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다시 사는 인생 - 259
미국의 대선은 너무 싱겁게 끝이 났다. 8년간의 공화당 집권도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 속에 미트 롬니는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힐러리 클린턴에게 너무 쉽게 백악관을 내 주고 말았다. 부부가 동시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타이틀보다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옴으로써 힐러리는 남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대선이 끝난 후 힐러리의 감사 전화를 직접 받은 경환은 그동안 미뤄왔던 NSA와 펜타곤과의 합작사업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며 힐러리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싱겁게 끝난 미국 대선과는 달리 한국의 대선은 혼전 양상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무리 SHJ가 뒤를 받쳐준다고는 하지만, 보수와 진보로 나뉘며 확실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여야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확실한 우위를 점한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지지율 2위로 시작한 심석우는 롤러코스터처럼 1위와 3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지지율로 인해 천국과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 지지율의 널뛰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TV토론이 끝나고 나서부터였다. 여야 대선 후보가 공동으로 심석우를 공격하고 나섰지만, 심석우는 이를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역공을 펴는 전략을 취했다. 가장 뜨거운 논란을 핀 복지정책과 관련해 심석우는 5년간 증세 없이 100조 이상을 투입하겠다는 여야의 복지정책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아울러 공약이 헛소리로 끝나지 않기 위해 매년 공약이행률을 국민에게 보고해 중간평가를 받자는 제안으로 여야 대선후보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다.
“심 후보님의 복지정책은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시는 분 같습니다. 평소 신정연의 당론이 정책을 통한 경쟁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복지에 대해 알고는 계시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5세까지 무상교육과 양육수당 지원, 4대 중증질환의 100% 건강보험 책임, 고교 무상교육과 저소득층 대학등록 무상지원 등의 복지 공약으로 재원 100조를 증세 없이 마련하겠다고 장담한 여당 후보가 심석우를 공격하고 나섰다. 이미 심석우에 의해 재원마련 방안이 무참히 박살 난 여당 후보의 얼굴엔 심석우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복지 정책을 검토하면서 많이 망설였던 게 사실입니다. 재원 마련이나 세수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들의 입맛에만 맞춰야 할지를 말입니다. 여기 계신 후보님들의 복지 공약은 너무나도 훌륭합니다. 대한민국의 복지 정책은 반드시 그렇게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은 정부의 재원으로는 그 좋은 정책을 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선 자기 것을 일부 포기해야만 합니다. 아흔아홉 개를 가진 자가 하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닌, 아흔아홉 개에서 하나를 빼 하나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만 진정한 복지국가의 시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말씀이시군요. 복지 정책이 없다는 걸 미화시키는 거 아닙니까?”
여당 후보의 질책성 발언에도 심석우는 카메라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박 후보님은 성격이 참 급하시군요. 후보님이 보시기에 복지에 관한 제 공약이 작을 수는 있지만, 모두 지킬 수 있는 공약입니다. 그러나 100조가 넘든 돈이 증세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저는 재원마련을 위해 서민의 부담이 증가하는 간접세는 놔두고 직접세를 조정하는 방법을 통해 복지국가로 가는 토대를 만들 생각입니다. 제가 다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복지국가로 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물려줄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진 자들을 끊임없이 설득할 생각입니다.”
심석우는 부자증세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법인세와 상속 등 재산과 소득에 관련된 직접세를 우회적으로 거론했다. 기득권의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심석우의 발언에 여야 대선 후보의 입가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미소는 단 하루 만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TV토론이 끝난 다음 날, SHJ아시아본사는 워런 버핏의 주장을 근거로 부유세의 긍정적인 측면을 들어 부의 재분배와 사회적 기여에 기업이 나서야 할 때라는 발표를 하고 나섰다. SHJ아시아본사의 발표에 맞춰 오성과 대현, 대후그룹 산하의 경제연구소에서 버핏세라고 불리는 부유세에 대해 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면서 반신반의하던 국민들의 시선은 서서히 심석우를 향해 바뀌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으로 경환의 전용기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전용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수정과 나란히 손을 잡고 내리는 경환을 뒤로 정우와 제니퍼의 모습이 보였다. 대선을 삼일 앞두고 한국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언론들의 추측성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지만, SHJ는 성탄절 연휴를 가족과 함께 보내려는 경환의 뜻이라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해 심석우와 연결지으려는 언론의 추측을 차단하고 나섰다. 서산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경환은 잭에게 입을 열었다.
