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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203)화 (203/228)
  • 203화

    강유현은 엄청나게 화를 냈지만, 이 녀석도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백시후의 아이템으로 던전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아직 백시후와 라이수의 꿍꿍이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약서를 썼으니 허튼짓은 하지 못하겠지.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 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럼에도 작동하는 아이템을 바라보며 조금 긴장했다.

    “이건…… 근데…….”

    “아빠, 불편해?”

    “아니, 아니야.”

    그리고 난감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나는 지금 용식이의 품 안에 쏙 안겨 있었다.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아이템은 다 좋은데, 반경 10m 안에 있는 사람들만 데리고 이동할 수 있어서 옹기종기 모이다 보니 이렇게 됐다. 한 번밖에 쓰지 못하는 아이템이라서 최대한 낙오자 없이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또라이들은 다짜고짜 나에게 아이템을 안겨 주더니, 내 주위에 누가 서 있을지를 난폭하게 정하기 시작했다. 밖에는 어떤 난리가 났을지 모르는데, 참으로 태평한 짓이었다.

    결국엔 내가 용식이를 지목해 실드처럼 그의 품에 감싸 안기자, 이놈들이 좀 잠잠해졌다.

    “헤헤.”

    “왜 웃어?”

    “그냥, 아빠가 나보다 작은 게 신기해서.”

    “아…… 하하.”

    무럭무럭 자란 용식이는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말하지만 나도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니다. 비능력자의 평균 신장을 생각하면 나도 꽤 큰 편이다. 하지만 이 S급 이상의 고등급 능력자 놈들이 너무 커서 비교되는 것뿐이었다.

    S급인 용식이도 이렇게 나보다 커져 버렸으니 말이다. 분명 아까는 커져서 싫다느니 어쩌느니 했던 용식이지만, 내가 달래 주자 이제는 완전히 풀어져서는 내 정수리 위에 턱을 얹고 실실거리고 있었다.

    진짜…… 한 번 더 각성할까? 아니면 빙의? 다른 몸에 빙의하면 능력도 신체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건가?

    “이동합니다! 서로 딱 붙어 계세요!”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아이템을 발동할 준비가 다 끝났다. 나는 통솔하는 능력자의 지시에 따라 아이템의 버튼 부분을 꾹 눌렀다. 곧 눈앞이 흐릿해져서 두 눈을 꽉 감았다.

    이제 여기서 나가면 던전 안으로 들어왔던 게이트에…….

    가만, 내가 들어올 때는 헬헤임 던전의 게이트였지만 나갈 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강유현 쪽이 들어왔던 니플헤임 던전 게이트로 나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별안간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어?”

    “아빠……!”

    “으어어!”

    볼썽사납게도 내 몸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누구라도 갑자기 허공에서 눈을 뜬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아빠, 괜찮아?”

    “이진아, 괜찮아?”

    “어어…….”

    그러나 다행히도 내 몸이 추락할 일은 없었다. 용인화한 용식이와 바람 능력을 다루는 이든이 내 몸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슬쩍 둘러보니 다른 능력자들도 워낙 고등급이라 당황하지 않고 각자 잘 내려가 땅에 착지했다.

    이래서 남 좋은 일만 하는 고등급 보조 스킬 능력자는 서럽다니까. 기왕 그런 스킬을 줄 거면 나한테도 적용되면 얼마나 좋아. 물론 발동 조건을 생각하면 좀 애매해지긴 하지만…….

    “대체 이게…….”

    “……박윤성 마스터?”

    밑으로 내려가니 의외의 인물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바로 박윤성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온 오딘 길드의 능력자들이 누군가를 경계하듯 바짝 날이 선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이수?”

    “안녕.”

    마치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를 대하듯, 라이수가 나를 향해 선선히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잠시 멍청하게 그 모습을 쳐다봤다.

    “한이진, 이리 와……!”

    “엇.”

    그런 나를 타박하듯 강유현이 앞으로 나섰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내 시야에서 라이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능력자들이 내 주위를 촘촘하게 둘러쌌다.

    “여전히 철옹성이네.”

    “또 무슨 개짓거리를…….”

    “오해하지 마. 이번엔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내가 시후를 보내지 않았으면 너희들 모두 그곳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을걸?”

