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3화 (33/118)
  • [■] 하지만 그것으로 좋은 걸까? [■]

    ─────

    "그래서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새하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노인이 가만히 눈앞의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황금이 흘러내릴 듯 찬란한 머리.

    그리고 그 아래로 보이는, 심혼을 앗아갈 듯한 눈빛과 빨려 들어갈 듯한 황금의 눈동자.

    베일 듯 솟아 있는 코와 어울리지 않는 듯 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붉은 입술.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피부.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압도적인 미모의 여인.

    '인간이 아니니까.'

    노인은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는 있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정체는 드래곤.

    환상이라고 여겨오던 전설상의 생물인 것이다.

    물론 그 실체를 그들이 파악한 적은 없지만, 그녀가 보여준 것과 그동안의 행보를 감안하면 적어도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인정과 준비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펠드리체는 오만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지능이 떨어지는 생물과 대화하는 것은 힘든 일이군."

    "죄송한 일이군요."

    무척이나 무례한 말이지만, 노인은 딱히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지금 강아지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기분일 테니까.

    그 시도에 찬사를 보내야 할 일이지, 강아지 주제에 기분 나빠 할 일은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뭔가 뱃속이 끓어오르는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다, 인간이여. 지금 이 세계는 타 차원으로부터 침공을 받고 있다. 침공을 하는 차원은 여러 곳이고, 대처해야 할 방향도 여러 곳이겠지.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게이트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당신 말대로 저열한 제 머리로는 해석의 한계가 있으니, 조금 더 쉽게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적 생명체가 넘어온다."

    "……."

    노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지금 당장은 몬스터와 싸우고 있다.

    쳐들어오면 물리친다.

    그 아주 간단한 명제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지적 생명체가 넘어온다고?

    "대화가 가능한 수준입니까?"

    "이곳의 인간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수준이지."

    "으음……."

    노인이 침음성을 삼켰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분명 난리가 나겠지.

    인류가 그리도 규명하려 애쓰던 외계인의 존재가 순간적으로 확인되어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모든 차원을 관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다른 곳의 인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있는 곳의 지적 생명체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겠지만."

    "그거라도 알 수 있겠습니까?"

    "생존."

    "……."

    "살아남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툭, 던지기는 했지만, 그 말이 가지는 알 수 없는 무게감에 노인은 전율했다.

    그리고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떠올리고는 또 한 번 전율했다.

    정복이라거나 강탈을 위해서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다면 상황이 여의치 않을 시에는 물러날 것이며, 피해를 입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목적이 생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만큼이나 절박할 것이고,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다는 심정이라면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싸울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흐음……."

    노인은 눈앞의 드래곤이 해준 말의 무게감을 실감했다.

    "그래서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준비."

    "어떠한 것을?"

    "그건 너희가 정하는 것이다, 인간이여. 그 머리를 굴려 해답을 찾아내어라.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지, 아니면 끝까지 싸워 둘 중 하나가 남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제삼의 방법을 찾아낼 것인지 말이다."

    "어려운 일이군요."

    "나는 전달자이지, 조언자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이니, 앞으로의 일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

    "감사하다고 해야겠군요."

    아펠드리체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의 감사는 내게 의미가 되지 못한다."

    "……."

    그제야 노인은 지금 이 여자가 그에게 꽤나 예의를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만남부터 대놓고 무시를 하고 사람을 내리깔아 보는 기분이 들어 오만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닌 것이다.

    이 존재의 눈에 인간이란 그저 지나가는 개미와도 다름이 없었다.

    그 개미를 존중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오만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인간이 이 존재를 오만하다고 느끼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주제를 모르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

    역사상 최초로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를 대면하게 된 노인은 자신의 포지션을 어찌 잡아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당신처럼 위대한 분이 왜 이지혁과 같은 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까? 당신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더없이 한심한 존재가 아닙니까?"

    "한심?"

    "네. 제가……."

    그 순간, 노신사의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충류의 입이 그의 몸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과 같은 환상이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새겨졌다가 사라졌다.

    "허억!"

    사내가 깜짝 놀라 바닥에 손을 짚었다.

    "허억, 허억……."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손발이 제멋대로 덜덜 떨리고, 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는 실감했다.

    방금 그는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결코 살아서는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인간이여……."

    아펠드리체의 싸늘한 목소리가 노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무언가로 뇌를 직접 후벼 파는 듯한 충격이 그를 고통스레 전율하게 만들었다.

    "오만한 인간이여, 도를 넘는구나."

    "요, 용서를……."

    "너희 인간들은 정해놓은 선을 언제나 넘으려 들지. 인간이란 종족이 그러한 바, 너의 잘못은 아니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여, 오만한 인간이여, 너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제, 제발!"

    "그는 감히 너 같은 인간이 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그 두 발로 걸어서 올라간 자, 한 차원의 모든 존재가 경배한 자. 저 위대한 신들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경의를 보이노라. 그런데 감히 너 같은 저열한 존재가 그를 입에 담는다고?"

    노인은 아펠드리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위의 존재.

    손짓 하나로 그를 지워 버릴 수 있을 만큼 까마득한 존재가 지금 그에게 순수한 분노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노인의 눈에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영혼이 두려워 떨고 있었다.

    "용서를!"

    아펠드리체는 가만히 노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지가 죄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무지로 인해 벌인 죄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이곳에서는 과거의 그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멸망의 좌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아닌 채로 그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기에, 이제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고, 배알이 뒤틀리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의 의지니까.

    '하지만…….'

    아펠드리체는 그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존재의 격은 어떻게 인정 받는가로 달라진다.

    심지어 미생물격의 존재라 하더라도 상위의 존재가 아낀다면 그 미생물은 더 이상 미생물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저열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지혁이 관계를 맺고 그들을 아낀다면, 아펠드리체도 그들을 그저 인간으로 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좋은 걸까?"

    "무슨 말씀이신지?"

    "혼잣말이다."

    "…예."

    노인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눈치를 살폈다.

    인간이 아닌 존재다 보니 그의 해석이 모두 맞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그녀가 매우 불편해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노인의 예상대로 아펠드리체는 심기가 편치는 않았다.

    스스로 낮은 곳을 자처하는 것이야 자신의 마음이지만, 그 낮은 곳을 자처하는 이의 격이 너무도 드높은 것이 문제였다.

    베라프에서라면 모든 생물의 지배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드래곤 로드인 그녀조차도 감히 이지혁을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강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베라프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였던 그가 끊임없이 기어오르고 기어올라 마침내 그 정점에 섰다는 것이 그의 위대함의 근원이었다.

    그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근성은 신들마저 그를 인정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 이가…….

