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40화 (11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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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140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무교동 뒷골목에는 고단했던 하루일과를 소주로 풀려는 샐러리맨들로 북적거렸다. 삼겹살이 구워지는 불판 위로 소주잔들이 넘나들고 있었고, 넥타이를 풀어헤친 김 과장은 신규 사업 프레젠테이션에서 자신을 박살낸 본부장을 안주와 함께 씹고 있었다.

“젠장, 어떤 새끼는 부모 잘 만나 힘들이지 않고 본부장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지시나 하고 자빠졌고, 내 더러워서 정말.”

“김 과장님, 적당히 좀 드세요. 그 인간 지랄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아요.”

“아, 쓰바. 세상이 엿 같아서 그러는 거야. 곽 대리, 한잔 더 따라 줘.”

중견 기업에 다니는 두 사람은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났던 사장의 아들이 본부장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안하무인격으로 전횡을 일삼고 있었다. 실력이 있는 직원들은 이미 회사를 떠났고 지방대를 졸업한 김 과장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이 회사 오래 못 간다. 곽 대리 너도 살길부터 찾아.”

이미 SHJ 엔지니어링에 지원서를 제출해 최종 면접만 남겨 놓고 있었지만, 김 과장의 사정을 알고 있는 곽 대리는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과장님이야 말로 살길을 찾아보세요.”

“쓰바, 난 이미 결심했어. 밀린 월급만 들어오면 마누라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을 거야.”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고 거래처인 대기업들의 자금악화가 시작되면서 월급은 벌써 4개월째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적금까지 해약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번 달이 한계였다. 두 사람의 술잔이 오가고 있을 때, 식당 안에 있는 TV에선 뉴스가 흘러나왔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눈은 TV를 향했다.

‘김상철 기자. SHJ에서 투자에 대해 공식 발표를 했다고 하던데, 그 소식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렇습니다. 조금 전 SHJ의 린다 쿡 부사장이 총 8억 불 규모의 투자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정확한 투자 부문은 밝히지 않았지만, SHJ의 주 업종인 플랜트와 무선통신 관련 사업이 될 거란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정부는 SHJ의 투자를 적극 환영한다는 논평과 함께 관련 부서에 협조를 지시했습니다.’

‘SHJ의 이경환 사장과 만남이 이뤄진 뒤, 청와대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있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경제관련 인물들을 청와대로 불러 장시간 회의를 나눴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에 강석주 장관이 배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청와대와 경제부 간의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김상철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SHJ의 창업자는 한국인인 이경환 사장입니다. 그의 투자를 적극 환영하는 바입니다.’

뉴스 앵커는 이 말을 끝으로 다음 뉴스로 내용이 넘어갔고,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김 과장은 술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나이도 서른밖에 안된 친구가 대단하네. 나란 놈은 흉내도 못 내겠다.”

“SHJ는 차입금도 십 원도 없다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글쎄, 이경환이란 사람이 도덕적인 인간이거나 아니면 욕심이 많은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우리 같이 넥타이 맨 거지들과는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요.”

김 과장은 빈 술병을 흔들며 소주 한 병을 추가로 주문했고, 불판 위에는 먹다 남은 삼겹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정우와 희수를 재우고 나서야 수정은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들 수 있었다. 경환과 통화를 할까 시계를 쳐다 본 수정은 한참 잠에 빠져 있을 경환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아이 둘을 키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수정은 경환과의 결혼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만나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고, 서로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가끔 초조해하는 경환을 보며 불안함도 느끼지도 했지만, 희수가 태어난 후로 더 이상 초조해 하는 경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수정은 지금의 이 행복이 영원히 깨지지 않고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커피를 한잔 내려 창가로 다가간 수정은 집안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휴대폰 디자인 수정안을 살피고 있었다. 경환의 적극적인 지지로 참여하게 된 디자인 작업은 단조로울 수 있는 수정의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청량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띠리리, 띠리리.’

