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67화 (25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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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7

    어렵게 KBR의 설득을 이끌어 낸 SHJ의 사무실은 인원들이 빠져서인지 조용하기만 했다. 일주일 후에 있을 입찰에 맞춰 황태수가 팀을 이끌고 나이지리아로 떠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미국에 온 후로 쉴 새 없이 일에 빠져있던 경환으로서도 간만에 찾아온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93년도 얼마 남지 않은 11월이지만, 휴스턴의 태양은 아직도 뜨겁기만 했다.

    의자를 뒤로 빼 휴스턴 거리를 감상하던 경환은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님, 저 경환입니다. 잘 지내시죠?”

    ‘어, 이 서방. 요새 수정이가 입덧이 심하다고 하던데 고생이 많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일일이 말을 전할 수는 없었다. 수정의 입덧은 특이하게도 간장게장, 곰탕, 심지어 선짓국까지 평소에도 즐겨 먹지 않던 한국음식을 찾는 통에 경환도 죽을 맛이었다.

    “어머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미국 비자는 받아 놓으셨나요?”

    ‘당연하지. 자네가 미국에 들어가자마자 사돈들과 함께 미국비자를 받아 놨지. 10년짜리야 이 서방. 호호호.”

    다행히 비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경환은 안도할 수 있었다. 학교생활과 임신으로 지쳐있는 수정이를 위해 경환은 장모님을 모셔올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어머님, 수정이도 혼자라서 외롭고 저도 경험이 없다 보니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어머님이 수정이 옆에 계셔 주시면 수정이가 많이 의지가 될 거 같은데, 와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보게.’

    장인어른과 상의라도 하는 듯 오랫동안 수화기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장모님을 모셔올 수만 있다면 미국에서 처음 맞는 수정의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손색이 없을 거라고 경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 장인어른도 그러라고 하시는데 내 바로 준비를 해서 자네에게 다시 연락을 주겠네. 그런데 나 혼자만 가면 사돈께 미안하니 자네가 사돈어른께 전화를 드려 같이 갈 수 있게 해 봐. 괜히 서운해 하실 수도 있으니, 난 모른 척 하고 있겠네.’

    ‘하~.’

    경환은 장모의 말을 듣고서야 큰 실수를 할 뻔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장모만 미국으로 불렀다면 자신의 어머니는 분명 서운해 할 수도 있다는 걸 놓치고 있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제가 그 생각은 하지 못했네요. 어머니에게는 제가 따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항공권은 제가 따로 준비를 해 드릴 테니, 오실 준비를 미리 해 주십시오.”

    경환은 장모와의 통화를 끊고는 급히 본가에 전화를 돌렸다.

    퇴근을 해 집에 도착한 경환은 심한 입덧으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수정을 안타깝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을 태어나려고 그러는지 수정은 오렌지 주스한잔도 넘기지 못하고 있어 나오는 배와는 달리 얼굴은 핼쑥해져만 가고 있었다.

    “뭐라도 좀 먹어야 될 텐데, 걱정이야.”

    “자기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내 걱정하지 말고 뭐 좀 먹어요.”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물만 마시고 있는 수정을 보고 있으려니 경환도 음식이 입으로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자기야, 며칠 후면 서울에서 엄마와 장모님이 오시기로 했으니 좀 만 참아보자.”

    경환의 말에 수정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뛰어와 경환의 품에 안겼다. 여자는 임신을 하면 엄마를 가장 많이 보고 싶어 한다고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수정이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고마워요. 나 사실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요.”

    “자기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더 빨리 모셨어야 되는데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네. 삼일 후에 도착 하시니까 그때까지만 견뎌봐.”

    “알았어요.”

    경환은 조용히 수정을 안아 주었다. 집 밖으로 보이는 큰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은근히 비춰지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까라는 상념에 빠지기도 했지만, 전생의 모습을 기억해 내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보다는 충분히 행복했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가족이던 사업이던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경환에게 최우선은 가족이었다. 지금의 수정도, 앞으로 태어날 아기도, 그리고 손꼽아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 희수도, 어느 하나 경환으로서는 놓칠 수 없었다. 가족을 위해 일에 매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환은 전생의 처절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사업을 궤도 위에 안착을 시켜야만 했다.

