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32화 (32/118)
  • [■] 그러니 조금은 즐기도록 하지 [■]

    ─────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벨트레체의 샛노란 눈이 가만히 아르고라스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네가 할 말인가?"

    "송구하옵니다만… 마왕이시여, 저의 나약한 육체와 나약한 정신으로는 감히 그를 대적할 수 없나이다. 그가 아무리 약해졌다고는 하나 마왕 중 하나. 감히 제가 어찌 그에게 대항하겠나이까."

    "음……."

    벨트레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명색이 마왕이다.

    마왕을 일반 마족이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벨트레체, 자신이 오지 않았는가.

    "그 간악하고, 사악하고, 비열한 자는 정녕 그 힘을 잃었는가?"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과거 그 강대하던 마력의 편린조차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확실한가?"

    "……."

    아르고라스는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재정리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확인한 끝에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벨트레체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말에 화답했다.

    "그렇군. 그래, 그 인간 놈이 마침내 힘을 잃었다는 것이로군……."

    벨트레체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마계에 나타나 변방 끝에서부터 중심까지 홀로 진격하여 모두를 굴복시킨 마왕 중의 마왕.

    감히 인간 주제에 마왕의 위를 손에 넣고 다른 마왕들조차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막대한 마력과 군단을 손에 넣은 신화적인 존재.

    과거 그가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자 불멸의 왕이라 불리던 시기라면 고귀한 마왕인 벨트레체조차 감히 그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격의 차이가 컸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감히 인간 주제에 마왕의 위에 앉은, 건방진 그놈을 내 손으로 찢어 죽이겠다."

    벨트레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공간을 자욱하게 누르자 알파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벨트레체의 눈이 알파에게로 향했다.

    "인간?"

    낮게 가라앉은 벨트레체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알파는 심혼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재미있군.'

    정신이 아니라 육체가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지금 알파의 육체는 눈앞의 마왕을 포식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 피식자의 입장에 놓인 알파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육체의 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아르고라스."

    "하명하십시오."

    "어째서 인간이 이곳에 있는가?"

    벨트레체의 말에 아르고라스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나약해진 저의 육체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동조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인가?"

    "아시다시피 이곳에는 인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벨트레체가 가만히 알파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알파는 가만히 그 손을 받아들였다.

    "흐음?"

    재미있다는 듯 알파를 바라보던 벨트레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치가 있는 남자로군."

    "인간치고는 나쁘지 않습니다."

    "인간치고는 훌륭한 거겠지."

    벨트레체가 손을 뗐음에도 알파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여."

    "……."

    스으으으.

    알파의 몸 주위로 음습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나는……."

    쿵!

    알파의 육체가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바닥으로 짓눌린다.

    "끅!"

    벨트레체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우득, 우드득.

    알파의 육체가 제멋대로 뒤틀리더니, 이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조아린 형태가 되었다.

    "인간은 마땅히 그러해야지."

    몰려드는 힘에 저항했을 뿐인데 전신이 뒤틀리고 살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지금 너를 살려둠은 내가 이곳에 강림하는 데 너의 지분이 있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악마와 마왕은 계약을 지키는 존재. 나는 너의 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서로에 대한 존중이 우선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나?"

    "후후후후."

    바닥에 처박힌 알파의 입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오?"

    벨트레체는 그 광경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인간이다.

    짓누르고 있던 힘을 풀자 알파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들어 우아하게 가슴 앞으로 휘두르며 한 쪽 다리를 뒤로 뺐다.

    그야말로 우아하기 짝이 없는 인사.

    조롱이자 경멸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인류의 적이신 마왕이시여. 미천한 존재다 보니 감히 마왕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한 점 용서해 주시기를."

    "큭큭큭."

    재미있는 놈이다.

    감히 마왕의 앞에서 조롱이라니.

    이미 까마득한 힘의 격차를 느꼈을 텐데도 저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니.

    '악마로 만들면 재미있겠는데?'

    "이전에 만났으면 재미있었겠지."

    벨트레체는 그리 생각했다.

    악마란 존재는 인간을 좋아한다.

    신격을 가진 존재들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악마란 존재는 인간을 즐긴다.

    예전이었다면 벨트레체 역시 알파를 이용해 어찌 재미있게 놀아볼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떤 인간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에 학을 떼버렸다.

    그가 아는 인간이란 비열하고, 재수 없고, 사악하고, 쪼잔하며, 더러운 존재였다.

    "아무래도 좋다. 그래서, 이지혁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미 이 세계를 손에 넣었는가?"

    아르고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불멸의 혼이 마계를 집어삼켰던 시간을 생각해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광포한 기세로 마계를 침공했던가.

    마계 역사상 처음으로 한 명의 마왕에 대한 공동전선이 펼쳐지지 않았던가.

    단순한 영역 싸움이 아닌, 마계에 대한 침공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과격하게 전진하던 그의 스타일을 감안했을 때, 이미 이세상의 절반 정도는 손에 넣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움직이지 않는다고?"

    "은인자중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딱히 뭔가를 준비하지도 않는 듯합니다."

    벨트레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근육을 뒤틀었다.

    "놀이는 끝났다는 건가?"

    벨트레체가 긴 손톱으로 허공을 가르며 말했다.

    "아니지. 놀이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끝나면 안 될 일이지."

    "그의 행동이 이 세계를 지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왕이시여."

    "그래?"

    "그러니 이 세계를 손에 넣으려 하다 보면 자연히 그는 마왕의 앞을 막아서려 할 것입니다."

    "그렇겠군."

    벨트레체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세계를 지킨다?

    아흔아홉 번째 마왕이?

    '어울리지 않는군.'

    그는 파괴를 위해 태어난 존재다. 지킨다는 것과는 영 맞지 않았다.

    "베라프의 생명이 다한 이상 새로운 흑마력의 출처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은 인간들만의 세상이라니, 이런 먹음직스러운 곳으로 안내해 준 그에게 상을 내려야겠지."

    마왕의 상을 말이야.

    "우선은 조금 재미있게 해줘 볼까?"

    악마와 유희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다.

    "감히 묻겠나이다."

    "으음?"

    "마왕께서는 본연의 힘을 모두 갖추셨나이까?"

    벨트레체는 고개를 저었다.

    "저 미약한 게이트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겨우 반을 가져왔을 뿐이지."

    "그 정도라면?"

    벨트레체가 큭큭대며 웃었다.

    "베라프도 아닌, 이 나약한 세상을 손에 넣는 데 반이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지. 그 불멸의 혼이 내 앞을 막는다 해도 말이야."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조금은 즐기도록 하지. 원한이 들끓어 쉽게 죽이는 것은 영 마음에 안 드니까."

    "……."

    "무엇으로 시작해 볼까? 흐음?"

    벨트레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아르고라스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지?"

    아르고라스의 장황한 설명을 모두 들은 벨트레체가 혀를 찼다.

    "머저리 같은 놈!"

    "죽여주십시오."

    "악마라는 놈이 그런 식으로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가. 아무리 저급한 존재라고는 하나!"

    "어찌 감히 제가 마왕의 마음에 들 수 있겠나이까. 길을 알려주십시오."

