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리터너-9화 (9/118)
  • [■] 아들을 그렇게 못 믿어? [■]

    ─────

    끌려 들어가는 예원이를 보며 이지혁은 청량함에 기지개를 켰다.

    뭘까, 이 알 수 없는 뿌듯함은?

    이럴 때는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라서 참 좋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바락바락 대들면서 저항하던 이예원이 순식간에 비에 젖은 강아지 꼴이 되어 처량하게 끌려가는 모양을 보니 깨소금이 따로 없었다.

    룰루랄라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응?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린 이지혁의 눈에 금발 머리 여자애가 들어온다.

    아, 맞다.

    쟤 때문에 내가 처음에 예원이가 괴롭힘 받고 있다고 착각했었지.

    양아치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괴롭힘 당하던 아이였다.

    "왜?"

    주춤대던 금발머리는 쭐레쭐레 다가오더니, 이지혁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도와? 내가?'

    하기야 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고맙다는 소리가 쉽게 나오나? 자신이 이예원의 오빠라는 걸 알았을 텐데?

    얼핏 보긴 했지만, 제일 주도적으로 나서서 괴롭히던 애가 그 녀석이었던 걸 감안하면 동생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싸대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고맙다고 하는 걸 보면 굉장히 심성이 곱구나.

    호구호구 열매를 먹은 거겠지.

    "근데 너는 왜 욕먹고 있었던 거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우물쭈물 하는 모습을 보니 대충 짐작은 갈 것 같았다.

    이예원처럼 완전히 환한 금발은 아니지만 밝은 갈색보다 더 연한 머리색과 새하얀 피부, 오똑한 코, 거기에 큰 키와 늘씬한…….

    예쁜데?

    이지혁은 흔히 볼 수 없는 여자의 미모를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금발은 싫다.

    쭉쭉 뻗은 예쁜 여자?

    더 싫다.

    저런 쭉쭉빵빵하고 서구적인 미모를 보면 베라프가 떠오른단 말이다!

    그리고 대체로 그가 만난 쭉쭉빵빵하고, 예쁘고, 늘씬한 것들은 거의가 악녀였다!

    망할 것들!

    "예원이가… 제 머리 염색하라고."

    "염색?"

    "예……. 일주일 전에 전학 왔는데요, 염색하라고 해서."

    음, 그러니까…….

    지가 금발인데 얘도 눈에 띄는 금발에 가까운 머리다 보니 자기가 튀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똑같은 금발인데 미모 차이가 극심하니까 열이 받았다든지.

    어느 쪽이든 막장인 건 마찬가지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야 하겠는데?'

    더 이상 삐뚤어지기 전에 정신 수양을 좀 시킬 필요가 있다. 계속 저리 내버려 두다가는 착하고 이뻤던 예원이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엄마만 잘 설득하면 교육 전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전권만 얻어낸다면 뼈와 살에 교훈을 쏟아부어서 정신 개조를!

    "그러게, 학생이 벌써부터 염색은 왜 하고 다녀! 너도 그렇다가 쟤처럼 양아치 된다."

    "염색한 거 아니에요."

    "응?"

    "저, 자연 금발이라서……."

    저 블링블링한 금발이 자연 금발이라고? 여기가 베라프냐?

    "혼혈?"

    "예……."

    이지혁은 아차 하는 얼굴로 여고생의 어깨를 꽉 잡았다.

    "미안하다."

    "예?"

    혼혈인 애 앞에서 혼혈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아니, 얘는 우월하니까 혼혈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여하튼!

    "못난 동생 때문에 폐를 끼쳤구나! 내가 최대한 저 망할 계집애의 썩어 빠진 정신 상태를 교정해 볼 테니, 앞으로 최대한 엮이지 마라."

    여고생은 멍한 얼굴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괜히 엮이면 너도 양아치 된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되는 거야."

    그러고 보면 내 친구들은 다들 뭐하고 있을까?

    다들 좋은… 아니,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이지혁은 자꾸 떠오르는 잡생각을 지우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갈게. 조심해서 가."

    "아, 사례도 못했는데……."

    "가해자 오빤데 사례는 무슨.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지. 그리고 혹시 앞으로 걔들이 또 괴롭히면 창식이한테 내 이름 대고 죽여 버린다고 해."

    "오빠 성함이……."

    "이지혁. 이지혁이다."

    "저는 김다솜이에요."

    다솜이라…….

    혼혈이라기에 안젤라 킴이라든가, 카사디안 리 같은 게 나올 줄 알았는데, 대놓고 한국 이름이라 좀 깨는 기분이다.

    "음, 그래. 그럼 잘 가라."

    이지혁은 현관으로 가다가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예?"

    김다솜이 깜짝 놀라 이지혁을 바라본다.

    "어깨에 힘 좀 넣고. 고개 들고 말할 때, 힘 넣어. 당당하란 말이야!"

    김다솜은 갑자기 이지혁이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어리둥절해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약해 보이는 개체는 괴롭힘을 당해. 그러니까 괴롭힘당하기 싫으면 일단 약해 보이지 말아야지. 계속 그렇게 소심하게 우물쭈물하면 일단 찔러본단 말이야. 알았어?"

    "아, 알겠어요."

    "그래!"

    이지혁은 후다닥 현관으로 사라졌다.

    김다솜은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상한 밤이었다.

    * * *

    이지혁의 아버지, 이철중은 기분이 좋았다.

    "룰룰루~"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요즘 들어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실종되었던 아들놈이 탈 없이 집에 돌아왔다.

    기억이야 좀 잃었다지만, 몸 성히 돌아온 게 어딘가.

    게다가 마누라의 식당은 안정적으로 매출을 올려주고 있는데다 딸내미도 귀엽기 그지없다.

    요즘 들어 좀 반항적이기는 하지만, 사춘기가 다 그런 거지.

    게다가 은근슬쩍 그의 임원 승격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슬슬 나이가 차서 걱정이 되던 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루하루 사는 맛이 있었다.

    물론 호랑이 같은 마누라가 조금만 더 사근사근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거까지야 바랄 수 없는 노릇이고.

    "좋은 아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선 이철중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이야?"

    사무실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본다.

    이철중은 엉망이 되어 있는 자신의 책상을 보며 당혹감에 잠겼다.

    그때, 그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철중 부장님."

    "으음? 당신들……."

    "감사팀입니다."

    이철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같이 가주시죠."

    턱.

    이철중의 서류 가방이 바닥으로 툭, 힘없이 떨어졌다.

    * * *

    시시각각 자신을 향해 마수가 뻗어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이지혁은 게임 삼매경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겹지도 않은가 봐."

    방 밖에서 그가 게임하는 몰골을 본 이예원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

    그날, 어머니에게 간만에 철권 제제를 당한 이예원은 틈이 날 때마다 이지혁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훠이."

    이지혁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저어 이예원을 쫓아냈다.

    "사람 보고 말하지?"

    "훠이, 훠이."

    "손모가지 부러지기 전에 그만두지?"

    "혼난다. 저리……."

    어? 목소리가 다른데?

    이지혁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거기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헤헤헤, 엄마 왔어?"

    "그래, 엄마 왔다. 엄마한테 훠이?"

    "에이, 몰라서 그런 거지."

    "그래. 게임을 열심히 하다 보니 부모도 못 알아보는구나."

