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래. 이래서 내가…….
- 이십 년 뒤 세상이 멸망한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고, 믿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라진 가보, 템퍼스의 비밀과 더불어 미래의 이야기를 들고 찾아온 아이의 말은 너무나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게다가 자신이 평생 비밀로 해 왔던 가슴 아픈 추억까지 알고 있었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긴 이야기를 그렇게 짜임새 있게 지어낼 만한 머리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다만, 그렇게 생각해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었다.
왜 미래의 자신은 스스로가 아닌 저 아이를 회귀자로 지정했을까.
‘……재능이라.’
서른이 되기 전에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했던가?
확실히 마나에 눈을 뜬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익스퍼트를 넘보는 수준이라면, 상식을 넘어서는 천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회귀자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마나를 다루는 수법 자체도 특이하고.’
꼬마의 전신에 고정된 마나는, 꼬마가 말하고 움직이는 동안에도 주변의 마나를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나연공법인지 마력회로인지도 구별이 안 되는 비전까지 스스로 만들어 낼 정도라면 그 재능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다만…… 그게 전부였을까?’
만약 자신이 회귀했다면, 가문과 지위를 이용하여 인류의 전력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마왕군에 맞설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병력은 결코 한 사람의 천재와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일 터였다.
아무리 오러의 힘밖에는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자신의 권력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테니까.
거기다.
‘미래의 경험이 있다면, 내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어 오러마스터가 되었을 수도 있어.’
그런데 미래의 자신은 그럼에도 기어이 저 아이를 회귀시켰다.
다가올 재앙들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는 저 아이를.
그 말은 즉…….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수단 중에서는 재앙을 극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내가 직접 돌아와서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지.’
예를 들면,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오러마스터나 그 이상의 경지에 닿을 수 없다고 느꼈다거나.
콰드득.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을 떠올리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뻗어 나간 기세에 연무장 바닥이 갈라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럴 리가 없지.”
이 에스가르드 폰 발렌티아가 설마 스스로 한계를 규정짓고 포기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러니, 꼬마야.
너는 내게 단순한 재능 이상의 것을 보여 줘야 한다.
도대체, 미래의 내가 너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지금 내게 다시 보여 다오.”
현 발렌티아 공작이자, 대륙 7대 기사의 말석.
후일 검제라는 이름으로 대륙 10대 기사 중 최고를 다툴 남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검은 머리 소년을 노려보았다.
‘보여 주긴 뭘 보여 줘! 그냥 골탕 먹이는 거잖아……!’
타이니는 거대한 철벽처럼 느껴지는 기사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익스퍼트도 되지 못한 자신을 그 두 단계 위인 슈페리어랑 맞붙게 하다니.
빈틈을 노린 반격조차 고스란히 튕겨 나오는 게 당연할 정도의 격차였다.
‘방어력과 공격력에 특화……. 전생의 나와 비슷한 스타일이군.’
심지어 지금의 그로서는 완전히 상위 호환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상대니, 맞서기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흘낏 눈을 돌리니 살벌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지랄맞은 성질머리라니…….’
아무래도 이 당시의 검제는 미래와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아직 덜 늙어서 그런가.’
어쨌건 간에 테스트 결과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고 했으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렇게 타이니가 재차 마음을 다잡는 순간.
“어딜 한눈을 파느냐!?”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압력이 느껴졌다.
“읏!”
반사적으로 움직인 월랑, 그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워해머가 그가 서 있던 바닥을 내리쳤다.
꽈아아아앙!
우르르릉.
망치질 한 번에 연무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진동했다.
하지만 5단계, 슈페리어급 기사가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면 이 정도 울림으로 끝나진 않았을 터.
‘기세는 흉흉해도, 역시나 적당히 상대해 준다는 거겠지.’
공략해 볼 만한 구석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감각동조를 극대화시킨 월랑이 타이니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드렉슬러를 향해 번개처럼 돌진했다.
그리고 상대가 다시 한번 워해머를 휘두르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그의 공격이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방향을 급선회했다.
동시에 워해머가 거둬지는 틈을 파고들어 반격을 시도해 보지만.
터어엉!
애초에 최선의 힘으로 뻗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크하하하! 약하다, 꼬마!”
워해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방향을 바꿔 그가 있던 공간을 강타했다.
퍼어어엉!
워해머가 허공을 후려치는 순간, 터져 나간 공기가 푸른 파문과 함께 돌풍을 만들어 냈다.
‘윽…… 이런.’
롱소드보다 큰 망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꼴을 보니, 드렉슬러가 단순히 공격력이나 스피드만 제어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원래는 방패도 페어로 쓰는가 보군. 방어에 좀 더 치중한 타입이었나.’
격하의 상대가 공략하기에는 더욱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공략할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결심이 서는 순간, 월랑이 속도를 더욱 높이며 드렉슬러의 주변을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퍼어어어엉!
회전하는 방향으로 날아온 워해머가 다시금 허공을 강타하는 순간, 관성을 무시하듯 급격하게 방향을 바꾼 은빛 늑대.
그 기수의 메이스가 드렉슬러의 어깨 갑옷 모서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타아앙!
“호오?”
적당히 수준을 맞춰 주고 있던 드렉슬러의 인상이 살짝 일그러지고, 그 순간 그의 몸이 조금 더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 뒤부터는 드렉슬러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콰아앙!
쾅!
퍼어엉!
“잘도 피하는구나!”
점점 붉게 달아오른 안색의 드렉슬러. 그의 공격은 점차 강해졌고, 속도 또한 한층 빨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공작의 인상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드렉슬러의 수를 다 읽고 있다.’
