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다시 사는 인생 - 187
2002년 6월의 한국은 대한민국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온통 붉은색으로 뒤덮여있었다.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대표팀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며 16강전에 올랐고, 이탈리아와 스페인과의 16강, 8강에 힘을 소진한 한국대표팀은 독일과 맞붙은 4강전에서 0:1로 분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승에 진출할 수는 없었지만, 거리를 오가는 국민들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동북아 허브공항을 꿈꾸며 2001년 개항한 인천공항으로 SHJ 전용기 한 대가 착륙하고 있었지만, 월드컵에 빠져있던 한국언론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인천공항을 빠져나온 차량 행렬은 경찰차의 선도에 따라 서해안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주행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곧 서산에 도착합니다. 피곤하시면 일정을 조정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일정대로 준비해 주세요.”
30대 중반의 하루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고혹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경환은 스커드 사이로 쭉 뻗어 있는 하루나의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하루나,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너무 튕기는 것도 좋지 않아요.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도 이젠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해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회장님.”
하루나가 자신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경환은 하루나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승연과 연결을 시켜주려 노력을 했지만, 하루나가 마음을 열기도 전에 승연은 사고를 치고 말았다. 경환의 말을 단칼에 끊어버린 하루나는 일정표를 다시 살피기 시작하자 경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찻장 밖으로 보이는 서해로 시선을 돌렸다.
군인과 SHJ시큐리티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검문소를 지나자 아직도 한참 공사를 진행하는 SHJ타운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SHJ타운의 내부는 사진과 도면으로 봐왔던 거 이상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아직 아시아본사 사옥이 완공되지 않았지만, SHJ퀄컴의 생산공장과 기술연구소는 이미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경환이 탑승한 차량은 대규모로 조성된 기술연구소로 향했다.
“회장님, 갑자기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하하, 황 소장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손님도 아니고 무슨 준비가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따로 만나볼 사람이 있으니 자세한 얘기는 잠시 후에 나눴으면 합니다.”
기술연구소 정문으로 마중을 나온 황정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경환은 기술연구소 내에 임시로 만든 집무실로 향했고 경환의 집무실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 제가 일정이 바쁘다 보니 이리로 모셨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아닐세. 애들하고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요즘 나이가 들다 보니 정우와 희수가 무척 눈에 밟히더군.”
“형님, 자주 좀 나오십시오. 삼 년 만에 나오시니 이사장님도 섭섭하신 거죠.”
장인인 김철수에 고개를 숙인 경환은 심석우를 향해 인상을 썼고 뻘쭘해진 심석우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일정이 바쁜 경환은 자리에 앉자마자 급히 말을 꺼냈다.
“재단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보고는 수시로 받고 있습니다. 직업훈련원이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고 들었는데, 실력들은 어떻습니까?”
“여기 심 본부장이 열성으로 관리한 덕분에 일반 이공계 대학보다 실무적으론 우수하다고 판단하네. 각 기업체에서도 졸업생을 끌어가려고 하지만, 졸업생 대부분이 SHJ에 입사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네.”
“실력 있는 인재를 SHJ가 마다해선 안 되겠죠. 이번 첫 졸업생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경환이 자신의 지분을 기부해 설립한 L & K 재단은 실력은 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학업을 하지 못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직업훈련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말이 직업훈련원이지 웬만한 대학 못지않은 시설과 강사진을 구성해 이론과 실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어 각 기업이 주목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전 학년 기숙사 생활로 운영하고 있는 직업훈련원은 학생들에게 무료로 운영되지 않았다. 숙식비와 학비를 포함, 일 년 5백만 원의 비용은 사실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지만, 전체 학생에 대한 학비를 L & K 재단에서 먼저 대납해 주고 졸업 후, 15년 동안 무이자로 상환하도록 해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이 제도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피해의식을 주지 않고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한 경환의 제안으로 시도된 방식이었다.
“이 서방, 올해부터 직업훈련원 외에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서울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투자할 생각인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좋은 생각이십니다. 미래를 주도할 신소재 공학과 로봇 산업, 그리고 우주항공 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좋은 프로젝트라면 SHJ와 연계한 공동 연구를 추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매제는 이제부터 소외 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재단을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해 봐.”
심석우의 얼굴에 긴장감이 흘렀다. 재단 일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심석우의 가슴 한구석에는 아직 정치가의 꿈이 남아있었다. 직업훈련원을 지원하면서 한국에서 소외당하는 계층에 대한 문제를 몸으로 겪어가고 있는 심석우는 서서히 바뀌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형님은 제가 준비되었다고 보십니까?”
“아니, 아직 멀었어. 앞으로 십 년이 매제에겐 중요할 거야. 십 년 앞을 위해선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매제에게 말하고 싶은 건 내가 항상 자네를 지켜보고 있다는 거야. 날 실망하게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
경환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자와 술 문제로 정치판을 떠난 심석우의 심성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 경환은 매제인 심석우가 알면 반발을 했겠지만, SHJ시큐리티를 통해 심석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었다. 재단활동과 직업훈련원을 통해 심석우의 심성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경환은 심석우와 약속한 정치 입성을 준비시킬 생각이었다.
“허허, 심 본부장에 대해 그런 안배가 있을 줄 몰랐었네.”
“아버님, SHJ에서 연구하는 기술이 성공한다면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입니다. 그걸 위해선 정치권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지금의 정치행태로는 우리 것도 지키지 못하는 구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심 본부장이 준비된다면 한번 도전을 해 볼까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형님.”
