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77화 (5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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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77

    쉴 새 없이 진행되는 강행군은 경환의 몸을 지치게 만들어 가고 있었지만,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수정을 위해서라도 일찍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박화수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몸을 싣고 최승호를 만나기 위해 마산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얼마나 술을 드셨으면 얼굴이 이틀 사이에 이렇게 망가지셨습니까?”

    첫날은 왕샹첸에 둘째 날은 장성궈에 의해 술로 곤죽이 돼 버린 경환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있었다. 박화수는 무리하게 출장일정을 수행하는 경환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술을 즐기지 않다 보니 좀 힘은 드네요. 공장직원들은 최 전무님이 잘 다독거리고 있겠죠?”

    “직원들의 동요는 많이 잠재워진 상태입니다. 최 전무님 덕분에 기대감도 많아졌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더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번 인수 작업에 최승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을 할 수 없었다. 경환은 최승호의 거절에도 5%의 지분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공장 직원들의 사기를 올리고 공장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아동건설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성수대교를 통보했더니 상당히 당황을 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성수대교를 지목하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성수대교는 시공 당시 기존의 다리와는 달리 강트러스트 공법을 적용한 다리였다. 기존의 공법과는 다르게 수많은 볼트와 강철판을 접합으로 연결시켜 응력을 발휘하도록 설계된 다리로 플랜트의 지평을 열었다고 할 정도로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기술력으로는 상당히 무리가 따른 시공이었고,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해 강철판의 피로균열을 막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플랜트기법이 적용된 획기적인 다리인 만큼 성수대교를 선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아동건설의 기술력과 시공능력을 판가름하는 데 손색이 없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줄 수 없었던 경환은 플랜트업체가 플랜트 기법이 적용된 다리를 점검하는 건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아동건설에서는 서울시와 점검일정을 조율하고 있다고 합니다. KBR이 점검을 하기 전에 미리 점검을 할 생각인 거 같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고민들로 인해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승용차는 마산톨게이트를 지나 빠르게 공장으로 진입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살길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님께서 존대를 해 주시니 너무 어색하네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많이 아쉬우셨을 텐데 개인적으로 전무님이나 최 사장님에겐 죄송합니다.”

    사무실의 많은 빈자리가 경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자신의 살길을 찾아 떠난 사람들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떠난 사람들 보다는 아직까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었다.

    “전무님, 공장의 전 직원들을 잠시 모이게 해 주십시오.”

    경환의 부탁을 받은 최승호는 사무직직원과 현장직원들을 공장 앞마당으로 전원 소집시켰다. 알던 젊은 직원들이 많이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다행히 경험 많은 기술자들이 눈에 많이 보이자 경환은 얼굴이 밝아졌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SHJ의 이경환입니다. 저를 다들 기억하시리라 봅니다. 예전에 저를 못살게 하셨던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시네요.”

    경환의 농담에 모인 직원들은 크게 웃었다. 예전 자신들과 함께 현장 밥을 먹어가며 몸을 부딪혀온 경환에 대해 큰 기대를 하는 눈치들이었다.

    “어떡하다 보니 회사이름이 SHJ-화성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중국으로의 공장이전은 백지화 하겠습니다. 또한 삭감된 임금은 원상태로 복귀시키고 삭감으로 인해 줄었던 임금은 소급 적용해서 일괄 지불해 드리겠습니다.”

    경환은 직원들의 사기를 돋우는 방법은 막연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거 보다는 어려운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경환의 말에 직원들은 밝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앞으로 SHJ-화성플랜트는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인해 발생된 이익을 저 혼자 먹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직원들의 복지와 근무환경을 누구에게 내 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들겠다는 것을 약속드리며 국내에서 가장 많은 급여를 주는 회사로 성장시켜 보겠습니다. 아무쪼록 박화수 사장과 최승호 전무를 믿고 여러분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경환은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여 자신의 말이 진심임을 확인시켰고 이런 마음을 전달받은 직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경환에게 화답을 해 주었다. 직원들과 간단하게 회식을 마친 경환은 바삐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제가 내일 오전 급한 약속이 있어 올라가야 됩니다. 공장은 전무님이 계시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처럼 직원들을 잘 다독여 주십시오.”

    최승호는 오랜만에 만난 경환과 술 한 잔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지만, SHJ를 이끌어야 되는 경환을 이해하고 있었다.

    “조심해서 올라가십시오. 다음에 오시게 되면 오늘처럼 그냥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공장은 박 사장과 제가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고 경환과 최승호는 굳은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공장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경환과 박화수는 서둘러 서울로 향해 차를 몰았다.

    “눈 좀 붙이십시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본가보다는 호텔에서 쉬시는 게 좋으실 거 같습니다. 회사 앞 르네상스 호텔로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그래야겠네요. 운전하시는 데 죄송하지만, 눈을 좀 감아야 될 거 같습니다.”

