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7화 (17/118)
  • [■] 훈련하기 싫은 사람? [■]

    ─────

    "니가?"

    다짜고짜 연장자에게 저딴 어투라니.

    한국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방금 그렇게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해줬는데도?

    멍청한 놈이라는 생각에 렌이 코웃음을 쳤다.

    "한국은 지원 온 사람을 이리 대하는 모양이군요. 이런 식이라면 돌아가 항의하겠습니다."

    "그러든지."

    이지혁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할 말 다 했으면 꺼지라는 듯한 그 태도에 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은 놈이 아닌가.

    "너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도 없는가? 아무리 예의를 모르고 자랐다고 해도 그 태도는 심하군."

    "와, 얘는 한국말 디게 잘하네? 그런데 왜 전에는 그런 애를 보냈지?"

    "내가 지금 말하고 있지 않나!"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사람이나 치료하지, 말싸움할 시간 있나 보네?"

    "이런 상황에서 치료를 할 수는 없다. 나는 단순한 치료사가 아니다. 국가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뭐래? 그래서 치료 안 하겠다?"

    "네가 사과한다면 생각해 보지."

    이지혁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가. 뭐, 딱히 살릴 필요도 없고."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이 태도에서 물씬 풍겼다.

    저 인간은 대체 뭐지?

    우우웅.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이런 곳에서도 전화가 터진다는 것을 신기해하며 렌이 전화를 받았다.

    "예."

    -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 거기, 이지혁이란 사람이 있네.

    "이지혁?"

    - 그 사람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충돌하지 말게. 트러블을 일으키지 말란 말이야. 그 사람과 적대적 포지션을 가지게 된다면 국가가 자네를 용서하지 않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기타무라 렌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이지혁 씨가 누구시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음······.

    거참, 대답하는 방식이 이상하네.

    그러니까 이지혁이······.

    "너?"

    이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고?"

    이번에는 뚱한 눈빛으로 대답을 했다.

    "진짜?"

    이지혁은 말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전에 받아놓은 번호로 전화를 건 이지혁이 건너편의 누군가를 향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치료사 좀 보내 달라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라고! 이러면서 뭔 대접을 해준다고 해요! 말은 청산유수더니, 이런 작은 거 하나도 못하는 데를 뭘 믿고 가겠어요? 안 그래요? 와나, 내가 어려운 걸 부탁했으면 말도 안 한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뚝.

    전화가 끊어지고······.

    이지혁은 싱글생글 웃으며 렌을 바라보았다.

    렌의 등 뒤에 식은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전화가 울린다, 전화가······.

    렌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받아야 할까?

    받으면 뭔 말이 나올지 빤히 예상이 가는데······.

    받아야 하는 건가?

    세상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건 조금 더 특별하게 하기 싫었다.

    삑.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는 렌의 얼굴이 서서히 질려가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붙들고 뭔가 각이 선 목소리로 대답하던 렌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조심스레 이지혁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치료할까요?"

    "꺼져."

    "치료하고 싶습니다."

    "됐다고."

    "꼭 치료하고 싶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게 해주십시오!"

    "너 혹시 재일교포니?"

    "예?"

    "한국말을 나보다 더 잘하네?"

    "이러다 사람 죽겠습니다."

    점점 더 상태가 심각해지는 윤혁규를 보며 렌이 안절부절못하자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해."

    이지혁의 말에 렌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윤혁규의 몸에 손을 대고 에테르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섬뜩한 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치료하는 게 꼭 그 사람을 위하는 건 아닐 거야."

    "네?"

    이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뒤, 거짓말인 것처럼 육체의 상처가 치료된 윤혁규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 능력이 꽤 높은데?'

    피가 철철 흘러서 상처가 심해 보인 것뿐이지, 실제로 후유증이 남을 만한 상처는 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적어도 한 달은 병원에 누워 있어야 나을 상처를 단숨에 치료해 낸다는 것은 뛰어난 능력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고위 신관급.

    광역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단일 치료 능력으로는 고위 신관에 육박했다.

    이 정도면 국가에서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할 수준인데, 이런 인사를 선뜻 보내주었다는 건 일본에서 자신을 영입하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거겠지.

    '줄은 많을수록 좋다.'

    타지 않는 줄이라도 잡고 있으면 손해는 없었다.

    강철 동아줄이 너무도 허무하게 끊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썩은 줄일지라도 버리지 않는 이들이 그 썩은 줄 때문에 살아남는 모습도 수없이 봐왔다.

    그러니 굳이 다가온 이들을 밀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잡고 있다면 이용할 시간은 언제든 올 테니까.

    "일어났어요?"

    이지혁이 비틀대는 윤혁규를 보며 말했다.

    "······."

    시선이 마주친 윤혁규가 마치 학질에라도 걸린 듯이 떨며 눈을 내리깔았다.

    꼬리 내린 강아지 같은 모습이다.

    조금 전만 해도 패기 넘치던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가여운 일일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하지만 이지혁은 그 흔한 '누구'가 아니었다.

    "다시 시작해야지?"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끝도 없이 '죄송합니다'를 웅얼거리는 윤혁규를 보며 렌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육체적 손상이야 어떻게 치료했다고 하더라도 정신적 트라우마가 심각했다.

    빠른 치료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

    "죄송하다고?"

    "예! 예! 예! 죄송합니다!"

    "으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

    "난 그냥 증명하라고 해서 증명한 건데,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당신이랑 나 사이에 서로 미안할 일이 있었나?"

    "그······."

    "그리고 죄송하지 마."

    "예?"

    "그거, 굉장히 무서운 말이야. 죄송하다고 하던 놈들이 두고 보면 나중에 꼭 사람 등을 찌르더라고. 두고 보자가 차라리 덜 섬뜩한 말이지."

    뭔 말이지?

    이해하지 못한 렌이 고개를 갸웃댈 때, 이지혁이 윤혁규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뭐, 좋아. 그런 건 자유지. 그러니까, 너는 죄송해하면 돼. 나는 증명할 테니까. 그럼 서로 할 일을 하는 거니까 합리적이잖아? 그렇지?"

    렌은 알 수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말이 아닌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이자는 미쳤다.

    저 앳된 얼굴을 한 능력자는 미친놈이다.

    사람들의 얼굴이 저리 질려 있는 이유는 이자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딘가 비틀려 있는 이자가 무서운 것이다.

    렌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이지혁은 오른 다리로 윤혁규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우드득!

    섬뜩한 소음과 함께 윤혁규의 다리가 반대쪽으로 꺾였다.

    "아아아아악!"

    하나의 지지대를 잃은 윤혁규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는 피해야지. 그래야 비교가 되고, 그래야 증명이 될 거 아냐. 이러면 또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몸을 떠는 윤혁규의 목을 잡아 끌어당기며 이지혁이 말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치료사가 왔잖아. 그러니 이제 증명할 시간은 충분해."

    이지혁은 환히 웃었다.

    그의 몸은 멀쩡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풀려 있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는 해변에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이지혁은 바닥에 쓰러진 채 웅얼거리는 윤혁규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살···려주세요······."

