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두 달 뒤
- 마법적 의식이라……. 찾아볼 필요는 있겠군요. 오르투스의 서쪽 섬들을 쭉 훑어보겠습니다.
- 다만 왕실에 사람을 심어 왕자를 감시하기까진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습니다. 당분간은 타이니 님이 애써 주십시오.
제이의 대답은 만족스러웠고, 그때까지만 해도 타이니는 일이 쉽게 풀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왕도(王都) 오르투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악마추종자와 결탁했다는 왕국의 배신자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반드시 찾아내라!”
“왕국의 반역자다!”
의욕적으로 리트만을 찾고자 했던 왕실 기사단과 예하 병사들도 그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이내 의지가 시들해지고 말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미 대륙이나 동대륙으로 넘어간 거 아냐?
“그렇겠지, 설마 왕국에 남아 있겠어?”
무엇보다 리트만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조명되는 것은 왕국의 유일한 초인이었던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의 실종이었다.
- ……나는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을 믿는다.
국왕은 그의 실종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귀환이 늦어지는 것일 뿐이라 주장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이미 그의 실종, 아니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초인의 사망으로 인한 국력의 저하.
모든 이의 관심이 그곳으로 옮겨 가며, 리트만의 사건은 자연스레 흐지부지되는 듯했다.
더하여, 여러모로 암울한 왕국의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함인지 왕실은 좀 더 긍정적인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문제의 배신자를 밝혀내고 쫓아내기까지 한 어린 기사를 더욱 조명하고 칭송하는 일에.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 차기 초인이 무사히 성장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기사단과 병사들 사이에선 그러한 얘기가 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두 달 사이에 왕실 기사단장, 암벽(巖壁)의 기사 리암 폰 피터슨과 몇 번이고 대련하며 상당한 선전을 보여 주었기에 아무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서, 눈에 띄는 특이한 점도 있었다.
“후우, 정말 눈에 띄게 성장하는군. 실력도 키도 말일세. 그거,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는 것과 상관있는 건가?”
대련을 마친 리암의 질문에 타이니는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실력은 그렇다 쳐도, 두 달 사이 한 뼘 넘게 자란 키는 뭐라 설명하기가 곤란했으니까.
실제로는 이제야 또래보다 좀 커진 것뿐이지만, 신분패에는 이미 스무 살이라고 새겨 놓은 상황이 아닌가.
다행히.
“타 종족 혼혈은 계기가 있으면 일순간에 확 성장하기도 한다더니, 자네가 딱 그 경우 같네그려.”
리암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오해해 주는 덕에, 캐묻는 이들은 얼마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왕실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가 또 있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그럼…….”
“아 잠깐만, 설마 오늘도 1왕자님께 가는 건가?”
“예, 저를 계속 찾으시니까요.”
그 대답에 리암은 안색을 굳혔다.
뭐라 말을 보태려다 마는 모습. 그 내심을 알 것 같아 타이니는 그저 싱긋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하나 왕자님과 가까워진다고, 뭐가 바뀌기야 하겠습니까?”
그 말에 리암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지금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야! 불과 스무 살에 익스퍼트에 오른 그 경지. 그러면서도 슈페리어급 기사를 제압할 만한 전투적 기량. 게다가 장생족인 엘프의 피까지 섞여 있으니…….”
……엘프 혼혈은 아닙니다만.
제게 한없이 호의를 보이는 리암에게 당장은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데, 리암은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포함해, 자네가 말년에 어떤 경지에 오를지 벌써부터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단 말일세. 혹시 아나? 자네가 오러유저마저 넘어서서 오러익시더…… 아니, 아예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게 될지? 그런 자네가 1왕자님을 가까이하고 있다고!”
그 말에 타이니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실,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었으니까.
‘왜 아직도 반응이 없는 거지? 그때 내가 벌인 일로 인해 무언가 바뀐 걸까?’
전생에 있었던 카룬의 재앙이 벌어질 때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하지만 일부러 가까이서 살펴봐도, 1왕자나 트루먼은 어떤 불온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자, 왕국의 신성이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좋아하기만 했으니.
- 리트만? 배신자는 당연히 죽여야 한다고 말한 것뿐이네. 뭐, 아바마마의 뜻이야 다르겠지만.
리트만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도 별 의미 없는, 판에 박힌 대답만 일삼으며 파티나 벌이고 다닐 뿐이었다.
‘……썩을 놈.’
타이니로선 한참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국왕이 마음에 두고 있는 왕손은 이제 막 스물다섯 살이 된 막내, 헨리 폰 카룬이라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불과 스무 살에 2서클의 경지를 달성한 데다가 이제 곧 3서클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 기대되는 ‘천재’였다.
고대 대마법사의 후손이라 알려진 카룬 왕실이 마법적 성취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는지도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정보였다.
“전하의 뜻은 삼…… 크흠, 다른 분에게 있을지도 모르네. 한데 지금 자네의 행동 때문에 왕실의 분위기가 묘해지고 있단 말일세.”
“……그 정도입니까?”
“전하의 뜻과 상관없이 1왕자 저하가 왕위를 잇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단 말이야.”
그 말이 타이니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거 혹시……?’
본래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 막내 왕자에게 왕위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1왕자가 악마추종자에게 손을 뻗은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제이의, 블랙윙의 보고 역시 그 추론으로 마음이 쏠리는 데에 일조했다.
- 조직의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카룬에서는 대륙 정보 길드에도 의뢰한 모양인데, 역시 성과가 없습니다.
- 이건 카룬이나 도시 국가 연합의 유력 인사가 대놓고 놈을 숨겨 주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놈의 뒤를 봐주는 거물이 있을 겁니다.
그 거물이 1왕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자신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면?
‘……찔러 볼 필요는 있겠어.’
