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8화 (18/118)
  • [■] 저기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요? [■]

    ─────

    [연쇄살인 사건이 보통 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에 반해 이번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쇄살인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희생자가 모두 15명으로 불어난 것으로 확인되는 가운데, 경찰은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가 더 있을 것이라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직 종적이 묘연한 범인의…….]

    "세상이 어찌 되려고……."

    박선덕은 눈살을 찌푸렸다.

    연쇄살인에 대한 이슈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일부는 흔적이 전혀 잡히지 않는 범인이 혹시 능력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화성 연쇄살인 이후로 이렇게 희생자가 대량으로 발생한 살인 사건은 처음이었기에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박선덕은 한숨을 쉬고는 휴대폰을 잡았다.

    이런 걸 보면 자식 놈들이 어쩌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통화 연결음이 나오고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엄마?

    "지혁아, 출근 잘했지? 별일 없어?

    - 별일 없지. 별일 있을 게 뭐 있겠어.

    - 으으으으으아악!

    - 살려줘어어어어!

    박선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게 뭔 소리니?"

    - 응? 아 신경 쓰지 마. 별거 아냐!

    - 이게 별게 아니냐아아!

    - 악마 같은 놈아아!

    - 아, 시끄러워!

    이지혁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뭔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전화기 너머가 이내 잠잠해졌다.

    - 응, 엄마. 이야기해.

    "아니… 엄마는 별일 없는가 해서. 요즘 연쇄살인도 일어나고, 시절이 워낙 수상하니까."

    - 에이, 엄마는 나를 왜 걱정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을 걱정해야지.

    듣고 보니 그러네?

    마리아나 해구에 던져 놓아도 살아 돌아올 놈을 뭐하러 걱정한단 말인가.

    "예원이도 걱정되고… 엄마는 좀 불안해."

    - 걔가 연쇄살인범을 만나는 순간이 연쇄살인 사건 해결되는 날이야.

    "니가 그래도 오라빈데,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동생인데 걱정을 해줘야 할 것 아니니."

    - 거주구 안으로 옮겼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 안으로 들어올 미친 살인범이 어딨어.

    "그건 그렇지만……."

    - 엄마, 요즘 잔걱정이 많아지는 것 보니 일을 안 해서 심심한가 보다. 가게 하나 낼래?

    "조금만 더 쉬고. 엄마도 생각하는 게 있어."

    - 알았어, 엄마. 그럼 나 일해야 하니까 나중에 전화할게.

    "그래. 고생해, 아들."

    그런데 일?

    웬일이래? 이놈이 일을 한다는 말을 다 하고?

    뭔 일을 하는 거지?

    "제군들."

    이지혁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광기와 살기가 뒤섞인 그 눈빛은 보는 사람의 오금을 절로 저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눈빛이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와 어우러지자 평범한 사람은 눈만 마주쳐도 지릴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나는 제군들에게 수많은 온정을 베풀었다."

    '온정은 얼어 죽을.'

    '히틀러 같은 새끼.'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어디서 뒷담 까는 소리가 들리는데?"

    '귀신같은 놈.'

    '생각도 못해, 생각도!'

    수많은 마음의 소리들을 무시하고 이지혁은 말을 이었다.

    "나는 최대한 제군들의 인권을 존중했다. 하나 그 대가가 이런 참담한 짓거리라는 것에서 비통함을 감출 수가 없다."

    꺼엉.

    이지혁이 발밑에서 낑낑대는 오식이를 걷어찼다.

    깨갱!

    반역을 꾀한 대가로 죽도록 얻어맞고 마나를 다 빨려 강아지만큼이나 작아진 오식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눈물을 줄줄 흘렸다.

    "너도 문제야! 개도 밥 주는 사람은 물지 않는 법인데, 사료를 그만큼이나 퍼먹고도 감히 반항을 해?"

    니가 사 준 건 한 포대가 전분데…….

    NDF를 위협해서 자급자족을 해온 오식이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발언이지만, 어차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이러니저러니 해봤자 속만 뒤집어질 뿐이었다.

    아니, 어차피 말도 못하지만 뭐.

    "인권과 민주주의는 철저한 교육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망각한 본인의 책임을 통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대들에게 철저하고 또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지혁의 등 뒤로 대가리를 바닥에 처박은 마수들이 있고, 발아래에는 널브러진 오식이가 처량한 얼굴로 울고 있었다.

    이지혁이 마수들을 돌아보며 눈을 부라리자 움찔한 놈들이 몸을 벌벌 떤다.

    수가 많지 않아서 생각 좀 하고 움직이라고 종속의 인을 좀 약하게 박아놨더니, 쿠데타를 일으킬 줄이야!

    세상에 믿을 놈, 아니, 믿을 괴물 하나도 없다더니!

    이지혁의 좌우에는 용케도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은 도가윤과 셔틀 짓을 하느라 참여할 기회도 없던 정해민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 앞으로는 시도도 못해보고 와해된 혁명의 불꽃의 여파로 처절하게 박살이 난 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본인은 이번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더 철저하고! 더 가혹… 크흠, 더 충실한 훈련을 할 것을 약속한다! 철저한 기강과 단호한 대처! 제군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개새끼.'

    '뭘 더 하겠다는 거야!'

    부글부글 반감이 끓어오른다.

    콧수염 기르면 진짜 잘 어울리겠는데?

    이 끓어오르는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얼떨결에 체벌조에 속해서 가시방석에 서 있는 기타무라 렌이었고…….

    '아니, 나는 왜 여기에…….'

    뭔가 아닌데, 빠져나가겠다는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멀찍이 서서 아무 데도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최정훈이었다.

    '그러게? 나는 왜 여기 있지?'

    어정쩡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최정훈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무렵, 이지혁이 오식이를 잡아 들어 올렸다.

    "어휴, 이걸 삶아버릴 수도 없고."

    끼잉.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오식이가 눈빛 공격을 날렸다.

    "어머!"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정해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에게나 통하는 법.

    "눈 안 깔아?"

    시무룩해진 오식이가 눈을 깔았다.

    "죽일 걸 살려서 밥도 주고 집도 줬더니, 주인을 배신해?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럴 수가 있냐! 하!"

    잘해줘?

    잘?

    오식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가?

    아닌데…….

    마계 생물은 언어가 아니라 심령, 그 자체를 이해하니까 말을 잘못 알아들을 일은 없을 텐데?

    "뭐? 왜?"

    끼잉.

    그런갑지.

    따지면 처맞을 거고, 안 따지면…….

    안 따지면 좀 덜 처맞을 테니 안 따져야지. 따져서 뭘 하겠나.

    오식이가 오무룩한 순간에도 이지혁은 눈을 희번덕대고 있었다.

    "하, 이것들을……."

    이것들을 어찌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퍼져서 방송까지 탈 수 있을 것인가!

    에테르도 연구할 겸 적당적당히 해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사, 사실……."

    서아영이 미약한 반항을 개시했다.

    "훈련이 너무 힘드니까……."

    "힘드러어어어어?"

    이지혁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벌렸다.

    힘들어?

    힘들다고? 그게?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자꾸 싸우기만 하니까요. 세진다는 자각도 별로 안 들고……."

    "아, 그렇구나."

    이지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세진다는 자각이 들지 않았구나! 강해지고 싶다, 이거군!"

    "아?"

    "얼마나 강해지고 싶었으면 반란까지 저질렀겠어. 내가 그 마음을 잘 알지.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그 마음가짐!"

    "아니, 잠깐만. 그런 게 아니고……."

    뭐야? 말이 왜 그렇게 돼?

    서아영이 슬금슬금 밀려오는 불안함에 최정훈을 돌아보았다.

    최정훈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안쓰러움에 뭔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각이 확 든다.

    "그렇게나 간절했는데 내가 몰랐네? 그럼 부응해 줘야지! 강해지게 해주지!"