심석우는 급히 자세를 고쳐잡았다. 예전이었다면 경환의 말을 한 귀로 흘렸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십 년 전 신촌의 허름한 주막에서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계획을 짧은 시간에 이룬 경환이라 그런지 심석우는 경환의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가 얻은 정보로는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고. 99년 있었던 제1연평해전의 패배를 갚겠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혹시라도 북한의 도발에 우리가 피해를 보게 된다면, 자넨 L & K의 힘을 총동원해서 피해복구에 나서도록 해.”
“형,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북한이 다시 도발해 온다니요?”
“아버님,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누는 얘기는 절대 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 됩니다. 매제도 여기서 나눈 대화는 정아한테도 말하지 말고. 아니길 바라지만, 미국 쪽 정보기관에서 나온 정보야.”
경환은 며칠 내로 발생할 북한 해군의 도발로 큰 인명피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단지, 미국에서 얻은 정보라고 말을 얼버무렸지만, SHJ의 능력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다.
“매제가 서서히 전면에 나선다면 정부와 각을 세울 수도 있을 거야. 물론 SHJ와도 각을 세우게 될 거고. 그렇다고 기죽지 마라. 내가 뒤에서 있는 힘껏 지원해 줄 테니까. 그리고 조만간 사람을 붙여줄 테니, 십 년 대계를 준비해 보자고.”
경환은 SHJ와 심석우를 분리해 정경유착에서 자유롭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혈연관계인 자신과 심석우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심석우가 풀어가야 할 문제였기에 심석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소장님,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SHJ타운에서의 생활은 어떠십니까? 혹시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전혀 없습니다. 단지 SHJ타운 밖을 나설 때 경호원을 대동해야 한다는 것이 좀 불편하지만, 시설이나 지원 면에서 전혀 부족한 게 없습니다.”
황정욱은 진심으로 경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SHJ타운에 건설된 기술연구소는 다른 어느 건물들보다도 규모와 장비, 보안이 잘 되어 있었다. 핵융합 연구소와 원자력 연구소의 인력까지 합류한 기술연구소는 분야별로 연구진을 할당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방연구소의 연구원들도 합류한 상태였다.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라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연구소를 살펴보시겠습니까?”
경환은 황정욱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술연구소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하 5층, 지상 3층 규모의 기술연구소를 돌아보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지만, 경환은 황정욱의 설명을 경청하며 기술연구소의 구석구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길 원했다.
“여긴 핵융합로 제작을 연구하는 부서입니다. 오성중공업과 대현중공업의 연구원들까지 합류한 상태로 연구에 속도가 붙은 상태입니다. 독자적인 핵융합로 개발은 2년 후면 구체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혹은 ITER와의 기술격차를 좁혔다는 뜻입니까?”
“이론만 정립한 상태입니다. 이론을 적용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만, 기술격차를 좁히는 게 아니라,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고성능 플라스마의 연속운전에 걸림돌인 불안정성을 제어하기 위한 기술과 플라스마 에너지의 유지시간 연장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경환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핵융합로 개발은 단순하게 1억 도의 플라스마를 생산하는 기술과 1억 도의 플라스마를 가둘 수 있는 인공태양(토카막)을 제작하는 기술로 나눈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선 황정욱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어색한 웃음을 황정욱에 전한 뒤 서둘러 다른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한국정부에 약속한 KSTAR 프로젝트의 투자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핵심 연구인력이 SHJ-JWH기술연구소로 합류한 후로 KSTAR 연구는 지지부진해지고 있었다. 또한, 투자된 금액 일부가 유용되거나 횡령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SHJ는 가벼운 항의만 할 뿐, 지원금을 끊거나 법적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SHJ의 무차별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핵융합로 사업은 서서히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경환은 SHJ퀄컴과 SHJ구글을 통해 원천기술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원천기술을 활용해 어떻게 이익을 극대화 시킬지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한국정부와의 밀약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핵융합로의 원천기술은 강대국의 논리가 적용되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어 잠글 생각이었다.
“이곳은 어떤 연구를 하는 곳입니까?”
“예전 JWH 연구원들과 SHJ의 연구원들이 저온핵융합을 연구하는 곳입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한 연구인지라…….”
“10년이 되든, 20년이 되든 지원과 투자는 끊기질 않을 것입니다. 단기간에 결과를 얻을 생각 또한 없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험한 연구가 많으니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연구원들을 다독여 주십시오.”
특별한 성과가 없는 저온핵융합 연구에 황정욱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았다. 작년 한 해만 해도 5천억 원 가까운 돈이 기술연구소에 투자되었고, 올해만 해도 이미 5천억 원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경환은 투자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SHJ의 미래를 이 기술연구소에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상층에 확인한 경환은 황정욱의 안내에 따라 이중 삼중으로 설치된 보안 시설을 거쳐 지하 연구팀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국방연구소에서 합류한 연구원 중심으로 연구개발이 한창인 지하엔 간간이 외국인들로 보이는 연구원들도 눈에 띠였다. 오후를 모두 기술연구소 현장확인에 소비한 경환은 서해로 가라앉는 태양을 보고서야 집무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예상보다 연구소가 활발히 운영되고 있어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부담을 드리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SHJ와 한국의 미래는 이곳의 연구성과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장님의 애국심을 자극하려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제 마지막을 한국을 위해 바친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저와 약속한 것을 지켜주리라 믿습니다.”
경환은 말없이 황정욱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를 서로 전하는 두 사람은 더 이상 신뢰에 대한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회장님,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래요. 노친네들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요.”
기술연구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는지 하루나는 연신 시계를 살피며 경환을 재촉했고, 기술연구소를 떠나기 아쉬운 듯 한참을 서성이던 경환은 알의 인도에 따라 차량에 탑승해야만 했다. 서울로 방향을 잡은 차들이 어둠이 서서히 물들고 있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빠르게 주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