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드렉슬러 아이넨
“기사를…… 그래, 로이어 정도면 되겠군. 그를 불러와.”
“예, 각하.”
명을 받은 시종이 방을 나서자마자 타이니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공작님께서 직접 상대해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건방지게 어린놈이……. 대충 봐도 답이 나오는데, 굳이 내가 네놈을 상대할까.”
“답이 나왔는데 테스트는 왜 합니까?”
“……내 맘이다.”
그냥 심술이란 소린가.
여러모로 예전과는 다른 검제의 모습에 실소가 나오는데, 문득 그가 전적으로 상황을 쥐고 흔드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장난기가 동했다.
그래서 떡밥을 풀듯 슬쩍 물었다.
“혹시 미래에 대해 궁금하신 건 없으십니까?”
“……많지.”
옳지, 걸렸다.
공작이 생각보다 빨리 미끼를 물자 타이니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데.
“제가 알고 있는 공작가의 미래에 대해서 알려 드릴까요?”
장난스러운 속내가 표정에 다 드러난 것일까.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딴 건 필요 없다.”
“……예?”
“네놈이 말한 그 재앙이 일어나기 전에 분명 전조가 있었을 텐데, 내가 궁금한 건 그런 심상치 않은 조짐에 관한 것들이다. 내 미래 따위엔 관심 없어.”
“자기 미래를 보통 ‘따위’라고 말하던가요?”
“그럼 그게 따위지 뭐냐. 내가 끝까지 살아남아 항전한다는 걸 알았으니 되었다. 내가 멀쩡하다면 가문도 멀쩡하겠지. 괜히 내 미래 따윌 알아서 인생의 재미를 잃고 싶진 않아.”
오, 대어 자존심에 이따위 미끼는 안 물겠다 이거지?
하지만 타이니에게는 회심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럼, 자녀분들의 미래는요?”
그 말에는 자신만만하던 검제의 눈동자도 흔들리고야 말았지만, 그 역시 잠시에 불과했다.
“……절대로 말하지 마라.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음……?
“사람은 무릇 실수와 실패를 통해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식들이 시련에 좌절하여 무너지지 않게끔 잘 가르쳤다고 자부한다. 부디 내 자식들이 성장할 기회를 가로막지 마라.”
반쯤 살기가 섞인 진심 어린 말에, 타이니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솔직히 클로이의 미래는 어느 정도 알지만 그 오빠들에 대한 건…….
“사실 잘 모릅니다. 이 한 몸 간수하기도 버거웠던 제가 공작가의 사정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그 말에 공작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내내 끌려다니다 처음으로 한 방 먹인 것 같아 속으로 웃는데, 어느새 얼굴이 굳어진 공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번에도 의외였다.
“설마 네놈, 앞으로의 세계정세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민간이 떠들썩해졌던 일 정도는 압니다만.”
“그 정도밖에 모른다고?!”
공작이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몰라, 타이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정도밖에라뇨? 대체 뭘 원하시는……?”
“네가 말한 미래의 연합군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수가 너무 적어! 대체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아……!”
“아!? 아라니? 허, 이런 미친…….”
공작의 분노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으아아아! 아, 아파요! 귀, 귀! 놔요! 놓으라고!”
“허, 야 이놈아. 넌 흠씬 두들겨 맞아서라도 다 기억해 내야 할 거다.”
타이니가 몸부림치는 동안 공작은 신경질적으로 시종을 호출하는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대기 중이던 시종이 바로 문을 열며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로이어 대신 가렌이나 드렉슬러더러 오라고 해!”
“……부단장님들을요?”
“그래, 아주 혼쭐을 내 줘야 할 놈이 있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시종의 걱정 어린 시선이 귀를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타이니에게 향했지만.
‘설마 각하께서 어린애를 패라고 부단장님들을 부르시진 않겠지.’
그는 이내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하며 공손히 물러났다.
그리고 타이니는 시종이 물러나자마자 체면 때문에 간신히 참고 있던 비명을 다시 내질렀다.
“아프다니까! 놓으라고요! 공작의 품위를 생각하시라고!”
“하, 이 애새끼 좀 보게. 대체 미래의 내가 뭘 믿고 이런 놈한테 가문의 보물을 쓴 거지?”
“그거야 본인한테 물어보시면…… 아아아아, 아파, 아프다니까요! 치사하게 마나까지 쓰시는 겁니까!”
“너 이 녀석, 뇌를 끄집어내서라도 기억나는 걸 전부 토해 내야 할 거다. 이게 다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야.”
“안 그래도 적어 놨어요!”
“……오?”