다행히 이제 막 1왕자와 트루먼에 대한 감시 체계도 구축했다는 연락을 받은 터였다.
그러니.
“충고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1왕자님은 좀 멀리해야겠군요.”
“……뭐?”
타이니가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자, 오히려 말을 꺼낸 리암이 당황했다.
그런데 타이니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혹시, 제가 그 소문의 헨리 왕자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허…… 뭐, 그래. 좋지! 그렇다면 내가 자리를 마련해 봄세. 안 그래도 왕자님께서 오랜 폐관 수련을 마치시고 곧 나오실 예정이니까.”
음? 폐관 수련(閉關修練)이라니?
아무리 동대륙이 카룬의 주 교역 대상이라지만, 서대륙의 왕실에서까지 대놓고 동대륙의 문자를 쓰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하지만 당장 신경 쓰이는 것은 그런 사소한 게 아니라 리암의 표정.
‘이렇게 속이 다 보이다니.’
이 양반도 확실히 정치할 스타일은 아니군.
타이니는 그리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리암의 행동력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그로부터 불과 3일 뒤.
“……그러니까, 여기 이 소년…… 아니, 이 기사가 그 유명한 타이니 경이라는 말이지?”
막 폐관 수련을 마치고 나온,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의 청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장장 3개월에 걸친 폐관 수련 끝에 가장 먼저 보게 된 것이 리암, 그리고 그가 소개한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초면의 기사는 수련장에서 내성까지 오는 동안 들은 소문만으로도 호기심이 동할 만한 사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하. 타이니 모르스입니다.”
“호오? 소개한 이름에 ‘폰’이 빠진 것은 아닌가?”
“홀로 남은 몸, 영지조차 없는 제가 어찌 감히 전통을 주장하겠습니까. 아직은 미력한 몸일 뿐입니다.”
그 말에 헨리 왕자는 미소를 지었다.
“핏줄에 집착하는 것이 귀족이거늘. 듣던 대로 그대는 특별하구나.”
핏줄 따위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문에서 전해지는 비전이나 교육이 더 중요한 거지.’
그런 사상이 반영되다 보니 가명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나온 실수였지만, 임기응변이 오히려 좋게 먹힌 것 같았다.
“아직은 한참 모자란 몸일 뿐입니다.”
“그 나이에 슈페리어급 배신자를 쫓아냈다 들었다. 그대가 모자라다면 나는 천치겠지.”
“저, 저하! 어찌 그런 말씀을……!”
리암이 놀라 소리를 지르는데, 헨리 왕자는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백작. 타이니 경 같은 천재는 겸손이 오히려 나쁘게 보입니다. 차라리 적당히 오만해야 그러려니 하겠지요.”
그가 다시 타이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스무 살이라 들었네. 핏줄 때문에 어려 보인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몇 살 위니, 충고를 좀 해 줄까 하네.”
“하명하십시오, 저하.”
“하하, 하명까지는 아니고. 그저 귀족들 앞에서는 적당히 오만하게 굴어 달라 제안하는 것일세.”
“예?”
“스스로 푸른 피가 흐른다고 헛소리하는 잡것들에게 약점을 보이면 물어뜯기기 십상이지. 힘과 재능이 있다면, 그저 짓눌러 닥치게 만드는 것이 답이라는 말일세.”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왕자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사람을 소름 끼치게 만드는 기백이 느껴졌다.
얼마나 대단한 놈인가 보자는 생각으로 만남을 자처한 타이니 역시 조금은 감탄했을 정도로.
‘살아 있었다면, 패왕이 되었을 만한 그릇이구나.’
왕재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지금 이 모습만으로도 사방의 눈치를 보는 그 1왕자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심장에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3개의 서클 또한 놈과 비교할 바가 못 될 정도였고 말이다.
“특히, 자네 같은 천재라면 더욱 그렇지. 내 말 알아듣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저하.”
“그건 그렇고,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해 보게.”
“예?”
“그저 출관했다는 내가 궁금해서 만나 보고자 한 것은 아닐 텐데? 왕궁에 온 이후의 행적만 봐도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아무래도 점수를 조금 더 줘야겠다.
왕자의 날카로운 눈빛에 타이니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국왕 전하께서 후계로 생각하신다는 분답군요. 확실히 루에리 왕자님보다야 훨씬 뛰어나신 듯합니다.”
그러고는 대뜸 왕궁에서 쉬쉬하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곁에 있던 리암이 경악해 소리를 지르는데, 왕자는 오히려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던 대로 담대하기도 하고 말이야. 아주 마음에 드는군. 날 만난 목적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할 말이 뭔가?”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만족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표정.
그 표정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바뀔까.
“그런데, 왕위를 이어받으시기 전에 이 나라가 망한다면 어찌하시렵니까?”
타이니는 장난꾸러기가 된 기분으로 담담하게 폭탄을 던졌다.
“무슨 그런 참람한 말을 하는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리암이 실망감으로 가득한 눈으로 고함을 지를 때.
“……자세히 말해 주겠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왕자는 이내 놀란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반문했다.
‘합격.’
그 표정을 본 타이니는 담담한 어조로 진실의 일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타이니는 공공연하게 헨리 왕자를 찾아가 시간을 보냈고, 1왕자와 트루먼은 노골적으로 멀리했다.
그 결과.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니까?”
“그럼 역시 다음 왕위는…….”
“그분……이 잇겠지.”
몇 주 되지 않아 왕실의 소문은 외부에까지 노골적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 다가오는 신년을 맞이하여 왕세자를 책봉하겠다.
국왕의 선포로 인해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갔다.
자연히 그 대척점에 선 누군가는 심각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만이십니다, 저하? 약속보다 너무 늦으신 것 같은데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연락하지 말아야 했을 이와 통신을 해야 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