    "살려 달라고?"

    이지혁은 허허, 웃었다.

    "살려주려고 시작한 일이잖아. 어차피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너흰 전부 죽어. 그래서 살려주겠다고 시작한 건데, 네가 네 스스로 살지 않고 죽겠다고 한 것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죽겠다더니, 이제는 왜 살려달라고 한다는 말인가.

    "어차피 사람은 죽어. 그러니 그냥 죽으면 되는 거지."

    이지혁의 눈이 서아영들에게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요?"

    대답은 없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해서 살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죽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어요. 다만······."

    이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발목 잡고 늘어지지는 말라고요. 나를 끌어들인 건 당신들이야.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이치 아니겠어요? 누군가 말한 것처럼,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했으니 그 기대에 부응해 줄게요."

    그 방식이 당신들이 생각한 건 아니더라도 말이지.

    "그래서 더 증명이 필요한 사람?"

    대답은 없었다.

    눈앞에서 한 사람이 반나절 넘게 시체 직전까지 갔다가 멀쩡히 돌아오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걸 본다면 누구라도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지혁은 입맛을 다셨다.

    '나도 많이 착해졌어.'

    베라프에서였다면 이런 구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충 게이트를 열어 던져 넣으면 마계의 온갖 마수들이 떨어진 생기를 씹고 뜯고 맛볼 것이다.

    최대한 느리게, 최대한 천천히!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처음의 그를 구성하던 것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지금 윤혁규는 말이라도 하잖아?

    침이라도 흘릴 수 있고 말이야.

    "흐음······."

    이지혁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윤혁규의 머리에 손을 댔다.

    벌벌 떨던 윤혁규가 마침내 이지혁의 손이 머리에 닿자 학질이라도 걸린 것마냥 경련을 일으켰다.

    "안 잡아먹어. 왜 쫄고 그래?"

    이지혁이 윤혁규의 머리에 손을 대고는 가볍게 '드레인'이라 말했다.

    윤혁규의 머리에서 시커먼 기운들이 빠져나와 이지혁의 손을 타고 들어갔다.

    "아?"

    정신이 번쩍 든 윤혁규가 멍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은 혀를 찼다.

    '진짜 착해졌어.'

    육체적인 손상이야 이지혁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빼앗는 존재.

    그의 베풂은 도움이 아닌 해악이다.

    멀쩡한 인간을 언데드로 만들어 버리겠지.

    하지만 정신 계열은 아니다.

    그는 저주와 현혹을 기본으로 하는 흑마법사.

    종교적 열광으로 모든 것을 백지화시키는 신관들에 비해서도 정신에 관한 이해도는 높다.

    특히나 혼란과 저주는 그의 특기.

    사람의 머리를 망가뜨리는 것은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망가져 가는 머리를 역으로 복원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면 페인이 되었을 윤혁규지만, 이지혁은 친히 그를 정상으로 되돌려놓았다.

    하나가 아쉬우니까.

    이지혁이 혀를 차고는 손짓했다.

    "가서 서."

    "···예!"

    정신은 돌아왔지만 트라우마는 남았는지, 윤혁규는 전력으로 달려 일행에 합류했다.

    이지혁은 그들을 보며 낮게 말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살짝 뜸을 들이고는 말이 이어진다.

    "당신들 정도는 일 분이면 다 죽일 수 있어요. 지금 당장 말이야."

    "······."

    "그런 나도 요즘 슬슬 위기감이 드는데, 당신들이 그리 편하게 살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훈련하기 싫은 사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이지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시작하죠."

    어둠과 함께 그들에게 덮쳐드는 마물들을 보던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저들이 도움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저들을 장악하는 것이 전체를 장악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원래 뭐든 대가리부터 치는 게 기본이다.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갈 길이 머네."

    하지만 시작은 했다.

    오늘 이후로 저들은 이지혁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조금 쓸쓸해지겠······.

    "이지혁 씨!"

    "응?"

    이지혁이 고개를 돌리자 앞치마를 두른 최정훈이 뚱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예?"

    "저녁 할까요? 퇴근은요?"

    "퇴근?"

    헐, 지금 시간이?

    시계를 본 이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정해미이이이이인!"

    출퇴근 셔틀이 빛살 같은 속도로 그에게 달려왔다.

    * * *

    "도주?"

    "그렇습니다."

    이지혁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를 셌다.

    둘이 모자란다?

    어이쿠야, 이것들 보게?

    반항이 실패하니까 도주?

    이지혁이 혀를 쯧쯧, 차면서 최정훈을 향해 물었다.

    "연락은요?"

    "전화를 안 받습니다."

    "출국 기록은?"

    "출국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렇군."

    이지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한민국 땅 안에 있으면서 도주라니, 생각이 짧아도 어느 정도가 있지.

    "오식아!"

    이지혁이 소리치자 문이 부서지며 파편 사이로 오식이가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최정훈은 한숨을 푹 쉬었다.

    '강철 쇠사슬로 목줄 해놨는데…….'

    그냥 다시 개 줄로 바꿔야겠다. 어차피 강철로 하든 합금으로 하든 못 묶어놓을 거, 뭔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왜 문짝은 부수고 들어오는 건가!

    부를 거면 문이라도 열고 부르든가!

    저게 다 예산인데!

    "아니, 문을 닫고 개를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개 아닌데요. 오식인데!"

    "문짝 못 열면 개랑 뭐가 달라요!"

    "어?"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오식이의 머리를 내려쳤다.

    쾅!

    가벼운 꿀밤인데 폭음이 터진다.

    지켜보는 이들은 그 무자비한 딱밤에 전율했고, 엄살 부리듯 머리를 감싸는 걸로 끝난 오식이의 무식한 내구력에 한 번 더 전율했다.

    괴물이 괴물이랑 노니까, 노는 것도 괴물 같다.

    "문을 열고 들어와야지, 이 멍청아! 문짝 날아갔잖아!"

    저번에는 느긋하게 들어온다고 때려놓고는…….

    이 인간에게 그런 걸 따진다고 돌아올 게 뭐가 있겠는가, 매밖에 없지.

    오식이는 끙끙대며 바닥에 머리를 댔다.

    하, 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최정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따져서 무엇하리오. 진짜로 따지자면 재빠르게 문을 열어젖히지 못한 그의 잘못인데.

    "그런데 오식이는 왜 부르신 겁니까?"

    "사냥을 하려면 개를 불러야죠."

    "예?"

    이지혁은 씨익 웃었다.

    "개요?"

    얘 말하는 건가?

    최정훈의 눈에 붉고 검은 털을 가진 귀여운 오거가 보인다.

    그래, 생긴 건 좀 개 같다.

    개 같다. 그래, 개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긴 게 개 같다고 해도 천하의 오거를 개 취급 하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물론 먹는 건 개 사료지만…….

    "냄새 잘 맡나요?"

    "보통 개와 같이 취급하지 마시죠. 우리 오식이는 최고의 개라구요."

    "……."

    그거 욕이야, 인마.

    자랑처럼 이야기하지 마!

    이지혁은 씨익 웃었다.