    "아주 재밌는 방법이 있지."

    벨트레체의 손끝에서 작은 구슬이 생겨났다.

    "이것으로 게이트를 열어라."

    "예!"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벨트레체가 내민 구슬을 조심스레 받아 드는 아르고라스.

    그리고 그런 아르고라스의 앞에서 쇠로 긁는 듯한 음성으로 웃어 젖히는 벨트레체.

    지구에 대한 마계의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그곳에서…….

    알파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엄마!"

    "이노무 자식!"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이지혁에게 박선덕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아니, 엄……."

    쫘악!

    "끅!"

    이지혁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으로 허리를 굽혔다.

    아프다!

    진짜 아프다!

    이 아줌마, 왜 이리 아픈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냥 손바닥으로 등짝을 내려치는 것뿐인데, 이리 아파도 되는가?

    살이 뜯겨 나가는 기분이다.

    "어디 외박을 일주일이나 하고 기어 들어와! 전화도 안 받고!"

    "아니……."

    이야기 안 했나?

    이야기했던 거 같은데?

    아… 그거 프랑스 갈 때였구나.

    "내가 니 직장에 전화해서 애 어디 갔냐고 물어야겠어? 그런 건 제깍제깍 알아서 보고하는 게 기본 아냐?"

    "그, 그렇습니다."

    "꿇어!"

    털썩.

    NDF를 강아지 부리듯이 복종시키고, 마계의 마왕마저 원한에 들끓게 하는 절대적 존재는 지금 그보다 더 위엄 쩌는 존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는 애가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게 없냐!"

    "죄송합니다."

    "그런 기본적인 것도 지키지 않는데 무슨 일을 하겠다고!"

    "죄송합니다."

    "내가, 응! 내가 이런 것까지 지금 일일이 너한테 말을 해야겠니? 이제 그런 건 알아서 할 때 아니야? 엄마가 대체 언제까지 니 뒤치다꺼리를……."

    "…살려줘."

    이러다가 귀에서 피가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지혁이 어머니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내,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만……."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 거야? 이 순간만 넘기려고 그렇게 말을 지어내서 모면하려 들면 안 된다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하니! 저번에도 그래! 프랑스에 가려면 엄마한테 직접 전화해야지! 어디 니가 안 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이지혁은 해탈한 얼굴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십 분 동안 위장이 뒤틀릴 것 같은 잔소리를 들은 이지혁은 파김치가 되어 늘어졌다.

    차라리 정신 공격이 편하지.

    정해민의 음파 공격이 인류 최종 병기인 줄 알았더니, 그보다 더한 게 바로 옆에 있었구나.

    문득 악마 새끼 하나 잡아다가 엄마가 잔소리를 하게 만들면 며칠이나 버틸까 궁금해진다.

    "그래서!"

    "넵!"

    한 귀로 흘리기 신공을 시전하던 이지혁이 어머니의 목소리에 즉각 제정신을 찾았다.

    절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을 유지한 이지혁에게 어머니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니 동생 데이트는 어떻게 됐니?"

    "어?"

    "너는 뭘 한 번 시작하면 왜 끝을 못보고 항상 흐지부지니! 제대로 못하겠어?"

    "아……."

    맞다, 데이트!

    그거 하기로 했었지.

    "그러니 내가 항상 말하자나. 응? 너는……."

    다시 시작되려는 잔소리에 이지혁이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왜 이래!"

    "엄마! 내가 그 인간 데리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꼭 할게!"

    "으응, 그래."

    "내가 말뿐만이 아니란 걸 확실히 보여주겠어!"

    이지혁이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 내던진 다짐에 먼 곳에 있는 누군가의 등골이 싸늘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왜 이리 춥지?"

    최정훈은 몸을 떨며 텀블러에 자양 강장제를 까 넣었다.

    * * *

    오식이는 기운이 없었다.

    요즘 한동안 주인 놈을 보지 못했더니 뭔가 시무룩한 것이, 벌써 이렇게 정이 들었나 싶었다.

    이전 몇 십 년 동안을 지배당하며 살았지만, 그때는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리저리 가까이 엮이며 밥 받아먹고 하다 보니 어느새 정이 든 모양이다.

    끼잉.

    오식이가 털썩 주저앉아 킁킁거렸다.

    음?

    이 냄새는?

    오식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꼬리를 쳤다.

    저 앞에서 이지혁의 냄새가 나고 있다!

    오식이가 꼬리를 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카앙!

    목에 매달린 쇠사슬이 거슬리자 목을 한 번 뒤틀어 단숨에 끊어버렸다.

    단단한 쇠사슬이 플라스틱처럼 뜯겨 나간다.

    커엉커엉!

    대로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든 오식이가 이지혁을 발견하고는 뛰어올라 그대로 안겼다.

    덥썩.

    하지만 이지혁은 냉정했다.

    달려드는 오식이의 뒷덜미를 잡아 허공에 대롱대롱 들어 올린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뭐야? 왜 이리 더러워?"

    끼잉?

    오식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지혁은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진짜 개꼴이네. 어휴!"

    이지혁이 고개를 뒤로 돌리고는 따라오고 있던 아펠드리체에게 말했다.

    "얘 좀 빨아봐."

    "네."

    아펠드리페가 두말없이 물의 정령을 소환하여 오식이를 씻기기 시작했다.

    깨갱!

    오식이가 기겁을 하고 발버둥을 쳤지만, 운디네는 놓아주지 않고 거대한 물방울을 만들어 집어삼켰다.

    부글부글!

    물이 끓어오르듯 공기 방울이 오식이를 강타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주인 보러 왔다가 갑자기 잠수를 하게 된 오식이가 울부짖었지만, 물속에서 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있나.

    부글부글!

    물의 공 안에서 이리저리 패대기쳐진 오식이가 눈물을 흘릴 찰나에 물이 사라지더니, 바람의 정령이 나타나 드라이를 시작했다.

    "역시 편하네."

    그런데 이상하게 이걸 보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뭔가 자꾸 되살아나는 느낌인데…….

    "…야."

    "네?"

    "내가 지금 기억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네?"

    "나도 저거 당한 적 있었나?"

    아펠드리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에 지혁 씨가 한창 반항하시던 무렵에 너무 더러워져서 몇 번 씻겨 드렸죠."

    "……."

    "한 번 하고 나면 얼마나 뽀송뽀송했는지, 참 귀여웠었죠."

    "…고맙네."

    옷은 입히고 했겠지?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 옷을 입으면 어떻고, 또 안 입으면 어떤가. 종족이 다른데.

    종족이 다르니까…….

    "넌 인권이 뭔지도 모르냐, 이 도마뱀아!"

    "드래곤인 제가 인권을 신경 쓸 리가 없죠. 동물 보호론자는 아니거든요."

    "사람이 동물이냐?"

    "인간이 동물을 보호하자고 하는 거나, 드래곤이 사람을 보호하자고 하는 거나 다를 게 있나요?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사랑으로 감싸주는 거죠."

    "으……."

    맞는 말인데, 왠지 기분이 나빠!

