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10화 (10/118)
  • [■] 제발 상식 좀 갖추고 삽시다! [■]

    ─────

    도가윤이 받은 명령은 간단했다.

    이지혁에 대한 감시.

    그리고 돌발 상황 발생 시 즉각 보고하고, 될 수 있으면 이지혁과 충돌하지 말 것.

    물론 도가윤 역시 이지혁과 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목숨은 두 개가 아니니까.

    다만, 이 의외의 요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조금 애매한 문제였다. 보고를 하기에는 사안이 중요하지 않고, 보고를 하지 않기에는 찝찝했다.

    '일단 선조치.'

    도가윤은 주변에서 이지혁을 감시하던 이들을 불러 차량을 수배했다. 그러더니 그 차에 이지혁을 태우고는 이지혁이 원하는 대로 최근 게이트가 열렸던 곳을 향해 갔다.

    차에 탄 이지혁이 전화를 꺼냈다.

    "엄마."

    도가윤이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쟤 만날 엄마 찾던데, 은근히 마마보이 기질이 있는 것 아닌가?

    "나 좀 늦게 들어갈 거 같아. 잘하면 오늘 못 들어갈 수도 있고."

    저 정도까지는 상식적이다.

    일단 외박 통보를 부모에게 하는 것까지야 상식선이다.

    "아니, 그런 거 아냐. 아니, 아니라니까! 진짜 노는 거 아냐! 아니, 돈 벌러 나왔다니까! 진짜야! 아니, 엄마는 왜 그렇게 자식을 못 믿어! 믿게 했냐고? 그야……."

    전화를 하면서 점점 찌그러지는 몰골이 심히 추하다. 저러다 차량 시트에 박힐 기세였다.

    "아니, 엄마, 진짜야……. 응. 진짠데… 아니, 아니……."

    그 후에도 계속 전화를 향해 '진짠데'와 '아니'를 반복하던 이지혁이 힘없이 전화를 끊고는 절망한 얼굴로 창문에 얼굴을 대더니 '나는 쓰레기다'라고 웅얼대기 시작했다.

    대체 전화 건너로 무슨 소리를 들었으면 사람이 저렇게 숨죽인 배추처럼 축축 늘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전화만으로 사람을 저리 만들다니, 정신계 능력자 수준이었다.

    '어머니도 측정을 해봐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

    이지혁은 두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풀죽은 두 어깨가 슬퍼 보였다.

    "보자, 보자……."

    주위를 슬그머니 둘러보던 이지혁이 한곳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있다!

    마나가 뭉쳐 있는 곳이 곳곳에 보였다.

    이지혁은 마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마나를 살폈다.

    '미세하게 흩어지고는 있군.'

    에테르와 섞이지 못하기에 한곳에 뭉치기는 하지만, 긴 시간에 걸쳐서 흩어지기는 하는 모양이다.

    흩어진 마나가 흐름에 휩쓸려 미세하게 나눠지는 건지, 아니면 결국 변질되어 동화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일단 게이트가 사라지더라도 한동안 마나는 유지된다는 것과 그 시기가 길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간이 길다면 그동안 게이트가 열렸던 곳들을 모조리 훑으며 마나를 다 흡수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가능성은 사라졌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마나도 일전에 이지혁이 흡수했던 마나량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게 어디야.'

    이지혁은 히죽 웃으면서 드레인을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뭉쳐 있던 마나가 이지혁에게로 빨려 들어왔다.

    "응?"

    도가윤은 이상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지혁이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봐."

    이지혁에 부름에 도가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땡큐."

    그 말을 남긴 이지혁이 그 자리에서 퍽, 사라졌다.

    "……."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지혁을 찾던 도가윤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는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 목표 사라짐.

    문자를 한참 바라보던 도가윤이 낮게 한숨을 쉬고는 차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포항.

    이른 아침부터 운동을 나왔던 사람들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해안가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천천히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괴물 아냐? 괴물?"

    "바다에서는 괴물이 안 나오잖아요."

    "그럼 저게 대체 뭐지?"

    "잠수함 같기도 하고……. 공비라도 출현한 건가?"

    "저거, 고래 아냐?"

    "고래?"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초점을 맞췄다.

    듣고 보니 고래 같기는 한데…….

    고래가 미쳤다고 이 해안까지 온단 말인가.

    거, 어디 해안에는 범고래가 파도 타고 와서 물개도 물어 가고 울릉도 근처에야 돌고래가 제 멋대로 논다지만, 그거야 다른 곳 이야기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눈으로 보이는 게 있으니 믿지 않을 수는 없고.

    사람들이 일제히 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SNS에 올려야겠네."

    "조회수 쩔듯."

    사람들은 히히덕거리며 고래를 보았다.

    하지만 그 히히덕거림도 잠시.

    점점 그들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계속 오는데?"

    "…저거, 어디까지 오는 거야?"

    "나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그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지 않았나?"

    "죠스?"

    "아니, 국산 영화에서."

    "…그러고 보니 이러다가 다들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이었나?"

    별것 아닌 말이지만 파장은 컸다.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그냥 고래 같은데?"

    "고래가 왜 해안으로 오겠어!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고래가 미쳐도 해안으로는 안 오지. 여기 20년 살았는데 그런 건 본 적도 없어."

    "죽어서 떠내려오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럼 알아서 해. 나는 도망갈 테니까."

    군중심리에 휘말린 사람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날 때쯤, 마침내 해안까지 닿은 고래가 멈춰 섰다.

    "그냥 고랜데?"

    "아니… 고래가 왜?"

    의문 어린 시선이 모일 때, 고래 뒤에서 물에 쫄딱 젖은 한 사람이 천천히 해안으로 걸어 나오더니 주저앉았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물에 푹 젖은 담배를 보고는 인상을 쓰며 집어 던졌다.

    "어휴, 죽는 줄 알았네."

    물론 사내는 이지혁이었다.

    "아저씨."

    이지혁이 옆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

    "예?"

    "담배 한 개비만 주시면 안 돼요? 제 건 다 젖어서요."

    "아, 뭐… 예, 드리죠."

    이지혁에게 불린 사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담배를 내밀고는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았다 내뱉은 이지혁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힘들었다."

    의도는 좋았다.

    태평양까지 가서 참치 몇 마리만 잡아 올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마나량이 부족했기에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위치를 몰라 공간 이동도 불가능했고, 거기까지 날아가야 하는데 플라이 마법은 생각보다 마나가 굉장히 많이 소모된다.

    그래서 타협을 본 것이 동해!

    적당히 날아갔을 때, 마침 숨을 쉬러 올라온 밍크고래를 발견하고 내리꽂히면서 죽빵을 날린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이 고래가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는 것이다.

    와이어로 묶어서 끌고 오다가 마나가 애매해지는 바람에 중간부터는 대충 반은 마나로 끌고 반은 체력으로 끌며 해안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은 못할 짓이라 생각될 정도의 강행군이긴 했지만!

    그 성과는 크고 아름다웠다.

    "흐흐흐."

    이지혁이 물에 잠겨 있는 고래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저게 1억짜리란 말이지?"

    신선한 고래라면 1억에도 거래된다는 기사를 검색해 봤다.

    게다가 저건 신선한 정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활어다! 활어!

    아니, 고래는 포유류니까 활어가 아니지.

    활육? 뭐라고 해야 하지?

    여하튼 살아 있는 생물 고래란 말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고래가 대충 정신을 차리면 다시 죽빵 한 번씩 날려서 기절시키기를 반복해 왔다.

    불쌍한 고래를 그렇게 이 해안까지 끌려온 것이다.