    뭐라더라?

    오거가 있는 숲에 들어섰다면 반대편의 오거가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지 않던가. 오거의 냄새를 맡는 능력은 감히 개가 비견될 수 없는 급이었다.

    "그 양반들 물건 가져와요."

    "한 번에 두 사람 물건을 다 가져와도 됩니까?"

    "오식이는 못하는 게 없으니까요."

    이지혁이 자랑스럽다는 듯 오식이의 등을 쓸어주자 오식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배를 드러냈다.

    '하지 마!'

    넌 자존심도 없냐! 너 오거잖아! 아무리 짐승이라도 그렇지!

    개 취급당하고 억울하지도 않냐!

    그러나 최정훈의 마음의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주섬주섬 찾아온 둘의 물건을 코앞에 대주자 킁킁대며 냄새를 맡은 오식이가 건물 밖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훗."

    이지혁이 눈을 빛내며 오식이의 뒤를 따랐다.

    "…안 오겠지?"

    김다현은 몸을 덜덜 떨었다.

    김씨 집안 가족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은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몸을 숨긴다. NDF에서 100㎞는 떨어진, 으슥한 숲 속에 비트를 파고 몸을 숨겼다.

    CCTV를 교묘하게 피해서 이동했으니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못 찾을 거야.'

    아무리 귀신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이렇게 꽁꽁 숨어 있는데 사람을 찾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웬만큼만 했어도 이리 도망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적당히를 알아야지.

    파견 온 외국의 치료사가 탈진해서 피를 토할 정도로 사람을 굴려 대는데, 대체 어떻게 버티라는 말인가.

    오거에게 걷어차여서 내장이 터지고 입가로 위장이 역류하는 고통을 느끼다가 순식간에 치료 받고 다시 뛰어들어 싸우는 짓거리를 며칠이나 하다 보니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나마 나았다.

    지켜보던 이지혁이 인상을 쓰며 훈련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진짜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괴수들은 사람을 후려치고 날리는 수준이지만, 이지혁은 뭔가 차원이 달랐다.

    차원이 다르게 강한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르게 더럽고 치사했다.

    등 뒤에서 튀어나와 가랑이를 걷어차 버리지를 않나, 때린 데를 집요하게 또 때리지를 않나.

    분명히 원거리 계열인 줄 않았는데, 열이 받아 발악하는 박성찬을 주먹으로 때려서 선 채로 기절시켜 버리는 완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 괴물 같은 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지!

    언젠가는 걸릴 테고 박살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오늘 또다시 그 지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어쩌면 이대로 한 달 정도는 돌아다닐 수 있을지도 몰라.'

    크륵.

    "얼마나 시달렸으면 환청이 다 들리네."

    그 망할 오거 놈!

    크륵.

    "하하하……."

    진짜 생생하게 들리네. 이 정도로 환청이 들릴 정도면 지금 정신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거…….

    크르릉.

    김다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절묘하게 덮어놓은 구멍 사이로 이를 드러내고 있는 오식이의 대가리가 보인다.

    '환상인가?'

    아니면 꿈인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크아아아!

    "아악! 꿈이 아니잖아!"

    김다현이 비트에서 몸을 띄워 올렸다.

    '침착해라!'

    자신은 패스 드리프터!

    속도로 따지면 누구도 쫓아올 수 없다.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말고 도주만 해낼 수 있다면 다시 멀찍이…….

    덥썩.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뒷목을 움켜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

    대롱대롱 허공으로 매달린 김다현은 목에서 느껴지는 손의 악력만으로도 자신을 잡은 이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몸을 나무토막처럼 뻣뻣이 굳혔다.

    그의 귀에 유부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찾았다."

    히이이이익!

    김다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야자수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김다현의 눈에 비치 체어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이지혁의 모습이 들어왔다.

    '개새끼.'

    아주 비치웨어까지 챙겨 와서 제대로 차려입고 노는 꼴이 눈꼴시려서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열대 과일로 만든 음료를 대령하고 있는 최정훈을 보니 더욱 열이 받는다.

    저 사람은 배알도 없는가!

    이 개고생을 하는 우리 밥은 캔이나 대충 던져 주면서 이지혁에게는 생과일로 만든 주스까지 주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저러면…….

    주스를 받은 이지혁이 미묘한 얼굴로 갸웃대다가 최정훈을 바라보았다.

    "이물질이 섞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주사제? 수면제? 자백제? 마약?"

    "아닙니다."

    "…침?"

    "하.하.하……."

    어색한 웃음에 이지혁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양반이?"

    "하하하하, 뭔가 실수가 있던 모양입니다. 바꿔 오지요."

    이지혁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번개처럼 주스를 낚아채서 뛰어가는 최정훈을 보며 김다현이 눈물을 삼켰다.

    그래, 사람 마음이 다 똑같지.

    마음이 다를 리야 있겠는가! 저 인간을 보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같은 심정이겠지.

    "하, 저 양반……."

    이지혁이 허탈하게 웃었다.

    저거, 매제 될 사람만 아니면 내가 참…….

    열심히 질주하던 최정훈의 등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이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최정훈과 이예원을 엮기에는 너무 미안한 감이 있다. 그러니 양심적으로 이 정도는 이해해 줘야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지혁이 머리 위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우웁."

    김다현이 이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뒤틀었다.

    "너도 참 징하다."

    이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이 얼마나 없으면 감히 자신에게서 도망을 가려고 한다는 말인가.

    베라프의 대륙 전체를 누비던 자신이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다고…….

    "동생한테 시달리는 게 불쌍해서 살살 대해줬더니."

    그게 만나자마자 사람 면상을 찐빵으로 만들어놓은 인간이 할 말이냐!

    할 말은 많았지만, 입에 물린 재갈은 그에게 '읍읍' 소리만을 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도 둘이나 말이야."

    이지혁의 눈에 바닥에 파묻혀 머리만 나와 있는 박성찬의 얼굴이 보였다.

    "읍읍!"

    "거, 사람이 잘 대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누가 잘 대해줬는데!

    만나자마자 사람을 찐빵으로 만들고, 만나자마자 사람을 기둥으로 만들었던 게 누군데!

    "여하튼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

    노란 머리 짐승도 별다를 건 없지만, 뭐. 경험상, 경험상 말이지.

    "자, 그럼……."

    이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뻗어 김다현의 몸을 묶고 있던 줄을 잘랐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을 뻗어 바닥에 박혀 있던 박성찬을 뽑아냈다.

    둘은 우물쭈물하며 이지혁의 앞에 섰다.

    이제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할까 떨리는 와중에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야, 가서 합류해."

    "네?"

    "합류하라고."

    "……."

    이 인간이 웬일이지?

    훈련 받던 도중에 힘들다고 투정만 부려도 사람을 걷어차서 성층권까지 날리던 인간이?

    "합류해도 됩니까?"

    "응. 가봐."

    둘은 되레 이지혁이 이리 나오자 불안해졌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지혁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으니 가서 합류해."

    "아니, 정말 잘못했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하……."

    이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사람은 말로 하면 들어 처먹지를 않는 것인가!

