 보며 혀를 찼다.

    하기야 이지혁은 이 세계에 동족들이 넘치지만 오식이는 혼자 넘어와서 인간들이랑 어울려 살고 있는 건데, 얼마나 외로울까.

    몬스터에게 인간과 같은 외로움이란 감정이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고, 호랑이와 비슷한 행태로 살아가는 오거가 동족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지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오식이가 오거인지도 이제는 헷갈리니까.'

    저게 무슨 오거인가.

    개지.

    하는 짓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개다. 그러니 생각하는 것도 개 같겠지.

    응?

    욕 아니라고.

    개 같다는 거라니까.

    "흠……."

    이지혁이 오거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평소라면 멀리서 그냥 인을 날리는 것만으로 종속시킬 수 있겠지만, 살아 있는 게 신기한 지경이다 보니 나름 신경을 써야 했다.

    아니면 인이 찍히는 충격으로 당장 쇼크사할 수도 있었다.

    이지혁이 조심스럽게 인을 찍고는 마나를 불어넣었다.

    크르륵.

    오거 특유의 낮은 그로울링이 울린다.

    아직은 힘이 없지만, 그나마 신음이라도 내게 될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오?"

    윤혁규가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눈으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오거의 육체가 회복되고 있었다.

    숯처럼 검게 물들었던 육체가 다시 불그스름한 빛을 되찾아가고, 그을려 모두 타버린 털이 다시금 자라나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전투 중에 잘린 오식이의 팔이 재생된다거나 뻥 뚫려 버린 배가 다시 차오른다거나 하는 광경은 본 적 있지만,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볼 수 없던데다가 지금의 광경처럼 신기하지는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원리지?'

    타버린 육체가 재생되는 걸 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게 인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어느새 오거의 육체가 처음 봤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오……."

    윤혁규가 신기하다는 듯이 다시금 탄성을 지르자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죄송합니다."

    시무룩해진 윤혁규가 한쪽으로 짜지자 이지혁이 오거의 몸에 마지막 마나를 불어넣고는 어깨를 쫙 폈다.

    마나가 빠져나가는 기분은 언제나 좋지 않았다. 그게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일어나 봐!"

    이지혁이 오거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찼다.

    크륵?

    자신의 몸이 회복된 것을 느낀 오거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지혁을 물어뜯으려던 오거의 입이 어깨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이게 뒈질라고!"

    퍼억!

    분명 멈추었건만, 이지혁의 응징은 그러한 점을 전혀 고려해 주지 않았다.

    "오거라는 새끼들은 하는 짓이 왜 이렇게 하나같이 똑같냐!"

    이지혁의 일갈에 구석에 있던 오식이가 움찔했다.

    그러고 보면 오식이도 똑같은 일을 벌였다가 뒈지게 처맞았지.

    "맞아야지! 개랑 오거는 삼 일에 한 번 처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이지혁의 발길질이 오거에게 틀어박혔다.

    종속의 인이 작용한 오거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몸을 둥글게 만 채 이지혁의 발길질을 감내했다.

    커엉!

    그 순간, 오식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이지혁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강아지의 형상을 한 주제에 무는 것도 아니고, 그 짧은 다리로 발을 잡고 늘어지는 꼴이 꽤 귀여웠다.

    "왜! 때리지 말라고?"

    끼잉.

    "어휴."

    그래, 동족이 처맞는 걸 좋아할 오거가 어디 있겠는가.

    이지혁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진 오식이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마, 그래도 동족보다는 주인을 우선시해야지!"

    커엉! 커엉!

    "…승질은."

    이지혁이 별말 없이 오식이를 오거에게 살포시 던져 주었다.

    이제 지지든 볶든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끼잉.

    오식이가 오거의 뒷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오거는 공포에 완전 질려 있었다. 종속의 인이라는 것은 인이 찍힌 자의 정신마저 완벽하게 지배한다.

    주인에게 대들었다는 것을 인식한 오거의 정신이 극한까지 몰렸다. 오식이쯤이나 되니까 그 공포에 저항한 것이지, 일반적인 오거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겁에 질린 오거가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돌려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크륵?

    이내 오거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분명 동족의 냄새가 났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한입에 꿀꺽 해도 좋을 만큼 작은 강아지이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르륵?

    아니, 그냥 동족도 아니었다.

    냄새 자체는 동족 중에서도 강력한 수컷의 향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 후각으로 느끼는 것 사이의 괴리에 오거가 당황하고 있을 때, 오식이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오거의 머리를 그 짧은 발로 쓰다듬었다.

    '저 시키 하는 짓거리 보소?'

    이지혁이 오식이의 능수능란한 작업질을 보며 혀를 찼다.

    워낙 덩치가 귀욤귀욤해져서 모양이 안 날 뿐이지, 하는 짓거리는 완전히 카사노바였다.

    하기야 붉은 털의 오거는 수컷 오거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우월한 오거가 아니던가.

    사람으로 치자면 집안 좋은 꽃미남 백만장자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여러 암컷 오거 울렸겠지.

    "나쁜 새끼."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이지혁이 오식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수도 없이 암컷을 건드렸을 놈을 위로해 주겠답시고 일본에서부터 오거를 공수해 온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말인가!

    크르륵?

    오거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인간보다 감정을 표현하기 힘든 오거의 얼굴 근육으로 잘도 혼란스러움을 표현해 내고 있었다.

    커엉! 커엉!

    오식이가 뭔가 짖어 대며 오거의 털을 골라주자,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오거가 오식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 오식아!"

    진정해라, 오식아. 그거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겉모습이 저런데!

    오거가 그 제반 사항을 모두 이해할 리가 있나!

    카아아아아!

    뻐엉!

    오거의 뒷발에 걷어차인 오식이가 밤하늘의 별이 될 기세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깨개애애애애앵!

    오식이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럼 그렇지."

    이지혁이 혀를 찼다.

    작업도 멀쩡한 상태로 해야 먹히는 거지, 어디 저 꼴로 작업질을 한단 말인가.

    눈물을 줄줄 뿜으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오식이를 보며 이지혁은 개운한 얼굴로 낄낄 웃었다.

    잘되라고 데리고 왔다.

    그래도 막상 잘되가는 걸 보면 배가 아픈 게 사람의 심정 아니던가.

    "나도 아직 없는데!"

    솔로 부대의 처절한 질투를 뿜으며 이지혁이 일갈하자 영문을 모르는 오거가 두려운 눈으로 꼬리를 말았다.

    옆에서 그 꼴을 모두 지켜본 윤혁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못됐다.'

    인성 보소.

    어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윤혁규의 등 뒤로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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