    "아니, 잠깐만요! 이지혁 씨, 그게 아니고!"

    "걱정하지 마요. 강해지고 싶어서 죽을 각오도 했는데, 뭘 못하겠어."

    누가 죽을 각오를 했는데!

    난 그런 적 없거든!

    "죽을 각오 한 적 없는데요!"

    "혁명에 실패한 자들은 고문 받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서 죽는 법이지!"

    "악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관대하다. 오히려 기회를 주지."

    보자, 어디 보자…….

    이곳에서 연결할 수 있는 곳이…….

    음…….

    스캔을 마친 이지혁이 고민에 빠졌다.

    너무 위험한 곳은 안 되니까 적당한 곳을 고르면…….

    이지혁의 우수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허공에 문양을 그려내더니, 곧 커다란 검은 홀을 만들어냈다.

    "강해질 기회를!"

    그 목소리 묻어나는 서늘한 살기에 서아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검은 홀은 뭐지?

    "자, 나는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강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강해지고 싶든가! 죽고 싶든가!"

    "수능 객관식도 선택지가 네 개는 되는데!"

    다섯 개겠지.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걱정 마세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놀랄 정도로 강해질 겁니다. 약간의 부작용은 있지만, 뭐, 그 정도야……."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라고 웅얼거리는 이지혁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죽지만 않으면 되지'가 너무도 섬뜩하게 들린다.

    "드, 들어가라는 건가요?"

    "그럼 보라고 열었겠어요?"

    "저기 들어가면 어떻게 되나요?"

    "신세계가 열립니다."

    말 그대로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지혁은 정직한 남자니까!

    말 그대로 신세계로 보내줄 테다.

    이지혁이 한 손에 게이트를 든 채 슬금슬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그 오싹한 공포에 기겁한 이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안 가! 안 간다고!"

    "뭔 짓거리야!"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아, 교육의 길이란 이 얼마나 험난한가.

    이리 친절하게 강하게 만들어준다는데 저리 싫어하다니, 선생님들이 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는지 알 것도 같았…….

    아, 이게 아니지.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간 검은 촉수가 사과를 따서 바구니에 넣듯, 도주하는 이들을 하나하나 잡아서 게이트로 던져 넣었다.

    비명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진다.

    이지혁은 모조리 다 게이트에다 던져 넣은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남은 것은…….

    괴수들이랑 정해민, 도가윤, 그리고…….

    "저, 저는 왜 보십니까! 전 민간인입니다!"

    "일반인이겠죠."

    최정훈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일반인이든 뭐든 저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도 가는 게 저쪽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머리가 하나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가 없으면 커피는 누가 탑니까!"

    "음?"

    "주스는 누가 만들고요!"

    "으으음!"

    "이지혁 씨의 평안한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서 저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란 말입니다! 잘 생각을 해보세요!"

    "크!"

    과연 그 말이 옳다.

    이지혁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자 최정훈은 긴장이 풀린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왠지 모를 서러움이 밀려온다.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서라지만 스스로 밥순이를 자처하게 된 대한민국 최상위 엘리트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이리 살아 무엇하는가.

    어머니…….

    "그런데 그분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신세계라니까요."

    "신세계?"

    좋은 곳이지, 좋은 곳.

    아마 돌아오게 되면 이 세계가 천국으로 바뀌어 보일 만큼 좋은 곳.

    근데 죽지는 않겠지?

    죽으려나?

    …알 게 뭐야.

    이지혁은 휘파람을 불며 비치 체어로 가 누웠다.

    인생 뭐 있나, 복불복이지.

    살아 돌아오면 강해지는 거니 고마워해야 하고, 죽으면 험한 꼴 덜 보고 죽는 거니 고마워해야지.

    안 그래?

    * * *

    "나는 안 가도 되는 건가?"

    도가윤의 말에 이지혁은 차가운 커피를 쪼옥 빨며 말했다.

    "넌 필요 없어."

    "어째서?"

    이지혁은 혀를 찼다.

    베라프에서도 클래스라는 게 있듯이 이곳의 능력자들도 클래스가 존재했다.

    굳이 따지자면, 도가윤은 암살자 포지션.

    아무리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지만, 괴수를 상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쓸모가 없으니까."

    "……."

    "괜찮아. 저 잉여 인간도 있는데 뭐."

    "잉여 인간 아니야!"

    순식간에 잉여 인간이 되어버린 정해민이 이지혁에게 우다다 달려들었다가 딱콩 한 방에 발랑 나가떨어졌다.

    "쟤는 캐릭터가 왜 저러냐?"

    니 캐릭터는?

    순수하고 근원적인 질문을 꾹 눌러 삼킨다.

    괜히 지금 이 말을 꺼낼 필요는 없겠지.

    "쓸모가 없어? 나는?"

    "어."

    여지도 없는 대답에 도가윤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군."

    살짝 고개를 끄덕인 도가윤이 묵묵히 입을 닫고 있자, 머리를 문지르던 정해민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넌 말이 너무 심해! 쓸모가 없다니!"

    "쓸모가 없으니 쓸모가 없다고 하지."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어딨어?"

    "여기에도 한 사람이 더 있는 듯."

    "…나?"

    "그래도 말귀는 알아듣네."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지혁을 향해 정해민이 모래를 잡아 뿌렸다.

    손을 덮어 주스를 보호한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돈 좀 벌었냐? 그러다 맞으면 치료비가 엄청 나올 건데?"

    "고소할 건데?"

    "고소하러 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

    "흥! 가윤이가 왜 쓸모가 없어! 얼마나 중요한 앤데!"

    "뭐가?"

    "응?"

    "뭐가 중요한데? 그냥 사람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애잖아."

    "그, 그게 중요한 일이지."

    이지혁이 피식 웃고는 몸을 기댔다.

    "암, 암,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 지하철 노숙자도 중요해."

    "비꼬는 것 봐! 진짜 성격 나쁘다, 너."

    "설마 쥐똥만 하겠어? 너 TV에 안 나온 지 며칠 됐으니 이제 기억하는 사람도 몇 없을걸?"

    그늘로 들어가 무릎을 감싸 안고 '그렇지 않아'를 중얼거리는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답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니, 여전히 그의 앞을 지키고 있는 도가윤이 보인다.

    "왜?"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하다.

    "필요하고 싶다."

    "응?"

    "쓸모 있는 인간. 효율적인 인간."

    쯧.

    "니가 쓸모 있는 분야에 집중해. 사람은 다 똑같은 용도가 아니니까."

    "용도?"

    "니가 아무리 용을 써도 쟤는 못 이겨."

    이지혁이 가리킨 곳에는 강아지만 한 작은 짐승이 손을 핥고 있었다.

    '귀여워.'

    도가윤마저 그 복슬복슬함에 순간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건 오거다!

    겉모습이 저래서 그렇지, 지금이라도 도가윤 정도는 발톱 하나로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는 맹수인 것이다.

    도가윤이 여기서 더 강해진다고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까?

    결코 아니겠지.

    인정하긴 싫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서아영이 쟤를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고 치자."

    "응."

    "그럼 너는 그 서아영을 이길 수 없게 되는 걸까?"

    "……."

    "아니지?"

    "음……."

    틈을 노려 나이프를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서아영이 얼마나 강하든지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클래스와 상성의 차이를 감안해. 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란 말이야. 니가 저길 같이 가서 몬스터를 백 마리 때려잡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별로 없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네 강점을 키워야 해."

    "아……."

    도가윤이 뭔가 말하려는 듯 머뭇대다가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아무리 해봤자 한계야 빤하지만 말이지."

    마지막에 한마디 더 붙여서 사람 복장 뒤집어놓는 짓거리만 안 하면 참 좋을 텐데.

    아니, 좋지는 않다. 덜 엿 같을 텐데!

    "그럼 내 강점을 키우려면 뭘 해야 하지?"

    "하던 거 해."