    육지까지 끌어 올리면 폐가 찌부러질까 봐 대충 물에 담가놓았으니, 이제 경매만 붙이면 된다.

    "아저씨."

    "…예?"

    "저거, 경매 붙이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경매요?"

    "예."

    "어판장에서 하긴 할 텐데, 근데 저걸 경매 붙인다고요?"

    "안 되나요?"

    "그게 참……."

    사내는 묘한 눈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그때, 사람들을 헤치며 이지혁을 향해 경찰들이 다가왔다.

    "뭔 일입니까?"

    "네?"

    "저 고래가 떠내려온 건가요?"

    순간, 이지혁은 발끈했다.

    떠내려오다니!

    얼마나 고생해서 잡은 건데!

    이지혁은 당당히 소유권을 주장했다.

    "제가 잡은 건데요?"

    "당신이요?"

    경찰이 미심쩍다는 얼굴로 이지혁을 훑어보았다.

    "능력자십니까?"

    "그런 건 아닌데, 제가 잡았어요."

    "능력자도 아닌데 고래를 잡았다고요?"

    "그 어감이 무척 이상하긴 한데……."

    이지혁이 다리를 오므리고 말을 이었다.

    "예. 제가 잡았어요."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구만!"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 소린가, 이게?

    "포경 불법인 거 몰라요?"

    "네?"

    "고래는 잡는 게 불법이에요. 아니, 기본적인 거 아닙니까!"

    "불법이요?"

    "예! 불법요!"

    이지혁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아니! 그럼 내가 지금까지 먹은 고래 고기는 다 어디서 나온 건데요! 내가 옛날에 어시장 놀러 갔다가 경매하는 것도 봤는데!"

    "그건 혼획이고."

    "혼획?"

    "그냥 그물 쳐놨는데 와서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인정해 주는 건데, 목적을 가지고 고래를 잡으면 불법이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뭔 법이 그따위래요?"

    "법은 법원에서 따지시고."

    경찰이 이지혁의 팔을 움켜잡았다.

    "일단 같이 가십시다."

    "네?"

    "일어나세요."

    "헐……."

    * * *

    서아영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선은 유치장 한쪽 구석에 쭈그리처럼 처박혀 있는 이지혁에게로 향해 있었다.

    해경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얼마나 황당했던가.

    불법으로 고래를 잡은 미친놈이 그녀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다.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구역에 새로운 미친놈이 등장했다는 것을.

    그 미친놈이라는 단어에 의혹을 가지고 확인해 본 결과… 아니나 다를까, '그' 미친놈이었다.

    서아영은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정훈이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쟤 진짜 영입해야 해요?'

    '어쩌겠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한데, 진짜.'

    최정훈의 시선이 유치장 구석에서 넋이 나가 있는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제발 상식 좀 갖추고 삽시다! 제발!"

    이지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서아영이 포문을 열었다.

    "대체 왜 그래요! 대체!"

    이지혁은 대답없이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서아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죽빵 한 대만!

    저 인간 죽빵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사람이 얼마나 상식이 없으면 고래를 잡을 생각을 해요!"

    "……."

    이지혁은 시선을 피한 채 딴청을 부렸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번만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래를 잡든 상어를 잡든 좋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래서 문제가 생겼으면 알아서 해결할 것이지! 왜 꼭 이럴 때만 우릴 찾는데! 같이 일하자고 해도 절대 싫다 그래놓고 왜 필요할 때만 써먹냐고요!"

    "그게……."

    이지혁이 우물쭈물했다.

    "집에 전화하면 되잖아요! 보호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바쁜 사람한테 전화해서 와달라고 하냐고요! 이유가 뭔데!"

    이지혁의 떨리는 눈이 서아영에게로 향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처량한지, 서아영이 순간 화를 내는 것을 멈출 정도였다.

    "엄마가……."

    "엄마?"

    "엄마가 알면 저 죽어요……."

    사고 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고래 잡다가 걸렸다는 말을 들으면 척추가 뒤로 접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해는 하겠는데……."

    박선덕 여사의 포스를 떠올린 서아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지혁 씨! 우리 바빠요. 바쁘거든요?"

    이지혁은 계속 고개를 구석으로 돌린 채 딴청을 부렸다.

    "저희가 정말 많이 배려해 드리고 있는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아니겠어요? 주는 것 없이 자꾸 이렇게 써먹기만 하시면 저희도 기분이 안 좋을 것 아니에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예요. 이러실 거면 쫓아내지나 말든지!"

    "죄송합니다."

    이지혁의 입에서 정말 나오기 힘든 사과가 나왔다.

    "흥!"

    승기를 잡은 서아영은 이지혁을 더더욱 몰아붙였다.

    "도와줄 것 같죠?"

    "……."

    "천만에요! 이건 법적으로 걸린 거라 저희가 어쩔 수 없네요. 알아서 잘 해결해 보시죠."

    "헐……."

    "어디 보자, 불법 포경이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나 3년 이하 징역이었나? 징역 살면 된다고 하시는 분이니 별것 아니겠네요."

    이지혁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표정을 보는 서아영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맺혔다.

    "그러니까 사람을 무시해도……."

    "저기, 팀장님……."

    "진짜 성질 같아서는 진짜!"

    "저기!"

    최정훈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아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왜욧!"

    최정훈이 두말없이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에서는 게이트 안 열리는 것 아니었습니까?"

    "……?"

    서아영의 고개가 바다 쪽을 향했다.

    먼바다로부터 해안을 향해 다수의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아영의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물 위로 반쯤 드러난 형태가 누가 봐도 이 세상의 것은 아니었다.

    서아영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몬스터는 이미 지척에 출현해 있다. 하지만 지원 병력이 도착할 시점이면 이미 이곳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그럼 지금 가용 인원은 그녀 하나뿐.

    그녀 혼자서 저 많은 몬스터를 모두 잡아두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럼 남는 가용 병력이…….

    서아영의 시선이 유치장 안으로 향했다.

    "이지혁 씨?"

    그곳에서…….

    세상의 모든 심통과 심술을 모아둔 것 같은 표정의 이지혁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눼?"

    서아영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망했어.'

    * * *

    서아영의 대처는 즉각적이었다.

    "최정훈 씨!"

    "예!"

    "관할에 지원 요청하고, 우리 쪽 애들도 가용 인원 추려서 당장 이쪽으로 튀어오라 그래요!"

    "거리가……."

    "혜민이도 같이 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최정훈이 다급하게 전화를 꺼내며 한쪽으로 달려갔다.

    "이지혁씨!"

    서아영이 초조 어린 얼굴로 말했다.

    "도와줘요."

    "눼?"

    불퉁하다.

    퉁명스럽다.

    심술보가 볼 가득 들어차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울화가 마구 치밀었지만, 방금 전 워낙 지어놓은 죄가 많은지라 서아영이 저자세로 나갔다.

    "이런 말씀 드리기 무척이나 죄송스럽지만……."

    "죄송스러우면 안 하면 되죠."

    "사정이 워낙……."

    "사정 없는 사람도 있나."

    이지혁은 사정없었다.

    "나 혼자는 못 막아요. 막을 수는 있는데, 빠져나가는 걸 모두 막을 수는 없어요. 저거 한두 마리만 잘못 풀려도 감당이 안 돼요. 아직 대피가 안 됐단 말이에요."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그러시나 모르겠네. 저는 이제 징역 살아야 해서 뭐 어떻게 도우려고 해도 방법이 없네요. 경찰 아저씨, 담요 하나 줘요. 잠이나 자야겠네."

    그러고는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리는 이지혁을 보며 서아영이 안절부절못했다.