“여론 플레이는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근소하게 앞서고 있지만, 여전히 오차범위 내에 있습니다. 개인 블로거를 중심으로 이번 대선에 심 후보가 탈락하면 한국과의 합작사업을 접고 SHJ아시아본사가 호주로 이전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여당 후보와 언론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해오고 있지만, 대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득권의 벽은 높았다. SHJ의 막대한 지원에도 심석우의 지지율은 오차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환의 미간은 급히 좁혀졌다. 심석우를 만나 힘을 실어주고 싶었지만, 선거법 위반에 휩싸일 수도 있었고, 정경유착을 걱정하는 국민들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자제해야만 했다. 도청방지 시스템을 확인한 알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환은 SHJ퀄컴에서 자체 개발한 위성전화기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제이, 제임스입니다.”
‘급히 한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는데, 한국 대선 때문인가?’
“뭐, 그렇게 되었네요. 지난번 부탁했던 일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대선이 자네의 뜻과 달리 쉽지 않다는 보고는 듣고 있었네. 이미 준비하고 있으니 몇 시간 후면 좋은 소식이 들어갈 거야. 일이 잘 풀리면 돌아와서 술이라도 한잔 사게.’
역시 제이는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힐러리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한국 대선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은 경환은 마지막 단추를 채우기 위해 제이의 지원을 요청했고, 제이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경환이 급격히 제이콥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이는 경환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박화수 대표에게 곧 소식이 있을 테니 준비하라고 일러두세요. 마지막 작전인 만큼,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는 말도 잊지 마시고요.”
“알겠습니다.”
잭이 위성전화기를 들어 박화수에게 연결을 시도하고 있을 때, 경환과 가족들이 탄 차량은 SHJ타운 정문을 통과해 저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경제 정책 실패와 원전 폭발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자민당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고, 그 중심엔 아베 신조가 있었다. 총리실에 밖을 바라보는 아베의 얼굴엔 기쁨이 충만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패배 이후, 70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은 발톱을 숨기고 와신상담을 하며 재기를 노려왔었다. 이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일본의 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중국은 경제력을 군사력에 쏟아부으면서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도달했고, 미국으로서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선 일본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때가 무르익었고 허리춤에 감춰둔 칼을 뺄 시기였다.
“총리, 미국에서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습니다. 미국도 결국엔 한국이 아닌 일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을 자극하는 건, 시기적으로 좋지 않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아니에요. 현 정권이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이 가장 적기입니다. 대선 후보들은 의견이 분분할 거고 적극적인 대처는 하지 못할 겁니다. 우린 다케시마가 분쟁지역이란 사실을 알림으로서 한국과의 외교에 우위를 점하고, 국민들에게 다케시마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만 하면 성공입니다.”
미국도 눈을 감아주기로 약조가 돼 있었다. 강한 일본을 외치며 경제부흥을 약속하며 얻은 자리였다. 금융완화와 엔저를 통해 내수를 증가하고 재정수입을 확대하는 경제 정책이 일시적으로 먹히면서 고질적인 디플레이션을 잡는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이젠 한국과의 분쟁을 통해 강한 일본을 국민들에게 인식시켜 그동안 감춰왔던 칼을 빼 들기만 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심석우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심석우 뒤에 SHJ가 버티고 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습니다. SHJ가 나선다면 골치 아플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SHJ도 결국은 미국기업입니다. 기업이 외교 문제에 관여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한국은 다케시마에 대응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하니, 우리를 도와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린 그런 한국정부를 이용해 실익을 얻으면 됩니다. 적어도 이십 년 내에는 다케시마를 최소한 공동관리 구역으로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음흉한 미소를 띠는 아베는 급히 수화기를 들어 명령을 하달했다. 아베의 명령이 떨어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헬기 한 대가 함정에서 이륙해 빠른 속도로 KADIZ(한국방공식별구역)를 넘어 독도 인근 54KM까지 접근하기 시작했다.