    "무슨 그런 여가부 같은 말씀을."

    이지혁은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 엄마! 잘 왔어. 안 그래도 할 말 있었는데, 나 돈 좀 줘."

    "돈?"

    처음에는 용돈도 받고 남자가 지갑이 든든해야 한다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아무리 돈이 썩어 넘쳐도 집에서 놀고먹는 벼멸구에게 투자될 돈은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전기세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로서 해줄 도리로는 차고 넘쳤다.

    그 이상을 바라면 이지혁이 양심이 없는 거지.

    "네가 돈이 왜 필요해?"

    그래도 혹시 간식이라도 사먹으려고 그러나?

    물으면서도 박선덕은 슬그머니 아직 들고 있던 백으로 손을 넣었다.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지고, 듣고 있자면 울화가 터지는 자식 놈이지만, 그래도 자식이라 배곯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스킨 사게."

    "스킨?"

    화장품?

    박선덕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얘가 안하던 짓을 하지?

    "이거 봐봐, 이거!"

    이지혁이 가리킨 곳을 보니까 컴퓨터 안에 웬 캐릭이 똥폼을 잡고 있었다.

    "봐, 이렇게 스킨을 바꾸면……."

    클릭을 하자 캐릭터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뀐다.

    "진짜 멋지지?"

    "그래, 이게 스킨이구나."

    "응! 나 이거 사줘."

    "얼만데?"

    "얼마 안 해. 만 원?"

    "그러니까……."

    어머니가 천천히 백에서 손을 빼고 이지혁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하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놀고, 먹고, 자는 것밖에 없는 놈이… 이제는 기집애도 아니고 옷 갈아입히는 인형놀이를 해야 하니까 돈이 필요하다, 이거지?"

    "엄마, 이거 인형놀이 같은 거 아니라니까?"

    "뭐가 다른데?"

    이지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하, 이거 참 다른데! 정말 다른데!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

    "직접 봤다! 이놈 시키야!"

    쫙! 쫙!

    등짝으로 스매싱이 날아들었다.

    이지혁은 필사적으로 엄마의 손을 피하며 소리쳤다.

    "아니! 엄마, 너무 폭력적이야!"

    "내가 너 때문에 그렇다! 너 때문에!"

    "아닌 것 같은데!"

    "그놈의 주둥아리!"

    그때, 옆에서 이예원이 지원사격을 한다.

    "엄마, 쟤 바닥에 콜라 엎질렀는데 안 닦고 휴지로 대충 문질러 놨어. 내가 봤어!"

    저년이!

    아무리 동맹은 아니라지만 뒷치기는 하지 말아야지!

    저런 건 천벌을 받아야 하는데!

    "누가 쟤야! 내가 오빠한테 호칭 똑바로 하라고 했지!"

    천벌이 떨어졌다.

    이예원은 '앗, 뜨거라' 도망쳤다.

    '이러다 제명에 못 살지.'

    이지혁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돌아왔을 때는 쭉 퍼지다 보니 집에서 놀면 마냥 좋았는데, 이제 이 생활도 슬슬 익숙해지다 보니 자유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지혁은 베라프 말년에는 황제처럼 살았단 말이다!

    손짓도 필요 없었다.

    가만히 누워 입만 열어도 음식이 입으로 들어왔고, 빨대가 입에 꽂혔다.

    그런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눈치를 보다 보니 슬슬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립을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한다.

    일!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절대 하고 싶지 않다. 딱 1년만이라도 편히 살고 싶었다.

    "엄마!"

    이지혁이 칼을 뽑았다.

    "왜 그러니, 아들?"

    "사실 내가 좀 놀고 있다는 건 인정해!"

    "그래, 아는구나."

    "하지만 엄마, 엄마 아들은 5년 동안 생고생을 했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 노는 건 인정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 적어도 1년 정도는 다른 생각 안 하고 마음 편히 쉬고 싶다는 게 그리 큰 욕심이야?"

    이지혁의 칼은 날카로웠다.

    이지혁은 그의 칼이 적의 급소를 벨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방패는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했다.

    "너, 5년 동안 기억 없다며?"

    어라?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었지.

    "그런데 뭔 고생을 해? 기억도 안 나는데."

    "아, 아니, 정황상… 그 정황상 고생했겠지. 고생했을 거야, 아마도……."

    "아들."

    "…응?"

    "1년 편히 쉬고 기억 잃어버리면 놀아댄 것도 말짱 황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놀 때가 되었다."

    설득력이 있다.

    확실히 그러하다.

    이지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어머니."

    "그럼 이제 일을 할 거니?"

    이지혁은 씨익 웃었다.

    "그럴 리가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한숨을 쉬던 어머니가 막 잔소리의 폭격을 시작하려 할 무렵.

    딩동.

    벨이 울렸다.

    * * *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집을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버지?

    아직 퇴근할 때가 아닐 텐데?

    "누구지?"

    어머니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이지혁은 슬그머니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머니가 자리를 떴으니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게 현명했다.

    어머니가 인터폰을 받았다.

    "누구세요?"

    인터폰 건너편에는 화사한 미소를 지은 미녀가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KSF에서 나왔습니다. 상담드릴 일이 있으니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KSF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이지혁이 고개가 획 돌아갔다.

    "KSF?"

    그것들이 왜?

    왜 집에까지 찾아온다는 말인가.

    은근슬쩍 사람 따라다니는 것도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집까지 찾아온다고?

    이지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야 거슬리는 것이 없었기에 내버려 둔 것이다만, 자꾸 이렇게 자신의 생활에 침투해 들어온다면 생각을 달리해 봐야 한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다 날려 버리겠다… 이런 건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국가와 싸우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고, 까딱했다가는 전 세계와 싸워야 할 일도 벌어질 텐데, 그걸 누가 감당한다고.

    거기에 이겨도 남는 게 없다.

    그럼 애초에 엮이지 않는 게 최고지!

    "엄마! 문 열어주지 마!"

    "응?"

    "안 열어주면 그만이지. 쟤들이랑 엮여서 좋을 게 없어."

    "그래도 나라에서 나오신 분들인데."

    "영장도 없잖아! 영장! 그냥 꺼지라고 해!"

    "그래도……."

    "아니, 쟤들이 KSF에서 나왔다는 증거라도 있어? 괜히 이상한 놈들이면 어쩔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

    어머니가 미심쩍다는 얼굴로 인터폰을 응시했다.

    그러자 서아영이 씨익 웃으며 손에 든 것을 들어 올렸다.

    "아참, 빈손으로 오는 것은 실례일 것 같아서 선물도 들고 왔어요. 어머니, 혹시 이 메이커를 좋아하시나 모르겠는데……."

    서아영이 든 작은 종이 가방에 적힌 XHANEL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인터폰을 내려치고 문을 향해 달려갔다.

    "엄마!"

    "시끄러워!"

    깔끔하게 자식의 고함을 무시한 어머니가 문을 열며 지금껏 단 한 번도 이지혁에게는 들려주지 않던 간드러진 목소리로 서아영을 맞았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귀한 곳에서 일하시는 분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 오셔서 어쩐데요?"

    "아닙니다, 어머님.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서아영이 씨익 웃으면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저 망할 것이!'

    서아영의 얼굴 위로 떠오른 승리자의 미소에 이지혁은 부들부들했다.