    "할 수 있는데 귀찮아서 도와달라는 게 아니고요. 이지혁 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몇 백이 죽어 나갈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아이고, 언제부터 대한민국 공무원이 범죄자한테 도움을 청하셨나?"

    '아아아아아아아!'

    서아영은 자신의 허벅지를 마구 내려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풀어줄걸!

    뭐 그리 악감정이 남았다고 사람을 몰고 갔나!

    아니, 저 망할 놈의 몬스터들은 왜 하필이면 지금 출현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여기서!

    "이지혁 씨?"

    "헹!"

    "이지혁 씨이이~"

    "퉤!"

    "아, 제발 좀!"

    이지혁은 귀를 휘휘 후비더니 입으로 훅, 불며 말했다.

    "거, 알아서 참 잘 해결하실 것 같더니, 왜 이제 와서 그러시나? 누가 보면 내가 뭐 생떼 부리는 줄 알겠네."

    "우리도 한 번 도와줬잖아요?"

    "그래서 좀 돕고 싶기는 한데, 신분이 범죄자 신분이라서……. 뭐, 어쩌겠어요. 무식하고 상식도 없어서 죄지은 게 잘못이지. 판사님,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서아영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싫다.

    정말 싫은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인간이 꼭 필요했다.

    서아영은 결심을 굳혔다.

    그녀가 이지혁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허리를 푹 숙였다.

    "뭐해요?"

    "도와주세요."

    "이런다고 제가 마음 돌릴 사람 아닌데?"

    "이지혁 씨가 도와주지 않으시면 민간인이 피해를 입어요. 저한테 감정 안 좋으신 거 압니다. 저희 쪽과 얽히기 싫어하시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급해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이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는 서아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자꾸 뭘 믿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정말."

    "부탁드려요."

    이지혁이 가만히 서아영을 바라보다 말했다.

    "고개 드세요."

    "도와주시는 거예요?"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런 관계 싫어해요. 우리가 뭐 도와주고 말고 할 관계도 아니고."

    "……."

    실망감과 경멸이 피어오르는 서아영의 얼굴을 보며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대신 이렇게 하죠."

    "네?"

    "한 마리당 1억."

    "1억?"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당장은 저희가 그만한 액수를 마련할 수가 없어요. 천만으로 하죠."

    "아무리 딜이란 게 지르고 보는 거라지만, 반도 아니고 십분지 일로 깎고 시작하는 건 너무하는 것 같은데."

    "저희 공무원이에요! 돈은 예산이고요. 법률도 없는 상태에서 한 마리당 천만 원도 굉장히 무리하는 거예요. 상황이 이리 급하니까!"

    "속는 기분인데."

    "제발 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이지혁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이번만이에요. 이걸 빌미로 저보고 자꾸 싸우라고 하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노력해 보죠."

    "대답이 영 시원치 않긴 한데……."

    이지혁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뭐, 일단은 그걸로 됐어요."

    돈도 돈이고, 서아영의 태도가 앞서 본 적 없을 정도로 정중하기도 했다지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찝찝하다는 거.

    민간인을 위해서 몸을 던져서 영웅 행세를 해보겠다는 정의감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지만, 사람이라 걸리는 게 있기는 하다.

    거,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물가에서 놀던 애가 자꾸 깊은 물 쪽으로 가면 사람은 누구나 그 애 쪽으로 슬금슬금 가게 되지.

    우물에 빠지려는 애를 보면 나도 모르게 달려든다든가.

    그런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간 존중은 있으니까.

    어려운 일이면 모를까, 조무래기 몇 상대하는 게 귀찮아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꼴을 방치한다는 게 영 찝찝하거든.

    게다가…….

    '돈 준다니까.'

    1억짜리 고래가 인어공주도 아니고, 물거품으로 화해 버린 상황이니까 이렇게라도 벌어야지!

    "한 마리에 천만 원이라 이거지?"

    이 정도면 거의 노다지 수준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해서 돈 떨어질 때마다 나가서 일할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겠는데?

    한탕 해서 한 1년 먹고살다가 다시 한 탕하고?

    이지혁은 피식 웃었다.

    말이야 쉽지.

    지금이야 위급 상황이니 굳이 그까지 필요로 하는 거지만, 막상 상황이 좀 진정되고 나서 게이트의 출현에 대비할 수 있다면 굳이 그를 용병으로 써야 할 상황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출현할 때인데…….

    그쯤 되면 용병질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 멸망을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뭐, 그거야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고!

    지금은 당장 눈앞의 저 돈 덩어… 아니, 몬스터들이 문제지!

    "이거나 좀 열어봐요. 깨고 나가면 나중에 또 무슨 소리 들을지 모르니까."

    서아영이 경관들에게 지시하여 유치장 문을 열었다.

    이지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유치장 밖으로 나와서 서아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불이에요!"

    "아니."

    "네?"

    이지혁이 강렬한 눈으로 말했다.

    "두부."

    서아영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 새끼 풀어준 게 정말 잘한 걸까?'

    인류를 위해 가둬둬야 할지도 모른다.

    손을 거둔 이지혁이 물가로 나오는 돈 덩어리들을 보며 희희낙락했다.

    "웰컴이다, 새끼들아."

    * * *

    "연락이 안 된다고?"

    최정훈이 인상을 확 썼다.

    "제기랄, 이런 상황에 연락이 안 된다고 하면 뭘 어쩌라는 거야! 항시 확보하고 있으라고 했잖아!"

    -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버럭 지른 최정훈이 주먹을 꽉 쥐었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김재범의 잘못도 아니었다.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는데…….

    최정훈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연락을 받은 경찰들이 최대한 대피를 서두르고 있고, 지부의 요원들이 급파되는 중이기는 하지만… 너무 느렸다.

    '막을 수 있나?'

    민간인 피해를 만들지 않으려면 서아영이 어떻게든 그들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하지만 서아영은 지원계.

    단독으로 다수의 몬스터들과 교전할 시, 접근하는 몬스터 하나만 있어도 속수무책이다.

    "이지혁! 이지혁!"

    최정훈이 전화기를 들었다.

    "어떻게든 확보해서 최대한 빠르게 보내!"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정훈이 다시 해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원을 요청해야 할 곳에는 모두 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혹시나 이지혁이 협조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하여 이지혁을 확보하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 해안으로 뛰어간 최정훈의 눈에 확 트인 바다가 들어왔다.

    "헐……."

    순간, 최정훈은 할 말을 잃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 * *

    "어?"

    이지혁은 물가로 올라오는 몬스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자드맨?"

    손에 꼬나 쥔 삼지창.

    비늘로 덮인 피부와 길게 갈라진 혀.

    누가 봐도 저건 리자드맨이다.

    이지혁은 상식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며 혀를 찼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나!"

    가장 앞에 있던 리자드맨이 이지혁을 보고 삼지창을 든 채로 달려들었다.

    "개구리는!"

    이지혁의 주먹이 달려드는 리자드맨의 턱주가리를 날렸다.

    "민물에 산다고, 이 새끼들아!"

    턱을 얻어맞은 리자 드맨이 쏘아진 탄환처럼 날아가 바다에 처박히며 물보라를 뿜어냈다.

    "상식에 맞게 살아야 할 거 아냐."

    이지혁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또 미묘하게 다르네.'

    자꾸 거슬린다.

    그가 알던 몬스터가 아니라 미묘하게 변형된 몬스터가 자꾸 보이는 것도, 게이트가 그가 있는 곳만 졸졸 따라다니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냥 넘기기에는 뭔가 찝찝했다.

    그가 바다에 오지 않았다면 오늘 바다에서 게이트가 열렸을까?