    이지혁은 이를 으득으득 갈며 아펠드리체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오식이에게로 돌렸다.

    "오?"

    뽀송뽀송해진 오식이가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더없이 깜직하다.

    이지혁은 허공에 떠 있는 오식이를 한 팔로 집어 들었다.

    "……."

    방금 전까지 그리 좋아 죽던 오식이가 고개를 슬쩍 바깥으로 돌린다.

    "음……."

    이지혁이 그런 오식이를 빙글 돌렸지만, 오식이는 계속 반대로 돌 뿐이다.

    "너 삐쳤냐?"

    오식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너 말이다……."

    니가 그래도 나름 오거잖아.

    그것도 수컷이잖아!

    근데 이런 걸로 삐치면 되겠냐? 오거 체면이 있지!

    거, 세탁기 좀 돌렸다고! 삐치다니!

    "너 요즘 너무 진짜 개 같다는, 그런 생각 안 하니?"

    끼잉.

    "물론 뭐, 개 같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니가 오거로서 너무 개 같으니까 내가 너를 개로 대해야 할지, 아니면 오거로 대해야 할지 헷갈리잖아."

    순간, 아펠드리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지?

    그냥 듣고만 있는데 왜 이리 미묘하게 욕먹는 느낌이 나는 거지?

    아펠드리체의 기분을 오식이도 똑같이 느꼈는지, 뭔가 눈꼬리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컹컹!

    "이게 미쳤나! 얻다대고 반항이야!"

    찔끔한 오식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앓느니 죽지, 이런 놈을 주인이라고…….

    내가 기다렸던 그 시간들은 다 뭐였단 말인가.

    오식이의 눈가에 습기가 맺혔다.

    최정훈이 본다면 '내가 오거가 우는 꼴을 또 보는구나' 하고 한탄했겠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최정훈이 없었다.

    "이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더니만, 이제 와서 어디 주인한테 으르렁거려!"

    이지혁이 버럭대자 오식이는 고개를 돌리고 낑낑댔다.

    아펠드리체는 그 광경을 보며 살면서 처음으로 오거에게 동정심이라는 것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오거라는 것은 좋은 수문장이 되는 소모품이거나, 아니면 그냥 맛있는…….

    순간, 아펠드리체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인간형으로 오래 있어서 그런지, 오거를 먹는다는 것에 살짝 거부감이 든다.

    '본체로 한 번 돌아갔다 와야 하나.'

    인간의 감정에 너무 동조되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녀는 드래곤이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았다. 하지만 본체로 돌아가는 것은 큰 마나를 소모한다. 우선은 부작용을 억누르는 식으로 가야겠다.

    "응? 오식아, 너 왜 그러니?"

    그 와중에도 이지혁은 계속 잔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아펠드리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드래곤과는 달리 인간은 부모의 성격에 깊은 영향을 받음.'

    이지혁을 매타작하고 잔소리하는 박선덕의 모습과 오식이를 구박하는 이지혁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유전자와 성격 형성의 과정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성격이 형성됨.'

    이지혁이 그리 치를 떠는 박선덕의 모습이 그 본인에게서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광경이다.

    "이놈 시키가 말이야! 내가 널 살려준 것만 해도 평생 갚아야 할 은혜 아냐? 그런데 양심도 없지. 감히 나한테 이를 드러내? 혼날래? 어?"

    …오거한테 논리적으로 따지지 마요.

    그러지 마요, 진짜 없어 보여요.

    아펠드리체는 그에게 가졌던 호의가 조금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하고 가죠."

    "응?"

    아펠드리체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이지혁이 오식이를 어깨에 짊어졌다.

    "오늘은 봐줘서 여기까지만 하는 거야! 내가 착해서 그런 거다, 내가 착해서!"

    세상에 착한 사람이 전부 얼어 죽었나.

    아펠드리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지혁의 어깨에 걸쳐진 오식이가 그 광경을 보며 한숨지었다.

    창세 이후 최초로 오거와 드래곤이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NDF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간 이지혁의 눈에 자양 강장제를 텀블러로 들이켜고 있는 최정훈의 모습이 보였다.

    돌아오자마자 쌓여 있는 일거리에 좌절한 최정훈은 지금 일을 미루지 않는다는 신념하에 미친 듯한 속도로 서류를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훌륭하다.'

    남자라면 그래야지!

    "어?"

    이지혁이 들어온 것을 본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시키거나 그러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상황이 미묘해지자 김다현이 입을 뗐다.

    "오셨습니까."

    "어, 그래."

    이지혁이 손을 휘저어 인사하자 다들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왜 이래?'

    이지혁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최정훈은 다른 사람들이 뭘 하든 말든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크……."

    남자다잉.

    저 댄디한 헤어스타일부터 딱 붙는 슈트 핏이 남자가 봐도 멋지다.

    게다가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닌가.

    이지혁이 흐뭇하게 웃으며 천천히 최정훈에게로 다가갔다.

    "일은 잘돼요?"

    "네?"

    최정훈은 귀를 후볐다.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뭐라고 하셨죠?"

    "일은 잘되시냐구요."

    "…아, 네."

    최정훈은 멍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인간이 이런 인사를 건넬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아닐 텐데?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최정훈을 보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바빠요?"

    "…네?"

    "바쁘냐구요."

    "아니, 뭐……."

    넌 눈이 없냐? 내가 지금 바쁜지, 안 바쁜지 모르겠냐?

    눈이 있으면 보고 알아야지!

    그 눈알에 담긴 정보는 뇌로 안 가는 거냐?

    최정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별거 아닌 말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항상 흥분하게 된다.

    진정해야지.

    "조금 그렇습니다."

    "많이는 아니고?"

    "…예."

    실제로는 많이 바쁘다. 하지만 그 말을 왠지 하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저 살짝 부르르 떨리는 눈꼬리라든가 말이다.

    "그럼 잠깐 이야기할 시간 정도는 있겠네요."

    "…그렇죠?"

    이야기야 뭐…….

    빨리 끝내고 가라. 내가 오늘 제출해야할 서류가 많다, 이놈아!

    겉과 속이 다른 게 패시브로 장착이 된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움직여진다.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살짝 따져 묻는 듯한 말투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지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시간 좀 내주시죠."

    "지금요?"

    "아뇨. 하루 제대로 빼주세요."

    "…아니, 왜?"

    "사람이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약속?"

    "놀이공원 가기로 했잖아요."

    "아……."

    그거 진심이었나? 그거 진심?

    진짜로 갈 생각이었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 나이에 남의 가족이랑 함께 놀이공원에 가야 하는 거지?

    "농담이죠?"

    "농담 같아요?"

    아니, 진담 같아.

    그래서 더 무섭다고.

    나를 거기에 끌고 가서 대체 뭘 어쩔 셈이야!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

    "꼭 가야 합니까?"

    "약속했으니까요."

    그래, 약속이야 했지.

    "그래도……."

    이지혁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할 생각?"

    최정훈은 당당히 대답했다.

    "자주 합니다만?"

    "…생각해 보니 나도?"

    뱉은 말을 꼭 지키고 살지야 않았지.