신정연 당사로 기자들이 급속히 모여들고 있었다. 근소한 차이지만, 지지율 1위를 보이고 있는 심석우의 갑작스러운 기자회견 소식에 9시 뉴스까지 뒤로 밀리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격앙된 모습으로 단상에 선 심석우가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금일 오후 17시 30분경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헬기 한 대가 KADIZ를 넘어 독도 인근 21KM까지 접근한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 공군의 F-15K가 출격하자 헬기가 기수를 돌렸지만, 일본도 제3 항공대의 F-15J를 출격시켜 무력시위를 하다 기수를 돌렸다고 합니다. 이런 중차대한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일본의 후안무치에 경고도 없이 덮으려는 정부가 저는 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대선에 대한 중대한 결단이 있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던 기자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기자들을 살피던 심석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고 기자들은 심석우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사방으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독도는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 정부는 독도를 실효지배하는 곳은 대한민국이고 100년을 실효지배하면 사법재판소도 영토를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국가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분쟁이 있는 영토는 천 년을 지배하더라도 실효지배 인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은 철저하리만큼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또한, 정부는 우리가 대응하면 우리 스스로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논리로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무대응을 철저히 계산 속에 넣은 상태로 독도를 공동관리 구역으로 설정하기 위해 치밀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단상 뒤의 스크린으로 일본어로 표기된 기밀문서가 나타났다. 선명한 한국지도 위로 독도와 울릉도 사이가 긴 타원형으로 칠해져 있었고, 남해는 제주도까지 포함해 칠해져 있었다. 기자들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일본어 전공자인 한 기자의 외침이 들렸다.
“뭐, 뭐야? 저거 잠수함 전대의 작전 구역 표시잖아!”
“맞습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잠수함 전대의 극비 문서입니다. 저는 이 문서를 입수하고 조용히 국방부에 전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 도발에도 숨기기에 급급한 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공개를 결심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제집 앞마당 드나들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아울러 이 문서가 조작된 문서라면 저는 지금이라도 당장 대선 후보를 사퇴하고 법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심석우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SHJ시큐리티에서 전달한 문서였고, 이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헛소리가 들리면 더 강력한 문서를 연이어 공개할 생각이었다. 일본은 빼도 박도 못하는 외통수에 걸린 상태였다.
“저는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제가 정부의 수반이 된다면 일본의 독도 도발에 강력한 대응을 하겠습니다. 일차적으로 독도의 경비를 경찰에서 해병대로 교체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이차적으로 동해 1함대의 전력을 이지스함과 강습상륙함, 잠수함을 포함한 기동전단 규모로 확대해 동해를 침범하는 어떠한 적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해양기지 건설과 입도 지원시설을 확대해, 더는 조용한 외교로 일본의 기를 살려주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젠 도발엔 격퇴로 맞불을 놓아야 할 때입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일본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와 공동으로 이 문제를 대처하길 주문합니다.”
말을 마친 심석우는 질문을 받지 않고 사라졌고 자주국방을 외치던 심석우가 일본을 향해 칼을 뺐다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가 각 신문사로 빠르게 전송되고 있었다. 여당과 야당 후보들은 심석우의 기자회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TV로 방영되는 심석우의 얼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부터 정부와 여당을 중심으로 주변국을 자극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이라는 성명으로 심석우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지만, 오히려 심석우의 지지율은 오차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