    하지만 이미 들어와 버린 판에 뭘 어쩌겠는가.

    "누추하지만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서아영은 예의 바른 태도로 조심스럽게 다리를 모으고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꼬리 999개 달린 여우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불퉁스러운 이지혁이었다.

    박선덕이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따라 가져왔다. 서아영은 적당한 예의를 표하고는 음료를 받았다.

    "험한 곳에서 일하시는 분이라더니, 어떻게 이렇게 고우신가 모르겠네요."

    "호호호,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야말로 정말 예쁘세요. 이지혁 씨 어머니라는 말을 듣고 와서 그렇지, 몰랐으면 언닌 줄 알 뻔했어요."

    "어머, 별말씀을. 호호호."

    이지혁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니, 차원을 달리해서도 여자들의 저 칭찬 남발 인사법은 변하지도 않고, 여전히 적응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어머니가 슬그머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서아영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서아영이 고개를 돌려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이지혁 씨를 스카웃하러 왔어요."

    "끄응."

    이지혁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아버렸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적어도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 탐색하는 시간이 이것보다는 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혁이를요?"

    "예. 예전에 KSF에서 이지혁 씨가 조사 받았던 것은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이죠."

    자식 놈이 3일이나 갇혀 있다가 풀려났는데, 어떻게 그걸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조사 결과, 이지혁 씨께서는 아주 훌륭한 인재라 판명이 났어요."

    "우리 아들놈이 훌륭한 인재라고요?"

    남이 칭찬을 하는데 어머니가 미심쩍어 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로 시작되는 어머니들의 기본 패시브 스킬인 내 자식 콩깍지가 박선덕 여사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예, 훌륭한 인재입니다. 그래서 저희 KSF에서는 이지혁 씨를 정식으로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스카웃이라니……."

    어머니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이지혁을 보았다.

    저놈을 스카웃한다니.

    이 KSF란 놈들 소문만 번지르르 하지, 알고 보면 허당 아닐까?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쟤를 스카웃한다고 하지는 않을 텐데?

    처음 이지혁이 뭔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때 잠시 가졌던 부푼 꿈은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아무리 어미지만, 감쌀 수가 없는 자식 놈이었다.

    "지혁아."

    "응."

    "이리 와서 앉아봐라."

    "이 판만 끝내고 가면 안 될까?"

    "인생 끝나고 싶니?"

    "엄마, 지금 가고 있어."

    이지혁은 터덜터덜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의 핏발 선 시선이 서아영에게로 꽂혔다.

    하지만 서아영은 여유로웠다.

    아무리 이지혁이 막나간다고 해도 어머니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미 수많은 자료 화면과 증언을 통해 이지혁이 어머니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아니, 식당 아줌마 손에 들린 마른 오징어 꼴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뭐 얻어먹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어머? 이지혁 씨, 안면도 여러 번 있는데 너무 각박한 것 아니에요?"

    "안면이 여러 번 있는 게 아니라 악연이 여러 번 있는 거겠지!"

    "아니랍니다. 저는 정말 좋은 의도로 온 거예요."

    이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등 뒤에 사람을 숨기고 계시나?"

    "아, 죄송해요. 습관이 돼서. 가윤아, 나와서 인사드려야지."

    서아영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도가윤이 옆에 앉으며 박선덕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나자 박선덕은 놀라 눈을 꿈뻑했다.

    "시, 신기하네."

    놀랍긴 하지만 기겁을 하진 않았다.

    이미 수많은 능력자들의 능력이 밝혀지며 전파를 타고 퍼져 나갔기에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씀을 계속 드리자면……."

    서아영이 화사하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희는 최고의 조건으로 이지혁 씨를 채용하고 싶습니다. 일반인에게는 드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급여는 물론이고, 이지혁 씨 개인에 대한 모든 지원, 그에 그치지 않고 가족분들 역시 최고의 복지와 지원을 약속드립니다. 구체적인 안은 여기에."

    서아영이 백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조심스레 이지혁이 아닌 박선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저희가 약속드릴 수 있는 조건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서아영이 들고 온 종이 백을 서류 위에 올렸다.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약소합니다."

    "이런 걸 받아도 될지."

    "정말 별것 아니니 받아주세요. 거절하시면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시다면……."

    매우 부담스러워하는 말투와 입이 귀에 걸린 표정이 합쳐지면 저런 느낌이 나는구나.

    이지혁은 천 년을 넘게 살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한 광경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어머니는 아직 선물에 손을 뻗지 않았다.

    "원래 능력자들은 강제징집 아닌가요?"

    "모르고 계시군요. 자제분께서는 아직 능력자가 아닙니다. 일반인 신분이시죠."

    "그런데 왜?"

    "하지만 능력자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저희 KSF에 꼭 필요하고요. 단지 KSF만이 아니라 국가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에이."

    박선덕이 손사래를 치며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 미심쩍은 시선에 이지혁은 서러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엄마! 나 엄마 자식이야!"

    "내 자식이니 못 미더운 거지!"

    "아들을 그렇게 못 믿어?"

    "아들이니 못 믿지!"

    "넹."

    이지혁은 침몰되어 찌그러졌다.

    "그럼……."

    찌그러진 이지혁을 무시하고 박선덕이 서아영에게 물었다.

    "KSF에 가게 되면 어떤 일들을 하게 되나요?"

    "기본적으로는……."

    서아영은 잠시 머뭇대다 대답했다.

    "대게이트 작전에 투입됩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주요 업무지요."

    박선덕이 깜짝 놀라 말했다.

    "능력자가 아니라면서요?"

    "네. 하지만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실 이지혁 씨의 능력이라면 그깟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쯤은 식후 운동거리나 마찬가지죠. 그렇죠, 이지혁 씨?"

    "누가 그래요!"

    "겸손하시네요."

    "아니, 겸손이 아니라……."

    "겸손도 과하면 좋지 않답니다."

    저 여자, 원래 저렇게 혀가 매끄러웠나?

    그러고 보니 주도권을 쥐었을 때는 말이 청산유수처럼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음, 그러면 위험하지는 않은 몬스터 토벌에 투입되는 대신에 월급도 많이 주고 복지도 빵빵하게 해주고 가족들도 지원해 준다. 뭐, 이런 말씀이신가 보네요."

    "예, 어머니. 정확합니다."

    서아영과 박선덕의 시선이 마주치고 둘은 서로 미소를 보였다.

    '아, 안 돼!'

    이지혁이 위기감을 느끼고 상황을 뒤엎으려는 순간, 어머니가 손을 뻗어 종이 가방을 잡았다.

    "이건?"

    "지갑이에요. 백을 살까 하다가 취향을 잘 몰라서 지갑으로 준비했습니다. 아무래도 지갑은 취향을 좀 덜 타니까요."

    "그러시군요."

    박선덕은 화사하게 웃으며 서류 위에 올려진 종이 가방을 앞으로 밀어내었다.

    서아영이 빤히 그 동작을 보다가 물었다.

    "어머니?"

    "가져가세요."

    "예? 아니, 어머니."

    박선덕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애를 낳아보지 않으셔서 모르나 본데……."

    "예?"

    박선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느 어미가 자식을 사지로 내밀고 그 돈으로 편히 살려고 하겠어요."

    "……."

