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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202)화 (202/228)
  • 202화

    “……!”

    그러나 내 앞을 막아선 건 강유현이 아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백시후……?”

    놀랍게도 나를 구하러 온 건 백시후였다.

    아니, 정말 나를 구하러 온 게 맞나? 또 납치하러 온 거 아니야? 뒤늦게 경계심을 품은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총을 꽉 잡았다.

    “너, 상태 이상에 걸리지 않았군.”

    “……?”

    갑자기 등장한 백시후를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던 헬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녀의 눈이 백시후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고 보니 백시후는 지금 스킬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었다. 이 저택에 온 능력자들은 모두 상태 이상에 걸려서 능력을 쓰지 못했는데 말이다. 특별한 아티팩트라도 끼고 있는 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마자 헬이 손을 휘둘렀다.

    콰광!

    “큭……!”

    백시후와 헬이 서로 맞붙기 시작했다. 내 몸은 그 충격으로 뒤로 주룩 밀려났다.

    아무리 S급인 백시후라고 해도 신에게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불 보듯 뻔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여신 헬의 영역이었다. 신들의 왕인 오딘조차 이곳에서는 제힘을 낼 수가 없다고 했지.

    기분 나쁘게도 나는 백시후가 갑자기 난입한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백시후는 내가 했던 것처럼 헬을 방심하게 한 다음 도망칠 속셈이었다. 게다가 그는 도망의 귀재였다.

    문제는 나였다. 백시후가 대체 이곳에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구할 의도로 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저번처럼 납치할 속셈이겠지. 내가 순순히 납치당할 거 같냐. 이렇게 된 거 겸사겸사 백시후를 이용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손을 뻗어 떨어트린 임시 이동 아이템을 잡았다. 한참 전투 중인 둘은 나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파삭.

    손안에서 아이템이 부서졌다. 동시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꽉 감았다.

    ‘……성공한 건가?’

    심단테의 아이템인데 설마하니 실패했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슬쩍 실눈을 뜨자 눈앞의 풍경이 보였다.

    “캬아아악!”

    “……!”

    맙소사. 이곳도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것도 대규모의 전투였다. 나는 놀란 눈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강……!”

    커다란 말처럼 생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강유현이 보였다. 그를 부르려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저택에서 내쫓긴 공대원들이 니플헤임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마주한 모양이었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곧 쓰러트릴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포털이 열릴 것이다.

    [니플헤임-S79의 보스 몬스터 ‘헬헤스트’를 처치하였습니다.]

    [니플헤임-S79를 최초로 공략한 플레이어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자(L)’의 칭호가 내려집니다.]

    [니플헤임-S79의 접속이 곧 종료됩니다.]

    “……!”

    됐다. 이제 던전에서 나갈 수 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울리며 강유현을 향해 다가갔다.

    “강유현!”

    “……한이진?”

    고개를 돌린 강유현의 얼굴이 왜인지 조금 초췌해 보였다. 왜지? 니플헤임의 보스 몬스터와 싸운 게 그렇게 힘들었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빨리 쓰러트린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보스 몬스터를 잡느라 한곳에 몰려 있던 능력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를 향했다.

    “이진아!”

    “한이진 능력자!”

    “형!”

    “아빠!”

    “어, 어어…….”

    순식간에 다가온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는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리암 화이트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나는 강유현과 나란히 서 있는 그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백시후가 나타났어요! 그리고 여신 헬이…….”

    크릉.

    말을 하던 중에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원래부터 어두컴컴한 곳이지만 더욱 음산하게 변한 느낌이다. 게다가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렸는데도 불구하고 몬스터가 낼 법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능력자들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니플헤임-S79 채널 관리자 고유의 권한이 발동됩니다.]

    [니플헤임-S79 채널 관리자의 권한으로 입장 및 퇴장이 불가능해집니다.]

    “뭐……?”

    예상치 못한 시스템 음성으로 순간 멍해졌다. 채널 관리자 권한? 관리자라면 설마 헬을 말하는 건가?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아우우우--.

    “네임드 몬스터다! 대열을 갖춰!”

    설상가상으로 네임드 몬스터까지 등장했다. 보스 몬스터를 막 쓰러트린 직후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름

    등급: ??

    레벨: ??

    ? ?? ?? ??, ?? ?? ??

    …….」

    긴 울음소리와 함께 등장한 건 커다란 늑대 모습의 몬스터였다. 목에는 목줄이 아닌 두꺼운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었고, 가슴팍은 누구의 피인지 모를 선혈이 잔뜩 묻어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방금 쓰러트린 보스 몬스터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생김새였다.

    “일단 저 녀석을 쓰러트리고 말하죠. 한이진 능력자.”