    아펠드리체의 눈에 박선덕에게 등짝을 맞고, 정해민에게 구박당하는 이지혁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게 좋은 걸까?'

    그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원한다는 것이니, 아펠드리체는 그저 그가 힘들지 않도록 도우면 되는 것이다.

    "가봐야겠군."

    "예."

    "나는 알릴 것을 알렸다. 이후의 대처는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아펠드리체는 싸늘한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고는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졌다.

    "후우……."

    조금 전까지 아펠드리체가 자리하던, 비어버린 공간을 보며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이 줄어들겠어."

    아니, 이미 줄었겠지.

    조금 전까지 덜덜 떨던 노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유와 강직함이 함께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그곳에 존재했다.

    "국방부 장관부터 호출해."

    "예."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노인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지적 생명체라……."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외벽 앞에 걸려 있는 성조기가 그의 시선을 가득 채웠다.

    * * *

    "그러니까……."

    이지혁은 말 그대로 똥 씹은 얼굴로 테이블에 놓인 피자를 바라보았다.

    "이걸 먹는다는 건가?"

    테마파크를 상징하는 쥐의 얼굴 모양으로 구워진 피자를 보며 이지혁은 진저리를 쳤다.

    "왜? 귀엽잖아?"

    정해민에 말에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귀여워?

    "하기야 닭 캐릭터가 닭 먹으라고 닭다리 들고 포즈 취하는 걸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들인데, 쥐 얼굴 정도야 웃으면서 뜯어 먹을 수 있는 거겠지."

    "…응?"

    "소고기 집에는 소 캐릭터가 맛있게 먹으라고 꼬리 치고, 닭 파는 집에서는 닭 캐릭터가 닭다리 들고 있잖아."

    "응."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거 엄청 섬뜩한 것 아닌가? '나를, 혹은 내 동족이 맛있으니까 어서 드세요'라는 거 아냐. 그거?"

    "……."

    정해민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으으, 너… 발상이 이상해."

    "너희가 더 이상해!"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래서 여하튼 이걸 먹는다는 거로군, 이걸."

    이지혁은 각종 캐릭터의 형상을 띤 빵과 피자, 파이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어."

    내 머리가 이상한 건가?

    '이 캐릭터가 너무 이쁘니 그 모양으로 만들어서 뜯어 먹어야지'라는 발상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지혁이었다.

    "야, 밥맛 떨어져! 하지 마!"

    정해민의 반항에 이지혁이 입을 닫았다.

    뭐, 밥 앞에다 두고 투정 부리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시끄러워!"

    "끙……."

    이지혁의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뭔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저 인간이 입을 열기 전만 해도 무척이나 즐거운 식사 자리였는데, 저 인간이 입을 열자마자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응?"

    정해민의 말에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 * *

    "분위기?"

    분위기가 뭐 어쨌단 말인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놀이공원 분위기란 건 원래 다 이렇지 않은가?

    원래 다들 뭐, 시끌시끌하고 북적북적한 거지.

    "원래 이런 거 아냐?"

    "으음……."

    대중의 기색을 파악하는 것에 민감한 정해민이라 그런지, 지금 사람들의 모습에 뭔가 긴장이 어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서 물어보면 되지, 무슨 일이냐고?"

    "으응?"

    이지혁의 말에 정해민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당연한 것을 몰라서 안 하겠는가.

    "…괜찮겠지 뭐."

    "물어보라니까."

    "아니,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그냥 괜찮네!"

    "응?"

    미묘한 정해민의 기색을 읽은 이지혁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너, 영어 못해서 그러는 거지?"

    "…아니거든!"

    정해민이 빨개진 얼굴로 정색했다.

    "아니거든? 나 완전 잘하거든?"

    "그럼 해봐."

    "너 앞에서 한다고 니가 알아듣겠어? 내가 너 자존심 상하지 말라고 일부러 안 해주는 거니까 고맙게 알아!"

    "눼눼."

    "지, 진짜거든!"

    이지혁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했다.

    "됐다, 됐어. 꼬맹이가 영어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얼른 자라서 영어나 배워라. 다른 애들도 있으니 물어보면 그만이지. 야, 너희 중에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가서……."

    말과 동시에 김다솜이 저 먼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도가윤은 스르르 이지혁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덥썩.

    그림자 속으로 반쯤 파고든 도가윤을 잡아 꺼낸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주제에 밥은 어떻게 사 왔냐?"

    "내가 영어로 사 왔다니까?"

    "…진짜?"

    "응!"

    도가윤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디스. 디스. 디스. 하우 머치."

    "……."

    "……."

    도가윤은 멈추지 않았다.

    "바디랭귀지 유용. 배워야 할 필요 있음."

    "하……."

    이지혁이 이마를 짚었다.

    나름 한국에서는 톱 아이돌인데, 그런 애가 음식을 가리키며 바디랭귀지해 댔을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쯧."

    "왜! 왜! 말만 통하면 되지! 너 몰라서 그렇지, 원래 영어 잘하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의사소통하거든!"

    "뭐?"

    몰라? 모른다고?

    야, 이 기집애야! 이 오래비가 바디랭귀지 마스터다!

    여긴 그나마 언어 체계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교육이라도 받지. 말 한마디 안 통하는 베라프에 떨어져서 몸짓 하나로 대화를 이어갔던 게 나라고!

    니가 '지금 화장실이 매우 급한데 이 근처에 내가 쓸 만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세요'를 바디랭귀지로 할 수 있겠냐! 이 몸은 해냈다고!

    하…….

    그때를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얼어 죽을 베라프 놈들!

    그 순간, 김다솜이 기습 공격을 펼쳤다.

    "여기."

    "응?"

    김다솜이 피자의 귀 부분을 떼어내 포크로 집더니 이지혁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먹으라고?"

    끄덕.

    이지혁은 김다솜이 주는 피자를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

    그 광경을 본 정해민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다솜은 이지혁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번에는 재빨리 콜라를 들어 이지혁의 입에 들이댔다.

    쪼옥.

    그 빨아먹는 모습도 왜 열불이 나는 것일까!

    정해민은 부들부들하며 그 광경을 보다가 눈앞에 있는 머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불쑥.

    그때 다시 이지혁의 입 앞에 숟가락으로 가득 뜬 푸딩이 내밀어졌다.

    "움……."

    이지혁은 생각 없이 그 푸딩을 받아먹었다.

    도가윤은 가만히 이지혁이 씹는 모습을 보다가 기계적으로 이지혁의 입에 푸딩을 밀어 넣었다.

    "으음……."

    이지혁이 받아먹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이게 무슨 일이지?

    뭔가 입으로 뭐가 계속 들어오는 느낌인데…….