    "쟤가 비록 좀 멍청하고, 매사에 의욕이 없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잉여 인간에다가 먹는 것 밝히고, 성격도 더럽고, 사내새끼가 패기가 없어서 동생한테도 무시당하고, 게임도 못해서 만날 욕만 먹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중졸이지만!"

    "어, 엄마……."

    말이 좀 심하잖아.

    내가 그래도 자식인데.

    이지혁은 눈물을 삼켰다.

    이 세계로 오고 나서는 괄시 받는 게 습관이 됐다.

    "그래도 내 자식이에요. 눈에 넣… 아니, 됐고. 자식이에요. 귀엽지는 않아도 내 자식이란 말이에요. 집에서 놀고먹는 꼴이 보기 싫다고 애를 그 무서운 몬스터랑 싸우게 하라고요? 그게 내 앞에서 할 말인가요?"

    어머니는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는 서아영을 빤히 바라보며 쐐기를 꽂았다.

    "다시는 이런 일로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제가 곱게 보내드리지는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강했다.

    * * *

    서아영은 딱딱하게 굳은 박선덕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성급했네요."

    지금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서아영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의 심기를 생각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사과 받자고 한 말 아니에요."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과를 드려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박선덕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섭다.'

    이지혁은 평소처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지 않는 박선덕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분위기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지혁이라서 몇 배로 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증거로 서아영은 어머니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담담했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하는게 좋을 것 같네요. 선물은 관계없이 그냥 드리는 거니까 받아주세요."

    "아니요. 가지고 가세요."

    "어머님."

    서아영이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도 부모님이 계세요. 아니, 계셨었죠. 부모님께선 제게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할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어머님의 마음에 들려고 준비한 선물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을 지키려고 하는 거니 제가 불효녀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다면야."

    아니! 엄마!

    그게 그 빈손이 아니잖아!

    과일이나 뭐 음료수나 그런 거겠지!

    그런 것치고는 그 메이커… 엄청 비싼 거잖아!

    누가 봐도 뇌물인데!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마음으로 받아둘게요."

    마음 두 번 썼다가는 차도 선물로 받겠네.

    입이 댓 발로 튀어나오는 이지혁을 보며 어머니가 눈을 부라렸다.

    조동아리 집어넣어라.

    엄마의 입 모양이 너무도 선명하다.

    이지혁의 입이 자동으로 쏙 들어갔다.

    "그럼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살펴 가세요."

    "그리고……."

    서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또 뵙겠습니다."

    "다시 안 보겠다고 말씀드렸을텐데요."

    "제가 실수를 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어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도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그저 한 번 찔러보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그것대로 최선을 다해서 풀어드리겠습니다. 몇 번이고 다시 오겠습니다. 물세례를 받고 머리채를 잡힌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찰거머리 같은 계집애.

    물귀신 같은 년.

    이지혁이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서아영은 끝까지 이지혁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다고 제가 마음을 돌릴 일은 없을 거예요."

    "어머님, 저 하나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국가와 세상을 위한 일이에요."

    어머니는 피식 웃었다.

    "내 자식을 희생시켜서 지켜질 국가라면 없는 게 낫죠."

    "……."

    단호한 어머니의 의지를 읽었는지 서아영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뵙겠습니다."

    "가보세요."

    서아영과 도가윤이 현관 밖으로 사라지자 이지혁이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끌어안았다.

    "엄마아아아아아아!"

    "징그럽게, 왜 이래!"

    "캬! 이게 엄마지! 그래, 엄마!"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이지혁은 진심으로 뭔가 울컥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베라프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막아서 주는 이도 없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동질감이나 가족이라는 연대를 느껴볼 수가 없었다.

    그 단절되어 있던 연대감이 지금 살아나고 있었다.

    "놔! 징그러워! 진짜 징그러우니까 놔!"

    아니… 착각이었나?

    "엄마! 저 망할 것들이 다음에 찾아와도 꼭 안 된다고 해야 돼!"

    "그렇긴 해야 하는데……."

    "응?"

    박선덕이 조금 껄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워낙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라 좀 겁나긴 한다. 해코지한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하하하. 엄마도 참, 별걱정을 다하네."

    "그래도 능관부잖아."

    "엄마, 걱정하지 마. 쟤들 다 호구야."

    "호구는 니가 호구지!"

    이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별일이 없을지 아닐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수틀리면 이지혁도 막나가 버릴지 모르니까.

    '무서워서 참아주는 게 아니야.'

    귀찮은 것뿐이다.

    그 귀찮음이 임계점을 넘는다면 그도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애초에 베라프에서 그는 브레이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멈출 줄을 몰랐으니까.

    지킬 것이 없기에 적당히라는 것을 몰랐고, 잃을 것이 없기에 언제나 풀 액셀을 밟았다.

    그 결과가 지금 이거다.

    세계가 아닌, 신의 방해까지 이겨내고 이지혁은 마침내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그래, 나는 베라프의…….'

    "그건 그렇고!"

    "응?"

    "너 여기 앉아봐!"

    이지혁이 움찔하여 자리에 앉았다.

    "으…응?"

    박선덕이 현관쪽에 놓여 있던 종이 가방을 들고 오더니 이지혁 앞에 내밀었다.

    "뭐야?"

    이지혁이 종이 가방 안에 든 것들을 꺼냈다.

    커다란 책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웬 책……."

    이지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 * *

    고졸 검정고시 30일 완성!

    나는 30일 만에 검정고시 졸업했다!

    알기 쉬운 검정고시 기본 이론.

    고졸 검정고시 제대로 합격하기.

    검정고시 기출 문제집.

    "어, 엄마?"

    박선덕이 이지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아들."

    "으응?"

    "졸업은 해야지?"

    "응?"

    "내가 방금도 니가 중졸이라고 말하면서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아니.

    그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엄마가 알아서 이야기한 거잖아.

    근데 그걸 나한테 따지고 물어봤자…….

    "엄마도 상식적인 사람이야. 너한테 대학 졸업장 같은 건 안 바라.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하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지. 그렇지?"

    "아니, 엄마, 내 생각인데……."

    "넌 생각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한다."

    예, 어머니.

    소자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사람은 학력이 전부가 아니야. 엄마도 중졸이고 초졸이고 할 것 없이 성공한 사람 많이 봤고, 훌륭한 인격자들도 많이 봤어."

    "맞아! 엄마!"

    "그런 게… 그건 그 사람들 이야기야! 그 사람들은 학력이랑 상관없이 성공할 사람들이야. 하지만 넌 아니야! 넌 학력이 있어도 망할 타입인데, 학력마저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

    "맞…아, 엄마……."

    "그러니!"

    어머니의 눈이 불타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격한다!"

    "의욕이 굉장하시군요. 그래서 시험이 언제인가요?"

    "잘 읽어보렴."

    "…30일 완성?"

    "잘 아는구나."

    "어, 엄마! 세상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있어!"

    "지금부터 네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 준비할 시간은 있어야지."

    "남들은 한 달만 공부해도 다 간다더라."

    "그건 남들이고!"

    "아들아."

    박선덕은 이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도 네 성적표를 기억하고 있단다. 생각해 보면 네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던 것도 기적 같은 일이지. 일단 누구든 들어갈 수야 있는 게 고등학교라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일찌감치 몸 쓰는 일을 알아보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던 니 중3 담임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구나."

    "그 양반이 그렇게 말했어?"