    “…….”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통통 튀는 음성이 귀에 꽂혔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백시후를 보내서 우리를 던전에서 빼낸 건 라이수의 짓이었구나. 그런데 대체 왜? 우리가 던전 안에 갇히는 게 라이수로서는 더 좋지 않나. 내가 아직 쓸모 있다고 해도, 백시후가 나만 쏙 빼 가면 됐을 텐데 다른 능력자들도 모두 구출하다니. 라이수답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일단 헬헤임 던전에 들어갔던 게이트 부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니플헤임 던전의 게이트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분위기가…….

    “어라?”

    던전 입구가 보이긴 하는데, 아직 활성화되진 않은 것 같았다. 게이트가 생성되지 않고 잠잠했기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들어가 있었던 던전이니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면 헬이 채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인가?

    그런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입찰이 끝난 던전 게이트는 각 길드에서 관리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도로 한가운데에서 던전이 불쑥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이 엉망이었다. 그나마 통제는 한 건지 비능력자들은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설마 이거 새로 출현한 던전인가? 헬이 말했던 그 요툰헤임 던전? 나는 경악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읏…….”

    기분 나쁜 감각이 몸을 훑었다. 왜인지 저곳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게이트로 추정되는 부분을 바라보자 뒤통수의 머리털이 삐죽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왜 그래?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도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그동안 던전 입구를 보고 꺼림직한 느낌이 든 적이 있긴 해도 이렇게까지 거부감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어서…… 여기서…….]

    [증오……스러운…… 놈들…….]

    “뭐?”

    “……?”

    더듬더듬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용식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식아, 너 뭐라고 했어?”

    “아니?”

    “어…….”

    그럼 누구지?

    나는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는 던전 입구가 또 눈에 보였다. 지금도 무슨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게 무슨 여름에 보는 오컬트 공포 영화도 아니고. 닭살이 쭈뼛 일어나는 팔을 손으로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그딴 건 알고 싶지 않고, 네놈을 여기서 쳐 죽이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평화로워지겠지.”

    “푸핫, 세계 평화?”

    신경 쓰지 못한 사이, 강유현과 라이수 쪽은 이미 한창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분노한 강유현의 주변에 광풍이 몰아쳤다. 라이수는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정말 주인공다운 이유라니까. 다 오늘을 위해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고.”

    “……!”

    의미심장한 라이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냥 흘려듣기에는 너무 수상했다. 마치 강유현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 같지 않은가.

    “라이수, 당신……!”

    어쩌면 라이수 역시 로키 신이나 다른 신과 접촉한 적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접촉뿐이랴, 내가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앞을 막고 있는 놈들을 헤치고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쿠구구구…….

    “윽……!”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던전 때문이라는 것은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던전 안과 밖을 이어 주는 게이트가 형성될 때, 주변에 영향을 많이 준다는 건 소설을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고등급 능력자들도 제 몸을 가누기 힘겨운지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이 진동만 가라앉으면 게이트가 형성될 것이다. 그러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공대를 재정비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이후에는, 어떻게든 방법을 짜내서 요툰헤임 던전을 공략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진동이 조금 가라앉은 걸 느끼자 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이게 무슨…….”

    그러나 예상했던 푸른색의 게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게이트가 나타나야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근에 뱀이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깊은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꺼림직한 느낌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크윽.”

    쿵쿵,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뛰었다.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카가가각. 카각.

    구덩이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검은 안개로 뒤덮인 그곳에서 무언가가 커다란 팔을 불쑥 내밀었다.

    “맙소사…… 던전 브레이크?”

    “말도 안 돼. 아직 게이트도 열리지 않은 던전이……!”

    던전 브레이크는 방치되거나 클리어하지 못한 던전에서 몬스터가 빠져나오는 사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 던전은 출현한 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게이트도 형성되지 않은 채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빠져나온 거였다. 패닉에 빠진 능력자들이 어쩔 줄을 모르며 그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얼이 빠지도록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뇌가 한순간 정지된 것 같았다.

    [미드가르드-B000와 아스가르드-SSS999의 채널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요툰헤임-SSS405이 공개 채널로 전환됩니다.]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합니다.]

    [거인들의 분노가 신들의 세계를 짓밟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최종 선고나 다름없는 시스템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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