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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61화 (61/500)

61화. 1왕자?

‘내가 놈이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나를 죽이려 했을 텐데……. 그냥 도망쳤단 말이지? 왜? 안 될 것 같아서? 그리 쉽게 포기할 놈 같지는 않았는데.’

대전을 나오면서도 타이니의 의식은 온통 후셀에게 꽂혀 있었다.

긴 시간의 가식적인 대화보다야, 진심을 담은 한 번의 칼부림이 성격 파악에 더 용이하다.

끈질기게 빈틈을 노리고, 부하를 갈아 넣어서라도 한 번의 허점을 만들려 했던 놈이 갑자기 등을 돌려 버린 게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나 다른 곳에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걸까? 화물의 정체는 마법 의식에 쓰이는 물품들…… 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봤지만, 그럴듯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하, 씨…….”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그런다고 무언가 떠오를 리는 없었다.

이럴 때면, 남들이 머리가 나쁘다고 놀리는 게 마냥 근거 없는 비난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안 되겠다. 제이한테 상황을 말하고 물어봐야지.’

머리를 굴려도 답이 없을 땐 답을 알 만한 사람한테 맡기면 된다.

스스로의 현명한 판단에 고개를 끄덕인 타이니는 이내 외성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타이니 경, 나와 얘기 좀 하지.”

귀에 익은 음성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리암 경.”

얼마 전에 대련으로 우의를 다졌다고 생각했던 노기사, 리암 폰 피터슨이었다.

그의 표정은 꽤 당혹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후셀에 대한 얘기겠지.’

그 마음도 이해가 가는 터라 타이니는 얌전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리암 백작, 잠시만 자리를 양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마흔쯤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루에리 왕자님.”

그를 본 리암의 인상이 일그러질 때.

그 중년인의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자네를 뵙기 위해 직접 오셨네. 잠시 시간 좀 내주겠나, 타이니 경?”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 기사는 성물 수호대장, 트루먼 폰 에니스.

명목상 자신의 상관인 그의 말에, 타이니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차가운 음성이 불쑥 치고 나왔다.

“루에리 왕자님은 아직 왕세자가 아니시네, 트루먼. 말을 조심하게.”

먼저 타이니를 불러 세웠던 이, 리암이었다.

그러자 트루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이내 그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각하, 저는 그저 융통성 있게 말한 것뿐입니다. 어차피 항렬상 루에리 왕자님이 왕세자가 되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전하께서 택하실 문제일세.”

그 말에 듣고 있던 중년인이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왕국의 신성을 앞에 두고 웬 쓸데없는 얘깁니까.”

타이니를 핑계로 삼았지만, 중년인의 차가운 시선은 리암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꼴을 보고 있던 타이니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늙은 왕에 나이 먹은 왕자라.’

마나의 힘으로 인간이 초인이 될 수 있는 이 대륙에서는 비교적 흔한 일이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던가.

진정한 의미의 초인은 아니더라도, 평범한 인간보다는 수명이 길기 마련인 마나유저들.

그런 왕이나 황제가 죽기 직전까지 집권하는 바람에, 그 자식들은 먼저 죽고 증손자가 태자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회자가 되지.’

하니 마흔쯤으로 보이는 왕세자는 그리 희한한 경우도 아닌 것이다.

다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었다.

국왕이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게 너무나 뚜렷이 보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1왕자인데 저 나이가 되도록 왕세자로 확정되지 않은 건가.’

아마도 꽤 무능하거나, 혹은 더 유능한 동생이 있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타이니는 왕의 자식이 몇이나 되는지, 손자는 또 몇이나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또 카룬 왕국이 왕자에게만 왕위를 계승하는지, 아니면 공주나 부마에게도 계승권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마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자 저하?”

“아……. 하하, 이거 첫 만남부터 못난 꼴을 보였네그려. 만나서 반갑네, 타이니 경. 루에리 폰 카룬일세.”

근엄하게 웃는 중년인, 루에리 왕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나라의 왕세…… 흠, 흠. 왕위 계승 1순위의 왕자님이시네.”

그 옆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는 트루먼의 모습에 타이니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여태 심장에 서클이 하나뿐인 왕자도, 좋았던 첫인상이 망가질 정도로 과하게 비위를 맞추는 트루먼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음…… 예. 그래서 어쩐 일이신지요, 저하?”