    예전에는 워낙 귀찮아 마족들이 주는 음식을 누워서 받아먹은적도 많다 보니 습관적으로 주는 걸 먹고야 말았다.

    그런데…….

    아니, 잠시만.

    얘들아, 좀 빠른 것 같은데…….

    "으!"

    정해민이 벌떡 일어나 이지혁의 입에 머핀을 밀어 넣었다.

    "읍읍!"

    이건 이미 먹여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도가윤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빈틈을 찾아내고는 푸딩을 이지혁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입이 살짝 열리는 틈을 놓치지 않는, 도가윤스러운 공격이었다.

    "……."

    김다솜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싶더니, 피자가 입 앞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어드이 이어아!"

    필사적으로 소리를 쳤지만, 음성은 말이 되지 못하고 그저 울림이 될 뿐이었다.

    "목말라?"

    콜라를 든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정해민을 보고 이지혁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목마르지? 목마를 거 같은데?"

    저 콜라 세 개가 동시에 들어오면 대형 참사가 일어난다.

    이지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잉엉애."

    '진정해'가 이리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나?

    그건 그렇고,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암살인가? 암살이야?

    먹을 걸로 질식시켜 죽일 셈인가?

    사주한 자는 서아영인가?

    "내가 주면 되니까 니들은 내려놔."

    "거부."

    "제가 줄게요."

    이젠 이지혁에게는 눈도 주지 않고 세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이지혁은 입안 가득 들어차 있는 음식들을 분쇄절삭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워낙 여러 가지가 많이 들어와 있다 보니 맛도 모르겠다.

    아니, 이 정도로 섞이면 그냥 개밥 수준 아닌가?

    이지혁이 치욕스러움에 부르르 떠는 동안에도 세 여자는 신경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과격하게 넣어 대면 어떻게 하니? 애가 힘들어하잖아."

    "제가 먼저 주고 있었어요."

    "푸딩. 촉촉함. 머핀. 퍽퍽함."

    정해민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할 기집애들,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는!

    "그런데……."

    "넌 조용히 해봐."

    "끼어들지 말 것."

    "우리가 할 말이 있어요."

    세 곳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왔지만, 이지혁은 꿋꿋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조용하라니까?"

    "저쪽으로."

    "오빠, 잠시만요."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아니, 지금 분위기 안 보여?"

    분위기?

    이지혁의 말을 들은 세 여자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주변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 어디 갔대?"

    "흠, 확인해 봐야겠네."

    이지혁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묘한 셋의 시선을 받으며 이지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 하……."

    "뭐?"

    정해민의 뚱한 발언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이지혁이 소리쳤다.

    "나와봐요!"

    반응이 또 없었다.

    "얼른 나오라고! 다 엎어버릴 거야!"

    그제야 저 멀리서 검은 슈트를 입은 백인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허억, 허억……."

    전력으로 질주하여 이지혁 앞에 도착한 남자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쯧쯧."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아니, 무슨 비밀 요원이 그래? 주변에 잘 숨어 있다가 손가락 튕기면 짜잔,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니에요?"

    "…영화를 너무 보셨네요."

    숨을 데가 어딨나, 숨을 데가!

    사람을 무슨 닌자로 아나?

    이지혁이 그 말을 듣고는 도가윤을 바라보았다.

    도가윤이 이지혁의 말을 알아듣고는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이 정도는 해야지!"

    다시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도가윤을 보며 사내는 눈을 크게 떴다.

    동양에는 진짜 닌자가 있구나!

    "저희는 그런 것 못합니다."

    "무능력한 것들, 에잉!"

    이지혁의 비난에 사내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른 놈들이 이런 말을 한다면 단숨에 그 주둥아리를 으깨놓겠지만, 이지혁은 이런 말이 아니라 백악관에서 팬티만 입고 깽판을 쳐도 어찌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물어야죠. 무슨 일이에요?"

    이지혁이 사내를 보며 물었다.

    미국 측이 멍청이들의 집합소가 아니라면 자신이 도착한 그 순간에 파악을 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이미 감시가 붙었을 거라는 예상이 맞았다.

    언뜻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지혁은 딱히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중요도가 높아지다 보면 감시는 필연적이다.

    예전 베라프에서는 그에게 붙은 정찰병만 만 단위였으니까.

    '그건 이미 정찰병이 아니지만.'

    대충 주변을 넓게 둘러싸 놓고 어느 쪽이 먼저 죽느냐로 진행 방향을 예측하는 수준이니, 정찰병이라기보다는 고기 방패, 아니, 고기 신호병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음……."

    사내가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이 터지긴 했습니다만, 아직 저희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파악할 테니, 말이라도 일단 해봐요."

    "사실은……."

    사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 * *

    "호호호호, 날이 참 좋네요."

    어머니, 지금 12월입니다.

    사실 놀이공원에서 놀기에는 날씨가 영 좋지 않죠.

    비시즌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서 그렇지, 지금도 사람이 적은 축이란 말입니다.

    날씨가 좋다니요.

    할 말은 참 많지만, 최정훈은 감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중년의 여성이 누구인가.

    무려 이지혁의 어머니다.

    인류 최강자이자 인류 최악의 악몽인 이지혁을 낳은 사람.

    그것 하나만으로 충격과 공포인데, 이 아주머니는 무려 이지혁을 뚜드려 까는 존재다.

    최정훈이 직접 본 것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정도.

    남들은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는 이지혁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등짝에 스파이크를 날리는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

    나중에는 발로 차고 쓰러진 이지혁의 등에 쌍스파이크를 날려 대기도 했다.

    '따져 보면 진짜 인류 최강은 이쪽이 아닌가!'

    그런 사람에게 감히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정훈이 이지혁의 아버지라 해도 자식을 그렇게 팰 수는 없을 터인데, 아무 거리낌 없이 개 잡듯이 잡아대는 것을 보면… 이 아주머니도 보통은 아니었다.

    물론 맞을 짓을 하기는 했지만…….

    아니, 맞아 죽을 짓을 수시로 해 대기는 하지만…….

    "예원아, 안 그러니?"

    "예."

    최정훈의 고개가 그의 옆에 있는 이예원에게로 향했다.

    '수수하네.'

    주변이 항상 화려한 미녀들로만 가득가득 차 있어서 그런가,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이예원의 모습이 색다르게만 보인다.

    게다가 그 이지혁의 동생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애가 차분하고 조용하다.

    '귀엽군.'

    이만한 나이의 동생이 있었다면 정말 귀여워 해줬을 텐데.

    저런 가정환경에서도 이렇게 참하게 자라주다니, 참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 환경에서 잘도……."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정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머니가 박선덕이고, 윗형제가 이지혁이라면, 간디를 던져 놔도 파괴신이 탄생하고 말리라.