    이지혁이 혀를 차다가 그에게 달려드는 세 마리의 리자드맨을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마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쉽게 쉽게 해결했겠지만, 지금 그에게 있는 것은 그저 몸뚱아리뿐이었다.

    그 몸뚱아리라도 잘 써야지.

    세 개의 삼지창이 머리와 복부,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지혁의 몸이 엿가락처럼 쭉 늘어나며 세 개의 삼지창을 피해냈다.

    무방비로 노출된 리자드맨 한 마리를 걷어차 날리고, 다른 한 마리의 복부에 단타를 꽂아 넣는다.

    펑!

    깔끔한 타격음과 함께 리자드맨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남은 한 마리는!

    "으라차!"

    이지혁이 리자드맨의 목을 움켜잡고 바닥에 꽂아 넣었다. 그 자세 그대로 오른손이 리자드맨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쾅!

    다시 한 번!

    쾅!

    쾅!

    삼 연격을 얻어맞은 리자드맨이 부들부들 경련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이지혁이 가만히 리자드맨을 응시했다.

    나와라.

    나와!

    죽은 리자드맨의 몸에서 소량의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지혁은 씨익 웃더니 드레인을 펼쳤다.

    한 톨의 마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빨아들인 이지혁이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마나만 있으면…….

    "비켜요!"

    "응?"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자 집채만 한 화염을 든 서아영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지?"

    서아영이 그대로 화염을 이지혁 쪽을 향해 날렸다.

    정확하게는 이지혁을 너머 리자드맨 무리에게 날린 것이긴 하지만.

    그 피격 범위에 이지혁이 미묘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매우 미묘하게!

    "저게 미쳤나!"

    이지혁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콰아앙!

    화염의 폭풍이 바다 위를 휩쓴다.

    아슬아슬하게 폭풍의 범위에서 벗어난 이지혁이 소리를 질렀다.

    "돈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지! 사람을 죽이려 들어!"

    서아영은 매우 아쉽다는 듯 혀를 차더니 말했다.

    "그러게 왜 그리 깔짝깔짝 하고 있어요. 저번처럼 한 번에 날려 버리면 되잖아요."

    "저번요?"

    "저번에 그 바위 괴물 죽였을 때."

    "그런 적 없는데요?"

    "다 봤어요! 이지혁 씨 건물 옥상 위에 있는 거."

    "아닌데……."

    "그런 쫄쫄이 트레이닝복 입고 다니는 사람 흔하지 않으니 그냥 인정하시죠."

    "시판 추리닝을 나만 입고 사는 것도 아니고……."

    변명할 말이 궁색해진 이지혁이 말을 돌렸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돈 준다니까!"

    "저기,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마나가 있을 때고.

    난 지금 마나가 얼마 없다고!

    마나만 있으면 저딴 것들쯤이야 손가락 하나로 처리하겠지만.

    지금 이지혁은 충전지 같은 존재.

    마나를 쓴 만큼 다시 채워야 한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조무래기들이야 문제가 없지만.

    문제가…….

    "어?"

    그사이 리자드맨이 좀 늘어난 것 같은데?

    어디 보자, 한 백 마리는 넘…….

    계속 늘어나는데?

    이지혁이 조금 황당한 얼굴로 바다 멀리를 바라보았다.

    개미 떼같이 뭔가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게이트가 좀 큰 게 열렸나 보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조금씩 잡으면서 마나만 흡수하면 저런 조무래기쯤…….

    우우우우우우웅!

    그때, 먼 곳에서 낮고 묵직하며 거대한 하울링이 울려왔다.

    "어?"

    이지혁의 고개가 먼 곳을 향했다.

    수평선쯤의 바다 밑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래 한 마리 잡았다고 바다가 노했나?"

    뭔가 일이 점점 꼬여가고 있다.

    * * *

    검은 그림자는 이윽고 해안까지 다다랐다.

    쏴아아아!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마침내 괴물의 거대한 동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음……."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 상황을.

    확실히 눈앞에 나타난 괴물은 거대하고 강해 보이기는 했다. 분명 그렇기는 한데…….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동체!

    좌우에 달려 있는 작은 눈은 검지만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입은 거대하여 절로 두려움을 일게 만들었다.

    "저건……."

    바다의 포식자.

    무자비한 학살자.

    상어도 잡아먹는, 천적 없는 바다의 폭군.

    그 무시무시한 바다의 악마를 본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은!

    그 모습은 너무나!

    "귀, 귀여워!"

    이지혁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서아영이 그 거대한 동체의 괴물을 보며 멍하게 말했다.

    "범고래?"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범고래였다.

    "으, 저 반점이 참을 수가 없어."

    이지혁이 범고래의 눈 부분에 위치한 새하얀 반점을 보면서 하악댔다.

    무자비한 바다의 포식자는 포식자고, 실제로 귀엽기는 귀여우니까.

    다만, 서아영은 생각이 다른지 떨리는 눈으로 눈앞의 괴물을 바라보았다.

    범고래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범고래가 아니었다.

    닮은 부분이라고는 머리 부분뿐, 좌우로 각각 십여 개의 지느러미가 팔처럼 돋아나 육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적어도 체고가 10m는 되어 보였다.

    '저런 괴물이 출현한 적이 있었나?'

    그녀가 알고 있는 바대로라면 단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난리가 났을 테니까.

    저번 바위 괴물 사태도 그렇고, 최근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보고된 적 없는 몬스터가 계속 출몰하고, 몬스터의 크기도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저 양반이 나타나고부터 되는 일이 없어.'

    서아영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꽂혔다.

    그러고 보면 몬스터들이 급출몰한 시점이 저 인간이 나타난 시점과 겹치지 않는가.

    관련은 없겠지만, 이상하게 찝찝하다.

    '그건 그렇고, 저 인간은 뭘 저리 좋아하는 거야?'

    뭔가 부르르 떠는 것 같더니, 이제는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까지 찍어 댄다.

    "뭐하는 거예요?"

    "귀엽잖아요."

    '저게?'

    저게 귀엽다고?

    이 인간은 취향도 맛이 갔나?

    아니, 사람이 맛이 갔으니까 취향도 맛이 갔겠지.

    그래,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바로 저 인간의 반응이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반응이기는 한데, 사람인지라 적응이 되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괴물이잖아! 이 양반아!"

    서아영의 격한 반응에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뭐래요? 그냥 귀엽다는 거지."

    이지혁은 휘파람을 불며 거대 범고래를 바라보았다.

    '기생형인가?'

    물론 이계에 범고래형 몬스터가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범고래와 리자드맨의 조합은 뭔가 이상하다.

    그러니 저 범고래는 기생형 몬스터에게 기생당한 상태라고 봐야 할 텐데,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동해에 범고래가 사나?"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말에 대답을 해줄 사람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지혁 씨."

    "넹?"

    서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조무래기들을 맡을 테니, 이지혁 씨가 저 괴물을 맡아주시면 좋겠네요."

    이지혁이 씨익 웃었다.

    "싫은데요?"

    "네?"

    "아니, 저 커다란 걸 나보고 뭘 어쩌라고!"

    "더 큰 것도 한 방에 날리는 걸 내가 봤는데!"

    그건 마나가 있을 때고!

    아니, 이걸 일일이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

    "가성비가 안 맞아요, 가성비가. 그리고 쟤는 얼마로 쳐줄 건데요? 설마 쟤도 똑같이 천만 원으로 하자는 건 아니죠?"

    서아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겨보고 싶지만, 아무리 우기려고 해도 저 커다란 걸 다른 거랑 똑같이 한 마리로 친다는 건 양심상 문제가 좀 있었다.

    "그럼 이천?"

    "적당히 해먹다 정치인으로 테크 타실 생각?"