    그래, 생각하니 그랬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살았었지.

    그래, 그랬다.

    이지혁은 납득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이번에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

    "저랑 한 약속이잖아요?"

    '나랑 한 약속을 어기고도 네 척추가 무사할 것 같은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한 최정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죠."

    일단 살아야지.

    살고 봐야지!

    "그런데 웬 놀이공원을……."

    "뭐, 별거 아니에요. 가서 애랑 좀 놀면 끝나는 일이니까요."

    "애요?"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가보면 알아요."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든 최정훈이 어딘가에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그에게 구명줄이 내려왔다.

    "어딜 간다구요?"

    서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놀이공원요."

    "…그걸 왜 마음대로 가요?"

    "놀러 가는 거도 보고해야 하나?"

    "당연하죠."

    "연차 내고 가면 그만이지!"

    "NDF에 연차가 어디 있……."

    말을 하려던 서아영이 입을 닫았다.

    …있긴 하다.

    안 써서 그렇지, 생각해 보니 연차가 있었다.

    "왜? 연차도 못 내게 막으시게?"

    이지혁이 승리자의 표정으로 삐딱하게 바라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서아영이 외쳤다.

    "그 연차 언제 내요?"

    "왜? 막게?"

    "아니요!"

    서아영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나도 갈 거야!"

    이지혁이 멍한 눈으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 * *

    이지혁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팠다.

    "온다고?"

    "그래요."

    "어디를?"

    "이지혁 씨랑 최정훈 씨가 가는 놀이공원에요."

    이지혁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가만히 서아영을 보다가 혀를 찼다.

    "왜 와? 왜?"

    "놀이공원은 많이 갈수록 재미있는 것 아니에요?"

    어?

    그거야 그렇지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틈을 타 서아영이 일격을 날렸다.

    "언니!"

    "응?"

    구석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정해민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도 가면 좋잖아!"

    "응?"

    정해민의 머리가 또르르 돌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에 간다.

    이지혁의 가족과.

    좋긴 한데…….

    마뜩찮아 한다는 기색을 느낀 서아영이 정해민에게 달려가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저 인간도 가겠지."

    "나 갈래!"

    즉각적인 정해민의 반응에 이지혁이 움찔했다.

    덥썩.

    "응?"

    그림자 속에서 새하얀 손이 튀어나와 이지혁의 다리를 움켜잡았다.

    "뭐? 너도 간다고?"

    손이 OK를 그리고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르르 들어간다.

    이지혁이 급변하는 상황에 당황할 때, 김다현의 전화가 울렸다.

    김다현이 전화를 받고 뭐라 숙덕대더니,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이지혁에게 말했다.

    "저, 형님……."

    "으응?"

    "다솜이도 간답니다."

    "어?"

    어라? 이거, 상황이 왜 이리되나?

    아니, 잠깐만!

    "근데 걔는 어떻게 그걸 알고 너한테 전화를 한 거래?"

    이지혁의 물음에 김다현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저도 잘……."

    소름이 돋은 이지혁이 주변을 살폈다.

    감시당하고 있다! 감시당하고 있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지금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동생 관리 똑바로 안 해?"

    괜히 파편을 처맞은 김다현이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서아영이 그것 보라는 듯 이지혁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다 같이 가면 되겠네."

    "누구 마음대로!"

    이지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들은 할 짓도 없냐! 안 돼! 안 데리고 가!"

    서아영이 마주 코웃음을 쳤다.

    "그럼 최정훈 씨는 못 쉬는 거죠. 연차 안 받아줘요."

    "와… 더럽다, 진짜."

    이지혁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동생 시집 좀 보내겠다는 데 이리 안 도와주나!

    "결론 내리시죠. 다 같이 가든가, 아니면 다 같이 안 가든가!"

    "헐……."

    되레 선택을 하게 되어버린 이지혁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뭐지?

    상황이 왜 이리되었지?

    서아영이 그 모습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뭔가 이지혁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통쾌했다.

    "끙……."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여기서 뭔가를 만들어보겠다고 상황을 만들다가는 더 꼬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다리 아래서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이 부담스럽고, 아무리 피하려 한다고 해도 김다솜이 알게 된 이상 그들의 눈을 모두 피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래, 가자. 다 같이 한 번 가보자."

    그의 눈이 희번덕댔다.

    "대신에 방해하면 다 태평양으로 던져 버릴 거다!"

    "방해는 무슨 방해요?"

    "그런 게 있어."

    의문 어린 서아영의 눈을 뒤로하고, 이지혁은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그래, 사람이 많은 게 무슨 상관이냐.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지.

    "그럼 날짜 한 번 잡아보죠."

    "뭐, 그리 불편하게 할 거 있나요?"

    서아영이 말을 끝내자마자 전화기를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서아영이 무뚝뚝한 어조로 선고했다.

    "저희 내일 놀아요."

    - 뭐?

    "논다구요."

    - 아니, 서 부장! 이게 뭔 소리야? 똑바로 설명을 해봐. 내일 NDF가 문을 닫겠다는 거야?

    "예."

    - 제정신이야? 뭘 어쩌려고 그러는데?

    "저희 결성되고 난 후, 지금까지 하루도 안 쉬고 일했어요. 주말도 없이 특근에 특근에 특근을 해 댔다구요. 이제 하루쯤 쉬어도 되잖아요."

    - 아니, 그러다가 일이 터지면!

    "당직 남겨둘게요. 됐죠?"

    - 서 부장!

    "그럼 진짜 제대로 휴일 찾아가며 근무 돌릴까요?"

    - 편히 쉬게.

    "네."

    가볍게 모든 사태를 해결한 서아영이 이지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요."

    "……."

    진짜 대책 없다.

    얘가 언제부터 이런 캐릭터… 아니, 원래 그랬었나?

    서아영의 본성을 끄집어내 버린 이지혁이 미묘하게 후회를 하고 있을 때, 서아영이 뒤로 돌며 선언했다.

    "내일 다 쉬세요."

    "와아아아아아아!"

    NDF 요원들은 감격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반년 동안 개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하루도 못 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으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재범이 환호를 지르다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당직은 누가 섭니까?"

    "……."

    서아영은 대답 없이 빤히 김재범을 바라보았다.

    김재범은 그 시선에서 절망을 느꼈다.

    "아……."

    나구나.

    나였어, 나였구나.

    김재범이 고개를 푹 숙이자 서아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대기 잘하고."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비상 연락망 확인도 잘해줘요."

    "네……."

    최정훈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내일이라뇨! 내일요?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 줄 잘 아시면서 내일 쉬어버리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이 일 전부 내일까지는 못 끝냅니다! 전 못 갑니다!"

    단호한 최정훈의 태도에 서아영이 말없이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응?"

    이지혁이 영문을 몰라 되묻자 서아영이 조용히 다가가서 속삭였다.

    "일이 많다잖아요."

    "그런데요?"

    "왜 일이 많을까요?"

    "그야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그걸 저 사람이 혼자 해야 하나요?"

    어?

    아니지.

    일이 많으면 사람이 많아져야지, 왜 있는 사람만 더 고생을 하는 거지?

