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0화 (167/264)
  • #190

    다시 사는 인생 - 190

    청와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환은 연평해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의 영결식 참석을 강행했다. 정부 대표로는 해군참모총장만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영결식은 유가족들의 오열 속에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고, L & K 재단은 전사자 2억 원, 부상자에 1억 원이라는 금액을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제2 연평해전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 추모비와 전승탑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심석우 본부장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 한국 정부는 즉각 우려를 표하며, L & K 재단을 자중시키라는 내용의 공문을 SHJ아시아본사에 보내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그러나 정부의 공문을 받은 SHJ아시아본사는 재단의 운영은 재단 독자적인 문제일 뿐, SHJ가 관여할 사항이 못 된다는 뜻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혀 한국정부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연평해전에 대한 정부의 대처 미흡을 지적하는 토론이 온라인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L & K 재단이 발 빠르게 움직이자 국민들의 뇌리에는 이 일을 주도한 심석우란 인물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길어진 한국방문 일정을 마치고 경환은 휴스턴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겨우 몸을 실었다. 판을 깔아 줬으니 이후의 일은 심석우의 능력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백악관의 독촉이 심하다고 합니다. 부회장이 노심초사네요.”

    책을 접고 잠을 취하려던 경환 곁으로 짙은 향수를 풍기는 하루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기장에게 말해 방향을 워싱턴으로 돌리라고 하시고 휴스턴에 연락해 준비하도록 지시를 내리세요. 매도 빨리 맞는 게 좋겠지요.”

    하루나가 기장석으로 향하자, 경환은 앨 고어와의 만남을 눈에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SHJ가 커지긴 했지만, 앨 고어의 관심 밖이라 생각했었다. 앨 고어가 급히 만남을 요청한 거라면 한국에 설립한 기술연구소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 경환은, 노련한 정치가인 앨 고어와의 만남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장고를 거듭했다. 이륙신호가 떨어졌는지 전용기는 서서히 인천공항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고된 한국 일정에 피곤했던지 경환은 몸을 좌석 깊숙이 파묻으며 긴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 제임스 리는 도착했나?”

    “네, 공항에 도착해 곧장 백악관으로 향했다는 보고입니다. 곧 도착할 시간입니다.”

    미국기업인인 경환의 돌출 행동으로 한국 정부의 항의를 받은 앨 고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의 해군력 증강은 일본과 중국을 자극해 군비경쟁의 명분을 제공한다는 분석으로 SHJ의 자중을 요청했지만, SHJ와는 무관한 경환의 개인적인 기부라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었다.

    “확실한 경고를 보내야만 합니다. 한국계인 제임스 리 회장이 한국정부와 각을 세우면서 한국정부의 항의가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허, 그것참, 고약한 인사야, 제임스는.”

    앨 고어는 팔짱을 낀 채, 집무실 밖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 고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경환을 제어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IT업계가 SHJ를 중심으로 뭉쳐있었고, 공화당과 텍사스 주 정부에선 SHJ에 대한 탄압이 이뤄진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대통령님, 제임스 리 회장이 도착했습니다.”

    비서실장인 다니엘 뒤로 동양계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훤칠한 키의 경환이 환한 웃음을 보이며 앨 고어에게 다가갔다.

    “대통령님,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SHJ를 맡고 있는 제임스 리입니다.”

    “하하하, 백악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리 회장과는 꼭 한번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악수를 건네는 앨 고어의 손을 잡은 경환은 처음 방문한 대통령 집무실이 그렇게 화려한 건 아니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집무실이 화려하고 규모도 있었지만, 전 세계를 주무르는 미국의 심장이라는 무게감은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의를 걸치지 않은 와이셔츠 차림의 앨 고어는 경환을 자리에 앉히고는 얼굴에 미소를 그린 채 경환의 인상을 살폈다.

    “제임스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영광입니다. 대통령님.”