    서아영이 이를 갈았다.

    차라리 욕을 하지, 참 더럽게도 비꼰다.

    "1억으로 하죠."

    "화끈하기도 하셔라. 세금을 물처럼 쓰시네요."

    울컥.

    서아영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줘도 불만이고, 안 줘도 불만이다.

    "시끄럽고, 얼른 싸우세요."

    "예이, 예이."

    이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농담은 농담이고…….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이거.'

    리자드맨의 개체 수가 백 단위를 간단히 넘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제 대충 올 놈은 다 온 것 같다는 게 다행이다. 더 늘어나기 시작하면 곤란하니까.

    일단 게이트에서 나올 놈들은 더 없는 것 같다.

    아니, 꼭 여기로만 다 몰려왔다고 볼 수는 없다.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으니까.

    이지혁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이것도 나 때문인 것 같은데.'

    가는 곳마다 게이트가 따라오는 기분이다. 아니, 이쯤 되면 기분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그가 있는 동네는 심심하면 게이트가 열리는 마굴이 되었고, 바다에 갔다 오니 이제까지는 없던 해상 게이트가 열렸다.

    우연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게 우연이면 세상에 필연 따위는 없다.

    '넘어오는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건가?'

    인과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애초에 저 게이트들이 왜 열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다만, 이대로 가서 좋을 게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떻게든 대책이 필요했다.

    "일단은 얘들부터 처리해야 하는데……."

    키이이이익!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리자드맨들이 떼를 지어 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지혁이 리자드맨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상실감이 든다, 상실감이!

    베라프였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것들이 삼지창을 꼬나 쥐고 달려드는 꼴을 보자니 배알이 뒤틀리고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권력을 잃은 자의 설움인가!

    뭐, 낙향한 권력자의 기분은 나중에도 음미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저 건방진 놈들에게 벌을 내는 게 우선이었다.

    부족하지만 가용한 마나를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면!

    이지혁의 오른손 앞에 검은 마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류처럼 파지직거리던 마나가 회오리치다 이내 길쭉하게 뻗어 나간다. 이지혁의 손을 떠난 마나가 얇게 펴지며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갔다.

    서걱! 서걱!

    마나의 칼날에 닿은 리자드맨들이 썰려 나가며 푸른 피가 솟구쳤다.

    드레인.

    이지혁의 손이 뻗어지며 리자드맨들이 죽으며 흘러나온 마나를 빨아들인다.

    육체로 빨려 들어온 마나를 정제하고 변환한다.

    변환된 마나가 양손으로 몰려든다.

    수식을 구성하고 마나를 조정하여 하나의 마법을 완성한다.

    이지혁의 우수가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리자드맨을 향해 뻗어졌다.

    "라이트닝!"

    검은빛을 띤 뇌전이 리자드맨의 육체를 꿰뚫고, 그 뒤로 달려들던 리자드맨들을 동시에 감전시켰다.

    파지지직!

    리자드맨들의 몸이 익다 못해 반쯤 터져 나갔다.

    이지혁은 흘러나온 마나를 빨아들이며 혀를 찼다.

    "이거, 효율이 너무 안 좋은데……."

    그리 강하지 않은 마법을 쓰고 있는데도 마나가 뭉텅뭉텅 빠져나간다.

    베라프에서처럼 변환 없는 마력으로 무식하게 찍어 누르는 스타일을 포기하고 일일이 수식을 짜서 마법을 써주고 있는데도 마나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새삼 느껴진다.

    마나 게이트를 통해 끝없이 공급되던 마력이 그를 얼마나 편하게 해주었는지. 강물처럼 마나를 뿜어내도 바다처럼 마력이 채워졌었지.

    '이제 와 아쉬워해 뭐하나.'

    그 마나를 잃는 대가로 지구로 돌아왔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다만, 좀 귀찮다는 게 문제인데…….

    순간, 이지혁이 움찔하여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데?

    "헐……."

    상공에 불꽃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이지혁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니! 말 좀 미리……."

    하지만 서아영은 그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파이어 레인!"

    화염의 비가 바다로 떨어진다.

    주먹만 한 불덩어리들이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광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오우."

    불덩어리들이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다.

    범위를 완벽하게 설정해서 이지혁에게는 불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묘한 거리가 뭔가 사람을 움찔하게 만든다. 대놓고 불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이 정도거리면 어쩌다 하나쯤은 튈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미묘하게 묻어 있는 것 같은 그 거리가!

    실력은 괜찮은데…….

    분명히 실력은 괜찮다.

    베라프에서도 동 나이 대에 서아영만 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아니!"

    이지혁이 서아영을 보며 삿대질을 했다.

    "바닷물에 잠겨 있는 애들한테 불 뿌리면 뭐하냐고!"

    불의 우박이고 뭐고, 바닷물을 데워서 얘들을 익혀 버릴 수가 없는데 의미가 있을 리 있나.

    그러니까 왜 바다에다 대고 불을 뿌리냐고!

    서아영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어째요.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는데!"

    "자랑이다!"

    이지혁이 혀를 찼다.

    실력이야 좋지만, 범용성이 너무 떨어진다.

    서아영에 비해 약한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물 계열이나 뇌전 계열의 마법을 통해서 리자드맨 정도야 깔끔하게 처리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서아영은 그들에 비해서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음에도 리자드맨들을 처리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화염 계열의 능력밖에 쓸 수 없으니까.

    한 가지 능력에 특화되어 있는 능력자의 한계였다.

    '자기들끼리 싸우더라도 상성이 엄청 갈리겠는데?'

    그것도 나름 재미는 있겠어.

    "쓸모가 없네, 쓸모가."

    "아니,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한 거잖아요! 얼른 처리나 해줘요!"

    "아직 돈 안 받았는데."

    이지혁의 표정이 뚱해지자 서아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면 좋겠는데요."

    "헹!"

    이지혁이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돌렸다.

    이지혁의 마법에 당하고 불덩어리 세례까지 받은 리자드맨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며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자신들의 세계였다면 이미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겠지만, 그들에게는 달아날 곳이 없었다.

    갈 곳…….

    그 순간, 리자드맨들이 이지혁의 눈치를 살피더니, 좌우로 뿔뿔이 흩어져 도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이지혁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막아요!"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던 최정훈이 소리를 질렀다.

    서아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일단 이쪽은 내가 맡아볼 테니, 저것들을 막아주세요."

    이지혁이 멍한 얼굴로 서아영을 보았다.

    "여기서 당신이 뭘 할 수 있다고 여길 막아? 반대로 가야지."

    "꺄악! 이지혁 씨!"

    "응?"

    이지혁의 고개가 뒤로 돌았다.

    콰앙!

    그 순간, 범고래 괴물이 그 거대한 지느러미 같은 팔을 휘둘러 이지혁을 내려쳤다.

    파아아!

    이지혁이 있던 자리가 파이며 대량의 흙과 함께 물보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

    서아영이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범고래의 팔이 내려쳐진 곳의 파문이 줄어들며 서아영이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수면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설마…….'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서아영의 눈이 떨린다.

    범고래의 팔이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밀려나듯 부르르 떨리는 팔 아래로 이지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코와 입으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오는 이지혁이 오른팔로 지느러미를 들어 올린 채 범고래를 노려보았다.

    "아니, 이 새끼가 사람이 말하는데!"

    이지혁이 고개를 획 돌려 서아영을 보고는 소리쳤다.

    "아줌마!"

    "뭐, 인마?"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는 서아영의 뒷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지혁이 소리쳤다.

    "증언 제대로 해요!"

    "예?"

    이지혁이 눈을 빛낸다.

    "이거 정당방위니까. 혼획이라고!"