    "저번에 아마?"

    서아영의 말에 이지혁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아, 맞다. 잊고 있었네.

    "잠시만요."

    이지혁이 김재범에게 가서 뭔가 숙덕대더니,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 * *

    "흐음……."

    오후의 나른한 햇살과 뜨거운 커피 향을 즐기고 있는 장년의 남자.

    희끗한 머리카락과 살짝 주름진 얼굴이 절로 위엄을 불러일으킨다.

    노회한 정치인의 오후는 언제나 바쁘지만, 또한 언제나 한가했다.

    "오늘은 그럼."

    대통령을 만나 보고를 할 게 있으니, 이제 슬슬 준비를…….

    라라라라.

    그떄, 전화기가 울리고 장년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직통이 올 일이 잘 없을 텐데…….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전화할 일이 없고,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 그의 티타임을 방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짜증과 노기를 담아 휴대폰의 액정을 들여다본 외교부 장관 하대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번혼데…….'

    끊어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뭔가 찝찝하다.

    "흐음……."

    하대성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에 댔다.

    "누구십니까?"

    - 장관 아저씨.

    장관 아저씨?

    어느 미친놈이 일국의 장관에게 이런 무례한 언사를 내뱉는단 말인가.

    어디 초딩 꼬맹이가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아내 장난 전화를 건 것이 아니고서야!

    막 짜증을 내고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하대성의 뇌리에 불길한 상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누, 누구?"

    - 이지혁이에요.

    "히익!"

    갑작스레 이지혁의 전화를 받은 외교부 장관 하대성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 전화를 하는 건가, 왜!

    "무, 무슨 일인가?"

    - 제가 저번에 분명 여기 일을 해결해 달라고 말했는데, 전혀 해결이 된 게 없는 모양인데요?

    하대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조직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네. 내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그게 처리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네. 그리고 장관이라는 자리가 조직도를 제 맘대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 어디세요?

    "응?"

    - 지금 어디시냐구요.

    "……."

    그걸 니가 알아서 뭐하게!

    - 아니지. 외교부에 있겠구나. 잠시 기다려요.

    "응? 응? 왜 그러는가! 왜 그러는가, 자네!"

    - 말이 안 통하니까 직접 가서 이야기하려구요.

    "아니야! 그러지 말게! 내가 잘 알아듣고 잘 설명할 수 있네! 정말일세! 그러니 잠시만 멈춰보게!"

    그만둬, 이… 이 미친놈아!

    오지 마!

    오지 말라고!

    - 근데 해결이 안 되잖아요.

    "내가 해결할게! 당장 해결해 줄 테니까 진정 좀 하라고! 그래, 뭐가 필요한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뭔가?"

    - 어, 잠만요.

    뭔가 대화하는 것이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장관님, 최정훈입니다.

    이 새끼…….

    욕하는 시어머니보다 옆에서 웃는 시누이가 더 죽여 버리고 싶다더니, 이지혁보다 이상하게 최정훈이 더 짜증나는 하대성이었다.

    "그래, 뭐가 필요한가?"

    - 먼저 이렇게 전화를 받게 되어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집어치워, 이 새끼야!

    그럴 거면 사태를 이렇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내가 미쳤지, 내가 어쩌자고 저런 인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쳐들어갔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게 최정훈에 대한 증오심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야 자신은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라도 받는 입장이지만, 최정훈은 이지혁 옆에서 머물면서 그의 꼬장을 모조리 받아내고 있지 않은가.

    "…그래, 뭐가 필요한가?"

    - 우선 내일 긴급으로 자리를 비워야 하니 대체 인력이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최소한 사무 업무를 처리할 5급 이상의 인력이 다섯 명 이상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원되는 자금도 너무 적습니다.

    "자금과 인력이라……."

    - 그리고 여기… 너무 외곽이라 밥 먹기도 힘듭니다. 식당을 지어야 할 것 같으니 자금과 채용 인력에 대한 허가를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직원 복지 문제인데…….

    미안하다며, 이 새끼야!

    지금 그게 미안한 사람이 하는 부탁이냐? 식당이 머니까 식당을 짓겠다고?

    그 후로 한참 동안 더 요구 조건을 들은 하대성이 피곤함을 느끼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거만 해주면 되는 건가?"

    - 이건 저번에도 부탁드린 일이고, 그사이에 또 필요한 것이 생겼는데, 우선…….

    양심도 없는 새끼.

    증오심이 사라지기는 개뿔!

    이지혁 건만 어떻게든 처리되면 내가 반드시 너를 외딴 섬으로 발령 내버릴 거다!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그게 오늘 하루 만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일단 국방부 쪽에도 협조를 요청해야 하고, NDF는 대통령 직속이다 보니 내가 보고도 따로 올려야 하는데……."

    - 이지혁 씨가 바꿔 달라는데요?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전해 주게. 오늘 내로 반드시!"

    -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끄응……."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린 하대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차관! 차관 들어오라고 해! 당장!"

    외부 대기를 하고 있던 비서가 크게 대답을 하고 후다닥 움직인다.

    "내가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

    하대성은 털썩, 의자에 다시 주저앉으며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웬만해서는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이런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건만……."

    건국 이래…….

    아니, 태초부터 따져도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가 이만한 국력을 과시한 것은 처음일 것이다.

    미국 외교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공손해진 그 어조에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런데 왜 이리……."

    하대성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화와 복은 같이 온다더니.

    그 화와 복이 같은 사람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휴……."

    하대성이 깊은 한숨이 지금 그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지혁과 엮이면 인생이 고달프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가 한 명 늘고야 말았다.

    * * *

    "어디를 간다고?"

    이지혁이 멍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어디라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일단 놀이공원을 간다고 한 것은 이지혁이지만, 그가 생각한 놀이공원이라고 해봐야 용인에 있는 거기라든가… 뭐, 그런 데였지.

    그런데 뭐라고?

    "미국?"

    "네, 미국이요."

    "놀이공원을 미국으로 간다고?"

    "네. 뭐 이상한가요? 세계 최대의 테마파크들이 있는 곳이니, 당연히 미국에서 놀아야죠."

    이지혁에 멍한 눈으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놀이공원에서 놀려고 미국을 간다니,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발상인가.

    이상하다.

    매우 이상하기는 한데…….

    이지혁의 눈이 서아영의 옆에서 화사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정해민에게 향했다.

    '저게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고.'

    미국에서 못 노는 거야 교통비와 이동에 걸리는 시간 때문인 건데, 정해민이 있으면 그 부분이 해결되니 못 갈 것도 없지 않나?

    '과연 텔레포터.'

    그 무궁무진한 활용성이란.

    어디를 가더라도 결국은 정해민 셔틀을 타고 가는 건데, 거리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준비를 다 끝낸 건가?"

    "다들 온 것 같은데요?"

    이지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스커트와 흰 와이셔츠 위에 걸친 가디건만으로 눈부시게 화사해진 서아영이야 그렇다 치고, 도가윤은 저게 뭐지?

    저게 나름 꾸민 거란 말인가?

