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60화 (237/264)
  • #260

    다시 사는 인생 - 260

    “회장님, 당락이 결정된 것 같습니다. 미국 대선보다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급히 한국을 찾은 린다와 카일과 함께 대선결과를 지켜보던 경환에게 잭이 말을 건넸다. 황태수의 은퇴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잭도 경환에게 자신의 은퇴를 거론하다 한마디로 박살이 난 잭은 경환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심 후보가 청와대에 들어간다더라도, 국정 장악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잭은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마세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은퇴를 거론하면 종신직으로 임명할 테니 알아서 하시고요.”

    잭은 경환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관심 속에 75%의 투표율을 보인 대선은 근소하게나마 심석우가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총 투표수 3천7십만 중에서 심석우가 40%, 여당 후보가 36%, 야당 후보가 23%로 심석우와 여당 후보의 표 차이는 백만 표를 조금 넘을 뿐이었다. 심석우가 정권을 잡고 신정연이 여당으로 틀을 바꾸더라도 국정을 끌고 나가기에는 쉽지 않은 정국이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기존 여당과 야당의 계파 싸움으로 분열이 예상됩니다. 다음 정권에 힘을 실어주려면 이들 계파를 신정연으로 끌어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더는 개입하지 마십시오. 그건 심석우 후보와 박화수 대표가 풀어야 할 몫입니다. 우린 두 사람과 약속한 일을 지키는 선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하는 것이지, 정치에 우리가 직접 개입하면 국민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구태의연에 익숙한 정치인들이 신정연에 모여든다면 신정연은 기본 창당 목적을 잃고 국민들이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심석우와 박화수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경환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설립되면 우리와의 합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겁니다. 표면상으로는 잭이 거래하게 되겠지만, 린다가 총지휘를 맡으십시오.”

    “이미 SHJ기술연구소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KFX 개발과 대함 미사일, 신형 구축함 등은 ADD(국방과학연구소)와 공동기술 계약이 체결되면 바로 성과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탄도탄 방어시스템은 펜타곤의 항의가 예상되어, 일단 포함을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하기야 보잉과 공동개발한 전투기도 FMS로 묶었는데 탄도탄 방어시스템은 말하면 입만 아프겠죠. 우선은 미국과 한국, SHJ가 공동으로 개발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판매이익은 최상으로 산정하십시오.”

    좋은 무기라도 미국정부를 배제하고 개발, 판매할 수는 없었다. 존 매케인 정부와의 계약으로 판매의 자유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SM-3와 PAC-3를 능가한다는 자체 분석보고에도 알 수 있듯이 한국과 단독으로 개발한다면 미국은 입에 거품을 물 게 뻔했다. 고고도 탄도미사일 요격을 목적으로 개발된 SM-3는 일본과 공동으로 연구 개발된 미사일이었고 이번 SHJ기술연구소의 탄도탄 방어시스템이 본격 가동된다면 퇴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의 등장으로 북핵 위협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시스템이었지만, 경환은 SHJ의 이익을 무시하고 공짜로 넘겨줄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CIA와 MI6 상황은 어떻습니까?”

    MI6의 파렴치한 행동이 폭로되면서 노르웨이 정부는 영국과 국교단절까지 거론할 정도로 격앙된 자세를 보였고, 영국정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내각이 총사퇴하고 관련자를 사법처리 했지만, 노르웨이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급기야 여왕까지 나서 정중히 사과하고 경제적 이익을 포기한 후에야 국교단절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관련자 모두가 처벌되면서 현직을 떠났지만, 언젠가는 상처 입은 자존심을 되찾으려 할 겁니다. 내부 깊숙이 우리 사람을 심었고 전담팀을 구성해 숨소리조차도 밀착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방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핵융합에너지와 인공지능, 양자컴퓨터와 우주개발이 몇 년 안으로 본격가동될 것입니다. 이번 제이콥과의 싸움에서 가장 이득을 본 곳은 SHJ가 아닌 중국입니다. 미래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조용하다는 것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사이버 전력 증강과 고정 스파이를 동원해 SHJ타운에 접근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를 뚫을 실력은 되지 못하지만,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NSA를 이용하세요. 우리와의 기술합작으로 얻은 게 있으니, 밥값을 하라고 하면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경환의 지시를 받은 카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주에 건설 중인 핵융합실험로는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북한에서의 테러 정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핵융합실험로 사업에 참여한 중국은 핵심기술에 대한 접근이 막히자,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기술합작도 감지덕지하지 못한다면 빠지라는 SHJ의 강경한 대응에 꼬리를 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순순히 포기할 중국이 아니란 걸 경환은 알고 있었다.