    아프리카의 날씨는 휴스턴의 살인적인 더위도 한 수 접어 줄 정도로 서있기 조차 아니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나이지리아 수도인 아부자에 도착한 SHJ와 KBR 입찰 팀들은 대여한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잭, 사람을 아주 미치게 하는 더위네요. 호텔에 도착해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하하, 난 사우디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참을 만합니다. 직원들이 다들 지쳐 보이니 우선 호텔부터 빨리 가도록 합시다.”

    황태수는 중동출장이 잦아 이런 더위를 경험해 보긴 했지만, 천성적으로 더위는 참지 못하는 체질이다 보니 나이지리아의 더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오랜 중동 현장에서 생활을 했던 잭은 오히려 이런 더위가 익숙해서인지 땀도 많이 흘리지 않는 모습을 황태수는 신기한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버스는 도로사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리는 듯 한참을 요동친 후에야 아부자에서 고급호텔로 손꼽히는 트랜스콥 힐튼호텔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머물러야 되었기에 서둘러 체크인을 마친 일행들은 긴 비행시간과 더위를 식히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빠르게 이동을 하고 있었다.

    “T.S, 우리는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합시다.”

    잭의 요청을 받은 황태수는 흔쾌히 동의를 하고 각자의 짐을 벨 보이에게 맡긴 후 실외 수영장이 한눈에 보이는 일층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레스토랑에는 많은 외국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제임스가 윌리엄을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KBR이나 SHJ에 이번 입찰은 독배가 될 수도 있어 마음이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경영진들이 판단을 내린 것이니 나나 잭은 최선을 다해 입찰에 성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공을 해도 걱정이기는 하지만, SHJ도 KBR이 손해를 크게 보지 않도록 최대한 협조를 할 겁니다.”

    황태수의 말에도 잭은 어렵다는 듯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황태수와 잭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고 있을 무렵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인물이 황태수 테이블로 이동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SHJ의 황 부사장님 아니십니까? 입찰 때문에 서둘러 오셨나 봅니다.”

    황태수는 마시던 맥주를 급히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대후건설의 이만수 부장이 아는 척을 하고 황태수에게 악수를 청해 오고 있었다. 국내에서 같은 해외영업부장을 맡고 있었기에 안면은 있는 사이였지만 서로 말을 섞을 정도의 친분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살갑게 다가오는 이만수가 황태수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네, 이 부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대후건설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괜히 저희가 들러리 서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저희야 말로 KBR과 SHJ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이만수는 황태수와 같이 있는 사람이 KBR의 잭 무어란 사실을 진작에 알았으면서도 황태수의 의향을 떠 보고 있었다.

    “이번 입찰을 주관하는 KBR의 잭 무어란 분입니다. 이렇게 되었으니 서로 인사를 나누시죠.”

    황태수의 소개에 두 사람은 각자의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입찰을 하기 전 경쟁사와 자리를 함께 한다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이런 자리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정보를 빼낼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초짜들이 아니란 게 문제였다.

    “저희도 맥주를 한잔씩 하고 있는데 두 분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희와 합석을 하시겠습니까? 경쟁은 경쟁이고 어차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인데 친분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만.”

    이만수의 제안에 황태수는 가벼운 미소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잭을 향해 말을 건넸다.

    “대후에서 자리를 같이 하자고 하네요. 특별히 손해 보는 게 아니라면 저는 자리를 같이 해 보려고 하는데, 잭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잭은 황태수의 제안에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자신이 대후건설과 입찰 전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특히 한국인들 사이에 멀뚱하게 앉아 있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T.S만 합석을 하는 거로 합시다. 저는 마침 TOTAL의 뱅상이 와 있다고 하니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잭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해주는 모습을 확인한 황태수는 이만수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황 부사장님, 황 부사장님이 오성건설을 그만 두셨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대후로 모시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었습니다. SHJ로 합류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입찰을 총괄하기 위해 나이지리아로 직접 온 김준성 상무가 황태수의 얼굴에 금테를 둘러주기 시작했지만, 황태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황태수 또한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영업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상무님께서 금테를 칠해 주시니 몸 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김준성은 아쉬운 눈빛으로 황태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준성은 황태수가 오성건설을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을 듣고 그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었다. 플랜트 해외영업으로는 대후도 황태수를 따라갈 인물이 없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부장이 아닌 이사 직급으로 황태수를 유혹했지만, 경쟁업체로 갈 수 없다는 황태수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SHJ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신생업체에서 황태수를 영입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탄식을 했을 정도였다.