    "…쟤 옷 누가 입혔어?"

    이지혁이 눈을 부릅떴다.

    저게 무슨 유치원생 놀러가는 복장도 아니고, 프릴 달린 드레스를 처입혀놓으면 뭘 어쩌자는 건가.

    "전데요?"

    서아영이 어서 칭찬해 달라는 듯 환히 웃으며 대답하자 이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정해민을 바라보았다.

    과연 훌륭하지 않은가.

    연예인답게 수수하고, 신경 쓰지 않은 듯하면서도 절대 신경을 안 쓴 것은 아닌, 명품 도배룩을 완성해 뽐내고 있었다.

    "쟤 옷 좀 어케 해봐."

    도가윤의 상태를 확인한 정해민이 한숨을 푹 쉬더니, 손을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니, 집은 확인하고……."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 저 끝에서 벤 하나가 부르릉 달려오더니, 정해민의 앞에 멈춰 섰다.

    드르르륵.

    옆문이 열리자 그 안에 가득 찬 옷이 보인다.

    "잠시만."

    정해민이 도가윤을 끌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지가 연예인이면 연예인이지, 무슨 옷을 차로 싣고 다닌단 말인가.

    뭐, 연예인이니까…….

    아니, 잠깐만? 쟤 텔레포터잖아!

    옷 갈아입을 일 있으면 자기 집에 가거나 옷 방으로 텔레포트해 버리면 그만이지!

    지가 못 고르겠으면 코디를 데리고 가도 되는데, 굳이 저렇게 차 하나를 끌고 다닐 필요가 있는 건가!

    "정상인이 없어, 정상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지혁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김다솜은 평소처럼 가볍게 옷을 입은 편이었고, 그 옆에 있는 김다현은…….

    "넌 뭐야?"

    "예?"

    "니가 여기 왜 와?"

    "제 동생이 간다는데, 저도 가야지 말입니다."

    "니 동생이 가는 거랑 니가 가는 게 무슨 상관인데?"

    "원래 동생 가는 데는 오빠도 같이 가는 거지 말입니다."

    "……."

    이 새끼도 답이 없다.

    가만 보면 여자들만 답이 없는 게 아니라 남자 놈들도 뭔가 나사 하나씩은 빠진 인종들밖에 없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보라.

    저 훌륭한 자태를.

    "크……."

    이지혁이 최정훈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평소의 리젠트와 정장 차림을 벗어나 스웨터와 청바지 차림에 머리를 내린 최정훈은 색다른 맛이 있었다.

    평소의 최정훈이 칼날 같은 엘리트의 매력을 뽐내던 사람이라면, 지금의 최정훈은 뭐랄까…….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훈남?

    뭔가 입을 열면 훈훈하게 흘러내릴 것 같은 그림이다.

    이지혁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베라프에서도 수많은 미남들이 있었다. 객관적인 외모만으로 본다면 최정훈은 그들에게 비견될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솔직히 얼굴로만 따지면 김다현이 최정훈보다야 나으니까.

    하지만 최정훈에게는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과거에 태어났으면 왕이 되었거나 역적이 되었겠지.'

    천성적인 매력치가 워낙에 높은 사람이다.

    쉽게 적을 만들지 않고, 만나는 사람마다 호인이라 느끼게 만드는 것은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재능이다.

    심지어 이지혁조차 최정훈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사복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네요?"

    "저도 좀 어색합니다."

    최정훈은 쓴웃음을 머금고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습관적으로 쓸어 넘기던 리젠트 대신 흘러내린 머리가 만져지자 어색함이 불어나는 느낌이다.

    "그럼 다 온 건가요?"

    서아영의 물음에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가족 와야지!"

    "같이 안 왔어요?"

    이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여자는 준비할 시간이 어쩌고 하면서 되도 않는 짓거리로 시간을 끌기에 빨리 좀 하라고 했을 뿐인데, 미개인으로 낙인찍혀 쫓겨났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돌아온 게 아니야!"

    "네?"

    "아니에요……."

    여자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다.

    천 년을 넘게 사람을 봐왔음에도 여전히 여자의 마음이란 혼돈이며, 카오스이며, 시공의 폭풍이다.

    드르르륵.

    그때, 벤의 문이 열리며 정해민이 의기양양하게 밖으로 나왔다.

    "짜잔!"

    정해민이 과도한 액션으로 가리킨 곳에서 도가윤이 어색하게 걸어 나왔다.

    "흐음?"

    최정훈이 턱을 감싸며 도가윤을 보았다.

    항상 무채색의 옷만 입던 애가 좀 화사하게 꾸몄더니, 미모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다.

    "좋네요."

    최정훈의 말에 이지혁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은 무덤덤하게 서아영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왜!"

    "애를 그따위로 만들어놓고 잘도 입을 떼는군."

    "나, 난 최선을 다했어."

    "모든 일은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 잘해라!"

    "큭!"

    인생의 진리 앞에서 서아영의 다리가 휘청했다.

    저 인간은 꼭 한 번씩 반박할 수 없는 말을 한다니까.

    "야, 꼬맹아."

    "꼬맹이 아니라고!"

    정해민이 발끈했지만, 이지혁은 귀를 후비며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우리 집 가서 좀 데리고 와라."

    "내가?"

    "너 말고 누가 있나?"

    "끄응……."

    정해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서 팟! 사라졌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선덕과 이예원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오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안면이 있는 서아영과 최정훈이 살갑게 둘을 맞았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넉살 좋게 둘과 마주 인사를 하는 박선덕과는 다르게 이예원은 조금은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직원들끼리 놀러 가신다는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박선덕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서아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라니.

    정확하게 말하면 서아영이 깽판을 치고 끼어든 것인데, 저리 말을 하니 양심이 콕콕 찔리는 느낌이었다.

    "같이 가면 좋죠."

    이지혁의 뚱한 눈빛을 등으로 느끼며 서아영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럼 다 왔으니 이제 출발하죠."

    이지혁의 말에 정해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두 손을 맞잡게 했다.

    "손 안 놓게 조심하세요."

    "넵."

    하지만 이지혁은 정해민의 손을 잡지 않고 뭔가 고민하고 있었다.

    "왜?"

    "아니, 뭔가……."

    이지혁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휴대폰도 챙겼고, 지갑도 있고, 다 챙겼는데… 뭔가 자꾸 이상하게 불안하네."

    "정 안 되면 다시 오면 그만이니까 일단 가자."

    "응."

    이지혁이 정해민의 손을 잡자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내 텅 빈 거리만이 남았다.

    휑해진 거리에 나타난 한 사내가 아무도 없는 건물 앞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 나는……."

    아버지는 오늘도 홀로 남겨진 채 서글픈 눈물을 흘렸다.

    * * *

    "와!"

    정해민이 눈앞의 광경을 보며 소리쳤다.

    "저기 봐! 저기! 궁전이야! 엄청 크다!"

    "아, 그래."

    "저기 캐릭터도 이뻐!"

    "쥐 새끼네."

    "저 캐릭터도!"

    "오리 새끼네."

    "…그럼 저건?"

    "개새……."

