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계획
“각하를 뵙습니다.”
“충!”
“그래, 다행히 상태는 좋아 보이는구나.”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공작의 시선은 이내 타이니와 같이 불려 온 드렉슬러에게 돌아갔다.
“어떻더냐?”
“……저도 믿기지 않지만, 익스퍼트인 아이가 슈페리어급의 기사와도 견줄 만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말에 놀란 듯 눈이 커진 공작이 씩 웃으며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기대 이상이로구나.”
고작 기대 이상이라는 말로 평가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신화 속 영웅 수준이던데.’
드렉슬러가 목구멍까지 솟구친 말을 억지로 참아낼 때.
타이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공작의 시선을 받았다.
“각하의 배려 덕분입니다.”
3일 전 그 처절한 원한(?)은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이는 미소에 공작 역시 웃으며 화답했다.
“그래, 그 정도라면 확실히 믿고 맡길 만하겠어.”
‘……뭘 말입니까?’
사정을 모르는 드렉슬러가 어리둥절해하는데, 공작은 그 의문을 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드렉슬러 경, 이만 나가 보게. 난 잠시 타이니와 할 말이 있으니.”
누구의 명이라 거절할까.
“……예, 알겠습니다.”
드렉슬러가 그렇게 사라지고 난 뒤에야, 공작은 굳은 얼굴로 타이니를 소환한 이유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의논해 봐야겠지?”
“예.”
“네가 말한 첫 번째 재앙, 카룬의 성물 후마니타스(Humanitas)가 사라지고 수도인 오르투스가 박살이 난다……. 솔직히 아직도 믿기 어렵다만, 그게 올해의 일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새해가 시작되는 날 성물이 사라지고, 이후 오르투스가 있는 섬이 크라켄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크라켄. 해양을 지배하는 초대형 마수.
하지만 심해에 서식하며 좀처럼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는 습성 탓에, 이제는 그 실존 자체가 의심되는 전설 속의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만약 녀석이 실제로 나타난다면, 그 자체로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성물이 사라진다는 것부터 믿기지 않는데 크라켄이라…….”
여신이 세상에 내렸다는 일곱 개의 성물은 고대 인간족의 문명을 유지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류의 보물이었다.
작은 도시 단위에 걸쳐 마기를 지닌 마물의 접근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진 이 유물들은, 고대에 미약했던 인류 최초의 도시 일곱 곳을 지키는 방패나 다름없었다.
물론 도시 규모가 훨씬 커진 현재에 와서는 그저 각 나라나 종족의 상징 구실만 할 뿐이었지만, 막상 마왕군이 강림했을 때는 사라진 성물들의 부재가 인류 연합군에게 뼈아픈 손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룬 왕실은 대체 뭘 했길래?”
“……그걸 저도 모릅니다. 다만 동료들에게 듣기로,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에 도난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
그 말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던 공작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타이니를 바라보았다.
“재앙의 내용에 대해 알면 뭐 하냐, 대책이 없는데.”
그 비난하는 듯한 시선에 타이니는 울컥하고 말았다.
“뭘 어쩌라고……요, 젠장! 심해에 들어가 크라켄을 미리 잡을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과거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대책을 준비했겠지.
‘지도 아무 말 없이 보내 놓고선…….’
그 억울한 듯한 표정에 공작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툭툭 건드렸다.
“결국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카룬의 성물에 대한 보안을 강화하는 것뿐인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다. 해상 왕국 카룬이 왕국 연합 소속은 아니라지만, 엄연히 중립국이니.”
아스란 제국의 발렌티아 공작이 직접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카룬에서 반발할 수도 있다.
억지로 조치를 취하려 하면 내정 간섭으로 보일 테니, 오히려 잠잠하던 왕국 연합이 다시 제국에 대립각을 세우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인즉.
“……관계없는 사람이, 그것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움직여야겠죠. 딱 저 같은 사람이요.”
만약 타이니 혼자 일을 처리하려 했다면, 무작정 왕국에 잠입할 생각밖에 못 했을 테지만.
“다행히 내 휘하에 있는 가렌이 카룬에 있는 해일의 마도사, 게일 앤더슨과 친분이 있다고 한다. 너는 그의 추천서를 받고 카룬의 왕실에 들어가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항상 인력이 부족한 카룬 왕실이니, 너 정도 인재라면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다행히도 공작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다만, 허점도 있어 보였다.
“추천을 받는다고 아무나 왕실에 들이겠습니까? 왕실에 들어가려면 신분부터 확실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반문은 일견 타당한 듯했지만, 공작은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정령술사.”
“……아!”
“순수하고 착한 영혼의 소유자만이 될 수 있는 정령의 주인. 인간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신분 증명패지. 물론…… 널 보면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만 말이다.”
“……뒷말만 없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워낙 솔직해서.”
어깨를 으쓱하는 공작의 모습이 얄밉기는 했지만, 사실 타이니도 정령술사에 대한 속설이 ‘조금’ 잘못 알려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특이한 경우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정령술사가 절대적으로 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정령술사가 된 뒤에 타락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라프탄, 그 놈처럼…….’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것. 그것에는 정령술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대륙 전체에 증명했던 악당.
전생의 한때 적으로 만났던 정령술사를 떠올린 타이니가 쓴웃음을 짓는데, 그 웃음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만약을 위해 네 나이도 한 스물 즈음이라 말하거라. 엘프족 혼혈이라 설명하면 얼추 믿을 것이다.”