    이지혁이 숲을 가리켰다.

    "느린 게 아니라 못 느끼는 것뿐이야. 어느 순간, 네 공간 안에 들어온 놈의 종적을 확실히 느낄 수 있게 된다면, 한 단계는 넘는 거다."

    "그러겠다."

    그 말을 끝으로 도가윤이 숲으로 걸어가자 우울한 얼굴의 정해민이 이지혁에게로 다가왔다.

    "그럼 난 뭐해?"

    "너는 할 게 없다. 팝콘이나 가져와라."

    "그러지 말고오오!"

    "가서 춤 연습이나 해! 안무도 만날 처틀리는 게."

    "아……."

    말이 심했나?

    그래도 따박따박 출퇴근시켜 주는 고마운 셔틀인데.

    이지혁이 뭔가 위로를 하려는 순간, 눈이 초롱초롱해진 정해민이 와락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너 내 무대 다 보고 있었구나!"

    "그게 아니야아!"

    왜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되는데!

    기승전결이 이상하잖아!

    이지혁이 달려드는 정해민의 얼굴을 잡아 밀어냈다.

    "아, 저리 꺼져!"

    "너 은근 앞에서는 까칠한데 뒤에서는 챙기는 타입이구나? 그래서 어땠어? 좋았어?"

    "뭘 좋아, 이년아!"

    정해민의 엉덩이를 걷어찬 이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댔다.

    정상적인 것들이 없어, 이 동네는.

    "에이, 그냥 좋았다고 말하면 사인 CD 정도는 줄 수 있는데!"

    "중고로 팔리지도 않는 걸 받아서 뭐하라고!"

    "…안 팔려?"

    다시 시무룩해진 정해민을 보며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쳐도 미쳐도 적당히 미쳐야지.

    "야, 이리 와봐."

    "응?"

    "어떻게 수련하면 되냐고 했었지?"

    "…응?"

    "가자."

    순간, 불안해진 정해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이지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 바퀴 돌아봐야지."

    "한국?"

    "아니."

    "그, 그럼?"

    이지혁이 정해민의 뒷덜미를 움켜잡고는 말했다.

    "우선은 가까운 미국으로 간다!"

    "미국이 어떻게 가까워! 정신 나갔어?"

    "제일 많이 들었으니 제일 가깝겠지! 가자, 셔틀!"

    이게 뭔 개소리야!

    "상식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몰라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어."

    너, 지장 많아 보이는데?

    그렇게 살면서 지장 없다고 하면 안 되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 할 것 아냐!

    정해민이 썩은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이 인간이 한다고 해서 안 한 게 없지.

    그냥 가자.

    "미국 어디?"

    "수도부터 둘러봐야지! 뉴욕으로 가자!"

    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할 수가 없다.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디 보자, 할 말이…….

    "뉴욕에도 내 팬들 많은데."

    썩어버린 이지혁의 얼굴을 보며 정해민은 눈을 돌렸다.

    이게 아닌가?

    "아프리카 오지에도 팬을 만들어줄 수 있는데?"

    "잘못했습니다."

    "가자."

    "응!"

    스슷.

    사라져 버린 이지혁과 정해민을 보며 손을 떠는 한 남자가 있었다.

    "나, 나는……?"

    왜 이 무인도를 그는 홀로 지켜야 하는가.

    있는 사람이라고는 도가윤밖에 없는데, 걔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고…….

    아니, 차라리 혼자 두지, 왜…….

    크르르륵.

    마수들과 함께인가.

    이지혁이 사라지자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오는 괴수들을 보면서 최정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아닌데.

    너희, 왜 다가오는 거니?

    친해지려고?

    아니면… 혹시?

    "배고프니?

    크륵.

    방금 고개를 끄덕인 거 같은데?

    "진짜 배고파?"

    크륵.

    아, 배고프구나, 배고파.

    그럼 먹어야지. 이 주변에 먹을 게…….

    오식이가 최정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나야?"

    아, 나구나. 내가 먹을 거였네.

    최정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스슷.

    "아, 건망증. 진짜!"

    정해민과 함께 섬에 나타난 이지혁이 짜증을 내며 천막을 찾았다.

    "식량을 안 줬네."

    먹을 곳도 없는 곳에다 던져 놨으니 먹을 건 좀 줬어야 하는 건데, 아무 생각 없이 사람만 던져 놨다. 잘못했으면 다 굶겨 죽일 뻔했네.

    "식량이, 식량이……."

    어?

    저거 뭐지?

    이지혁의 눈에 천막 앞에서 타오르는 커다란 불꽃이 보였다.

    "응?"

    "웬 불이야?"

    "그러게."

    누가 캠프파이어라도 하나?

    불을 향해 다가간 이지혁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최정훈이 웃통을 깐 채 양손으로 미친 듯이 냄비를 휘두르고 있었다.

    "어?"

    그리고 그 주변에 마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땀을 휘날리며 냄비를 돌리는 최정훈의 모습은 뭔가 멋지기까지 했다.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그림이 되는구나.

    "뭐해요?"

    "이, 이지혁 씨!"

    이지혁을 본 최정훈이 두 눈으로 눈물을 뿜으며 달려왔다.

    "응?"

    "어허허허헝."

    "왜 이래, 이 사람!"

    "쟤들이! 사람 잡아먹으려고!"

    헐.

    그러니까… 쟤들이 잡아먹으려고 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있는 재료를 모조리 요리해서 바쳤다는 것인가?

    이게 뭔 개소리야?

    "쟤들, 사람 못 먹는데?"

    "네?"

    "당연히 금제 걸어놨죠. 그 정도야 기본이잖아요."

    "아……."

    "뭔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요. 그리고……."

    이지혁이 오식이를 부르더니 머리를 내려쳤다.

    깨갱!

    "어디 건방지게 사람 가지고 장난을 치고 그래!"

    한 대 얻어맞은 오식이가 바르르 떨더니 배를 까고 누웠다.

    "어쭈, 이게 엄살을 부려? 어디 한 대……."

    아, 그런데 얘 왜 이렇게 귀엽지?

    오건데…….

    이참에 오거 새끼 한 마리 분양 받아볼까?

    이지혁이 고민하는 와중에 최정훈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삼켰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처절한 짓은 다 뭐였다는 말인가.

    옆에서 마수들이 입맛을 다실 때마다 오금이 저려 지릴 뻔했는데!

    어떻게든 살아보겠답시고 사람도 아니고, 몬스터들에게 요리까지 해서 바쳤는데, 그게 다 뻘짓이었다니!

    "어흑."

    최정훈의 절망을 느끼며 이지혁은 혀를 찼다.

    '이 양반도 갈수록 허당이 되어가네.'

    천막으로 들어간 이지혁이 눈을 크게 떴다.

    "어? 밥 다 어디 갔어?"

    배고플 때 먹으려고 대량으로 공수해다 놓은 통조림들이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쟤들이 다 먹었어요."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밥 준 적이 없네?

    "오식아."

    컹.

    "사람 밥 뺏어 먹지 말고, 배고프면 고래라도 잡아먹어."

    컹.

    이러면 됐지, 뭐.

    이지혁은 남아 있는 캔을 게이트에다 던져 넣고는 다시 닫았다.

    남은 건 제 팔자지.

    볼일을 끝낸 이지혁이 정해민을 불렀다.

    "다시 가자!"

    "저, 저도 데리고 가세요!"

    "응?"

    최정훈이 이지혁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혼자 두지 말라구요!"

    "다 큰 아저씨가 왜 이래요! 애처럼!"

    야, 이 미친놈아!

    이 무인도에 저 괴물들이랑 두면서 아저씨가 문제냐!

    아저씨도 사람인데!

    "제발 좀!"

    "알았어요. 야, 이 양반도 데리고 가자."

    "…그럼 옷 좀 입으라고 해요. 그전에 땀 좀 씻고."

    "그러네. 더러워."

