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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들이 내게 집착한다 (178)화 (178/228)
  • 178화

    “뭐……라고?”

    “…….”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강유현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말하기 전에는 조금 머뭇거린 것 같았던 강유현은 어느새 평소처럼 차분해져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가 한 말 때문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스펠헤임 던전에서 마지막으로 쓴 보조 스킬…….

    그건 설마, 능력을 증폭시키기 위해 딥…… 키스한 일을 말하는 건가?

    그 일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야, 그건……!”

    “대답해.”

    “그…….”

    나에게 있어서 그때의 일은 일종의 사고였다. 안타까운 사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키스한 것뿐이었다. 그게 스킬 발동 조건이었으니까.

    내일 열릴 최후의 던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물론 SS급인 데다가 주인공인 강유현에게 보조 스킬을 집중할 생각이긴 하지만, 그동안의 던전 공략을 생각하면 돌발 상황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즉, 단순히 내 의지로는 컨트롤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거였다. 만약 강유현과 떨어진 상황에서 다른 고등급 능력자에게 보조 스킬을 걸어야 한다면,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면 스킨십 강도를 높여 보조 스킬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스킬을 걸 상대가 누구든 똑같다. 상대가 강유현이든, 이든이든, 리암 화이트든, 강수……현은 어리니까 딥 키스는 좀 그렇고.

    아무튼 남자라면 질색인 나에게 있어서 누구와 손을 잡고 입술을 부딪치든 똑같이 기분 나쁘고 역겨울 뿐이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에 불과하다.

    분명, 그래야 할 터였다.

    “한이진.”

    “잠깐, 기다려 봐.”

    나는 당황하며 강유현을 밀어 냈다. 그러자 강유현은 또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으면서. 내가 곤란하든 말든 멋대로 밀어붙인 주제에, 오늘은 또 왜 이러는 거야.

    정말이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별안간 와서 다른 놈이랑 키스하지 말라고 닦달하는 강유현이나, 그런 말을 듣고 당황하는 나나. 게다가 평소와 달리 유순한 태도로 내 말을 듣는 강유현이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아무튼 생각하니까 다 강유현 탓인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그게, 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뭐라고?”

    “아니, 막말로 고등급 능력자가 너만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눈살을 찌푸린 강유현이 거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목 끝까지 차오른 물음을 내뱉으려고 했을 때였다.

    “한이진, 나는…….”

    “……!”

    손을 뻗은 강유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양쪽 어깨가 붙들린 채로 꼼짝없이 강유현을 쳐다봤다. 가라앉은 그의 검은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네가 다른 놈들과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나랑만 해.”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강유현이 재차 말했다. 다시 훅 다가온 강유현에게서는 희미한 코튼 향이 풍겼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꾸만 감각을 어지럽히는 향을 내쫓으려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우습게도 나는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제 와서 강유현이 무서운 것도 아닌데 자꾸만 몸이 떨렸다. 내 몸 같지 않게 가늘게 떨리는 팔을 손으로 잡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강유현은 단순히 내 보조 스킬을 독점하고 싶은 건가? 전부터 다른 고등급 능력자들을 견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그런 생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꾸 다른 곳으로 생각이 튀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점점 더 이 상황이 난감해지고 있었다.

    “그건…….”

    “형!”

    벌컥, 하고 예고도 없이 발코니의 문이 열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막 문을 열고 들어온 강수현이 서 있었다. 강수현이 굳어 있는 나와 강유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형이…… 여긴 왜…….”

    “…….”

    “…….”

    그제야 나는 남들이 보면 오해할 모습으로 줄곧 강유현과 마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놀라서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강유현은 그런 나를 붙잡지 않았다.

    “흠, 왜?”

    “왜라니, 가기 전에 형한테 인사하려고 왔죠.”

    “흠흠, 뭐 하러 그러냐? 어차피 내일 볼 건데.”

    자꾸만 헛기침이 나와서 말이 빨라졌다. 강수현은 그런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둘이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죠?”

    “무, 무슨 일은 무슨!”

    “…….”

    젠장, 당황하는 나를 강수현이 더 의심스럽게 응시했다. 집요한 구석이 있는 강수현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설마…….”

    “너희, 지금 출발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응?”

    나는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는 강유현까지 닦달하며 발코니에서 쫓아내려 애를 썼다. 둘 다 원래는 내가 밀어 내 봤자 꼼짝도 하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내가 밀어 내자 순순히 끌려가 주고 있었다.

