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78화 (55/264)

#78

다시 사는 인생 - 78

“이미 소문이 났나 보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무슨 제안이신지 말씀해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금년 하반기에 있을 FPSO입찰의 강력한 경쟁사는 일본 업체라고 경환은 판단하고 있었다. 영국보다는 같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을 산출할 수 있는 국가는 일본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경환은 케이스케의 말에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흠…, 미쓰비시와 미쓰이가 합작으로 이번 나이지리아의 FPSO 입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SHJ에 알려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경환은 도저히 케이스케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JSC가 미쓰비시와 미쓰이의 공격적인 영업에 국내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보를 일본기업도 아닌 SHJ에 넘긴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일본기업들은 국내에서는 경쟁을 하다가도 국가적인 경쟁에는 철저히 국익을 우선시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통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이 주시겠다는 정보를 제가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저에게 그런 제안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경환은 자신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댄다면 케이스케의 제안을 일언지하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맛있게 보이는 떡일지라도 급하게 먹다 보면 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제 자식 놈인 코이치를 맡아 주십사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경환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30대 중반의 코이치를 맡아달라는 케이스케의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코이치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인지 벌린 입을 닫지를 못하고 있었다.

“능력이 있는 자식이긴 하지만, 제가 거둘 수 없는 자식이기도 합니다. SHJ에서 거둬 준다면 큰 몫을 할 겁니다. 코이치 네가 큰물에서 네 꿈을 펼치는 모습을 이 아비는 보고 싶구나.”

케이스케의 제안이 구미가 당기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SHJ에서 뼈를 묻을 각오가 없는 사람은 필요가 없었다. 경환은 케이스케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의 가정사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SHJ를 도피처로 제공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SHJ 이름아래서 평생을 같이 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과는 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코이치를 얻을 수만 있다면 황태수와 함께 컨설팅분야를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지만, 코이치의 속내를 모르는 상태에서 케이스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제가 평생을 SHJ와 함께 한다면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코이치는 맘이 급했는지 경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케이스케는 코이치의 반응에 조용히 눈을 감았고, 경환은 묵묵히 코이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소장님이 진심으로 SHJ에 합류를 원하신다면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겠습니다. 회장님의 제안과는 상관없이 타케우치 코이치란 인물에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JSC는 국내시장을 벗어나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줄 압니다. SHJ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JSC와의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JSC와의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코이치의 복잡한 심경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JSC를 위해 일을 해 왔지만, 돌아오는 건 배다른 형제들의 질시와 견제밖에는 없었다. SHJ를 조사하면서 코이치는 묘한 흥분을 느낀 적이 많았다. 젊은 사장의 추진력과 빠르게 성장을 하는 모습에 감탄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환의 말에 코이치는 쉽게 결심을 할 수는 없었다. 형제들에게 멸시를 받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JSC와 경쟁을 한다는 것이 꺼림칙했기때문이었다.

“코이치, 내 눈치 볼 필요 없다. JSC 본사에는 너를 받아 줄 자리가 없다. 네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결정을 하도록 해.”

코이치의 흔들리는 마음을 헤아린 케이스케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과 경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코이치의 족쇄를 풀어주고 싶었다. 코이치는 결심이 선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SHJ에서 받아 주신다면 제 한계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게 JSC가 되더라도 경쟁에서 이겨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 고맙습니다.”

아직은 더 지켜봐야 되겠지만, 코이치의 합류를 경환은 내심 반기고 있었다. 이제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경환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경환의 계획대로 JSC를 얻게 된다면 코이치만한 적임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JSC와의 모든 인연을 정리하시고 다음 달 초까지 가족들과 함께 SHJ본사로 합류하시기 바랍니다. 이전과 관련된 사항은 SHJ-화성의 도움을 받으세요.”

케이스케는 경환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케이스케는 경환이 JSC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코이치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환을 만난 이유는 코이치의 날개를 SHJ의 울타리에서 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JSC의 앞날이 불투명해진다 하더라도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되겠지만, 조만간 이번 이 사장님의 결정에 답례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케이스케를 경환은 독촉할 생각은 없었다. FPSO에 대한 낙찰가는 아직 자신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가벼운 묵례로 케이스케의 결단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미팅을 정리한 경환은 시간을 확인하며 서둘러 공항으로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정 사장, 서울시와는 일정을 조정했습니까?”

“네, 회장님. 이번 달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3일 동안 성수대교의 안전점검을 하기로 합의는 했지만, 서울시에서는 갑작스런 저희의 요청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최준석은 KBR에서 성수대교를 지목한 이유를 아직까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것은 정기명도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성수대교를 지목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저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토목과 플랜트를 묘하게 접목시킨 성수대교가 KBR의 관심을 끌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1979년 완공된 성수대교의 설계도를 최준석은 살펴보고 있었다. 자신이 맡았던 공사는 아니었지만,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 부실자재 사용과 무리한 공기단축이 분명 있었을 거란 사실은 쉽게 예측이 가능했다. KBR이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성수대교를 지목하는 바람에 최준석의 심기를 편하지 못했다.

“설계팀과 기술팀으로 점검반을 구성해서 철저히 점검을 하도록 지시하세요. 혹시라도 KBR에 흠이라도 잡힌다면 모두 옷 벗을 각오를 하십시오.”