    보고 배우고 자라는 것이 그런 것인데, 멀쩡한 인간이 나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천성이 조용한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예원은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최정훈이 흐뭇하게 이예원을 바라보고 있자 갑자기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요?"

    "응?"

    서아영이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자꾸 범죄자의 눈을 하고는 애를 보고 있어요?"

    "범죄자의 눈이라니!"

    나는! 그저 순수한 호의로!

    그냥 본 것뿐인데!

    "철컹철컹!"

    "아, 아닙니다, 진짜."

    최정훈이 당황하여 변명을 하려 할 때, 저 멀리서 북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최정훈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 * *

    "뭐지?"

    최정훈이 저기 앞을 바라보자 서아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어디, 말을 돌리려고!"

    "아, 아닙니다."

    최정훈이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페도! 로리!"

    "아니라고오오오오오!"

    난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난 그저 저런 가정환경에서도 조신하게 자라준 저 아이가 너무 대견했단 말이야!

    "나이 차가 띠 동갑이 넘는데! 범죄자!"

    "그런 눈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몰아가지 마시죠!"

    "흥, 눈이 음흉했는데!"

    "아니라고!"

    눈이 음흉하다니!

    내가 눈이 느끼하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

    "꿈도 꾸지 말아요. 어디 애를 두고!"

    "아니, 아니라니까요!"

    그때, 이예원이 입을 열었다.

    "뭐, 안 될 이유 없는 거 아닌가요?"

    "응?"

    서아영의 멍한 눈이 이예원에게로 향했다.

    "요즘은 그 정도 나이 차는 흔하잖아요?"

    열다섯 살 차이가 흔하다고?

    넌 어느 나라 살던 아이니?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서아영이 가만히 이예원을 바라보았다.

    얘 혹시?

    "호호호호."

    서아영이 뭔가를 확인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박선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죠. 요즘이야 뭐, 열다섯 살 차이가 별건가요. 30살 차이 나는 사람들도 결혼하는 시대인데."

    "그래도 미성년잔데……."

    "옛날이면 애가 있을 나이죠."

    이 모녀…….

    서아영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놀이공원을 가자고 하고 일을 벌인다 싶었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서아영이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딸내미 데이트에 어머니가 따라온 모양새인가?

    그거도 정상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지혁 씨 가족이니까.'

    납득해 버린 서아영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박선덕에게 말했다.

    "에이, 그래도 나이 대에 맞는 사람과 사는 게 낫죠."

    "꼭 그렇지는 않아요. 나이가 중요한가요, 얼마나 잘 맞는가가 중요하지."

    "나이가 비슷하면 더 잘 맞겠죠."

    "음, 아직 아영 씨가 연애를 많이 못해봐서 그런가? 이상한 선입견이 있네요."

    연애를 많이 못해봐?

    가슴을 송곳으로 푸욱 찌르는 것 같은 일격을 당한 서아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 연애요?"

    "벌써 시집갈 나이가 된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 보면 좋은 남자 못 만나요."

    "시집갈 나이?"

    가슴에 박힌 송곳 위로 해머가 떨어져 내렸다.

    서아영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마, 말씀이 조금 지나치시네요."

    "어머, 내가 걱정해서 한 말인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사과하는 표정이 아닌데? 이 아줌마가?

    박선덕은 날카로운 눈으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예상치도 못한 방해물이 아닌가.

    가정의 안녕과 딸의 행복을 위해서 이런 방해물은 미리미리 멀리 치워둬야 한다.

    "내가 아영 씨 같은 타입을 좀 아는데……."

    "네?"

    "잘 어울리는 남자 있는데, 소개 한 번 받아볼래요?"

    "무슨 말씀을!"

    일단 아무 데나 엮고 보는 아줌마 특유의 스킬에 걸린 서아영은 평정을 잃어버렸다.

    그녀가 아무리 능력자 계열에서야 알아주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빼고 나면 그냥 사회 경험 애매한 20대 중반의 여자일 뿐이다.

    박선덕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아니, 사람을 많이 만나보는 것도 중요해요. 꼭 연애 많이 못해본 사람들이 결혼하고 나면 후회하더라니까. 어때요? 의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는데."

    "괘, 괜찮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박선덕이 서아영의 손을 잡아 질질 끌고 가며 이예원에게 눈치를 주었다.

    '가라, 내 딸.'

    '응, 엄마.'

    어깨가 축 늘어진 서아영이 박선덕에게 질질 끌려가자 이예원은 고양이처럼 웃었다.

    이걸로 방해물은 사라졌다.

    "다솜이는 뭐하고 있지?"

    저 바보만 빼면 말이다.

    저건 얼굴도 저리 잘생겨서는 왜 저리 허당인가. 그러니 아직 여자 친구도 없지.

    얼굴만 보면 넋이 나갈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정신이 날아갈 것 같다.

    "가봐요."

    "응?"

    "조 짰다고 꼭 같이 있으란 법은 없잖아요."

    "그, 그렇지?"

    "네. 어차피 여기는 아영이 언니 있으니까. 오빠가 간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야 있겠어요?"

    "으응, 그럼 나 잠시만……."

    또 하나의 방해물이 빛살 같은 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본 이예원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 갔네요?"

    "그러게."

    이걸로 둘만 남았다.

    "오빠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말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고."

    "지혁 씨가?"

    "예."

    "이지혁 씨가 그런 말을……."

    왠지 모를 감격에 젖은 최정훈을 보며 이예원은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는 '잔소리는 더럽게 많은 노총각 주제에 잘생겨서 거슬린다'가 이지혁의 평가였다.

    그래도 선의의 거짓말이니까 괜찮겠지.

    "오빠는 결혼 생각 안 하세요?"

    "응?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아주 안 할 수는 없지. 그런데 뭐 결혼을 내가 혼자 하나? 상대가 없으니까."

    "오빠 정도면 좋다고 쫓아다닐 여자가 많을 것 같은데……."

    "좋다고 하는 여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어. 집에도 삼 일에 한 번씩 들어가는데."

    "아……."

    뭐지?

    로맨틱 코미디를 틀었는데 인간극장이 나오는 것 같은, 이 이상한 분위기는 대체 뭐지?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이예원이 말을 돌렸다.

    "그래도 호감 가던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없었는데?"

    "눈이 높으신가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남중, 남고를 나와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1학년 때 덜컥 또 행시에 붙어버려서 바로 군대 갔다 왔다가 학업이랑 일을 병행하다 보니까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어."

    "아……."