    "으흑."

    서러움이 물밀 듯 밀려오지만, 뭘 어쩌겠는가.

    정해민이 이지혁과 씻고 온 최정훈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하자 섬은 조용한 적막으로 물들어갔다.

    * * *

    "지원은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온다고 했습니다!"

    "게이트가 당장 열릴 판인데!"

    정인수가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열릴 듯한 레벨 5 게이트를 보며 소리쳤다.

    "최정훈 씨 바꿔봐."

    "지금 온다고……."

    "알았으니까 연결하라고, 이 새끼야!"

    "예."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으니까 안 그래도 돼요."

    정인수가 반색하며 고개를 돌리자 이지혁을 위시로 한 NDF의 인물들이 보였다.

    "이지혁 씨! 게이트가 열리려고 합니다! 아니, 열려요! 저기!"

    정인수가 가리킨 곳에서 게이트가 진동을 하더니, 문이 열리며 괴수들이 악다구니를 트며 튀어나왔다.

    "어떻게 좀……."

    "쉿."

    정인수의 말을 가로막은 이지혁이 씨익 웃더니, 앞으로 나섰다.

    이거 진짜…….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게이트엔 게이트지!"

    이이제이, 이독제독이 뭔지 보여주지!

    "소개합니다, 여러분."

    이지혁의 손에서 검은 마나가 뿜어져 나와 기묘한 문양을 만들더니, 이내 커다란 검은 게이트를 만들어냈다.

    "지옥에서 돌아온 귀환 전사들입니다."

    우웅!

    게이트가 가볍게 떨리더니, 그 안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

    "이지혁, 이 개새끼 어딨어!"

    "죽인다! 죽일 거야!"

    그 광포한 기세에 몬스터들마저 주춤했다.

    이지혁을 찾던 이들이 눈앞에 있는 몬스터들을 보더니, 눈을 희번덕대며 소리쳤다.

    "고기다아아아!"

    최정훈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가여운 사람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세상에는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은 일도 있는 법이었다.

    * * *

    이지혁은 거지꼴이 되어 튀어나오는 애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래?"

    물론 거지꼴이야 되는 게 맞다. 당연히 되어야지.

    그런데 문제는 방향이 좀 이상하다는 거다.

    몬스터와 싸우고 지옥을 겪으면서 의복이 날아가고 상처가 생기고 더러워진 거야 다 이해하는데, 저 미묘하게 낡아 보이는 의복이 이상하다.

    몇 달은 입고 있어야 저 정도로 바래지 않나?

    거의 걸레 조각이 되어 있는 옷들을 보니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

    "어? 음? 아? 아!"

    아, 맞다!

    이지혁이 손바닥을 짝! 쳤다.

    생각해 보면 그가 베라프에서 천 년을 넘게 보내는 동안 이쪽에서는 오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시간 축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밀어 넣어버렸네?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아, 실수했네."

    "아는 무슨 아야! 이 새끼야!"

    "으아아아아! 죽여 버린다아아아!"

    "저 새끼 잡아!"

    농축된 분노와 증오와 울분이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자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좀 세졌네."

    가장 뒤에 있던 서아영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개……."

    "에헤이!"

    최정훈이 앞으 가로막자 서아영이 눈을 부라렸다.

    "뭐! 뭐! 왜!"

    "헐……."

    예전과는 다르게 과격한 반응과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표정에 당황한 최정훈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저 새끼 뜯어 먹을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 지금 진정이라고 했어요?"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니. 그런데 나한테 왜 이러니.

    최정훈이 진땀을 뻘뻘 흘릴 동안 이지혁은 휘파람을 휘휘, 불더니 씨익 웃었다.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지."

    "실수우우우우?"

    모두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이쪽이 문제가 아닐 텐데?"

    그제야 서아영의 눈에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이 다시 들어왔다.

    아무리 이성이 반쯤 날아갔다고는 하나 본분을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이것들부터 처리합시다."

    "라져!"

    서아영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NDF의 요원들이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오?"

    이지혁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강해진 건 알겠는데,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봐야 제대로 감이 잡힐 테니까.

    전방으로 달려들던 박성찬이 바닥에 닿을 듯 몸을 숙이더니, 빙글 회전하며 전방의 몬스터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몬스터의 가슴팍이 터져 나가며 포탄처럼 뒤로 쏘아졌다.

    주변의 몬스터들이 휘말리며 만들어낸 공간을 스핏 파이어가 파고들어 사방으로 불꽃의 탁류를 뿜어낸다.

    스핏 파이어의 머리 위로 뛰어오른 루드라가 불꽃을 밀어 바람에 실어 퍼뜨렸다.

    그 와중에 서아영은 양손에서 불꽃을 끌어모아 통렬한 일격을 준비했다.

    "빠져!"

    불꽃의 바람으로 아비규환이 된 몬스터들의 무리로 서아영이 만들어낸 붉은 태양이 떨어진다.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더 강해지기는 했는데, 방향성이 좀 이상한데?

    그가 원한 건 개개인의 강함이었는데, 연계 요소가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개인이 강해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뭐, 그것도 좋겠지.'

    세상일은 언제나 마음처럼은 되지 않는 법. 그렇게라도 강해졌다면 좋은 일이다.

    화아아악!

    붉은 태양이 몬스터 무리에 작렬하고 난 후에는 검은 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전부가 나선 것도 아닌데 게이트를 터뜨릴 듯 튀어나오던 몬스터의 절반 이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남은 몬스터들 역시 순식간에 마저 정리가 되고 있었다.

    레벨 5 게이트 하나에 쩔쩔매던 과거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지혁이 그 강렬한 화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는 되어야지, 그럼.

    근데, 음…….

    뭐지, 저 눈빛들은?

    희번덕대는 눈이 자신에게 모인 것을 알아차린 이지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방위사고 뭐고 이지혁의 주위에서 물러나 있었다. 최정훈마저 이지혁에게서 멀리 떨어져서는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으응?"

    뭐지, 이 반응은?

    "이.지.혁. 씨."

    "네?"

    서아영이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이지혁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이유를. 들어볼까요?"

    "무슨 이유요?"

    "우릴 반년이나 거기에 처박아놓은 이유 말이죠."

    "반년?"

    오, 생각보다 많이 지났네.

    현실에서 일주일이 지났는데 반년이면, 시간 비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십 대 일 정도인가?

    그 정도면 양호한 거지! 난 비율이 이백이 넘었는데!

    너희, 베라프 같은 데로 갔으면 그새 5년은 지났어!

    "뭐, 세졌으면 된 거죠."

    "반년이나 사람을 박아놓고는 뭐라고?"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죠."

    "실수우우우?"

    그 지옥 같은 곳에 사람을 반년이나 처박아놓고 실수라고 하는 건가, 지금?

    반년을 버틴다는 게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상이나 하고 말하는 걸까?

    "실수, 실수라니……."

    이지혁이 조금 겸연쩍어 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밥도 꼬박꼬박 넣어줬는데."

    서아영의 뒤를 지키던 이들이 쑥덕댔다.

    "그건 축복이었지."

    "하늘에서 밥이 떨어졌다."

    "각국의 요리가 다 떨어지는데 타이밍 잘 못 잡아서 몬스터들이 처먹었을 때는 정말 울 뻔했다."

    "배 갈라서 다 빼 먹어놓고는 뭔 소리야?"

    "맛이 다르잖아!"

    서아영이 그들을 째려보았다.

    "시끄러워요!"

    "넵."

    쑥덕대던 이들을 진압한 서아영이 다시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열흘에 한 번 정도씩 각국의 음식들이 다발로 떨어졌다. 그나마 그거라도 있었으니 버텼지.

    그렇다고 해서 고맙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고마울 리가 있나!

    현실에 있었으면 그런 거야 돈만 주면 언제든 먹는 건데!

    근데 왜 각국의 음식이지?

    다양하게 먹으라는 건가?