10대 기사니, 뭐니 하더니만 확실히 전생의 경험이 어디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늑대의 정령이 가진 기동력까지 더해지니, 슈페리어급치고는 다소 느린 편인 드렉슬러가 고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의 얼굴에 흡족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대단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 정도는 내가 어려져도 할 수 있어. 고작 그게 전부더냐, 꼬마야?’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적용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 타이니가 보여 주는 실력은 그의 기대치에 간신히 다다른 수준이었으니까.
“드렉슬러! 언제까지 내 체면을 구길 셈이냐!?”
드렉슬러가 다소 느리다 한들 그건 슈페리어급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의 이야기일 뿐.
공작이 고함을 지르는 순간.
드렉슬러의 움직임이 갑자기 세 배 이상 빨라지며 타이니와의 거리를 단숨에 압축했다.
게다가 그 순간 그의 워해머 역시 갈색빛으로 물들며 순식간에 세 배 이상의 크기로 커졌다.
그것을 본 공작의 인상이 굳어졌다.
‘소울웨폰까지!?’
소울웨폰(Soul Weapon).
속성력과 마나 블레이드가 결합된, 슈페리어급에서나 보일 수 있는 특기.
그것을 아직 익스퍼트급에도 이르지 못한 꼬마에게 사용하는 것은, 공작의 기준으로도 너무 과했다.
‘저런!’
이걸 부하의 과잉 충성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실수라고 해야 할까.
당혹스러울 뿐인데, 이내 더 황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타이니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드렉슬러의 전면으로 뛰어든 것이다.
‘저런 미친……!?’
공작의 눈이 두 배로 커지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검은 머리 소년이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이런 미친놈이!!”
“죄, 죄송합니다. 제가 좀 과했……”
대결이 끝나자마자 다시 소심한 성격으로 돌아온 드렉슬러가 자신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런 그를 휙 지나쳐, 족히 20m는 튕겨 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 소년을 향해 달려갔다.
“제정신이냐!? 나는 재능을 보이라 했지, 객기를 보이라고 하지 않았…….”
“내가 이겼…… 쿨럭!”
캬악, 퉤.
“……습니다.”
피를 토해 낸 타이니가 입가를 슥 닦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드렉슬러를 가리켰다.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가 통째로 탈구된 듯한 몸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소년은 웃고 있었다.
그에 황당한 얼굴로 드렉슬러를 돌아본 공작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블루윙의 부단장, 드렉슬러의 뺨에는 가늘고 기다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충돌 당시, 정면으로 달려드는 타이니의 모습에 놀란 드렉슬러는 소울웨폰의 발동을 급히 거두었다. 그 반동으로 몸이 멈칫하는 찰나, 워해머를 몸으로 받아 낸 타이니가 동시에 메이스를 휘둘러 간신히 만들어 낸 상처였다.
실전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타격일 테지만, 조건이 걸린 승부라면 얘기가 달랐다.
“제가, 이겼습니다…….”
핏물이 흥건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타이니의 모습에,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네놈은 방금 죽을 수도 있었다! 고작 대련에서 이기겠다고 그런 미친 짓을……!”
“아, 안 죽었고, 쿨럭…… 이겼습니다.”
“예전에도 이따위로 무모하게 살았더냐?”
“흐…… 당연한, 소리를…….”
“대체 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후…… 뒷골목 인생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요.”
“이건 그냥 대련이었어!!”
“동시에…… 내기가 걸린 승부였죠.”
“뭐라? 이런 미친……!”
“그리고 전…… 이겼습니다.”
공작은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히죽 웃는 타이니의 표정에서는 정말로 후회의 빛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미련한 것아! 고작 내기에 목숨을 건다고? 그게 제정신인 사람이 할 짓이……!!?”
“어쨌거나 이겨야 하는 판 아니었습니까……? 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피범벅이 된 추한 몰골로 당당하게 웃는 타이니의 모습을, 공작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서 있기도 힘든 소년으로선 그의 복잡한 속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우드득.
타이니는 염체를 이용해 어긋난 뼈들을 강제로 맞췄다.
‘부러진 뼈가 7개……. 역시 철신갑도 이 정도 경지 차이에서는 버티기 힘들군. 하지만 괜찮아. 뼈들이 다 붙는 데 일주일, 내상도 그즈음이면 나을 테고…….’
해 볼 만한 대련이었다.
그래서 짜릿한 통증에도 웃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해냈으니까.’
매 순간을 치열하게, 승부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아무것도 몰랐던, 그저 마나 감응력 하날 타고났을 뿐인 뒷골목 출신 고아는 그렇게 대륙 10대 기사로 성장했다.
더구나 타이니가 볼 때는 이건 딱히 목숨을 건 도박도 아니었다. 상대가 소울웨폰을 휘두르는 순간, 결국 힘을 다시 거둘 것도 알았으니까.
전력을 다한 일격, 그리고 그것을 거둘 때 생기는 반동.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세 단계의 경지 차이를 격하고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이 대련이 성립된 순간부터 타이니의 머릿속에 펼쳐진 그림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굳이 공작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둬야 했다.
“……어떻습니까, 공작 각하. 저는…… 제대로 증명한 겁니까?”
현재는 올려다보기도 힘든 신분, 하지만 미래의 동료.
공작은 그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라면 이따위 짓은 절대 못 하지. 그랬겠구나. 그래서 내가……. 그만큼 무모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타이니는 공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저.
“그럼 무엇을 주실 겁니까?”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마.”
약속을 확인하는 것.
“감사…….”
원하던 대답을 들은 타이니는 다시금 핏물이 흥건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소년을, 공작이 착잡한 눈으로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