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39화 (11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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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39

    “래리, 오늘은 인터뷰가 몇 건이야? 난 벌써 10명이 넘었어. 인터뷰는 슈미트 사장이 해야 되는 거 아냐?”

    세르게이는 손에 들려 있는 이력서를 래리 앞에 던지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구글의 서비스가 시작되고 처음 주춤하던 가입자 수는 SHJ의 무지막지한 홍보 덕분인지 수식 상승을 하고 있었지만, 기존 검색사이트를 넘기에는 한참 부족한 상태였다. 에릭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대대적인 인원확충과 설비의 증강을 SHJ에 요청했고, 경환은 에릭이 요청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래리와 세르게이는 자신들에게할당된 인터뷰를 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우는 소리 하지 마. 나도 오늘만 15명과 인터뷰를 해야 돼. 슈미트 사장은 20명이라고 하더라고. 제임스의 명령이라고 하니, 하소연 할 곳도 없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야.”

    IT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소문에 미국 전 지역에서 지원자가 넘쳐나고 있었고 실리콘밸리의 고급인원을 충당하는 스탠퍼드와 버클리 대학의 지원자가 특히 많았다. IT 열풍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래리는 다음 인터뷰를 할 사람의 이력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르게이, 이번에 인터뷰할 친구가 재밌는 친구네. 제임스와 같은 한국 출신이야. 아직 대학도 마치지 않은 상태고.”

    “한국대학은 아직도 코볼과 C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 아닌가? 특별한 게 있겠어?”

    “그러긴 한데, 군대를 다녀온 경력도 있고 의지도 상당히 강한 거 같아. 이번 인터뷰를 위해 한국에서 직접 온 걸 보면.”

    “내가 맡은 인터뷰는 아니니, 네가 알아서 해. 난 그만 간다. 나중에 맥주나 한잔 하자.”

    세르게이는 귀찮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래리의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지원자 대부분의 스펙이 화려한 것에 비해 한국의 이름 없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인물의 이력서에 래리는 신경이 쓰였다. 처음 우편으로 배달된 이력서를 열어 봤을 때만 해도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이력서에 나타난 지원자의 열정을 확인한 래리는 숙소에 적혀있는 모텔에 전화를 걸어 직접 인터뷰 날짜를 통보하고야 말았다.

    “미스터 스캇 리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인터폰이 끊기자 연구실 문이 열리고 동양인치고는 큰 체격의 사내가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스캇 리라고 합니다.”

    “SHJ-구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스터 리의 인터뷰를 맡은 래리 페이지라고 합니다.”

    서글서글한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 앉은 스캇은 전혀 주눅 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래리는 낯설게 보이지 않는 스캇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동양인들의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생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미스터 리, 한국 대학에서 전산학과를 전공하고 계시더군요. 우리는 서비스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업입니다. 어떻게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까?”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면서 프로그래밍 언어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왕이면 큰물에서 놀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졸업하기도 전이지만 관광비자로 무작정 미국에 건너왔습니다. 사실 SHJ-구글에 처음 이력서를 제출한 것은 아닙니다. JAVA의 매력에 빠져 썬마이크로시스템에 지원했지만,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SHJ-구글은 두 번째로 지원한 회사입니다.”

    유창한 영어실력은 아니었지만,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SHJ-구글의 발전가능성을 언급하며 자신의 스펙을 과대포장하려는 것에 비해 JAVA를 언급하며 썬마이크로시스템에 떨어져서 지원했다는 스캇의 솔직한 표현에 래리는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평소 프로그래밍 언어에 관심을 보였다니 의외군요. 한국대학의 수준을 잘 알지 못하는데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한국대학의 수준보다는 제가 공부한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미스터 페이지가 생각하는 거 보다 한국대학의 수준은 높습니다. 코볼과 C언어는 기본이고 포트란, 파스칼, C++, 오브젝티브-C 까지 습득한 상태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JAVA에 빠져있는 상태구요.”

    스캇의 대답에 래리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환이 한국인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컴퓨터공학 수준은 아직 초보단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캇의 답변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캇의 스펙은 자신이 요구하는 선에 미치지 못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가 원하는 직원의 스펙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한참 모자란다는 것은 제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SHJ가 퀄컴을 인수하고 구글을 설립한 것은 미래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두 업체에서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뭔지 생각해 보다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래리는 스캇의 의외의 답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무턱대고 경환을 찾아가 자신에게 투자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자리는 오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 래리는 스캇의 모습에서 예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선통신과 인터넷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의 OS를 개발하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OS를 개발하면서 기본이 되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들지 않는다면 나중에 특허소송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부족하지만,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해 보고 싶습니다. 저를 써 주십시오.”

    래리는 스캇의 답변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인터뷰를 진행해 오면서 스캇과 같이 미래를 내다보는 답변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빈약한 스펙과 유창하지 않은 영어능력으로 슈미트 사장이 반대를 한다 하더라도 스캇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래리를 사로잡았다. 부족한 실력은 자신이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한 래리는 결심을 굳혔는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미국에 있을 예정입니까?”

    “사실 일주일 후면 체류기간이 끝나 돌아가야 됩니다.”

    “좋습니다. 저와 같이 일을 해 봅시다. 한국에 돌아가서 주변을 정리하고 제 연락을 기다리세요. 취업비자는 우리가 해결해 놓겠습니다. 우리 미스터 리를 퇴짜 놓은 썬마이크로시스템을 제대로 엿 먹여 봅시다.”