    와, 배신자!

    나보고는 노력만 하면 공부 잘할 수 있다고 해놓고서는!

    "하지만 사람은 안 돼도 해야 할 때가 있단다.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할 수 없어도 해내야 해! 반드시!"

    창식아, 미안하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이지혁은 다음에 창식이를 보면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 근데 엄마… 사실 이건 무리수야. 나 공부 안 한 지가 5년이 넘었잖아."

    사실 천 년이 넘었지만.

    "그전에도 어차피 안 했잖니."

    "듣고 보니 그러네?"

    "걱정하지 마라. 게임을 하는 열정으로 공부를 하면 박사 학위도 딸 것 같으니까."

    미안해, 엄마.

    나… 게임에서도 장애인 소리 듣고 있어.

    이런 아들이라 미안해.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아버지 오셨나보다."

    * * *

    "어떻게 됐습니까?"

    최정훈의 물음에 서아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철벽이에요, 철벽."

    최정훈은 빙긋이 웃었다.

    "처음부터 쉽게 될 리가 없겠죠."

    "정말 단호하더라고요."

    "단호박인 줄."

    최정훈은 추임새를 넣는 도가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요즘 캐릭터가 좀 변하는 거 같은데?

    "정말 이 방법이 맞는 거예요? 일단은 신중하게 접근해서 환심부터 사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최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망하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우린 KSF 소속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환심을 사며 접근하면 누구나 의심을 품게 되겠죠. 나중에는 진심으로 다가가도 결국 마음속의 한 가닥 의혹을 떨쳐 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냥 돌직구가 최선입니다."

    "그래도 너무 돌직구 같은데. 마음을 돌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시더라고요."

    "이제부터가 중요한 거죠."

    일단은 목적을 알렸다.

    상대가 내 목적을 알고 있는가와 모르는가는 극심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어차피 그냥 설득한다고 해결되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준비한 것들은 이제부터 착착 진행될 것이다.

    결코 이지혁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그 심기의 한계치를 최대한 파악해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크게 파탄이 날 테니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최정훈은 그 어려운 일을 반드시 성공시키리라 다짐했다.

    "…내 원한은 이 정도가 아니야."

    "예?"

    "아, 아닙니다."

    KSF의 훈남.

    잘나가는 공무원이자 최고의 신랑감.

    잘생긴 외모와 능력이 잘 조화된 이 남자는…….

    사실 조금 소심했다.

    아니, 조금이 아닐지도.

    "밑밥은 깔았으니 이제 후퇴하면 되겠네요."

    "정말 그냥 가요?"

    "예. 가면 됩니다."

    최정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지혁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일단은 일차 폭탄이 투하될 겁니다. 느긋하게 관망하다가 재진입 타이밍을 잡죠."

    "흐음……."

    "그럼 퇴근하시죠."

    서아영이 활기차게 말하는 최정훈의 어깨를 잡았다.

    "……."

    "알죠?"

    "예."

    "꿈을 꾸셨군요."

    "잠시나마 즐거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저는 퇴근할게요."

    최정훈의 눈가에서 마음의 땀이 흘러내렸다.

    퇴근은 못해도 좋으니 사우나라도 가서 목욕이나 좀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게 다 저 인간 때문이야.'

    최정훈의 마음속에서 이지혁에 대한 적대감이 불타올랐다.

    이 일의 원한!

    퇴근을 못한 원한!

    그리고 무엇보다 그 더러운 게임 플레이의 원한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리매치를 향한 최정훈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 * *

    "여보?"

    어머니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이철중의 얼굴이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질려 있었다.

    "여, 여보! 무슨 일이에요!"

    "여보……."

    "왜요! 여보, 왜 그래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지혁도 긴장하여 현관으로 나왔고, 방 안에 있던 이예원도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쭈욱 둘러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보, 나……."

    "말을 해보세요."

    "나… 짤렸어."

    "예?"

    "해임당했어. 내일부터 회사 안 나가."

    우드득.

    이예원이 놀라 이지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지혁이 이를 갈아붙였다.

    '이 새끼들이…….'

    보나마나 빤했다.

    자신을 압박하겠답시고 압력을 가한 거겠지.

    하지만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다.

    '가만두지 않…….'

    "왜요! 대체 왜요! 아니, 당신 곧 임원으로 승진한다더니!"

    "그게……."

    아버지가 슬픈 눈으로 어머니와 자식들을 훑어보더니 모기처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드, 들켰어."

    "예?"

    "들켰다고."

    "뭘요?"

    이지혁이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이거… 뭐, 좀 이상한데?

    아버지가 민망한 듯 대답했다.

    "그… 그러려던 건 아닌데, 거, 뭐라고 해야 할까. 좀 부족하면 가져다 쓸 수도 있고 그렇잖아. 그… 내가 먹으려던 건 아니고, 나중에 메워 넣으려고 했는데……."

    이지혁의 턱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되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 좀 나눠 쓴 건데."

    "전문용어로 말해보시죠."

    "그게 참, 어감이 안 좋은데……."

    아버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횡령한 게 걸렸어."

    어머니가 두말없이 아버지를 걷어찼다.

    "아악!"

    "야! 이 화상아! 자식 놈들도 저 꼴인데, 너까지 사람을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아니! 내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우리 가족 잘살아보자고! 어디, 그걸 나만 썼나! 이 집은 어디서 났겠어!"

    "나가! 안 나가? 나가서 뒈져, 이 화상아!"

    "지혁아! 네 엄마 좀 말려라! 지혁아!"

    이지혁은 허허,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방문을 닫으며 눈가를 훔쳤다.

    '콩가루 집안이야.'

    엄마만 마왕인 줄 알았더니, 아빠는 사기꾼이다.

    유전자가 이러니 애가 삐뚤어지지.

    뭐?

    내 유전자는 어디서 온 거냐고?

    …그러게.

    * * *

    그렇게 집 안에는 폭풍이 몰아쳤다.

    화는 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범죄를 저지른 것은 저지른 것이고, 일단 당장 생계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냥 짤린 걸로 끝난 거예요?"

    "그, 그럼."

    뭔가 눈치를 보는 행색을 보니 상황은 빤했다.

    박선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있는 대로 털어놔요."

    슬쩍 박선덕의 눈치를 살핀 이철중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화 안 낼 거지?"

    "나중에 들키면 화가 문제가 아닐 텐데?"

    "그렇긴 하지."

    심호흡을 한 이철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횡령으로 고소는 안 하는 대신에 그동안 해먹은 것 다 뱉어내래."

    "…얼만데요?"

    "조금 많은데……."

    "그러니까 얼마!"

    이철중이 겸연쩍게 대답했다.

    "사억 정도."

    박선덕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한 박선덕이 화를 내지 않자 되레 불안해지는 이철중이었다.

    "여보?"

    박선덕은 말없이 이지혁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불안함을 느낀 이철중이 은근슬쩍 그녀를 따라나섰다.

    박선덕이 방문을 쾅! 열었다.

    "깜짝이야! 엄마, 노크 좀!"

    "지혁아, 인터넷 켜봐라."

    "응? 엄마, 왜?"

    "옥바라지 물품이 뭐뭐 있는지 검색 좀 해봐라!"

    이철중이 기겁하여 박선덕을 안고 늘어졌다.

    "여보오!"

