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89화 (166/264)

#189

다시 사는 인생 - 189

“얘, 아버지 기다리신다. 내려와서 밥 먹어라. 뭔 술을 그렇게 마시니?”

“씻고 내려갈게요.”

시차도 문제였지만, 이형우와 김상우가 건넨 술을 넙죽넙죽 받아마신 게 탈이었다. 12시 넘어서까지 두 사람에게 붙잡혀 있던 경환은 서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잠에 취해 버렸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휴스턴 저택의 축소판으로 지어진 저택에는 이미 경환의 부모님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L & K 재단 이사장인 장인은 아직 서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제 좀 늦었습니다.”

“아니다. 사내가 일을 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는 거지. 어서 앉거라.”

미국에 건너간 이후로 과음하지 않던 경환은 부대끼는 속을 콩나물국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저택을 관리할 집사와 도우미들이 있었지만, 아들의 국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끓여주길 원했던 경환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콩나물을 다듬었다. 경환이 국그릇이 빈 걸 확인한 경환 어머니는 자신의 국그릇을 경환에게 넘겨주며 식탁에 앉았다.

“엄마, 국이 아주 시원해서 좋네요.”

“내가 말년에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 아들 두 놈을 다 미국으로 보내고, 손주들도 마음대로 못 보니. 어휴, 내 팔자야.”

“거, 당신은 뭔 불만이 그렇게 많은 거야? 정우 어미가 그렇게 오라고 해도 안 간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해?”

“친구들이 여기 다 있는데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엘 어떻게 가요? 그냥 그렇다는 소리예요.”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경환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전생의 경환은 부모님을 살필 수 없었다. 아내와 시댁과의 불화는 경환을 항상 난처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이혼과 사업실패로 대못이 가슴에 박힌 부모님은 차례로 세상을 등져, 경환에겐 천추의 한으로 남았었다. 지금 이런 부모님의 투정도 경환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앞으로 방학이 되면 애들을 한국으로 보낼게요.”

“제발 좀 그래라.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정우하고 희수 원 없이 보게 좀 해줘라. 그리고 승연이는 결혼 소식 없는 거니?”

“오늘 만나 보려고요. 승연이가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그동안 신경을 안 썼거든요.”

말은 마친 경환은 밥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국사 발을 들어 단번에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연은 김혜리와 조심스럽게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지만, 바쁜 일상으로 인해 서로 만남을 가질 수는 없었다. 느닷없이 승연의 앞에 나타난 김혜리를 경환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고 그동안 SHJ시큐리티를 통해 김혜리와 관련된 모든 걸 조사한 후에야 의심을 풀 수 있었다.

“밥 다 먹었으면, 같이 출근하자.”

“네, 아버지.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저녁에 손님과 같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라. 저녁엔 너 좋아하는 비지찌개 끓여 놓을 테니, 일찍 들어와라.”

아직 아시아본사 사옥이 완공되지 않아 SHJ퀄컴 한국공장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본사로 출근한 경환은 SHJ엔지니어링 고문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모셔다 드린 후, 자신의 임시 집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루나가 건네주는 진한 커피를 마시며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인 아시아본사 사옥을 바라보고 있는 경환에게 하루나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김혜리 변호사가 왔습니다.”

하루나의 뒤에 서 있던 김혜리를 경환은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사진과는 다르게 늘씬한 미인형인 김혜리를 경환은 미소로 반겨 주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경환입니다.”

“회장님을 뵙게 돼 영광입니다. 김혜리 변호사입니다.”

경환의 권유에 자리에 앉은 김혜리의 몸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올해 세계갑부 순위를 선정한 포브스에선 갑부 1위를 공석으로 놔두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그 이유는 SHJ의 기업가치를 추산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정확한 경환의 자산을 확인할 수 없다는 설명과 함께 최소 천억 달러는 넘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 보냈다. 포브스도 산정하지 못하는 막대한 재산을 가진 사내를 눈앞에 둔 김혜리는 회장비서실의 호출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보다 미인이시군요. 저녁에 집으로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경환의 뜬금없는 소리에 김혜리의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가정적이라고 소문난 경환도 역시 사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김혜리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SHJ의 능력으로 봤을 때, 자신의 변호사 생활은 순탄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김혜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재벌들의 여성편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마수가 자신에게 뻗어오자 김혜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더 드리자면 회장님의 말씀은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하하하.”

