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41화 (41/500)

41화. 로히터

“또 온다!”

“저긴 또 어디야?”

“어디 보자, 문양이…… 트로스 백작가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시각, 발렌티노 동서남북의 성문에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운집하여 성에 들어서는 무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귀족들이 얼마나 온 거야?”

“제국에서 방귀깨나 뀐다고 하는 귀족들은 다 왔겠지. 아무래도 우리 발렌티아 공작가의 잔치인데.”

“그래도 보통 성년식에 이렇게까지 오나?”

“각하께서 공녀님을 끔찍이 아끼신다는 소문이 온 제국에 파다해. 그러니 알아서 기는 거 아니겠어?”

온 동네가 대단한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시끌벅적했지만, 사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발렌티아 공작령 산하의 영지 귀족들은 해가 떠오르고 성문이 열리자마자 이미 일제히 입성해 있었고, 그 뒤로도 수많은 귀족 사절들의 행진이 대낮까지 이어졌다.

발렌티아 공작가의 막내딸, 클로이 폰 발렌티아의 성년식 초대장을 받자마자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것도 손님을 받기 시작한 일주일 전부터 오늘까지 말이다.

그 때문에 발렌티노 내성에서의 움직임도 점차 바빠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습니다.”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이 전부 다 온 것 같습니다.”

“집사장님, 아무래도 영주관 내에는 더 이상 자리가 없겠는데요?”

사용인들의 보고에 발렌티아 공작가의 집사장이자 총관 크린 맥도웰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형식상 보낸 초대장인데 왜 이렇게 많이 온 거야?’

애초에 휘하 영지의 귀족 가문들과 근방의 귀족 사절들만을 고려해서 준비한 탓에, 이대로라면 음식과 자리가 턱없이 모자랄 게 분명했다.

“이, 일단 조리장에게 가서 식자재 발주 두 배, 아니 세 배로 넣으라고 해. 그리고 내성의 고급 숙소들을 가문의 이름으로 전부 대여해!”

“귀족들이 여관 같은 데서 묵으려고 할까요?”

“싫으면 돌아가라고 해! 어쩔 거야, 자리가 없는데!”

“그럼 영주관 내 배치는…….”

“작위 순으로…… 아, 아니지. 영지 귀족들 우선으로 하고, 그다음엔 작위 순으로 배정해! 나머지는 전부 숙소로 돌려!”

그가 예상외의 재난에 힘겨워할 때.

이 성의 주인 역시 이 사태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로히터 공작가에서도 사절을 보냈습니다. 망나니로 유명한 셋째 아들이긴 합니다만…….”

은빛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칼같이 정돈된 남성형 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

그야말로 ‘단정’이라는 단어가 형상화된 것만 같은 사내, 제나스 프리웰의 보고에 공작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명백히 이상한 일입니다. 가문에서도 각하와 저만 알고 있는 일 아니었습니까? 아직 공녀님께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랬지.”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이건 황실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뭐, 결과적으로 저희에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요.”

“……그렇겠지.”

이대로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야.

공작은 마음의 소리를 그저 가슴속에 담아 둔 채 제나스를 바라보았다.

‘미래에선 보지 못했다고 했던가?’

그 시선에는 당장의 대화 주제와는 상관없는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제나스는 죽은 자신의 친우이자 전 기사단장인 클렌 프리웰의 뒤를 이어 블루윙의 기사단장이 된 조카 같은 아이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핏줄로 지위를 이어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 녀석은 불과 서른의 나이에 마나유저 6단계, 챌린저(Challenger)급에 오른 천재였으니까.

‘이제 겨우 서른둘.’

거기다 검술과 가문의 일에만 몰두하느라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까운 아이.

그것만 해도 미안할 따름인데.

- 제나스 프리웰이요? 못 들어 봤습니다만…… 그 정도로 천재였다고요? 어, 이상하네?

타이니와 나눈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이 아이가 미래에 없다고? 왜?’

개인적으로 아끼는 것은 둘째 치고, 이대로 성장하면 늦어도 마흔 즈음에는 초인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였다.