    "아, 가라고!"

    이지혁이 뻥! 걷어차고 나서야 둘은 신나게 달려서 오식이와 마수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이지혁은 그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사람들의 움직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훈련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실전 경험.

    아무리 이지혁이라도 과정이 전혀 다른 능력자들의 실력을 일순간에 끌어올릴 방법 같은 건 없다. 되레 에테르를 이용한 능력 활용이라면 이지혁보다 저들이 더 전문가다.

    축구를 세계에서 제일 잘한다고 해서 야구 선수에게 야구를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바꿔주는 게 전부였다.

    그게 실전 경험이다.

    이전의 저들이라면 전원이 모여 있다 하더라도 오식이가 마음먹고 덤비는 순간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적어도 한 시간은 버틸 수 있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극한을 여러 번 겪다 보면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루트를 찾게 되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에테르의 연구였다.

    마나가 잔뜩 실린 이지혁의 눈이 그들의 움직임을 빼놓지 않고 분석한다.

    에테르가 어떻게 유동하고 움직이는지를 모조리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마나의 세계 역시 처음에는 이리 시작했다. 그 과정에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실험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능력자들 중에서는 나름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저들을 이리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에테르를 연구해야 하는 이지혁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단순히 저들을 강하게 만들려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는 이지혁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다.

    이 과정은 분명히 이지혁이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에테르.'

    이지혁이 눈을 빛냈다.

    새로운 열쇠는 이미 그의 손안에 들어와 있다. 육체 안에서 약동하는 에테르를 느끼며, 이지혁은 에테르의 움직임에 시선을 모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알아내면 뭔가 새로운 길이 보일 것 같다.

    마나와 에테르.

    서로 이질적이지만 다르지 않은 그 기운을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면, 이지혁은 멸망의 좌이던 시절의 힘을 되찾을, 아니,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지혁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 * *

    훈련에 가장 열성적으로 임하고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의외의 인물이었다.

    도가윤.

    그녀는 이지혁이 마나로 만들어낸 재규어를 상대하고 있었다.

    은신과 암살이 주 능력인 그녀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들조차 능력을 가진 그녀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태생적으로 어둠과 함께 태어난 은밀한 암살자인 재규어의 움직임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무인도 중앙에 위치한 무성한 숲에서 그녀는 그림자 속에 숨어든 재규어의 종적을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어둠 속으로 감추었다.

    '어디?'

    반쯤은 해가 비치는 숲 속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 어둠 속으로 스며든 재규어의 모습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눈까지 감고 기척을 느끼려 애쓰던 그녀의 귓가에 낮은 그로울링 소리가 들려온다.

    크륵.

    등 뒤.

    움직임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미 그녀의 등 뒤에 재규어가 서 있었다.

    도가윤은 이를 꽉 깨물었다.

    퍼억!

    등으로 강렬한 앞발이 틀어박힌다.

    뱃속이 뒤틀리고 좁아져 뭔가 울컥하고 밀려 올라온다.

    목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내음.

    하지만 피 내음은 바닥과 충돌하며 피어오른 흙먼지의 매캐함에 이내 희석되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쫓으려 해도 쫓을 수가 없고, 찾아내려 해도 찾아낼 수가 없다.

    항상 뒤를 잡히고 다가오는 격통.

    변하지 않는 패턴에 도가윤이 진저리를 칠 무렵,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게 아냐."

    도가윤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지혁이 담배를 물고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라고?"

    도가윤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틀.

    살짝 균형을 잃은 그녀의 옷을 이지혁이 움켜잡고 당겼다.

    "아……."

    도가윤을 일으켜 세운 이지혁이 혀를 찼다.

    "그냥 열심히만 한다고 될 것 같으면 세상 사람 중에 성공 못할 사람이 누가 있냐? 생각을 좀 해라, 생각을."

    "생각?"

    이지혁이 도가윤을 잡은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자."

    이지혁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도가윤은 이지혁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뭐하자는 거지?

    이지혁이 인상을 쓰더니, 손을 뺐다가 다시 찔러 넣었다.

    허공에다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이지혁의 행동이 이상하기 짝이 없었음에도 도가윤은 이지혁의 행동이 의미라는 바를 찾기 위해 애썼다.

    저자가 엉뚱하긴 해도 의미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동안의 관찰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동일한 동작을 관찰하고서야 도가윤이 탄성을 내뱉었다.

    저 동작은 이지혁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이지혁이 손을 뻗어올 때와 손을 거두었을 때 존재감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지혁의 존재감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도가윤이 느끼는 이지혁의 존재가 달라지고 있었다.

    "여기가 경계다."

    이지혁의 발이 선을 쭉 그었다.

    도가윤이 그 선을 바라보았다.

    이지혁의 손이 누비던 허공을 경계로 삼은 선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 쫓는다? 기감으로 쫓는다? 상대도 숨으려고 하는데 그게 쫓아지나? 쫓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다. 여기가 니 인식의 범위야. 이곳을 넘어 들어오는 것을 찾아."

    "인식의 범위."

    "말로는 의미가 없어. 필요한 건 다 줬다."

    "응."

    이지혁은 돌아 나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치료사가 흉터도 없애더라. 팔에 그거… 치료해 달라고 해."

    도가윤의 시선이 자신의 팔로 향했다.

    예전 날도마뱀 사태 때 길게 갈라져 흉터가 남아 있는 팔이 보였다.

    도가윤은 고개를 들어 숲을 빠져나가는 이지혁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

    정해민을 본 이지혁이 혀를 찼다.

    아이돌이라는 인간이 혀를 길게 내민 채 바닥에 철푸덕 쓰러져 꿈틀대고 있는 광경은 영 보기가 좋지 않았다.

    "어이."

    "으……."

    "어이."

    정해민이 눈에 불을 켜고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눈에는 어떻게든 달려들려는 의지가 보였지만, 몸은 바닥에서 꿈틀댈 뿐이었다.

    "너어어……."

    "쯧쯧."

    전투 쪽으로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데다 전투력을 올린다고 해도 한계가 극명하다 보니 정해민은 텔레포트의 용량과 횟수를 올리는 것에 주력했다.

    방법이야 워낙 간단하니까.

    그냥 텔레포트를 계속 시키면 된다.

    문제는 그 텔레포트라는 것이 시전자의 체력과 정신력을 상상 이상으로 소모시킨다는 것 정도?

    "무작정 텔레포트하지 말고 이미지네이션을 하란 말이야! 내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을 먼저 하고 자기 위치를 제대로 잡아!"

    "반말……."

    "정말 답도 없다."

    이 와중에도 반말 타령이라니, 애가 정신이 맛이 갔어.

    근성 하나는 인정해 준다.

    저렇게 꾸준하게 멍청하기도 힘든데 말이야.

    이지혁이 그녀를 번쩍 들어서 원래 그가 쓰던 비치 체어에 던져 넣었다.

    "탈진할 때까지 노력한 건 인정해 주지."