    이지혁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끝이 안 보이는 테마파크.

    그 압도적인 광경을 보며 이지혁은 감탄했다.

    "와, 진짜 크긴 크네."

    "입 좀 다물어. 촌스럽게."

    "넌 와봤어?"

    "저거 이쁘지?"

    말 돌리는 클라스 보소?

    이지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지만, 정해민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음, 사람들이 여기서 논다는 거지?"

    "응."

    "뭐하고 놀면 되는 거지?"

    "니가 오자고 그래놓고,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

    이지혁이 서아영을 보며 물었다.

    "이제 뭐 해야 해?"

    "저, 이런 데 처음 와봐요."

    서아영의 당당한 선언에 이지혁은 혀를 차더니 고개를 돌렸다.

    "놀이공원 와본 사람."

    "……."

    그 어디에도 대답은 없었다.

    "한심한 인간들."

    이지혁이 혀를 차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지혁에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뭔가 수치스럽다.

    "넌 와봤어?"

    "아니."

    "근데 넌 왜 혼자 당당해?"

    이지혁이 가슴을 쫙 폈다.

    "난 언제나 당당하다."

    "…그래."

    최정훈이 사태를 수습했다.

    "일단은 저기 안으로 가보죠. 놀이기구든 뭐든 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이지혁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여기로군."

    알파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놀이공원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벨트레체가 준 작은 아티팩트가 들려 있었다.

    "어디 볼까?"

    적당한 자리를 잡아 아티팩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악마들에게서 전해 받은 흑마력을 조절하여 구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흡!"

    몸이 절로 덜덜 떨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알파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견뎌냈다.

    이 흑마력이라는 힘은 무척이나 위험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힘이었다.

    그 이지혁이 가진 힘의 원천이라고 하니, 연구할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우우웅!

    알파에게서 흘러나온 흑마력을 받아들인 아티팩트가 부르르 진동하더니, 이내 허공에 작디작은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흐으음……."

    알파는 그 작은 게이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농구공 크기나 될까 싶은 게이트를 보니, 과연 이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벨트레체가 지금까지의 방식을 비웃으며 준 것이니만큼 독특한 효과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뭐, 시킨 것은 다 했으니까.

    물러나려던 알파가 발을 멈추고 다시금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진동하는 소리와 웅웅대는 소음.

    마침내 게이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을 본 알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이거… 효과가 있긴 하겠는데?"

    악마라는 놈들의 생각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지만, 그 효용성만큼은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이트를 보며 악마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던 알파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재미있겠네."

    알파의 시선이 놀이공원의 한쪽으로 향했다.

    딱히 노린 것도 아닌데, 타이밍 좋게 딱 와주지 않았는가.

    "아주 재미있겠어."

    알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 *

    "조를 나누자고요?"

    이지혁의 말에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놀이공원에서 노는 방식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굳이 조를 나눠야 할 필요까지야 있겠는가.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겨우 열 명 남짓인데.

    "그게 놀기 편하니까."

    "왜 그게 놀기 편한지를 잘 모르겠네요."

    "그게 놀기 편하니까."

    "그런데 제 생각은……."

    "그게 놀기 편하니까."

    "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최정훈의 항복을 받아낸 이지혁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꼴이 영 눈꼴 시리던 서아영이 물었다.

    "뭘 어떻게 나눌 건데요?"

    "일단 일반인과 능력자를 구분한다."

    이지혁의 당당한 발언에 서아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딴지를 걸었다.

    "왜! 그걸 왜 그리 나눠요!"

    "아주 당연한 것을 묻는군. 능력자 놈들은 위기감이 없고, 언제 어디서든 몸을 뺄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놀이기구를 타더라도 스릴을 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반인과 능력자가 섞이면 기구 선정이 애매해지는 법이지!"

    "아……."

    말문이 막힌 서아영이 이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이리 논리정연한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단 말인가!

    이지혁의 확고한 발언에 서아영이 눌린 순간, 김다현이 처절하게 반항했다.

    "하, 하지만 수가 안 맞지 않습니까, 수가! 일반인이라고 해봤자 고작 네 명인데! 능력자는 이지혁 씨와 서아영 부장, 정해민 씨, 도가윤 씨, 그리고 저까지 모두 다섯이란 말입니다! 넷과 다섯이라구요!"

    "…잘 맞는 거 아닌가?"

    "잘 맞네요?"

    어, 이상하다?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아펠드리체 씨 어디 갔지?

    김다현이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인들만 다니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통솔할 능력자가 하나쯤은 끼어야 하는 게 맞는 겁니다!"

    "놀이공원에서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저 캐릭터들이 갑자기 미쳐서 사람에게 돌진한다든가 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합니까! 그러다 애가 다치기라도 하면!"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다현아."

    "…예?"

    "시스콤도 병이다. 병원에 가보거라."

    "누, 누가 시스콤입니까!"

    이지혁이 혀를 쯧쯧, 찼다.

    저거도 병이다, 병.

    그만큼이나 괴롭힘을 당하고 동생 이야기만 나오면 벌벌 떠는 주제에 그래도 좋다고 하는 걸 보면, 참 성격도 이상하지.

    "그래서 넌 니 동생이랑 함께 다니고 싶다고?"

    "네!"

    이지혁이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김다현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저 미친놈.

    이런 데까지 와서 지 동생이랑 놀고 싶은 건가?

    제정신인 인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지혁더러 지금 이예원과 함께 놀라고 하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이다.

    이지혁이 저 구석에서 새초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예원을 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국 최고의 연예인도 동생 눈에는 평범해 보이는 게 사람 아니던가!

    "병이다, 병."

    이지혁이 김다현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능력자가 하나쯤 같이 가야 한다는 말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실 조심해서 나쁠 것이야 없지 않습니까?"

    최정훈이 편을 들어주자 김다현이 감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최정훈 씨!'

    NDF의 유일한 호인다웠다.

    "으음……."

    이지혁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그럼 그러죠. 그런데……."

    이지혁이 김다현을 가리켰다.

    "쟤는 안 돼."

    "아, 왜!"

    이지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지 동생만 챙길 인간이다."

    "인정."

    최정훈의 깔끔한 인정에 김다현이 무너졌다.

    NDF 유일의 호인에게마저 외면당하고야 말았다.

    널브러진 김다현을 보고 냉정히 시선을 돌린 최정훈이 물었다.

    "그럼 누가 같이 갑니까?"

    "저요."

    "응?"

    선택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매우 의외의 인물이라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네. 제가 가면 되죠."

    "흐음……."

    손을 든 사람은 서아영이었다.

    확실히 서아영이 같이 간다면 안심이다.

    무엇보다 능력치도 뛰어나고, 계급도 높고, 의외로 책임감도 투철한데다가 위기 상황 시 불이 펄펄 피어오를 테니, 상황을 확인하기도 쉬웠다.

    따져 보면 최적이기는 한데, 저 여자… 왜 자원하는 거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무도 안 갈 테니까."

    "응?"

    서아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도가윤에 정해민, 김다현에 이지혁, 서아영까지 다섯.