    "그리고 취직하고 나서는 이상한 부서에 배속되어서 퇴근도 못하며 일하고, 시간 남으면 리포트 쓰고 하다 보니 어느새……."

    뭔가 최정훈의 눈가가 촉촉해 보인다.

    착각이겠지.

    "그럼 설마 모태……."

    "…비밀이다."

    "꼭 지켜 드릴게요."

    가여운 사람 같으니.

    이예원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슬픈 이야기이긴 하지만, 따져 보면 지금까지 여자를 전혀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니까 그만큼 순진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적당히 구슬려 주면 넘어올 듯도 싶다.

    희망을 본 이예원이 뿌듯해하려는 찰나, 박선덕을 뿌리친 서아영이 필사적으로 뛰어왔다.

    "응?"

    박선덕이 서아영의 뒤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진짜 괜찮다니까!"

    "안 해요! 안 한다구요! 저 그냥 혼자 살다 죽을래요! 어머니, 이러지 마세요!"

    끊임없는 박선덕의 공세에 질려 버린 서아영이 최정훈을 붙잡고 늘어졌다.

    "저분 좀 말려주세요."

    최정훈이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이 세상에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이지혁 씨고, 둘 있다면 저분을 넣어야 합니다. 그냥 포기하시죠."

    "그럼 내가 남자랑 선을 봐야 한다는 말이에요?"

    "네? 좋은 남자면 나쁘지 않……."

    콰득!

    "끄으으윽."

    발등이 해머로 찍힌 듯한 충격에 최정훈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이 여자가 미쳤나!

    남의 발을 왜 밟아!

    최정훈이 고통에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본 이예원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소리를 빽! 질렀다.

    "왜 사람 발을 밟고 그래요!"

    "어머, 그랬나? 내가 실수를 했네. 미안해요, 최정훈 씨. 호호."

    "일부러 그랬죠?"

    "아닌데? 아니거든? 아닌데?"

    서아영과 이예원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며 스파크를 피워 올렸다.

    '이 아줌마가?'

    '이 꼬맹이가?'

    서로 노리는 것이 같다는 것을 파악한 두 여자는 이 순간부터 전쟁을 선포했다.

    "너는 그런데, 이런 데 와서 놀아도 돼? 그 나이면 공부나 할 때 아니니?"

    "그래야죠. 그런데 쉬는 날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매일 공부만 하면 효율이 떨어지니까요. 그런 언니는 공부 잘하셨나 봐요?"

    "어머? 언니가 일하는 데 보면 모르겠니? 너도 열심히 공부하면 언니 같은 곳에서 일할 수 있단다."

    "우리 오빠 보면 공부 안 해도 되는 거 같은데요?"

    "……."

    서아영은 말문이 막혔다.

    얘야, 너희 오빠는 몸뚱아리 하나로 뽑혀온 것이고, 언니는 지성체를 겸비해서 이곳에 있는 거란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우리 오빠 같은 사람도 일하고 있는 거 보면, 거기도 참 사람 머리 안 보고 뽑나 봐요?"

    "으……."

    확실히 대미지가 훅훅 들어오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 공격을 하기 위해서 지 오빠를 희생양으로 삼다니! 독한 계집애!

    "아니, 너는!"

    "잠시만요."

    서아영이 뭔가를 외치려는 순간, 최정훈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편드는 거예요?"

    "조용히!"

    최정훈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서아영도 입을 닫았다.

    이지혁조차 신경 안 쓰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는 최근의 그녀였지만, 최정훈이 진지하게 나올 때는 말이 다르다.

    "뭔가 이상합니다."

    "네?"

    그 말에 서아영이 최정훈이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뭔가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이죠?"

    "잠시. 일단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

    그때, 건물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무리지어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본 서아영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뭐지?"

    지금 분명 뭔가를 피해서 도망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딱히 저 뒤로 뭔가가 보이지는 않는데?

    "작은 몬스터라도 출현한 건가?"

    서아영이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그녀가 이예원의 팔을 잡고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왜 이래요?"

    "뭔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까, 언니 등 뒤에서 떨어지지 마! 알았어?"

    "…예."

    갑작스레 급변한 서아영의 분위기에 이예원이 입을 다물었다.

    투닥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없는, 위대한 능력자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최정훈 씨! 사태 파악 빨……."

    하지만 굳이 사태를 파악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도 이젠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저게 뭐지?"

    저 멀리 시커먼 구름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름?

    아니, 구름이 저리 바닥에 깔려 있을 리가 없잖아.

    말하자면 짙은 안개 같은 느낌인데, 검은색 안개라니…….

    질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최정훈이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묻자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한 단어만이 들려왔다.

    "버그?"

    버그라니?

    시스템 오류가 났다는 건가?

    하지만 최정훈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저 멀리 있던 구름이 그들 가까이, 눈에 확연히 보일 만큼 다가왔을 때에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버그.

    말 그대로 벌레.

    그들 눈에 보이는 시커먼 구름은 어마어마한 수의 새카만 벌레들이 뭉쳐서 날아다니며 만들어낸 형체였던 것이다.

    "아……."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냈다.

    "제기랄, 대체 저게 뭐야!"

    저걸 몬스터라고 할 수 있나? 저걸?

    저건 몬스터라기보다는 그냥 벌레 떼잖아!

    저걸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지?

    우우우우우우웅!

    수억 마리의 벌 떼가 동시에 날아다니는 듯한 소음과 함께 벌레들이 허공으로 크게 출렁였다.

    마치 거대한 검은 슬라임 같은 모습으로 벌레 떼가 서아영들을 덮쳐 왔다.

    "꺄아아아아아악!"

    이예원의 날카로운 비명이 테마파크를 쩌렁쩌렁 울렸다.

    * * *

    벌레 떼들은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보며 생리적인 혐오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동안 수많은 몬스터들을 봐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아니, 눈앞의 이것들이 정말 몬스터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으!"

    최정훈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거대한 자이언트와 좀비 드래곤을 앞에 두고도 딱히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최정훈이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두려움 이전에 거부감이 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큭!"

    서아영이 치를 떨며 불꽃을 피워 올렸다.

    "뒤로 물러나 있어요! 최정훈 씨! 뭐해요! 두 분 챙겨요!"

    "아! 네!"

    최정훈이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한 손으로 박선덕의 손을 잡고, 이예원에게로 달려 다른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이리로!"

    최정훈이 서아영의 불꽃이 미치지 않는 범위로 가장 안전할 곳을 계산했다.

    "내려주세요!"

    부끄럽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려서 달리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정훈의 생각은 달랐다.

    "빨리 이지혁 씨한테 전화해!"

    "네?"

    "이리로 오라고!"

    이예원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빼 들고는 이지혁의 번호를 눌렀다.