    "혹시 그동안 뭐하셨죠?"

    "뭐, 그냥저냥……."

    말끝을 흐리는 이지혁을 야리던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서아영이 보내는 무언의 압박과 이지혁의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고민하던 최정훈이 최선의 답변을 찾았다.

    "세계 각국으로 여행을 다니셨죠."

    꼰지르기.

    서아영의 입가가 과격하게 뒤틀린다.

    우드득.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놓고 속편하게 여행이나 다니셨다?

    "맞아요.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도 실수 한 번 할 수 있는 거겠네요. 그렇죠?"

    "네?"

    서아영의 말이 끝나자 NDF의 요원들이 슬금슬금 이지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이지혁이 바보처럼 헤, 웃으며 말했다.

    "죽여 버리겠다?"

    서아영이 정색했다.

    "설마요. 어쨌든 덕분에 강해진 건 사실이죠."

    분명 사실이다.

    어두컴컴해 사물도 분간이 잘 안 가는 세상에서 끝도 없이 몬스터와 조우하며 싸우고 또 싸우고, 또 싸우다 보니 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사의 고비는 수도 없이 넘겼다.

    아마도 죄도 없는 기타무라 렌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살아 돌아온 사람은 셋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강해졌다.

    고통을 겪은 만큼 강해졌다. 그러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감사해요, 덕분에 강해질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서아영이 이를 으드득, 갈아붙였다.

    "저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보셔야죠. 그렇죠?"

    "그러다 보면……."

    "실수도 하는 거지."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는 이들을 보며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싸워봐도 대충은 알 것 같은데?"

    이지혁의 말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에이, 에이, 모르지."

    "알 수가 없지, 그런 거."

    "하지만 몸에 새긴 것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그랬듯이 말이죠."

    "특히 그 주둥아리는 조심하셔야겠네요."

    "맞아, 주둥아리."

    슬금슬금 접근하는 NDF 요원들의 얼굴에 웃음과 분노가 동시에 자리 잡았다.

    "죽을 일이야 있겠습니까? 렌도 치료 능력이 엄청 늘었습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되요."

    "맞습니다. 뭐, 어디 한두 군데 부러지는 것은 각오해야 할지 모르지만요."

    "하지만 그 주둥아리만은 절대 원래대로 돌려주지 않을 거야."

    "찬성."

    "확 꿰매 버리면 좋겠어."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이 주둥아리가 어떤 주둥아린데 그걸 자기들 마음대로 변형하겠다는 말인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시도 쉬지 않던 이지혁의 입이다. 그런데 그걸 뭐 어쩌겠다고?

    "하……."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뭐, 물론 이지혁의 잘못이 조오금, 아주 조오금 있기야 하다.

    아주 눈꼽만큼은 잘못했지, 뭐.

    그런데 겨우 그 정도의 잘못을 했다고 이리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핍박한다는 것은 정도와 예의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던가!

    세상이 각박해도 정도가 있지!

    "이러다 후회할 텐데?"

    서아영이 눈을 부라렸다.

    "어차피 죽빵 한 대 못 날리면 배 아파서 죽어요."

    "죽빵 한 대로는 잠도 못 자지!"

    "삼 일 밤낮을 두들겨도 분이 풀릴까 말깐데!"

    "우리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본인 걱정을 하시는 게 먼저겠지요."

    이지혁이 허허 웃었다.

    이 사람들 보게?

    아니, 거, 뭐, 사람이 좀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감을 잃었나?

    불과 일주일…….

    아, 얘들한테는 반년 지났구나.

    "때가 됐네."

    원래 타작은 주기적으로 해줘야 하는 법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뱃속에 반항심이 항상 무럭무럭 자라나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마다 뿌리를 뽑아줘야 다시 자라날 때까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는데, 진짜 후회 안 하겠어요?"

    "누가 후회할지는 봐야 할 거 같지 않아요?"

    "크, 전형적인 대사에 몸이 다 떨리네요."

    이지혁이 몸을 의도적으로 한 번 부르르 떨어 젖혔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이 모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오.

    진짜 저놈의 주둥아리.

    저 주둥아리를 뭉개는 꿈까지 꿨다, 진짜.

    "진짜 뒈진다?"

    "그러다 다치면 억울함이 두 배."

    "이 상황에서까지 깐죽대고 싶냐?"

    "뭐, 별 상황도 아닌거 같은데. 그런데 깐죽대는 걸로 보였나요? 아닌데? 난 그런 적 없는데?"

    "야이 개자식아!"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들썩이는 박성찬을 몇 명이 잡아끌었다.

    혼자 달려들어서야 결과가 빤하다.

    몇 번이고 계획하고 계획했던 대로 철저하게 나눠서 공략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진정해요, 성찬 씨!"

    "으, 저 새끼… 진짜……."

    "와. 잘하면 한 대 치겠네?"

    "으아아! 이 새끼야아!"

    흥분해서 얼굴까지 뻘게진 박성찬을 보며 이지혁이 혀를 찼다.

    정신적으로는 성장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 정도에 저리 흥분해서야.

    적당히 놀아줬으니…….

    이제 슬슬 군기를 다시 잡아야지.

    이지혁의 우수가 검은 문양을 그려내고 시커먼 홀이 열렸다.

    "으으."

    "안 돼!"

    이지혁이 검은 게이트 만들어내자마자 기겁한 요원들이 뒤로 물러섰다.

    "아아, 걱정 말아요. 다른 거니까."

    대신 재미있게 놀아봐야지?

    커어어엉!

    게이트 안에서 오식이와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미리 말해두지만, 몬스터와 싸웠다고 그리 자신만만해할 건 없어요."

    "……."

    "내가 몬스터보다 무서우니까 말이죠."

    이지혁의 촉수에서 마나를 공급 받은 오식이가 거대하게 덩치를 불리며 서아영들을 덮쳐들기 시작했다.

    "반란 진압의 시간이다. 제군들!"

    * * *

    커어어엉!

    오식이의 포효가 대원들을 휩쓸었다.

    "큭!"

    본래의 능력을 모두 회복한 오거의 위세는 과연 대단했다. 수많은 몬스터들과 싸워온 NDF들조차도 순간적으로 넋이 나갈 정도의 압도적인 위압감.

    그 하울링 앞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런!"

    서아영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비록 6개월 전의 일이지만 오식이와는 끝도 없이 싸워왔고,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따져 보면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힘을 최대로 발휘한 오식이를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제약을 풀어버린 오거는 너무나도 두렵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크아아아!

    오식이가 흉성을 드러내고 울부짖는다.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그 광경을 지켜본 정해민이 몸을 부르르 떤다.

    항상 귀여운 강아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깜빡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오식이는 몬스터였다. 그리고 지금 그 몬스터가 그녀의 친구들을 노리고 있었다.

    "막아? 왜?"

    이지혁은 태연했다.

    "저러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해?"

    "나면 나는 거고, 내가 냈나? 지들이 와서 갖다 박는데, 어떻게 피해? 나는 과실 없어요."

    아니, 거기가 주차 금지 구역입니다, 이 양반아.

    사람들을 그만큼이나 괴롭혀 놓고 죄가 없다니.

    크르르르.

    오식이가 NDF들을 위협하는 동안 다른 마수들 역시 쉭쉭대며 오식이의 옆을 채웠다.

    오식이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다른 마수들마저 위협을 가하자 NDF의 요원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진형 잡아요!"

    서아영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펼쳐지자 물러서던 다리가 멈추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잖아?

    동요가 사라지자 투지가 몰려온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한 번 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그들의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혈기와 능력자들의 투기가 서로를 겨누며 팽팽한 대치를 만들어냈다.

    정적.

    숨소리마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정적.

    그 긴장된…….

    "저어……."

    최정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요!"

    서아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배신자!

    "아니, 그게 아니고……."

    "뭐예요! 빨리 말해요!"