    친근감을 표시하려는 앨 고어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경환은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 턱에 걸쳤다. 건방진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이미 편한 복장을 한 상태에서 경환을 맞이한 앨 고어도 경환의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잠시 두 사람의 기 싸움이 흐른 뒤, 앨 고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한국방문 시 있었던 제임스의 돌발행동으로 내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습니다. L & K 재단이 SHJ와 상관이 없다 해도 제임스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닙니까?”

    “재단의 본부장이 제 매제이긴 하지만, 사람이 워낙 강골이라 제 말이 먹히지 않습니다. 저도 이번 일에 대해 나름대로 주의도 주고 경고도 했지만, 제삼자는 빠지라며 핀잔만 잔뜩 얻어먹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질문의 핵심을 피해 가는 경환이 괘씸했지만, 사소한 일에 정력을 낭비할 생각이 없던 앨 고어는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도 경환을 바라보는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앨 고어의 눈빛이 반짝였다.

    “제임스는 현 미국 경제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직접적인 도발보다 우회적인 표현으로 경환의 의사를 확인하려는 앨 고어의 질문에 경환은 긴장했다. SHJ를 미국의 금융위기와 경기 하락의 돌파구로 삼으려는 앨 고어의 꼼수가 눈에 보였지만, 경환은 쉽게 앨 고어의 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미국의 약점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20%의 고금리 정책을 편, 볼커 쇼크로 제조업이 무너지며 중산층이 붕괴했다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후 미국의 경제 축은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빠르게 자리이동을 하고 소비 위축을 자산효과로 해결하기 위해 저금리 정책으로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이 발생하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임스의 주장이 특이하군요.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13%를 넘어가던 인플레이션을 잡고, 이후 경제 성장의 동력을 제공했다는 평가로 FED(연방준비제도) 의장 중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제 말을 오해하셨나 봅니다. 볼커의 고금리 정책은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볼커가 주장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규제한 글래스스티걸법이 99년 전임 정부에 의해 폐지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정적이던 미국의 주택가격이 97년부터 들썩이기 시작하면서 은행들을 규제한 글래스스티걸법이 폐지되자, 저금리를 앞세워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 문제엔 전임 정부의 주택정책인 ‘NO INCOME, NO JOB, NO ASSET’가 큰 몫을 담당했는데 수입과 직업, 자산이 없어도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게 만들어 부동산이라는 파이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럼 제임스는 내가 주장한 OWNERSHIP SOCIETY(주택소유 장려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이겠군요.”

    경환은 착잡한 심정에 앨 고어의 시선을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었지만,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자신의 기억으로 OWNERSHIP SOCIETY는 조지 부시의 정책으로 알고 있었는데 앨 고어가 사회보장제도 정책에 관한 연설에서 이 용어를 사용할 줄은 몰랐었다. 결국, 조지 부시나 앨 고어의 경제정책은 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정책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니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은행들의 무분별한 대출과 금융기관들을 정부가 제대로 통솔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의견 잘 들었습니다. 백악관의 싱크탱크가 제임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환은 씁쓸한 미소를 날렸다. 조지 부시의 손에 떨어질 지금의 자리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앉혀준 자리였지만, 앨 고어의 경제정책은 조지 부시와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경환은 실망하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의 의견 중에 제조업의 붕괴가 소비위축을 가져왔다는 것엔 나도 동감을 합니다. 플랜트와 IT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SHJ가 자국 내의 투자에는 등한시하면서 한국의 투자를 늘리는 것에 우려하는 시각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지적을 제임스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경환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 질문을 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앨 고어가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이란 자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SHJ라는 기업 하나는 날릴 수도 있는 자리였기에 경환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휴스턴만으로 전 세계시장을 아우른다는 게 어렵다는 걸 대통령님도 아시리라 봅니다. 새롭게 확대되고 있는 아시아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IT 강국인 한국투자가 SHJ의 세계경영이 부합한다고 판단해서입니다. SHJ는 기술과 디자인 개발에 작년 한 해만 해도 23억 불을 미국에 투자했습니다. 한국보다 결코 낮은 금액이 아닙니다.”