그 짧은 반문에 굳은 얼굴로 옆에 서 있던 리암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에 1왕자 루에리의 표정 역시 슬쩍 굳어졌다.

“……허허. 어린…… 흠, 젊은 친구답게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나 보군. 뭐, 나 역시 바라던 바일세.”

대체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던 왕자는 이내 멀뚱히 서 있는 리암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 잠시 나와 같이 가 주겠나, 타이니 경?”

말을 마친 왕자는 이미 반쯤 돌아서고 있었다.

마치 타이니가 당연히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면 후일을 약속해도 되겠습니까, 저하?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타이니는 정중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그와 동시에 왕자의 얼굴이 티가 나게 굳어졌다.

“지금 내 명…… 큼, 제안을 거부하는 건가?”

“국왕 전하의 명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저하. 혹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까?”

한마디로 ‘네가 국왕보다 높냐?’라는 뜻.

그 말에 왕자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내 다시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히 전하의 명을 따라야지. 이거 내가 연달아 실례했군그래.”

“아닙니다. 말씀을 따르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임무를 마치고 여유가 생긴다면,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그땐 내가 여기 없겠지만 말이야.

속마음을 감추고 적당히 예의를 차렸을 뿐이었지만, 그 말에 왕자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이내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리트만 그자와 악마추종자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고 들었네. 놈을 바다로 쫓아냈다고도. 전하의 명령은 그와 관련된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 배신자를 찾아내서 숨통을 끊어 주시게. 놈 때문에 애꿎은 내가 좀 난처해져서 말이야.”

“……예?”

무슨…… 뜻이지?

“그 이야기를 자세히 나누고 싶었는데, 자네가 바쁘다니 어쩔 수 없군. 아무튼 잘 부탁하네, 타이니 경.”

왕자는 그에게 작은 의문만을 남긴 채 돌아섰다.

그렇게 그와 트루먼이 사라지고 난 뒤.

“……전하께서 리트만에게 1왕자님의 교육을 맡기셨었지. 당연히 저 왕자님의 뜻은 아니었네만, 그가 배신자라 밝혀진 마당에 괜히 불똥이 튈 수도 있어서 그러시는 걸세.”

왕자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리암이 설명해 줬다.

“그렇다고 해도 전하께서 불살을 명하셨는데 죽이라고 하시다니……. 물론 모르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말일세. 허허. 역시나 두 분의 성정이 너무 달라.”

평생 현 카룬 국왕을 보필해 온 노기사는, 아무래도 1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타이니는 카룬의 상황에 대한 수많은 의문 중 하나의 답이 보이는 듯했다.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는 리암에게 넌지시 물었다.

“……트루먼 경은 아무래도 저 1왕자님 쪽에 줄을 선 모양입니다?”

“아, 흐……. 그런 듯하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친구였네만, 최근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러고 있네.”

리암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저나 나나 은퇴를 앞둔 마당인데, 말년에 무슨 험한 꼴을 겪고 싶어서 그러는지 원…….”

그리고 그 대답은, 타이니의 뇌리를 스치는 가능성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리암 경. 그럼 전 이만…….”

“뭐? 이, 이보게! 내 말 아직 안 끝났……!”

리암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타이니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작 물어보려던 말은 아직 꺼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그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지, 대체 국왕과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대전에서 그런 대화가 오갔는지…….

왕실 기사단장의 의문은 한동안은 풀리지 않을 듯했다.

* * *

“1왕자와 성물 수호대장 트루먼 경을 감시해야겠어. 그들이 성물을 빼돌리려 할 거야.”

리트만, 즉 후셀과 이 사건의 연관성. 그리고 미래에 성물이 사라진다는 정보를 아는 이만이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 성물이 있는 곳의 출입증은 전하를 제외하면 나만 가지고 있으니.

- 굳이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이제 트루먼의 그 말이, 마치 성물을 지키지 말라는 말처럼 해석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니가 파악한 성물의 특성을 누군가 알고 있다면, 수천 년간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던 성물 후마니타스(Humaitas)를 훔쳐 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왕실의 적자, 왕자라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수도 있어.’