    '오빠!'

    멍청하고, 게으르고, 게임이나 끝도 없이 해 대고, 잘 씻지도 않고, 먹기는 더럽게 많이 먹는, 짜증나는 오빠지만… 뭔가 위기가 처했다 싶을 때는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이예원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 * *

    "뭔가 술렁술렁하는 거 같은데?"

    이지혁이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앉아서는 말했다.

    그의 배는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우리 계속 여기 있는 거야?"

    "이게 누구 때문인데!"

    정해민이 투정을 부리자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사건인즉슨 이러했다.

    결국 경쟁이 붙어서 이지혁의 입에 음식을 모조리 퍼부은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거야 뭐, 그럴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양이 심지어 이지혁의 허용 용량마저 초월해 버렸다는 것이다.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올라 도무지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이지혁은 그 자리에서 퍼져 버렸고, 남은 이들은 그런 이지혁을 내버려 두고 놀러갈 수가 없어서 같이 주저앉아 버렸다.

    "끙……."

    정해민이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반성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기껏 여기까지 놀러 와서 벤치에나 앉아서 시간을 때우다니, 이 얼마나 서글프고 비생산적인 일이란 말인가.

    노는 날도 며칠 없는데.

    "근데, 너 아이돌… 그건 잘되어가냐?"

    "…해체할 거 같은데."

    "어?"

    이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그룹이라더니, 이게 뭔 소린가?

    "왜 해체를 해?"

    "그게……."

    정해민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PD들도 잘 안 찾아주고, 행사도 안 들어와. 그래서 콘서트라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적자가 날 것 같아서 안 되겠대. 그래서 진짜 백조처럼 놀고 있어."

    "그 인기가 그리 확 식나?"

    "원래 연예인이라는 건 이미지로 먹고사는 거니까. 이미지가 가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능력자 팀이 다 안 좋아."

    이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응? 뭔 소리야?"

    이지혁의 얼굴이 조금 미묘해졌다.

    능력자 아이돌에 대한 비정상적인 인기는 정부의 조장 탓이 컸다. 매스미디어를 모두 장악한 정부가 계속해서 능력자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를 퍼뜨려 대니, 사람들이 그들은 친근하게 느껴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건 하나 있었다고 정부의 압박을 받던 방송사들이 모조리 등을 돌린다고?

    "아예 안 들어와?"

    "들어오기는 하는 모양이야. 그런데 방송 나갔던 애들이 야유 받고 물건 투척도 받고 하다 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정해민의 얼굴이 울적해졌다.

    밑바닥 시절부터 아이돌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온 그녀다 보니, 말은 안 하지만 심리적으로 타격이 큰 모양이었다.

    "흐음……."

    왜인지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고, 거기에 더해 대중의 반감이 아이돌로 쏠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비정상적인 인기를 누려온 반작용이니, 뭐 불쌍하다고 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능력자에 대한 호감으로 이득을 봤다면, 능력자들에 대한 비호감으로 대가도 치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확 놀고 스트레스 좀 풀려고 했는데!"

    "보통 니 나이면 술을 처먹거나 클럽 가서 흔들면서 스트레스를 풀지."

    "술 안 좋아해. 클럽은 시끄럽고."

    "입장은 되냐, 입장은?"

    "나 연예인이야! 왜 이래!"

    "아역이라고 짤리는 건 아니고?"

    "야!"

    '빼액!'거리며 달려드는 정해민을 한 손으로 쭈욱 밀어내며 이지혁은 생각에 잠겼다.

    보통 사람들의 능력자에 대한 반감이 이 정도까지 이르렀는가.

    항상 능력자 거주구에 있다 보니 실감을 못하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좀 심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 놀러 가자. 응?"

    "내가 지금 움직일 수 있어 보이냐!"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올라 아이가 있지 않은가 의심이 되는 배를 본 정해민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게, 왜 그리 미련스레 먹었어?"

    "그만하라는 말도 못하게 밀어 넣은 게 누군데!"

    "난 아니야."

    "이걸 그냥 성 꼭대기에 매달아 버릴까 보다."

    바로 그때, 이지혁의 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응?"

    이지혁이 전화기를 꺼내고는 액정을 확인했다.

    날라리.

    "이게 웬일이래?"

    이예원이 이지혁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이지혁은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귀에 댔다.

    "뭔 일이야?"

    "오빠아아! 여기!"

    날카로운 이예원의 음성이 귀를 꿰뚫자마자 이지혁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주위를 빙그르르 돌아 이상을 살폈다.

    한쪽에 검은 구름 같은 것이 뭉쳐 있는 모습을 확인한 이지혁의 몸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날아올랐다.

    이예원이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이지혁이 다급한 마음으로 속도를 올렸다.

    "으아아아아!"

    콰앙!

    이지혁의 몸이 바닥과 충돌하자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진흙처럼 파이며 솟아올랐다.

    "예원아! 엄마!"

    이지혁이 좌우를 살폈다.

    그러자 서아영의 저 뒤에 최정훈의 보호를 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저건?"

    이지혁이 검은 구름을 보며 소리쳤다.

    "벌레 떼예요! 벌레가 뭉쳐서!"

    "벌레?"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과연.

    자세히 살펴보자 새끼손톱만 한 갑충들이 다닥다닥 뭉쳐 있다.

    "으……."

    저만한 벌레들이 뭉쳐 있는 것을 보니 영 기분이 더럽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이지혁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벌레들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 느낌은…….'

    저 벌레들에게서 느껴지는 음습한 느낌은 분명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마계인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음기가 느껴진다.

    저 진득한 음기는 이 세상의 것들이 지닐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언데드이거나 마계.

    이지혁이 벌레들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일단 갈겨봐!"

    "라져!"

    불꽃을 충전하며 상황을 주시하던 서아영이 기합을 지르며 불덩어리를 쏘아냈다.

    "으아압!"

    집채만 한 화염이 검은 벌레 구름을 향해 날아든다.

    화악!

    하지만 벌레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불덩어리를 간단히 피해냈다.

    "어라?"

    서아영의 입에서 당혹성이 흘러나오고, 벌레들을 통과해 버린 불덩어리가 날아들어 테마파크 가운데에 세워진 거대한 성을 덮쳤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성의 반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남아 있는 잔해들도 금세 새빨간 화염에 뒤덮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내 맘은 이게 아닌데?

    "아……."

    최정훈이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남의 나라에 깽판을 놓으면 안 됩니다!"

    "일부러 그런 거도 아니잖아요!"

    "수습할 수 있는 사고만 치란 말입니다!"

    으, 저 얄미운 인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일단은!

    서아영이 다시금 불꽃을 피워 올렸다.

