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86화 (1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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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186

경환의 예상대로 조지 부시는 재검표 요청을 철회하며 결과에 승복함에 따라 미 대선은 앨 고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8년을 기다리며 정권 재탈환을 준비했던 공화당은 극우 보수주의에 대한 자성론이 제기되면서 조지 부시와 딕 체니의 대선캠프를 막후 조종한 네오콘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선 패배로 인해 부시와 딕은 각자의 정치적 고향인 텍사스와 와이오밍으로 귀향하며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딕의 백악관 입성 실패는 많은 후유증을 양산하고 있었고, PMC(민간군사기업)를 꿈꾸던 블랙워터도 이런 후유증의 직격탄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벌건 대낮부터 술에 취해있던 에릭은 마시던 술병을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젠장, 딕 체니 이 병신같은 자식. 실컷 이용만 해 먹고 버린다 이거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힌 술병은 산산조각이 난 채로 어지럽게 바닥에 뿌려져 있었고, 소리에 놀라 급히 방으로 들어온 부사장 조지 브라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릭과 같은 NAVY SEAL 출신으로 펜타곤에서 대테러 전문가로 활약했던 조지는 딕의 백악관 입성에 맞춰 에릭이 공을 들여 스카우트한 인물이었다.

“에릭, 직원들 보는 데서 뭐하는 겁니까? 딕 체니가 대선에 실패했다, 해서 우리가 망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는 몰라. 내 꿈은 이런 촌구석에서 햇병아리 FBI 애들 총 잡는 거 가르치는 건 아니었다고.”

군대와 정부기관 요원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설립된 블랙워터는 딕의 지원으로 펜타곤과 FBI 현장요원들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랙워터의 진짜 목적이 딕과 네오콘에 의해 재편될 중동 분쟁지역에 투입될 용병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일확천금의 기회가 앨 고어의 백악관 입성과 함께 날아가 버리자, 에릭은 경영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로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홀리버튼에서 지원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현 인원의 반을 정리하라는 통보와 함께 말입니다.”

“개자식들, 부려 먹을 땐 언제고 끈 떨어지니 큰소리를 치겠다는 거로군. 정리하라면 정리하면 될 거 아닌가.”

조지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워터에 입사하기 전, SHJ시큐리티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고민했던 조지는 SHJ의 울타리 안을 지키는 SHJ시큐리티보다는 딕과 연계된 블랙워터의 성장 가능성에 이끌렸다. 그러나 딕이라는 끈이 떨어진 블랙워터는 성장과 발전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한낱 사설훈련소에 불과했다.

“에릭, 직원들이 많이 동요합니다. 개중 눈치 빠른 직원들은 다른 PMC로 자리를 옮기고 있고, 이 때문에 남아있는 직원들의 사기도 바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보러 어쩌라는 거야! 갈 놈들은 가라고 해. 이 바닥 생리가 원래 그렇다는 거 자네가 모를 리 없잖아.”

“예전의 자신만만했던 에릭 프린스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겁니까? 지름길을 잃어버렸다면 돌아갈 수도 있는 겁니다. 주저앉아버리면 돌아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돌아갈 길은 없어. 우린 낙오병 신세일 뿐이라고.”

에릭은 다른 위스키병을 집어 들고는 만사가 귀찮은 듯 병째 나발을 불었다. 그런 에릭의 모습을 바라보던 조지는 인상을 구겨버렸다. 용병을 단순 일회용으로 보는 에릭의 처사에 반발해 왔었지만, 지금의 에릭 모습으로는 더는 기대할 미래조차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홀리버튼의 지원금 삭감뿐만 아니라, 블랙워터의 마지막 돈줄인 펜타곤과 FBI는 계약만료와 함께 계약 종료를 통보해 온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돌아온 조지는 조용히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비전도 없는 블랙워터에 더는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조지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카일 디푸어의 제안을 거절한 걸 못내 후회하며 카일이 건네준 SHJ의 명함을 움켜쥐었다.

작년 연말 출시한 세틀러-5도 노키아와 모토로라, 오성전자의 신모델 출시와 맞물려 점유율 상승을 이끌지 못하며 점유율 추락을 막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특히, 스타텍 이후 추락을 계속하던 모토로라는 폴더형의 신모델인 레이저를 출시하면서 히트상품 대열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SHJ퀄컴의 위기론이 각 언론의 경제지 한 면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SHJ는 논평을 삼간 채, 평온한 모습을 보여 특종에 목말라하는 기자들을 김빠지게 만들었다.

