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66화 (258/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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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66

    서소문동을 다시 찾은 박화수는 감회에 빠져 들었다. 자신의 청춘을 이 서소문동에서 보냈지만 결국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생각하며 박화수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SHJ에 합류한 후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일에 매진 중이었지만, 지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화성산업의 인수 작업이 자신의 손에서 마무리 하게 된다면, 오성건설에서는 꿈꿀 수 없었던 사장자리를 이미 경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뒤에서 경환과 황태수가 밀어 준다면 화성산업을 글로벌 플랜트제작기업으로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박화수는 미국출장에서 화성산업 인수와는 별개로 받은 경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급히 발걸음을 옮겨 국내 최대 물류회사인 한국통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6층 사장실 앞에 도착한 박화수는 심호흡을 크게 내쉰 후 사장실 문을 열었다.

    “SHJ의 박화수 부장입니다. 사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젊은 여비서는 박화수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화수를 안내해 사장실 문을 열었다. 사장실 안에는 세 명의 인물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고 박화수는 빠르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SHJ의 박화수 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통운의 김환기 사장입니다. 이 분들은 민수영업본부장과 해외영업본부장입니다. 어서 앉으시죠.”

    김환기의 맞은편에 앉은 박화수는 비서가 가지고 온 커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중국의 중원그룹의 제안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한국통운이 중국에 진출을 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SHJ의 제안을 검토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국내 최대 물류회사인 한국통운은 아직까지는 중국진출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넘쳐나는 국내 물동량을 처리하기에도 벅찬 상황이었고 중국과 수교가 된지 일 년밖에는 되지 않은 까닭에 한중간의 물동량은 생각하는 거 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중국최대 물류기업인 중원그룹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한국통운이 아직 중국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중원그룹은 중국최대 물류기업이자 최대 선사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물류기반이 아직은 약하기 때문에 선진 물류를 접목시키길 원하고 있습니다. 저희 SHJ는 그 파트너가 한국통운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을 해서 오늘 찾아 뵌 것입니다.”

    박화수의 말에도 김환기는 좌우의 본부장들을 한 번씩 쳐다볼 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표정은 아니었다. 박화수는 한국통운보다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 이번 중원그룹과의 합작에 큰 관심을 보이고 접근하고 있는 한진을 마다하고 있는 경환을 아직까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통운이 제안을 받아 들리지 않고 미적거린다면 경환의 지시가 있었다 하더라도 한진과 별도 미팅을 할 생각이었다. 주는 떡을 먹지 않겠다는 놈한테 억지로 입에 넣어줄 생각은 없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중원그룹에서 정확히 원하는 범위가 어떤 것인지요?”

    국내영업을 총괄하는 권현수 상무가 나서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중원그룹에서 원하는 합작범위는 중국내륙의 물류기지 설치와 물류 통합관리 시스템을 접목시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물류의 통합관리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실 한국통운의 일본파트너인 일본통운이 꾸준히 중원그룹과의 합작을 제안해 오고 있지만 국민정서를 감안해 한국에 먼저 손을 내민 겁니다.”

    “흠~.”

    한국통운은 국내의 통합물류시스템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투자된 비용과 노력을 중국에 그냥 내 놓을 수는 없었다.

    “저희가 수년간에 걸쳐 완성시킨 물류시스템을 합작이라는 명분으로 중국에 그냥 내 놓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김환기의 말을 이해를 못하는 박화수가 아니었다.

    “중국과의 수교 이후 한중간 이뤄지는 물동량은 급속도로 증가할 겁니다. 중원그룹과의 합작은 한국통운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물론 물류시스템을 중국에 제공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통운이 아니더라도 십 년 안에는 중국도 분명 물류통합시스템을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박화수의 설득에도 김환기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저희에게 제안을 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검토를 해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국과의 합작이 저희에게 어떤 이득을 줄 건지에 검토를 해 보겠습니다.”

    명백한 거절의사였다. 박화수는 지금이라도 당장 한진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끝까지 한국통운을 고집하는 경환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이마저도 한국통운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깨끗이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중원그룹과의 합작은 한국통운에 두 가지의 현실적인 이득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득이란 소리에 자리를 정리하던 김환기는 급히 호감을 보였다. 매출 1조원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전사적으로 영업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통운이었기에 박화수의 제안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이득이란 게 어떤 것인가요?”

    김환기의 흥미를 유발시킨 박화수는 중원그룹의 회사소개서를 꺼내 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중원그룹은 현재 일본 고베에서 조작되는 TS(환적화물)카고를 부산으로 옮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권그룹과 합작이 이뤄진다면 이 컨테이너의 국내 하역권을 한국통운이 갖게 될 것입니다. 해외영업본부장님이 있으니 중원그룹의 컨테이너 물동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중국의 컨테이너 물량의 대부분은 중원그룹의 선박을 이용하여 수출입이 되고 있었다. 유럽과 미주를 연결하는 TS카고가 고베에서 부산으로 옮겨지게 된다면 한국통운의 사활을 걸고서라도 하역권을 획득해야만 했다. 반대로 말해서 중원그룹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 물량을 한국통운과는 요원해 질 수밖에 없었다.

    김환기는 해외영업본부장인 박구현 상무를 쳐다보았다. 박구현은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이 제안을 놓치면 안 된다는 신호를 김환기에게 보내고 있었다.

    “흠~, 저희 입장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제안이시군요.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박 부장님께서 두 가지를 거론 하셨으니, 다른 한 가지도 궁금해지는군요.”