    “끝났군요.”

    TV에선 심석우의 당선 확실을 보도하며 당원들과 환호하는 박화수 대표를 비추고 있었다. 심석우 집 주위엔 기자들과 지지자들 주민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뤘고, 카메라엔 불이 환하게 켜진 거실이 보이고 있었다.

    ‘띠리리, 띠리리.’

    위성전화기의 액정에 뜨는 번호를 확인한 경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심석우와 신촌 주막에서 의기투합한 지, 21년이 흘렀다. 마지막 남은 단추까지 채우게 된 경환은 기쁜 마음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고했어. 축하해.”

    ‘고맙습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넘볼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오늘까지는 매제로 대할 생각이야. 오늘 이후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내 존대를 받게 될 거야.”

    ‘상관없습니다. 제겐 영원한 형님이시지 않습니까?’

    심석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경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경환의 그늘을 벗어나서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밀어주는 경환의 마음을 인정하고부터 심석우는 개인적 욕망을 접고 진심으로 한국의 정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5년이란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형님, 주변국들로 인해 설움 받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 다음은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게 튼튼한 기초를 마련할 생각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초심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 때로는 강한 모습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타협과 화합을 이뤄야 할 거야.”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박화수 대표와 약속하신 건 지켜주십시오.’

    “뭐야?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약속한 거 빨리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거야?”

    수화기로 호탕하게 웃는 심석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예전의 심석우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경환도 그런 심석우가 밉지는 않았다. 특히, 아직도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박화수에게 경환은 그 이상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인수위가 결정되면 바로 진행이 될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대신 공짜는 없어.”

    ‘어련하시겠습니까? 한국도 가난한 나라는 아닙니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야지요. 그 대신 미국 애들처럼 무지막지하게 이득을 취하시진 말아 주십시오. 적정한 이윤은 반드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KFX 사업을 시작으로 이지스함 건조, 핵융합로 사업과 우주호텔 건설 등 심석우의 정권장악에 힘을 실어줄 계획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래는 거래였다. SHJ의 이익을 무시하고 한국에 퍼줄 생각은 애당초 경환의 머릿속엔 존재하지도 않았다.

    ‘형님, 제게도 선물 하나 주십시오.’

    “대통령이나 된 사람이 무슨 선물 타령을 하고 그래? 오히려 나한테 선물을 줘야 하는 게 아니야?”

    ‘다 가시진 분이 뭘 또 바라십니까? 내년 4월쯤 해서 힐러리 클린턴과 정상회담을 추진할 생각입니다. 힘 좀 써 주십시오. 그리고 철벽을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

    “정상회담이야 그렇다 치고, 철벽은 또 뭐야? 뭘 알아야 양보를 하든 말든 하지.”

    안타까운 현실이긴 했지만, 해외순방의 첫 국가를 미국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심석우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철벽을 양보해 달라는 말엔 경환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SHJ기술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탄도탄 방어시스템을 철벽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차피 미국을 무시하고 한국 스스로 시스템을 완료할 수 없지 않습니까? 미국의 참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이상으로 다른 걸 받아낼 생각입니다. 힐러리에겐 이 기술의 반 이상이 한국의 기술이라고 할 생각이니, 부탁 좀 하겠습니다. 형님.’