    최정훈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손가락을 들어 게이트를 가리켰다.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요?"

    "네?"

    모두의 시선이 게이트로 향했다.

    그것은 거대했다.

    그리고 강했다.

    태어날 때부터 두려운 것이 없고, 언제나 강자의 입장이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지루하면 물어뜯었다.

    누군가 그것을 재앙이란 뜻으로 파둠이라 칭하기 시작했을 때, 파둠은 그것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파둠은 공간을 유영하는 중이었다.

    눈앞에 푸른 유리와 같은 게이트가 열렸을 때, 파둠은 홀린 듯 게이트 안으로 향했다.

    새로운 먹이와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파둠보다 먼저 게이트로 뛰쳐 들어간 나약한 것들의 뒤를 따라서.

    그리고 파둠은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새로운 세계로.

    이곳에서도 파둠은 거대하고, 강하고,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 했는데…….

    꿈뻑.

    파둠은 커다란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시야에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사납고 강하고 포악해 보이는 괴물들과 그 괴물들에 맞서고 있는 조그마한 것들이 보였다.

    괴물들이야 그렇다 치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저 조그만 것들이 뿜어내는 저 위험한 기운은 대체 뭐라는 말인가.

    파둠은 자신의 손보다도 작은 생명체들에게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목을 움츠렸다.

    뭐지, 여기는?

    지옥인가?

    아니, 지옥이라도 그렇지.

    보통 저런 것들이 저리 떼거리로 몰려 있나?

    와, 좀 너무하지 않나?

    괴물들과 조그만 생명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일시에 몰린다.

    움찔한 파둠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갔다.

    괴물과 작은 인간들이 뭔가 쑥덕대더니, 몸을 돌려 파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카아?

    파둠이 게이트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벼락같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게이트는 계속해서 파둠을 튕겨낼 뿐, 행복하고 즐거웠던 그의 고향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파둠이 떨리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목격한 것은, 거대한 털복숭이의 괴물이 그 우악스러운 주먹을 날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콰드득!

    일격에 갑피가 부러지고 내장이 뒤틀린다.

    구멍이란 구멍으로 모조리 체액이 튀어나가는 충격에 파둠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콰득!

    콰드득!

    주먹와 이빨, 불과 뇌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거대한 충격 앞에 발끝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파둠은 보았다.

    진정한 악마의 모습을 말이다.

    악마는 천천히 걸어서 그에게 다가왔다.

    작은 생명체의 생김새를 세세히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그에게 없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 작은 악마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먹어 치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파괴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세계에 사는 생물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피의 기운.

    보통은 살짝 어리는 듯한 기운이 끝도 없이 뒤엉켜 거대한 족쇄처럼 악마의 몸을 휘어 감고 있었다.

    파둠의 육체가 학질에라도 걸린 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작은 생물의 손에서 시커먼 촉수가 뻗어져 나온다.

    파둠은 작은 촉수의 앞부분이 끝도 없이 벌어지며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는 것을 보고는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뿐.

    촉수는 파둠을 놓치지 않고 뒤덮었다.

    세상이 암흑으로 물든다.

    전신을 둘러싼, 점막 같기도 하고, 천 같기도 한 기묘한 감촉의 막들이 꿈틀꿈틀 요동치며 파둠의 전신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발성기관이 없는 파둠으로서는 단지 몸을 떨어 미약한 비명을 지를 수 있을 뿐이었다.

    우득, 우드득.

    육체가 우그러든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지독한 고통과 함께 육체가 부서지고 또 부서져 뭉쳐 든다.

    재앙?

    이것이야말로 재앙이다.

    파둠이 재앙이라는 뜻이라면, 그 단어는 자신이 아니라 눈앞의 이 작은 악마에게 붙어야 마땅할 것이다.

    뇌가 찌부러져 의식이 날아가는 순간에 그가 본 것은 검은 막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어둠의 구렁텅이였다.

    "쩝……."

    이지혁은 몸 안으로 남김없이 빨려 들어온 마나를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좋긴 한데, 조금 뭐랄까…….

    불순하다랄까?

    상성이 맞지 않던 요정들과는 다른 의미로 좀 불편한 마나였다.

    정제되지 않고 불순물이 마구 섞인, 불량 식품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았다.

    "이것저것 따질 때는 아니지만."

    소화를 마친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마저 해야죠?"

    "……."

    서아영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흉성을 드러낸 오식이를 보고 나니 이지혁에 대한 판단도 뭔가 급속도로 수정되고 있었다.

    오식이가 저만큼 무서운데…….

    그 오식이를 말 그대로 개 패듯 패는 저 사람은 얼마나 강한 걸까?

    높은 산을 보기만 한 이는 산의 높이를 알지 못한다.

    직접 올라본 이들만이 산이 얼마나 높고 험준한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서아영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막연하게나마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그 강함에 도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이 사람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알 수 없다.

    위기 자체가 없던 사람이니까.

    진심이 되었을 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저 평소에 보여주는 모습만으로도 자신들 전체가 달려들어도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

    "저기요."

    "…네?"

    "안 덤벼요? 이쪽은 준비 끝났는데?"

    "자, 잠시만요."

    "더 기다려 주실 생각인가 보네. 준비 좀 더 해요? 이렇게 따뜻한 온정을 받아본 적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적응이 잘 안 되는데?"

    "누가 온정을 베풀었다고!"

    "아니면 뭐……."

    이지혁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더없이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덤비시든가."

    선뜻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서아영이 움츠러들자 다른 능력자들도 슬슬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얼마나 막연한 존재인지.

    그 실체가 도저히 잡히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지난 6개월간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다, 아는데…….

    서아영이 이를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는 넘어갈 수 없다.

    끔찍한 괴물들과 싸우면서 버텨야 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목이 말라 괴물들의 피를 마시고, 배가 고파 괴물의 살을 뜯으며 버텨야 했던, 그 끔찍했던 상황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서로 싸우고 충돌하면서도 이지혁을 떠올리는 끓어오르는 증오만으로 버텨온 반년이다.

    이성적으로 이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어차피!"

    으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죽기밖에 더하겠어?"

    서아영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 투지에 다른 이들도 감화되었는지 불타는 눈으로 이지혁을 응시한다.

    "아, 뜨거라."

    너스레를 떤 이지혁이 손을 까딱했다.

    "와요, 와. 내가 먼저 치면 그걸로 끝이니까, 선공쯤은 받아줘야지."

    "후회할 텐데?"

    "참 남 걱정 많이 해주시네. 마더 테레사세요? 자비심이 막막 넘쳐서 남만 보면 막 퍼주고 싶고 그러신가 보네?"

    "이죽거리는 것도 그걸로 끝이야!"

    서아영의 수신호에 따라 능력자들이 일제히 이지혁에게로 달려들었다.

    얼핏 무작정 달려드는 것 같지만, 교묘하게 서로가 서로를 커버하는 진형.

    대부분은 당하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이지혁에게 닿아 응징의 철퇴를 쑤셔 박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진형이었다.

    살을 주고 뼈를 끊는 게 아니라 뼈를 주고서라도 살점 하나만큼은 뜯어먹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진형을 보며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많이 늘었다니까.'

    예전이었다면 저런 식의 진형을 짜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죽더라도 다른 이를 앞으로 보내겠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지는 진형은 망국의 현실을 앞둔 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방향이 어쨌든 마음가짐과 효율성이라는 측면을 깨달았다는 것에서 박수를 쳐줘야겠지만…….

    "헤헹."

    그런 거 없다.

    장담컨대, 이지혁은 이 세상뿐 아니라 전 차원을 통틀어서 저런 식의 공격을 가장 많이 상대해 본 사람이다.

    이지혁의 몸에 생체기 하나라도 내겠답시고 모든 것을 내던지며 달려들던 이들이 한둘이었겠는가.

    그가 불사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륙의 이름 높은 무인과 신관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가며 이지혁을 노려왔다.