    “알겠습니다.”

    나는 굳은 얼굴의 리암 화이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공격 태세를 갖춘 능력자들이 앞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이따가 얘기하자.”

    “…….”

    강유현은 집요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순간 백시후에 대한 건 그에게 어떻게든 말해야 했나 싶었지만, 이미 그 역시 몬스터를 향해 달려간 뒤였다.

    “이진아,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아빠, 정말 괜찮은 거야? 응?”

    “삐익! 삑!”

    시끄럽게 구는 녀석들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못하면 손가락이 잘릴 뻔하긴 했지만 잘리지 않았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나는 속으로 납득하며 얼굴을 돌렸다.

    “크아아아!”

    보스 몬스터를 물리친 직후라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다행히 니플헤임에 남아 있던 오딘 길드 공대와 합류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저놈을 잡아도 포털이 열리지 않는단 건데…….

    아마 그럴 가능성이 컸다. 헬이 나를 내보내지 않기 위해 던전을 잠가 버린 거라서, 니플헤임을 관리하는 그녀가 열어 주지 않는 한 나갈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헬이 원하는 대로 나만 이곳에 남아야 하나. 그러나 지금의 전력으로 요툰헤임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보조 스킬 없이 SSS급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가능한가? 솔직히 보조 스킬을 고등급 능력자들에게 모두 써도 가능할까 말까 할 것 같았다.

    “하아…….”

    대체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갑작스러운 일들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한숨을 깊게 내쉬는데, 갑자기 몸이 뒤에서 붙들렸다.

    “이진아!”

    “윽……!”

    기우뚱거린 몸이 누군가의 품 안에 처박혔다. 고개를 조금 들어 보니 이든이 나를 안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든이 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시후.”

    “…….”

    피투성이가 된 백시후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의 잿빛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마스터가 널 데려오라고 했다.”

    “뭐?”

    라이수가? 나를? 이번에도 또 납치하라고 한 거야?

    눈살을 찌푸리며 백시후를 노려보자, 내 앞을 막고 있는 용식이와 용순이가 으르릉거렸다.

    보아하니 백시후는 헬과 싸운 뒤라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S급 소환수가 둘이나 있다. 덤으로 이든도 있고. 아무튼 지금 유리한 건 내 쪽이었다.

    “내가 순순히 널 따라갈 거 같아?”

    “…….”

    백시후는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는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의 눈 속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볼수록 소름이 끼치는 눈이었다.

    대체 저놈은 왜 나를 저렇게 보는 건지. 그동안 자꾸 잡히지 않아서 화가 나기라도 하는 건가. 그래도 세상 어느 누가 납치범을 순순히 따라간단 말인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백시후를 노려봤다.

    “날 따라오면 밖에 나갈 수 있다.”

    “뭐?”

    그 말에는 조금 솔깃했다. 시험해 보니 헬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귀환 스크롤도 쓰지 못하던데. 그런데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

    “아니…….”

    이든이 나를 대신하려고 한 듯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우리 쪽이 여유로운데 얘기는 들어 봐도 되지 않겠니. 나는 난감해하며 이든을 말린 다음 다시 백시후를 쳐다봤다.

    “말해 봐. 여기서 어떻게 나갈 수 있는 건지.”

    “…….”

    백시후는 내 물음에 잠시 침묵하더니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그걸 보며 감정 스킬을 켰다.

    「비상탈출 넘버원!(L)

    어두운 던전 안, 생전 처음 보는 공간 안에 갇혀도 안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안전하게 탈출해 보아요!

    ※ 아이템 주변 반경 10m 안의 인원만 적용 가능함

    ※ 인원수 제한 없음」

    “헐.”

    이럴 때 딱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내가 심단테에게도 얻어 내지 못한 아이템인 것 같은데.

    대체 백시후는 이런 아이템을 어떻게 얻은 걸까. 라우페이 길드의 것이니까 라이수가 주었을 텐데. 게다가 상태 이상을 막아 낸 아티팩트도 의심스러웠다.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못 이긴 척 백시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계약서 써. 여기서 나간 다음에 나와 다른 능력자들에게 수작 부리지 않는다고.”

    “알았다.”

    놀랍게도 백시후는 순순히 끄덕이고는 바로 S급 계약서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마치 미리 준비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세상에. 더 의심이 갔다. 무슨 꿍꿍이지.

    미간을 좁히는 사이, 시스템 음성이 주변에 퍼졌다.

    [니플헤임-S79의 네임드 몬스터 ‘가름’을 처치하였습니다. 아이템이 귀속됩니다.]

    강유현과 공대가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했다는 음성이었다. 나는 백시후에게서 받아 든 계약서를 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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