    집중이 안 된다면 범위로 해야지!

    서아영의 주위로 화염이 화르륵 피어오르더니, 광범위한 범위를 그대로 뒤덮어 버렸다.

    하지만…….

    우우웅!

    불꽃이 덮쳐들자 벌레들이 일제히 높은 하늘 위로 날아올라 화염을 피해냈다.

    "으응?"

    서아영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아!"

    최정훈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에에에!"

    아니나 다를까, 벌레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아……."

    최정훈이 힘없이 그 광경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뭐야? 저리 가버리면 어떻게 해?"

    서아영도 황당한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렇게 수백만 개체로 보이는 벌레들이 뿔뿔이 흩어지는데, 그걸 어떻게 잡으라는 말인가.

    "어떻게 된 거예요?"

    다급하게 달려온 정해민들이 물었지만, 이 자리에서 딱히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뭐, 뭉쳐 있으니 문제가 되는 거지, 저리 흩어지면 어차피 벌렌데… 별로 신경 쓸 거 없는 거 아냐?"

    "그러면 좋을 텐데……."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 최정훈이 말끝을 흐렸다.

    "벌레가 뭘 하겠어요. 걱정되면 전자 파리채라도 생산 늘리라고 하지 뭐."

    "흐음……."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저 끝에서 비명성이 들려왔다.

    "응?"

    뭐지?

    "가보자!"

    이지혁들이 우르르 비명이 터져 나온 곳을 향해 뛰었다.

    "으?"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몸이 새파랗게 변해 버린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독?"

    이지혁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이지혁……."

    "오지 마!"

    이지혁의 찢어지는 외침에 최정훈이 주변 사람들을 잡고 뒤로 물러났다.

    "다 물러나라고 해! 여기 당장 폐쇄하라고!"

    "대체 무슨?"

    이지혁의 입에서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전염된다……."

    "설마……."

    이지혁이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의 몸에서 손을 떼 들어 올렸다.

    이지혁의 손끝이 새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헉!"

    최정훈이 헛바람을 삼켰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원리는 모르겠지만, 전염되고 있어. 독인지 병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저 벌레에 물린 사람은 이런 상태가 되고, 이 사람들과 접촉한 이들도 똑같이 된다는 거지."

    "그럼……."

    최정훈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 병원균을 가진 수백만 마리의 벌레들이 방금 세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그 벌레에 물린 이들이 또 병을 전파하게 된다는 건가?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차라리 세상을 일격에 무너뜨릴 몬스터가 강림했다면 어떻게 저항하는 척이라도 해보겠다.

    하지만 이건 경우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괜찮습니까?"

    "흠……."

    이지혁이 자신의 육체를 파고든 기운을 마나로 집어삼켜 버렸다.

    어둠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이지혁에게는 맛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지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들을 어찌할 수가 없다.

    마력으로 빨아들이다가는 중독 이전에 고통으로 즉사해 버릴 것이다.

    능력자들도 버티기 힘든 일인데, 일반인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단은……."

    이지혁이 씁쓸히 뇌까렸다.

    "한국으로 돌아가죠."

    최정훈은 처음으로 보는 이지혁의 힘없는 모습에 지금까지 겪은 적 없는 위기가 닥쳐왔음을 실감했다.

    * * *

    [미국에서 발생한 이번 사태에 미국 정부는 아직 확실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생물 재해의 일종이라 보고 있지만, 정확한 원인균을 찾아내는 일은 아직 요원하다 보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전염성에 대해서도 확인 된 바가 없어서 상황은 점점 더 오리무중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쯧."

    TV를 보는 이지혁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그냥 좌시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고, 그렇다고 나서서 뭔가를 해보자니 이지혁이 도움이 될 일이 없다.

    "흐음……."

    마력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지식적으로나 활용적으로나 이지혁을 따라올 사람이 없겠지만, 이런 분야라면 다르다.

    아무리 마계가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이지혁이 모든 분야를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같은 과학이라도 물리학 박사가 아는 것과 생물학 박사가 아는 것은 다르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지혁의 분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지혁의 전공은 그냥 다 때려 부수는 것과 마수를 다루는 일, 그리고 마나에 관련된 일이었다.

    마수를 다루는 일이 그나마 관련된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지혁이 다루는 마수는 거의가 대형 몬스터였다.

    동물원 사육사에게 벌레의 생태에 대해 물으면 뭐라고 답을 하겠는가.

    "끙……."

    이지혁이 노란 줄로 통제되어 있는 병원의 전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변형된 흑마력에 노출된 인간이 어찌 되는지는 이지혁도 알지 못한다. 워낙 다양한 증례가 있으니.

    이지혁처럼 그냥 순수한 마나를 때려 박는 타입이면 미치거나 광포화하거나 언데드화되거나 셋 중의 하나의 결과가 나올 테지만, 벌레가 품은 흑마력에 노출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벌레에 따라 또 다를 테니까.

    결국 이지혁은 마계의 생태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이 일에 관해서는 의사나 생물학 박사 수준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떻게 되는 거야?"

    "끙……."

    안 그래도 속이 시끄러운데 옆에서 쫑알대는 것을 들으니 더 짜증이 난다.

    "넌 왜 여기 있는데!"

    "…여기가 안전하다고, 여기 있으라던데?"

    "누가!"

    "최정훈 씨가."

    "끄응……."

    이지혁이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정해민과 김다솜들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다솜아."

    "네?"

    "너는 니 오라비가 있잖니. 왜 여기 있는 거니?"

    "쓸모없어요."

    "……."

    그거 매우 공감 가는 이야기기는 한데, 매우 슬픈 이야기기도 한 거야.

    여동생에게 괄시당하는 김다현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온다.

    "나도 다를 게 없구나."

    "뭐?"

    "아니다."

    이지혁은 최정훈이 사라지자마자 본색을 드러내고는 방바닥에서 뒹굴거리며 과자를 폭풍같이 퍼먹고 있는 이예원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저런 걸 동생이라고……."

    "왜? 귀여운데."

    "귀여워? 저게? 눈알이 삐었나?"

    이지혁의 말을 들은 이예원이 베고 있던 베게를 집어 던졌다.

    "다 들리거든! 이 그지야!"

    "이게 미쳤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말든 이지혁의 집안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지혁의 집이 평온하다고 해서 세상이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이지혁의 집을 벗어난 세계는 지금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확인되었나?"

    "아뇨.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도노반 맥기는 심각한 얼굴로 통제구역을 바라보았다. 전염을 막기 위해 통제된 환자들 사이를 화학 방호복을 입은 의사들이 누비고 있었다.

    "병원균은 파악 못한 건가?"