    얼굴이 모래투성이가 될 때까지 열심히 한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다고 얼마나 더 강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지시에 최선을 다해 따라준다는 것은 기꺼운 일이었다. 딱히 신뢰감을 쌓기 어려운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문득 이지혁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존재에게 신뢰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일 아니던가.

    그에게 있어 인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적이었으니까.

    뭐지, 이거?

    좀 간질간질한데?

    이지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묘한 감상이 생기네, 이거.

    이지혁의 눈에 오식이를 위시로 한 마수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이들이 들어왔다.

    "으……."

    오식이의 공격에 하늘 높이 날아오른 박성찬을 보며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쪽은 정말 안 느네.'

    짧은 시간에 전투 경험을 미친 듯이 우겨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에 뛸 만큼 발전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아니면 이지혁의 눈이 워낙 높다 보니 발전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하기야 이지혁도 여기까지 오는 데 천 년이 넘게 걸렸는데, 불과 2주도 안 되는 시간 사이에 만족할 만한 능력을 갖추라고 하는 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지.'

    모든 게이트가 이지혁을 노린다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이트는 전 세계에 열리고 있고, 균형이 무너지는 곳이 나오면 연쇄적으로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몬스터들이 세상을 뒤덮는 순간이 바로 종말의 날이다.

    그 모든 몬스터를 몰아낸다고 해도 그때 남아 있는 것은 이지혁 혼자뿐이겠지.

    그러니 최소한 이지혁이 움직일 동안 시간을 벌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들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하고, 이곳에서 얻어낸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능력자들의 능력 역시 끌어 올려줘야 한다.

    화르륵!

    그 순간, 오발인지 제대로 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불덩어리가 이지혁에게로 날아들었다.

    "호오?"

    이지혁이 슬쩍 몸을 틀어 불덩어리를 피해냈다.

    불덩어리를 날린 장본인인 서아영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저년이?

    "여유가 넘치는 모양이네?"

    이지혁의 양손에서 검은 문양이 피어오르더니, 두 마리의 마수가 추가되었다.

    "으아아아악!"

    "야, 이 개새끼야!"

    쏟아져 나오는 쌍욕과 비명을 들으며 이지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디다 불똥을 튕겨?"

    건방지게 말이야.

    지속된 전투로 끝없는 체력을 가진 마수들도 슬슬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슬슬 새로운 시도를 해볼 때가 되었다.

    "이지혁 씨!"

    그때,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최정훈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네?"

    "지원 요청입니다. 게이트가 열리려 한답니다."

    "뭐가 이리 늦게 요청이 온대요?"

    "열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답니다. 레벨은 5입니다."

    "음……."

    그 말을 들은 능력자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레벨 5라면 어마어마한 마수가 나오겠지.

    그래도 이렇게 여러 마리의 마수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다야 백배는 나을 것이다.

    "우리가……."

    "와, 말할 틈이 있는 사람이 있네? 대단한데?"

    "……."

    그들의 입이 마치 강철처럼 닫혔다.

    "내가 가죠."

    "혼자 말입니까?"

    "어려울 거야 있겠어요?"

    "직접 가신다면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가는 것보다 확실하겠지.

    최정훈이 고개를 끄덕일 때, 이지혁이 서아영을 보며 말했다.

    "놀지 말고 퇴근 시간 될 때까지 제대로 훈련해요."

    "네!"

    "말할 틈이 있네, 거참."

    "……."

    이지혁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마수 한 마리를 기어이 더 추가해 놓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욕과 저주의 오케스트라가 울려 퍼졌지만, 이지혁의 귀에는 더없이 달콤하게만 들렸다.

    "야, 일어나!"

    이지혁이 비치 체어에 쓰러져 있던 정해민의 등을 찰싹, 때렸다.

    "으응?"

    "가자. 일이다."

    "…나 진짜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지금 가면 오늘 퇴근시켜 준다."

    "어딘데?"

    불타오르는 눈빛을 본 이지혁이 피식 웃었다.

    퇴근에 대한 사람의 의지는 산도 뚫고 바다에 길도 내는 법이지.

    "좌표 받아와."

    정해민이 벌떡 일어나서 최정훈에게로 달려갔다.

    이지혁은 위치 정보를 받아온 정해민의 손을 움켜잡았다.

    스슷.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 갑자기 오식이가 포효를 내질렀다.

    쿠오오오오오!

    돌변한 오식이의 모습에 능력자들이 기겁을 했다.

    이지혁이 사라지면서 억눌러 놨던 오거의 흉성이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설마……."

    최정훈조차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약 저 몬스터들이 이지혁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면, 이 무인도에서 갈 곳이 없는 그들은 그저 몰살당할 뿐이다.

    크르르르!

    오식이가 이를 한껏 드러내고 으르렁대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아예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응?"

    다른 마수들도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으응?"

    능력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대망은 아예 꾸물꾸물 기어가더니,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쟤들도 힘들겠네."

    "그런데 몬스터가 저리 쉬기도 하나?"

    "지들도 생물인데?"

    "그럼 우리도 좀 쉬어도 되는 건가?"

    "…응?"

    서아영과 오식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짧은 시선 교환이 끝나고 그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혁이라는 태풍에 휩쓸린 인간과 몬스터들 사이에 처음으로 공동 전선이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이지혁의 혹독한 훈련이 뜻밖의 결과를 낳고 있었다.

    스슷.

    "헉!"

    바로 눈앞에서 튀어나온 사람 때문에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한 정인수 대령이 품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아, 위에 떨어져야지!"

    "…아, 몰라. 나 힘없단 말이야."

    "에이! 쓸모없는 것!"

    이지혁이 축 늘어진 정해민을 대충 뒤로 밀어내고는 정인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지원 온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일단 저 혼자 왔어요."

    "혼자……."

    과거 보았던 이지혁의 신위를 떠올린 정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라면 NDF 전체보다 오히려 든든하지.

    "알아서 잘하셨겠지만, 상황 보고 잘 좀 물려주세요. 괜히 휘말리면 다쳐요."

    "알겠습니다."

    후딱 처리하고 가야겠다.

    이지혁이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는 순간, 게이트가 광채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고."

    이제 빠르게…….

    어?

    게이트 안에서 뭔가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본 이지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거… 저게 왜 여기에 있지?

    대체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지혁의 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마냥 흔들렸다.

    * * *

    이지혁의 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마냥 흔들렸다.

    게이트가 열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이 낯이 익다. 지금까지 봐왔던 몬스터들 역시 그가 알고 있던 범주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베라프에서 봐오던 몬스터들과는 분명 다른 부분이 있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그 무언가.

    하지만 지금 이지혁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그가 알던 몬스터였다.

    베라프의.

    이지혁이 이를 갈았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건가?

    그곳과?

    따져 보면 이상할 일은 아니다.

    이지혁이 그곳으로 넘어갔으니까.

    블랙 먼데이가 일어나던 시점에 그가 베라프로 갔다는 것은 베라프와 이 세계의 접점이 있다는 뜻이고, 반대의 경우가 벌어져도 딱히 이상할 것이 없다고 봐야 했다.

    이성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베라프의 생명체를 보게 된 이지혁의 가슴은 거칠게 달아올랐다.