    "사억? 사아아아어어억? 그게 땅 파면 나와? 사억 갚아주고 고소 안 당하느니, 당신이 한 십 년 살고 나오는 게 싸게 쳐. 경찰서에 전화해서 출두한다고 해!"

    "여보! 돈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남편을 옥에 넣을 생각을 다해!"

    "그러니까 내가 지금 옥바라지는 해주겠다고 하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돼!"

    "긴말할 것 없어요. 기러기 아빠라고 생각하고 몇 년 푹 지나다 나오면 되요. 얘들은 걱정 말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얘들이 아니라 나를 걱정해 달라고! 나를!"

    "이 양반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잘했다는 건 아니고……."

    "내가 당신이 회사 잘 나간다고 돈을 바리바리 들고 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리 능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결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리 빌빌대며 살지도 않았을 텐데! 아이고, 나는 그거도 모르고 남편 돈 잘 번다고 여기저기 자랑했네!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사나."

    "여, 여보……."

    이지혁은 눈치도 없었다.

    "엄마, 검색했어."

    "야, 인마! 너까지 이러기냐!"

    "아버지."

    이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희생은 적을수록 좋은 겁니다."

    유전자는 어디 가지 않았다.

    * * *

    결국 아버지를 감방에 넣는다고 해도 돈은 갚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어머니가 절망에 빠졌다.

    "사억이라니……."

    집에 돈을 쌓아놓고 사는 것도 아니고, 사억이라는 돈을 대체 어디서 구해야한다는 말인가.

    요즘 같은 세태에 선뜻 돈을 빌려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몬스터에 의한 사고사가 워낙에 늘어나다 보니 대출은 기준이 엄청나게 강화되었고, 담보 없이 신용으로만 대출을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최근에 와서야 대게이트 대처법이 확립되면서 희생자들이 줄어들었기에 조금 완화되는 추세지만, 회사에서 짤린 사람에게 대출을 해주겠다는 업체가 있을 리 없고, 막상 대출을 한다고 해도 그 돈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결국 있는 재산에서 해결해야 했다.

    "집을 팔아도 사억이 안 되는데."

    집이고 차고 다 팔아야 할 일 아닌가.

    잘못하다가는 박선덕의 가게까지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뭘 먹고 살라고.

    그때, 박선덕의 눈에 서아영이 놓고 간 종이 가방이 들어왔다.

    저 메이커가 나름 비싼 건데, 써보지도 못하고 팔아서 쌈짓돈이라도 보태야 할 실정이었다.

    "에구."

    박선덕이 힘없이 종이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도 어떤 물건인지 확인을 해야 팔아도 팔 수 있을 테니까.

    툭.

    힘없이 종이 가방 한쪽을 잡아드는데, 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명함?'

    서아영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든 명함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최상의 대우.

    이지혁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베풀어지는 지원과 복지.

    서류에 내용이 있다고 했었나?

    하지만 그 서류는 서아영이 회수해 간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지혁이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대체 평안한 날이 없네. 이 일을 어떻……."

    이지혁과 박선덕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선덕의 오른손에는 서아영의 명함이 들려 있고, 왼손에 들린 휴대폰은 귀에 닿아 있었다.

    "엄마?"

    이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왜…… 왜!"

    "지금 어디다 전화하는 것이여?"

    "아니, 나는 그냥……."

    "엄마! 지금 나 팔아먹는 거야?"

    도축 운반용 트럭에 실리는 소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이지혁이 절망하자 박선덕은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냥 잠깐 물어볼 일이 있어서… 내가 너를 팔아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어만 보려고 했지! 물어만!"

    "아니, 팔 것도 아닌 물건 가격 물어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엄마! 왜 그래! 나 지혁이야! 엄마 아들 지혁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식 놈 보고 몬스터랑 싸우라고 하는 엄마가 어딨냐고 그랬잖아! 엄마, 잊었어?"

    "잊기는.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엄마!"

    하지만 어머니는 당당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응?"

    "거, 그 KSF인가 뭐시긴가에도 사람들이 많잖아."

    "그……렇지?"

    "그럼 따지고 보면 그 사람들도 다 부모가 있고 그 사람들은 지 자식이 몬스터랑 싸워도 그러려니 하는데, 나만 좀 유별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머니이이이이이!"

    이지혁은 절망하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엄마가 나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이게 그 보릿고개에 팔려가는 자식의 심정이던가!

    "누, 누가 한데? 아니, 그냥 알아보려고만 했다니까!"

    괜히 화를 내는 어머니를 보자니 심증이 확신으로 변하는 이지혁이었다.

    조금만 늦게 나왔다면 그가 모르는 곳에서 그를 팔아먹는 밀거래가 이루어졌을지도 몰랐다.

    이지혁은 어머니의 손에 들린 명함을 잡아서 갈기갈기 찢고는 어머니의 휴대폰에 입력된 서아영의 번호까지 지워 버렸다.

    "내가 두 눈 뜨고 팔려 갈 것 같아! 죽어도 안 갈 거니까 꿈도 꾸지 마."

    "내가 뭐랬니."

    어머니는 꿍얼꿍얼거리며 안방으로 향했다.

    "……바꿔 달라고 하면 그만인걸."

    "응?"

    "아니야, 아니야. 늦었다. 너 얼른 자! 일은 일이고, 잠은 자야지."

    "나 자는 동안 팔아먹는 거 아니지?"

    "누가 널 팔아먹었다고 그래! 그냥 전화만 해본 거라니까!"

    이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믿을 수가. 하, 세상에."

    그래도 믿어야지.

    엄만데…….

    설마 엄마가?

    이지혁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어."

    * * *

    결과적으로 어머니가 이지혁을 팔아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뭔가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싸움터로 밀어 넣어서 풍족함을 유지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 덕분에 이지혁은 KSF의 마수에서 일단은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집 판다."

    "헐."

    "차도 판다! 가게도 내놓고 작은 데로 옮길 거야!"

    아버지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기야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지혁이 혀를 찼다.

    "그러게 적당히 해드셨어야죠."

    "그러려던 게 아닌데."

    이지혁은 아버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지만, 딱히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덕?

    그런 거야 시대에 따라 다른 거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역사를 천 년 넘게 지켜보다 보니 한 시대에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도덕이 다른 시대에는 길가에 널브러진 개똥만도 못하게 취급 받는 것을 여러 번 본 터라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아니라 지금 그의 집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뿐.

    "그럼 집은 어떻게 해?"

    "이사 가야지."

    "어디로 가?"

    "일단 집값 싼 데로라도 가야지. 안 되면 월세로라도."

    이예원이 깜짝 놀라 말했다.

    "그럼 이 동네 뜨는 거야?"

    "그러지 않을까 싶다."

    "전학 가야 돼?"

    "아마도?"

    "싫어!"

    이예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 전학 가기 싫다고, 이 나이에 전학 가고 그러면 왕따당한단 말이야!"

    '그게 겁나는 애가 왕따를 주도하고 있냐?'

    맞아야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전학이야 다들 가고 하는 거고, 지금 집이 이 상황인데 너는 그러고 싶니?"

    "몰라. 난 안 가. 절대로 안 갈 거야. 아빠가 저질렀으니까 아빠가 해결해!"

    이예원은 소리를 빽! 지르고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쟤는 언제 철이 들려고……."

    엄마가 혀를 찼다.