“‘오’? 이제 와서 ‘오’는 무슨! 일단 이것부터 놔요! 그냥 농담한 건데, 성질머리하고는……!”
“성질머리?”
타이니의 무례한 단어 선택이 새삼 거슬렸지만, 공작의 시선은 일단 타이니가 내어놓은 양피지를 향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이내 다시 일그러지고 말았다.
“……왜 이렇게 내용이 비느냐. 무슨 무슨 재앙이라고 섬뜩하게 써 놓은 게 열 개가 넘는데, 정작 그 내용은? 왜 이렇게 허술해?”
타이니는 그 살벌한 눈빛을 슬그머니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제가 직접 겪은 몇 가지 말고는 다 소문으로 접하거나 동료들한테 들은 것뿐이라서…….”
직접 겪은 것은 굳이 상세하게 적을 필요가 없어서 안 쓴 것이었지만, 공작의 눈에는 부실하기 그지없어 보일 뿐이었다.
“허으으……. 여신이시여, 왜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이건 미래의 저를 탓해야 하는 겁니까? 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던 공작이 다시금 타이니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자,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마나가 동결되며 소년의 몸을 완벽하게 구속했다.
‘그 잘난 능력을 왜 이런 데다가 써!’
속으로 비명을 지른 타이니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놀렸다.
“아! 그러고 보니까, 신전에서도 일이 있었는데…….”
“있었는데?”
“……요.”
왜 갑자기 이런 사이가 됐지? 좀 전까지만 해도 훈훈했던 거 같은데…….
타이니가 속으로 분을 삭이며 식은땀을 흘리는데, 그나마 정중해진 말투가 마음에 든 것인지 공작이 힘을 거두고 턱짓을 했다.
“뭔데? 말해 보거라.”
“마왕군이 강림한 뒤, 신탁에 의해 용사와 성녀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마왕군을 상대하겠다고 출진했는데…….”
“했는데?”
말끝이 흐려지자 다시금 공작의 손이 뻗어 나왔다.
“저, 저도 거기까지밖에 몰라……요. 그 소식 들었을 때는 이미 글러터니와 치고받기 시작했을 때니까요!”
“그걸 정보라고…….”
다시금 전신을 옭아매는 공작의 마나.
타이니는 꼼짝도 못 하게 되기 전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요, 용사의 나이는 압니다! 이름도요!”
“불어 봐라.”
“크롬벨! 그리고 나이는…….”
“나이는?”
“스무 살!”
“오, 다행이군. 그럼 어디 출신인지도…….”
“거기까지는 모르는데…….”
부족한 정보였지만,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집어 들었다.
“뭐…… 용사라면 특출난 재능을 보일 테니 찾기 어렵진 않겠지. 그래, 그나마 쓸만한 정보구나. 다행이야.”
공작은 타이니의 악필이 적힌 양피지에 크롬벨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런데…… 저 그게.”
“뭐냐?”
“용사 나이가…… 이십 년 뒤에 스무 살인데……요.”
양피지에 이름과 나이를 적던 펜이 빠직, 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좀 쓸모 있는 정보는 없나?”
클로이를 닮은 푸른 눈이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타이니를 압박했다.
전생에는 그래도 대등한 관계였는데…….
‘씨바, 더러워서라도 빨리 큰다.’
사실 정보를 모을 생각은 그도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미래에 이어질 재앙 중 막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막고, 인류 연합군의 힘도 키우기 위해서 말이다.
“처, 첫 번째는 확실해요! 카룬에서…….”
타이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재앙에 대한 정보를 와르르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필요한 과정이야.’
절대, 공작의 폭력에 굴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로
* * *
그그그극.
연무장의 석문이 열리며 그 안에 서 있는 금발 머리 중년인이 보이는 순간, 드렉슬러는 바로 무릎을 꿇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로드, 부르셨습니까!”
“오, 드렉슬러. 잘 왔다, 대련 좀 하자.”
“예, 기꺼이.”
오러유저인 주군과의 대련이라니, 자연히 피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에이씨, 이미 다 믿고 있으면서 뭔 또 테스트래.”
그의 앞에 선 것은 기대했던 주군이 아니라 웬 처음 보는 꼬마였다.
불길하게 느껴지는 검은 머리가 주는 인상만큼 입으로도 예의 없게 구시렁거리는 꼬마.
이런 꼬마가 왜 대 발렌티아 공작가의 기사 연무장에……?
“……각하?”
“아, 그 아이의 재능을 좀 테스트해 보려는 것일세. 입을 놀린 만큼 건방 떨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예?”
설명을 듣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각하 말씀은 제게 이 꼬마와 대련을……?”