    오식이 때와는 다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식이는 베라프가 아니라 마계의 생물이니까.

    어느 쪽으로 소환이 되는가의 문제였다.

    이지혁은 눈앞에 보이는 생물을 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묘하게 같은 생명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곳처럼 베라프에도 사람이 있으니까. 같은 종족이 다른 세상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베라프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베라프에만 존재하는 신성.

    끈질기게 그의 앞을 막아온 존재.

    빛의 신 라트렐의 축복으로 태어난 빛의 요정들이 게이트를 넘어 이 세계로 들어오고 있었다.

    "끄응……."

    이지혁이 머리를 박박 긁었다.

    라트렐은 베라프를 관장하는 신.

    그의 가호를 얻은 존재는 베라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하얀 여체의 모습을 한, 사람 반만 한 요정들이 잠자리 같은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건 뭐야?"

    시각적으로 보았을 때, 이전까지의 몬스터들과는 그 갭이 커서인지 정인수도 섣불리 공격을 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베라프랑 연결되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쳐들어오면 막으면 되는 거고, 깔짝대면 뒤집어엎으면 그만이다.

    골치 아프게 고민한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정인수를 돌아보았다.

    "저거 털죠."

    "…저걸 말입니까?"

    정인수가 멍하니 요정들을 바라보다 되물었다.

    아니, 솔직히 좀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해 왔던 것들은 누가 봐도 괴물이었다. 총이 아니라 입안에 알라의 요술봉을 처박고 당겨도 1g의 죄책감도 생기지 않는, 굿 타깃들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저 요정들은 좀 다르지 않은가.

    일단 공격을 해오지 않는데다가… 저 귀여운 모습을 보라.

    게다가 은은하게 비쳐져 오는 빛에서 신성함마저 느껴진다.

    참 군인임을 자부하는 정인수로서도 저것들을 공격하는 것은 어쩐지 민간인 거주 구역에 폭격을 가하는 기분이라 영 내키지가 않았다.

    차라리 생기기라도 좀 우락부락하면 모를까, 사람 반만 한 여자아이의 형상이다 보니 더더욱 찝찝했다.

    "공격해야 합니까?"

    "물론이죠."

    "많이 위험합니까?"

    "왜요?"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인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저리 귀여운데?"

    이지혁이 히익거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페도[Pedophilia]?"

    "아니야아아아아!"

    정인수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소리 질렀다.

    "이거, 큰일 날 사람이네. 이분, 철컹철컹이 무섭지도 않나?"

    "애초에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모함입니다!"

    "사람같이 생겼잖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내부에 그런 성향이 있을지도 몰라요! 빨리 치료를 받으면 되는 거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아니라고오오오!"

    졸지에 아동성애자가 된 정인수가 절규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부하들도 많은 곳에서 이게 무슨 개망신…….

    어라?

    너희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니?

    벌레라도 묻었니?

    슬금슬금 물러나긴 왜 물러나는 거니?

    "아… 아니야……."

    정인수의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지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다정스레 위로해 주었다.

    "일단 서로 같이 가시죠."

    "서는 무슨 섭니까! 아니라구요! 아니에요!"

    순식간에 로리 성향이 되어버린 정인수가 피눈물을 흘리며 이지혁을 노려보았다.

    이런 인격 말살을 서슴없이 저지르다니! 무서운 인간!

    새삼 이지혁의 무서움에 진저리를 친 정인수가 소리쳤다.

    "내가 페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다! 모두 공격해! 저 마귀들을 부숴 버려!"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다?"

    "아니라고오오!"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대응이군요."

    멘탈이 터져 버린 정인수를 보던 부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지시를 내렸다.

    "쏴라."

    그 말과 동시에 총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위이잉.

    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요정들은 라트렐의 축복을 받은 존재들.

    물리력을 넘어 신성이 직접 개입하는 자들에게 총알은 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유영하고 있을 뿐이건만,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들이 모조리 그녀들을 피해 나갔다.

    "뭐야?"

    당황한 정인수가 소리를 질렀다.

    "페도 군단?"

    "아니라고오!"

    설마 여기 있는 이들이 모두 소아성애자여서 일부러 빗맞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이지혁은 미묘한 얼굴로 요정들을 바라보았다.

    신성의 개입.

    총알이 특정 사물을 맞출 확률과 맞추지 못할 확률 중 자신에게 이로운 확률을 절대적으로 끌어내는 힘.

    수천 발의 총알들이 모조리 신성의 힘 앞에서 목표를 잃고 허공을 꿰뚫었다.

    '이곳에서도 라트렐의 힘이 작용한다는 건가?'

    저건 요정들의 특성이 아니었다.

    라트렐이 그들에게 내린 힘이다.

    그 힘이 이곳에서도 작용한다는 것은 라트렐의 가호가 이 세계에서도 작용한다는 것.

    "끙……."

    베라프와 관련된 것은 다 싫다.

    돌 조각 하나, 공기 한 모금까지 모두가 싫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을 택하라면, 누가 뭐라 해도 라트렐이다.

    천 년 넘게 그의 앞을 막아온 라트렐과 라트렐 교단은 그가 가장 증오하는 적이었다.

    라트렐.

    드래곤 로드.

    그리고 입에 담기조차 싫은 그녀까지…….

    이지혁에게 여성 불신증과 성격이상을 초래한, 망할 세 년을 생각하니 위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기분이었다.

    이지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생각하니 또 짜증이 나네?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도 저 꼴을 봐야 하는 거지?

    "망할 것들이……."

    이지혁이 앞으로 한 발 나서서 손을 뻗었다.

    고오오오.

    이지혁의 손에 검은 마나가 뭉쳐 들었다.

    본능적으로 흑마력의 기운을 감지한 요정들이 날개를 펼쳐 분분이 흩어졌다.

    이지혁의 눈에는 그게 마치 모기 떼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도망?"

    어림도 없는 소리!

    이지혁의 손 앞에 뭉친 마나가 뒤틀리더니, 긴 촉수를 가닥가닥 뽑아냈다.

    뱀처럼 쉭쉭대는 촉수들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요정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음…….'

    정인수는 그 광경을 보며 기묘한 위화감에 몸을 떨었다.

    그동안은 이지혁이 상대해 온 것들이 그로테스크한 몬스터들이라 딱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음에도 의식적으로 무시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지금 저 요정들을 상대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게 느껴졌다.

    되레 이지혁이 악마 같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요정들에게 검은 촉수를 날려 대는 이지혁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이쪽이 악당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힘이라는 것은 속성이 없다.

    같은 총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다른 물건이 된다는 것을 군인인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시각적인 고정관념일까?'

    실제로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이지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지혁이 뽑아낸 촉수가 요정들을 향해 입을 벌린다.

    절대의 회피 확률을 가진 이들이라고는 하나 직접적인 공격마저 무효로 만들 수는 없었다.

    직접 타격과 광역기 앞에서는 확률조차도 무의미해지니까.

    받을 타격을 최소로 줄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절대의 운 따위는 무의미했다.