“부회장님, 세틀러-6의 출시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기술적 테스트를 모두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3/4분기 출시엔 지장이 없을 겁니다.”

IMT 2000을 겨냥한 세틀러-6이 나오기 전까진, 지금의 상황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노키아를 벤치마킹해 기존 세틀러 시리즈를 소지한 고객은 시리즈별로 차등을 두어 5~30%의 범위에서 신모델로 교환해 주는 마케팅 전략을 선보일 계획이었다. 경환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애플도 모바일 OS 개발이 한창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아이팟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스티브 잡스가 사활을 걸고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회장님이 SHJ구글을 좀 독려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베타서비스를 시작한 구글라인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기존의 동창찾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SNS라 슈미트 사장도 구글스토어 이상으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승연이 SNS 개발팀장을 맡은 후로 경환은 승연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처음 맡은 프로젝트의 부담감도 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SHJ구글에서의 자리를 잡기 위해 승연은 모든 숙식을 회사에서 해결하며 이 일에 전념했다. 팀원들에게 부담을 주진 않았지만, 승연의 이런 모습으로 SNS 개발팀원들은 회사 내에서도 폐인으로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저도 들어가 봤습니다. 상당히 진보된 방식이더군요. 회원들의 정보를 연동시켜 친구 추천을 해주고 개인에 대한 블로그를 제공해 일상을 쓸 수 있게 만든 건 좋은 아이디어라고 봅니다. 애드센스와 구글스토어, 메신저에 이어 구글라인이 큰 성공을 거둘 거라고 봅니다.”

“스캇 팀장이 제대로 한 건을 한 거 같습니다. 구글라인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 광고수입에 대한 마케팅 전략이 수립되면 SHJ구글은 매출과 이익이 SHJ퀄컴을 넘어설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스캇 팀장을 위문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자식이 한 번도 얼굴을 안 비치는데 어떻게 위문을 하겠습니까? 위문은 제 몫이 아니라 슈미트 사장의 몫이라고 봅니다.”

미국에서 베타서비스를 시작한 구글라인은 이용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하루에도 수십만 명씩 가입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광고마케팅으로 인해 정식서비스가 지체되고 있었지만, 이미 광고업계에선 구글라인의 잠재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서울에 위치한 SHJ아시아본사엔 때아닌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세틀러-5가 출시되었지만, 한국의 휴대폰 점유율 1위 자리는 이미 오성전자에 내 주었고, 2위 자리 또한 무섭게 쫓아오는 금성전자에 위협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퀄컴 한국지사와 대책 논의로 하루를 허비한 잭은 코이치와 박화수, 새롭게 SHJ구글 한국 지사장으로 부임한 김수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플랜트 시장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SHJ의 모태가 플랜트인 만큼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려선 안 됩니다.”

“그동안 확보된 기술과 실적으로 플랜트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고 자부합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는 남미와 호주, 아시아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예정입니다. SHJ타운이 완공되면 SHJ엔지니어링과 SHJ-화성플랜트가 합병된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코이치의 질문에 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SHJ엔지니어링은 코이치가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고, 경환은 두 회사의 합병을 통해 시너지효과를 보길 원했다. 코이치나 박화수의 얼굴이 살짝 긴장된 표정이 나타났다. 잭은 답변을 서둘렀다.

“타케우치 사장의 말대로 회장님은 두 회사의 합병을 통해 업무를 간소화시킬 계획이십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박화수 사장은 그룹 기획조정실을 맡게 될 겁니다.”

“제, 제가요?”

박화수는 말을 더듬었다. 기획조정실을 맡는다는 건 승진을 뜻하는 거였기 때문이었다. 코이치는 서둘러 박화수에게 축하를 건넸다. 잭은 두 사람의 축하를 지켜본 후 말을 이어갔다.

“회장님의 관심은 기술연구소와 SHJ타운 건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기술연구소 연구원과 시큐리티 인원이 대거 입국하게 될 겁니다. 그들이 불편함이 없게 편의를 최대한 봐 주도록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비는 끝내 놨습니다. 그런데 오성과 대현에서 채용된 상위 연구원들은 휴스턴에서 선발진으로 파견된 SHJ시큐리티 직원들의 경호를 받고 있습니다. 핵융합연구소와 원자력연구소의 인력은 SHJ타운이 건설된 후에야 합류할 수 있다는 답변입니다.”