    그럴 리가.

    * * *

    실수라면 실수였다.

    불사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하는 부작용.

    어떤 전장에서도 죽을 수 없고, 어떤 타격을 받아도 죽지 않는다.

    그런 시간을 천 년 넘게 보내다 보니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는 아님에도.

    속 어디가 상한 듯 목구멍으로 비릿한 핏물이 자꾸 울컥울컥 올라온다.

    이지혁이 오른팔을 밀어 올렸다.

    퉁!

    범고래가 튕겨 나온 팔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뒤로 밀려난다.

    그 거대한 동체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찍어 대자 대지가 쿵쿵, 울리는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서아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온다. 이지혁의 상의가 피로 젖어들어 갔다.

    "괜찮을 리가 있나! 이 피 안 보여요? 아이고! 내 피 같은 피……. 아, 이게 아닌가?"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금 같은 피?

    이건 이상하고.

    돈 같은 피?

    이것도 뭔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더럽게 아프네. 진짜."

    고통이야 익숙하다마는 재생과 동시에 고통이 사라지는 게 당연했기에 한 번 입은 부상이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이지혁에게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휘말리지 말고 물러나요."

    "예?"

    "물러나라고!"

    이지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자 서아영은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잊고 있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기보다는 막상 마주하면 긴장감이 풀어지게 되는 사람이다 보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지혁은 특급 위험인물이다.

    이지혁이 손으로 코를 잡고 핏물을 풀어내고는 손을 한차례 털었다.

    기분이 좀 나쁘다.

    이지혁이 가만히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선뜻 달려들지 못하던 몬스터들이 이지혁의 시선을 받자 낮게 몸을 움츠리며 그로울링한다.

    으르르하는 소음이 합쳐지며 이지혁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그들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주먹을 움켜쥔 이지혁이 가장 가까운 곳의 리자드맨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아악!

    괴성을 지르며 리자드맨들이 우르르 이지혁을 맞이한다.

    가장 선두에 선 리자드맨의 창을 마나를 둘러 강화시킨 팔로 후려쳐 날리고, 그대로 손을 뻗어 목을 꿰뚫었다.

    우드득.

    고깃덩어리를 파고드는 질감이 느껴진다. 꿰뚫은 채로 움켜잡고 집어 던졌다.

    리자드맨의 시체가 맹렬히 회전하며 다른 리자드맨들을 집어삼킨다.

    물보라가 튀어오르고 괴성이 울려 퍼진다.

    뭔가 그리운 소음이다.

    우우웅!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주변에서 절로 뭉쳐 몇 개의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연기처럼, 불꽃처럼 휘날리던 마나탄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며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키에에엑!

    카아악!

    몬스터의 조악한 성대가 만들어낸 쇳소리가 귀를 아프게 파고든다.

    "드레인."

    이지혁은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끌어당겼다.

    오오오오!

    범고래가 다시금 팔을 휘둘러 이지혁을 후려쳐 왔다. 이지혁이 가볍게 몸을 띄워 범고래의 팔을 피했다.

    콰앙!

    범고래의 지느러미 같은 팔이 바닥을 후려치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뒤틀리고 물보라가 하늘까지 솟구쳤다.

    이지혁이 바닥에 착지해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그러고는 빨아들인 마나를 흑마력으로 전환하였다.

    일반적인 마도사라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지난한 작업이지만, 그 모든 작업이 이루어진 순간은 찰나.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력을 전환시킨 이지혁이 양손을 벌렸다.

    가슴 앞에서 응축된 마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

    꿈틀대며 부풀어 오른 마나가 일순간 부르르 떨더니, 수십여 개의 촉수를 뿜어내었다.

    촉수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며 리자드맨들을 꿰뚫었다.

    파충류의 기괴한 비명이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촉수가 그들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 있는 리자드맨들은 삼켜지지 않으려 발악했지만, 검은 촉수는 마치 크게 입을 벌린 뱀처럼 그들을 하나하나 집어삼켰다.

    이지혁은 촉수의 시작이 되는 중심에 손을 대었다.

    드레인.

    우드드득!

    꺄아아악!

    뼈 부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섞인다.

    우드득, 우득.

    괴음과 함께 검은 마나에 둘러싸인 리자드맨들이 압력에 짓눌려 찌부러지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효율은 이게 높군.'

    흘러나온 마나만 먹을 게 아니라 직접 흡수해 보면 어떨까 싶어 라이프 드레인과 함께 써봤더니, 마나가 확실히 더 많이 차올랐다.

    그동안은 HP가 풀로 고정된 치트캐나 다름없었기에 라이프 드레인 같은 저급한 마법을 쓸 필요가 없어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방법이라면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효율을 끌어 올릴 수 있을 듯했다.

    '아니, 아니지!'

    앞으로의 전투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생각을!

    이지혁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그를 보고 있는 범고래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핏물이 기껍다.

    맞았으면 보답을 해줘야지. 그렇지?

    "넌……."

    이지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양손에서 뭉클대더니 길고 날카로운 손톱의 형태로 화했다.

    "쉽게 죽을 생각 말아라."

    이지혁이 범고래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서아영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도 목숨이 오가는 게이트 사투에 몸을 던진 지가 5년이 넘었다.

    못 볼 꼴도 많이 봤고, 험한 꼴도 많이 봤다.

    목숨을 걸고 하는 전투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고, 이제 웬만한 광경에는 놀라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녀의 인식과는 너무 달랐다.

    이지혁이 양손으로 범고래 괴물을 말 그대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양손으로 범고래의 살을 꿰뚫고 잡아채 찢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검고 하얀 모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신을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인 범고래는 공포에 짓눌려 저항하고 있는 수준이었고, 이지혁은 낄낄 웃으며 범고래의 살을 바르고 있었다.

    '산 채로 회를 뜬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서아영의 시선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낄낄 웃으며 범고래의 입을 강제로 비틀어 열고 있는 이지혁의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미쳤어.'

    저 인간은 맛이 갔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나사가 풀린 게 아니라 저 인간… 머리가 좀 이상하다.

    수많은 미친놈을 봤지만 저리 웃으면서 괴물을 쥐어뜯는 놈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차라리 악마적인 타입이라면 이리 위화감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최정훈이 수도 없이 그에게 경고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지혁은 위험하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와 닿지 않던 그 말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난다.

    저 인간은 정말 위험하다.

    절대로 저 인간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저 고래 꼴이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도 없을 테니까.

    붉은 포말이 이는 바다를 보며 서아영은 한숨을 쉬었다. 바닥에 쓰러져 겨우 숨만 쉬고 있는 고래의 머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지혁은 마지막으로 고래 머리를 걷어차 숨통을 끊어놓고는 피 칠갑이 된 몸으로 서아영에게 다가왔다.

    찰방.

    파도를 헤치며 다가오던 이지혁이 바닷물을 손에 적셔 피 묻은 얼굴을 닦아내며 서아영에게 물었다.

    "그런데 고래도 회로 먹나요?"

    "…친 새끼."

    "네?"

    "아니에요."

    서아영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 *

    탁탁탁탁.

    이지혁이 휴대폰을 들고는 계산기 어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보자, 개구리가 백스물두 마리, 고래가 한 마리."

    최정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가 무슨 제탕원도 아니고, 뭔 계산을 저리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거 개구리 아니라고! 도마뱀이랑 개구리를 구분하란 말이다!

    그건 상식 이전의 문제잖아!

    차마 소리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삼킨 최정훈이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이러다가 스트레스성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 날 잡아서 대나무 숲이라도 찾아야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속으로 소리치는 최정훈을 향해 이지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십삼억 이천만 원이네요. 끝다리는 빼드릴게. 십삼억만 주시면 됩니다."