    “감사합니다. SHJ-구글에서 제대로 놀아 보겠습니다.”

    스캇은 자리에서 일어나 래리를 포옹하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런 스캇을 래리는 뜨겁게 안아주었다.

    타이트한 일정에도 수정과의 통화를 잊지 않았던 경환은 정우와 희수의 목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호텔 주위를 산책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호텔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때문에 호텔 밖을 나선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경환이 업무를 시작하자 박화수가 조용히 다가왔다.

    “사장님, 십분 후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네요. 쿡 부사장과 제이콥스 사장에게 준비하라고 전달해 주세요.”

    호텔에 마련한 회의실에 먼저 내려가 손님을 기다리는 경환은 이번 출장의 백미를 장식한다는 생각에 가볍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하루나의 안내를 받으며 세련된 중년의 여자가 아들로 보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이 회장님, SHJ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경환입니다. 이후의 대화는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점을 미리 양해 드리겠습니다.”

    “한새그룹을 맡고 있는 이자영입니다. 이쪽은 이관우 부회장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지루한 탐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경환이 한새그룹과 만남을 추진한 것은 수정의 휴대폰 모델을 도와주다 휴대폰에 장착할 기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한새그룹은 오성그룹과는 형제관계였지만, 경영권 다툼에서 패배한 차남이 일찌감치 독립해 설립한 기업이었다. 처음엔 미디어그룹으로 시작했지만, 91년 창업자가 사망한 이후 부인이 경영권을인계받아 제2의 창업이란 타이틀로 공격적인 경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성그룹과는 지분을 완전히 정리한 후, 구미공장에 1조원을 투자하고 있었지만, 올해부터 시작된 불경기와 섬유필름 사업의 침체로 경영은 서서히 악화되고 있었다.

    “주변의 여건이 좋지 못한 관계로 두 분을 이쪽으로 모신 점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이 사장님의 방한에 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만남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차분한 이자영과는 달리 이관우의 표정은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환은 그런 이관우를 보며 내실 있던 기업이 잘못된 투자와 인사로 인해 허물어진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경영권을 넘겨준다면 잘 나가던 기업도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박화수 사장을 통해 저희가 드린 제안에 긍정적인 답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회장님과 마찬가지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흠, 흠. SHJ가 원하는 것이 우리 한새정보시스템에서 개발한 MPEG 방식을 이용한 휴대용 음향재생장치 및 방법의 원천기술이라고 들었습니다. 조건을 조금 바꿔서 한새정보시스템을 인수하시면 어떻겠습니까?”

    MP3의 원천기술을 가지고도 제대로 사용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특허를 출원했지만, 특허 문제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무리한 투자로 자금압박이 시작된 한새그룹 내에서도 특별한 성과 없이 연구개발비만 축내고 있는 한새정보시스템은 미운오리새끼였다. 이관우는 경환의 눈치를 살피며 이번기회에 한새정보시스템을 치워버리려 했지만, 경환은 이관우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한새그룹에서 특허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또한, 그 기술을 가지고 제작된 제품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구요. 이 부회장님은 저를 아주 쉽게 생각하시는 거 같습니다. SHJ를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이번 만남은 큰 의미를 찾을 수 없겠군요.”

    이자영은 급히 이관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성그룹도 어쩌지 못해 애를 먹고 있는 경환을 이관우가 상대한다는 거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아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과드립니다. SHJ와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회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성그룹을 견제하기 위해 한새그룹과 관계를 맺고 싶었기 때문에, 특허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기술을 원한 것입니다. 저희가 그 기술을 인수한다 해도 사장 될 확률이 많고요.”

    시제품으로 나온 앰피맨F10은 그룹 내에서도 성공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기 때문에 SHJ가 그 기술을 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자영은 오성그룹의 견제목적이란 말이 경환의 입에서 나오자 그제야 SHJ 목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요 없는 기술을 팔고 SHJ와 인연을 맺게 된다면 오성그룹에 의해 당한 설움을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자영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미 박화수 사장과 합의한 대로 50억 원에 기술을 넘기겠습니다.”

    특허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퀄컴의 CDMA 원천기술과도 맞먹을 수 있는 MP3 원천기술이 경환의 손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경환은 미국의 대형로펌을 동원해 이 원천기술의 라이선스 문제를 금년 안으로 해결 할 생각이었다. 경환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고민이 많은 듯 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자영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실 50억 원이란 금액은 경환에겐 헐값이었지만, 이자영에겐 기술개발에 부은 투자금을 회수하고도 남는 금액이었기때문이었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되겠죠. MOU는 생략하고 본 계약으로 바로 들어가도록 하시죠. 그리고 회장님께 무례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SHJ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이라면 한새정보시스템 인수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원천기술 매각 계약이 체결되면 저희에게 오퍼를 넣어 주십시오. 밀고 당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퍼의 금액이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인수는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합당한 매각대금을 산출해서 오퍼를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한새그룹과 SHJ는 같은 곳을 향해 가게 될 것입니다.”

    이자영은 경환과의 만남이 한새그룹의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고 있었지만, 경영실패로 몇 년 지나지 않아 해체가 되는 한새그룹과는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린다와 어윈은 경환의 연기력에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출장 전 한새정보시스템의 원천기술을 분석한 어윈은 몇 억 불을 들여서라도 이 기술을 확보해야 된다고 입술에 침을 튀겨가며 주장을 했지만, 천만 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 이 기술을 확보한 경환의 연기력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런 경환의 연기력에 희생된 희생자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어윈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흐르는 강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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