    능구렁이 같은 김환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박화수는 그런 김환기를 보며 대기업을 이끄는 사장자리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저희 SHJ에 대해 먼저 설명을 드려야 될 듯 합니다. 저희는 플랜트 컨설팅을 하는 업체입니다. 사장님께서는 SHJ가 생소하시겠지만 한국통운의 모기업인 아동건설은 저희에 대해서 알 수도 있을 겁니다. 이번 중원그룹과의 합작이 원만하게 진행이 된다면, SHJ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토목건설 부분을 아동건설에 의뢰할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SHJ는 현재 미국의 KBR과 함께 나이지리아 석유화학단지 입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박화수의 두 번째 제안에 김환기는 급히 메모를 시작했다. 그룹의 생리상 계열사 사장이라 해도 회장의 눈 밖에 난다면 다음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반대로 회장의 눈에 든다면 계열사 내의 입지를 확실히 굳혀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SHJ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김환기에게는 회장의 신임을 얻기에 좋은 기회였다. 박화수의 제안을 마다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SHJ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겠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박화수가 한국통운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때 휴스턴 KBR 본사에서는 저녁 8시가 넘어서도 황태수와 잭의 설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이지리아로 출국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최종 입찰가가 아직 확정이 되지 않았다. 황태수의 끈질긴 설득에도 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미스터 무어, 금액을 낮추기 어렵다는 것은 나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이 금액으로 조정이 되지 않는다면 입찰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대단위 프로젝트를 손해를 보면서까지 참여를 할 수도 없는 입장 아닙니까. 손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는 문제이고요. 대후의 입찰가가 이정도 수준이라면 대후가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잭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황태수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잭을 설득하는 황태수는 어딘가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자신도 이 프로젝트의 입찰가는 KBR이 제시한 12억 7천만 불이 마지노선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잭의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더 큰 이익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걸 놓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황태수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잭은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의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미스터 황, 이건 내 선에서 결정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윌리엄이 컨펌 한다 해도 경영진을 쉽게 설득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FPSO 3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우리가 성공을 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다.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FPSO 사업을 위해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잭은 윌리엄과 달리 FPSO 프로젝트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선박제조 경험이 전혀 없는 KBR이 FPSO 입찰에 뛰어든다는 것은 큰 모험이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는 반드시 FPSO 프로젝트에 참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잭의 고민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FPSO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부분을 저희 SHJ가 컨설팅을 해 드릴 생각입니다. 잭의 부정적인 시각이 바뀌었으면 좋겠군요.”

    “SHJ의 정보력에 의문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KBR에서도 선박건조는 생소한 분야기 때문에 솔직히 불안한 건 사실입니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비슷한 나이인 두 사람은 이번 입찰을 준비하면서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잭도 황태수가 풍부한 입찰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황태수의 조언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이번 최종 입찰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어긋나고 있었다.

    둘의 의견에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경환은 윌리엄의 초대를 받아들여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윌리엄 또한 경환이 제시한 낙찰가가 맘에 들지 않아서인지 접시에 놓인 잘 구워진 양고기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잭도 나처럼 쉽게 결정은 못 하겠군.”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저라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니까요.”

    경환은 윌리엄과는 달리 양고기를 썰어 입으로 넣으며 윌리엄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넸다. 경환도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지만, 윌리엄 앞에서 초조한 모습을 들킬 수는 없었다.

    “제임스, 왜 입찰가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주지 않았나? 미리 검토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경환은 포크와 나이프를 조용히 내려놓은 뒤 냅킨을 들어 입 주위를 닦았다.

    “윌리엄에게 미리 정보를 줬다면 아마 포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대후를 이기기 위해 저는 다른 기업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제가 KBR을 너무 사랑하고 있나 봅니다. FPSO는 제가 반드시 윌리엄의 입 안에 통째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12억 4천만 불이 필요합니다.”

    윌리엄은 차이가 나는 3천만 불에 대해 그룹 회장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여기에서 손을 놓는다면 자리는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번 입찰에 성공을 한 후 FPSO 입찰에 실패를 하게 된다면 KBR에서 자신의 사무실은 없어 질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민이 되는 건 사실이네. 자네의 제안을 수락하려면 내 목을 걸어야 되네.”

    윌리엄의 말이 진심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경환 또한 모든 것을 걸고 있었기에 윌리엄을 설득해야만 했다.

    “저희가 받기로 한 컨설팅 비용에서 일부 플랜트 제작과 토목건설업체를 소개시키는 옵션으로 오백만 불을 인하하겠습니다. 그래도 2천 5백만 불은 여전히 KBR의 몫으로 남겠지만, SHJ도 최대한 협조를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윌리엄은 경환이 오백만 불을 받지 않겠다는 소리에 흠칫 놀라긴 했지만, 오백만 불로는 자신의 고민을 해소 시킬 수는 없었다.

    “자네 FPSO에 대한 확신은 가지고 있는 건가? 이 건이 실패하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고 SHJ도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한데 말이야.”

    경환도 사실 백프로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FPSO는 영국과 일본이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두 나라와의 경쟁이 쉽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확신을 줘야만 했다.

    “윌리엄, 영국, 일본과 경쟁을 해야 되긴 하지만 자신 있습니다. 아니 저나 윌리엄에겐 무조건 성공을 시켜야만 될 이유가 명백하지 않습니다. 큰 도박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만큼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득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윌리엄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주먹으로 탁자를 힘껏 내리치고는 경환을 바라봤다.

    “제임스, 자네를 믿겠네. 내 목을 저당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회장을 설득시켜 보겠네. 난 석유화학단지 입찰을 반드시 성공 시킬 테니, 자네도 자네의 목을 걸고 FPSO를 성공시켜 나한테 가져다주게.”

    윌리엄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경환은 긴장이 풀리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윌리엄은 앞에 놓인 위스키를 들어 잔에 붓고는 경환에 건배를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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