    "원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조금 우물쭈물하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병원균이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무슨 소리야?"

    "우선 검사를 보내놓기는 했지만, 증상 자체가 일반적인 전염병과는 다릅니다. 차라리 이건 중독 증상과 비슷합니다."

    "중독?"

    "예, 중독입니다."

    도노반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중독이라니, 세상에 전염되는 중독이 어디 있는가! 그저 피부 접촉만으로 전신으로 퍼져 전염되는 중독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긴가!"

    반쯤 벗겨진 머리로 화를 내는 도노반을 보며 샘 라이트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물론 상식적으로야 말이 안 됩니다."

    "그렇지."

    "하지만 이건 몬스터 해저드입니다."

    "……."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몬스터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모두 헛소리라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는 상식이 무너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반박할 말이 없어진 도노반이 고개를 돌려 다시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진행은 어떤가?"

    "아직 사망자가 없어서 정확하게 어느 정도 진행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첫 사망자가 나와야 나름의 매뉴얼이 잡힐 것 같습니다."

    "사람이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샘 라이트가 조금은 딱딱해진 얼굴로 말했다.

    "위원장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

    "이건 그저 시작일 뿐입니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벌레들은 지금도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벌레들에 의한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지만, 새로운 피해가 발생한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으……."

    "벌레들이 벌처럼 한 명을 중독시키고 자신이 죽는 케이스라면 수십만의 피해가 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수백만, 수천만… 거기에 2차 피해까지 생각한다면……."

    도노반의 눈이 크게 떨렸다.

    궤멸.

    그것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피해가 온전히 미국에만 쏟아진다면 국가 붕괴 사태가 터질 것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는가? 자네 말대로라면 말라리아 병원균을 가진 모기의 수만큼 사상자가 생겨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잖는가."

    "그렇습니다."

    샘 라이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상식적으로 따진다면 그럴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접촉하는 수는 소수일 테니까.

    수백만의 벌레라 하더라도 세상에 존재하는 벌레들에 비한다면 너무도 미약한 수에 불과했다.

    "문제는!"

    "으음?"

    "이것들이 정말 벌레의 습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잊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벌레가 아닙니다. 벌레의 모양을 한 몬스터죠."

    "……."

    아차 싶은 도노반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의 형상을 한 몬스터가 개와 같은 습성을 보이지는 않는다. 형태만 개일 뿐, 그들의 행동 방식은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생물체들을 사냥하고 집어삼키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

    만약 이 작은 벌레들이 그러한 몬스터과 같은 습성을 지녔다면 어찌 될 것인가.

    "우선 현장에 떨어져 있던 벌레들의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뭐라도 좀 잡히겠죠."

    "그럼 그전에는?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한낱 의사일 뿐이죠."

    "이……."

    도노반이 유리 너머로 경련을 일으키는 환자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의사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신종 질병이라는 것에 대처하는 대다수의 의사들이 그러하듯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호전시킬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수동적인 대처마저 잘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만약 정말 이 작은 벌레들이 몬스터의 습성을 가진 채로 사람들을 중독시킨다면…….

    실질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벌레 하나하나를 모조리 잡아낼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방역 처리를 하려 해도 문제다.

    몬스터에게 방역이 통하겠는가.

    "빌어먹을."

    도노반은 그와 인류의 나약함을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지금은 2차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 * *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크리스토퍼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은 순간?

    아니, 그 이전에 이지혁들이 상대하던 벌레들이 미국 전체로 퍼져 나가 버린 순간에 이미 그는 넋을 잃었다.

    일단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겠다는 이지혁들을 그대로 놓아 보낸 이유였다.

    잡아놓는다고 해서 뭘 할 수가 없으니까.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지금까지 미국이 처한 모든 위기 그 이상이었다.

    "진행 방향은 전혀 모르는 건가?"

    "내륙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속도가 빠르지 않아 아직은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만……."

    "바다 쪽은?"

    "그쪽으로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벌레 주제에!"

    벌레가 바다로 나가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 아닌가!

    이 세계의 생물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바다를 넘는 건 아니겠지?"

    "…알 수 없습니다."

    크리스토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바다를 넘어간다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 재앙이 될 것이다.

    '우리만 당할 수는 없지'를 외쳐야 할지, '너희라도 살아야지'를 외쳐야 할지 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전이었다면 전자를 과감히 택했겠지만, 크리스토퍼의 뇌리 한구석에서는 이 상황을 거의 국가 괴멸 사태로까지 끌어내고 있었다.

    "각하께서는?"

    "보고를 받으시고 우선 벌레들을 박멸하는 데 전 병력들을 동원하라 지시하셨답니다."

    "큭."

    헛웃음이 자꾸 나온다.

    새끼손톱만큼 작은 벌레들을 무슨 수로 잡으라는 말인가.

    지금 당장 놈들이 눈앞을 지나간다고 해도 진짜 그 벌레인지 아니면 다른 벌레인지 구분도 못할 판인데.

    "국장님, 한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야?"

    "최정훈이랍니다."

    크리스토퍼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어쩌다가 일개 소국의 부국장과 동등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손 벌릴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서 머리를 조아려야 할 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제 최고의 실적을 올리고 있는 NDF가 연락해 준다면 되레 고마워해야 할 일이겠지.

    "연결해."

    "예."

    크리스토퍼는 잠시 기다렸다가 전화기를 들었다.

    - 국장님, 최정훈입니다.

    "용건만 간단히 합시다, 최정훈 씨. 지금 나는 매우 바쁘고 정신이 없으니까."

    - 대처법은 나왔습니까?

    "내가 묻고 싶군. 대처할 방법이 있어서 지금 내게 전화를 한 거요, 아니면 그냥 궁금해서 전화를 한 거요? 바쁜 사람의 시간을 뺐었다면 그마한 대가가 있어야겠지?"

    까칠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울리자 최정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빌어먹을 놈.'

    정보가 필요하면 아랫놈에게라도 알아서 얻어 가란 말이다. 아직 위기상황에 처하지도 않은 국가의 놈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을 붙들어 시간 빼앗지 말고 말이다!

    - 그 대처법 말입니다만…….

    "으응?"

    - 일단은 이지혁 씨에게 최대한 정보를 받아볼 생각입니다. 직접 들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 시간을 내주시면 제가 직접 모시고 가겠습니다.

    "흐음?"

    크리스토퍼의 눈이 빛났다.

    "이지혁 씨가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그런 거요?"

    - 네, 아마도. 자세히는 몰라도 분명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음……."

    크리스토퍼의 눈이 진지해졌다.

    "그럼 이 내가 미합중국의 이름으로 요청하겠소. 지금 당장 이지혁 씨를 보내주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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