    “좋습니다. 다 이해한다 쳐도 어째서 기술연구소를 미국이 아닌 한국에 설립했는지, 도대체 그 기술연구소에서 무엇을 연구하는지 설명이 필요할 거 같군요. 미국은 조국을 배신한 자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할 겁니다. 제임스.”

    웃음을 거둔 앨 고어의 눈빛은 사납게 빛났다. 청산유수처럼 논쟁의 핵심을 피해 가는 경환의 답변에 앨 고어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공화당과 텍사스 주 정부의 압력 따위는 더는 앨 고어의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경환은 앨 고어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SHJ가 투자하는 핵융합로 사업은 성공 가능성이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연구가 성공한다면 그 이익은 상상을 초월하겠죠.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본국에서의 핵융합로 연구가 막힌 상태에서, ITER 가입이 무산된 한국은 좋은 파트너였습니다. 저는 SHJ의 보장 되지 않은 미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국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한 겁니다.”

    경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한국에서의 연구는 미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해, 클린턴 정부에 핵융합로 사업참여를 타진했고 예상대로 클린턴 정부는 SHJ의 제안을 반려시켰다. 경환의 반격에 앨 고어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경환은 서둘러 다음 말을 이어갔다.

    “KSTAR에 대한 투자는 불투명한 한국정부의 관행에 대비해 기술을 SHJ기술연구소로 옮기기 위한 전략입니다."

    "제임스 말 대로라면 SHJ가 연구에 성공하면 이 기술은 미국의 것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한국정부의 지분도 있는 만큼 원천기술 사용에 대한 양국의 협상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의 한국은 미국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지 않습니까?”

    미국 정부를 상대로 막가파식의 싸움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경환이 타협안을 제시하자, 사나웠던 앨 고어의 눈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북한과의 대치상황과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려면 미국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는 한국의 상황을 앨 고어는 잘 알고 있었다.

    “제임스의 말을 믿기로 하죠. 마지막 제안이 있는데, 주가가 살아나지 않아 고민입니다. 이 기회에 SHJ홀딩스를 상장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경환은 썩은 미소로 앨 고어를 쳐다봤다. 물에 빠진 놈 건져냈더니 봇짐 내놓으라고 멱살 잡는 앨 고어에 욕지거리가 목에까지 차올랐다. 린다에 의해 경영권의 피해 없이 최대의 이익을 보기 위한 기업공개 대책을 미리 연구해 놓은 것이 경환을 태연하게 만들었다.

    “대통령님께서 제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SHJ퀄컴의 지분 중 35% 정도는 상장할 의향이 있습니다.”

    SHJ 계열사의 지분을 관리하는 SHJ홀딩스를 지금 상장은 하늘이 무너져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앨 고어 또한 SHJ구글을 상장시켜 정부의 인터넷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술수가 SHJ퀄컴을 들고 나온 경환의 발 빠른 대책에 막히는 순간이었다. SHJ퀄컴은 MS엔 미치지 못하지만, IBM의 시가총액인 1,450억 불은 넘는다는 금액적인 부분보다도 철옹성이었던 SHJ가 앨 고어 자신의 손에 의해 빗장이 풀렸다는데 의미를 둘 생각이었다. 또한, 한번 풀리기 시작한 빗장은 계속해서 열린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임기 내에 SHJ의 빗장을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자신감에 빠져들었다.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저것 준비가 필요한 만큼 최소 10개월 후에나 증권거래위원회에 IPO(기업공개)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SHJ퀄컴을 알몸으로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떡고물을 분산한 후 IPO를 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건 IT버블 붕괴로 추락한 주가가 내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이 면담이 끝나면 같이 브리핑룸에서 기자들과 좋은 시간을 보냅시다.”

    “대통령님, 아직 제 조건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피 같은 SHJ퀄컴을 상장해서 얻을 수 있는 자본은 최대 6백억 불로 적지 않았다. 그러나 35%이긴 하지만, 경영권이 분산된다는 것과 내부 정보를 공개하며 공시 의무를 진다는 것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앨 고어에 먹이를 준 만큼 받아낼 건 최대한으로 받아내야만 직성이 풀릴 거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