    이 중에 김다현은 까였고 남은 건 넷인데, 도가윤과 정해민은 이지혁과 노는 게 더 재미있을 테니, 결국 서아영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는 꼴이야 속에서 열불이 나게 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언니와 동생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맞는 건가?'

    차라리 강제로라도 저 이지혁과 떨어뜨려 놓는 것이 현실적인 도움이지 않을까?

    그렇게 언니와 동생의 현실에 대해서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던 서아영의 손을 잡는 이가 있었다.

    "응?"

    그 은근하고 강력한 손아귀 힘에 놀라 서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김다솜이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으응?"

    이러지 말고 이유를 말하려므…….

    "아……."

    아니다.

    언니가 이유를 알 것 같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보자꾸나.

    "김다현 씨."

    "네?"

    "이쪽으로 오고 싶다고 했죠?"

    "네, 물론입니다."

    "그럼 와요. 후회하지 않겠죠?"

    "당연한 말씀!"

    서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김다현 씨랑 다솜이랑 바꿀게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바꾸는 이유가 없잖……."

    덥썩.

    등 뒤에서 그의 입을 틀어잡는 나긋나긋한 손길을 느낀 김다현이 입을 닫았다.

    여기서 한마디 더 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가 순간적으로 이미지네이션된다.

    "…가겠습니다."

    "좋아요."

    이렇게 조가 완성되었다.

    이지혁이 최정훈에게 다가가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제 동생이랑 어머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직접 챙기시는 게 1억 배는 더 안전하고 든든할 것 같은데요?"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정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오늘 이러다 보면 아저씨가 오빠 되는 거고, 오빠가 여보 되는거고, 여보가 애 아빠 되는 거지.

    근데 왜 이리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리지?

    "남아 있었구나."

    "네?"

    "아니에요."

    이지혁은 힘겹게 생존 신고를 부르짖는 양심을 짓밟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지혁이 먼저 몸을 돌려 걸어 나가자 정해민과 도가윤, 김다솜이 그 뒤를 따랐다.

    "저기 괜찮을까요?"

    "글쎄요."

    뭔가 조합이 미묘하기는 하지만, 뭐,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박선덕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요?"

    "아, 네. 어디부터 갈까요?"

    "일단은 어디든 가보죠."

    "네, 그럼."

    최정훈이 인솔하듯 앞으로 나서자 박선덕이 은근히 이예원을 옆으로 살짝 떠밀었다.

    자연스레 나란히 걷게 된 모습을 등 뒤에서 지켜보며 박선덕이 눈을 빛냈다.

    어쩐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낀 서아영이 옆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박선덕이 엄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이 불안함은?

    * * *

    "뭐하고 놀까, 뭐하고?"

    정해민은 놀이공원에 처음 온 중학생처럼 방방 뛰어 댔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고 혀를 찼다.

    "체력도 좋다, 그 나이에."

    "나, 나이 이야기하지 마!"

    "몸 안 쑤시나? 비 오면 쿡쿡한다던데, 진짜야?"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흐음……."

    이지혁이 미심쩍다는 눈으로 정해민의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지도. 아직 발육이 덜됐으니까."

    "…이게 다 큰 거야!"

    "거짓말!"

    "으으……."

    정해민이 아랫배 깊숙이 꽂힌 돌직구에 고통스러워할 때, 김다솜이 이지혁의 팔을 잡고 한쪽을 가리켰다.

    "저거 어때요?"

    이지혁의 눈에 거대한 롤러코스터가 들어왔다.

    "너, 저런 거 좋아하니?"

    끄덕.

    의외의 일면이네?

    애가 하도 조용하고 그래서 회전목마 같은 거나 탈 줄 알았더니 말이야.

    "그래, 뭐……."

    이지혁은 딱히 놀이기구를 가리지 않는다.

    아니 가릴 이유가 없었다.

    이지혁에게 있어서는 어린이가 타는 범퍼카나 제트기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스릴이라는 것은 위기감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애초에 뭘 타도 위기감이 없으니 딱히 재미가 있을 것도 없었다.

    "가자."

    하지만 그 순간, 도가윤이 이지혁의 팔을 잡았다.

    "응?"

    도리도리.

    "안 탄다고?"

    끄덕.

    "왜? 무서워?"

    끄덕.

    이지혁이 미묘한 얼굴로 도가윤을 바라보았다.

    무섭다고?

    아니, 능력자가 저걸 무서워하면 어떻게 일을 하는가!

    몬스터랑 싸우는 주제에 롤러코스터가 무섭다니!

    "엄살 부리는 거 아냐?"

    도리도리.

    이지혁은 고뇌에 찬 얼굴로 도가윤을 바라보았다.

    얘가 그 좀비 드래곤 사태 때 까마득한 상공에서 아펠드리체의 발판을 밟아가며 드레이크 떼를 농락하던 그 여자가 맞나?

    한 발만 삐끗해도 오징어포가 될 상황을 깔끔하게 해낸 여자가 롤러코스터가 무섭다고?

    "왜? 왜 무서운데?"

    도가윤이 손을 들어 어깨부터 가슴 앞까지를 가리켰다.

    "응?"

    "안전장치. 벗어날 수 없음. 탈선 시 대처 불가능."

    "아……."

    그러니까 안전장치가 꽉 잡고 있으니까 몸을 뺼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사고가 나면 그녀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가 없으니 무섭다, 이런 건가?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무서울 수도 있겠네.

    얘는 육체적 힘은 별다른 강화가 되지 않으니 무서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하나는 타겠다 하고, 하나는 타지 않겠다 하니, 이걸 어찌해야 하는가.

    "어쩔 거야?"

    정해민의 물음에 이지혁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대답을 내놓았다.

    "밥이나 먹자."

    "…좋은데?"

    "찬성."

    "저두요."

    정해민이 신이 나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캐릭터 모양 피자도 판대!"

    "쥐 새끼 얼굴 모양을 뜯어 먹으며 즐기는 것인가? 인간이란 어디까지 추락하는 거지?"

    "…하지 마."

    이거 굉장히 귀여운 이야기였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마!

    이지혁이 투덜거리면서도 정해민의 손에 먹거리 마차가 있는 곳으로 끌려갈 때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 * *

    "끙……."

    크리스토퍼 맥클라렌은 긴장된 얼굴로 망원경에서 눈을 뗐다.

    "놀러 오지 말라고!"

    금방이라도 입에서 불이 튀어나올 듯 격한 사자후가 뿜어져 나온다.

    놀려면 지들 나라에서나 놀 것이지, 뭐하겠다고 남의 나라에 와서 저러고 있는가!

    특별 감시 대상들인데다가 특히나 이지혁은 움직이는 핵폭탄이나 다름없어서 눈을 뗼 수가 없었다.

    "제길."

    이지혁이 인간 타락의 증거라고 말을 한 쥐 얼굴 모양의 피자를 뜯으며 크리스토퍼는 다시금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댔다.

    "국장님!"

    "왜!"

    "보고가 들어왔는데, 확인을 해보셔야겠습니다."

    "바쁘다고 해."

    "확인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그에게 보고를 하는 부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크리스토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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