    “형, 진짜 잠깐만요.”

    “……?”

    발코니 끝에 다다른 강수현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별안간 진지한 강수현의 얼굴에 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나도 할 말 있어요.”

    “지금?”

    “…….”

    나도 모르게 강유현이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그의 탐탁지 않은 얼굴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지금 출발해야 하지 않냐?”

    “빨리 말할게요.”

    “음, 어…… 그래.”

    그래도 강수현이 무슨 말을 할지는 궁금했기에,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수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형, 내일 지나면 저 스무 살이에요.”

    “아, 그러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렇다. 벌써 강수현이 스무 살이 되는구나. 키는 멀대같이 크고 덩치도 크지만 얼굴은 앳되어서 곧 성인이 된다는 자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리 축하해?”

    “네, 고마워요.”

    내일 던전에 들어가면 축하할 새도 없을 테니 냉큼 미리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강수현이 활짝 웃었다.

    “그래서 형한테 부탁할 게 있는데요.”

    “……부탁?”

    이 형제는 나한테 뭘 맡겨 놨나. 왜 다짜고짜 와서는 부탁한다 그래? 왠지 강수현도 이상한 부탁을 할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뭔데?”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대충 부탁을 들어주고 얼른 둘 다 쫓아내고 싶었다. 강수현과 말이 길어질수록 점점 강유현의 표정도 좋지 않아지고 있었다.

    “저한테도 이제 더 진한 스킨십해 주면 안 돼요?”

    “뭐……라고?”

    “계속 스킬 쓸 때마다 손만 잡아 줬잖아요. 저 이제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어…….”

    손을 뻗은 강수현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크고 단단한 손이 내 손을 감쌌다.

    “네?”

    “윽……!”

    강수현은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끌어당겨 제 볼에 갖다 대었다. 내 손바닥에 자신의 볼을 대고 비비적거렸다. 마치 커다란 개가 주인에게 애교를 피우듯이.

    “잠깐…….”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순순히 힘을 풀지 않는다. 강수현의 눈이 집요하게 나를 응시했다.

    “거기까지 해, 강수현.”

    “…….”

    낮은 음성으로 말한 강유현이 강수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강수현의 한쪽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자 강수현의 얼굴이 고통을 느끼는 듯이 일그러졌다.

    “하…… 형, 그럼 내일 봐요.”

    “어, 그래.”

    작게 한숨을 쉰 강수현이 먼저 내 손을 놓고 물러나자, 강유현도 곧 몸을 돌렸다. 나는 폭풍처럼 휩쓸고 간 형제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

    최후의 던전. 다른 말로 긴눙가가프 던전.

    북유럽 신화에서 태초의 무저갱이라 불리는 긴눙가가프는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다고 하는 텅 빈 공간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세계가 만들어지면서 그 일부가 되어 사라졌다.

    긴눙가가프는 창세 신화에만 나오는 지역에 불과한 곳이지만, 소설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끝장내는 역할을 맡은 최악의 던전으로 변했다.

    결국 이 세계에서도 긴눙가가프 던전이 출현했고, 반나절 동안 전문가들이 수도 없이 달라붙었지만 결국 등급을 측정하지 못했다. 그저 조심스럽게 강유현의 눈치를 보며 SS급, 혹은 그동안 유례없는 SSS급 던전일 수도 있다며 의견을 제시했다.

    “…….”

    그 말을 듣고도 강유현은 그저 시큰둥했다. 그가 떨어진 게이트에는 SS급 보스 몬스터가 있었다. 강유현은 게이트에 휘말린 다른 사람이 모두 죽을 때까지 그 보스몹을 죽일 수 없었고, 결국 원작에서는 돌아온 뒤 힘을 키워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말에서는 긴눙가가프의 보스 몬스터를 이길 수 없었다. 정말이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이었다.

    “그렇군요.”

    짧게 말을 내뱉은 강유현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애초에 등급을 측정하는 협회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긴 다리를 움직여 걸어오더니 내 앞에 멈춰 섰다.

    “가자.”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를 보는 강유현의 얼굴은 그저 덤덤하기만 했다.

    “그래.”

    나 역시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이 던전이 SS급이든 SSS급이든 알 게 뭔가. 클리어하지 못한다면 죽음뿐. 오로지 그 사실만이 우리에게 중요할 뿐이었다.

    곧 새파란 빛을 내뿜는 포탈이 내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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