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27화 (104/264)

#127

다시 사는 인생 - 127

두툼한 서류를 손에 들고 경환을 찾은 린다는 피부에 탄력을 잃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퀄컴의 수익이 안정화되고 지속적인 투자에 대한 결실이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까지 검토를 하는 바람에 하루 24시간도 모자란 형편이었다. 대대적인 인원보충이 되고 있지만, 총괄을 린다의 몫이었기 때문에 린다의 업무량은 증폭되어가고만 있었다.

“제임스, 한국 투자기업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는데, 대후엔지니어링은 100% 사원지주제로 운영이 되다보니 지분확보가 쉽지 않을 거 같네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후그룹이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을 하게 되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명목은 대후그룹에서 독립을 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대후그룹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을 하고 있을 거예요. 최대한 주시를 해 주세요.”

100% 사원지주회사로 운영이 된다 하더라도 대후그룹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경환은 대후그룹이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는 순간을 노려 대후엔지니어링을 손에 넣을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알겠어요.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SHJ-화성플랜트를 확대 개편하는 방안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이번 JSC와의 합작으로 사우디 입찰을 성공한다면 LNG 플랜트의 기술도 확보가 될 텐데, KBR과 JSC의 기술과 본사에서 확보하고 있는 플랜트와 FPSO의 플랜트 기술을 SHJ-화성플랜트에 이전을 하게 되면 굳이 아동이나 대후를 인수할 필요가 있겠어요?”

황태수를 의식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린다는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었다. 경환 또한, SHJ-화성플랜트를 단순 제작업체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KBR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협상을 벌여왔지만, 윌리엄은 지분 23%를 내 놓지 않고 있었다. 경영에 직접적인 힘을 쓰지는 못하지만, 23%의 지분은 경환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저도 그 생각을 해봤지만, KBR이 통 지분을 내놓을 생각을 안 하니 그게 문제네요. KBR이 손을 털어 주면 좋겠는데 윌리엄의 고집을 꺾기가 어려워요.”

린다뿐만 아니라 잭까지 SHJ에 합류하자 경환의 타협을 모색하던 윌리엄은 태도를 바꿔 SHJ에 칼날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믿었던 두 사람을 경환에게 빼앗겼다는 자격지심이 윌리엄을 사로잡고 있었다.

“한국 상황은 계속 관찰을 해 주시고, 다른 얘기나 합시다. 휴스턴 시 정부에서 우리의 이탈을 막기 위해 당근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는데 린다는 어떻게 생각해요?”

최석현은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다. SHJ 본사가 지역을 옮길 수도 있다는 소식은 휴스턴 시 정부를 긴장시켰고, 실제로도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의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었다. 또한 같은 텍사스 주의 댈러스까지 끼어들자 시 정부 간 자존심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위기감을 느낀 휴스턴 시 정부는 토지의 무상제공을 무기로 SHJ를 설득하고 나섰다.

“SHJ의 발판이 휴스턴인 점을 감안한다면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고 봅니다. 휴스턴 시 정부에서 미 개발지역이긴 하지만, 250에이커를 무상으로 제공을 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좋지 않겠어요? 물론 개발은 우리 몫이 되겠지만요.”

남아도는 땅을 무상으로 주고 생색을 내려 하지만, 경환은 최대한 더 받아 낼 생각이었다. 상수도와 전기, 도로등 제반시설이 확충되지 않는다면 배보다 배꼽이 커질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최대한 몸값을 올려놔야죠. 아마 리 브라운이 이 문제로 만나자고 하는 거 같은데, 당선 가능성이 있습니까?”

“여러 지역의 경찰국장을 역임했고 최근 뉴욕시 경찰청장을 했다는 점이 시민에게 어필하고 있어요. 여론도 우호적이고요.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내년에 있을 시장선거에 출마하는 리 브라운은 클린턴 행정부 사람으로 보수 색채가 강한 휴스턴을 감안할 때, 민주당 후보인 리 브라운의 선전은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또한, 여태껏 흑인시장을 배출한 적이 없었던 휴스턴에 새바람이 불고 있었다.

“IT 전문경영인 스카우트와 관련된 이력서들 이예요. 한번 살펴보세요.”

리 브라운과의 만남을 고민하던 경환은 린다가 건네주는 이력서를 살폈지만,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력서를 천천히 넘기던 경환은 한 인물의 프로필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린다, 이 사람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눈에 띠네요. 우리와 생각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인터뷰를 잡아보세요.”

경환이 선택한 인물에 대한 헤드헌터의 평가는 반 MS 진영에서 수동적인 인터넷환경을 동영상과 음향, 게임 등 동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JAVA언어 개발의 책임자로 있다는 설명이었다.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애플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 보다는 MS의 독점체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경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마트폰의 개발을 염두에 두고 구글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을 갖고 있는 경환의 생각과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었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에서 개발 매니저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노벨사에서 사장자리를 제안하며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흠. 그렇군요.”

자신이 생각해도 아직은 불확실해 보이는 SHJ에 합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인물이 구글을 성공시킬지 또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경환은 이 인물을 놓치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린다, 이 사람이 왠지 끌리네요. 미안하지만, 래리와 세르게이를 데리고 실리콘밸리에 가서 직접 제안을 해 보세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하다면 저라도 직접 건너가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SHJ-퀄컴의 매출이 급격히 신장세로 접어들었습니다. 2/4분기의 매출이 1천 6백 70만 불입니다. 문제는 QCP 단말기의 사업성이 크질 않다는 거예요. 일부 라인을 축소시키거나 매각을 하는 게 어떨까요?”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스마트폰에 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연구개발을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성전자와 애플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단말기 제조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좀 더 연구를 해 보죠. 앞으로 단말기 경쟁은 성능과 더불어 디자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우선 외주를 통해 획기적인 디자인과 타사제품과 비교되는 기능개발에 역점을 두라고 지시를 하세요. 그래도 안 되면 매각을 검토하시고요.”