    "어쨌든 당신도 그리 알고 빨리 일자리 구해요."

    "으응."

    외부로 공표야 안 했다지만, 횡령으로 짤린 사람을 써주겠다는 회사가 얼마나 있겠는가.

    업계에서는 암암리에 말이 돌 것이고, 모른다 하더라도 임원 승급을 앞두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짤렸다면 뭔가 일이 있었다는 것쯤은 다들 짐작을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취업을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건 빤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철중은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집이고 뭐고 다 날아가게 된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의 눈이 이지혁에게로 향했다.

    이지혁이 움찔한다.

    "응?"

    "너도! 놀지 말고 일할 때가 됐어!"

    "뭐?"

    이지혁이 격하게 반발했다.

    일이라니!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요! 일이라니!

    내가 일이나 하자고 이 세계로 돌아온 게 아닌데!

    "집이 망하게 생겼는데 언제까지 컴퓨터만 들여다보며 놀 건 아니겠지? 너도 장남인데 책임감이 있어야지."

    "엄마, 나 중졸인데. 취직도 못해."

    "편의점 알바라도 해!"

    어머니, 제가 베라프에선 황제처럼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편의점이라니요?

    "이렇게 망할 수는 없지.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정상화할 거야. 그러려면 너도 최선을 다해서 엄마를 도와줘야 해."

    그야 그렇지. 그렇긴 하지만…….

    이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엄마, 그런데 사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신경 쓸 것도 없고."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경험에서.

    대한민국에서 최극빈층으로 살아본 사람도 이지혁보다 극빈층으로 살아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밥 한 끼 먹기 힘든 극빈층으로 살아본 경험도 다 합치면 백 년은 넘는다.

    그러니까 경험에서 나온 말인데…….

    엄마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 가난하다고 해서 굶어 죽지야 않겠지, 대한민국에서. 그렇지?"

    "그럼, 엄마."

    "하지만 가난하면 포기해야 할 게 많단다. 예를 들어 니가 먹는 밥에서는 고기가 사라질 것이고, 컴퓨터 하면서 먹는 과자와 음료수가 줄어들 것이고, 무엇보다……."

    어머니가 선고를 내렸다.

    "그놈의 컴퓨터 인터넷부터 끊어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그런!

    사형선고보다 더 무서운 말이었다.

    컴퓨터와 먹을 것이 사라진다면 대체 이 세계로 돌아온 의미가 뭐란 말인가!

    아니, 잠깐만. 꼭 그것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여하튼!

    "음, 그건 매우 심각한 문제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한 이지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돈이 없어서 문제라 이거지?"

    "아는구나."

    "그럼 돈만 벌어 오면 되는 거지?"

    "으응?"

    이지혁이 어깨를 폈다.

    베라프를 지배한 그의 위엄이 절로 뿜어져 나오자 어머니마저 움찔했다.

    "그럼 돈을 벌면 되겠네?"

    무슨 수로?

    그야 무궁무진하지!

    * * *

    방으로 들어온 이지혁은 인터넷을 켰다.

    "어디 보자……."

    돈이야 벌려고 마음먹으면 방법이 수도 없다.

    뭐? 열심히 살아도 돈 못 벌고 끙끙대는 사람들 다 무시하는 거냐고?

    나야 그 사람들 끙끙대는 거 이상으로 500년은 넘게 끙끙댔거든?

    그래도 여기는 노동법이라도 있지!

    이지혁은 검색창에 '가장 비싼'을 써 넣었다.

    * * *

    가장 비싼 애완동물?

    이건 제외.

    가장 비싼 광물?

    이것도 제외.

    가장 비싼 음식?

    이건 볼 것도 없고.

    일단 만들어진 건 다 제외하고, 그러면 남는 게…… 어디 보자…….

    "생선?"

    이지혁의 귀가 펄럭였다.

    정보를 대충 살펴보니 중국에서 잡힌 황순어라는 물고기가 2억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거, 잡을 수 있을까?"

    개체수가 너무 적어서 로또라도 잡는 심정으로 잡아야 할 것 같았다.

    가능성이 너무 적…….

    순간, 이지혁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참치 한 마리에 18억?"

    이 정도면 참치가 아니라 크라켄이라도 잡는 수준 아닌가.

    어떻게 생선이 한 마리에 18억이나 할 수 있지?

    18억이나 하는 최고급의 참치가 아니더라도 손낚시로 낚아낸 질 좋은 참치면 마리당 가격이 4~5천은 쉽게 오가는 것 같다.

    그럼 대충 열 마리만 잡아서 넘기면 4~5억은 쉽게 번다는 이야기 아닌가.

    물론 세금과 법적인 문제가 좀 있긴 하겠지만, 그런 거야 어떻게든 해결하면 그만이고.

    세상에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없는 법이니까.

    그 외에도 방법이야 차고 넘쳤다.

    일반인들은 상상도 하기 힘들고 구하기 힘든 것들도 마음만 먹으면 대충은 다 구해낼 수 있다.

    그리고 법이라는 제약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으면 할 일은 더욱 무궁무진해진다.

    당장 지금 여기서 마스크와 장갑이나 대충 하나 사서 끼고 미국으로 텔레포트한 다음에 은행이나 하나 털고 돌아온다면 자신을 잡을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은데?

    돈을 못 벌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좀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있는 대로 살자고 했을 뿐이지.

    그런데 이렇게 태클이 들어온다면 방법을 마련해야겠지.

    이지혁은 낄낄대며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문제는 딱 하난데…….

    "마나가 없다."

    이지혁은 통렬하게 몸을 떨었다.

    마나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비록 그 못할 것이라는 게 능력을 통하여 크게 주목을 끌지 않으며, 동시에 그의 능력을 이해한 이들에게 귀찮음을 유발하지 않을 정도의 일에 한정되기야 하겠지만, 그것만 해도 어딘가.

    대충 태평양 위를 날아다니다가 적당히 크고 살이 가득 찬 참치 한 마리 끌어 올려 바로 일본 쪽으로 공간 이동만 해도 10억은 우습게 벌 것이다.

    그런데 마나가 없다.

    "끄응……."

    미묘하게 남아 있기는 한데, 이걸로 크게 일을 벌이기는 부족했다.

    지금의 이지혁은 충전지 같은 존재.

    마나를 쓴 만큼 다시 채워 넣지 못하면 딴딴한 몸뚱아리 하나로 버텨야 하는 반쪽짜리였다.

    그럼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마나를 채워야겠어."

    제일 쉬운 방법은 역시나 게이트다.

    전국 어디든 게이트가 열리는 곳에서 알짱대다가 KSF가 정리하고 나면 슬그머니 다가가 잔존 마나를 모조리 드레인해 충전하고 한탕하면 끝!

    완벽한 계획이다.

    이지혁은 휘파람을 불며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니?"

    "바람 좀 쐬고 올게."

    "일찍 들어와."

    어머니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지혁은 씨익 웃었다.

    "엄마."

    "응?"

    "걱정하지 마. 금방 돈 벌어다 줄게."

    "……그래그래."

    "아니, 진짜야!"

    "……퍽이나."

    이지혁은 습기가 차오르는 안구를 훔쳤다.

    이리도 신뢰가 없나.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구로 돌아온 뒤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게임에 빠져 살거나 배나 벅벅 긁으며 소설을 읽는 게 전부였으니까.