    그럼에도 이지혁은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때에 비하면 이들의 공격은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조금 거슬리는 부분은…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는 것뿐.

    하지만 그것조차 너무나 간단하다.

    "바인드."

    이지혁의 손에서 얽힌 수인이 마나의 넝쿨을 만들어 NDF들을 움켜잡았다.

    "뭐, 뭐야, 이거!"

    "놔라! 놔!"

    "안 끊어져!

    발악하는 NDF들을 보며 이지혁은 혀를 찼다.

    멍청한 것들.

    이지혁이 주로 방출형 마법과 촉수를 이용한다는 것에 착안해 동시 공격으로 틈을 만들어보려 한 모양인데…….

    필요가 없어서 안 쓴 거지, 이지혁은 공격 마법에 있어서는 베라프 역사상 다시없을 경지에 오른 이다.

    마도사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기도 모호한 존재.

    "반항은 너무 이르지."

    아직 애송이들 주제에 말이야.

    "크윽!"

    "이 새끼야, 이거 안 풀어?"

    이 새끼?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건가?

    "이 새끼?"

    박성찬이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그래! 이 개새끼야!"

    우웅!

    이지혁의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커다란 검은 홀을 만들어내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인간이 아무리 잔인해도 그건 아니지.

    이제 겨우 나왔다! 이제!

    "이 새끼?"

    박성찬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하.하.하. 이지혁 씨, 그게 아니고……."

    "이. 새.끼?"

    "아, 안 돼에에! 이지혁 씨! 이지혁 님! 형님! 이러지 마십시오! 으아아, 잘못했……."

    넝쿨에 잡혀 게이트 안으로 처넣어진 박성찬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박성찬을 집어삼킨 검은 게이트로 향했다.

    "또 불만 있으신 분?"

    "……."

    게이트가 슬금슬금 앞으로 전진하자 사색이 된 이들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으면 죽었지, 저기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지혁이 마나의 넝쿨을 해제하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제군들."

    "……."

    "제군들?"

    "예!"

    고개를 끄덕인 이지혁이 담배를 문 채 말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거다. 더 강해지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사악하게 말려 올라간 이지혁의 미소를 보며 남은 이들은 하나같이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느꼈다.

    불과 두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NDF는 완전히 이지혁의 손에 떨어졌다.

    * * *

    "아이고, 못해먹겠다."

    NDF에서 나온 이지혁은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베라프에서 돌아오고부터는 여유가 가득한 삶이었건만, 최근 들어서는 뭔가 바빠진 느낌이다.

    그래도 이제 한 가지는 해결했으니까…….

    "좀 쉬어야지."

    사람이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 잠깐 무리했다고 이리 지치나.

    음…….

    아닌가?

    이지혁이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육체적으로는 딱히 문제가 없다. 육체적인 피로는 아니다.

    그럼 정신적인 피로란 말인데…….

    겨우 이 정도로?

    "흐음……."

    따져 보면 일리가 있는 것이, 이지혁이 베라프에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정신이 리셋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원래라면 미쳐도 벌써 미쳤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리셋에 정신적 피로도까지 포함이 되었다면 이지혁은 천 년이 넘도록 정신적 피로를 겪어보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에 대한 면역이 없는 것이다.

    '이거, 정신계 마법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전에야 그냥 이뮨이었지만, 지금은 절대적 고정이 없는 상태니 바로 걸려서 빌빌댈지도 모른다.

    "으으, 끔찍하다."

    현혹이라도 걸리면 그날로 난리가 나는 거다.

    물론 이지혁이 가진 마법적 지식이나 육체 안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는 마나가 있으니 저항이야 극을 찍었다고는 하지만, 절대와 극은 다르다.

    천만분의 일이라도 걸릴 확률이 있다는 게 찝찝했다.

    "뭐가 끔찍한데?"

    "헐!"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아무도…….

    "밑을 봐! 밑을!"

    "아?"

    고개를 내리자 정해민이 씩씩대고 있었다.

    "일부러 그랬지?"

    "귀신인 줄!"

    "너 진짜 성격 나쁜 거 알아?"

    "넌 아이돌이 진짜 한가한 거 아냐?"

    정해민이 충격 먹은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니야. 원래 스케줄 꽉 차 있는데, 내가 빼달라고 한 거야……."

    "기획사가 어떤 놈들인데 잘나가는 연예인이 바쁘다고 스케줄을 빼줘?"

    "아니, 진짜……."

    "글고, 너 그룹 아냐?"

    "으응."

    "남은 애들은 다 활동하지?"

    "응."

    "그럼 빤하네. 너 없어도 잘 돌아가는 거 보면 이제 인기 떨어진 거지."

    "아니야! 아니거든! 나 인기 많거든!"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기 많겠지."

    "그래!"

    "하지만 아이돌이 그 나이면 끝물인 거지. 그룹 깨면 이미지 안 좋으니까 데리고는 가지만, 결코 센터에는 세우지 않는, 그런 멤버?"

    정해민이 비틀거렸다.

    그 살짝 질린 듯한 얼굴을 보며 이지혁이 혀를 찼다.

    "정곡이었나?"

    "아, 아니거든?"

    "그래서 마지막으로 센터에 서보신 게?"

    "…말 안할 건데?"

    "기억이 안 나시겠지. 워낙에 까마득하니까! 아주 아주 오래된 고대의 기억까지 유전자 레벨로 파고들어 가야 겨우겨우 바랜 기억 하나를 찾아내겠지!"

    "2년밖에 안 됐단 말이야!"

    "헐, 세상에. 소속사가 무슨 자선단체도 아니고, 할머니를 센터에 세우나? 양로원 투어라도 갔어?"

    울먹울먹.

    바짓단을 움켜잡고 울음이 터지기 직전까지 간 정해민의 어깨 위로 이지혁이 손을 올렸다.

    "진정해, 진정해. 넌 울어선 안 돼."

    "으응?"

    "주름 생겨. 답도 없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음파 공격이 터져 나오는 정해민을 피해 이지혁이 멀찍이 달아났다.

    "아악! 내 귀!"

    수많은 NDF의 능력자가 달려들었음에도 조금의 대미지조차 주지 못한 이지혁을 정해민이 물러나게 만들었다.

    "아! 미쳤어?"

    하지만 정해민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지혁의 눈에 사방에서 열리는 창문과 문들이 보였다.

    소음 폭탄급 울음에 사람들이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뭘 봐! 팍, 씨!"

    고개를 숙인 작은 여자와 인상 더러운 남자를 본 사람들이 혀를 차며 창문을 다시 닫았다.

    "야, 고개 들지 마."

    어설프게 여기서 정해민이라는 것을 들켰다가는 귀찮아질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아, 그만 울어!"

    "으아아아아아앙!"

    아, 이거… 두고 갈까?

    따져 보면 내가 데리고 온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얘를 챙겨야 하는 거지?

    그냥 가면 되잖아?

    이지혁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내버려 두고…….

    "에잉!"

    "쯧쯧쯧쯧."

    그러자 갑자기 창문들이 슬그머니 다시 열리면서 혀 차는 소리와 대놓고 못마땅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놈이……."

    "그냥 가려는 거 봐봐. 누가 키웠는지!"

    아닌데요?

    그런 거 아닌데요?

    저, 이 사람이랑 아무 관련 없거든요?

    그런 난봉꾼 보는 눈으로 사람을 보지 마시죠!

    내가 공포와 이질감의 대명사였지, 그런 시선은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거든요?

    와! 와! 이게 뭐지?

    환장하겠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살아본 적은 없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라프의 타인과 이곳의 타인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여긴 우리 동네란 말이야!

    엄마가 가게라도 열었는데 저 집 자식 놈이 난봉꾼이라는 소문이라도 나면 그게 뭔 망신인가!