    "얼마요?"

    "심삼억이요."

    최정훈이 멍한 얼굴로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서아영이 고개를 돌렸다.

    "십삼억?"

    "왜, 왜요!"

    최정훈의 눈이 타오른다.

    "팀장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그럼 뭘 어떻게 해요. 아니면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생겼는데. 돈보다야 사람이 중요하잖아요!"

    그야 그렇다.

    분명 그렇기는 한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십삼억이라니요! 그 예산은 어디서 짜란 겁니까?"

    "그야 최정훈 씨가……."

    "예?"

    서아영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면목이 없는지 어깨를 움츠리며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최정훈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최정훈은 집요했다.

    "십삼억이 무슨 애 이름도 아니고! 그걸 상의도 없이 갑자기 집행하라고 하면 저는 뭐라고 보고를 해야 되는 겁니까? 이 예산은 어디서 빼오라는 겁니까!"

    "죄, 죄송해요."

    찔끔한 서아영을 보며 최정훈은 신이라도 난 듯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거, 다 좋은데……."

    서아영을 구해준 것은 의외로 이지혁이었다.

    이지혁은 허락도 없이 최정훈의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돈부터 주고 이야기하죠."

    "이지혁 씨……."

    최정훈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속을 했으니 돈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정부 자금이라는 게 그리 바로바로 지급되는 게 아니라서 저도 결재안을 올리고 집행이 떨어져야 지급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짧으면 보름이면 됩니다."

    "길면?"

    "길면 육 개월까지도 걸리죠. 좀 꼬이면 이 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까지 걸리기야 하겠습니까?"

    "흐음, 육 개월에서 이 년이라……."

    이지혁이 고개를 돌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범고래 괴물의 사체를 보며 말했다.

    "회 좋아하세요?"

    "……."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최정훈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갈가리 해체되어 회 떠진 괴물을 보며 묻는 이유가 뭘까?

    알아듣기 싫은데 자연스레 알아들어진다.

    이지혁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천천히 허공으로 흩어진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나도 저 담배 연기처럼 흩어지겠지.

    "제가 노력은 해보겠지만, 이게 제가 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회 좋아하시나요?"

    "…오늘 내로 입금해 보겠습니다."

    이지혁이 방끗 웃었다.

    "역시 능력이 있으시네요."

    '개새끼.'

    능력자가 아니라서 가장 서글픈 점은 할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리라.

    하지만 최정훈은 프로페셔널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사상자도 없고 건물 피해도 전혀 없었습니다. 규모에 비하면 정말 깔끔하게 끝난 일이죠. 그러니 어떠십니까? 같이 가셔서 차라도 한잔?"

    이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됐고요. 집에 가야 하는데, 뭐 타고 가야 하죠? 가까운 데 터미널이 있나?"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럴 거까지 있나요. 버스 타면 금방일 텐데."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요."

    "예? 그렇게나 걸려요?"

    날아서 금방 왔더니 시간 감각이 없다.

    "제가 모셔다 드릴 테니, 일단 타시죠."

    "이렇게요?"

    이지혁이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물에 젖고 피에 젖어 엉망이 된 옷을 보자 최정훈이 단호해졌다.

    "일단 옷부터 사 오라고 하겠습니다."

    시트는 보호해야 한다.

    차가 얼마짜린데!

    "서비스?"

    "네…… 서비습니다."

    "감사요!"

    헤실헤실 웃는 이지혁을 보며 최정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파악하기 힘든 인간이다.

    * * *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지혁은 신기한 듯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한 반응에 서아영과 최정훈의 눈썹이 꿈틀꿈틀했다.

    "저… 이지혁 씨."

    "예?"

    "병원은 정말 안 가보셔도 되겠어요?"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이 정도로 병원을 가요?"

    '보통 사람이면 죽었어, 이 미친놈아.'

    적어도 몇 십 톤은 될 괴물이 전력으로 휘두른 팔에 직격당했다. 일반인이었으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오징어포가 되었을 것이다.

    "장기 손상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잠시 들르시는 게?"

    "괜찮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제 몸은 제가 잘 아니까요."

    사실 모른다.

    다쳐 봤어야 알지. 다친 적이 없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친 적은 많지만, 그 '다침'이라는 현상이 3초 이상 유지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잘은 모르지만, 아프지도 않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왜 아까부터…….

    "창문 좀 열어도 돼요?"

    "예? 물론이죠. 갑갑하신가요?"

    "아뇨. 갑갑한 게 아니라 멀미가 나는 것 같아서 속이 자꾸 울렁거리는 게…… 웁!"

    이지혁이 미식거린다는 듯 헛구역질을 하자 최정훈이 차의 속도를 줄였다. 갓길에라도 대고 일단 진정을 시켜야 할 듯했다.

    "이지혁 씨! 피잖아요, 그거!"

    이지혁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서아영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어? 이상하다. 왜 피가 나지?"

    "그러니까 내가 병원에 가자니까!"

    최정훈이 화를 내며 엑셀을 꽉 밟았다.

    * * *

    "에, 그러니까……."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증상 자체는 위천공을 의심했습니다만, CT와 내시경 소견상 위궤양이라 생각됩니다."

    "위궤양요?"

    최정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궤양이 그 정도의 출혈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아뇨. 보통 그 정도의 출혈이 나는 경우라면 궤양이 아니라 천공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 내시경으로 확인한 것이 궤양이라 저도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으음, 그럼 천공이었다가 호전되었을 수도 있습니까?"

    "그 정도의 회복력이 있다면 사람이 아니겠죠. 아니, 그러고 보니……."

    이지혁은 빙긋 웃었다.

    '뭐라고 하는 줄 모르겠으니 그냥 가만있어야겠다.'

    의사가 서아영과 최정훈을 잠시 보더니 차트를 들었다.

    "회복계라면 가능한 일이군요. 보자, 그런데 에테르 수치가…… 음, 에테르는 970이네요. 미묘하긴 한데, 능력이 있다 해도 이 정도 에테르 수치면 그 정도의 급회복을 바라기는 어려울 텐……."

    꽈악.

    그 순간, 서아영이 의사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몇이요?"

    "예?"

    "에테르!"

    서아영의 타오르는 눈을 본 의사가 찔끔하여 대답했다.

    "970입니다. 뭐가 잘못됐나요?"

    "970……."

    "올랐군요."

    서아영과 최정훈이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교환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 기쁜 소식을 이지혁과 함께 나눠야지.

    "뭐?"

    이지혁이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대답한다.

    "어쩌라고! 팍! 씨!"

    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수치가 올라서 좋긴 한데, 생각해 보면 이제 와 그런 게 뭔 의미가 있나.

    무엇보다… 좀 무섭다, 저 인간.

    "그럼 별 이상은 없다는 거죠?"

    "약만 잘 드시면 됩니다. 술 드시지 말고요."

    "예, 감사합니다."

    병원 밖으로 나온 이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치가 올랐다?'

    에테르라는 것이 이 세계의 마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강체술이라든가 육체형들이 쓰는 비술은 마나를 육체 내부에 쌓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기술들이고, 외부의 마나를 정제해 사용하는 이지혁은 이러한 비술들을 사용하기 위해 자연스레 에테르의 사용법을 깨우쳤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 극미했기에 육체를 사용하는 기술들은 2류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에테르가 늘어났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이제 내 육체는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생각해 보면 에테르를 통해 더 강해질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찾지 않더라도 에테르가 늘어날수록 육체가 강인해지고 익히기만 해두고 쓸 수 없던 기술들을 쓸 수 있게 될 테니 자연히 강해질 것이다.