크게 웃는 경환이 뻔뻔하다고 생각한 김혜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물잔이라도 앞에 있으면 경환의 얼굴에 끼얹고 싶었지만, 김혜리는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위해 치마를 손으로 꽉 쥐었다.

“사귄다는 사람이 SHJ구글에 있는 스캇 리라는 남자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김혜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자신이 경환의 청을 거절한다면 스캇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혜리는 경환의 뜻대로 움직일 마음이 없었다.

“김 변호사가 뭘 오해했나 본데, 스캇 리, 아니 이승연은 내 친동생입니다. 자립심이 강해 형 도움을 마다하고 있지만요.”

“네. 네?! 스캇이 회장님 친동생이라고요?”

“사실입니다. 제 부모님이 김혜리 변호사를 만나보고 싶어 하시니 시간이 되면 저녁을 같이 합시다.”

김혜리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의 초점을 잃어갔다. 장거리 연애로 서로에 대한 애정 전선에 살짝 문제가 생기면서, 이번 여름휴가에 맞춰 휴스턴으로 승연을 만나러 가기로 계획한 김혜리는 승연이 경환의 친동생이란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승연에 대한 배신감으로 동공이 사방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제 동생을 잡아 족치지 마세요.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려고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는 놈입니다. 그리고 꼭 저녁 시간 비워 두세요. 저녁 메뉴는 비지찌개입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제가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스캇, 아니 이승연, 이 새끼 너 오늘 나한테 죽었다고 복창해라.’

김혜리는 풀죽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속으로 승연을 잡아먹을 거처럼 욕설을 난무하고 있었다. 경환은 김혜리의 속마음도 모른 채, 수줍어하는 김혜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경환이 김혜리와의 대화를 이어가는 순간, 잭과 알이 노크도 없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회장님, 지금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잠시…….”

잭은 김혜리를 의식하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날짜를 확인한 경환은 좀전의 밝은 미소를 거둬들이고 나지막이 김혜리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으니, 이따 저녁에 보기로 합시다.”

눈치 빠른 김혜리가 자리를 벗어나자, 경환은 서둘러 잭과 알을 가까이 불렀다. 빗겨가기를 바랐지만, 역사는 경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북한이 사고를 쳤나 보죠? 대사관에서 급히 연락을 취한 걸 보면.”

“회, 회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북한 해군이 연평도 앞바다에서 한국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한국 해군의 피해가 상당하다는 정보입니다. 미국 시민들은 모처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는 대사관의 전문입니다.”

장비에서 월등한 한국 해군이 당했다는 것은 북한의 준비가 상당히 치밀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직접적인 교전을 자제하고 북한 경비정을 차단기동을 통해 밀어내는 방식의 교전규칙이 한국 해군의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것이 경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회장님, 급히 한국을 벗어나는 걸 제안 드립니다. 경호팀은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잭의 말을 받아 알이 급히 한국을 떠날 것을 종용하자, 경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조국이 없는 한국인은 결국 세상의 천대를 받으며 떠돌이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경환은 알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어딜 벗어난단 말입니까! 내가 비록 독수리 여권을 들고 다닌다지만, 엄연히 한국의 예비군입니다. 알은 SHJ시큐리티를 통해 사태를 파악하시고, 잭은 SHJ타운에 속한 외국계 직원들의 동요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세요. 그리고 저는 사태가 종료되기 전까진 한국을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회, 회장님. 여긴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는 부모님과 함께 잠시 자리를 피하십시오.”

“잭, 제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서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십시오.”