“그렇지.”
미친…….
“……크흠.”
드렉슬러는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른 불경한 소리를 가까스로 삼켰다. 하지만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장악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 나를 버리시려는 걸까?
왜 이런 하찮은 일에 부단장인 날?
내가 뭘 잘못해서 좌천을 시키시려는 걸까?
부단장 봉록이 아니면 장원을 유지하기 버거운데…….
“……드렉슬러!”
“헛, 예! 가, 각하!”
“또 쓸데없는 상상에 빠졌군. 중요한 일이니 녀석을 제대로 보도록.”
“예? 아, 예. 알겠습니다.”
험상궂은 외모에 비해서 소심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줄곧 지적받아 온 터라, 드렉슬러는 다시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꼬마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꼬마의 경지를 파악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2단계? 그것도 익스퍼트 직전? 잘해야 열 살 전후로 보이는데, 이게 말이 돼?’
자신의 판단이 믿기지 않아서, 또다시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다시금 들려온 주군의 음성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보다시피 그 녀석은 천재다. 하지만 단순히 마나의 재능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투 감각도 겸했는지를 확인해야 하니 경이 제대로 확인해 보도록.”
“……명심하겠습니다.”
5단계, 슈페리어(Superior)급의 강자인 자신을 부른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드렉슬러는 투지를 일으키며 꼬마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 워해머? 경, 혹시 그 무구를 만든 장인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것보다는 조금 컸으면 좋겠는데. 망치 머리에는 좀 더 균열을 넣고, 손잡이는 1인치만 길게…….”
아이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애병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것도 꽤 구체적으로.
“정신 차려라, 타이니.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약속한 것도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쫌생이.”
……무언가 불경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누가 감히 공작가에서 주군께…….’
드렉슬러가 명백히 들은 단어를 애써 환청으로 치부할 때.
정작 그 주군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드렉슬러, 박살을 내도 괜찮다. 목숨만 붙여 놔.”
그 명령이 그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인자함으로 명망 높은 주군께서 어린애를 반쯤 죽이라고 하시다니?
혹시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일까 걱정하는데.
“이게 무슨, 수준 차이에도 정도가 있지!”
자신의 귀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 버르장머리 없는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네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다. 그러니 이 대련에서 네가 무엇을 보여 주느냐에 따라, 현재의 내가 줄 것이 달라질 것이다.”
이번에도 아이의 말에 피식 웃기까지 하며 답해 주는 주군.
그 대화의 의미를, 드렉슬러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진짜로 이기라는 건 아니겠죠?”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드렉슬러에게 상처 하나라도 입힐 수 있다면 네가 이긴 걸로 하지.”
“약속하셨습니다!?”
……그게 되겠냐, 꼬마야.
드렉슬러로선 그 순진한 패기가 어이없을 뿐이었지만, 꼬마는 생각이 다른지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자, 기사님. 한판 하시죠! 안 오시면 먼저 갑니다.”
맹랑한 어조로 외친 꼬마가 어느 순간 번개처럼 쇄도하며 자신의 발목을 노렸다.
꼬마의 메이스가 내뿜는 푸른 빛을 보아하니, 녀석이 완연한 2단계에 이르렀을 거란 추측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그래 봤자…….
고작 그 정도일 뿐.
콰아아아앙!
“어림없다, 꼬마.”
각반에 마나를 실어 그대로 메이스를 차 버린 드렉슬러가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순간적인 기습으로 극복하기에는 그와 꼬마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런데.
“큭!”
놀랍게도 꼬마는 메이스를 놓치지 않고, 몇 걸음 물러선 것으로 충격을 흩어 냈다.
‘어떻게 저 나이에?’
단순히 마나의 재능만이 아니었나.
드렉슬러는 더욱 이 천재 꼬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군의 호령이 들려왔다.
“정령술사라 들었다. 설마 한참 고수를 상대로 수를 아낄 셈이냐!”
쩌렁쩌렁한 고함이 연무장에 울려 퍼지기 무섭게 꼬마의 발치에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호오, 정령이라니.”
놀랍기는 했지만.
콰아아아아앙!
달려오는 늑대와 기수를 후려치는 워해머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꼬마는 놀라운 움직임으로 그 일격을 피해 냈다.
‘이걸 피해?’
“……제대로 맞으면 죽을 수도 있겠는데?”
간신히 직격을 피한 꼬마의 넋두리가 그의 투쟁심을 자극했다.
“죽지 않게 힘 조절은 해 주마.”
험악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성격.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사내.
블루윙 기사단 부단장 중 한 명, 드렉슬러 아이넨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