정말로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을 유지한다면, 발렌티아의 비전 중 하나인 오러 특성의 비전을 가르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왜?

“제나스.”

“예, 각하.”

“……혹시 내게 말하지 않은 병 같은 것이 있느냐?”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 그런다.”

얼떨결에 둘러댄 말에 제나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닙니다, 제가 미숙해서 컨디션 조절을 못 한 것뿐입니다.”

챌린저급 기사가 컨디션 조절을 못 했다니?

“일이 너무 바쁜 거겠지. 굳이 클로이의 성년식을 네가 직접 준비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공녀님은 제게도 조카 같은……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 그런 걸로 죄송할 것까지야. 실제로 그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너를 많이 따르긴 했지. 친오빠가 넷인 줄 알았던 녀석 아니냐.”

“……예, 그래서 더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네가 한 일인데 말이다.”

그리 말하면서도 공작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 녀석이 결혼해서 은퇴한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젠, 여전히 결혼 생각은 없느냐?”

굳이 어릴 적 애칭으로 부른 것은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대화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거기다 최대한 인자한 미소까지 곁들여 보았지만.

“절. 대. 없습니다.”

돌아오는 거라곤 단호한 목소리뿐이었다.

“그 건에 관해서는, 분명 다시 묻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싸늘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표정으로 그리 말하니 공작은 황급히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알겠다. 미안하구나.”

제나스의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클렌, 이 친구야…….’

가정을 좀 더 챙겼어야지.

그의 부모 관계가 좋지 못했던 탓인지, 제니스는 여전히 결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로써 기대했던 경우가 아닌 것은 확실해졌다.

얼마 전 챌린저급에 올랐을 때, 검을 들 수 없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기사단장을 역임하겠다고 당차게 말했던 아이다.

그러니 정말 좋게 생각해 봐도.

‘……중상으로 은퇴? 아니야. 그랬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회복시켰겠지.’

결국 남는 것은.

‘……죽는다는 건가.’

이 아까운 아이가.

고생만 시킨 것 같아 언제나 미안한, 아픈 손가락 같은 조카가.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니, 아니다.”

공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생각을 거듭했다.

블루윙의 기사단장, 30대 초반에 챌린저급에 오른 천재가 죽을 만한 일로 생각되는 상황은 몇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큰 후보라 하면 최근에 타이니와 이야기했던 사건.

‘황실의 비극.’

신분상 직접 결혼식장에 들어서지는 못하더라도, 가문 기사들과 외부 경계를 서는 역할로 참석했다가 재앙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나라면 당연히 제나스를 데려갔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대비하면 없는 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알고 있으면 됐다, 바꿀 수 있어.’

그렇게 미래를 바꾼다면, 이 아이는 말세에 인류를 구원하는 또 한 명의 오러유저가 될 것이다.

아니, 그리 만들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다짐하는 공작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제나스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고생 많았다. 이만 들어가 보거라.”

“……오늘 좀 이상하십니다, 각하.”

“클로이가 성년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지 않느냐.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다.”

“예, 그럼…….”

“아! 하나를 잊을 뻔했군. 그 로히터의 망나니에 대해 주변에 똑똑히 일러 둬라.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라고. 아, 놈한테도 경고해 둬. 여기는 로히터가 아니라 발렌티아라고 말이야.”

“이미 조치했습니다.”

“……그래? 역시 든든하구나.”

“별말씀을. 각하께서도 좀 쉬십시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오러유저에게 건강 걱정이라니.

피식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삼켰다.

“내 걱정은 말고 너부터 쉬거라. 나머지 일은 크린이 처리할 테니.”

“예, 알겠습니다.”

대낮부터 번잡했던 공작가의 일은 이 대화로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다만 한 가지, 발렌티아 가문에 속하지 않은 어떤 소년에게는 그 말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이곳은 발렌티아의 땅이니 행실에 예의를 갖춰 달라……? 하, 건방진…….”

쾅.