인터폰이 울리자 수정을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급히 뛰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인터폰 소리에 어렵게 잠재운 정우와 희수가 깨기라도 한다면 수정의 개인시간은 그것으로 종료되기 때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미시즈 리, 1층 프런트의 제이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미시즈 리의 친척이란 사람이 방문을 요청하고 있는데 확인을 해 주시겠습니까?’

경환이나 자신은 미국에 거주하는 친척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친척이 찾아왔다는 소리에 수정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확인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수정은 급히 제이미를 찾았다.

“제이미, 제가 통화를 먼저 하고 싶으니 바꿔주시겠어요?”

‘형수님, 저 승연이에요. 무작정 찾아와서 죄송하지만, 좀 올라가게 해 주세요.’

“어머, 도련님! 연락도 안 주시고 어쩐 일이세요?”

인터폰의 작은 화면으로 시동생의 얼굴이 나타나자, 놀란 수정은 급히 프런트에 친척임을 확인해 주었고, 승연은 방문 수속을 마친 후에야 엘리베이터에 오를 수 있었다. 정우와 희수 때문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수정은 아쉬운 대로 머리띠를 찾아 두르고는 현관문을 열어 승연을 맞아 주었다.

“도련님, 정말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형은 알고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배낭을 둘러맨 승연의 모습은 노숙자와 별 차이가 없었다.

“형한테 아무 말 하지 않고 왔어요. 원래 계획은 샌프란시스코에만 머물 생각이었는데 일이 생겨서 휴스턴까지 오게 되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는 미리 말을 해 주셨어야죠. 휴스턴에 오셨으면 바로 집으로 오시지 않고 뭐하신 거예요?”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수염까지 덥수룩한 승연의 모습은 초췌해 보이기까지 했다. 수정은 급히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 승연은 며칠 굶은 티를 내며 반찬까지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접시를 비웠다.

“그동안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 미국에 왔는데, 일정에 없던 휴스턴에 오느라 비상금까지 다 써버렸어요. 정말 형수님 신세 안지고 조용히 돌아가려고 했는데, 자꾸 경찰의 검문을 받다보니 어쩔 수 없이 찾아왔어요. 죄송해요, 형수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 지금 얼마나 속상한지 알아요? 제가 그렇게 도련님을 불편하게 해 드렸나요?”

왜 승연이 미국에까지 와서 형을 찾지 않았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해하던 수정은 눈물까지 글썽거려 승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휴, 절대 아니에요. 저 일 찾으러 미국 온 거에요. 형이나 형수님이 아시게 되면 가만있었겠어요? 형 도움 없이 제 힘으로 찾아보려고 했어요. 제가 미국에 온 거 담당 교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승연의 설명을 들은 후에야 수정의 얼굴은 펴질 수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앞날을 개척하겠다는 말에 수정은 어리게만 느꼈던 승연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럼 일은 구하신 거예요?”

“하하하, 제가 누굽니까? 오라는 곳이 많아서 고르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미래가 밝은 회사를 선택했습니다. 그나저나 제 사랑스런 조카들 모습이 보고 싶은데.”

“지금 잠들어 있어요. 그런데 도련님, 샤워부터 하셔야겠어요. 배낭 안에 있는 빨래 감도 빨리 꺼내 놓으시고요.”

이틀 동안 노숙을 한 덕에 무더운 날씨에도 샤워를 하지 못한 승연의 몸에선 악취와 다름없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승연은 그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수정의 명령 아닌 명령에 승연은 샤워실로 직행했고 수정은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킨 후 많은 양의 빨래 감을 세탁기에 넣었다.

알라모전투의 영웅들 동상들 뒤로 고풍스러운 텍사스 주정부 청사가 위치한 오스틴은 유럽풍과 현대식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였다. 주지사인 조지 부시의 사무실로 식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딕 체니가 들어가고 있었다.