단말기의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에 대해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하루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미스터 리 브라운이 도착했습니다. 모실까요?

“그렇게 하세요. 린다는 실리콘밸리 출장을 서두르시고요.”

린다가 빠져 나가자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수한 인상의 리 브라운이 보좌관과 함께 경환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경환은 양복 상의를 걸치며 혹시라도 시장이 될지도 모르는 리 브라운을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맞이했다.

“미스터 브라운, SHJ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SHJ의 대표 제임스 리입니다.”

“휴스턴에서 촉망받는 젊은 기업인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리 패트릭 브라운입니다.”

50대 후반의 리는 오랜 경찰 쪽에 몸을 담근 사람이라서 그런지 수더분한 외모와는 달리 날카로운 눈매가 경환의 흥미를 당기고 있었다. 경환은 리가 왜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선거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바쁘실 텐데 SHJ를 찾아주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하하, 젊으신 분이라 직설적이시군요. 그럼 저도 직설적으로 물어 보겠습니다. 미스터 리는 민주당입니까 공화당입니까?”

뜬금없이 자신의 정치성향을 물은 리를 경환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치인을 잘못 상대해 두고두고 피곤한 일을 만들기 않기 위해 경환은 머리를 바쁘게 굴리기 시작했다.

“미스터 브라운, 저는 외국인입니다. 물론 저만의 정치성향이 있기는 하지만, 제가 미국의 정치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정치성향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시지는 않았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젊은 사업가이면서도 급하지 않고 생각이 깊다고 느낀 리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권모술수에 능하다며 입에 침을 튀기며 경환을 비하한 윌리엄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스케줄이 잡혀있던 관계로 리는 길게 얘기를 끌고 나갈 수 없었다.

“SHJ가 사업장을 타 지역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이 들리더군요. 제가 SHJ를 찾은 이유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결정을 한 건 아니지만, 검토를 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앞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저희에게 가장 유리한 지역을 선정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리의 방문 목적을 확인한 경환은 리가 어떤 조건을 내 거는지 그의 의중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이미 휴스턴 시로부터 250에이커를 확보한 경환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불모지 250에이커 받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제가 시장에 당선이 된다면 롱포인트 개발에 SHJ타운을 포함시키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정은 미스터 리의 손에 달려있지만 말입니다.”

직접적으로 지지해 달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손을 잡으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롱포인트 지역은 유색인종 특히 아시아와 라틴계가 밀집된 지역으로 SHJ의 사업장을 끌어 들일 수 있다면 밀리는 백인들의 지지를 유색인종의 지지로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듯 했다. SHJ 입장에서 본다면 시 정부에서 제안한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롱포인트 지역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내년 초에는 지역을 설정하고 기초공사를 시작해야 됩니다. 시기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시 의회와 일부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조건이 SHJ에 유리할지 연구를 해 보세요.”

잘하면 리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경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미스터 브라운, 제가 요새 큰 고민이 있습니다. KBR에서 가지고 있는 한국 자회사의 지분을 인수하고 싶은데 윌리엄이 움직이질 않네요.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데도 말입니다. 미스터 브라운이 윌리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 문제가 해결되면 저도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하하하, 그러셨군요. 주말에 윌리엄을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요.”

서면으로 작성할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씩 손에 쥘 수 있었다. 휴스턴에서 기반을 닦은 경환은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 이상 휴스턴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단지 더 좋은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시 정부를 압박하는 차원이었지만, KBR이 가지고 있는 23%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료스케,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황태수에게 전해 주거라.”

“회장님, 다시 생각을 해 주십시오. 우리의 기술이 SHJ에 넘어가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토사구팽을 당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료스케의 항변에도 케이스케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무리 수를 부려 봐도 SHJ의 손을 잡지 않고서는 위기를 벗어날 길이 통 보이지 않았다.

“네 말이 틀리지는 않는다. 결국 SHJ에게 기술을 빼앗긴 채 팽을 당하게 될 거야. 그러나 SHJ를 통해 해외시장 개척을 하지 못한다면, 미쓰비시중공업의 아가리에 우리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게 될게다.”

“그, 그렇지만.......”

료스케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벌써부터 JSC의 경영에 관여하기 위해 JSC의 반발을 무시한 채 서서히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사면초가에 진퇴양난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JSC의 상황은 회생할 기회는 요원한 상태였다.

“기술은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SHJ에 넘겨주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벌면서 기존의 기술 향상과 신기술 개발에 매진할 수 있다면 토사구팽 당하기 전에 도망갈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쓰비시중공업에 먹히느니 난 1%의 가능성을 믿어 보고 싶구나.”

“크으윽, 이런 수모를 겪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병가지상사라 했다. 이번 일을 교훈으로 삼아 JSC를 다시 반석에 올려놓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 SHJ도 언젠가는 반드시 틈이 생기게 될 테니, 지금의 빚은 그때 가서 갚더라도 늦지 않을 게다.”

료스케의 주먹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안일한 대처로 JSC의 처지가 한 순간에 나락에 떨어졌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후회했지만, 이미 JSC는 회생이 불가능 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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