    이지혁의 촉수가 휘감아오자 필사적으로 몸을 피하던 요정들이 입을 열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

    천상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상을 음으로 가득 채워 버릴 듯 크고 웅장하지만 그 안에서 가녀림이 느껴지는, 이중적인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합쳐져서 공명하는 순간, 커다란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충격파가 촉수를 날려 버리고 이지혁과 방위사를 뒤덮었다.

    "아아악!"

    충격에 휘말린 정인수가 폭풍을 만난 종잇조각처럼 날아갔다.

    방위사와 함께 휘말려 구른 정인수가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저런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정인수였다.

    물론 베라프의 개념으로 본다면 요정을 몬스터로 분류하는 게 오류이기는 하겠지만.

    "호오?"

    이지혁이 충격파를 정면으로 받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음파 공격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데?

    이지혁의 양손을 뻗어 다시 촉수를 날렸다.

    노래를 하고 있던 요정들이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고 이지혁의 촉수에 잡혀 버둥댔다.

    "드레인."

    쫘악 펼쳐진 촉수가 요정들을 집어삼킨다.

    어린 여자아이의 것과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지자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인간의 비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귀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이지혁에 대한 적대감이 뭉클뭉클 피어오른다.

    따져 보면 먼저 공격을 한 것도 자신들이지 않은가.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이지혁에 대한 호의가 가득한 정인수조차도 순간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다.'

    차라리 죽이거나 가루로 날려 버렸으면 덜하련만, 인간의 형체를 집어삼키는 모습이 극도의 거부감을 가져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지혁은 촉수를 마구 뻗으며 하나도 남김없이 요정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 사람이 사람과 싸우면 어찌 되는 걸까?

    그때도 저런 식으로 인간을 집어삼키나?

    아니, 애초에 몬스터를 집어삼킨다는 것도 정신 나간 짓거리 아닌가?

    정인수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을 즈음, 이지혁은 이미 모든 요정들을 집어삼키고는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 더부룩해."

    극상성의 마나를 억지로 먹었더니 소화가 안 된다. 전환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지혁은 입맛을 다셨다.

    베라프에서라면 이런 저급한 마나 따위는 손도 대지 않았겠지만, 이곳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불량 식품이라도 먹고 소화시켜 힘으로 전환하는 수밖에.

    새삼 처량한 자신의 처지에 한숨을 쉰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눈길로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인수를 보고 이지혁은 인상을 확 썼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몬스터인 걸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여자애 모습이라고 해도 사람을 그렇게 보지 마세요! 취향은 존중하니까."

    "아니라고오!"

    대가리가 그쪽으로밖에 안 돌아가냐, 이 미친놈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극구 부정하는 정인수를 보며 이지혁은 혀를 찼다.

    참 답도 없다, 답도 없어.

    * * *

    "방법을 찾아야 해."

    크륵.

    "이대로 계속 이 꼴을 당할 수는 없어."

    크르륵.

    "알아는 듣는 거예요?"

    오식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아영은 묘한 눈길로 주시했다.

    정말 알아듣는 건가?

    겉으로 보기에는 곰보다도 머리가 안 돌아갈 것 같은데?

    사람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진짜?"

    크륵.

    그런데 반응이 즉각적으로 오는 걸 보면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쩌면 이 괴물 같은… 아니, 괴물, 그 자체인 외면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 실제로는 사람과 비슷한 정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닐까?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좋으면 오른손을 들고, 싫으면 왼손을 들어. 어때?"

    슥.

    오식이의 오른손이 들리는 것을 본 서아영은 살짝 벌어진 입으로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진짜 알아듣잖아?

    헐,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기분이야.

    "머리가 좋아도 개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일부러?"

    오식이가 다시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치밀한 놈!

    서아영은 드디어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찾은 느낌이었다. 머리가 너무 좋으면 이지혁에게 부림을 당할까 봐 지금까지 그것을 숨겨온 것이다.

    이 정도의 지능과 인내심이라면 믿을 수 있다.

    "아니, 그러면……."

    하지만 최정훈은 다른 부분을 주목했다.

    "그 개처럼 굴었던 게 다……."

    연기였다고?

    최정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저거 뭐야?

    저 눈가에 맺힌 촉촉한 것은 뭐지?

    허허허.

    내가 살다가 오거가 우는 것도 보는구나. 괴물이 눈물도 흘릴 수 있었나?

    그런데 왜 자꾸 눈앞이 뿌옇지?

    최정훈은 자꾸 눈앞을 가로막는 물기를 닦아냈다.

    빌어먹을, 오거와 교감하다가 울다니.

    그전부터 평탄한 인생은 아니지만, 이지혁이 나타나고부터는 인생이 제대로 꼬이고 있었다.

    애초에 능력자도 아닌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 선생."

    최정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오식이의 집채만 한 손이 그 위를 덮었다.

    까칠까칠한 털 사이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최정훈은 다시 한 번 눈가를 훑어냈다.

    "그 정도로 해두세요."

    서아영은 궁상맞은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괴물을 보며 혀를 찼다.

    궁상을 떠는 것도 때와 시기가 있는 법이다.

    마왕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크륵?

    "일단 오식… 음, 오식 씨가 좋으면 오른손을, 오 선생님이 좋으면 왼손을 들어주세요."

    그런데 이건 너무 미묘한 어감 차이 아닌가?

    그런 걸 괴물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좀…….

    서아영의 우려는 오식이의 살짝 들리는 오른손 앞에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뭐야, 이 새끼! 나보다 똑똑한 거 아냐?'

    순간적인 불신감이 들었지만, 공동전선이 펼쳐진 이 마당에 굳이 그런 것을 들먹여 어색해질 필요는 없겠지.

    "적당히 저희끼리 협상을 해서 조금 더 편할 것인지……."

    크륵.

    "아니면!"

    서아영의 눈이 번뜩였다.

    "혁명을 일으킬 것인지!"

    크르르륵?

    오식이가 움찔하며 뒤로 몸을 젖혀 서아영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서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지혁이 그리도 무서운가?

    아니, 그래, 무섭다. 진짜 무섭다.

    그건 인정한다.

    서아영도 한 번씩 그를 볼 때마다 섬뜩함을 느끼니까.

    하지만 그건 연약한 여자니까 그렇다 치고…….

    덩치가 아깝다, 덩치가!

    서아영이 뚱한 얼굴로 노려보자 오식이는 사람처럼 컹컹,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정좌했다.

    정좌를 한 시점에서 이미 괴물의 영역은 많이 넘어선 느낌이다.

    "오식 씨, 다른 분들하고는 대화가 되시는 건가요?"

    오식이가 뒤를 슬쩍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속의 인이 찍힌 이들끼리는 정신적으로 교감을 할 수가 있다. 빌어먹을 종속의 인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 저분들의 의견은 어떤가요?"

    크륵?

    "계속 이리 사실 건가요?"

    오식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여자는 이지혁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는 건가?

    확실히 이 세계에서 만난 이지혁은 예전의 멸망의 좌만큼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때로는 정말 예전의 그 사람인가 의심이 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멸망의 좌의 만분지 일만이라도 남아 있다면, 감히 반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죽음은 차라리 평안한 것.