    지금은 임시로 마나를 몸에 두르고 싸우는 식으로 근접전에 대비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파괴력은 어느 정도 낼 수 있어도 속도를 높일 수 없어서 한계가 있으니까.

    좋은 소식이긴 한데…….

    "이 동네에서 굳이 그런 게 필요할까?"

    전쟁터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 * *

    좋은 차는 다르다.

    운전석과 보조석도 다르지만, 고급형 차량으로 갈수록 뒷좌석의 안락함이 달랐다. 이지혁은 최정훈의 고급 세단이 가지는 안락함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요."

    "예."

    "에테르는 어떻게 늘려요?"

    최정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서아영을 바라보았다.

    "딱히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들어본 적은 없어요. 보통은 자연스레 늘어나죠."

    "그렇구나."

    "그러니 이지혁 씨도 곧 1,000을 넘기실 거예요. 그럼 명실상부한 능력자가 되는 거죠."

    "아, 그렇구나."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시죠?"

    "그럼요."

    "정말?"

    "좋죠. 정말 좋은데,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좀 더 좋지 않을까 고민하는 중이죠."

    "하…하하."

    서아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게 농담처럼 안 들린다.

    "이지혁 씨."

    "예?"

    최정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제 생각을 좀 해보셔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

    "지금까지 겪어봐서 아시겠지만, 저희 그리 나쁜 놈들 아닙니다. 능력자분들의 복지도 최대한 고려하고 있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최대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까지는 이지혁 씨가 활동을 워낙 안 하셨기에 큰 트러블이 없었지만,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트러블은 피할 수 없습니다."

    "트러블요?"

    "능력자를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이지혁 씨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냉담합니다."

    이지혁은 침음성을 냈다.

    대충은 예상은 했다.

    베라프에서도 마법을 익힌 마법사나 기사는 경원의 대상이었으니까.

    그쪽에서야 그런 인종들이 지배계급이니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어떨까?

    어느 날 내 옆으로 1초면 나를 불태워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지나간다면?

    웃고 떠들던 친구가 알고 보니 화가 나면 나를 말 그대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통제되지 않는 힘은 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지혁은 KSF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KSF가 있어서 생기는 부작용보다 KSF가 없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배는 더 클 테니까.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예."

    "능력자 양반들이 저지른 범죄 같은 건 없어요? 일반인들도 술 퍼먹고 가게 유리창을 깬다거나 사람을 때려죽이기도 하는데, 그 많은 능력자들 중에서 그런 미친놈이 한둘 없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많은 부분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최정훈이 낮게 말했다.

    "물론 없을 수야 없습니다. 없게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요."

    "그런데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던데……."

    "통제하니까요."

    사람이 아니라 언론을.

    대충 알아들은 이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한국은 그나마 통제가 잘되는 곳입니다. 블랙 먼데이가 있기 전부터 치안 같은 부분은 최상급이었으니까요. 다만, 유럽 같은 경우도 능력자 범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죠."

    아이러니하다.

    대게이트 대처법이 확립되기 전까지 피가 쏟아지는 전투가 있을 때에는 드러나지 않던 문제점이 사회가 안정되면서 거꾸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이지혁 씨를 전력으로 쓰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이지혁 씨도 보호 받아야 합니다."

    "제가요?"

    "예. 보호 받아야 합니다. 이지혁 씨는 아직 이 사회에서 자신이 처한 입장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 죄송하기는 한데, 이지혁 씨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폭탄이나 다름없는 문제입니다. 규제를 피해가는 능력자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난리가 날 겁니다. 그만큼 이지혁 씨는 민감한 곳에 서 있는 겁니다."

    "아니,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더 문제죠. 잘못이 없으니까. 잘못도 없는데 가해오는 압박을 참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

    "그렇게 하나하나 압박이 들어오다 보면 어느 순간 이지혁 씨도 선을 넘게 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끝이 없어집니다."

    최정훈은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단순한 회유가 아니다. 이건 경고이자 부탁이었다.

    "결국 이 사회가 해체되고 이지혁 씨를 주도로 질서가 재편되거나 이지혁 씨가 죽어야 끝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될까 봐 겁이 납니다. 어느 쪽이든 흘려야 할 피는 적지 않을 테니까요."

    "흠……."

    "저희도 이지혁 씨를 회유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여러 가지 방책이 있고, 조금씩 진행해 나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오늘 느꼈습니다. 다 쓸모없는 이야기죠. 조건이나 대우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지혁 씨니까요. 이지혁 씨가 관심 없는 쪽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버지 짤린 것도 그쪽 짓인가요?"

    "아니, 그건 좀 억울한 게… 탈세 정도나 잡으려고 했는데."

    "제가 죄송합니다……."

    "아뇨. 이지혁 씨가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여하튼간에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저희에게 오는 길이 이지혁 씨의 미래를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만들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지혁 씨!"

    최정훈이 갓길에 차를 대며 말했다.

    "저희와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뭐랄까…….

    이 남자가 남자에게 하는 열렬한 고백 같은 대사는.

    이지혁은 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전부터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요."

    "예!"

    "거, 자꾸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솔직히 제가 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건데, 진심으로……."

    "예, 말씀하십시오!"

    "아니, 일단 데려가는 것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가면 감당이 되겠어요?"

    "…예?"

    "그럼 그때부턴 나랑 같이 계속 일을 해야 할 텐데?"

    카로 왕국.

    신성제국을 뒤집어엎을 기세로 세력을 뻗어가던 카로 왕국의 핵심이자 대륙 역사에 남은 명재상 루드 브렌시아.

    관리의 달인이라 불리던 철혈의 명재상.

    그조차 이지혁과 엮인 이후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서 단명하고 말았다.

    이지혁과 엮이지 않았으면 카로 왕국은 아마 대륙의 역사를 바꿔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재조차도 이지혁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니들이?

    나랑 같이 지내보겠다고?

    "뭔 배짱으로?"

    이지혁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최정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얘랑 계속 같이 일을 하고, 엮여야 한다는 건가?

    얘랑?

    최정훈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이내 다시 활짝 웃는 얼굴이 되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이건 없던 일로 하시는 게……."

    "에라이!"

    최정훈은 진지했다.

    * * *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차에서 내린 이지혁이 집을 향해 걸어가며 담배를 꼬나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알고는 있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배척되는가는 지겨울 정도로 겪었다.

    물론 그 세상에서처럼 배척 받지야 않겠지. 전 세계가 자신 하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모습을 바꾸고 최대한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애써본 적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에서 튀어나온다.

    블록들 사이에 다른 크기에 블록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결국에는 섞이지 못하고 튀어나오게 된다.

    '여기서도 그렇게 될까?'

    아니, 다르겠지.

    일단 이곳에는 다른 적이 있으니까. 그 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새로운 적을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저 게이트가 영원하다는 보장은 없다.

    게이트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지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중요하지 않아.

    아직까지는…….

    한데 그 순간, 이지혁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저거?"

    허공이 물결친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넣은 것처럼 허공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 속에서 새파란 거울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이트?"

    이젠 코앞에서 나타나는 건가?

    그것 하나라면 놀랄 일까지는 아니다. 예상했던 범위 내였으니까.

    우웅- 우우웅-

    공명음과 함께 이지혁을 둘러싼 형태로 또 다른 게이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야?"

    마치 그를 포위하듯 나타난 게이트들.

    이지혁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해보자는 거지?"

    얌전히 살고 싶었다.

    그동안의 반동이 너무 심했기에 최대한 얌전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마저 이리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누군지는 모른다.

    아직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지혁은 최정훈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감당할 수 있을까?"

    나를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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