    “뭐야!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마. 이건 대통령이 아니고 완전 날강도잖아. 꿈도 꾸지 마라! 난 절대 동의 못 해!”

    ‘하하하. 형님 기자들 인터뷰가 있어 저 끊습니다. 그럼 동의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내가 언제 동의했다는 거야! 너 내가 물로 보이는 거야!”

    경환은 악을 써봤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경환은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고, TV에선 집 밖으로 나와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심석우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휴스턴의 겨울은 뼛속까지 아리는 강추위는 없었다. 그러나 쌀쌀한 기온은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일 년이 넘는 재활에도 하루나의 하반신은 큰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재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하루나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휠체어를 의지해 창밖을 바라보던 하루나의 눈가로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똑. 똑.’

    병실 밖에서 들리는 노크소리에도 하루나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멍하게 창밖을 응시하는 하루나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몇 번의 노크에도 반응이 없자, 조용히 문이 열렸다.

    “하루나, 오랜만이지요? 늦게 찾아와 미안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을 급히 감춘 하루나가 휠체어를 돌렸다.

    “사, 사모님. 한국에서 돌아오신지도 얼마 되지 않아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미안해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하루나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어요. 하루나를 마주한 지금도 솔직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이해해 줘요.”

    몇 번의 재수술과 재활기간에도 수정은 하루나를 찾지 않았었다. 머리로는 남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하루나를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다른 여자를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수정을 움직인 것은 재활에 대한 노력을 보이지 않고, 삶의 의지를 잃어가는 하루나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루나, 절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재활에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루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회장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이 힘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저는 하루나가 재활에 의지를 보여주길 바라요.”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받아들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멍한 하루나의 눈을 바라보는 수정의 마음은 애잔했다. 핏기조차도 사라진 하루나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루나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수정의 마음은 사방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대상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루나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에 다른 여자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죽기만큼 어려웠다.

    “하루나가 아니었다면, 회장님 아니 내 남편이 우리 곁을 떠났을 수도 있었어요. 난 그런 하루나를 인정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가 봐요. 이해해 주실 수 있어요?”

    “모든 건 제 잘못입니다. 사모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전 더욱 살아있을 의미를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죄송하지만, 제 마음을 완전히 정리할 때까지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휠체어를 잡고 있는 하루나의 두 손을 잡았다. 하루나의 손은 너무 차가웠다. 하루나의 손 밑으로 보이는 두 다리는 걷기를 포기해서인지 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한 뼈만 남아 있었다. 큰 결심을 했는지 숨을 크게 내쉰 수정이 하루나의 초점 없는 눈을 바라보았다.

    “호주로 가 주세요.”

    “사, 사모님. 저를 또······.”

    초점 없는 하루나의 눈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하루나는 한 달에 한두 번 병문안을 오는 경환을 매정하게 대하면서도 그날을 낙으로 삼고 지냈다. 자신의 유일한 낙까지 빼앗으려는 수정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오해하지 마세요. SHJ메디컬이 설립된 이유는 하루나를 회복시키겠다는 회장님의 의지라는 걸 모르지 않을 거예요. 그 SHJ메디컬이 SHJ테크놀러지와 같이 나노로봇을 이용한 신체회복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어요. 그러나 임상시험과 FDA의 승인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래서 까다로운 미국보단 호주에서 하루나를 치료하려는 거예요.”

    하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든 재활과 치료에도 자신의 하반신이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었고, 회복되더라도 자신의 삶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번만큼은 수정의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루나, 연구진의 말로는 2년 정도면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회복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2년만 참고 재활 의지를 보여주세요. 그런다면 남편의 곁에 저와 함께 하루나가 서는 걸 인정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사, 사모님.”

    “자신은 못 해요. 그러나 노력은 해 볼 생각이에요. 그러니 하루나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하루나의 두 손을 잡은 수정의 손등 위로 하루나의 눈물이 떨어졌다. 하루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 흐느꼈고, 돌아서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수정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며칠 후, 하루나를 태운 전용기가 호주를 향해 이륙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