“예?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눈이 있고 양심이 있으니, 자신의 외모가 엘프에 비할 정도는 절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뭐, 대충 귀여운 외모다만? 그리고 쿼터 엘프쯤 되면 겉으로는 티가 안 나는 이들도 많으니까.”
‘귀여운’이라는 말에 슬쩍 인상을 쓰던 타이니는 이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쿼터 엘프라서 티가 안 난다면 어려 보이는 걸 설명할 수도 없지 않겠냐는 반박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까.
“제가 혼혈이라 말하면 하나같이 엘프가 아니라 마족을 떠올릴 겁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리 말한 타이니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 게다가 비상식적으로 큰 덩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았던가.
물론 그의 면전에 대고 마족이니, 뭐니 하는 말을 지껄이는 이는 몇 없었지만 말이다.
그 반응에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그것을 본 타이니의 인상이 더 구겨지려는 찰나 공작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카룬은 다르다. 동부의 군도, 해상 왕국이지 않느냐. 애초에 동대륙과의 무역을 업으로 사는 나라야. 거기는 검은 머리를 가진 혼혈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고 들었다.”
듣고 보니…….
“뭐…… 그렇긴 하겠네요.”
전생에서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카룬은 이미 수도가 박살 나고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곳이었기에, 굳이 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니 너는 카룬 왕실에 들어가 성물 수호대에 자원하거라. 그게 네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크라켄하고 싸워 보든가.”
그 말에 타이니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자, 공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농담이다. 성물은 이미 상징적인 물건이 된 지 오래. 그걸 지키는 일은 대개 한직으로 취급받고 있으니, 자원하면 들어가기는 쉬울 것이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뭐, 어떻게든 들어가 봐야죠. 다만 걱정되는 점은 여전히 있습니다. 정말 성물을 도둑맞는 거라면, 제가 정확히 그 시간에 거기 있어야 할 텐데요.”
“징조가 있을 거다. 아무리 감시가 허술하다 해도 그 타이밍에 성물이 없어진다는 게 말이 안 돼. 네가 말한 일련의 재앙 중 다수는 누군가 수작을 부린 거로밖에 보이지 않아.”
막연한 추측이긴 했지만, 나름의 설득력도 분명 있었다.
“전생의 당신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분명히 악마추종자 놈들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그래, 그때는 이미 벌어진 뒤에 결과를 보고 내린 결론이겠지만, 이번에는…….”
“막아야죠.”
“막아 내야지.”
같은 말을 동시에 뱉어 낸 둘의 시선이 교차하고, 이내 두 사람의 얼굴에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뢰를 얻고 자리를 잡아야 하니, 최대한 빨리 카룬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 징조라는 것도 찾아보지요. 아니면 아예 수련을 핑계로 성물 근처에서 숙식하는 것도 괜찮고요.”
다소 극단적인 방안이지만, 정 안되면 정말 그렇게라도 할 생각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타이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공작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 전에, 해야 할 게 하나 있다.”
“예?”
“네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
“슈페리어급의 전투력을 보유한 익스퍼트……. 뭐, 적의 방심을 유도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태다만, 그래도 네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줄 패는 있어야지.”
“허…… 저를 그렇게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타이니가 멍한 표정으로 의아한 듯 묻자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크흠, 우리 가보가 헛되이 쓰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뭐, 쓸 수 있는 패를 더해 주신다면 저야 좋습니다만……?”
직접적인 지원은 못 해 준다더니 뭘 어떻게?
그 의문 가득한 시선을 받은 공작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티팩트 워해머를 제작해 주겠다. 아직은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받아 가거라.”
“……예?!”
그 말에는 타이니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티팩트라 하면 마법의 힘이 반영구적으로 깃든 무구.
그 마법의 효용과 위력에 따라 가치가 천차만별이지만, 최소로 잡아도 보통 기사 봉록의 몇 년 치요. 최대로 잡으면 성을 팔아도 구하지 못하는 초월무구 같은 것들도 있었다.
물론, 지금 제작한다는 아티팩트가 초월무구는 아니겠지만.
“하하……. 뭘 그렇게까지…….”
지금 공작이 쉽게 말한다고, 정말 가벼운 가치의 물건은 아닐 터였다.
“썩 대단한 것은 아니니 그리 반색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사실 몇 달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놨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니까.”
음? 몇 달 전부터?
“아니, 어떻게 말입니까?”
내가 올 것을 몰랐을 텐데?
그 의문 어린 시선에 공작이 다시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비밀이다만, 이건 원래 드렉슬러에게 줄 장기 근속 선물이었다.”
“아…….”
타이니는 이곳까지 동행했던, 겉모습과는 달리 유독 심성이 여린 블루윙의 부단장을 떠올렸다.
미안함에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후에 더 큰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드렉슬러 경.’
타이니는 그리 다짐하며 다시금 공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을 네게 주려는 것이니, 후에 드렉슬러를 보거든 잘 좀 챙겨 주거라.”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요? 아티팩트까지 가지고 있는 자가 임관을 청한다면.”
“엘븐하임 출신 쿼터 엘프라고 하면 하급의 아티팩트를 가진 것 정도야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네 실력을 숨길 핑계로도 좋을 거고.”
“……그렇긴 하겠네요.”
열세 살짜리 꼬마가 온전히 제힘으로 워해머를 휘둘러 사람 머리를 깼다는 것보다는, 스무 살짜리 엘프 혼혈 정령술사가 아티팩트를 써서 엄청난 무력을 발휘했다는 게 더 그럴싸할 테니까.
“그럼 그 아티팩트, 어디서 받을 수 있습니까?”
계산을 끝낸 타이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