“딕, 오랜 만이야. 홀리버튼 사장 자리가 국방장관보다 좋은가 보지? 아버지가 안부를 많이 묻더군. 가끔 연락 좀 드려 봐.”

“그동안 바닥에 깔아져 있다 보니 좀이 다 쑤시더군. 슬슬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어? 준비는 잘 되고 있지?”

93년까지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강한 인상을 남겼던 딕 체니는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조지를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어수룩해 보이는 조지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다면 미국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이 되는 것도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지금부터 자네를 차기 대통령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 될 걸세. 클린턴의 대외정책에 국민들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인 만큼, 자네는 강력한 국방정책을 펴 나가는 전략을 써야 될 거야.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잘 이용하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민주당을 공격한다면 다음 정권은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될 걸세.”

“잘 한번 만들어 봐. 어차피 정책은 자네의 몫이잖아.”

신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네오콘의 수장인 딕은 봉쇄와 억지의 안보정책에 반기를 들며 강력한 미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지목하는 불량국가를 선제공격함으로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어 공화당의 보수주의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휴스턴에 SHJ란 기업이 요즘 잘 나간다고 하더군. 자네 들어 봤어? “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한번 만났던 거 같아. 타운을 조성한다고 캘리포니아와 좀 시끄러웠었거든. 자네가 SHJ를 주목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홀리버튼 계열사로 있는 KBR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넘기면서 알게 됐어. 제임스라는 친구가 좀 당돌하더라고. 지금 한국에 있나 본데, 조지 소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야.”

경환이 한국 정부에 경고한 내용은 그날로 조지 소로스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많은 준비기간과 자금을 투입해 준비해 온 돈벌이가 경환에 의해 까발려지자, 조지 소로스는 딕을 찾아 SHJ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네오콘의 핵심 자금줄을 담당하고 있는 조지 소로스를 딕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 재밌는 친구군. 아직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니 애국심을 발휘한 건가? 그건 그렇고, 그 친구가 조지 소로스의 계획은 어떻게 알게 된 건데?”

“SHJ의 정보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어. 플랜트 업계에선 이미 SHJ의 정보력이 검증이 된 상태더군. 이번 조지 소로스의 계획도 이미 2년 전에 예상하고 한국 정부에 흘렸다는데 그 정보의 소스가 어디인지 도대체 알아 낼 방법이 없었어.”

딕은 깊은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KBR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넘길 때만 해도 SHJ는 딕의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지 휴스턴 시장으로 나서는 리의 부탁을 받아들여 제임스와의 만남을 추진한 정도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때? SHJ를 날리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우리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크기 전에 싹을 자르는 것도 좋지 않겠어?”

“퀄컴뿐만 아니라 이번에 서비스를 시작한 구글의 성장세가 무섭더군. 비선조직을 통해 확인해 보니 퀄컴과 구글의 기술력만 보면 MS와 필적할 수준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야. 그리고 이번 한국 방문에서도 휴대폰 제조업체와 플랜트 기업을 설립한다는 정보가 있거든. 싹을 자르기엔 아깝다는 생각도 들어.”

자신보다 과격한 딕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조지는 경환과의 만났던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특별히 주목해야 될 내용은 없었다.

“자네가 고민하는 걸 보니, 내가 제임스라는 친구를 잘못 판단한 거 같군. 정보력이 있고 미래에 대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친구라면 우선 그 친구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 않겠어? 그런 다음에 죽일지 살릴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 같은데.”

차기 정권을 노리는 작업이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자금줄을 담당하는 조지 소로스를 방해하고 나선 SHJ는 딕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권을 잡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부터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해야만 했다. 자칫 SHJ를 잘못 건드려 흙탕물이 튄다면 대선과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조만간 제임스란 친구를 만나기로 했으니, 우선은 그 친구의 의향을 파악해 볼 생각이야. 같이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정리를 해야 되겠지.”

경환이 한국 일정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는 시간, 오스틴에선 경환이 알 수 없는 일이 진행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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