    이지혁은 부들부들 떨며 사운드 밤(Sound Bomb)을 날리고 있는 정해민에게 다가갔다.

    "그만 처울어!"

    통하지 않는다.

    "까까 사 줄게."

    "으아아아아아아앙!"

    통하지 않는다.

    "빽 사 줄게, 빽!"

    "으아아아아아앙!"

    더 크게 운다.

    와, 이거 어떡하지?

    보통 울음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발성기관을 날려 버리는 걸로 해결하던 사람이다 보니 대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라, 생각해라…….

    "크흐흠, 근데 내가 보기에는……."

    울음소리가 잦아들며 힐끗 옆을 본다.

    가증스러운 계집.

    "그… 뭐, 개중에는 니가 제일 나은 듯."

    "개중?"

    "그, 니 멤버들 중에서는 니가 좀 나은 편이지."

    "…진짜?"

    "그래. 여자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어. 얼굴이 이뻐야지."

    어차피 마족이나 드래곤 같은 것들에 비하면 너나 걔들이나 핏덩어리지.

    핏덩어리 중에 누가 더 늙은 핏덩어리인가를 따지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야.

    "정말?"

    이지혁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간악한 계집!

    사이가 좋다며 멤버들 칭찬을 늘어놓고 친자매 같니, 동생들 같니 수다 떠는 걸 분명히 봤는데!

    개중에 이쁘다니까 반색하는 꼬라지 보소!

    하지만 그걸 말했다가는 다시 폭탄이 터지겠지.

    "그럼."

    겨우 표정을 수습한 이지혁이 웃으며 말하자 정해민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헐……."

    뭐지? 왜 예쁘지?

    이거, 감정 이상하네.

    예쁘긴 한데… 이런 상황에 저리 웃으니까 진짜 싸가지 없어 보인다.

    이거… 뭐라고 해야 하지, 이 기분을?

    미묘하다, 매우 미묘해!

    "그러니까 그만 울고, 빨리 가라! 응? 좀 가!"

    "알았어."

    "그래."

    하지만 정해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안 가?"

    "같이 가."

    "어딜 같이 가! 내가 너랑 왜 같이 가!"

    "너희 집 가니까."

    그래, 집에 가야지.

    그런데 그럴 때는 너희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고 하는 거다.

    응?

    "우리 집?"

    "응, 너희 집."

    "…왜? 니가 우리 집에 왜 오는데!"

    "저번에 어머니랑 예원이한테 사인 CD 주기로 했거든. 주기로 했으면 챙겨야지."

    하나의 팬도 놓치지 않는 것인가…….

    눈물 나는 팬서비스로다.

    "그럼 줘. 내가 가져다줄게."

    "안 돼."

    "또 왜 안 되는데!"

    "사진 찍어야 할 거 아냐. 사인 CD 증정 장면 찍는 건 기본 아냐?"

    "사진은 또 뭐하러."

    "요즘 누가 CD 듣는다고 사? 그게 다 기념품 같은 거잖아. 사진 하나 있으면 더 좋지."

    "하……."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여기서 또 안 된다고 하면 울고불고 할까 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지혁은 한숨을 푹 쉬고는 집을 향해 걸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베라프에서 그 개고생을 하고, 이 동네에 와서도 이리 시달려야 하나.

    뭔 죄를 지었기에 만나는 여자마다 제대로 된 인간이 없는가!

    "에효……."

    "뭔 한숨을 그리 쉬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지혁이 눈을 희번덕대자 정해민이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너, 누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설명하기 귀찮으니, 그냥 맞을래?"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하, 이 쥐똥만 한 걸 줘 팰 수도 없고."

    "쥐똥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래. 들어가자, 들어가. 들어가서 엄마랑 잘 놀고, 나 귀찮게 하지 마라. 진짜 창밖으로 집어 던져 버린다."

    "다 이를 거거든!"

    "누구한테?"

    "너희 엄마한테 이를 건데?"

    니가 왜 우리 엄마한테 나를 일러, 이 정신 빠진 여자야!

    하여간 말이 안 통한다니까.

    바로 그때.

    이지혁이 등 뒤에서 서늘하고 으스스한 기운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지?

    이 마왕성 최심층에서나 느껴보았던 한기는?

    "오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지혁은 한기의 정체를 알아내고 전율했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몸을 돌리자 평소보다 살짝 크게 눈을 뜬 김다솜이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

    "아, 안녕?"

    뭐야!

    왜 목소리가 떨려 나와!

    나 이지혁이야, 이지혁!

    신도, 악마도 다 처바르고 운명을 쟁취한 남자란 말이다!

    "누구……?"

    김다솜의 시선이 정해민에게로 향했다.

    "아, 회사 동료야. 혹시 아나, 정해민이라고? 아이돌인데……."

    뭔가 말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난다.

    김다솜은 정해민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너무도 느릿해서 정말 뱀이라도 기어가는 느낌을 받을 듯했다.

    하지만 정해민 역시 연예인.

    다른 것은 몰라도 시선에서만큼은 면역을 끝까지 찍은 여자였다.

    "누구야?"

    "얘는 어… 일단은……."

    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스토커?

    예원이 친구?

    김다현 동생?

    "내 동생 친구이자 김다현이 동생이야."

    "아, 그러고 보니 다현 씨 닮았네요. 반가워요. 김다현 씨랑 같이 일하고 있는 정해민이에요."

    정해민은 영업용 미소를 한껏 입에 달고 인사했다.

    아, 그런데 뭔가 좀 미묘하게 어색한 느낌인데, 저거?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저런 다듬어지지 않은 미소를 보이다니, 이게 이지혁이 아는 팬 서비스 머신 정해민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TV에서 보지 않았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요."

    김다솜은 무감정한 눈으로 정해민에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회사 동료분과 함께 집에 들어가시는 거죠?"

    "으응? 얘가 우리 엄마랑 동생한테 볼일이 있대서……."

    그런데 내가 왜 이걸 대답해야 하는 거지?

    "볼일?"

    "CD 준데."

    "그렇군요."

    다시 한 번 정해민을 무표정한 눈으로 탐색한 김다솜이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밀었다.

    "또… 뭐니?"

    "장갑이에요."

    "자꾸 이런 거 주지 마. 그거 한 번 도와줬다고 이렇게 하면 내가 부담스럽잖아."

    순간, 정해민이 입을 쩍 벌렸다.

    뭐지?

    이 사자가 고기를 싫어한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인 언행은?

    이지혁이 예의를 차리고 있잖아!

    "제가 아직 감사해서 그래요."

    "그래도 좀……."

    "편히 받아주세요."

    "으응……."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장갑을 받아 들자 정해민은 자신도 모르게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해가 저쪽으로 지고 있는 게 맞는가?

    '맞는데?'

    그럼 꿈은 아니라는 거잖아.

    그럼 대체 저 여자는 뭐하는 여자기에 저 이지혁을 저리 만든다는 말인가! 사람이 아닌 건가?

    "그럼……."

    김다솜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리다가 멈춰 섰다.

    "그러면……."

    "응?"

    "언제 나갈 생각이시죠?"

    정해민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건 왜요?"

    "그냥요, 그냥……."

    "그, 금방 나갈 거예요, 금방!"

    "…일단 알겠습니다."

    그 '일단'이란 단어가 너무나도 마음에 걸리는 정해민이었다.

    김다솜이 슬쩍슬쩍 뒤를 돌아보다 저 멀리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정해민이 이지혁을 보며 물었다.

    "…나, 네 동생 방에서 자고 가면 안 돼?"

    "미쳤냐? 왜!"

    "어쩐지 돌아가기 무서워서."

    "텔레포터가 무슨 외박을 해! 느그 집에 가서 자!"

    "아, 나 텔레포터지."

    하, 진짜…….

    멍청하긴! 멍청해!

    그런데 은근히 이해가 간다.

    …나도 웬지 으스스한데?

    음, 왜 이러지?

    아, 추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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