KBR의 지적을 받게 된다면 국내 건설업체의 조롱을 넘어 해외 공사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정기명은 최준석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는 걸 느끼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박화수 사장의 말로는 KBR의 점검 팀에는 다수의 공학박사들이 포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점검에 서울대학교와 한양대학교의 교수들로 전문가팀을 따로 구성을 해서 이중으로 점검을 할 계획입니다. 사용된 볼트 하나까지 확인을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정기명의 말을 들을 후에야 최준석은 겨우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KBR이 알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답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정 사장도 잘 알겠지만, 중동경기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KBR의 공사는 반드시 우리가 따 내야 됩니다.”

최준석의 다그침에 정기명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룹 내 라이벌인 김환기는 이미 중원그룹과의 합작을 마무리하고 실질적인 매출증대에도 기여를 하고 있어 자신보다 한발 앞서 나가고 있었다. 한국통운으로 인해 KBR이라는 골치 아픈 떡을 손에 받아 든 정기명은 진퇴양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번 KBR과의 사업이 실패하게 된다면 자신은 사장직함을 놓아야 된다는 절박감이 정기명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안전점검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숨이 막혀 최준석의 얼굴을 바로 쳐다 볼 수 없었던 정기명은 도망치듯 회장실을 벗어나 점검 팀이 기다리는 회의실로 빠르게 움직였다.

휴스턴에 도착한 경환은 주차장에 주차된 차를 몰아 회사가 아닌 집으로 서둘러 향했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수정이 걱정도 되었고 결혼 후 처음으로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수정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기 고생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굴이 이렇게 상한 거예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어머님께 인사부터 드리고 나와요.”

“어머니, 장모님. 저 왔습니다.”

경환의 목소리에 두 어머니는 서둘러 방에서 나와 경환을 반겼다.

“이 서방. 고생했네. 난 저녁상을 볼 테니까 어서 씻고 나와.”

“고생했다. 아버지가 오랜만에 널 봤다고 좋아하시더라. 옷부터 갈아입고 나와서 같이 식사하자.”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경환은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급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었다. 수정은 경환을 따라 들어와 양복을 받아 걸면서 경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경환은 남산처럼 나온 수정의 배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은 후에 수정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

“항상 자기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해. 내가 복이 많은 놈인 건 확실한 거 같아. 자기 같은 여자가 내 아내가 된 사실을 보면 말이지.”

“치, 그거 이제 알았어요? 결혼 후 처음으로 자기하고 떨어져 있다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자기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사실도 알았고요.”

수정은 나온 배 때문에 경환에게 안겨있기가 버거웠지만, 오랜만에 만난 경환의 품을 떠나기가 싫었다. 수정은 고개를 들어 경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경환은 그런 수정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깊은 입맞춤으로 그 동안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학교 다니기 힘들면 중단해도 돼. 정우까지 태어나면 학교까지 병행하기 어렵지 않겠어?”

경환이 수정을 학교에 입학시킨 이유는 아이를 갖는 것을 최대한 늦춰보기 위한 꽁수였지만, 이미 임신을 한 상태에서 학교를 더 이상 다닐 필요는 없었다.

“아직은 괜찮아요. 정 힘들면 그때 자기한테 부탁을 할게요. 자기한테 이렇게 안겨있으니 너무 편해서 좋긴 한데, 우선 식사부터 해요.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 식사한 후에 몸을 좀 담가 봐요.”

“그럴게. 이따 같이 하자.”

수정은 부끄럽다는 듯이 경환을 흘겨봤지만,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주방으로 나온 경환은 두 어머니들이 준비한 풍성한 저녁식탁을 바라보고 오랜만에 식욕이 당기기 시작했다.

“역시 집 밥이 최고네요. 간만에 포식을 하게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사돈하고 같이 나가서 장을 좀 봐 왔네.”

음식의 맛을 본 경환은 오늘 만든 요리가 장모님의 솜씨란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음식솜씨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맛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띵동~, 띵동~.’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경환은 급히 문을 열었고 문 밖에는 최석현과 케이티가 서 있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경환을 무시하고 최석현은 케이티의 손을 잡고 쳐들어 왔다.

“사장님, 맛있는 냄새가 요동을 쳐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밥 좀 주십시오.”

뻔뻔스러운 최석현의 모습에 경환은 혀를 찼지만, 경환의 어머니는 서둘러 밥을 푸고 있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첫날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최석현을 경환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케이티가 임신을 했다고 하더구나. 음식냄새를 못 맡을 정도라고 해서 당분간 여기서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최 차장님, 축하합니다. 드디어 아빠가 되시네요. 뉴욕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그때인가요? 하하하.”

경환은 그런 사실도 알지 못하고 최석현을 나무라려던 것이 미안했던지 격하게 축하를 해 주었다. 게이티는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졌고 최석현은 머리만 긁적거리다 고개를 끄떡였다. 두 사람을 식탁으로 이끈 경환은 같이 식사를 했고, 입덧이 아무래도 케이티의 식성을 바꿨는지 평소 한국음식을 잘 먹지 못해 고생을 하던 케이티가 김치와 된장찌개를 정신없이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사장님도 오시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경환은 황태수가 마음에 걸렸다. 식사를 하면서 코이치에 대한 말도 미리 꺼내는 게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황 부사장님은 퀄컴 투자자금 때문에 쿡 부사장님과 사무실에서 회의 중이실 거예요. 먼저 퇴근을 하라고 하셔서 저 먼저 나왔습니다.”

회사로 전화를 해 보려고 생각했지만, 둘에게 일정부문 회사의 경영을 맡긴 이상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경환은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는 최석현에 위기감을 느끼고 급히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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