    냉정한 눈으로 보면 벼멸구라 불린다 해도 항변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었다.

    비록 학력이야 딸리지만, 사지육신 멀쩡한 놈이 집에서 놀고먹는데 누가 좋은 눈으로 보겠는가.

    그나마 자식이니 이 정도에서 그치는 거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다들 군대에 가거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이 정도 대접도 과분할 지경이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것참,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인생 한 방이다.'

    하지만 돈만 벌어오면 지금의 대접이 바뀔 것이다.

    딱히 돈이 더 벌린다고 그의 일상에서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컴퓨터가 좀 더 최신형으로 바뀔지도 모르고, 의자도 조금 쿠션이 빵빵한 의자로 교체가 가능…….

    그게 단가?

    따져 보니 나 진짜 바라는 게 없구나.

    이지혁은 허탈하게 웃으며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오자 쌀쌀한 바람이 느껴졌다.

    "일단은……."

    "저……."

    "히익?"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이지혁은 덜컥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놀래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안면이 있는 금발 머리가 서 있었다.

    뭐냐, 이 여자?

    자객? 닌자?

    평범해 보이는 일반인인데, 얘가 어떻게 이지혁의 지각을 벗어날 수가 있지?

    '일반인이라 그런 건가?'

    그런 건가가 아니라 그렇다가 맞다.

    조금이라도 마나를 품은 생명체라면 이지혁의 지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곳의 에테르를 잔뜩 품은 이들도 이지혁의 지각을 벗어나긴 힘들다. 파동이 다르다고 해도 일정 이상의 양이 모이면 왜곡을 유발하니까.

    하지만 에테르 양이 적은 일반인들은 이지혁이라도 감지해 내기 어려웠다.

    다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다가오는 걸 보통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뭐야? 너 언제부터 있었어?"

    이지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름이 뭐랬더라? 김다솜이었나?

    그녀는 찬바람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지혁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지혁은 멍하게 그녀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뭐야?"

    "그, 그냥 쿠키 같은 것 좀 구워봤어요."

    "응?"

    "걸치는 건 싫어하시는 것 같고, 과자 같은 건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한테 이걸 왜 주는데?"

    "저번에 그 답례로……."

    "그러니까……."

    저번에 예원이가 괴롭히고 있던 것에서 구해준 답례로 쿠키를 구워서 가져왔다, 이거지?

    그래, 좋다. 좋은 일이지.

    그것까지는 매우 훈훈한 일이다.

    매우, 아주 매우!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너 언제부터 있던 거니?"

    이지혁은 필드에 가끔 출현하는 레어 몹 같은 존재.

    등장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 출현할지는 알 수 없는, 그런 인간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 찾아와서, 오늘 마주치고, 오늘 저걸 건넨다?

    그것도 이 다 늦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럼 이지혁이 나올 때까지 여기서 계속 잠복을 타고 있었다는 건데, 그건 뭐랄까…….

    '무서운데?'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그게 언젠데?"

    "학교 마치고?"

    "……."

    적어도 다섯 시간.

    그 다섯 시간을 나올지도 안 나올지도 모를 이지혁을 기다리며 이 현관에서 죽쳤다는 건데…….

    이거 뭐지? 이걸 뭐라고 하더라?

    사생팬?

    아니, 아니지.

    이지혁은 스타가 아니니까 사생팬이라기보다는…….

    이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괜히 착한 애를 그런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가지는 말자.

    어떻게든 보답은 하고 싶은데 방법이 애매해서 지금까지 꾹 참고 기다린, 저어어어엉마아아알~ 착해 빠진 아이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지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 잘 먹을게. 진짜 잘 먹을게. 뭐 이런 걸 다. 하하하하……."

    그런데 이거 먹어도 될까?

    이상한 게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보통 사람은 순간적인 호의보다는 적의에 의해서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예원이가 내 동생이라는 걸 알았으니 설사약 같은 것을 타서 엿 먹이려는 걸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둘이 나눠 먹고 나란히 한 화장실을 미친 듯이 들락거리면 더 좋은 거고.

    "정말 별것 아니에요."

    김다솜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리 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가려고?"

    "예. 드릴 건 드렸으니까요."

    "그래, 그럼 조심히 가봐."

    "예."

    이지혁이 웃으며 말하자 김다솜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대답과는 다르게 그녀의 발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간다며?"

    "예."

    "음……."

    이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딱히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너무 강렬하다.

    이럴 때 해야 할 말이 뭐가 있지?

    고마워는 이미 했고, 또 할게 뭐가 있지?

    "…바래다 줄까?"

    "아뇨. 수고스러우실 텐데요……."

    묘하게 말끝을 흐리지 마라!

    말은 반듯하게 하는 거야, 반듯하게!

    누구라도 그 말뜻을 알아먹을 수 있게 확실하고 조리 있게 말하란 말이다!

    "그래? 그럼 혼자 갈래?"

    "…에."

    미묘하게 '예'가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나도 나가던 길이니까… 가자, 어디야?"

    그녀의 눈빛에 져버린 이지혁이 힘없이 말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다솜은 슬그머니 한쪽으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이지혁이 따라오지 않는 건 아닐까 느릿하게 옆으로 걷는 게걸음이었다.

    '알기 쉽네.'

    진짜 알기 쉽다.

    그래서 더 무섭다.

    생각해 보면 머리 때문에 트러블이 생기면 보통 사람이라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염색을 해버릴 텐데, 그걸 꿋꿋이 고수하다가 결국 끌려가기까지 했다면… 얘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이미 이 시점에 보통 사람은 넘었어.

    대체 어느 보통 사람이 쿠키 하나 주겠다고 이 시간까지 남의 집 앞에서 나올지도 모를 사람을 기다린다는…….

    순간, 이지혁이 뭔가 떠올린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말이다……."

    "예?"

    "너 어제도 여기 있었니?"

    "……."

    대답은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침묵이 대답이요, 무언이 긍정이다.

    이지혁은 당장에라도 뒤로 돌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영 모르겠다는 듯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자니 찝찝하기가 그지없다.

    '집 밖에 나오지 말아야겠어.'

    아니면 창문으로 날아가든가.

    그렇게 어색하게 김다솜을 집까지 데려다 준 이지혁이 주위를 살피고는 입을 열었다.

    "야, 나와봐."

    스스슷.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가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걸 감안하고 은신한 채 감시하는 사람이나 감시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나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

    "지금 게이트 열린 데가 몇 군데냐?"

    도가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충 대피령이 내려진 곳만 검색해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사실인데, 하루 종일 컴퓨터만 하고 사는 인간이 그런 것도 몰라서 이걸 자신에게 물어본다는 말인가?

    '머리가 나쁨.'

    일단 한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출현해 있는 게이트는 모두 세 곳."

    "어디야?

    "부산, 경주, 나주."

    이지혁이 한숨을 쉬었다.

    "머네."

    그렇게 멀면 가서 대기 타겠다는 그의 계획이 조금 어긋난다.

    살짝 고민하던 이지혁이 뭔가 떠올랐는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가까운 곳에 최근에 처리한 게이트가 있나? 저번에 내가 갔던 곳 말고."

    "최근?"

    도가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왕이면 좀 센 애들이 나타났던 곳으로 말이야."

    이지혁이 음침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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