    “황 부사장의 자리는 우리 대후에 항상 마련해 놓고 있으니 언제든지 연락만 주시면 됩니다. 그건 그렇고 황 부사장께서는 이번 입찰을 어떻게 보십니까?”

    김준성은 황태수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며 슬쩍 입찰에 대한 황태수의 생각을 물었다. 황태수는 김준성을 향해 웃어주며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김준성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을 하지만, 모든 결정은 KBR에서 하는 만큼 SHJ는 지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사장님께서는 자신을 하고 계시지만, 대후건설이 괜히 대후건설이겠습니까? 저희 실무진들은 그저 결과만 지켜볼 뿐입니다. 그나저나 여기 더위는 참기도 힘들고 시간이 후딱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대후는 이번에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신 거 같아 보입니다.”

    자신의 패를 보이지 않고 상대의 패를 읽기 위해 두 사람은 피 터지는 싸움이상으로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맥주병을 크게 들이킨 김준성은 손으로 대충 입 주위를 훔쳤다.

    “저희야 뭐 그럭저럭 준비는 했습니다. 황 부사장님께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손해를 보지는 않겠지만, 이득도 볼 생각이 없습니다. 하하하.”

    황태수는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김준성의 도발 섞인 말에 쉽게 대응을 하기가 곤란해서였다.

    “맥주 잘 마셨습니다. 입찰이 끝난 후에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그럼 이만.”

    황태수는 남은 술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 있는 모습으로 레스토랑을 빠져 나갔다.

    “이 부장, 입찰가 최대한 낮추도록 해.”

    “상무님, 더 이상 낮추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금액도 마진을 장담 못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석유야. 이깟 플랜트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어. 황태수가 여기까지 왔다면 KBR과의 의견이 조율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걸 뜻하는 거야. 황태수는 우리의 전략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테니 최대한 KBR을 설득을 하려 할 거고. 내 지시에 들어.”

    대후와 SHJ간의 진흙탕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 어머니.”

    수정은 입국장을 빠져 나오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어린아이처럼 팔짝거리며 급히 두 사람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임신한 애가 이렇게 뛰어 다니면 어떡하니. 조심해야지. 우리 집안 첫 손주다.”

    “헤헤, 어머니하고 엄마를 보니 너무 좋아서 그래요. 죄송해요.”

    “장모님, 엄마. 잘 오셨어요. 오래 계시면서 구경도 많이 하시고.”

    “이 서방, 불러줘서 고마워. 서울은 추운데 여기 날씨는 아주 맘에 드는데.”

    경환의 전화를 받자마자 두 어머니들은 미리 준비를 했다는 듯 경환이 준비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경환은 서둘러짐을 받아 차에 실은 후 집으로 향했다.

    “너희는 어째 북경도 그러더니 미국집도 이렇게 크냐? 여긴 집값도 비싸다던데.”

    경환의 어머니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고 수정은 두 분이 한국에서 준비해온 밑반찬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 동안 입덧으로 인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모습과는 달리 다른 사람의 말이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온통 먹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희와 거래하는 업체에서 싸게 임대를 줘서 그렇게 비싸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수정이가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너무 맘이 놓여서 좋네요. 정말 잘 오셨어요. 손주 낳는 거까지 보셔야 됩니다.”

    그 동안 커 보이던 집이 사람이 사는 집다워 보였다. 두 분을 환영하기 위해 황태수 아내와 케이티가 집을 방문했지만, 오히려 두 어머니는 넉넉히 싸온 밑반찬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두 어머니의 미국 방문에 경환은 수정을 당분간 두 어머니께 맡기고 일에 전념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만큼 지금은 SHJ나 경환에게는 중요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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