경환의 결심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경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경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더 이상의 도발은 없을 거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전쟁의 위험 속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내 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전쟁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면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느냐는 자신 내면의 질문엔 경환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경환도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환은 급히 티비를 켰지만, 티비에선 저녁에 있을 터키와의 3.4위전에 초점을 맞춰 분석자료만 방영할 뿐, 연평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남북 교전에 대한 보도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방아쇠를 놓지 않던 해군 병사의 모습이 눈에 서리며 경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청와대는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가 소집된 가운데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오전 9시 45분 북한 경비정 2척이 연평도 서해 7마일 해상에서 NLL을 침범하며 남하를 시작했고, 이에 우리 해군은 참수리 357, 358 두 대를 출동 경고방송과 함께 차단기동을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 25분 아무런 징후 없이 북한 경비정은 357호를 향해 85mm 포를 시작으로 선제공격했고, 이에 357, 358호의 반격과 함께 초계함이 교전에 가담, 10시 43분 북한 경비정이 퇴각하면서 교전은 중지되었습니다.”

김환기는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북한과의 화해모드를 조성하기 위해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추진하던 대북지원이 빛을 바라는 순간이었다. 김환기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았다.

“우리 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357호에 승선한 장병 중 5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하고 357호는 침몰 되었습니다. 부상자 중에는 중상자가 많아 전사자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평택 2함대 사령부는 초계함과 구축함을 증강해 북한의 도발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교전 내용에 대한 보고를 마친 김남현 국방장관의 이마엔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2주 전 명령만 하달되면 발포하겠다는 북한 서해함대의 교신을 감청하고도 남북한 화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정보를 묵살했던 자신의 실책을 덮기에 급급했다.

“이렇게 피해가 컸던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5단계로 이뤄진 교전수칙이 기습적으로 이뤄진 북한 경비정의 공격에 취약점을 드러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해군의 교전수칙을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언성을 높이는 김환기의 질문에 김남현의 대책은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들 집 나간 소가 다시 들어오리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김남현에겐 이 대답 밖엔 상황을 돌파할 마땅한 대안이 손에 쥐어있지 않았다.

“지금 분위기에 내일 있을 일본 방문을 감행하는 건 무리라고 봅니다. 일본에 우리의 상황을 잘 설명해 보세요.”

“대통령님, 교전은 중단되었고 더 이상의 도발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만큼, 국가 간의 신뢰를 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상황을 위험하다고 인식시키게 될 거고, 특히 6.15선언으로 어렵게 이룩한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강력한 항의를 보내고 부상자 방문은 일본 방문 이후로 미뤄도 크게 문제 되지 않으리라고 판단되니 내일 일본 방문은 예정대로 강행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김환기는 통일특보의 말에 망설였다. 국민의 여론을 생각해야 할지, 국가 간의 신뢰를 생각해야 할지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었던 김환기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청와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무렵, SHJ도 매우 급한 행보를 보였다. 수장이 전쟁의 위험성이 높아진 한국에 나가 있다는 사실에 휴스턴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전 임직원이 비상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서산의 SHJ타운은 그룹 회장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북한의 전면적인 도발은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국정부는 대통령의 방일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보도와 함께, 이번 사태를 우발적인 교전으로 잠정 결론 낸 상황입니다.”

알의 보고를 받은 경환은 착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 우발적이든 계획적인 도발이든 조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장병들은 추앙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과의 충돌사고를 뉴스를 통해 들은 심석우가 쏜살같이 서산으로 내려왔다.

“형, 형님. 형님 말씀대로 북한의 도발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마라. 너는 전사 장병 영결식에 나와 함께 참석하는 걸 시작으로 전사장병과 부상장병의 지원에 신경을 쓰도록 해. 누누이 말하지만, 너 자신을 버리고 진심으로 다가갈 때 민심은 움직인다는 걸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저도 재단 일을 하면서 느끼는 바가 컸습니다.”

이번 사태를 이용해 심석우의 입지를 다지는 작업을 시작한다는 게 산화한 장병들에 죄송스러웠지만, 경환은 죽어서 용서를 빌 생각이었다. 한국은 연평해전의 긴박함과는 무관하게 터키와의 월드컵 중계에 온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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