기업들의 연구원을 채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국가기관 소속의 연구원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돈보다는 명예와 애국심을 우선시하는 연구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기업인 SHJ에 대한 반발심으로 핵심 연구인원에 대한 설득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잭의 개인비서가 들어왔다.

“사장님, 혜성 법무법인의 장성길 대표와 김혜리 변호사가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모시세요.”

김수재를 제외한 세 사람은 묘한 미소를 흘렸다. 김수재는 무거웠던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이유를 몰라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 그 이유에 대해 묻을 용기는 없어 보였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세 사람은 세련되면서도 지적인 김혜리의 모습에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셨습니다. SHJ아시아본사 사장인 잭 무어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혜성 법무법인의 대표 장성길입니다.”

SHJ의 방문 요청을 제안받은 장성길은 종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혜성 법무법인은 메이저 로펌과는 거리가 먼 구멍가게 수준으로 5명의 변호사가 합작형태로 운영되는 로펌이었다. SHJ라는 다국적 기업과 계약을 성공하게 된다면 혜성을 키울 기회였지만, 이미 SHJ는 한국의 대표적인 로펌인 박 & 이와 계약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어 오늘 이 자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장성길과는 다르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김혜리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전 SHJ-화성플랜트의 박화수 사장입니다. 잭 무어 사장님을 대신해서 제가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 네. 말씀하십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SHJ아시아본사를 담당하는 로펌은 박 & 이 법무법인입니다. SHJ아시아본사의 서브-법무법인으로 혜성과 계약을 하고자 합니다. 장 대표님이 이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혜성은 SHJ구글 한국지사를 단독으로 담당하게 되실 겁니다.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 무엇입니까?”

장성길은 마른 침을 삼켰다. 박 & 이 법무법인의 서브로 들어가는 게 모양새가 빠지긴 하지만, SHJ에서 가장 화제의 중심에 있는 SHJ구글을 전담한다면 처자식을 바꾸라는 조건을 제외하고는 못 들어줄 조건이 없었다. 아니, 자식은 몰라도 처는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장성길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굳게 쥐었다.

“여기 계신 김혜리 변호사를 SHJ구글을 전담하는 변호사로 지정하시고 SHJ구글 한국지사로 파견을 보내시는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하신다면, 이번 계약은 성사되기 어렵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장성길은 선배 변호사들의 변론서를 정리하는 수준의 김혜리를 SHJ구글의 전담으로 지정하라는 박화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성길의 고민은 그리 깊지 않았다. 김혜리 하나 보다는 SHJ라는 떡고물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었다.

“저, 잠시만요. 죄송하지만, 제 의견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왜 지정하셨는지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김혜리가 당돌하게 먼저 치고 나오자 장성길은 미간을 급히 좁히며 김혜리를 제지하기 하려 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하하하, 이유가 당연히 있죠. 그 이유는 김혜리 변호사가 잘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직원을 방치할 수 없거든요. 그리고 그 직원이 수십억 불의 이익을 가져다줄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더 자세하게 이유를 설명해 드릴까요? 그리고 SHJ는 집요한 면이 있습니다. 만약 김혜리 변호사가 다른 로펌으로 옮기신다면, 우린 그 로펌에도 똑같은 제안을 할 겁니다.”

김혜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승연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묻는 메일을 주고받은 것을 제외하곤 감정을 쌓아갈 기회는 없었다. 자신의 첫 남자이기도 한 승연이 이 정도로 입이 쌀 줄은 몰랐다. 부끄러움에 주먹 쥔 손이 떨리고 입술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변호사를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치부를 안줏거리 삼아 떠들어 댄 승연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좋았던 감정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죄송합니다. 김혜리 변호사님. 그 친구를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그 친구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 친구는 특별관리를 받고 있는 직원이기 때문에 알게 된 거뿐입니다. 그리고 이 제안은 저희 회장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특별관리를 받을 정도로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인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김혜리는 승연에 대한 원망을 누그러트리는 중이었다. 김혜리가 어디로 튈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장성길은 김혜리의 표정이 수그러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로 흐르는 땀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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