“악! 뭐야, 이거!”

가슴 속에 쌓인 울화를 곱씹다가 탁자를 걷어차려던 티브론 폰 로히터는 오히려 자신의 정강이를 붙잡고 펄쩍 뛰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바로 치우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로히터의 시종은 표정 변화도 없이 바로 탁자를 치웠다.

“젠장, 이 빌어먹을 곳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티브론이 옆에 놓인 도자기 화분마저 걷어찼다.

와장창창!

단번에 박살이 난 화분이 수십 골드짜리라는 것은 몰랐겠지만, 알았다 해도 그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을 터였다.

지금 그는 어떻게든 가슴 속 울화를 풀어내야 했으니까.

태어나 단 한 번도 화를 참아 본 적 없었던 티브론.

그런 그가 불과 몇 시간 전에 큰 수모를 당하면서도 억지로 참아야 했던 것이다.

“감히 중간 성도 없는 단승 귀족 따위가 내가 누군 줄 알고!”

와장창.

티브론이 기억을 곱씹을 때마다 그의 주변엔 부서진 물건의 파편들이 늘어만 갔다.

제나스…… 뭐라던가.

얼굴만 봐서는 힘도 제대로 못 쓰는 기생오라비 같았는데, 막상 마주했을 때는 기묘한 기세가 영혼을 억누르는 듯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울화를 더욱 키웠다.

몇 시간 동안이나 애먼 데에 분풀이를 해도 화가 풀리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이내.

똑똑.

- 공자님, 그리엄입니다.

문밖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가까스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티브론의 눈짓에 시종이 조심스레 문을 열자, 로히터 공작가의 수위 기사 그리엄이 거침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벌어진 난장판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이내 그 불편한 시선을 티브론에게 옮겼다.

“……공자님, 각하께서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괜한 짓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평소라면 당연히 발작하듯 화를 냈을 티브론이었지만, 지금은 얼굴이 터질 듯 벌게지면서도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절단에 자신의 감시역으로 파견된 기사가 그리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 잘 참고 있잖아!”

참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모르는 듯한 헛소리였지만.

‘뭐, 쓸데없이 지금 사람을 치는 것보다는 물건이나 부수는 게 낫겠지.’

그리엄은 인상을 쓰면서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사소한 집기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공자님이 일전에 치신 사고를 수습해 주시는 대가로 각하께서 내리신 명, 잊지 않으셨지요?”

“……어찌 잊을 수 있겠어.”

- 네놈, 가문에서 내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똑똑히 들어라.

티브론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 바로 자신의 아버지 알론 폰 로히터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슬쩍 몸을 떨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 발렌티아의 공녀를 꼬시라는 거 아냐.”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공녀가 방에서 나와 기사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 왜?”

“그거야 저도 모르지요. 일단 첫인상을 좋게 가져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엄이 웃으며 손짓하자, 티브론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여자도 나의 매력에는 저항 못 하지! 바로 가 보자고.”

로히터 가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푸른 머리에 붉은 눈, 이색적인 외모의 소유자인 티브론은 분명 객관적으로 보면 잘생긴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는 그리엄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여자들이 너한테 달라붙는 건 네 가문 때문이지, 얼간아. 그것도 이제 끝이고.’

성년식을 앞둔 공녀를 꼬시라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지시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점에서, 저 얼간이는 망나니치고 순수한 편이기는 했다.

- 티브론 놈이 에스가르드의 딸에게 찝쩍거리며 추문을 만들기만 해도 충분하다.

- 너희들이 발렌티아에 도착할 때쯤이면 놈은 이미 가문에서 제명당했을 테니, 너는 그것을 모르고 명령을 조작한 녀석을 따라 발렌티아에 간 것이다. 알겠느냐?

- 녀석이 아무리 수작을 부려 봤자 뜻대로 되지 않을 테니, 놈이 참지 못하고 평소처럼 사고를 치면 너는 바로…….

제 자식마저도 이용하려는 비정한 주군.

그 명을 떠올리는 그리엄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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