    박화수의 요청을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정도로 경환의 몸 상태는 좋지 못했다. 내일 오후 미국 행 비행기로 예약을 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은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같은 시각 롯데호텔 스위트룸에는 두 인물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장님, 신생기업인 SHJ와의 협력에 불만의 시선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미국기업이긴 하지만, 기업의 오너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신경 쓰지 말거라. 나도 코이치 네 제안이 JSC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번 경환과의 만남을 어렵게 추진한 타케우치 코이치는, 회장이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인 타케우치 케이스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1920년대 말 설립된 JSC는 일본의 대표적인 플랜트 엔지니어링 회사로 정유, 가스, 석유화학플랜트의 설계와 시공분야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업체로 1960년대부터 세계플랜트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 말부터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이조선이 경쟁에 참여하고 플랜트 후발국가인 한국의 저가공세와 엔고현상에 따른 채산성 악화 등의 문제들이 터지는 바람에 회사설립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보고 있었으며 이것은 곧 심각한 경영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돌파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서울사무소장으로 있던 코이치의 제안을 받아들여 회장인 케이스케가 직접 현해탄을 건너왔다.

    “KBR은 우리도 경쟁하기가 꺼려지는 업체입니다. 그런 업체의 컨설팅을 맡아 연이어 입찰에 성공을 시키는 것을 보면 SHJ의 능력은 증명이 된 거라고 봅니다.”

    케이스케는 첩의 자식인 코이치가 항상 마음에 걸렸다. 본처의 자식이었다면 기업을 물려줬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었지만, 본처 자식들의 시기를 염려해 서울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내서 보낸 것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코이치는 한 번도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을 정도로 항상 거리를 두는 모습을 케이스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SHJ의 사장이 상당히 젊다고 하던데, 보통은 아니겠군.”

    “나이만 보시지 마십시오. KBR을 손안에 넣고 휘저을 정도면 절대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소문에는 대형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JSC의 위기를 돌파할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장님.”

    코이치는 지난번 황태수와의 만남을 통해 SHJ의 행보를 일부 확인하고는 매우 놀랐었다. 오성건설을 통해 SHJ의 실체를 일부 확인했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빠르게 확대해 가는 SHJ의 모습을 보며 JSC의 돌파구를 SHJ를 통해서 찾아보려고 했다. 많은 경영진들의 반대에도 회장을 직접 설득해 이 자리에 오게 만든 이유로 그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피곤하니 오늘은 이만 쉬자꾸나.”

    중요한 만남을 앞두고 케이스케는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했다.

    간만에 피곤을 풀은 경환은 살 거 같았다. 수정의 잔소리에도 나이만 믿고 운동을 하지 않았던 경환은 이번 출장을 통해 절실히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수명이 92세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나이까지 골골거리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JSC에 대한 만남을 준비하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2000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리엔지니어링을 통해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양질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서 대 반전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JSC을 자신의 품에 들어오게 할 수만 있다면 SHJ는 직접 수주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JSC의 경영위기가 극에 달하는 1999년을 타깃으로 삼고 작업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당분간 JSC가 성공하는 프로젝트를 최대한 막아야 했다.

    “반갑습니다. SHJ의 사장 이경환입니다.”

    “JSC의 회장 타케우치 케이스케라고 합니다.”

    노쇠한 케이스케의 눈빛만큼은 20대 못지않은 날카로움이 보이고 있었다. 경환은 쉽지 않은 노인네라는 생각에 기선제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저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제가 오후비행기로 미국에 돌아가야 됩니다. 미사여구를 빼고 말씀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이 사장님이 젊어서 그런지 성격이 급하시군요. 뭐, 좋습니다. 저희 JSC에 대한 컨설팅을 의뢰에 대해 협의를 해 보고 싶습니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케이스케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은 거만한 표정으로 제안을 하고 있는 케이스케를 보면 경환은 슬쩍 미소를 보였다.

    “거절합니다. SHJ는 현재 KBR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최우선적으로 KBR을 컨설팅하고 있기 때문에 JSC의 컨설팅은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먼 길 오셨는데 좋은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단칼에 제안을 거절하는 경환을 케이스케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플랜트 업계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JSC 회장인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생각에 케이스케의 표정은 급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거절하시는 본심을 알고 싶습니다. 저희가 일본기업이라는 이유인가요?”

    경환은 물론 일본이라는 나라는 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비즈니스는 정치논리와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비즈니스에 정치논리를 적용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죠. 망해가는 기업과 손을 잡기가 꺼려지기 때문입니다. JSC는 미쓰비시와 미쓰이의 추격에 시장이 잠식되고 있고, 엔고현상에 따른 원자재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불량품 증가와 채산성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기업의 덤핑을 막을 힘도 없고요. 제가 왜 이런 JSC와 손을 잡아야 되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케이스케는 경환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JSC에 대해 분석을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코이치는 급하게 중간에 끼어들었다.

    “이 사장님, 물론 JSC가 힘든 상황이란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JSC의 저력까지 무시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JSC가 위기인 만큼 SHJ는 더 큰 메리트가 있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코이치를 직시했다. JSC의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장님의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나 SHJ는 아직까지는 KBR의 눈치를 봐야 되는 기업입니다. JSC를 얻고자 KBR을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코이치는 마땅히 경환을 설득할만한 떡밥을 찾지 못했다.

    “대현중공업과 KBR를 SHJ에서 컨설팅해서 FPSO 프로젝트를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케이스케의 갑작스런 제안에 경환의 눈은 심하게 흔들렸다. 일본기업에서도 이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떤 제안이 나올지 불안 반 기대 반으로 케이스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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