왜 왕자씩이나 되는 놈이 그런 짓을 하는지, 은퇴를 앞둔 노기사는 또 왜 그를 돕는 건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가정하면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다만,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 판단의 근거는요?”

많은 설명이 생략된 그 논리를 다른 사람이 알아듣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오르투스 외곽에 오픈한 어느 펍의 안쪽 방 안.

전문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손길로 와인 잔을 닦고 있던 제이가 그렇게 묻는 것도 당연했다.

“어, 그게…….”

미래를 알고 있기에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 조각.

그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거기까지는 생각 못 한 채 앞뒤 안 가리고 제이를 찾아온 타이니는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 택한 대답은 결국.

“……직감이네.”

뿌득.

와인 잔을 닦던 손길이 처음으로 부자연스러운 소음을 내고, 에낙센에서 봤던 중년인의 얼굴이 아니라 젊은 청년의 얼굴을 한 제이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직감……이란 말이죠? 하, 하, 하.”

난 지금 매우 어처구니가 없다. 빨리 그럴듯한 근거를 대 달라.

제이의 차가운 눈빛과 부러 꾸며 낸 듯한 웃음은 그리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타이니는 그저 우길 수밖에 없었다.

“흠, 흠. 직접 경험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게 있지 않나. 왠지 그 둘이 너무 수상하단 말이지.”

- 마왕의 골통을 부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다 크기도 전에 화형당하고 싶은 거냐?

검제의 당부는 아직 그의 뇌리에 선명히 새겨져 있었으니까.

회귀에 대한 진실은 그 결전의 날까지는 절대 극비였다. 옛 동료들을 설득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저희는 그 직감만 믿고 요원을 내성에 침투시켜서 일국의 왕자를 감시해야 하는 거군요? 그것도 왕위 계승 1순위를?”

제이가 이렇게까지 의욕을 안 보이면 곤란했다.

타이니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악마추종자들이 성물을 빼돌리려 한다는 것은 확실해. 이번에 쫓아낸 놈은 심지어 정상적인 마나유저였다. 성물이 지키는 공간에서 국왕의 신뢰를 얻기 위해 무려 16년 동안 웅크린 놈이야. 그런 놈이 왕자의 스승으로 있었다잖아!”

그가 왕자에게 뭘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부언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다급한 마음에 일단 뱉고 본 말이었는데.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시는 바람에 제 주군의 안목까지 의심했잖습니까.”

다행히 먹혀든 것 같았다.

휴.

“어…… 내가 원래 감으로 먼저 파악하고, 머리로 분석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는 스타일이라서.”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름대로 멋있는 척을 해 보는데, 제이가 썩은 미소로 받았다.

“머리가 나빠서 동물적 직감에 의존하신다고 메모해 놓겠습니다.”

“아니야!”

쾅.

울컥한 마음에 작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자, 낡은 가구가 쩌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곧바로 비난 섞인 눈빛이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일이 바빠서 집기가 부족한 판에…… 하, 인생…….”

보란 듯이 내쉬는 한숨까지.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해라.

한숨을 쉬는 제이를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타이니는 바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

“뭐, 말씀하신 대로 조치하겠습니다. 따로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아, 놈이 서쪽의 바다로 도망쳤어. 그 근방의 섬 중에…….”

타이니가 후셀에 대한 추가 정보와 자신이 느낀 의문점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순간.

탕. 팅. 타당. 탕. 탕. 팅.

기묘한 박자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순간에 대화가 끊기고 제이가 한 손을 들자, 방문이 스르륵 열리며 낯선 인상의 청년이 뛰어 들어왔다.

‘이 광경,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타이니가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마스터, 지금 빨리…….”

뛰어 들어온 청년의 귓속말을 들은 제이가 심각한 안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설마 단체 손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은 타이니가 눈살을 찌푸리자, 제이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VIP 손님입니다. 이번에는 고급 살롱 바인 만큼 천박하게 단체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하?”

“위장은 철저히 해야 하니까요.”

“너 대체 뭘 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데.

“그럼.”

제이는 청년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곧장 방문을 나서 버렸다.

스르륵. 쿵.

“뭐? VIP? 허, 개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낡은 창고를 개조한 방 안에는 홀로 남겨진 타이니의 허탈한 독백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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