    이지혁의 눈 밖에 났다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된 상태에서 끝도 없는 고통의 지옥에서 허우적거린 마물들이 대륙을 가득 채울 만큼 많다.

    하지만…….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자신은 오거다! 오거란 말이다!

    수많은 오거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오거임을 증명하는 붉은 털의 오거다!

    그의 울음소리 한 번에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마계에서조차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리 개처럼 빌빌대는 꼴이라니!

    아무리 상대가…….

    이지혁을 떠올린 오식이의 눈가에 다시 습기가 차올랐다.

    마계의 마왕들 중에서도 오거를 이리 개처럼 다루는 사람이 있을까?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최소한의 존엄성은 보장을 해줘야지.

    아무리 두렵고 무서운 존재라고는 하나 받는 취급을 감안하자면 파업을 해도 백번은 해야 옳았다.

    다만, 문제는 방법이 없다는 것.

    이 작은 여자는 종속의 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다.

    종속의 인이 찍힌 존재는 인을 찍은 존재를 감히…….

    크륵?

    오식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면 좀 이상한데?

    종속의 인이 찍혀 있다면 오식이도 지금 감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본인이 없는 자리라고는 하나 반항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종속의 인이 완전하지 않다?

    오식이의 눈에 희망이 떠올랐다.

    크르르르!

    그로울링으로 다른 마수들과 소통을 한다.

    과연 그들 역시 미묘한 반항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이지혁의 육체를 제압하는 수준의 반항은 가능하지 않을까?

    오식이의 커다란 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겨우겨우 마계에서 이곳까지 왔는데, 이렇게 자유를 빼앗긴 채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못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결심을 굳힌 오식이가 마물들과 소통을 했다.

    커다란 동요가 인다.

    마물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자 지켜보던 능력자들도 흠칫흠칫 거리를 벌렸다.

    이내 소요가 잦아들고, 마물들이 긴장한 태도로 몸을 낮췄다.

    크륵.

    오식이가 다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확고한 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신 이지혁 씨에게서 벗어나도 사람들을 헤쳐서는 안 돼요!"

    오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처럼 사는 것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쯤이야.

    최정훈이 서아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쩌실 셈이십니까? 이들은 마수라고요."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죠."

    "아무리 그래도!"

    서아영의 눈이 불을 뿜었다.

    "최정훈 씨는 안 당하니까 그러는 거죠! 저희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안 당하다니!

    내가 안 당하다니!

    이 중에서 제일 서러운 게 나일 텐데, 내가 안 당하다니!

    아니, 부장 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최정훈이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여기 무인도잖아요. 협조를 얻어서 이 근처에다 두면 되겠죠."

    '그게 아니면 협력을 얻어내든가.'

    상대가 누구든.

    괴물이든 악마든 일단 말만 통한다면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설득의 명수가 있으니까.

    서아영의 정이 듬뿍 담긴 시선에 최정훈이 진저리를 쳤다.

    "뭡니까, 그 돈 보는 졸부 같은 눈은?"

    "적절한 표현이에요."

    서아영은 상큼하게 웃고는 다시 오식이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함께하시겠어요?"

    오식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크륵?

    "전 진짜 잘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가 힘을 합쳐서 대들면 반항은 할 수 있는 거예요?"

    순간, 오식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들어?

    그 멸망의 좌에게?

    베라프의 악몽이자 아흔아홉 번째 마왕인 이지혁에게?

    오식이의 머릿속에 전성기 시절 이지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충천하듯 솟아 올라간 불꽃의 날개를 펄럭이며 수억의 마물 군단을 이끌던 악마.

    마물이 보기에도 섬뜩하기 짝이 없는 마력을 흩날리며 끝도 없는 마법을 퍼부어 대는, 움직이는 절망.

    서로의 영역을 다투던 12주신이 힘을 합쳤음에도 막아낼 수 없던 절대자.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악마이되 악마가 아닌 자.

    결과는 간단하다.

    몰살.

    눈 한 번 깜빡할 틈에 모조리 영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찢어발겨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의 이지혁은 과거 그 멸망의 좌라고 하기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약해 빠졌다.

    과거 이지혁의 발톱의 때도 지금의 이지혁보다는 강할 것이다.

    그럼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번에 이지혁이 그를 구타했을 때도 고통스럽긴 했지만, 나름 맞을 만했다.

    예전의 이지혁이라면 자신의 기준으로는 티끝만큼밖에 안 되는 마나만으로도 오식이를 지옥불로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크륵.

    오식이가 이를 드러냈다.

    그가 주인으로 모신 자는 절대자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혁은 절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지혁은…….

    크롸롸롸!

    오식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표효했다.

    인간! 그저 인간!

    살을 찢으면 찢어지고, 목을 잡으면 뽑히는,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서아영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실 거죠? 여러분이 지낼 곳과 식량을 보장하겠어요."

    크륵!

    오식이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아영은 그 손에 손을 얹고는 아래위로 흔들었다.

    좋아!

    지구가 생겨난 이래 최초로 인류와 몬스터의 공조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서아영이 뒤로 돌아 능력자들을 보며 외쳤다.

    "연대는 이루어졌어요! 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선포합니다!"

    "옳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대로는 살 수 없는 법이죠. 혁명은 언제나 밑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죠!"

    "성공하기 전에는 그냥 반란이지."

    "그렇긴 하죠."

    무심하게 대답한 서아영이 몸을 굳혔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린데?

    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뒤로 고개를 돌린 서아영의 눈에 오식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지혁이 들어왔다.

    이지혁……?

    아니, 그런데 뭘 쓰다듬어?

    오식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커어엉!

    그거다!

    서아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거가 선봉을 서주면 바로 이어서 지원을!

    그 순간, 오식이가 바닥으로 몸을 날리더니, 배를 뒤집어 깠다. 얼굴 앞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오식이가 헥헥댔다.

    "착하다."

    이지혁이 오식이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

    그 덩치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꼴 보기 싫은 걸 떠나서 무섭단 말이야!

    그리고 조금 전까지 그렇게 동조해 놓고는 그렇게 개처럼 비비지 말라고! 꼬리 흔들지 마!

    오식이의 배를 쓰다듬던 이지혁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죠? 혁명?"

    "그게……."

    서아영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그녀의 머리에서 딱히 좋은 대답이 나올 리가 있나.

    상황을 살핀 최정훈이 자연스레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미우나 고우나 상관이다.

    "하하하, 혁명은 좋은 거죠. 인류는 혁명과 함께 발전해 온 것 아니겠습니까? 역사에 대한 것이죠. 그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그렇죠, 혁명은 좋은 거죠."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은 일이지, 혁명.

    "그런데 그건 아세요?"

    "네?"

    "실패한 혁명만큼 끔찍한 것도 없다는 걸 말이야!"

    이지혁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환상이 보이는 것 같다.

    "역사? 역사 좋지! 내가 일인 독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하게 해주지!"

    울부짖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은 그냥 웃어버렸다.

    망했네.

    허허…….

    허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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